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심판에 대한 짧은 서사시, 포도원의 개들

D. 빈센트 베이커가 만든 포도원의 개들(Dogs in the Vineyard)의 기본 배경은 초기 모르몬 교의 역사에 일부 기반한 가상의 미국 서부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배경에 쉽게 차용할 수 있는 것이, 이 규칙책의 기본 내용은 모르몬교나 서부극에 대한 것이 아닌 죄악과 도덕적 판단, 그리고 죄인과 그 심판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최대의 묘미는 ‘참가자의 선택이 곧 법이며 진리’라는 데에 있습니다. 분명히 지켜야 할 신념은 있지만, 그것을 실제 어떻게 적용하는 길이 가장 잘 지키는 길인지는 불확실하기 쉽습니다. 두 여성이 부부로 함께 살고 있다면 이는 신의 뜻을 어긴 죄일까요, 아니면 축복받을 사랑일까요? 진행자는 절대 어느 쪽이 옳은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RPG가 가진 게임성의 근본이 되는 ‘선택’이라는 요소를 극도로 살린다는 점에서 이 게임에 대한 호평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녹록치 않은 주제를 다루는 포도원의 개들은 판정 규칙부터 매우 독특해서, 포커식으로 레이즈(Raise)와 시(See)의 연속으로 상대가 거는 주사위의 합계만큼 자신의 주사위를 소모하는 체계로 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거는 주사위를 두 개의 주사위로 막지 못하고 세 개 이상으로 막을 경우 부상을 입고, 상대의 주사위 합계를 더이상 맞출 수 없게 되면 집니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고 했던가요. 주인공은 부상을 입어야 성장 또한 할 수 있다는 점도 이 규칙의 특징입니다. 이 게임에서는 별 깊이없는 인물은 판정 성공률도 높고 부상도 적지만 대신 성장 또한 늦어집니다. 반면 상처가 많고 복잡한 인물은 부서지고 깨지는만큼 더욱 빨리 성장하고, 깊이 또한 깊어진다는 점에 이 규칙의 묘미가 있습니다. 흉터 하나하나에 사연이 있는 인물, 낡은 총과 그을린 외투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그런 인물이 되어가는 것이 ‘포도원의 개들’에서의 성장입니다. (물론 그만큼 강해지는 것도 틀림없고요.)

사실 강한 인물과 약한 인물에 큰 차이를 둘 것도 없는 것이, 제작 규칙상 주인공은 주변 인물들에게 무조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공의 댓가입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스스로 견딜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요. ‘상승’이라는 규칙 때문에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새로운 대립 수단을 끌어들임으로써 주사위를 더 얻습니다. 말로 안되면 주먹을 쓰고, 주먹으로도 안되면 총을 뽑는 식으로 점점 갈등의 수위를 높여가게 됩니다. 문제는 정말 그러면서까지 이기고 싶은지 하는 것. 어떤 갈등이든 그 극단까지 끌고 가면 분명히 이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심판,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주인공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늘려갑니다.

이러한 심판과 선택이 이루어지는 극적 공간은 주인공들이 돌아다니는 마을들로, 마을 제작 규칙도 이 책의 별미입니다.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깽판칠 수 있는 극적 상황과 인물들을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오만에서 죄악, 거짓 신앙 등으로 이어지는 죄의 진행은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종교색을 띨 필요도 없습니다. 배경에 따라 주인공들은 제다이, 성기사, 경찰, 범죄조직원 등 어떤 신분도 될 수 있고, 그들이 지키는 신념도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지키려는 신념이 있고 집행할 권위가 있는 한 어떤 배경이든 가능한 것이 포도원의 개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진행자에 대한 조언도 상당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또다른 장점. 제가 본 진행자 조언 중 가히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참가자의 선택을 완전히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시나리오를 절대 짜지 말라는 것도 많은 진행자에게 참 반가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주인공으로 인해 달라질 수 있는 극적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부터는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반응만 하라는 조언은 이후의 제 RPG 진행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지금까지 한 두어번 돌려보기는 했지만 거의 판정 규칙만 따왔을 뿐, 근본적으로는 그 특징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이 규칙을 제대로 활용해서 장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싶군요   . 죄와 심판이라는 무겁고도 흥미로운 주제, 그리고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짧고 격렬한 서사시를…

5 thoughts on “죄와 심판에 대한 짧은 서사시, 포도원의 개들

  1. ddowan

    성공의 댓가라.
    댓가를 치루면 이길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만 할 거 같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치룰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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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사람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너무 강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오히려 그 강함은 참가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수단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일반적인 하이파워 게임과는 다른 게, 주인공들은 밑도 끝도 없이 센 것은 아니니까요. 갈등 수단을 많이 끌어들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이 판정 규칙의 극적인 면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면서까지 이길 각오가 되어 있는지, 친구의 얼굴에 총을 들이댈만큼 중대한 일인지는 참가자의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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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사히라

    마지막 예시가 왠지 멋진데요.
    즉,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면서까지 이길 각오가 되어 있는지, 친구의 얼굴에 총을 들이댈만큼 중대한 일인지는 참가자의 판단입니다.

    이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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