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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시 카트 소개

근미래 디스토피아/사이버펑크 배경의 작품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활극을 펼친 주인공이 정신을 잃은 후 눈을 떠보니 어느 병원 침대 위에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더라… 같은 전개는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들을 후송하는 구급대원들의 활약이 더 흥미진진할 수도 있지요.

(구급기 ‘로미호 78호’)

갈렌 피저의 크래시 카트(링크)는 21세기 말 초거대 스프롤인 캘리포니아 광역대도시 연합, 일명 ‘캘엑시스’을 무대로 한 근미래 구급대원 RPG입니다. PC들은 민간 구급 서비스 회사 “크래시 카트 HQ”의 직원들로, 매일 밤 교대근무마다 긴급출동에 나서 위기에 빠진 고객을 구출해 지정한 장소까지 안전하게 후송합니다. 원문의 설명을 빌리자면 “여러분은 특별히 사이버하지도 않고 펑크하지도 않은, 그저 별탈 없이 근무 시간을 버티려 노력하는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게임의 참고자료 중 하나인 조 코넬리 원작, 마틴 스콜세지 감독 <비상근무>.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평범한 구급대원들의 평범하지 않은 구조 활동

구급대원들은 늘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하루하루 펼쳐지는 근무 현장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매 출동마다 구급대원들은 시속 300km로 비행하는 구급기를 타고 건물 사이를 위태위태하게 날아 몇 분 내로 구조신호 위치로 도착해야 합니다. 무사히 도착해도 끝이 아닙니다. 착륙 현장에는 각종 골칫거리가 가득합니다. 구급대원들은 고객을 노리는 갱단이나 킬러들과(혹은 경쟁사 구급대원들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객이 갇힌 불타는 빌딩 속으로 달려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고객이 크게 다쳤다면 현장에서 수술을 집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착륙을 마음 편히 할 수 있으면 차라리 낫습니다. 착륙하기도 전에 지대공 미사일의 환영인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고객을 태운 다음에도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진땀을 빼거나, 한참 위험한 상황에 느닷없이 연락해와 이런저런 계약상 허점을 물고 늘어지는 고객의 변호사를 상대하며 진땀을 뺄 수도 있습니다. 행여나 구조 과정에서 구급기가 크게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격납고 정비원들과 법무팀, 높으신 분들의 곱지 않은 눈총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대다수 직원들은 삼 주 안에 번아웃 증후군에 빠집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몇 달도 전에 그 경지를 지났습니다. 여러분은 돈도, 직업 안정성도 아닌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좇아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평범한 사람이 이토록 크나큰 위험을 짊어질까요? 플레이를 통해 알아봐야 합니다. 이 과정이 게임의 핵심입니다.

어둠 속의 칼날과 레이디 블랙버드가 결합하면

크래시 카트는 존 하퍼의 ‘어둠 속의 칼날’과 ‘레이디 블랙버드’를 참고해서 만든 RPG입니다. 우선 크래시 카트는 ‘포지드 인 더 다크’. 즉 어둠 속의 칼날 자매작임을 표방하고 있으며, 플레이 구조와 판정 방식을 따왔습니다. 매 근무(매 세션)마다 캐릭터들은 긴급 출동을 나서고, 고객을 구출한 다음 격납고로 복귀합니다. 복귀한 다음에는 막간 활동으로 휴식과 개인활동을 한 다음, 다음 근무에 다시 출동에 나가는 플레이를 반복합니다. 판정 방식 역시 몇 가지 차이점은 있지만 어둠 속의 칼날처럼 처지와 효과를 정한 다음 결과를 알아보는 방식입니다. 다만 크래시 카트에서는 판정을 주사위 대신 플레잉 카드로 하며, 카드 뽑기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게임 규칙에 활용합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 블랙버드(링크) 역시 크래시 카트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블랙버드 공녀와 그 일행이 밀수선 올빼미 호를 타고 정략결혼을 피해 도망치다가 순양함 비탄의 손 호에 잡혔다’라는 초기 상황과 캐릭터가 주어진 레이디 블랙버드와 마찬가지로, 크래시 카트 역시 기본 설정이 어느 정도 정해진 네 명의 캐릭터가 (새로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구급기 로미오 78호를 타고 활약하는 RPG입니다.

플레잉 카드로 보여주는 팍팍한 직장인의 삶,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수면 시간

앞에서 언급했지만, 다른 어둠칼 자매작들과 다른 크래시 카트의 가장 큰 특징은 주사위 대신 플레잉 카드를 판정에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크래시 카트의 카드는 성공과 실패를 나타내는 판정 수단이자, 캐릭터들의 점점 마모되는 의지와 체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선 캐릭터들은 판정을 할 때 카드를 뽑습니다. 붉은색 카드만 나오면 실패, 검은색 숫자 카드가 나오면 부분 성공, 검은색 인물 카드(잭, 퀸, 킹)가 나오면 성공, 검은색 인물 카드가 여러 개 나오면 대성공,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쓴 카드는 다시 섞는 대신 그냥 버립니다. 즉, 초반 상황이 쉬우면 나중에는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는 반면, 초반에 각종 실패에 시달리면 이후 판정에서 극적인 성공을 거둘 확률이 높아집니다. 또한 버린 카드는 세션이 끝나기 전까지는 카드 더미로 돌아가지 않으며, 특정한 조건이 발동되어야 다시 카드 더미에 섞입니다: 조커가 나오거나, 아니면 캐릭터들이 잠을 자거나.

조커를 뽑으면 상황이 악화됩니다. 픽션 속에서는 무언가 골칫거리가 발생하며, 지금까지 사용한 붉은색 카드(실패 카드)만 전부 카드 더미로 다시 섞입니다. 즉 판정에서 실패할 확률이 훨씬 커집니다.

검은색 카드(성공 카드)를 카드 더미로 다시 섞으려면 막간 동안 조금이나마 눈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면 버린 검은색 카드 일부가 카드 더미로 되돌아 갑니다. 쪽잠을 자겠다고 선언한 캐릭터는 그 막간 동안 스트레스 해소도, 자기 개발도, 치료도, 그 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매 막간마다 플레이어들은 잠을 잘지 말지 항상 고민해야겠지요. 끊임없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서글픔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캐릭터들의 결말, 두 장의 편지

이토록 고생하며 구조 현장으로 달려가는 캐릭터들은 도대체 무슨 미래를 꿈꿀까요? 플레이어들은 매 세션이 끝날 때마다 두 장의 편지 중 하나를 선택해 한 줄을 채웁니다. 하나는 자신이 미처 구하지 못한 고객의 가족에게 쓰는 위문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본사에서 제안한 임원직을 승낙하는 편지입니다. 어느 쪽 편지를 채울지는 플레이어 자유지만, 편지 중 하나가 완성되면 플레이어는 그 편지를 보내고 구급대원을 그만둘지, 아니면 편지를 묻어두고 계속 팀원들과 활동을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두 편지가 모두 완성되면 어느 쪽 편지를 보낼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제 캐릭터의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으로

크래시 카트는 세상을 흔드는 영웅 대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부품처럼 일하다가 사라지는 개인을 플레이하는 작은 RPG입니다. 캐릭터들이 아무리 열심히 날고 뛰더라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캐릭터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캐릭터 자신의 미래와 이번 출동에서 구할 환자의 목숨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출동을 나서서 난관을 극복하고, 누군가를 구하고, 격납고에 돌아와 편지를 쓰다 보면 영웅담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풍성한 이야기가 완성되겠지요. 크래시 카트는 바로 그런 RPG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