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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운드, 반신반인 영웅을 플레이하는 RPG

한때 강대한 제국이 있었습니다.

제국은 강대한 힘과 마법으로 주변 나라를 복속시켜 마침내 세상을 통일했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정의를 증명받기 위해, 그리고 인류가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천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제국의 마법사와 군인들은 천사의 군세를 무찌르고 천상을 정복하여 마침내 조물주의 옥좌에 도착했지만, 옥좌는 비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혹은 신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슬퍼하고 분노했지만 이내 서로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념을 형상화한 인공 신을 만들어 내전을 벌였고, 세상은 산산조각이 나 기나긴 암흑의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천 년 동안 계속된 전쟁 속에서 인공 신들이 하나둘씩 파괴되며 이들이 지녔던 천상의 에너지는 세계 곳곳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사이에서 신의 힘을 얻은 반신(半神)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갓바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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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운드?

<갓바운드(Godbound)>는 폐허가 된 세계에서 신의 힘에 눈뜬 영웅, 즉 갓바운드가 되어 세상을 구하는(혹은 파괴하는) RPG입니다. 갓바운드는 보통 인간으로는 상상도 못할 권능을 행사하면서 이 세상을 활보하는 괴물들을 무찌르고, 폭군의 압정에 신음하는 나라를 구하며, 더 나아가 복수심에 불타는 천사들과 여전히 서로 전쟁을 벌이는 인공 신들, 존재 너머의 무리들과 맞서 싸우면서 세상을 구합니다.

OSR(“올드 스쿨 르네상스”), 고전 D&D의 새로운 부활.

최근 서양 RPG계는 실험적인 규칙을 내세운 ‘스토리 게임’ 못지 않게 1970~80년대 RPG 규칙의 영향을 받은 신복고풍 RPG, 즉 OSR(“Old School Renaissance”)풍 RPG들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OSR 디자이너들은 과거 RPG의 특징인 간결한 규칙과 상상력을 중시하는 플레이를 강조하면서, 특히 고전 D&D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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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책들은 한국의 옛 RPG 팬이라면 한 번 정도는 보았을 “고전 D&D”, 즉 D&D BECMI입니다. BECMI는 Basic, Expert, Companion, Master, Immortals의 약자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Master까지 나왔지요.)

<갓바운드> 역시 OSR풍 RPG 중 하나입니다. 제작자 케빈 크라우포드는 OSR 디자이너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며, <갓바운드> 외에도 <사일런트 레기온>(러브크래프트풍 호러), <스타즈 윗아웃 넘버>(SF) 등 다방면의 RPG를 OSR풍 규칙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갓바운드는 고전 D&D 팬들에게 익숙한 요소(여섯 가지 능력치, 레벨, 낮을수록 좋은 방어도, 극복 판정, 사기 판정 등)를 많이 갖추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개성적인 면모를 많이 갖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적인 캐릭터를 플레이하기 위해서

설정부터 거창한 만큼, 갓바운드들은 강력한 신적 존재입니다. 갓 힘에 눈뜬 초보 갓바운드라 할지라도 평범한 인간 십여 명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으며, 갓바운드들이 힘을 합치면 강력한 왕국도 쉽게 무너뜨립니다. 오직 갓바운드와 동급인 천상의 존재들과 괴수들, 그리고 인간 중 정말로 뛰어난 일부 영웅만이(수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치밀한 준비를 해서) 갓바운드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갓바운드>는 이러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몇 가지 특수한 규칙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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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피해 규칙의 변화입니다. 갓바운드와 다른 적들은 피해를 받을 때 적용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갓바운드는 피해를 받을 때 생명점이 깎이지만, 다른 적들은 피해 주사위의 결과에 따라 HD(히트 다이스, 적들의 레벨)가 깎입니다. 갓바운드의 피해 계산법은 보통 피해 주사위의 결과에 따라 일정량의 피해를 받는 방식인데, 예를 들어 갓바운드가 인간에게 대형 검(1d10)을 휘둘렀을 때 피해 주사위의 결과가 1 이하면 HD에 0점, 2~5면 1점, 6~9면 2점, 10+이면 4점 피해를 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HD가 1~2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일격에 죽지요. 또한 남은 피해는 주변 적에게 들어가기 때문에 한 방에 두세 명씩 쓰러지는 경우도 흔합니다. 게다가 갓바운드는 주변에 신성력을 자동으로 행사하므로, 갓바운드의 레벨보다 기존 HD가 같거나 낮은 적들은 라운드마다 일정량의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여러 졸개들이 달려들어도 몇 라운드 후면 모두 쓰러질 수 밖에 없지요.

두 번째는 ‘창조의 언어’입니다. 모든 갓바운드는 천상의 힘인 창조의 언어를 지닙니다. 창조의 언어는 활, 명령, 죽음, 속임수, 불, 생명, 지식, 바다, 하늘, 검, 마법 등 다양한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갓바운드는 자신의 영역을 이용해 기적을 일으키고 전투 중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순간 이동, 초인적인 속도, 물리 공격에 무적, 부활시키기 등등…).

세 번째는 영향력과 지배력 점수입니다. 갓바운드는 레벨이 오르면서 영향력과 지배력 점수를 얻으며, 이 점수들을 이용해 세상에 축복이나 저주를 내리고, 신들의 무기를 만드는 등 막강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샌드박스 플레이를 권장하는 RPG

<갓바운드>의 또 다른 특징은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샌드박스 플레이의 권장입니다. <갓바운드>는 특정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지 않은채, PC들이 주도해서 사건을 이끌도록 권장합니다. 이를 위해 <갓바운드>에는 GM이 PC들의 행동에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몇 가지 기법을 소개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세력과 이들의 특징, 지도자, 문제점 등을 만드는 표를 준비했습니다. 특히 추가 자료집인 <식스틴 소로우즈>는 PC들이 마주칠 각종 문제를 즉석에서 만드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갓바운드 뿐만 아니라 다른 RPG에서도 무척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갓바운드>는 올해 접한 RPG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무척 뛰어난 게임입니다. 가능하다면 판권을 얻어 한국에도 소개하고 싶네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꼭 플레이해보고 싶은 RPG입니다.

p.s : 

갓바운드는 무료판이 공개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보세요. 각종 추가규칙이 빠진 것을 제외하면 유료판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http://www.drivethrurpg.com/product/185959/Godbound-A-Game-of-Divine-Heroes-Free-Edition

비커밍 : 영웅의 여정, 그리고 치러야 할 희생.

오랫동안 묵혀 놓았던 RPG 중 하나를 읽었습니다.

오늘 읽은 RPG는 영웅이 길을 떠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희생을 치르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비커밍(Becoming : A Game of Heroism and Sacrifice)입니다. 비커밍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네 명이 즐기는 RPG이며(물론 옵션 규칙을 적용해 수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 중 한 명은 영웅이 되고, 다른 세 명은 운명이 되어 영웅의 여정을 가로막습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폴라리스와도 비슷한 면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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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 세 명의 운명이 가련한 영웅을 서로 한 대라도 더 때리려고 아우성치는 게임)

기본적인 게임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게임은 기본적으로 장면별로 나뉩니다. 장면마다 운명들은 돌아가면서 한 명씩 ‘위험의 화신’이 되어 영웅과 직접 겨루고, 나머지 두 명은 ‘유혹자’가 되어 영웅을 돕는 대신 대가를 제안합니다. 위험의 화신은 각 장면의 주요 마스터 역할을 하며, 유혹자는 NPC 중 한 명이 되어 영웅을 유혹합니다.

2. 위험의 화신이 장면을 열고 영웅에게 시련을 던지면, 영웅은 자신이 가진 이점(미덕, 힘, 동료)를 동원해 이에 대항합니다. 위험의 화신은 이미 타락시킨 이점에서 보너스를 받습니다. 유혹자는 기본적으로 위험의 화신을 돕지만, 영웅이 자원 중 하나를 자신에게 바치는 대가로 영웅을 돕겠다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3. 판정은 다이스 풀 방식으로, 판정에 동원한 이점에 따라 주사위를 모아 6 또는 5가 많이 나온 쪽이 이깁니다(먼저 6의 개수를 비교한 다음, 동수일 때 5의 개수를 비교합니다). 판정에서 승리한 측이 나머지 장면을 서술합니다. 영웅이 이기면 자신이 건 이점을 좀 더 강화할 수 있으며, 위험의 화신이 이기면 영웅이 판정에서 건 이점들을 점점 타락시키거나 걸지 않은 이점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유혹자들은 영웅과의 거래에 따른 결과를 받습니다.

4. 게임은 기본적으로 총 아홉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플레이어들은 마지막 장면이 끝난 다음 점수계산을 합니다. 영웅은 자신이 지킨 이점과 강화한 이점마다 일정 점수를 받고, 각 운명은 자신이 빼앗거나 타락시킨 이점마다 점수를 받습니다. 이 중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승리하여 이야기의 결말을 서술합니다.

비커밍에서는 몇 가지 여정을 일종의 플레이 무대처럼 소개하고(물론 만드는 방법도 소개했습니다), 여정 중 하나를 골라 플레이를 하는 방식입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한 편의 영웅담이 만들어지겠지요. 영웅이 여정 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으며 무엇을 희생했는지, 결국에는 여정을 완수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물론 중간에 모든 이점을 빼앗기면 그 시점에서 여정이 끝납니다).

비커밍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영웅의 이야기를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무척 관심이 가는 RPG입니다. 언제 한번 사람들을 모아 플레이해보고 싶네요.

피아스코: 욕망의 비극, 또는 희극

흔히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이란 곧 지옥이라고도 하지요. 인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기대하고 좌절을 맛보고, 가질 수 없는데 소유하고자 하고,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남이 채워주기를 바라면서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 하나씩은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런 고통을 달래줄 도피처를 찾아 헤맵니다. 돈을 벌면, 성공하면, 날씬해지면, 예뻐지면, 술을 마시면, 네가 나를 사랑하면,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라고, 아니면 잠시 잊을 수는 있을 거라고 되뇌며 비틀거리는 나약한 우리. 그런 인간에게 인간관계란 고문관 없는 고문실이나 다름없습니다.

피아스코 표지fiasco
낭패
a fiasco failure
대실패.
피아스코 (Fiasco: A Game of Powerful Ambition and Poor Impulse Control, 2009 Bully Pulpit Games)는 바로 그런 관계와 욕망이 얽히고 섥히는 놀이입니다. RPG에서 일반적으로 놀이의 시작이자 기본단위는 인물입니다. RPG라는 말 자체가 인물의 역할 (Role)을 맡는 (Playing) 유희 (Game)를 가리키고 있지요. 반면 피아스코의 플레이 준비는 인물이 아닌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A는 설정표를 잠시 보다가, 굴려놓은 주사위 중 3을 골라서 관계 분류 3인 ‘과거’를 자신과 플레이어 B 사이에 설정합니다. 다음 B는 6으로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과거 분류 중 6번인 ‘안 좋은 가족사’를 고릅니다. A와 B는 아직 인물 설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인물은 불미스러운 가족사라는 관계에 얽혀있게 됩니다.

피아스코 설정 단계에서 참가자들은 미리 굴려둔 주사위를 골라서 설정표에 나오는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그 인간관계에 붙는 욕구, 장소와 물건도 마찬가지로 고릅니다. 그 인간관계의 당사자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계의 망을 짜면서 차차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피아스코의 인물은 관계의 망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니까요.
관계에는 욕구, 장소, 물건 중 한 가지가 붙습니다. 플레이어 C는 4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욕구 분류의 4번인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를 고릅니다. 다시 차례가 돌아온 플레이어 A는 역시 4가 나온 주사위를 집어들어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 욕구의 4번인 ‘경찰에게 망신을 줘서 친구들에게’를 고릅니다.
불미스러운 가족사하고 경찰을 망신주는 일이 어떻게 연관이 될까 서로 얘기해보다가, A는 B가 경찰이고 A는 그의 숨은 아들이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다른 플레이어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하지만, 일단 다른 관계와 욕구·장소·물건도 설정해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합니다.
관계와 그에 붙는 부속을 다 설정했으면 그에 맞추어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하고 플레이에 들어갑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자신의 인물이 나오는 장면을 합니다. 이때 참가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장면을 시작하고 다른 참가자들이 성패를 정하거나,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시작하고 자신이 스스로 성패를 정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성공에는 흰 주사위, 실패에는 검은 주사위를 스스로 고르거나 참가자들에게 받으면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관계를 설정한 후에 A는 불량 고등학생 애니, B는 애니의 어머니를 오래전에 버린 경찰관 빌, C는 빌에게 쫓기는 마약 딜러이며 애니의 남자친구인 찰리라고 정합니다.
차례가 돌아온 A는 스스로 장면을 설정하기로 합니다. 새로 산 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과속을 하다 걸린 애니는 단속 경찰관 빌을 알아보고는 친구들 앞에서 빌에게 망신을 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애니는 빌에게 그 나이가 되도록 교통단속이나 한다고 살살 약올리기 시작합니다.
B와 C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성공이라는 표시로 둘이서 하얀 주사위를 골라 A 앞에 놓습니다. B가 맡은 빌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답을 못하다가 애니를 홧김에 체포해버립니다. 애니는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등뒤에 손으로 승리의 V를 그리지요. 애니는 단번에 친구들 사이에 영웅이 됩니다.
장면을 설정하고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참가자의 의지이기에, 놀이 속 인물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맡은 참가자 역시 계산을 하고 눈치보고 견제하는 구도를 이루게 됩니다. 장면과 성패 규칙은 참가자끼리 이야기에 대한 기대심리와 욕구가 다른 그 미묘한 긴장을 이용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점점 치닫는 이야기를 이끌어내지요. 욕구가 서로 엇갈리고, 그 욕구를 위해 서로 이용하는 동안 서술의 양상은 계속해서 어긋나며, 균열은 점점 커집니다. 놀이 속에서나, 그리고 밖에서도.

자기 차례가 돌아온 C는 A와 B에게 장면을 설정해달라고 합니다. 빌이 마약거래 현장에서 찰리를 쫓는 장면은 어떻겠느냐고 A가 제안하고, B도 동의합니다. 마약 거래 현장을 포착한 빌은 찰리를 쫓아 달리고, 찰리는 정신없이 달아납니다. 뒷골목을 따라 쫓기던 찰리는 리볼버 권총 (둘의 관계에 붙은 부속물)을 들어 빌에게 겨누는데…! 성공하고 달아나되 경찰을 쏜 중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붙잡힐 것인가? C는 고민하다가 결국 검은 주사위를 들어보이고, 찰리는 총을 겨누다가 무서워서 쏘지 못한다고 서술합니다. B가 맡은 빌은 달려와서 찰리를 한 방 먹이고는 수갑을 채웁니다.

피아스코에서 주사위는 정말로 용도가 다양한 도구입니다. 위에서 다루었듯 설정과 성패 결정에도 사용하지만, 이야기 완급을 조절하고 결말을 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주사위를 반 소모하면 1막이 끝나고, 남은 주사위를 굴려서 반전 (The Tilt)을 설정표에서 고릅니다. 그리고 2막을 하면서 나머지 주사위를 소모하고, 마침내 결말에 도달합니다.

1막을 끝내고 세 참가자는 반전을 정합니다. A는 2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반전표에서 ‘비극’을 고르고, B는 1이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비극 중 1번인 ‘느닷없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세 사람은 이야기 끝에 찰리가 총기 오발로 경찰을 죽여서 경찰에 대대적으로 쫓기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반전을 몇 개 정하고 잠시 쉬었다가 돌아와 2막을 시작합니다.

2막에 나머지 주사위도 전부 소모했으면 각 참가자 앞에는 흰색과 검은색 주사위가 쌓여 있게 됩니다. 여기서 인물을 해피엔딩으로 이끌고 싶다면 하얀 주사위 혹은 검은 주사위만 있는 것이 최상이며, 두 가지 색이 비등하게 있으면 최악입니다. 결말을 이끌어내려면 하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하고 검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한 다음에 높은 쪽에서 낮은 쪽을 뺍니다. 그 최종 결과가 높을 수록 해피엔딩이고, 0이나 음수이면 배드엔딩입니다. 어차피 8~9쯤은 되어야 그나마 현상유지를 하므로 해피엔딩이 나오기는 확률상 쉽지 않습니다.
2막까지 끝나고 이제 모든 주사위를 소모했습니다. 빌 앞에는 하얀 주사위 3개에 검은 주사위 하나가 있습니다. 하얀 주사위를 굴리자 4 + 2 + 2 = 8이 나오고, 검은 주사위는 1이 나옵니다. 8 – 1 = 7 이고 하얀색이 높으므로 결과는 백7입니다. 애니는 흑14, 찰리는 백3이 나옵니다.
결말표에서 찾아본 결과 흑13이 넘은 애니는 더 좋을 수가 없는 결말이 나오고, 백7인 빌은 실패하고 감옥에 가며, 백3인 찰리는 파멸합니다. 애니는 감옥에서 억만장자의 아들을 만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빌은 찰리의 총기오발을 가장해 동료 경관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가며, 찰리는 빌의 죄가 드러나기 전에 유치장에서 당한 폭행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됩니다.
플레이 중 참가자는 되도록 검은색 혹은 흰색 주사위만 많이 얻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2막에는 자기 장면의 성패 주사위를 스스로 가지지만, 1막 중에는 남에게 주게 되어 있거든요. 즉, 1막에는 한쪽 주사위만 많아지지 않도록 견제당하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가자 사이에 치밀한 거래와 배신이 판을 치기 십상이지요. 2막 들어서는 자기 주사위를 자기가 가지므로 다른 참가자들에게 장면 설정을 부탁하고 한쪽 주사위만 늘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추가할 수 있는 주사위는 2개입니다. 게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설정하므로 사건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겠지요. 결국 피아스코의 타인은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아스코를 한 판 마치고 나면 망가진 인생과 부서진 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과 이상할 정도로 행운이나 불운의 지배를 받는 인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막장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헤어날 수 없는 인연의 끈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공허 속에 허우적거리다 파국을 맞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비쳐주는 거울 아닐까요? 이지러진 것이 거울인지 아니면 자신의 얼굴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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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에 운명을 걸어볼까요?

RPG? 음주게임? 이야기 놀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요즘 새 RPG를 별로 안 봐서 새로 보는 건 거의 위시송군의 소개로 보는 느낌인데,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건 이미 지난 네이버 TRPG 카페 MT에서 선보여서 꽤 좋은 반응을 얻은 게임이기도 하지요.

원작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 뭔지는 다 아실 겁니다. 뭉크하우젠 남작의 말도 안 되는 허풍 모험담이지요. 게임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그 허풍을 게임으로 재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고 하면 게임을 가리킵니다.

이걸 어떻게 분류할지는 좀 미묘합니다. 일단 RP 요소는 있기는 합니다. 각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하나 설정해서 자신의 인물 입장에서 허풍을 늘어놓는 것이 기본 설정이니까요. 단, RPG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 능력치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규칙은 오직 이야기의 흐름 자체만을 다루지요. 그런 면에서 묘사 요소는 전혀 없이 서사적 규칙만 있는 놀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RPG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 RPG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주사위도, 캐릭터 시트도, 진행자도 없는 이 놀이를 굳이 분류하자면 ‘음주게임’ 내지는 ‘이야기 놀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규칙책 자체가 음주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고, 술을 마시면 훨씬 재미있을 성격의 놀이라는 점에서 음주게임, 그리고 굳이 RPG인가 일종의 보드게임인가 하는 구분을 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노는 놀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겠지요.

놀이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진행자 없이 모든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한 명 설정합니다. 인물에 능력치 같은 것은 필요없고, 이름과 작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MT에서는 그냥 본명 내지 닉으로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북한 가서 김정일하고 맞장뜨고 우주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긴 했지만요..ㅡㅡ;;)

다음, 돌아가면서 운을 뗍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공작, 하늘의 별을 따서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구한 얘기를 해주시지요’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실마리가 들어오면 그 참가자는 약 5분경 온갖 허풍과 뻥을 섞어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운을 뗍니다. ‘주교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품 사이에 주교님의 신학서가 있었던 연유를 알려주시지요.’라든지요.

저게 끝이었다면 규칙이랄 게 없으니 놀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 만들어내기였겠지만,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서는 ‘개입’이라는 간단하고도 강력한 규칙이 놀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게 거의 유일한 규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모험가는 모험가 수만큼의 토큰, 최소 5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MT에서는 포커칩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어떤 모험가이든 잘못 알았다며 토큰을 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중인 모험가는 그 이의를 받아들여서 이야기를 고치고 토큰을 받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자신의 토큰까지 얹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험가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이 포기하거나 토큰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할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백작: 아 그래서 지옥의 파수견한테 주려고 달나라 토끼한테 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러 갔는데 말야-(주:실제 해보시면 이게 절대 너무 아스트랄한 게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주 두부제국의 위력을 맛보지 못하신 여러분은 아스트랄이 뭔지 모르십니다..ㅠㅠ)
주교: 어허 이사람~ 주님이 노하실 소리! 달나라 토끼들은 토끼독감 걸려서 이미 죽은 때가 아니었나. (자기 토큰 하나를 백작에게 밀어주며)
백작: 이양반이 술이 과하셨나, 예수님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시네. 토끼들이 타밀플루 맞고 살아난 거 몰라요? (주교 토큰에 자기 토큰을 얹어서 밀어준다)
주교: 예끼, 타밀플루 알레르기 땜에 다 죽었었지! (토큰을 또 하나 얹어서 총 3개를 백작에게 스윽)
백작: 아 맞아, 그랬죠. (토큰 3개를 챙기며) 저도 달나라에 도착해서야 그게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죽은 토끼들이 남긴 떡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바이러스가 들끓는 폐공장으로 들어갔는데..

이 개입 규칙 때문에 각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독주무대가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되며, 가뜩이나 상식을 씹어드신 허풍담은 더더욱 은하계 저편으로 날아갑니다. 덕분에 더 흥이 살면서 참가자들은 웃느라 숨넘어갑니다. 이렇게 모두 함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우러지는 흥겨움은 허풍선이 남작 최고의 묘미입니다. (더욱 공포스럽게도, 하다보면 종종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생기면서 뭔가 말이 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이렇게 모든 모험가가 이야기를 마치면 각 참가자는 자신 외에 누구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정해서 자기 토큰을 그 사람에게 전부 몰아줍니다. 토큰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승자가 되고, 승자는 모두에게 술을 돌린 후 (음주를 적극 권장하는 놀이라고 했었죠) 다음 라운드에는 승자가 오른쪽 사람에게 운을 떼면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허풍선이 남작은 간단하면서도 굉장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즐거운 자리에서 흥을 돋우며 정신없이 웃는 놀이입니다. 위에 소개한 기본 규칙 외에도 책에는 신밧드 변형 규칙,(주:이 변형의 하이라이트라면 ‘모험담 중 잘 되는 일마다 알라를 찬양하되, 잘 안 풀렸을 때 알라 탓으로 돌리면 방에서 쫓겨나고 방문 밖에서는 거대한 몸집의 내시가 기다리고 있다가 목을 베어버린다’) 또 토큰조차 필요없는 어린이용 놀이 ‘우리 삼촌이신 남작은…’도 나옵니다. MT 때에 전부 해봤는데, 기본 규칙이 가장 재미있었고 어린이용 규칙도 시간은 짤막하지만 굉장히 웃으면서 했습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우리가 익숙한 형태의 RPG와는 많이 다르고, 어쩌면 RPG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따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며 즐기는 흥겨운 놀이이기는 하죠. 그런 이야기 놀이는 RPG에서 갈라져나오기는 했지만 전통 RPG의 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들이 어쩌면 RPG라는 취미의 또 다른 지평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말에 동의하시지 않는다면 뭉크하우젠 남작이 코사크 부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 칼을 휘두르며 결투신청을 해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길.

펄프 RPG 세기의 혼: 장르와 범용성, 극과 전략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능력치와 난이도 표현에 숫자 대신 형용사를 사용하는 퍼지 (Fudge) 규칙을 기반으로 면모와 극점수를 추가한 페이트 (FATE)의 발전형으로서, 범용 규칙인 페이트의 펄프 장르용 변형입니다. 기본 배경은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시작하기 전, ‘세기 클럽’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벌이는 모험 중심입니다. 세기 클럽의 모험가들은 악당 수학자 메두셀라 박사, 제트팩을 메고 날아다니는 소련 특수요원 로켓 레드 등 다양한 악당을 상대로 고대 유물 탈취전을 벌이고 거대 로봇과 전투를 벌이는 등 세계를 구해내지요.

펄프 자체는 국내에 아주 낯익은 장르는 아닙니다만, 위에 나온 간단한 소개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양한 장르 문학과 영화, 만화의 요소를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펄프의 특징 중 과학과 활극에 초점을 두면 수퍼히어로물과 SF, 초자연에 초점을 두면 호러와 판타지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장르가 펄프의 파생물입니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국내에 잘 알려진 영화도 ‘펄프’라는 이름과 연관짓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전형적인 펄프물이고요. 이와 같이 펄프는 대중적 장르 작품과 연관이 아주 깊습니다.
일종의 상위 혹은 메타장르, 혹은 기원점인 프로토장르라고 할 수 있는 펄프의 기본 정신은 긴박한 활극과 모험, 서양과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 시대상을 반영하는 지식과 기술에 대한 낙관,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에서 생겨난 미지와 신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각각 나누고 중점을 다르게 하면 위에서 언급했듯 다양한 하위 내지 파생 장르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펄프 RPG를 표방하는 세기의 혼은 펄프를 넘어서는 다양한 장르에 적용할 수 있으며, 펄프 장르를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많은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이 특징은 장르 규칙인 세기의 혼이 역설적으로 범용성을 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기의 혼은 어떤 면에서 펄프 RPG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활극에 특화된 인물 제작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적은 수의 기능이 각각 넓은 분야를 다루므로 (예를 들어 구르기, 곡예, 수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운동신경’ 기능 하나로 통합) 각 인물이 상당히 넓은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싸움을 잘한다고 사회성이 떨어질 이유는 없고, 뛰어난 학자도 필요하면 총 (혹은 채찍!)을 들 수 있지요.
넓은 기능 범위의 단점이라면 기능 선택으로는 인물의 개성이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세기의 혼은 기능의 특화 내지는 특수 활용인 스턴트 규칙으로 개성을 확보하고 획일화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영할 때면 운동신경 판정에 자동으로 +2를 받는 스턴트가 있다면 운동신경 등급이 비슷한 다른 인물과 차별화할 수 있지요. 또한, 춤을 출 때면 운동신경을 예술 기능 대신 활용하는 스턴트가 있어도 마찬가지로 높은 운동신경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특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활극의 중요한 요소인 전술적, 극적 연출에도 세기의 혼은 강한 편입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환경이나 장면의 특징을 ‘면모’로서 조작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연회장에서 모두가 긴장한 상태라면 그 장면에는 ‘모두 긴장했다’ 면모가 있습니다. 이때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해서 위협 기능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술 기능으로 음악이나 춤 등 공연을 해서 긴장한 분위기를 없애고 대신 ‘부드러운 분위기’ 면모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면모로 친화력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지요. 자신이 스스로 판정해서 부여하거나 발견한 면모의 첫 발동은 무료이므로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극점수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무료 발동을 넘길 수도 있으므로 꽤 긴밀한 협력도 할 수 있고요. 이렇게 해서 세기의 혼은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꾸거나 관찰하는 것을 규칙으로 포상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보너스나 페널티가 붙는 것은 거의 모든 RPG에 있는 규칙이지만, 세기의 혼 규칙은 위와 같이 극점수와 면모 발견, 부여, 제거를 매개로 참가자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직접 다루고 포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가자가 훨씬 능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작하고 이용해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극적이면서 동시에 확고한 규칙상 이점도 있으므로 전술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은 활극적 재미를 더욱 강화합니다.
다음 세기의 혼의 펄프적 특징으로 지식 기능의 활용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학술과 과학, 공학, 신비학과 같은 지식 기반 기능의 활용도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단순히 어떤 지식을 아는지 판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 판정을 통해 참가자가 새로운 극적 사실을 선언하고, 그 선언에 따라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림의 부족과 조우했을 때 ‘이 부족은 여자만을 지도자로 뽑으니까 우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하면 결과가 좋을 거에요.’ 하는 같은 선언을 하고 학술을 굴려 성공하면 접선하는 부족에 ‘여성이 지도자인 것을 당연시한다’ 면모를 부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했을 때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이때도 판정을 통해 면모를 부여했으므로 첫 발동은 무료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 돛줄을 자르면 돛이 적을 덮어버릴 거야!’ 하고 선언한 후 과학 굴림에 성공하면 동료가 해당 돛줄을 잘랐을 때 적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실패한다면 잘못 판단한 거니까 효과가 없거나 우리편이 돛에 덮여버릴 수도 있겠지요. 공학이라면 ‘저 깜박거리늘 붉은 빛을 쏘면 차단문이 내려와!’ 하는 식으로 선언하고 마찬가지로 판정할 수도 있고요.
지식 판정의 선언 기능 외에도 세기의 혼에는 연구, 기계 제작과 수리 등 학술, 공학, 과학을 활용하는 규칙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신비학은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학술, 과학, 공학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공학으로는 손목에 차는 무전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신비학으로는 같은 제작 규칙을 사용하되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식입니다. 이렇게 과학기술과 신비를 둘다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세기의 혼 규칙은 다분히 펄프적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기의 혼이 펄프적 특징을 잘 반영하는 것은 규칙을 통한 인물 표현의 확보가 아닌가 합니다. 펄프의 원동력이자 펄프적 정신의 표현은 다름아닌 펄프의 영웅들, 강한 개성과 놀라운 지략과 행동력, 교양과 지식이 빛나는 주인공들입니다. 딱히 창의적이거나 새로울 필요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일정한 기존 유형을 잘 활용하면 더 인기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인물성을 표현할 필요는 있지요.
이러한 인물 표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면모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환경이나 장면 면모처럼 인물에게도 면모가 있는데, 환경이나 장면 면모가 주변 환경의 특징을 표현하듯 면모도 ‘서부 최고의 명사수’라든지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 등 그 인물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하면 해당 판정에 +2를 받을 수 있지요.
위의 예를 계속하자면, 서부 최고의 명사수 면모 당연히 총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면 예쁜 여자 꼬시는 데는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2를 받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점이 인물 자신의 배경이나 특징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면모 발동은 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인물의 배경, 과거, 특징, 내면 등을 플레이 자체에 반영합니다.
면모는 이점뿐만 아니라 약점도 될 수 있습니다. 서부 최대의 명사수에게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나 도전자가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고, 이런 때에 진행자는 면모가 불리하게 (혹은 귀찮게) 드러난 인물의 참가자에게 극점수를 역으로 지급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쁜 얼굴을 보면 사족을 못쓰는 특징도 진행자가 ‘시장 부인이 엄청 미인이야! 가서 꼬시려고 들면 극점수 줄게’ 하는 식으로 불리하게 발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면모가 불리하게 작용해서 극점수를 역으로 받는 것을 강제 발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참가자를 곤란하게 한다기보다는 플레이를 재미있게 유도하는 장치입니다. 극점수가 나온다는 면에서는 전술적인 장치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면모를 통해 등장하는 사건과 갈등은 이점과 마찬가지로 각 인물의 배경과 특징, 사연에서 나오므로 면모 중심 진행은 인물 중심적 전개를 유도하며, 플레이의 극적 재미를 풍요롭게 합니다. 뛰어나면서도 부족한 데가 있는 인물들의 능력과 과거, 갈등에서 나오는 플레이는 참가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진행을 편하게 해주지요.
결국 제가 보는 세기의 혼은 장르 특징에 대한 충실성과 그 장르를 넘어서는 일정한 범용성, 그리고 극적 연출과 전술적 선택이라는, 서로 상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긴장관계에 있는 요소들을 조화시키는 규칙입니다. 그리고 그 긴장을 창의적으로 해소하는 순간 굉장히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죠. 세기의 혼을 플레이하며 그 끝없는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짧은 서사시, 포도원의 개들

D. 빈센트 베이커가 만든 포도원의 개들(Dogs in the Vineyard)의 기본 배경은 초기 모르몬 교의 역사에 일부 기반한 가상의 미국 서부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배경에 쉽게 차용할 수 있는 것이, 이 규칙책의 기본 내용은 모르몬교나 서부극에 대한 것이 아닌 죄악과 도덕적 판단, 그리고 죄인과 그 심판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최대의 묘미는 ‘참가자의 선택이 곧 법이며 진리’라는 데에 있습니다. 분명히 지켜야 할 신념은 있지만, 그것을 실제 어떻게 적용하는 길이 가장 잘 지키는 길인지는 불확실하기 쉽습니다. 두 여성이 부부로 함께 살고 있다면 이는 신의 뜻을 어긴 죄일까요, 아니면 축복받을 사랑일까요? 진행자는 절대 어느 쪽이 옳은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RPG가 가진 게임성의 근본이 되는 ‘선택’이라는 요소를 극도로 살린다는 점에서 이 게임에 대한 호평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녹록치 않은 주제를 다루는 포도원의 개들은 판정 규칙부터 매우 독특해서, 포커식으로 레이즈(Raise)와 시(See)의 연속으로 상대가 거는 주사위의 합계만큼 자신의 주사위를 소모하는 체계로 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거는 주사위를 두 개의 주사위로 막지 못하고 세 개 이상으로 막을 경우 부상을 입고, 상대의 주사위 합계를 더이상 맞출 수 없게 되면 집니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고 했던가요. 주인공은 부상을 입어야 성장 또한 할 수 있다는 점도 이 규칙의 특징입니다. 이 게임에서는 별 깊이없는 인물은 판정 성공률도 높고 부상도 적지만 대신 성장 또한 늦어집니다. 반면 상처가 많고 복잡한 인물은 부서지고 깨지는만큼 더욱 빨리 성장하고, 깊이 또한 깊어진다는 점에 이 규칙의 묘미가 있습니다. 흉터 하나하나에 사연이 있는 인물, 낡은 총과 그을린 외투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그런 인물이 되어가는 것이 ‘포도원의 개들’에서의 성장입니다. (물론 그만큼 강해지는 것도 틀림없고요.)

사실 강한 인물과 약한 인물에 큰 차이를 둘 것도 없는 것이, 제작 규칙상 주인공은 주변 인물들에게 무조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공의 댓가입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스스로 견딜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요. ‘상승’이라는 규칙 때문에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새로운 대립 수단을 끌어들임으로써 주사위를 더 얻습니다. 말로 안되면 주먹을 쓰고, 주먹으로도 안되면 총을 뽑는 식으로 점점 갈등의 수위를 높여가게 됩니다. 문제는 정말 그러면서까지 이기고 싶은지 하는 것. 어떤 갈등이든 그 극단까지 끌고 가면 분명히 이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심판,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주인공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늘려갑니다.

이러한 심판과 선택이 이루어지는 극적 공간은 주인공들이 돌아다니는 마을들로, 마을 제작 규칙도 이 책의 별미입니다.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깽판칠 수 있는 극적 상황과 인물들을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오만에서 죄악, 거짓 신앙 등으로 이어지는 죄의 진행은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종교색을 띨 필요도 없습니다. 배경에 따라 주인공들은 제다이, 성기사, 경찰, 범죄조직원 등 어떤 신분도 될 수 있고, 그들이 지키는 신념도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지키려는 신념이 있고 집행할 권위가 있는 한 어떤 배경이든 가능한 것이 포도원의 개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진행자에 대한 조언도 상당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또다른 장점. 제가 본 진행자 조언 중 가히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참가자의 선택을 완전히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시나리오를 절대 짜지 말라는 것도 많은 진행자에게 참 반가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주인공으로 인해 달라질 수 있는 극적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부터는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반응만 하라는 조언은 이후의 제 RPG 진행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지금까지 한 두어번 돌려보기는 했지만 거의 판정 규칙만 따왔을 뿐, 근본적으로는 그 특징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이 규칙을 제대로 활용해서 장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싶군요   . 죄와 심판이라는 무겁고도 흥미로운 주제, 그리고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짧고 격렬한 서사시를…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게임, 니코틴 걸즈

http://www.halfmeme.com/nicotinegirls.html

니코틴 걸즈(Nicotine Girls, 2002 © Paul Czege)는 걸작 인디게임 ‘주인님과 함께(My Life with Master)’의 디자이너가 만든 무료 공개룰인데, 여러모로 ‘주인님과 함께’의 전신이라고 생각되는 게임이다. 몇가지 공통점을 들자면

1. 다이스풀의 사용

메카닉 면에서는 다이스풀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다만 다이스풀은 수많은 RPG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고, ‘주인님’과 ‘니코틴’은 사뭇 다이스 사용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있는 비교는 아니다.

2. 극도로 협소한 장르룰

둘다 매우 좁은 배경과 아주 적은 수의 행동만이 가능한 협소 장르 룰이다. ‘주인님과 함께’는 고딕 호러를 모티프로 하고 있으며, 사악한 주인에게 매인 하인들이 인간성을 되찾고 주인님을 살해하는 내용만을 지원하고 있다. ‘니코틴 걸스’ 같은 경우 도심에 사는 저소득층 소녀들이 자신의 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조금 있다 설명하겠지만 대개 실패한다.)

또한 ‘주인님과 함께’에서 가능한 행동이 주인님의 명령에 저항하거나, 수행하거나, 마을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주인님을 죽이는 4가지에 한정되어 있듯이 ‘니코틴 걸즈’에서는 섹스, 돈, 눈물, 담배 피우기 4가지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극도로 협소한 장르 를은 실제로 GM과 플레이어 모두에게 제한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한된 범위의 행동과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는 생각 이상으로 강렬하며, 무한한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은 쉬워진다. ‘주인님’이나 ‘니코틴 걸즈’를 플레이하면서 막막한 느낌이 든다면 그건 PC를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또 하나, 이러한 장르 룰은 그 장르의 분위기를 모르면 플레이가 어려워진다. 실제로 ‘주인님’ 캠페인을 돌리면서 깨달은 점이었는데, 고딕 호러 장르가 국내에 친숙하기 않기 때문에 생긴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니코틴 걸즈’도 마찬가지여서, 이 게임에서 저소득층 소녀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플레이가 완전히 엇나갈 가능성이 높다.

3. 정신적 스탯의 사용

‘주인님’과 ‘니코틴’은 둘다 일반 RPG에서 쓰는 힘, 지능, 지혜, 민첩성, 건강 등등의 특성치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주인님’의 PC들에게는 자기혐오와 무력감, 그리고 사랑이 있고, ‘니코틴 걸즈’의 소녀들에게는 희망과 두려움 두가지 스탯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극도로 제한된 장르에만 유용한 스탯이다. 또 한편으로 이런 정신적 스탯은 시스템과 플레이의 관계를 매우 긴밀하게 해준다. ‘이번에 강아지에게 먹이를 줘서 사랑을 올리면 주인님을 죽일 수 있어!’라든가 ‘이번 판정에 희망을 쓰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일단 두려움으로 하고 희망은 다음 기회에 늘리자.’와 같은 판단은 시스템에 대한 판단이면서 동시에 극적인 결정이기도 하다.

4. 장면전환식 플레이

둘다 전통적인 파티플레이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각 플레이어가 돌아가면서 한 장면씩을 플레이하는 형태이다. ‘주인님’의 경우 다이스 더해주기, ‘니코틴’의 경우 담배를 통해서 각 플레이어가 서로의 판정에 영향을 줄 방법을 마련하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형태의 플레이는 플레이어가 많을수록 자칫하면 플레이어의 몰입도 저해와 지루함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5. 시작과 끝이 있는 캠페인

마지막으로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둘다 시스템 자체적으로 캠페인의 결말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캠페인은 끝이 나고 결말을 서술하도록 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RPG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아르스 마기카 4판

요즘엔 아르스 마기카 (Ars Magica) 4판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참고로 4판은 무료입니다. 회원 전용 자료실에도 올라온 걸 봤고, rpgnow.com에서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엔 5판도 나왔더군요. 그건 무료가 아니지만요.) 라이언 램팬트가 처음 출판해 화이트 울프,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 그리고 현재는 아틀라스 게임스로 넘겨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시스템은 처음 나온 80년대부터 정교한 디자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D&D 3.5의 조나단 트위트가 디자인한 시스템이기도 하지요.)

뭐 시스템 메카닉을 나열하자면 한도끝도 없으니까 제가 맘에 드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사회성을 전제로 한 시스템

1 플레이어에 1 캐릭터가 원칙인 대개의 게임과 달리 아르스 마기카(이하 AM)에서는 1 플레이어가 적어도 3인의 캐릭터를 갖습니다. 즉 마법사 1인, 전문가 1인, 일꾼 1인이지요.

각 캐릭터 종류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AM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무대는 요정과 드래곤과 악마와 천사와 마법사가 모두 현실인 13세기 유럽으로서, 중심이 되는 곳은 헤르메스 계열에 속한 마법사들의 공동체입니다. (헤르메스 계열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들도 존재하지만 이야기의 주축은 헤르메스계 마법사들입니다.) 시스템의 가장 주요 인물은 물론 마법사들로서 이들은 마법연구와 개발에 일생을 바치며, 한편으로는 마법사 사이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자기 입지를 넓히고 더욱 많은 이익(돈, 실험재료, 영향력 등)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실험실에 틀어박혀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다가 마법적 재능을 가진 이들 마법사는 일반 사회로 들어가면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마법의 기운을 느낀 동물들이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고, 마법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그 기운을 느끼고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죠. 따라서 일반사람과의 반응굴림에서 자동적으로 -3의 페널티를 얻습니다.

이런 마법사들을 구제(?)해 주는 존재가 전문가로서, 직업은 기사, 바드, 도둑, 학자, 한량귀족(…) 등 다양하지만 마법사와 일반 사회 사이에 가교가 되어준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들은 마법능력은 없지만 다양한 경로로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음양으로 마법사들을 도와주면서 자신도 보수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법사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서는 하인, 경비, 요리사 등등이 필요한데, 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일꾼입니다. 엘리트는 아니지만 이들도 자기가 하는 일에서 나름대로 전문인이며, 궁수, 검사, 요리사 등 모험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이들은 고용주인 마법사들이 모험을 떠날 때 함께 따라가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 캐릭터들은 사회에서의 위치와 서로와의 관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고, 마법사들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해서 부대끼고 살아갑니다. 마법사가 연구하고, 전문가가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어슬렁거리고, 일꾼이 고되게 일하는 곳. 고립된 던전에서 몬스터 잡는 세계를 메카닉의 기본으로 상정한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이서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기본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아르스 마기카는 던전탐험을 기반으로 한 D&D와는 반대의 시점에서 출발합니다.

2. 마법, 마법, 마법

몬스터 잡아서 레벨이 오르면 마법이 더 생긴다? 아닙니다. AM의 마법사들이 새로운 마법을 얻는 방법은 오직 연구와 공부입니다. 잡일만 죽어라 시키고 가르쳐주는 건 더럽게 없는…아니지, 자상하시며 훌륭하시며 사려깊고 학식 높으신 스승께 배워서 정식 마법사가 된 후에는 자신이 스스로 마법을 발명할 수도 있고, 다른 마법사의 연구노트를 보고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가 암호라도 걸어놓았으면 그거 푸느라 또 몇 달 끙끙. 자기 연구의 성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적었을지도 모르므로 자칫하면 아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부적이나 마법지팡이가 필요하면 어떻게 할까요? 드래곤 레어를 습격해서 슥삭? 뭐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아크메이지 정도 되어서 드래곤을 건드리면 매우 위험, 보통 메이지가 드래곤을 건드리는 건 그냥 자살입니다. 어쨌거나 스스로 마법을 걸지 않은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마법효과를 알아내는데 또 시간을 바쳐야 하고, 고약한 원주인이 보호 마법이라도 걸었으면 꼼짝없이 걸릴 수도 있죠. 아주 별볼일 있는 물건 같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안정적인 방법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법을 걸려는 물체의 재질과 크기, 형태를 가지고 보너스와 페널티와 다양한 작용효과를 확인하고, 실험재료와 시간을 투자해서 원하는 마법을 겁니다. 하늘을 나는 벨트, 치유의 마법지팡이, 불이 나오는 장갑…. 뭐든지 좋습니다. 다만 마법 이론과 해당 마법의 레벨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니 충분해도 운나쁘게 주사위 잘못 나오면 시간과 마법재료를 날릴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이렇게 맨날 연구만 하면 한평생도 모자라겠다고요? 걱정 없습니다. 수명연장 시약을 만들면 되니까요. (말이 시약이지 문신 같은 것도 괜찮은.) 시약을 만들어 마시면(혹은 새기거나 등등) 100살은 거뜬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수명연장 시약은 시약을 마신 그 나이에 마신 사람의 생명력을 붙들어두므로 일단 시약을 마시고 나면 생명력을 정상적으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일단 마시면 영구 불임이 된다는 소리죠. 어차피 마법사야 연구에 온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마법사의 실험실에 몰래 들어가 생명연장 시약을 마시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유서 쓰고 공증인 세우고 가야 할 겁니다. 실험실은 마법사의 성역이므로 같은 마법사도 남의 실험실에 들어가면 헤르메스 마법사의 법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가 없고, 각 시약의 공식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 만든 걸 마셨다간 뒷일은 책임 못 지거든요.

연구실에서 늘 시간을 보내기가 쓸쓸하십니까? 마법사야 태생적으로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만큼 고독감을 느끼진 않겠지만, 때로는 외로울 수도 있죠. 다른 마법사들이래봤자 전부 당신의 실험성과나 영향력을 뺏으려는 못믿을 족속 뿐이니. 이럴 때는 패밀리어를 만들어 보세요! 마법적 능력을 조금 가진 짐승이 마법사를 자기 의지로 완전히 받아들일 경우 실험실로 데려와 1년에 걸친 패밀리어 과정을 밟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마법사와 동물 모두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그만큼 둘의 마법력과 마음과 몸이 연결된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단 패밀리어를 만들면 마법사에게는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로움도 달래주고 심지어는 마법연구의 성공률도 높여주는 충직한 동료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까마귀를 패밀리어로 둔 마법사가 가끔 깃털손질하는 까마귀처럼 어깨로 얼굴을 닦는 버릇이 생겨도 놀라지 마시길.

아르스 마기카의 세계에는 심지어 다른 마법사와의 무혈 결투를 위한 룰도 따로 있습니다. 이른바 케어타멘인데, 마법사의 가문(헤르메스 마법계열에는 각자 다른 능력과 역할을 가진 열두 가문이 있지요)에 따라서는 스승과 결투해서 이겨야 정식 마법사가 될 수 있는 무서운 곳도 있죠. 하지만 결투는 반드시 두 마법사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니 싫은 결투를 억지로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체면이 깎이는 건 감수해야겠죠.

3. 모험은 왠 얼어죽을 모험? 난 연구해야 돼!

AM에서는 다른 게임들처럼 모든 캐릭터가 사이좋게 모험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행을 떠나는 게 해로울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중인데 열흘 넘게 실험실을 비우면 실험 성공률은 점점 떨어지죠. 바꿔 말하면 모든 플레이어가 모든 세션에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한 명이 없으면 그 캐릭터의 마법사가 한 계절 동안 연구하는 걸로 하고 미리 연구성과 다이스를 굴리게 하면 되니까요. 나머지 캐릭터들은 요정의 숲으로 고고.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모험은 (실생활에서도 그렇듯이) 꽤나 위험한 일입니다. 절벽에서 한번 잘못 떨어졌다간 꼬박 28일을 침대에 누워 지낼 수도 있죠. 치유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80일을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험이나 전투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아, 전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평생 실험실에나 박혀 지내는 마법사는 순 골샌님일 것 같다고요? 그런 말씀은 마법의 화마가 적진을 초토화시킨 다음에나 하시길. 아르스 마기카의 마법사 역시 전투에서 휘황한 능력을 보입니다. 다만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실험실에서의 많은 시간과 자신을 삶을 바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성취는 더욱 값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 보고 무서워하거나 신기해하는 그 마법은 인간적인 삶을 희생하고 그 자리에 수많은 마법노트와 실험물을 남긴 그들, 자손도 없고 친구도 없지만 늦은 밤까지 실험실에 불을 밝히며 탐구욕을 불사른 마법사들이 살아간 흔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