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혼이 내 손 안에!

제가 멋대로 ‘세기의 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Spirit of the Century를 사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아직 책이 나오진 않았고 11월 초쯤에 배송되겠지만, 미리 주문하면 무료 PDF가 나오기 때문에 그 PDF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420쪽짜리의 탄탄한 내용이라 보는 즐거움이 한가득! (광고하냐)

세기의 혼은 본래 무료 규칙책으로 나왔던 페이트를 수정해 펄프 장르에 적용한 것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페이트 3.0으로 통합니다. (현재 번역중인 PDF가 1.0, 페이트 OGL SRD가 2.0, 세기의 혼이 3.0) 펄프에 특화돼 있긴 하지만 펄프가 워낙에 SF, 판타지, 공포물, 추리물, 수퍼히어로물 등 다른 많은 장르로 파생돼 나온지라 (아시모프, 하인라인,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라이스…) 다른 수많은 장르에도 적용할 수 있을듯 합니다.

페이트는 원래부터 좋아하는 규칙이었지만 세기의 혼에 와서는 정말 마음에 들게 바뀐 점이 몇가지 있는 게, 우선 인물 제작이 훨씬 간단해졌다는 점입니다. 면모에는 더이상 칸수가 없이 유무만 있으며 (즉 ‘아틀란티스의 후예 □□’가 아닌 ‘아틀란티스의 후예’), 가장 복잡한 부분이었던 기능 피라미드는 이제 ‘엄청나다’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에다가 기능을 채워넣기만 하면 됩니다.

인물 제작에서 또 좋아진 부분은 주인공들이 전에도 서로 함께 일한 적이 있고 서로 알도록 짜여져 있다는 것. 어차피 모든 주인공은 ‘세기 클럽’의 구성원이므로 시작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이 논리적이기도 하지만, 인물 제작 과정을 통해서 각 주인공은 두명의 다른 주인공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 총 5기의 인물제작 중 3기에 각 참가자는 자기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펄프 소설의 제목과 대략의 내용을 정합니다. (예를 들어 ‘정글맨과 리키-티키의 눈’에서 정글맨은 고대 유적에 묻힌 전설의 유물 리키-티키의 눈을 찾는 밀렵꾼들을 물리친다! 라든지요.) 그리고 4기와 5기에는 다른 주인공의 펄프 소설에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글맨은 4기에는 ‘마타 하리와 아틀란티스의 전설’에 출연하고, 5기에는 ‘닥터 D와 분노의 고릴라’에 출연할 수 있겠죠.)

각 기마다 그 기의 경험에 어울리는 면모를 두개씩 추가하기 때문에 주인공끼리의 공통된 경험이라든지 인간관계를 면모로 만들어 규칙 자체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4·5기를 거치면서 정글맨에게는 ‘정글맨은 마타 하리 좋아한다’라거나 ‘닥터 D는 백인치고 똑똑하다’ 면모가 추가될 수도 있는 것이죠. 또한 기존의 모험에서 새로운 모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편합니다.

판정 부분은 아직 다 보지는 못했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은 장면이라든지 주변 인물, 혹은 다른 주인공의 면모를 주인공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면에 ‘어둡다’ ‘까마득한 절벽’ ‘화재’와 같은 면모가 있다면 페이트 점수를 들여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술성과 극적 재미를 둘다 확보한 규칙이라고 보입니다.

그 외에 페이트 1.0 규칙을 보면서 불확실했던 부분들을 명확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저는 1.0 규칙만 봐서는 주인공의 면모에 의해서 불이익이 생기지만 주인공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일 때 어떻게 할지 잘 알 수가 없었거든요. 예를 들어 ‘예쁜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 면모가 있는 주인공이 수상한 미녀에게 넘어가는 것은 참가자가 페이트 점수를 내서 자제시킬 수 있지만, ‘검은 불꽃 형제단의 원수’ 면모가 있다고 해서 검은 불꽃 형제단의 출연을 페이트 점수로 막는 것은 이상하니까요.

이 경우 3.0 규칙의 지침은 단순명쾌합니다. 검은 불꽃의 형제단이 등장하는 세션 전에 그 면모가 있는 참가자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페이트 점수를 미리 1점 주라는 것이죠. 또 배경 세계와의 연관, 특히 문제의 소지가 있는 연관을 포상하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명확화는 페이트의 기존 팬들에게도 유용하고, 전체 규칙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펄프는 단일 장르라기보다도 하나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에 세기의 혼으로 실제 펄프 캠페인을 돌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내에서의 친숙도 문제도 있고… 어쨌든 명확하고 잘 다듬어진 규칙 때문에라도 세기의 혼은 구입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읽으면서 한장 한장 음미할 시간이 기대되는군요. ^^

6 thoughts on “세기의 혼이 내 손 안에!

  1. ddowan

    펄프는 마음가짐 이라는 말이 맘에 드는 군요.
    (한국의 펄프라면 잡타지 로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미국의 펄프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게 있어서 미국 펄프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이성과 공포가 교차하는 배경시대입니다.)
    등장 작품과 활약의 부분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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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정글맨은 재밌는 친구인 겁니..(퍽)

      확실히 펄프의 기반에는 이성과 공포의 교차가 있죠. 한편으로는 이성의 힘과 과학에 대한 낙관적인 신뢰, 다른 면에서는 인간 본성의 어둠과 미지의 영역에 대한 신비와 공포가 자리잡고 있는 이율배반적 마음가짐이 펄프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유명한 펄프 영화인 인디아나 존스에서 볼 수 있듯 이성적인 고고학자인 존스가 악령과 야만인, 나치가 득시글거리는 이국적이고 신비한 세계로 가서 위험 끝에 승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펄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죠. 그 외에도 또다른 펄프 영화인 미라 1, 2편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러한 이성과 공포의 대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포 쪽에 무게가 주어진 게 호러, 특히 러브크래프트식 호러 장르고 이성의 승리가 SF인듯 합니다. 르귄 같은 경우 그 구분 자체를 부정해서 SF를 펄프에서 해방시켰고요.

      이러한 이성의 승리라는 게 그런데 꽤 차별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해서 눈썹이 찌푸려지기도 하죠. 펄프에서 백인이 아닌 인물들은 ‘고귀한 야만인’ 아니면 ‘괴물’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러브크래프트나 에드거 버로우 라이스의 작품만 봐도 말이죠.) 결국 이성 = 익숙한 것, 공포 = 이해할 수 없는 타자였달까요. 어차피 당대의 편견은 펄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거고, 그저 그때는 그런 게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요. 어쨌든 펄프가 꽤 재밌는 장르, 혹은 마음가짐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펄프가 있을 수가 없었던 게, 펄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거 시대에 대한 그리움,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국적이고 신비한 장소에서 겪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뭐… 펄프의 주 메뉴인 3~40년대에 대한 그리움은 가질 수도 없고, 5~60년대, 7~80년대도..(…) 워낙에 고통스러운 근대사 때문에 과거를 그립게 회상하기보다는 더 좋은 내일을 바랄 수밖에 없으니까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도 불의와 모순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가지기 어려웠고요.

      이국적이고 신비한 나라? 그게 곧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우월감 어린 그리움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야만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식민지’ 국가, 펄프의 영원한 구경거리이자 타자인 것은 바로 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결국 한국의 ‘펄프’는 언제나 펄프가 아닌 비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를 그리워할만큼의 천진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치가 아니었으니까요.

      (답변이 길었습..헥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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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dowan

      펄프픽션이 나올 당시에는 흔한 통속적인 저급 소설(+잡지)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잡타지나 일본의 라이트 노벨 등이 펄프에 해당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공통점을 가진 장르화 될지는 의문입니다.)
      장르적 의미와 세속적 의미를 섞어서 써버렸군요.

      확실히 지금시대에 보는 펄프는 (‘신비(와 무지)’에 대한) 낭만적인 그리움이지만, 나올 당시의 펄프에는 신비는 있어도 그리움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그 당시의 미국도 문제는 많았을 것 같고, 그 당시에는 펄프라는 장르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의 제가 봐도 그 당시의 한국이 ‘신비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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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키

    하긴, 어떤 의미에서는 판타지도 통속적이라는 면에서는 펄프와 가깝죠. 미국에서 처음에는 펄프에서 갈라져 나오기도 했고요.

    펄프가 나왔을 때가 5~70년대로 알고 있는데, 이들 펄프의 배경은 3~40년대가 많았죠. 그래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펄프의 요소로 꼽은 것입니다.

    한국에는 펄프가 있을수 없었다고 게거품(..)을 물긴 했지만 한국 배경의 펄프 RPG를 해보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배경으로 말이죠.(..) 시대가 시대인만큼 느와르적 요소가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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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owan

      RNarsis님과 oWOD식으로 독립군과 일본 헌병과 만주 마적과 문학인등 을 가지고 농담 따먹기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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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폴라리스로 돌려서 필연적으로

    1. 죽거나
    2. 일본에 넘어가는

    독립투사들 얘기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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