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종류

http://yudhishthirasdice.blogspot.com/2005/09/actual-play-with-my-mother-in-law-part.html

어떤 사람이 아내와 장모를 플레이어로 해서 RPG를 한 이야기입니다. 시스템은 히어로퀘스트, 배경은 펜드래건의 아일랜드 소스북이었습니다. 아내는 전부터 RPG를 했지만 장모는 RPG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반응이 특히 재밌었다고 합니다.

PC들은 서기 6세기경 아일랜드 한 부족에서 각각 바드(아내)와 여사제(장모)로, 바드는 여성이지만 전사로서도 훈련받은 반면 여사제 쪽은 전투능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에 사제라는 직책이 있었고, 또 공동체의 구심점이었죠. (처음부터 장모가 그렇게 고집했다고 합니다.) 바드 쪽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사이에서 갈등했던 반면 여사제 쪽은 철저히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었습니다. 실제로 처음 플레이가 시작한 장면에서는 버터를 만들고 있었죠.

잠시 설명하자면, 히어로퀘스트는 캐릭터 특성치를 플레이어가 스스로 정의하는 시스템입니다. 예를 들어 ‘힘 14’가 아니라 ‘드루이드 14’ ‘공동체의 구심점 12’ 하는 식으로요. 저한테 없는 게임이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때 적대 부족에서 전사들이 쳐들어와 부족의 가축을 훔쳐가려고 합니다. 그건 곧 다들 굶어죽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전사들은 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여사제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안전한 곳으로 가려다가 양아들이 휘말려들었다는 말을 듣고 가축 우리로 달려가지요. 황소에게 아들이 받히기 일보직전에 여사제는 그 황소의 진로를 바꿔서 아들의 목숨을 구하는 동시에 그 소가 나머지 소떼를 이끌어서 적 전사들에게서 도망가게 합니다. 적 부족의 전사들이 쫓아가려 하자, 이번에는 바드가 그 앞을 막고 전사들에게 너희를 소재로 해서 모욕적인 노래를 만들겠다고 협박합니다. 바드는 신성하기 때문에 죽이면 신들의 분노를 살 수 있고, 모욕적인 노래가 퍼지면 명예를 잃기 때문에 전사들은 물러납니다.

이때 미처 도망가지 못한 적 전사 하나를 부족의 전사인 드라살이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여사제는 ‘드루이드’, ‘공동체의 구심점’ 등의 특성치를 사용해서 논쟁에서 이기고 (“드라살, 입닥치고 집에나 가거라.”) 적 전사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RPG의 상징과 같은 힘세고 건장한 전사가 조그마한 할머니의 한마디에 찍소리 못하고 도망가는 게 되게 재밌더라…고 GM은 전하고 있죠.

여러모로 인상적인 플레이 기록이지만, 특히 제게는 ‘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더군요. 전통적으로 RPG에서는 전투력이 곧 힘이지만, 이 블로그에 나온 플레이의 경우 두 PC가 문제를 해결한 것은 전투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서였죠. 전사와 늙은 여사제?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두 캐릭터의 스탯을 생각해도 그렇고 둘이서 치고받고 싸운다면 이미 승부는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전사와 여사제는 더 큰 공동체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부족의 전사가 동네 할머니, 게다가 드루이드 사제에게 손을 댄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뭐, 가능하지만 그 동네에 살긴 힘들겠죠. 그래서 떠돌이 모험가가 생기는 걸지도..^^) 마찬가지로 여자 바드에게 가로막힌 적 전사들도 그냥 죽이고 지나가자! 하고 작정했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가 있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는 것, 그리고 명예가 깎이는 것을 저어한 것이지요.

물론 D&D 같은 전통적인 전투중심 시스템에서도 얼마든지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스템으로 구현되지 못하고 롤플레잉으로 처리한다는 점이겠죠. 전투나 마법이 아닌 사회적인 부분에서는 다분히 역할극의 성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매력 판정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입체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겁스에서는 영향력 기능으로 판정했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캐릭터들의 사회성과 그들을 둘러싼 공동체를 단순한 기능판정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폭력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다분히 사회질서가 붕괴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역사적으로 힘은 누구 주먹이 세느냐보다는 종교와 법률, 관습, 공동체의 의견 등에서 나왔죠. 물론 신나는 전투가 나쁜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재밌으니까요! ^^ 하지만 ‘사회 속의 인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지원하는 플레이, 그리고 시스템을 통해 좀더 깊이있는 롤플레잉을 경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추신: 이제 히어로퀘스트를 지르고 싶어서 어쩌죠? ;ㅁ;

3 thoughts on “힘의 종류

  1. 불타는도넛

    인디 RPG의 PDF파일을 구매할수 있는 전문 숍이 있나요? 저는 못 찾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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