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산업과 RPG 취미

사업으로서 RPG는 별로 판매량이나 수익성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주:TRPG 혹은 펜&페이퍼 RPG를 가리키는 것이며, CRPG나 MMORPG 얘기는 아닙니다) 원체 소수 취미인 데다가 원한다면 돈을 별로 안 들이고도 즐길 수 있는지라,(주:’어둠의 경로’ 따위 얘기가 아니라 좋은 무료 규칙도 많고, 규칙책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오랫동안 플레이할 수 있죠.) 돈이 많이 되기는 구조적으로 좀 어렵죠. 소비자와 공급자층의 분리가 적은 것도 다르게 말하면 좋아서 하는 일이지 돈이 되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전세계 최대 규모의 RPG 회사인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 (Wizards of the Coast)마저도 수입의 규모는 모회사인 완구 회사 하스브로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겁스(GURPS)로 잘 알려진 SJ사나 7번째 바다 (7th Sea), 오륜전설 (Legend of the Five Rings) 등을 출간한 AEG도 수익이 많이 나는 쪽은 RPG 라인이 아닌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이라고 들었습니다.(주:정확한 수치를 조사하지는 못했으므로 거의 풍문에 가까운 얘기긴 합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지적 주시기 바랍니다.)

RPG 산업의 이러한 현실 때문에 RPG의 미래는 어둡다는 얘기가 습관적으로 나옵니다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제 생각과 경험상 산업으로서의 RPG와 취미로서의 RPG는 별개이며, 전자의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후자의 전망까지 어둡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위에서 말했듯 RPG는 별로 돈이 들지 않는 놀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RPG 산업에는 돈이 안 들어가고 있어도 RPG 취미는 활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저만 해도 지금 1년 가까이 하고 있는 캠페인에서 실제 RPG 상품에 들인 돈은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규칙책에 들어간 2만원이 전부인 등, 적어도 제 경험상 RPG라는 취미의 활기와 RPG 산업의 건강은 큰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상품이 꾸준하게 나오는 원동력으로 RPG 산업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해도 독자적 소규모 출판이 대형 출판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PDF 판매, 주문이 들어올 때만 인쇄하는 POD (Print on Demand) 책 등 신기술을 이용한 저가 출판 방식의 활용이 늘어나는 추세니까요.

이러한 추세는 한편으로는 수익이 낮아도 비용을 낮추고 규모를 줄이면서 RPG의 상업적 창작은 존속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업이 아닌 부업 내지는 취미로서 RPG 창작의 미래를 시사해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지금도 RPG에 전업으로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도 하고요.

결국 RPG 취미를 활성화시키는 것과 RPG가 고수입 산업이 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후자는 별로 현실적이지 않기도 하고요. 그보다는 소규모 출판이나 비상업적 창작 활성화 등 RPG 취미에 활기를 불어넣는 방안을 생각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큰 돈이 되는 산업의 뒷받침이 없어도 이 취미는 얼마든지 존속할 수 있고, 또 재밌을 수 있으니까요.

11 thoughts on “RPG 산업과 RPG 취미

  1. 소년H

    SJG에 관해선 무한한 흑역사 이야기가 꽤 떠돌고 있죠 (…)

    뭐 RPG로 돈 벌기 힘든 또 다른 면으로 역시, 개인이 하나씩 사는 경우보다 룰북이 팀당 하나인 경우가 더 많기도 하고 (한국에선 그나마 그것도 적지만 (…))

    단지, 디테일한 데이터화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 아무래도 개발비가 많이 들 수 밖에 없는데 이건 RPG에서 나왔다는 CRPG나 이쪽 기반에서 역수입하는 방법도 있긴 할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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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키

    Xenosia// 그..그런 어려운! (..)

    소년H// 예, 개발비가 많이 드는 상품을 만들려면 창의적인 생각이 요구되겠죠. 개발자가 떠안을 수도 있고,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처럼 다수의 노력을 사용하는 공개 개발 방식을 택할 수도 있는 등 방법은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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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dowan

    역시 소비자로서는 퀄리티를 따지는 수밖에… 산업이 잘 되야 더 안정적인 퀄리티가 나오니까요.
    타 산업으로 먹고살면서도 RPG계를 유지해주는, 아직은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은 대기업(대기업인가?) 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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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nefos

    아무리 취미라지만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없습니다. 취미에서 중장기적인 봉사와 노력은 3가지에서만 일어납니다. ①우리끼리 즐기기 위한 과정, ②타인을 ‘우리’로 만드는 과정, ③’내’가 집단에 소속하려는 경우.
    물론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없는 이를 위해 양질의 컨텐츠(창작룰, 강좌, 읽을만한 리플레이 등)를 만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욕구에 의한 생산활동 이후에 욕구가 사라지거나 사정등으로 완결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취미이므로 꼭 완결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받지도 못하고 말이죠.
    예를 들어 컨텐츠를 생산하는데 10시간이 필요하다고 합시다. 이건 적어도 취미이므로 내가 흥미가 동하는 경우는 무보수로 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가 중단된 경우 3~10만원의 예상소득이 생기지 않는다면 완성할리 없습니다. 아마 첫날은 3시간, 둘째날은 2시간 셋째날은 1시간 해서 6시간 하고서는 중간에 때려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미완의 프로젝트가 매우 많을거 같은데;;)

    위키나 오픈소스로 다뤄야 봉사로 하더라도 누군가 계속 이어서 뭔가 만들어지지 않을가 하네요.
    하지만 월드세팅을 만드는 중 바빠서 완성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때 ‘다른 사람이 이어서 만들다가 나중에 보니 내 기획의도도 없어지고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월드 탄생’ vs ‘그냥 방치하고 언젠가 내가 만들고 만다’…후자가 압도적이지 않을까요!?…로키님이야 나름 전자쪽이신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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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로키

    Rrr…// 많은 RPG 관련 사이트를 비롯해 로키의 로카세나에서도 파는데 잘 안 팔려요 (?)

    ddowan// 그렇다고 해서 RPG인들이 활발한 산업을 지원할 만큼 구매하는 것도 아니고 (또 억지로 구매할 필요도 없고요), 다른 걸로 돈 벌면서 RPG에 투자하는 회사들의 자비(?)에만 의존할 수도 없죠. RPG는 돈이 안 되는 만큼이나 돈이 안 드는 사업이기도 한 점이 그나마 희망적이지만요. 좀 더 다양한 상품이 나올 수 있는 소규모 부업 출판에 저는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요.

    nefos// 말씀하신 걸 보니 ‘인질’형 RPG 출판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일단 상품을 만들어놓고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든 비용이랑 일정 이윤을 회수한 다음부터는 무료로 공개하는 방식이죠. 말씀하신 일정 수익을 창출하면서도 정보의 자유로운 공개도 확보한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취미 업계의 현실은 이렇듯 다양한 창의적인 발상을 유도하죠.

    말씀하신 유형 중에서 저는 단연코 ‘우리끼리 즐기려고’ 중장기적 봉사와 노력을 하는 유형인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되도록 모든 걸 공개하니까 ‘타인을 우리로’ 만드는 효과도 부차적으로 있기를 바라지만요.

    말씀하신 대로 무료 창작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지만, 애당초 취미 창작이 대세가 된 것도 RPG 산업의 침체 (라기보다는 한국에서는 거의 부재)라는 면에서 RPG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타개할 수 없다면 적응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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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Tealeaf

    “인질”형 RPG 출판의 경우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나중에 어차피 무료로 공개될 물건이라면 구매욕구가 상당히 떨어지는건 사실이니까요. 아무리 취미라지만, 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대가를 받고 싶다는 것인데 아무리 질좋은 물건이 나와도 팔리지 않는다면 창작 욕구가 확실히 떨어지니까요.

    또한 RPG를 부업으로라도 자신의 노력에 대한 결과를 받고 싶은 분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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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구매 욕구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면 일정 액수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예 비공개로 하는 비공개형 인질형 출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기금 조성 부담을 널리 분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문제는 이게 공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할 자료가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그건 맛배기를 적당히 한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죠.

      결국 모든 출판 방식에 문제와 한계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목적에 어떤 방식이 가장 적합한지, 문제는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게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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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비탈길

    RPG 산업이 싸그리 망한다고 해도, 말씀하신 바 대로 RPG라는 취미 자체는 유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RPG란 취미가 번영하기 위해서는-즉, 유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업의 도움이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현재 RPG라는 취미가 암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RPG에 대해 아는 사람 찾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과거에 우리나라에 RPG 붐이 일었던 것은 개인 개인의 취미가 모여서 성장한 것이라기 보다는 RPG 산업체(대표적으로.. 잡지회사일까요.^^;)에 의한 광고 효과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RPG 산업이 침체된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국가 대표 축구 경기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알피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것은 보다 자본력이 강력한 집단의 힘을 반드시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말씀하신 좋은 무료 룰북들 역시, 알피쥐가 번영하는 상태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음.. 평소에 생각하던 내용이라 덧글을 달았지만.. 지금 약간의 음주상태라, 조금 횡설수설 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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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취미가 번영하는 모습이 어떤가에 달렸겠죠. RPG가 인터넷 중심의 마이너한 취미인 건 어떻게 보면 필연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스포츠처럼 커다란 산업이 되는 게 번영의 모습이라면 RPG의 번영은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반면 제가 생각하는 RPG 취미의 성공은 플레이할 규칙이 있고, 같이 플레이할 사람이 있고, 재미있는 플레이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건 말씀대로 기업 단위의 RPG 산업이 없어도 가능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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