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지난번 글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 수집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이 다음과 같이 많이 때문이지요.
1. 타인의 관점과 정보를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현실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지요. 누구든지 감각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걸러내고 해석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얘기입니다. 그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실을, 즉 감각정보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감각정보의 홍수에 묻혀서 살 뿐 사람으로서, 아니 동물로서도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 때문에 입장에 따라 같은 현실에 대한 결론도 크게 다르다는 것도 역시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같은 경기를 보면서 A팀 팬에게는 심판 오심인 것이 B팀 팬이 보기에는 심판의 명판정이고 B팀의 나이스 플레이입니다. A팀 팬도, B팀 팬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둘다 옳을 수 있습니다. A팀 팬과 B팀 팬은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관점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확대하고,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지극히 당연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쳤을 테니까요. 그들이 각각 선택한 정보 내에서는 아마 그들의 해석은 각자 옳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A팀과 B팀 팬이 서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면 당연히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A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선을 넘지도 않았었는데! 그 심판은 경기 내내 A팀에 불리하게 판정했어!) 내에서 B팀 팬의 결론을 도출한다면 어불성설일 테고, 마찬가지로 B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휘두른 순간 공이 확 휘어져서 헛스윙했지! 그날 내내 A팀 경기는 엉망이었어!) 내에서 A팀 팬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요.
스포츠 팬끼리 적당히 싸우는 건 스포츠의 재미 중 하나기도 합니다만, 인간관계를 해칠 수도 있는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럴 때에는 상대가 왜 나하고는 의견이 다른지, 즉 같은 상황에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했기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들어보기 전에는 의견 차이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상대는 다른 정보를 가지고 다른 해석을 해서 당연히 결론이 다른 것인데, 그 생각을 (원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뿐만 아니라 입장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자체도 다릅니다. 플레이에 매번 늦는 참가자는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갔다가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동생과 싸워서 컴퓨터를 쟁취해낸 후에야 플레이를 위해 접속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정보는 공유하기 전에는 그 참가자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같은 현실을 어떻게 걸러내고 해석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아는지는 제대로 대화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필요한 정보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자신이 취사선택한 정보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만 고려하는 반쪽 대화가 될 테니까요. 결국 공감대 없이 서로 목소리만 높일 뿐, 진정 주고받는 소통은 없기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관점과 정보를 알아내고 자신의 관점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2. 타인의 의도를 모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의도를 타인이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합니다. 예를 들어 참가자가 플레이에 늦어서 플레이에 곤란이 생겼다면 참가자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고 했다, 혹은 곤란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진행자가 일방통행식 진행을 해서 재미없어졌다면 진행자는 내 재미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도가 나쁜 사람은 곧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런 상종 못할 게으르고 무배려한 인간, 저런 천하의 독재자 하는 식으로 우리의 삶에는 악역이 꽤 많지요. 타인을 나쁜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내기는 어려워지고, 감정이 쌓이거나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타인의 의도를 모릅니다.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할 뿐이지요. 자꾸 늦는 참가자는 자기 때문에 시간을 바꾸자고 하기가 미안해서 시간을 맞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일방통행식 진행자는 참가자의 적극성이 부족해서 자꾸 진행이 표류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이끄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행동의 의도와 결과는 서로 별개의 개념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행동의 결과가 의도와 어긋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로부터 추정한 의도는 그저 추정일 뿐,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추정한 의도로 타인을 마음 속에서 악역으로 만들고 왜 당신은 무배려하고 무책임하느냐, 왜 마음대로 하려고만 하느냐 하고 윽박지르는 것도 비생산적이지요.
따라서 타인의 의도를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추정은 그저 추리, 혹은 가설로 남겨놓고 타인의 진짜 의도를 알아내는 편이 더 정확하고, 감정적 소모가 적습니다. A님이 의도적으로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러이러한 점이 힘든데, 이유를 알 수 있겠는지, 혹은 B님의 진행 속에서 참가자는 할일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계신지 하는 식의 대화는 한결 얘기할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3. 타인에 대한 내 행동의 결과를 모른다
타인의 행동의 결과에서 타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의도에 맞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곤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독재자가 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참가자들은 내 진행을 독재로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면 그것은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지, 내가 독재적 진행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참가자가 할일이 없다고 그러는지 말이죠. 결국 자신의 좋은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며 역시 머릿속의 악역을 늘리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의도와 행동은 별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행동의 결과가 반드시 좋지는 않으며,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의도란 복잡해서 자신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좋은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비생산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다툼에 빠지기 쉽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의도보다는 행동의 결과이며, 대화의 목적은 의도가 좋았네 나빴네 다투는 것보다는 행동의 실제적 결과에서 생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참가자가 남을 배려하려고 시간을 바꾸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고 시간을 맞추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자꾸 늦는다면 플레이가 곤란해지며, 진행자가 진행이 표류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참가자가 낄 데가 없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타인의 의도를 혼자 억측하지 않고, 또 자신의 의도에서 결과를 유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도는 논의할 만하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보다는 결과입니다. 감정이 쌓이지 않게 생산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의도에 대한 토론은 분명 가치가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결국 의도와 결과는 별개이니까요.
4. 자신이 한 원인 제공을 모른다
위 1번에서 다루었듯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관점과 결론이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타인의 원인 제공을 크게 보고 자신의 원인 제공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 하는 시비가 흔히 붙는데, 이것이 무익하다는 것은 이미 이전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문제를 정말 해결하려고 한다면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논의는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입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과는 다른 개념으로, 상황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정죄 없이 따져보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번 늦는 참가자가 현실적인 시간으로 플레이 약속을 잡지 않은 점, 진행자가 참가자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진행하는 점은 그들이 상황에 한 기여이지만, 다른 참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상황에 기여했을 수 있습니다. 플레이 시간을 다시 잡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거나, 진행자에게 충분히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이 그 예이지요.
원인 제공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둘다 잘못했다는 식의 얘기와는 다릅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의 얘기이니까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제에 기여는 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또한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 잘못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대화의 중점을 잘잘못에 둘 것인가, 문제 해결에 둘 것인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다면 정죄보다는 원인 제공 논의가 낫다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목표라면 잘잘못과 별개로 기여도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거의 어떤 상황에서든 양측 모두, 비록 한쪽이 99%이고 다른쪽이 1%라도 기여도가 있게 마련이기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잘못이라는 결론이 나면 다른 쪽의 원인 제공은 묻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자신의 일방통행식 진행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고 행동을 고친다 하더라도, 참여를 잘 하지 않는 참가자의 원인 제공에 대응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를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를 파악해야 하는데, 타인의 원인 제공은 비교적 알기 쉽지만 자신의 원인 제공은 상대적으로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모두 알아야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논한 바와 같죠. 그래서 자신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아내고 타인이 어떻게 기여했는지 (정죄 없이) 알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석입니다.
5.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라
오랜 옛날에 어느 위대한 성현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탐구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크고작은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대화를 통해서 알아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추정과 억측을 기반으로 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 1~4번에서 다루었듯 타인의 개입이 있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정보의 반쪽밖에 모릅니다. 그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한 혼자 추정할 뿐이지요. 모르는 상태에서 내리는 진단과 해결은 불완전하고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쉽습니다. 결국 혼자 납득할 뿐 상대의 협력을 끌어내기는 어렵지요. 그리고 그 추정이 실제와 맞아떨어졌다 하더라도 먼저 대화로 풀어내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없이는 옳은 말도 상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확실성의 관점으로 대화에 접근하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우며,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모르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대화를 하면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의 공감과 협력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 수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첩보전을 벌이거나 독심술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상대의 관점과 의도, 자기 행동의 결과와 자신의 기여도를 알아내는 방법은 대화이며, 그 중에서도 발언보다는 경청이겠지요.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경청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thoughts on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3: 우리가 모르는 것들

  1. 크리

    우리가 아는 건 현실이 아니라는 부분을 보고 잠깐동안 기절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고려하면서 세계가 제공하는 정보를 취하지는 않지요. ‘그 방면’으로 부던히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기절한 동안 발견할 수 있어서 기분 좋게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드시 틀릴 추측’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합니다. 상대방이 표현하는 정보조차도 그것의 진위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을 노릇입니다. 동물도 거짓말을 하는데 사람이라고 그걸 못 하지는 않을테니까요. 물론 이런 의심 속에서 사고하는건 피곤합니다(…). 개인은 타인을 모르고 타인 역시 개인을 모릅니다. 때로는 개인이 자신을 믿지 못할 때도 있고요. 반드시 틀릴 추측만 계속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많은 단서가 제공된 추리가 좀 더 튼튼해 진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모르는 내 상황과 나는 모르는 상대방의 상황을 공유하다보면 그 단서가 늘어갑니다. (진범도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삿대질을 할 손가락도 준비합시다.)
    마지막 문단에서 123대화법이 떠오르도록 유도 하셨는데, 1분 말하고 2분 듣고 3분 공감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양쪽이 서로 일치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는 정보를 기반으로 대화를 할 때에는 상대방이 그 정보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그럼 그녀에게 오리온 별자리에 대해서 알려주면서 몰래 손을 잡아볼래요’, ‘이 세계엔 오리온좌가 없어요’, ‘네? 여기 병렬우주의 지구 아니예요?’). 우리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만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역설적으로 멋있습니다. ;p
    실제로, 그것을 의심하는 것과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에도 큰 가치가 있는 것이죠. 몰라야만 알 수 있을테니까요. (죽여야 살릴 수 있습니다. 네, 경제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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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푸핫.. 확실히, ‘내가 인식하는 건 현실에 대한 나의 선택적 인식과 그 인식에 대한 해석일 뿐 현실이 아니야’ 하고 늘 생각하고 있다면 생활에 꽤나 지장이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이 인식과 해석이 현실이라는 허구는 평소에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타인과 오해가 생기고 감정이 쌓이는 상황에는 한 번쯤 그 허구를 걷어볼 필요가 있겠지요. 평소에는 그저 마음 한 구석에 염두에 두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나의 진실은 주관적이라는 것을.

      말씀대로 결국 진실을 추적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필요한 만큼의 진실은 있는 것 같아요. 서로 모순이 없고 동의는 하지 않아도 납득은 할 수 있는 수위까지 정보를 모으면 그때쯤에는 ‘범인–아니 원인–은 바로 너–아니, 이거–다!’ (처억) 신공을 벌일 수 있겠죠.

      그래서 완벽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실용적인 목표라고 봐요. 확실성에서 호기심으로, “감히 날 무시하다니!” (불끈)에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궁금)으로 이전하는 것만으로도 대화와 인간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 같고요.

      123 대화법은 처음 들어보는데, 한 번 봐야겠네요. 언제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시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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