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1/5)

신들이 사랑하는…

1.

“거짓말이야.”

목쉰 한마디는 침묵 속에 공허하게 울렸다. 자신이 한 말이라는 것을 다룬 오르가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일이 사실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리가…

“두분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젊은 제다이 나이트의 얼굴은 부드러우면서도 차분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에 동정은 보낼 수 있되 공감할 수는 없는 사람의 표정. 이 사람에게, 이 제다이에게 다룬의 슬픔은 견딜 수 없이 가슴을 할퀴는 현실이 아니라 위로하고 쓰다듬어줄 남의 상처에 불과했다. 다룬은 그런 제다이에게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미움을 느꼈다.

“다쓰 세데스라고 했소? 그 자는 어디있소?”

창가의 의자에 앉은채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는 무겁게 질문을 던졌다. 남이 보기에는 무표정할 뿐이었지만 다룬은 아버지의 흔들리는 눈빛을, 깊이 가라앉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절망보다 깊은 그 상실을.

“다쓰 세데스는 도망쳤고 아직 행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르가나 각하.”

“그 자의 제자를 붙잡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가 스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않겠소?”

다룬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채 제다이를 쳐다보았다. 다쓰 세데스의… 형을 죽인 자의 행방에 대해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다면! 젊은 나이트는 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자락스 토레이는… 전 스승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 스승?”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가 아주 작게 한쪽 눈썹을 들어보이자 순식간에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젊은 나이트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고, 그 광경에 다룬은 잔인한 즐거움을 느꼈다.

“저도 한가지 묻지요. 마스터 모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번갈아 보며 제다이 나이트는 이제 눈에 띄게 불편해하고 있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아버지도 다룬도 지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제다이는 뭔가를 말하기 꺼려하고 있었고, 그것이 형의 죽음에 관련된 것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째서 제 형님의 스승이 아닌 나이트 리엘께서 이 비보를 전해주시는지 궁금하군요. 설마 마스터 모트께서도 부상을 당하셨습니까?”

다룬은 형이 제다이가 된 이래 코루선트에 갈 일이 있으면 형과 함께 만나곤 했던 모트 클라인을 떠올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평온하고 소탈하던 웃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굳은살투성이의 따뜻한 손. 부모님마저도 저런 스승 곁이라면 루바트도 안심이라고 했었는데 결국에는… 치미는 슬픔을 참으며 그는 표정변화 없이 나이트 리엘을 마주보았다.

“아닙니다… 마스터 모트 클라인은 코루선트에 있습니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오.”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이번에는 아버지가 심문을 이어갔다.

“다쓰 세데스가 설마 코루선트로 도망쳤을 것 같지는 않고, 무엇 때문에 마스터 모트가 제자의 가족에게 루바트의 죽음을 알릴 시간도 없이 코루선트에 있다는 말이오?”

다룬은 천천히 아버지의 의자 뒤로 가서 서며 이제 확연히 쩔쩔매고 있는 나이트에게 말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자락스 토레이라는 자를 심문하기 위해서?”

나이트 리엘은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시스가 공의회의 포로이긴 한 것이오?”

제다이 나이트는 마치 구원을 청하는 시선으로 방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그러합니다.”

“허나?”

나이트 리엘은 애써 자신을 추스르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오르가나 부자를 마주보았다.

“마스터 모트는… 자락스 토레이를 제자로 받기 위해 제다이 공의회를 설득중입니다.”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다룬은 입안에 피맛이 고일 때까지 입술 안쪽을 작게 깨물었다. 평온하고 소탈한 미소, 굳은살투성이의 따스한 손. 마스터 모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의심많은 대귀족 가문 사람마저도 신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안심이 됐었다. 형이 저런 분의 제자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어린 마음에 부럽기까지 했었다…

‘형…’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제다이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그 기세에 눌려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제다이를 무표정하게 보며 다룬은 의자 등받이를 꽉 쥐었다.

“내 아들의 죽음의 원인이 된 시스를… 제다이로 만들겠다고? 루바트의 스승이?”

“오르가나 각하, 진정하십시오. 파다완 루바트의 죽음은…”

“이 작자가 정말 스승의 행방을 모르는지는 어떻게 아시오? 정말로 제다이가 되려는 것인지, 첩자인지 확인할 수 있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각하. 거짓이 있다면 저희 제다이 공의회에서 밝혀낼 것입니다.”

어린애 달래듯 평안하고 차분한 그 태도에 다룬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걸로 끝입니까? 전쟁 내내 시스였다가 잘못했다, 제다이가 되고 싶다는 걸로?”

아버지의 묵묵한 시선과 제다이의 정나미 떨어지도록 평온한 시선을 둘다 느끼며 그는 제다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최소한 재판은 있는 겁니까? 전쟁중의 범죄에 대한 처벌은?”

“오르가나 공자님, 포스를 바로잡는 길은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는 그 자체가 처벌이 되고도 남습니다. 부디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파다완 루바트를 죽인 것은-”

“그래서!”

다룬은 거의 절규하듯 제다이의 말을 끊었다. 깊은 터널을 지나듯 귀가 울리면서 머릿속의 열기가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다. 피를 보면 이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이 작자의, 마스터 모트의, 형이 죽었는데 살아있는 자락스 토레이라는 시스의…

“내가 제다이 선생의 미간에 대고 블래스터 방아쇠를 당기면 ‘미안하다’ 한마디로 끝나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무슨…!”

“다룬!”

아버지의 일갈에 다룬은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순식간에 식으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의 피로만 남았다.

“나가 보거라.”

아버지의 눈빛은 매서웠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격앙된 상태라 해도 제다이를 협박하다니, 실수라는 것 정도는… 늘 불완전하고 늘 실수투성이인 자신이 차지한 이 자리에 설 자격을 진정 갖춘 그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 생각에 가슴이 텅 비는 것만 같았다.

“예, 아버지.”

그는 허리숙여 인사했다. 더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이 목소리는 다시한번 낮고 냉정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나이트 리엘. 우리 일반인들은 제다이처럼 감정을 버리지 못하니 이해하시길.”

말에 숨은 뼈를 알아챘는지 못챘는지 나이트 리엘은 그에게 깊이 예를 취했다.

“아닙니다, 공자님. 공자님과 가족이 겪은 상실에 조의를 표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다룬은 아버지 집무실에서 나와 아무 목표도 없이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로든 움직일 수만 있다면.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풀밭에 앉은채 웃고 떠들던 형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그라브볼 경기 얘기, 가정교사들이 숙제를 너무 많이 준다는 얘기, 여자애들 얘기, 온갖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보냈던 여름 오후의 기억.

‘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형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어릴 때의 그 악동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 장난이었다며, 형의 타고난 권리를 다시 찾아가기를. 십여년이 지나도 도저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낄 수 없는 이 특권과 의무의 덫에서 자신을 건져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루바트 형은 특별했으니까. 형만큼 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저택의 현관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다룬이 멈칫하는 동안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찬바람과 함께 오후 햇살이 가득 들어왔고, 그는 순간적으로 그 문으로 걸어들어오는 형을 떠올렸다. 쾌활하게 웃으며 정복자처럼 당당하게. 전쟁과 죽음의 참혹한 현실 따위는 닿지도 못한다는듯 그렇게. 그게 바로 형이라는 사람이었다. 다룬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열리는 문으로 들어서는 여인을 지켜보며 그는 짧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어머니는 승마용 장갑을 서둘러 벗으며 다가왔다.

“얘야! 저택에 제다이가 왔다고 들었다. 무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나 팍팍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 같았다. 무표정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어머니의 얼굴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자식과 부모간의 그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을 통해 어머니가 진실을 깨닫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감흥조차 없었다. 자신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오던 어머니의 무릎이 꺾이자 팔꿈치를 붙잡아 받쳐올리는 동작은 기계적이었다.

“아냐… 아냐! 아니라고 해라!”

다룬을 올려다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그가 아니라고 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기라도 하듯. 어머니가 이렇게도 작은 분이었던가. 형과 둘이 무슨 말썽을 부린 것이 들켜서 어머니 앞으로 끌려왔던 때면 그렇게도 무서웠는데. 그 찌푸린 얼굴을 올려다보던 때가 그렇게 먼 옛날 같지도 않은데. 형과 나란히 꾸중을 듣던 때가… 표정없이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다룬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냐…!”

어머니는 마치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려는듯 몸부림을 쳤지만, 다룬은 놓지 않았다. 손가락을 푸는 방법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제자리에 굳은채 어느 영원 동안 서있으면 이것이 현실이 아니게 될까.

“제발… 아닌 거지? 네 형… 그럴 리가 없잖니? 그럴 리가… 루바트…!”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자 다룬은 기계적으로 그 작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렇게 눈에 띄는 장소에서 어머니가 감정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지만 하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현관으로 들어오던 햇살이 점점 좁아지더니 사라졌다.

석상처럼 선채 그는 어머니의 슬픔이 자신에게 가득 부딪쳐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상실 앞에 서로 부둥켜안고도 그들은 각각 혼자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손을 잡아드리고, 등을 쓸어드릴 수 있겠지. 어쩌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어붙은 혼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황금빛 햇살 속에 웃던 소년의 기억은 산산조각난 빛의 파편이 되어 천천히 흩어져갔다.

네, 옛날에 시범 플레이에서 잠시 나왔던 다룬 오르가나입니다. 지난번의 성원에 힘입어(?) 약속했던 과거 이야기죠. 뭐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 주인공이긴 (뭔소리여) 하지만 어차피 저는 진행을 할때든 소설을 쓸 때든 남의 인물을 건드리는 일은 피하고 보기 때문에… 시범 플레이에서 주인공이었다가 본 캠페인에서 조연이 된 로크락이 그나마 제일 이 원칙에서 벗어난 경우군요.

어쨌든 주인공들이 직접 나올 일은 없지만 자락스와 다소 관련이 있는 얘기고, 이방인님이 전에 요청하신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갈등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워낙에 규모가 큰지라 겁부터 나긴 합니다만…) 다른 분들도 캠페인의 방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제안해 주시면 제가 고맙죠~

6 thoughts on “[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1/5)

  1. 아카스트

    역시 자 형사, 인기가 많으시군요(…).

    로크락은 제가 플레이했던 캐릭터였죠, 그리고 본 플레이에서는 그의 제자를 플레이하게 되었으니, 이만큼 건드리기 쉬운 인물도 없…(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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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자 형사의 인기란..(..) 뭐 2편부터는 그의 인기도 하락할 걸로 보이지만요(?) 어쨌든 다룬이(..) 얘기이지 자락스 얘기는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다룬 오르가나는 공화국과 제다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사람이니 센과 틸과도 접점이 있을 테고요.

      로크락은 어쨌든 허락받고 건드린 인물이니..(음?) 지금쯤은 어딜 헤매고 있을지 안습입..

      그가 공의회에서 튄 원인이 된 프로토타입은 초기 설계에 센도 관여했던 것이라 어떤 식으로든 얽혀들어가겠죠. 정확히는 한밤중에 로크락이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며 곤히 잠든 센의 멱살을 잡고 작업장으로 질질 끌고 나왔겠고, 센은 잠좀 자려고 어쩔 수 없이 도와줬겠지만 이 사제지간에 이정도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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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카스트

      혹시 모르죠 작업중에도 센은 정말 자고 있었을지도 (…?!).

      그래서 나중에 두 사제가 만나게 된다면 “그 말도 안되지만 어쩐지 작동하는 설계방식은 어쨌건 같이 만들었으니까 이 스승을 봐서…” “…네? 뭘 만들어요?” “싸우자는 거냐?” (부웅) 같은 대화가 나오게 되는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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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방인

    아니! 이런 5편 규모의 거대한 뒷 설정이라니!(광분한다(…)) 어…어서 뒤편을…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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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재밌게 봐주시면 좋죠~ 아, 그리고 글에 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신들이 사랑하는..’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방대하기보다는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갈등이 캠페인 소재로서 꽤 규모가 크다는 얘기였어요. 물론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들도 꽤 광범위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성격이지만, 일단은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긴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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