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언더월드 3기 이야기)

전에 제노시아님이 얘기하신, 주인공 입장에서 본 언더월드 3기 캠페인의 이야기입니다.

책상 앞에 앉은채 리이는 몸이 배배 꼬여왔다. 책상, 의자, 종이. 이 삼위일체만 갖추어지면 머리에는 온갖 잡생각만 가득 차고 어디든 놀러나갈 구실 생각해 내느라 머리가 풀가동 되는 게 체질인 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지난 몇개월간의 일에 대한 생각을 글로 옮겨보라는 카구라 할머니의 말씀은 준엄했고, 비록 홈그라운드는 아닐지언정 장여사의 주걱은 더 준엄했다.

연필 끝으로 입술을 톡톡 치다가 리이는 마지못해 연필을 종이로 가져갔다.

지난 가을과 겨울에 있었던 일

생각해 보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사건이 있었다. 수많은 적과 새 친구들, 산 자와 죽은 영들과의 만남도 있었고… 새로운 인연과 수많은 위험 사이에서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와는 달라진 자신, 그리고 그때와는 조금 달라 보이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며 그녀는 제목 밑에 삐뚤빼뚤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민솔 민설을 만났다. 장난아니게 모땐 못된 귀신 땜에 민설이 죽을뻔했다.

그녀가 신도시에 와서 처음 본 예지, 그리고 그 속에서 죽을 뻔했던 민설의 모습… 리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실하고 유능하지만, 자기 챙길줄은 모르고 미련하게 일만 하는 솔. 그를 어느정도 알게 된 다음에 그런 예지를 봤더라면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일부러 놀리면서도 때로는 듬직한 오빠처럼 꾸짖어 주기도 하는, 위험이 닥치면 항상 바보처럼 자기 생각은 안하고 남들 앞에 나서는 그가 리이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잡았는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들 모두가 그렇듯이… 결국 리이는 연필 지우개를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글을 이었다.

히연도 만났다. 설이 boyfriend 아니라고 했다. 장여사님네 밥은 맛있다. 맛있었다.

희연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불완전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요괴 사이에 태어나 어느쪽도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누구인지’ 알려고 한다면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은걸. 다정다감한 마음과 따스한 손끝에서 나오는 것 하나하나가 주변 사람들의 삶을 풍요하게 하고 있다는 것, 아버지 없이 쉽지만은 않은 환경에서 씩씩하게 살아온 삶의 과정이 리이를 부끄럽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정신차리게 도와주었다는 것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라는 사실, 용기를 내어서 자신에게 가장 아플만한 비밀을 리이와 모두에게 고백하게 해준 그 신뢰 앞에서 더이상 무엇을 따지고 잴 수 있을까.

리사 엘리사는 이상한 기생충을 달고 다녀따 다녔다. 솔은 맨날 나만 혼낸다.

힘과 아름다움을 갖춘 신비한 존재, 그러면서도 그저 술잔 하나 사이에 놓고 밤늦게까지 수다떨기에 딱 편한 외로운 아가씨. 리이는 문득 리사의 오빠 단서휘를 만난 저녁이 떠올랐다.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친어머니와 헤어졌을까… 그러면서도 부모를 찾아서 낯선 땅까지 온 용기와 애정이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기를 바랄 뿐.

알카나에 갔고, 장여사님네서 먹고 잤다.

엄격하면서도 활달하고 다정한 장여사는 어쩌면 리이 자신이 엄마에게 바랬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희연이 부러웠다고 말한다면 희연은 웃겠지. 어쩌면 엄마가 바랬던 딸의 모습에서 벗어났듯 리이도 엄마에게 엄마 아닌 다른 모습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참 바보같은 일인데 말야.

종이의 여백에 낙서하면서 리이는 생각에 잠겼다. 카구라 할머니는 어쩌면 신엄마를 떠나야만 했던 상황에서 붙잡을 수 있었던 신엄마의 마지막 흔적, 그리고 또하나의 정신적 대모. 범상치 않은 가족상황에도 불구하고 밝게 웃을 수 있는 요코는 그녀의 친구, 그리고 또다른 스승이기도 했다.

늘 떠받들리면서도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갖기 힘든 요코에게 자신을 전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영안의 천형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리이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하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곳에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 두 사람은 언제나 그녀에게 신도시의 얼굴로 남아있겠지. 포근한 또다른 마음의 고향으로. 리이는 다시 연필을 들어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한테 죽을 뻔 했다. 악령, 원령, 고양이, 그림자, 유익비, 엄마, 아빠, 호랑이, 앤써리온, 인질범 신부, 그림자, 미나

문장을 끝맺지 못한채 다른 생각을 하면서 손이 느슨해졌다. 다른 손이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목걸이에 갔다. 미나가 총탄 세례를 받으며 쓰러질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돌 지경이었지만, 카르카스 신부의 말이 틀리지만은 않았다. 산 자는 산 자의 영역에,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영역에. 그리고 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무당이 있는 것이니까.

카구라 할머니와 요코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했지만 분명 문서보관실 지하에서 미나는 리이와 민설에게 소름끼치는 적의를 드러냈었다. 어느쪽이 진짜일까. 같이 나이트에서 술먹으며 떠들었던,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왔던 젊은 여자의 혼 쪽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건 미나를 보내기 싫은 자신의 이기심 아닐까.

어쩌면 신으로 모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산자와 죽은자가 이만큼의 감정적 교류를 하기도, 또 이만한 인연에 얽히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미나의 불안정, 그리고 자신의 미숙함. 게다가 사실 미나는 이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붙잡고 있는 건 혼자만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공중에 목걸이를 시계추처럼 흔들다가 리이는 고개를 젓고 다시 연필을 들었다.

우리가 맞선 적은 누구?

가을과 겨울에 걸친 긴 싸움 끝에 성모병원 이사장의 부정은 드러낼 수 있었지만, 꽤나 끈질긴 상대였던 그도 더 큰 적의 대외적 얼굴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앤써리온이나 뱀파이어들일까? 하지만 그들도 이곳이 아닌 외지에서 들어온 세력.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혹은 전반적인 혼란을 틈탄 것 뿐이었다.

어둠 속의 상대는 그들의 주변에 있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보이지 않는 적이기도 했다. 중앙도로의 사고들과 밤하늘을 불길하게 밝히곤 하는 붉은 달, 종종 펼쳐지는 결계의 폐쇄적인 공포를 생각하며 리이는 때로는 도시 자체와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에 몸을 작게 떨었다.

@#$% 같은 빙의령을 드디어 때려잡았다!!!

가끔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때로 불안감이 덮쳐올 때면, 사람과 가까워질 때마다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안된다는 부담을 느낄 때면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봐 그간 얼마나 압박감에 짓눌려 살았는지 새삼 깨닫곤 했다. 결국 해답은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마음과 인연의 힘 그 자체에 있었음을 모르다니. 리이는 작게 웃음지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자신도 조금은 성장했을까.

그간 가장 원하는 일은 신엄마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갈 수 있게 된 지금 리이의 생각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곳에는 아직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고, 하던 싸움을 그만두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기는 너무 찝찝하니까. 그것이 영능력자로서 자신이 가진 책임이자 특권이었다.

어쩌면 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엄마는 굳이 자신을 떠나보낸 것 아닐까. 리이가 한사람의 무당으로서 제몫을 할 수 있도록. 구르고 떨어지고 상처입으면서도 자신만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역시 늙으면 사람이 꾀만 는다고 생각하며 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종이 밑부분에 조심스럽게 적었다.

– 끝 –

‘아, 정말 학교다닐 때 반성문보다 더 어렵네.’

연필심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는 잠시 창밖의 도시를 내다보았다. 저 밖에는, 넓은 세상에는, 아니 당장 이 도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 거미줄 같은 계획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엮어넣고 있겠지. 그 속에서 자신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한없이 작았고, 그들을 두른 그림자들은 나날이 조여오는 기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보잘것없는 존재들은 보잘것없는대로 자신의 몫을 다할 수밖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때로는 가장 중대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은 조금씩 깨닫고 있으니까.

리이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세계의 거대하고 불안한 흐름 속에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나 갖는 의문이겠지만, 어차피 미래는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니까. 눈으로, 모든 마음으로,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존재 그 자체로. 옆에 놓인 빈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날린 후 그녀는 글씨와 낙서로 지저분해진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할머니이~~ 다 썼어요!!!”

계단을 쿵쿵쿵쿵 내려가다가 뭐에 걸렸는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종이비행기는 차가운 공기를 타고 열린 창밖으로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보이지 않는 기류에 몸을 실은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6 thoughts on “가을과 겨울 (언더월드 3기 이야기)

    1. 로키

      뭐 컨셉인 겁니..(먼산) 리이가 미국으로 갔던 때가 딱 그때쯤이기도 하고요. (언어능력의 정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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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rches

    오랜만입니다~ 로키님. 포스팅하신 것을 보고 ‘리이의 입장에서 보는 언더월드는 이렇구나’ 라고 느꼈답니다. (민설이나 리사 입장에서 본 언더월드도 보고 싶어지는군요) 만일 희연이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리이! 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감격했을 것 같지 않으신지요? 물론 리이 못지 않게 다른 pc들도 좋아하고 정이 함뿍 들은 상태랍니다. ^^

    리이가 희연을 부러워하듯 희연도 (플레이어인 저 역시) 리이를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있어요. 특히 성모병원 옥상 원한령 분들과의 사건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곱씹어보면서 감탄하고 있어요. 그 분들 앞에서의 리이의 행동이나 말은 ‘진짜’ 용기없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신 1. 생각해보니 신도시의 사건에 같이 얽매이지 않았다면 ‘캬악! 외국물 먹은 티 내지마!!!!’ 로 리이의 인상이 끝났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추신 2. 희연 입장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npc를 꼽으라면 앞으로도 (pc들로 인해 말려들지 않는 이상) 초자연 세계과는 관련이 없으며, 희연이 자라면서 여러모로 영향을 받았을 그녀의 사촌과 그의 가족이겠지요 (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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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확실히 등장인물마다 입장과 생각이 다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인 것 같아요. 희연의 입장에서 본 언더월드도 기대되는 걸요. ^^

      사실 리이도 희연하고 가까워지지 않았더라면 ‘저런 재섭는 범생이!’ 하고 끝났겠죠. 어떻게 보면 상극에 가까운 두 아가씨인데… 인연이란 그래서 재밌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리이를 통해서 제일 하고 싶었던 얘기는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 정도였을까요. 외국물 먹은 날라리에 싸가지는 눈씻고 봐도 없는데다 어휘는 초등학생 수준(..)인 아가씨도 사실은 용기있고 순수한 젊은 사람일 수 있다는… 리이도 희연도, 그리고 다른 PC들도 서로 겉모습만 보고 스쳐갔더라면 풍요로운 우정을 많이 놓쳤겠죠. 그렇게 보면 초자연적 위험에 휘말리는 것도 나름 전화위복일지도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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