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대한 생각

국내에 소개된 RPG 룰이란 게 워낙 적고, 다양한 룰에 대한 욕구는 존재하다 보니 이런저런 룰을 번역하거나 국문으로 요약하게됩니다. 그러면서 번역을 할 때의 제 습관이나 제가 보기에 좋은 번역 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RPG 번역을 하시는분들, 그리고 외래 취미인 RPG의 성격상 어떤 식으로든 번역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RPG인 모두와 토의하기 좋은 주제인것 같습니다.

1. 언제 소리로 읽고, 언제 뜻을 풀이할 것인가

‘7번째 바다’냐 아니면 ‘세븐스 시’냐, ‘일반적이며 범용적인 역할놀이 시스템’이냐 ‘겁스’냐 하는 문제랄까요. (일반적이며범용적인 역할놀이 시스템 왠지 괜찮은..퍼억) 딱히 기준은 없겠지만 저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기준을 사용합니다.

-약어[acronym, abbreviation] 같은 경우는 음을 씁니다. D&D, 겁스, T&T,M&M, 페이트, 퍼지 등등 이미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약어를 만든 경우는 굳이 뜻풀이를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고유명사로 이루어진 제목은 거의 소리풀이. ‘펜드래건’을 ‘거대한 용’이나 ‘거대한 뱀’이라고 해봤자 더 헷갈릴 뿐..(…) 라이서스처럼 원어로 아무 뜻이 없는 경우도 이에 준합니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외래어도 뜻이 아닌 소리를 옮기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캣, 던전, 소서러, 니코틴 걸즈, 오크월드등이 그 예일까요. 일반인(?)이 쉽게 알아보는 외래어는 아니어도 대개가 판타지 팬인 RPG 팬들에게는 익숙하니까요.

-고유명사나 외래어의 경우와 다소 겹치는 경우이지만, 뜻풀이로 하면 썰렁한 경우가 꽤 많습니다. 고유명사도 외래어도 아닌대표적인 예라면 아르스 마기카가 있겠지요. 마법학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뭐…별로 느낌이 잘 오진 않습니다. 그 외에도펜드래건을 거대 뱀으로, ‘니코틴 걸즈’를 ‘담배소녀들’로, ‘던전’을 ‘감옥탑’으로, ‘오크월드’를 ‘오크세상’으로 뜻풀이를할 수도 있겠지만…하고 싶으신 분? (…) 번역이 얼마나 주관적인 작업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랄까요. 뜻은 다 통해도느낌이 아니면 영 아닌 거라서요. (북한을 배경으로 한 니코틴 걸즈 플레이라면 담배소녀도 괜찮을듯..(…))

-마지막으로 위의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는 뜻을 풀어서 번역합니다. 더 섀도우 오브 예스터데이… 쉽게 알아볼수도 없고, 고유명사도 아니고, 너무 깁니다. ‘과거의 그늘’로 뜻풀이. 독스 인 더 빈야드…이하동문. ‘포도원의 개들’로낙찰. 마이 라이프 위드 마스터…외래어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역시 너무 깁니다. 과감히 ‘주인님과 함께’로.

이건 제목 뿐만 아니라 게임 용어에도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7번째 바다에서는 캐릭터 종류가 크게 4가지입니다. 플레이어캐릭터들인 히어로, 악당인 빌린(Villain), 악당의 부하인 헨치맨(Henchman), 그리고 엑스트라 악당인브루트(Brute)가 있지요. 여기서 히어로란 용어는 흔히 쓰는 외래어이고 ‘영웅’보다 뜻이 덜 거하기 때문에 그대로사용하지만, 나머지 세가지 경우 저는 악당, 심복, 졸개라고 뜻을 풀어서 사용합니다. 원래 발음대로는 들어서 쏙쏙 귀에들어오지를 않으니까요.

가장 뜻풀이가 어려웠던 게임 제목은 ‘안방극장 대모험'(원제 Primetime Adventures)였습니다만, 이건 두번째 논의와 연관되므로 넘어갑니다.

2. 원문따위 필요없다

…뭐 과장이 좀 있는 소제목입니다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외국어란 단순히 같은 말을 다른 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따라서 원문과 독자 사이에 번역자라는 필터가 좋든싫든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필터가 얼마만큼 개입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저같은 경우 번역자로서의 자신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편입니다. 원문을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경우 저는 원문의 단어사용 같은 것은 싸그리 무시하고 그 속뜻을 자연스럽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만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Primetime Adventures라는, 가상의 TV 드라마를 롤플레이하는 룰의 경우 소리풀이는 너무 길고어려웠고, 그렇다고 뜻 그대로 옮기자니 좀 썰렁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말이 ‘황금시간대 모험’인데, 뭐…나쁘지는 않지만 좀맥아리가 없달까요. 그래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습니다. 대모험이라고 하면 좀더 색채있는 느낌일 것 같고…그렇다면 띄어쓰기하나 바꿔서 ‘황금시간 대모험?’ 훨씬 낫지만 프라임타임이라는 원어처럼 텔레비전을 소재로 한 게임이라는 점이 한눈에 드러날까?’텔레비전 대모험?’ 좀 그렇고, 텔레비전을 비유해서 사용하는 말은 없나? ‘안방극장 대모험!’ 괜찮군.

결국 원어의 단어사용에서는 꽤 멀어졌지만 대신 뜻은 더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어는 소리만 다른 같은 말이 아닌지라1:1 치환은 애당초 포기하고, 그 대신에 뜻을 잘 전달하는데 집중하자는 게 번역에 대한 제 신조라면 신조랄까요. (어째 말이거창하지만..;;)

게임 개념 중 이런 의역을 가장 많이 한 게 ‘과거의 그늘’에 나오는 bringing down the pain의 경우입니다.이건 그야말로 직역불가. 따라서 원문은 포기하고 그 뜻에만 주목했습니다. Bringing down the pain은 플레이어가대결판정에서 졌을 때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피해를 입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패배를 승리로 바꾸려는시도랄까요. 그건 즉 뭔가 보여준다는 뜻…즉, 본때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bringing down the pain이’본때를 보여주기’가 되었다죠. 원문에서 멀어진만큼 뜻은 가까워졌다는 점에서 의역의 묘미랄까요.

이런 적극 개입은 제 경우 말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글의 구성 같은 것도 저 보기 좋은대로 마구 바꾸는 편입니다. 룰북에서예시한 것을 바꾸기도 하고, 기능목록을 고치기도 하는 등 한마디로 제멋대로랄까요! (…) 또 워낙에 성격이 급해서 이거한마디 한마디 다 옮기는데 시간이 얼마냐~!를 외치며 마음내키는대로 뭉텅뭉텅 잘라내고 요약해 버리곤 합니다. 그 때문에 원문을보고 또본 저만 이해했지 정작 번역의 수혜자여야 할 분들은 알아먹을 수가 없는 경우도 꽤 되는 것 같아서 이점은 고쳐야겠다고반성하고 있습니다.

3. 기타등등

그 외에도 저는 언어의 리듬감이랄까, 그런 것을 많이 중시합니다. 듣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아니 이건 아닌데?(…) 하여튼 뜻이 통하는 것 못지않게 듣기 좋게 만드는데 집착한달까요. 특히 룰 제목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또 늘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외국어와 외래어 사용을 줄여보려는 노력도 나름대로 하고 있습니다. (성훈님처럼 한자어사용까지 자제하시려는 분도 있지만 전 거기까지는…) 그런 면에서 RPG 같은 경우 외국어가 상당 부분 여과없이 그대로 들어온점이 좀 안타깝습니다. PC는 주인공, 룰은 규칙, 다이스는 주사위 하는 식으로 조금씩 고쳐가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GM 같은 경우 얼마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는데, ( http://www.rpg.net/oracle/essays/itoolkit2.html) ‘마스터’라는 용어보다는 ‘제 5인(The Fifth Business)’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있지요. 제 5인이란 오페라에서주인공, 여주인공, 악당, 조연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제 5의 부류이지만 동시에 줄거리에 없어선 안될 인물입니다.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랄까요. 게임마스터에게 꽤 잘 어울리는 호칭인 것 같습니다.

4. 맺으면서

이상 외래 취미라고 할 수 있는 RPG에서의 외국어와 번역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RPG의 매력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소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도 그중 하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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