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의 전술성

수정치와 같은 판정의 세부사항은 대체로 진행자의 권한입니다. 하지만 오늘 겁스의 음악적 영향 (노래나 연주를 통해 자신이나 다른 주인공의 반응판정에 가산점을 주는 기능)을 보면서, 참가자에게 판정의 조건에 대한 폭넓은 제어를 준다면 그만큼 전술적인 판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가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규칙 자체적으로 지원해 참가자의 능동성을 유도할 테니까요.

참가자가 판정의 조건에 영향을 주는 경우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극점수 규칙이 있습니다. 유한한 극점수를 소모할 것인가 아니면 판정에 실패할 것인가 하는 전술적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니까요. 이러한 규칙의 예로는 7번째 바다 (7th Sea)의 극주사위 규칙, 페이트 (FATE)의 면모와 페이트 점수,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의 특성치 소모와 선물 주사위 규칙, 블루 로즈/트루20 (Blue Rose/True20)의 신념 규칙,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의 팬레터 등등 많은 예가 있습니다.

게임 내적으로 전술이 판정에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예라면 벌점을 만회하거나 가산점을 더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활로 쏘려고 하는데 말을 타고 달리고 있어서 판정에 벌점이 붙는다면 낙마를 유도해서 벌점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잘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그 사람의 친구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판정에 가산점을 받을 수도 있겠죠.

이러한 원칙을 확대하면 다른 등장인물에게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A가 통제구역에 몰래 들어가려고 하는 동안 B가 한쪽에서 경찰의 주의를 끌어 기척 죽이기에 가산점을 준다든지 말이죠. 이렇게 하면 전술성에 주인공끼리의 협력이라는 또다른 깊이를 더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술성을 진행중에 살리기 위해서는 판정에 벌점이 붙을 경우 그 원인을 참가자가 알아낼 수 있도록 하고, 벌점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나무 밑둥에 가지가 별로 없어서 오르기가 힘들다면 칼집을 내서 발딛을 곳을 만들 수도 있어야 하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나무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칼집을 낼 수가 없군요!’는 진행자 실격사유
(주: 물론 각 팀의 분위기라든지 취향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저런 식으로 참가자의 적극성을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벌주는 진행이 참가자를 극도로 소극적으로 만드는 경우를 봐서 개인적으로 좋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상대 외교관이 주인공을 싫어해서 교섭이 힘들다면 호텔방으로 미녀를 보내든지 해서 달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판정의 전술성을 살리려면 참가자의 발상이나 제안을 왠만해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참가자가 영 떠오르는 게 없다면 진행자가 가끔은 벌점을 만회하거나 가산점을 붙일 방법을 제안하는 것도 좋겠지요. 처음 몇번 이렇게 하면 참가자도 곧 자신이 판정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데 익숙해지면서 다양한 발상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벌점의 만회와 가산점의 추가를 진행자에게 맡기지 않고 참가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게 한 RPG로는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이 있습니다.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서 몸을 숨기는 경우 오르기를 굴려서 성공 정도만큼 은신에 추가 주사위를 굴릴 수도 있고, 뛰어난 하프 연주로 맹수를 달랜다고 하면 연주 기능의 성공 정도만큼 동물 다루기에 추가 주사위를 굴릴 수 있는 등 온갖 조합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에게도 추가 주사위를 줄 수 있고요.

페이트 3.0이라고도 불리는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주변 환경이나 다른 인물의 특성을 이용할 수 있는 참신한 규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페이트 점수를 들여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이나 환경의 면모를 이용하는 규칙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적에게 ‘자만심’ 면모가 있다면 이를 이용하여 재굴림이나 +2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까마득한 절벽 앞에서 싸우고 있다면 ‘까마득한 절벽’ 면모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환경 혹은 등장인물의 면모를 창출할 수도 있다는 점이 이 규칙의 또다른 묘미인데, 방 전체에 석유를 뿌림으로써 방에 ‘불씨 하나라도 일어나면 다 죽는다’ 면모를 부여하고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진짜 다 죽으면 안습..) 도망치는 악당과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서 악당에게 ‘너 죽고 나 죽자’ 면모를 부여할 수도 있겠죠. 물론 열쇠를 버리는 건 기본입.. (뻑)

그 외에 특수한 예로 안방극장 대모험처럼 진행자 (PD)도 판정에 가산을 받기 위해서 한정된 자원(예산)을 소모해야 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별로 중요하지 않은 판정에 진행자가 예산을 소모하면 정작 중요한 판정에서는 진행자에게 예산이 떨어져서 참가자가 쉽게 판정을 성공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노르망디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칼레를 공격하는 척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게임 내용과 연계시키면 좋겠죠. 진행자가 유한한 자원을 소모해야 하는 규칙은 거의 없기 때문에 매우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요.

이렇듯 판정의 전술성은 비단 전투 뿐 아니라 판정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저것 있습니다. 그리고 판정의 전술성이 확실하다면 참가자는 주사위 결과에 휘둘리는 희생자에서 벗어나 플레이의 주도자 역할을할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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