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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RPG에서 여성의 비중과 역할

트위터로 간략하게 소개했던 글인 “역사 RPG에서 등장하는 여성” 이(링크) 예상치 못하게 큰 관심을 끌어서, 많은 분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글 전체를 번역해봤습니다.

원문은 https://chariotrpg.blogspot.com/2016/11/dymphna.html 입니다.

 

 

역사 RPG에서 등장하는 여성

우선, 제 킥스타터 프로젝트인 <에이지 오브 미라클즈>가 여전히 펀딩 중이고, 아직 목표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중임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신(新)신비주의 비의(秘儀) 신학자를 좀 도와주실래요?

펀딩 작업을 하는 동안, 저는 몇 주 후에 보여줄 외부 기고문을 몇 개 의뢰했습니다. 제가 처음 의뢰를 부탁한 사람은 딤프나입니다. 저는 딤프나와 지난 몇 달 동안 서로 즐겁게 생각을 주고받았고, 딤프나는 제 <이너 월즈> 시리즈에서 저보다 더 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주제에 글 몇 가지를 보태어 주기로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딤프나는 “어디 출신이냐?”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좀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딤프나는 지금까지 화이트 울프/오닉스 패스에서 많은 글을 썼고, 최근에는 <체인질링 : 더 로스트>, <뱀파이어 : 더 다크 에이지스>, <뱀파이어 : 더 마스커레이드> 등을 포함한 여러 RPG 시리즈에서 작업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블로그 <여성으로서 게임하기>를 운영중이며, 트위터에서는 @dymphna_saith, 구글 플러스에서는 +Dymphna C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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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딤프나

하워드는 제게 역사 RPG에서 여성을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지침이 될 만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사항을 전제로 두고 글을 쓰겠습니다. 1) 여성혐오는 나쁘며, 가능한 한 피해야 합니다. 2) 역사물 게임에서는 역사적인 정확성, 혹은 그 비슷한 것을 추구합니다.

여성을 다루는 내용이 역사물 RPG에 포함되어야 할까요? (각주 1)

역사물 RPG에서 여성을 집어넣기는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불안한 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역사 속 무대에서 여성의 존재를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역사물 게임에서 여성을 포함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해당 시대에서 여성들이 무엇을 했는지 자료를 거의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명한 역사책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인류의 약 50%는 태곳적부터 그저 바느질하거나, 천을 짜거나, 때때로 아이를 낳는 도중 죽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류가 아닙니다. 의도된 것이지요. 여성의 역사는 수천년 동안 여성을 혐오하는 문화적 세력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워졌으며, 살아남은 기록은 그 당시 문화의 한계 때문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존재하는 기록조차 사회에서 정한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한 여성을 다룬 내용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가부장제에 저항한 여성의 기록은 말살되거나 좀 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강력한 여성을 키운 문화의 기록은 파괴되어 정복자의 이야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인기를 잃은 남성들의 이야기는 사후 여성적인 모습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내용은 곧 나올 2차 세계대전 속 여성을 다룬 게임 모음집인 <워버즈>의 제작자이자 편집자인 모이라 털킹튼과 이야기한 주제입니다. 저는 모이라에게 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게임을 만들었는지 물어보았고, 모이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전쟁 중 여성의 역할을 보여준 가장 흔한 스테레오타입은 ‘리벳공 로지’에요. 백인이고, 중산층 주부이며, 빅토리 가든(전쟁 중 널리 퍼진, 채소 등을 직접 키우는 텃밭을 일컫는 말)을 일구죠. 대부분은 헛소리에요. 선전일 뿐이지요. 여성은 수많은 방법으로 전쟁에 기여했어요. 직접 전쟁에 참여도 하고, 지극히 위험하고 힘든 공장 일도 떠맡았죠.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를 잊었어요. 이제 2차 세계 대전은 우리 생생한 기억 속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어요. 만약 우리가 이 기억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어떻게 과거를 제대로 떠올릴 수 있겠어요? (각주 2) 우리 자신, 즉 현대의 여성을 어떻게 제대로 그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여성혐오는 어떻게 하죠?

물론 여성을 다룬 역사적인 기록이 전부 여성혐오로 가득 찬 거짓말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과거에 여성혐오는 존재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말이지요. 여러 문화와 시대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여성혐오 때문에 꾸준히 억제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지속해서 억압을 겪었고, 문화 속의 여성혐오 때문에 삶을 제한당했습니다.

따라서, 역사물 게임에서 여성들을 등장시키려는 사람들은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동시대 기록에 맞춰 여성들을 묘사해서, 곧이곧대로 역사 자료를 사실로 인정할 건가요? 아니면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아예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낼 건가요?

“역사적 정확성? 바보 같은 소리.”

역사적 배경에서 여성을 집어넣을 때는 보통 어느 정도 플레이어의 환상이 개입됩니다. 그러니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여러분의 게임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은 있지도 않은 과거를 상상하고 재현하는 척할 뿐입니다. 좀 더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모든 역사가는 과거를 떠올릴 때 공상 속을 헤엄칠 뿐입니다. (각주 3) 어쨌든, 제 말의 핵심은 여러분의 상상이 역사적인 기록에 기반을 두었는지, 아니면 그저 우리 자신의 문제투성이 문화적 가정을 바탕으로 과거가 어땠는지 함께 이야기를 끼워 맞춰 나온 생각인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완벽하게 구현하려는 게임이 없는 것처럼, 역사적 정확성을 완벽하게 살리려는 게임 역시 실제로는 없다는 사실도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비록 RPG 시장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사 중세풍 게임이 나왔지만, 그중에서 흔한 창자 속 기생충 때문에 PC가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역사적인 정확성”에 신경을 쓰나요?

짧게 대답하자면, 신경 쓰지 않습니다 – 최소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정도로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리인액터(역사적 순간을 재현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라면 또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리고 저는 분명히) 리인액터가 아닙니다. 이야기꾼이지요. 우리가 역사적 정확성에 신경 쓰는 이유는 그래야 게임 속에서 파고들려는 분위기나 주제를 표현할 수 있고,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게임 속에 여성혐오를 포함해야 할까요? 쉬운 대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만들 때 명심할 사항을 아래에 불완전하게나마 소개했습니다.

여성혐오가 가진 무게를 인정하세요. 쉽게 꺼내지 마세요. 누가 악당인지 보여주기 위한 싸구려 수단으로 사용하지 마세요. 여성 플레이어에게 여성혐오는 그저 게임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부딪혀야 할 문제이지요. 여성들은 오고 가는 차에서, 상사의 웃음 속에서, 빈약한 월급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여성혐오를 절감합니다. 만약 운이 좋다면 일생 동안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을 경험할 전 세계 35%의 여성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요.

여성혐오는 여성들을 상처입히고, 때로는 죽이기도 합니다. 벗어날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성이며 특별히 여성혐오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무심하게 지나치지 마세요. 만약 게임 속에 여성혐오를 등장시키기로 했다면, 반드시 이 점을 최대한 이해하세요. 여성혐오를 역사적 배경에 “기본 사항”으로 집어넣지 마세요. “역사적”이라는 뜻이 “21세기 우리 문화에서 흔히 생각하는 여성혐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문화와 맥락에서 표현되는 여성혐오는 오늘날 여성혐오와 다릅니다. 21세기에서 흔히 이해하는 성 이분법이 모든 역사적인 배경에서 기본으로 통용될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에도 시대를 보겠습니다. 이 시대의 법 체계와 사상은 노골적으로 여성혐오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성 역학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성차별주의”와는 달랐습니다. 에도 시대는 남자, 승려, 와카슈(여성 복장을 하고 남성이나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젊은 남성) (각주 4), 결혼한 여성,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여성, 성노동자(경제적 지위에 따라 더욱 세분화합니다), 과부 등 이 모두를 서로 다른 성적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즉, 이 시대는 <비버는 해결사>(Leave It to Beaver, 1950년대 미국 인기 코미디 드라마)에 등장하는 성적 역할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 에도 시대의 여성혐오를 묘사하려면, 최소한 이때 성적 구분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기초적인 이해는 지녀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게임에 중요한 역할을 할 때만 여성혐오를 등장시키세요. 스스로 타당한지 검증해보세요. 왜 게임에 여성혐오를 등장시켜야 하나요? 게임의 주제를 결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여성혐오가 꼭 필요한가요? 플레이어들에게도 납득시킬 준비를 하세요.

여러분의 게임보다 플레이어들을 더 존중하세요. 만약 여성 플레이어가 “난 이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를 하고 싶고, 여성혐오 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않아.” 라고 말한다면 귀 기울여 들으세요. 이렇게 대답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네가 할 만한 게임은 아닌 거 같아.” 무엇을 말하든 여러분의 자유이니까요. 하지만 플레이어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마세요.

플레이어들에게 미리 말하세요. 여러분의 게임에 여성혐오가 포함되었다면, 미리 플레이어들에게 말하세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튀어나오는 갑작스러운 여성혐오는 가장 즐겁지 못한 종류입니다.

여성들이 직접 상상을 펼치게 하세요. 여성혐오와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이 구조에서 벗어나 직접 자유롭게 상상할 때까지 끝낼 수 없습니다. 제가 RPG를 무척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RPG를 통해 가부장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여성 영웅을 만듭니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과거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하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해 기억들을 파괴했습니다. 무척 훌륭하게, 비극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요.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실제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플레이어들이 함께 만든 상상 속에 추가로 여성혐오를 드리울 때는 무척 주의를 기울이세요.

 

(각주)

1)     서양 RPG 플레이어들의 생각 속에서, “역사적 RPG” 란 보통 1980년 이전 유럽, 혹은 지중해 연안에 한정된 무대를 일컫습니다. 가끔은 일본이나 이들 지역에 환상적 분위기가 가미된 대체 배경을 일컫기도 하지요.

2)     솔직히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다음 우리는 X되는 거고.”

3)     좋아요. 저는 실제로 모든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고민하지 않거나 아무런 엄격한 지적 활동에 뛰어들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한다고 허무주의적으로 결정하는 말재주 늘어놓는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지는 알겠지요?
“공상”이라는 말에 경멸적인 뜻을 담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도 있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교수와 이론가 중에서는 비의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비의 마법사도 나오면 좋겠네요)

4)     좋아요. 와카슈는 엄밀히 말하자면 남성이 아니지만 표현하기 무척 어렵군요. 와카슈는 태어날 때 남성이고, 대부분은 어린 시절 동안만 와카슈로 있다가 보통 성인이 되면서 남성의 위치로 가지요. 하지만 어떤 와카슈들은 평생 와카슈로 남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