지정 문답

시하야님의 지정 문답에서 바톤을 넘겨받았습니다. 주제는 ‘룰북.’

■ 최근 생각하는『룰북』

여러 사람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토대. 그 규칙들은 명시적일 수도 있고, 묵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명시적 규칙을 사용한다고 해도 묵시적 규칙 또한 상당히 많이 작용하고, 명시적 규칙이 없는 플레이 (예를 들어 얼마전에 완결한 버지니아 드림스)라 해도 묵시적인 규칙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 규칙이 얼마나 잘 짜여있느냐, 얼마나 잘 지켜지느냐, 얼마나 공감받느냐에 따라 놀이의 질은 크게 달라집니다.

명시적인 규칙의 예: “D6을 굴려서 4 이상은 성공이다.”
기능적인 묵시적 규칙의 예: “참가자의 선택이 유의미하도록 상황을 제시한다.”
병리적인 묵시적 규칙의 예: “게임 외적으로 마음에 안드는 것을 게임 내적으로 화풀이한다.”

■ 이런 『룰북』에는 감동

1. 참신한 것. 특히 명시적 규칙을 통해 묵시적 규칙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 일석이조입니다. ‘얼음깨기’ 같은 경우 주사위 포상이라는 명시적 규칙을 통해 ‘서로 흥을 돋구는 이야기 만들어가기’라는 묵시적 규칙을 이끌어냈고, ‘포도원의 개들’은 주인공의 강한 능력과 마을 제작 규칙을 통해 ‘진행자의 개입 없는 참가자의 적극성’이라는 스타일을 끌어내는 면이 강하지요.

2. 단순성 속에서 깊이를 살리는 것. 한두가지 규칙체계만으로 플레이 속에서 무한한 변형과 활용이 가능한 경량 규칙, 쉬우면서도 얄팍하지 않고 파고들수록 새로운 게 나오는 구성이 있는 규칙을 좋아합니다. ‘과거의 그늘,’ ‘안방극장 대모험,’ ‘얼음깨기,’ ‘트롤베이브,’ ‘페이트,’ ‘천일야화’ 등등.

3. 초점이 확실한 것. 어떤 플레이를 지원할지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규칙 자체로 그 스타일을 확실히 밀어주며, 그 스타일을 보강하는 행동은 포상하고 저해하는 행동을 처벌하는 규칙책은 참 멋집니다. 창의적인 생각에는 자유 못지않게 제약이 필요하니까요.

4. 읽기 좋은 것. 그림과 제목, 본문의 배치, 문체, 목차와 색인 등 책의 총합이 어우러지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전달방법이 안 좋으면 정작 얻을 것은 없죠.

■ 직감적『룰북』

한마디로 사회계약. 명시적인 규칙은 없다 하더라도 묵시적인 규칙마저 없으면 함께 모여서 놀 수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싸우거나 지루해하지 않고 함께 즐거울 수 있다는 작은 기적은 잘 기능하는 명시적·묵시적 규칙에서 나옵니다.

■ 좋아하는『룰북』

아아, 너무 많아서 세기도 힘들어요. ;ㅁ; 어차피 블로그 글을 봐오신 분들은 지겹도록 들은 제목들이고… 많은 규칙을 알면 좋은 점이라는 이전 글로 대답을 대신하도록 하죠.

■ 이런『룰북』은 싫다

1. 지향한다고 말하는 플레이상의 목적을 규칙으로는 전혀 지원하지 않는 룰북. 위에서 말한 확실한 초점 기준에 미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같은 맥락에서, 규칙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규칙책. 규칙의 어떤 부분은 전투를 장려하는데 어떤 부분은 전투를 너무 위험하게 만들어서 전투를 회피하게 하는 식이죠. 지향점이 없는 규칙책만큼 피곤한 것도 없습니다.

3. 복잡한 룰북. 이건 단순히 제가 참을성없고 뭐든 쉽게 잊어먹는 인간인 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먼산) 하지만 한편으로는 ‘쓸데없이’ 복잡한 규칙책들도 얼마든지 있지요. 한가지 정도의 규칙으로 다루면 될 것을 괜히 자잘한 차이를 두어서 헷갈리게 한다든지 말이죠.

4. 새로운 것이 없는 룰북. 요즘에는 읽기 시작했다가 힘, 지능 같은 특성치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일단 ‘또 시작이군’ 하고 색안경을 끼게 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규칙책도 아주 많아서 편견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만요. 어쨌든 남이 해놓은 것을 답습하는 부분은 좀 적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5. 플레이의 병리현상을 장려하는 것. 특성치에 중점적으로 투자하도록 장려한다든지, 진행자가 참가자들의 선택을 깔아뭉개는 진행을 권장한다든지 하는 규칙책이 가끔 있습니다. 역시 명시적 규칙이 묵시적 규칙에 깊은 영향을 주는 경우이지만, 방향성은 반대랄까요. 규칙이란 서로 얼기설기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의 규칙은 책 속에 있는 다른 규칙 뿐만 아니라 플레이 스타일과 팀 역학에 크고작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디자인은 실패하기 쉽지요.

■ 세계에『룰북』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놀이란 훨씬 개인적인 취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RPG, 보드게임, 카드게임 등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넓게 보면 MMORPG의 길드, 스포츠 등도 규칙 없이는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더 넓게 ‘법칙’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사회와 우주의 붕괴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법칙, 일관성, 혹은 규칙이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이 바톤을 주고 싶은 사람

삭풍님, ‘게임’이라는 주제로.
시하야님, ‘시스템’이라는 주제로,
오체스님, ‘캐릭터’라는 주제로.
제노님, ‘시스템’이라는 주제로.

자, 포스팅거리를 드렸으니 고맙죠? 그렇죠? (…)

8 thoughts on “지정 문답

  1. Pingback: Project Asa

  2. orches

    처음으로 바톤을 받아보았습니다. 성은이 무척 망극하옵니.. (넙죽) 다만, 이번주 금요일까지 순번까지 뽑아들고 대기하는 (교양과 전공) 과제들과의 데이트가 끝난 후까지 잠시 먹어두겠습니.. (우적우적)

    Reply
  3. Pingback: 삭풍의 공상연구소

  4. Pingback: 시하야, 그 목마름의 환상

  5. Pingback: rustle in the breeze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