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인가 참가인가

RPG를 즐기는 사람마다 보면 진행자(게임마스터) 체질인 사람이 있고 참가자(플레이어) 체질인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양쪽 다 똑같이 좋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요.

진행을 참가보다 좋아하는 분은 대체로 잘 짜인 줄거리의 묘미라든지 변해가는 세계, 주변인물(NPC) 연기 같은 데서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합니다. 또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 속에서 즐거워하는 참가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한가지 즐거움이겠지요.

참가자로서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을 진행보다 좋아하는 분은 특정한 한 사람의 역할로서 몰입해서 그 세계와 사건을 경험하는 재미가 크지 않을까 합니다. 그만큼 자기 주인공에 대한 애착도 크고, 한 사람의 미시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진행이 부담이 되기 때문에 참가만 하는 분도 많을 것 같고요.

저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참가보다는 진행을 훨씬 즐기는 편입니다. 몇가지 이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RPG계는 제가 관찰한 바로는 미국보다도 훨씬 진행자의 비율이 적습니다. 따라서 진행자가 대체로 세계관, 캠페인 기획, 규칙 선택, 참가자 선정 등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고, 누군가 진행할 사람이 있다면 참가자들은 자연 따라오는 편이지요. Rpg.net 쪽에서 보면 진행자들이 종종 ‘이러이러한 규칙과 세계관을 하고 싶은데 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 하고 고민하는데, 개인적으로 겪어본 일이 없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거의 아무도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인디 규칙 위주로 진행해 왔는데도 참가자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가 진행을 하지 않고 참가만 했다면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아니어도 대체로 진행자가 참가자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되는 RPG의 특성상 왕성한 실험정신은 어떻게 보면 진행자의 특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 다양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참가자가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은 주인공 한명입니다. 반면 진행자는 수많은 주변인물을 자유자재로 연기할 수 있습니다. 귀족, 깡패, 할머니, 어린아이, 기사, 괴물… 다양한 인물들을 마치 옷처럼 갈아입는 기분은 제게는 주인공 한명만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로키> “그래요…이 또한 여신의 뜻.”
<로키> “모든 것은 지나가나니…그리고 그분의 손 아래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한답니다.”
<로키> 헬레드는 흙묻은 손으로 아리에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줍니다.
<아리에> -마주 잡아요
<로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는군요.
<로키> “이 땅에 새로운 영이 깃들듯이 내 아이의 육신에도…”
<로키> “그 잠든 기억과 정신이 그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로키> “그대가 가는 길에 축복을.”
<로키> 헬레드는 아리에의 머리를 부드럽게 붙들고 몸을 숙이게 해 이마에 입맞춥니다.
<아리에> -헬레드를 잠깐 포옹
<로키> “그대가 아직 걷지 않은 길에, 그리고 마지막에 돌아오는 길에 축복 있으라.”

>> 이런 짓을 하다가도…

<로키> “알았냐, 이 쓸모없는 놈들아! 요정 귀 하나에 반 디나르다! 반 디나르!”
<로키> “부지런히 벌란 말이야.”
<로키> “그 조그만 야만인들은 말야, 일단 구석에 몰리면”
<로키> “미개한 짐승답게 풀섶에 달려가 숨으려고 하지.”
<로키> “그러니까 그럴 때는 괜히 헤마다가 개죽음당해서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로키> “아예 불을 싸지르란 말이다!” 그리고 요란한 웃음소리.

>>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묘미가 있는 게 바로 진행질(?) 아니겠습니까.

물론 완전히 한 인물이 된 기분을 느끼는 몰입을 중시하는 취미에는 잘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인물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가 없고 극 전체와 세계, 그리고 수많은 인물군상을 모두 포괄해서 생각해야 하니까요. 저같은 경우는 참가자일 때도 별로 몰입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 진행이 더 취향에 맞는 것 같습니다. 제 인물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참가자의 적극적인 연기를 유도할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니까요.

3. 묘사와 서술의 재미

개인적으로 저는 묘사하는 것을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참가자들이 지루해하기 전에 적당한 데서 끊어야겠다고 늘 다짐해야 할 정도로요. 그런 면에서 묘사와 서술권을 갖고 있는 진행자 역할은 저에게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제 머리 속에서 나온 장면과 공간들을 다른 사람 앞에 펼쳐보이고, 그 속에서 뛰노는 참가자들을 지켜보는 건 얼마나 흡족한 일인지 모릅니다. (…)

한편으로는 극적인 얘기 만들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면도 있는데, 이건 어떻게 보면 진행자로서는 결격요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얘기가 되가는 걸 보면 제 생각에는 이렇게 이렇게 되는 편이 가장 재밌겠다고 하는 진행도가 펼쳐지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자꾸 그쪽으로 유도하느라고 참가자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 점은 정말 고쳐야겠다고 생각중입니다. 그래서 지도를 중심으로 한 모험도 진행해 보았는데 이번엔 또 서사적 추진력이 떨어져서 곤란. 여러모로 쉽지 않은 문제죠.

4. 임기응변의 재미

저같은 경우 즉석에서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마구 만들어내는 걸 즐겨하기 때문에 놀이중 예측불능의 상황이 나오면 더 재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나리오 준비도 제대로 안하는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퍽) 또 그 때문에 NPC 스탯은 최소한만 하거나 아예 스탯이 없어도 되는 규칙을 좋아하죠. 소설도 가끔 써보고 하지만 역시 가장 역동적인 재미는 늘 전혀 생각 못한 설정과 상황이 튀어나오는 RPG에서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5. 남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재미

마지막으로 만만찮은 즐거움이라면 참가자들이 제 진행을 재밌어할 때겠죠. 한편으로는 참가자에게 재미없는 진행이었다면 진행자 본인은 아무리 좋았어도 전혀 소용이 없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항상 참가자들의 의견을 묻지만 몇분을 제외하면 참가자 분들은 잘 대답이 없으시더군요. 하다못해 ‘한번만 더 진행 이따위로 하면 찾아내서 죽여버린다’ 소리라도 나오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RPG가 묘한 게, OR에서는 비록 얼굴도 안 보이고 목소리도 안 들리지만 참가자의 호응도는 어느정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파장이 있달까요. 그리고 모두의 즐거움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멋진 극을 만들어 가는 때가 진정 RPG가 재밌어지는 순간입니다. 그것이야말로 RPG만의 포기할 수 없는 재미겠죠.

2 thoughts on “진행인가 참가인가

  1. 희미

    아, 아아아아아아-….orz
    누가 저에게 하루 열시간만 더 주세요 (?)

    저는 참가가 무지하게 재밌습니다. 아직까지 진행을 못해본것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시나리오를 짜보려고 하다가도..
    어느 순간 소설이 되어있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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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르티온

    괴롭히는 재미를 빼놓으셨…<- 사마인가.으음, 저는 묘사와 서술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인거 같군요...솔직히 NPC는 다양하게 쓰고는 싶지만, 너무 많이 나오면 재미없어 지는 일이 많더군요;;;마지막, 남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서는...언젠가 이루고 싶은 경지랄까요..-먼산누군가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라는 정규플이 해보고 싶군요.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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