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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가드/후기] 질주의 기억

마우스가드 1화 후기입니다. 플레이 게시판은 네이버 TRPG Club D&D 기타 소모임 ‘인디 RPG 클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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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켄지, 색슨야산의 풀숲은 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는다. 새로 나는 파릇파릇한 풀에 섞인 죽은 풀을 헤치며 지나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털이 곤두서면서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 주변을 살핀다. 아까 시꺼먼 놈한테 찔린 어깨가 매번 욱신거린다.
빌어먹을.
쉴새없이 실룩거리는 코와 움찔거리는 귀는 공기중에 떠도는 정보를 걸러낸다. 아까 시꺼먼 놈들? 아니, 풀잎에 스치는 바람이다. 살괭이? 바람이 냄새를 불어올 뿐, 아직은 멀리 있다.
풀이 쓰러져 있다. 많은 인원이 지나간 길이다. 깊이 패인 쥐 발자국은 중갑주를 입은 상대다. 시꺼먼 놈들… 엘가르는 이를 드러내며 달려간다.
깔쭉깔쭉한 풀줄기에 붙은 흰 망토조각이 작은 꽃처럼 흔들린다. 켄터 대장이 일부러 남긴 흔적인가?  얼마 뒤, 무거운 것을 끌고간 듯 흙이 쓸린 곳. 피투성이가 되어 늘어져 있던 비올레타를 기억하고 엘가르는 목구멍에 차오르는 분노를 삼킨다.
빌어먹을 비올레타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일까, 다시 이렇게 막막하게 달려가던 기억이 번져온다. 숨도 안 쉬는 것 같은 여자를 어깨 위에 들쳐메고 돌투성이 맨땅을 질주하던 지난 가을, 비올레타의 피에 젖은 어깨는 차가웠다.
비올레타 조장을 이곳에서 데려가, 엘가르! 족제비들이 진군하는 길목을 막아서던 정찰대원의 목소리는 잊히지도 않는다. 지원군을 불러와라!
부드러운 밤색 털이 붉게 엉긴 비올레타를 들쳐업으며 엘가르는 그 명령을 어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찰대원님 죽을 거에요. 조원들이랑 다 죽을 거라고요. 그 소리조차 하지 못했다. 그 벽력같던 명령이 머릿속에 울리고 또 울리는 소리에 맞추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조장을 메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달렸다.
엘가르… 어깨에 걸쳐멘 비올레타가 몸을 뒤척이며 목쉰 소리로 불렀을 때에는 안도감에 주저앉을 뻔했다. 내려놓고… 빨리 가… 지원군을…
피로가 온몸에 한꺼번에 부딪치면서 발이 끌렸다. 타는 듯한 폐가, 망토를 찢어 싸맨 뒷다리의 상처가, 저려오는 어깨가 각자의 고통을 호소했다.
명령이다. 없는 힘을 쥐어짠 비올레타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울렸다.
엘가르는 자꾸 접히려는 무릎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바위투성이 정경에 몸을 숨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상당한 생쥐 한 마리는 한입거리도 안 되는 포식자를 막거나, 눈을 가릴 수단이라고는.
조장님은… 비척거리며 그는 한 발 앞에 다른 발을 끌어다 옮겼다. 비올레타 조장께서는 지금 부상이 심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가슴을 한껏 부풀려 아픈 폐에 공기를 집어넣었다.
지금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엘가르…! 다시 혼수상태로 빠져드는 목소리에는 가냘픈 절망이 얽혀들었다.
마우스가드의 외곽 초소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당시에도 몰랐고, 이후에도 계산하지 않았다. 비올레타를 놓치고 땅에 구른 엘가르는 놀라서 달려온 가드들에게 단어를 토해냈다. 도토리 언덕에 족제비 습격… 정찰조… 지원군… 요망…
며칠 후, 검은 악몽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면서 동료들의 용감한 죽음 소식이 들려왔다. 엘가르는 멍하니 이것 역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비올레타 조장의 거대하고 차가운 분노 역시 꿈일 수 있었을 것이다.
비올레타는 명령대로 자신을 두고 지원군부터 불러왔으면 부하들을 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랬으면 조장님도 죽었을 거라고 엘가르는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엘가르에게 죽음이 무서워 득달같이 도망친 비겁자라고 했고, 그는 반론할 말이 없었다.
동료를 버리는 자는 마우스가드의 자격이 없다는 비올레타의 말에 엘가르는 어깨를 움츠리고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이 울부짖으며 자신을 휩쓸어 지나가게 내버려두었다.
기억의 안개를 뚫고 한 줄기 바람에 생쥐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들이다. 켄터 대장, 신참, 시꺼먼 놈들, 호위대, 비올레타. 엘가르는 땅을 박차는 다리에 힘을 가한다.
주어진 임무만을 생각한다면 과학자들을 스푸르스턱에 데려다주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초냄새 나는 아저씨들 앞발 잡고 마을에까지 바래다주는 게 명령이라면, 그런 명령은 부엉이한테나 채여가라지.
그웬돌린 사령관의 명령은 분명 쥐들의 ‘안보에 필수적인’ 과학자들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스푸르스턱 주변 길을 엘가르보다 잘 아는 과학자들이 적도 없는 안전한 길로 무사히 못 돌아간다면 그건 안보에 필수적인 게 아니라 식량이나 축내는 밥충이니까 신경쓸 필요가 없다.
과학자들이 무사히 찾아갈 만큼 똑똑하면 쫓아갈 필요가 없고, 그러지도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면 더더욱 쫓아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임무는 완수했고 이제는 동료들을 구하면 되는 거다. 아, 역시 마우스가드는 명령을 잘 따르는 게 최고다.
적과 동료들이 점점 가까와오자 엘가르는 신중한 걸음으로 돌과 식물에 몸을 붙이며 이동한다. 이제 금방이다. 엘가르에게 신세를 지면 비올레타 그 성질 더러운 여자 표정이 볼만하겠지? 두려움과 기대감에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경비대원 엘가르는 풀잎 사이로 내리는 어둠 속을 움직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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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Matriarch – (총)사령관, Patrol leader – 정찰조장, Patrol guard – 정찰대원, Guardmouse – 경비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