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미래에 RPG는 있는가

예전에 아비게일님의 글 시작과 끝을 보고 당시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았던 생각이 납니다. 처음 읽었을 때 당시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놀고먹는 백수였고, 게다가 몸이 아픈 것이 노는데 대한 면죄부가 되던 시기였죠. 따라서 당시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RPG를 그만둔다는 문제는 먼 일로만 느껴졌습니다.

RPG를 시작한지 1년 반쯤이 되어가는 지금 저는 로스쿨 학생이며, 건강도 좋아져서 2학년이 되는 내년이면 취직할 생각을 해야 하고, 졸업하고 나면 결혼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인턴으로 있는 지금은 나중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게 한가할 텐데도 아침에 눈뜨면 출근하기 바쁘고, 사무실에 있을 때면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퇴근해도 잡일 몇가지 처리하고 나면 순식간에 밤이 됩니다. 건강을 위해 적당한 시간에 자야 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하고… 아마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 지금보다도 더 자기 시간을 내기란 힘들겠지요. 출산까지 하고 나면 더더욱.

지금도 팀을 명목상 돌리고는 있는데, 요즘 규칙적인 세션을 진행하지 못하며 동동거릴 때면 과연 나의 미래에 RPG는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 생활의 요구가 쉴새없이 부닥쳐 오는 삶 속에서 가상의 삶까지 누릴 여유가 과연 있을까요?

욕심 같아서는 언제까지나 한주나 두주에 한번이라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RPG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RPG에 대한 토론을 하고, 규칙책도 많이 읽고 번역하고, 부럽게도 RPG 인구의 고령화를 우려하는 RPG.net 쪽에서 본 수많은 RPG인들처럼 제 취미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이해하는 배우자를 만나 (도대체 이놈의 취미는 왜이렇게 주변 사람에게 납득시키기가 힘든 건지요) 자녀들에게도 RPG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그러기 위한 몇가지 방법이라면, 우선 삶의 활동에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전에 시하야님과오프에서 만났을 때, RPG를 계속하려면 굉장히 높은 우선순위를 매겨야 하는 것 같다는 말씀에 깊은 인상이 남았었습니다. 물론 삶에는 RPG보다 중요한 것이 많지만, 그만큼 또 쓰잘데기 없는 일도 많지요. RPG보다 중요하거나 즐거운 일들이 하루 24시간과 일주일의 7일을 꽉꽉 채우고도 넘친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은 일이라면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개인 취향과도 관련된 문제지만 경량 규칙의 사용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80~100쪽 남짓 하는 실험적 경량 규칙들은 200~300쪽을 넘기는 많은 기성 규칙보다 읽을 양이 적고 배우기도 쉽죠. 또 그만큼 많은 규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필요의 충족이라는 면에서도 좋아 보입니다. 물론 수백쪽짜리 규칙 한가지만 배워서 여기저기 활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간과 노력 면에서 경제적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별로 범용 규칙 취향이 아니고 또 범용 규칙이란 것이 과연 있는지도 의문이기 때문에 경량 규칙을 선호하기는 합니다만, 이건 그야말로 취향 차이니까요.

또 비표준적 시간대의 활용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RPG의 ‘표준’ 시간대라면 밤과 심야, 새벽이 많아 보이는데, 보통 낮에 바쁜 사람이 쉽게 유지할 수 있는 시간대는 아닙니다. 이것도 시하야님과 얘기할 때 나온 얘기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 시간대처럼 한가하고 이른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생활에 잘 맞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 일요일 아침 팀이 있었는데 파토가 났었죠..;ㅁ;) 종일을 투자해서 진도가 많이 나가는 맛은 없어도 어차피 하루종일을 들인다는 건 갈수록 어려워지고, ‘많이’보다는 ‘꾸준히’가 중요하게 마련이니까요.

저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분은 RPG를 오랫동안 계속할지도, 못할지도 모릅니다. Que sera sera. (누가 알겠어요?) 통계상으로는 아마도 오래 계속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원하는 마음이 크다면, 그리고 그만큼 노력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주사위를 굴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통계는 통계일 뿐 실제 벌어질 일을 말해주지는 못하니까요. Que sera sera.

8 thoughts on “우리들의 미래에 RPG는 있는가

  1. 조성훈

    오호. 저는 저 중에서 결혼과 출산 문제는 덜었군요. 아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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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ihaya

    이름이 나와서 순간 덜컹-
    저렇게 쓰시니 제가 뭔가 고수 같아요~~ (…)
    (아비게일 양 이야기가 나오다니 역시 이 세계는 좁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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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기우, 아르티온// 안습입니..(…)

    시하야// 고수 맞으시죠, 뭐..^^ 아비게일님 글들 예전에 재밌게 읽었었던 기억이… (또다른 환동분?)

    블로그 개장 첫글이 좀 암울해서 다른 글을 쓰는 중인데, 일하느라 완성을 못하고 있으니 왠지 더욱 암울해지는 로키였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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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알피지를 계속하냐 마느냐의 여부는 확실히 중요한 것 같더군요. 개인적으로 저는 알피지라는 것을 가능한 계속 해보고 싶습니다. 농촌에 살아가는지라 외부 사람들과는 OR로 즐길 수 밖에 없고 TR 팀을 만들어도 언제나 아는 얼굴들만 이지만 그래도 매 팀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지니까요(그리고 저의 경우는 그만두려고 해도 이제 슬슬 영어 룰북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포기할 순 없다고요;ㅁ;). 역시 알피지란 취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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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orches

    윗 분의 말씀처럼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섬칫한 글입니다. 지금은 방학이라서 괜찮지만요. 평상시에는 시간이라든지 부딪칠 때마다 한숨만 푹푹이랍니다. 가장 큰 딜레마는 그렇게 포기를 해서 시간 확보를 해서 플레이를 하고나는 데까지는 괜찮은데, 하고 나서 (여러가지 이유로) 차라리 안하느니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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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paul4

    생각을 하게 해주는 좋은 글이네요. 아, 일단 처음 뵙겠습니다. ^^
    저도 청소년기부터 RPG를 접했지만 최근 몇년사이에는 만나고 있는 사람이 RPG의 환상세계를 지극히도 싫어하기에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아쉽네요. 제 미래에는 RPG가 없는 듯하여 이런 글을 만나면 속상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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