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데마르 캠페인 이야기 (6) — 기사회생

4화에서 배운 것을 기반으로 하여 5화부터는 플레이가 기적적(?)으로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마스터링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거라면 스토리, 혹은 시나리오를 포기했다는 점입니다. 4화 플레이 외에 이 결정에 영향을 준 출처가 있다면 빈센트 베이커의 ‘포도원의 개들’과 론 에드워즈의’소서러’였죠. 둘다 굉장히 훌륭한 룰로, 차후에 소개하겠습니다. (그래…리뷰를 핑계로 소서러를 지르리라! +_+)

많은 룰북에 GM 조언란이 있지만 ‘포도원의 개들’에 나오는 GM 조언은 특히 눈이 확 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스 아니면 다이스, 둘중 하나만 하라.’

즉, 플레이어가 어떤 행동을 희망하면 그대로 진행하거나 성공 여부를 보기 위해 다이스를 굴리게 하거나 둘중 하나만 하라는 뜻이죠.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구덩이를 뛰어넘겠다고 하면 ‘뛰어넘었군.’이라고 선언하던가 ‘운동신경 굴려.’라고 하면 되지, ‘저걸 뛰어넘긴 힘들지 않을까?’라든지 ‘지금은 이쪽에서 보물을 찾고 있잖아.’ 등 군소리를 달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플레이어의 선택을 무조건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RPG의 근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원칙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플레이어 행동에 제약을 걸거나 플레이어 선택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 많았는데,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죠.

플레이어 선택을 완전히 존중하기 위해서 빈센트 베이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시나리오라든지 스토리 같은 것은 절대 정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GM이 정한 시나리오가 있으면 그 시나리오에 부합하기 위해 플레이어를 구속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포도원의 개들’을 진행하기 위한 일련의 기법들을 제시하지만, 이것은 오만과 불의, 죄를 구조화해서 진행표로 만든 것으로 모든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플레이어 선택의 존중과 무(無)시나리오 진행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시나리오 짜기가 귀찮아서라도…;;;)

그러면 시나리오 없이 어떻게 세션을 진행할 것인가? 그 해답은 또하나의 걸작 인디게임인 ‘소서러’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서러에는 ‘키커’와 ‘뱅’이라는 시스템이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자면 ‘발단’과 ‘극적 상황’ 정도일까요. 별로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발단은 말 그대로 사건의 시작을 말하는데, 각 플레이어가 자신의 PC가 어떻게 모험을 시작하는지 정하는 것입니다. 극적 상황은 세션 중간중간에 나오는 상황이 극적 긴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상황이 어떻게 해결되거나 마무리될지는 전혀 정하지 않은 상태로요. 한마디로 PC들에게 곤란한 상황을 툭툭 던져주고 ‘자, 재주껏 빠져나와’ 하는 격이랄까요(…) 예를 들어 ‘벽장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차갑게 굳은 시체가 굴러나옵니다! 그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자, RP하세요.’ 식이죠.

시나리오 없는 진행에서 이 극적 상황 기법이야말로 제 마스터링의 중심이 될만한 시스템이라고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제 5화 세션을 준비하면서 아무런 시나리오도 생각해 두지 않고 몇가지 극적 상황만을 정해두었습니다. 이 상황에 플레이어가 반응하면 나는 거기서부터 반응한다, 하는 생각으로요.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완전히 자유를 주자 플레이어들은 제가 놀랄만큼의 창의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저는 그런 그들에게 반응하면서 슬쩍슬쩍 극적 긴장을 높이면 그만이었습니다. 마스터링이 많이 편해지고, 플레이가 부드럽게 흘러가서 정말 종더군요. 실제로 이 세션은 (당시에는) 그동안 한 것 중 최고의 세션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PC들의 결속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PC 둘은 아주 호흡이 잘 맞고 스토리도 완벽하게 엮이는데 비해 제 3의 PC가 계속 겉돈다는 점이었죠. 이 PC는 설정상으로도 나머지 팀원과 접점이 적을 뿐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이 캐릭터를 나머지 둘에게 접근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녀석은 원래 비사회적이다’라는 이유를 들어서요. 아니 그럼 어쩌라고..ㅡㅡ;; 솔직히 별로 좋아보이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나야 PC에 충실할 뿐이니 GM 네가 어떻게 해보라는 걸까요. PC 성격이 그렇다면 다른 이유로라도 파티 결속력을 유지할 노력 정도는 해야지(상호 이익이라든가), 아무 노력도 없이 자꾸 따로 놀기만 하는 건 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한테도 잘못이 있었고요. 비사회적인 PC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RPG의 고전적인 문제를 잘 보여준 경우였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RPG가 사회적인 놀이라는 것 아닐까요. 혼자 돋보이고 싶으면 소설을 쓰든지 혼자 플레이하는 것이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러모로 5화 플레이는 캠페인의 전환점이 되는 플레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스터링에도 그렇고요.
이글루스 가든 – 한국 RPG 대중화의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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