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이론적 분석

자료 중심 배경과 분위기 중심 배경

이전에 Story Games 게시판에서 보았던 개념인데, 이번에 승한님의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Transhuman Space) 번역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나서 제가 이해한 대로 적어봅니다.

자료 중심 배경은 바로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같은 것으로, 대개의 전통적 RPG 규칙에 사용하는 설정은 자료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습은 다소간에 이미 잡혀 있으며, 구체적인 자료와 지명, 인물 설정 등이 추가 설정과 전개의 실마리가 됩니다. 자료 중심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꽤 많은 설정 자료를 (특히 진행자가) 읽고 익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분위기 중심 배경은 반면 자료가 비교적 적습니다. 책에 나오는 자료만으로는 완전한 캠페인 배경을 채워넣을 수 없을 정도이지요. 대신 창작과 즉흥의 기반이 될 만한 함의와 암시를 통해 설정에 대한 이해와 기대치를 조율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많은 인디 RPG에서 볼 수 있으며, 설정 분량 자체가 적고 구체적인 지명과 집단보다는 광범위의 상황 설정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설정란 앞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번역은 로키가 대충대충)

다른 RPG를 많이 진행해 봤다면 진행자이든, 제작자이든 한 사람의 상상에 맞추어 일관성 있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익숙할 것입니다. 개들은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게 만든 게임이 아닙니다. 개들을 플레이할 때면 각 참가자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모아서 공통 현실로 만듦으로써 일관된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분위기 중심 설정의 기본 철학입니다. 이 세계는 대충 이런 곳이니 구체적인 부분은 스스로 채워가라. 거기서부터 생기는 해석 차이는 문제나 병리가 아니며, 오히려 공동 상상 공간을 짓는 재료라고 말이죠. 인디 RPG에 분위기 중심 설정이 많이 보이는 건 한편으로는 예산과 시간이 별로 없는 개인 제작자라는 배경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들 규칙 자체의 즉흥적이고 협동적인 성격도 작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자료 분량은 적은 편을 선호하기는 합니다. 구체적인 자료가 많으면 일단 읽고 소화하는 시간이 들고, 저는 기억력이 별로인 데다 준비 많이 하는 걸 싫어하고 스타일에 즉흥성이 강해서 좀 하다 보면 어느새 원래 설정과는 딴세상이 돼버리거든요.

그래서 자료가 많은 설정이라도 즉흥의 발판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저는 또 자료가 많으면 얽매이는지라 대범하게
무시해버리는 걸 또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자..잠깐. 이 집단이 어디로 도망쳤었지? 지금 여기 나타나면 안 되는 거
아냐?!” (뒤적뒤적)) 그런 이유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즉흥을 뒷받침하는 게 목적인 분위기 중심 설정이 마음이
편하더군요.

제 취향 얘기에서 벗어나서 남의 취향 얘기도 하자면(?) 이런 쪽의 선호도는 또 놀이를 하는 목적, 즉 놀이를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량의 구체적인 자료를 제일 선호할 듯한 취향은 아무래도 모사주의
(Simulationism) 쪽? 가상 세계의 탐험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세계의 자세한 내적 논리와 일관성이라는 기반이 필요할
테니까요.

물론 자료 중심 배경과 분위기 중심 배경은 본질적으로 다르거나 서로 배척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접근 차이는 있지만 자료 중심 배경이 제공하는 자료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창작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며, 분위기 중심 배경도 창작과 즉흥의 방향을 제공하고 이미지를 만들 정도의 자료는 제공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설정이 어느 분류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설정 자료를 제공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이겠죠. 목적이 플레이를 손쉽게 시작하게 돕는 것이든, 치밀한 배경을 구성해
그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든, 창작의 기반과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든, 서로 기대치와 이미지를 조율하는 것이든 그 목적에 이
정보가 꼭 필요한지 생각해가면서 하면 더욱 효과적인 설정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판정 –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이런저런 RPG 규칙을 접하다 보니 RPG 규칙에는 가상현실을 다루는 것과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민님의 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과 같은 맥락이군요, 다 써놓고 나니..(..) 그 논지를 좀 더 상세하게 제 나름 발전시켰다고 생각해 주세요 (?).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가상공간의 물리법칙과 논리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힘센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성공적으로 들어올릴 확률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같은 일을 해낼 확률보다 높다든지 하는 식이죠. 가상현실에서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성공할 만한 것은 참여자의 공감보다는 그 물리법칙을 표현하는 규칙으로 판단합니다. 장기 캠페인을 받쳐줄 만한 규칙의 분량과 범위에 대한 논의라든지, 다양한 상황을 표현하려면 규칙은 많은 게 좋다는 주장의 전제에는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D&D, 겁스 (GURPS), 7번째 바다 (7th Sea), WoD (World of Darkness) 등 제가 아는 모든 상용 규칙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퍼지 (FUDGE),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미딕 (Mythic Roleplaying),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 등 많은 인디 RPG도 마찬가지죠. 판정은 기본적으로 실력과 상황 수정치에 따른 확률을 이용하는 굴림이며, 낙상이나 익사, 폭발 등 다양한 상황을 처리하는 규칙이 있기도 합니다.

반면 위에서 예를 든 규칙책에도 가상현실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규칙도 있습니다. D20 계열이나 변형에서 볼 수 있는 액션 포인트라든지 겁스에서 추가 규칙으로 할 수 있는 CP 소모, 7번째 바다의 극주사위나 배경 규칙, WoD의 의지력 규칙, 미딕의 무작위 사건 생성 규칙, 과거의 그늘에서 특정 조건에 맞는 RP를 하면 성장하는 열쇠 규칙 등이 그 예입니다.

이들 규칙은 가상현실 속에 있는 등장인물의 실력이나 의지보다는 참여자의 극적 욕구를 반영하며, 가상현실 법칙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가상현실의 법칙에 저항하거나 서술을 조작합니다. 즉,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룬다는 면에서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규칙과는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상현실 법칙이 아닌 플레이의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을 판정의 근간으로 삼는 규칙도 더러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도전-응대식 판정, 폴라리스 (Polaris)의 서술 교섭,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의 반박 경매 규칙,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의 장면 판정 등이 그 예이지요. 서술권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진행자의 역할인 만큼 참가자에게 서술권을 많이 주는 규칙일 수록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 분배도 분산적 성격을 보입니다.

이들 규칙책에서는 물리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는 참여자 간 공감으로 해결하며, 정말로 판정이 필요한 때는 극적 방향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입니다. (참가자: ‘경비를 다 죽여요!’ 진행자: ‘경비는 다 죽습니다!’ 참가자: ‘마왕도 죽여요!’ 진행자: ‘음… 그건 판정을 해볼까요?’)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아무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달을 쏘아서 적의 머리에 떨어뜨려요’ 같은 선언도 통과합니다. 수정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면 ‘장군은 한 달음에 산을 넘어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였다’ 같은 글도 역사적 진실이 됩니다. (신화적인 분위기라면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을 중시한다면 포도원의 개들이나 안방극장 대모험 같은 규칙은 장기 캠페인을 하기에는 빈약하다거나, 상황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속의 법칙을 표현하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까요. 반면 저는 가상현실 표현보다는 극적 욕구 연출이 훨씬 우선이라 가상현실 표현 때문에 극적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잘 참지 못해서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 쪽을 선호합니다. 결국 어느 쪽이 우선이느냐, 혹은 극적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을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겠죠.

참고로 극적 욕구나 연출 얘기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마음대로 가야 성이 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나리오 중심 진행은 거의 가상현실 중심 규칙의 특권에 가깝습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규칙은 시나리오에 나올 만한 요소들을 바로 움직일 수 있으므로 누구 한 사람이 앞으로 이야기를 예상하거나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규칙을 할 때는 다른 참여자와 의견이 충돌하고 그 충돌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극적 의외성과 역동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는 부담이 적거나 없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매력적이고요.

대비해 놓기는 했지만 물론 가상현실 표현과 극적 요소의 조작은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죠. 예를 들어, 제가 얘기한 극적 욕구와 가상현실의 충돌 부분을 많은 가상현실 중심 규칙에서는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으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번 판정은 극적 욕구상 꼭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가상현실 법칙상 확률이 낮아서 극점수를 소모한다든지요. 그런 규칙은 자원 관리 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술적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심심해서 제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규칙이 RPG의 재미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기준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표현이 자신의 재미에 얼마나 중요한지,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것이 몰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 이러한 판단은 전에 적었듯 규칙의 선택, 수정, 제작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판정 스트레스와 참가자 서술권

며칠 전에 승한님과 진행자의 필요성과 서술권 분배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떠오른 생각인데, 많은 참가자가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원인이 서술권 분배 방식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RPG 역할 분배에서 진행자는 주변 세계와 조연에 대한 것을 서술하고, 참가자는 그 참가자가 맡은 주인공이 하는 언행을 서술합니다. 주인공이 하는 판정은 참가자의 서술 영역과 진행자의 서술 영역 사이에서 일어나므로 판정 규칙은 성공 여부에 따라 참가자의 서술권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살로 오크의 눈을 꿰뚫습니다.” 하는 참가자 선언과 그에 따른 판정을 생각해 보죠. 성공했을 때는 참가자의 서술이 진행자의 서술 없이도 진행자의 서술 영역인 주인공 외부에 작용하며, 참가자가 서술하는 목적인 극적, 게임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같은 극적 목적이나 오크를 쓰러뜨리는 게임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동이라는 제한적인 서술 영역에서마저 참가자의 서술을 관철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공보다 실패가 재미없어지고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게 됩니다.

물론 판정 실패가 판정 성공보다 불리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또한, 게임적 관점에서 보면 캐릭터 성장이나 전술적 판단을 통해 판정 성공률을 높이려는 노력 자체도 게임의 재미이지요. 그러나 그 점을 보존하면서도 판정 실패에도 극적 재미나 게임적 도전을 부여하면 참가자의 재미가 주사위 굴림에 의존하는 현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갈등 판정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판정에 무엇을 걸지 결정해서 성공과 실패가 둘 다 재미있도록 조절하는 것이죠. 판정에 성공하면 화살로 오크 눈을 맞추고 실패하면 헛손질로 끝이 아니라, 성공하면 휘황한 궁술을 본 오크들이 겁을 먹고 못 쫓아오고 실패하면 성난 오크들이 일제히 추적해 온다든가.

갈등 판정에서는 무엇을 걸지 않는지 하는 문제가 무엇을 거는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놀라운 궁술을 선보이는 건 같게 해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충족하되, 성공하면 오크 수장을 일격에 쓰러뜨려서 오크가 조직적인 저항을 못하게 하지만 실패하면 졸개를 쓰러뜨려서 괜히 이쪽이 숨은 위치만 들키고 오크들이 조직적으로 반격해 온다든지요.

갈등 판정의 승패에 거는 결과 결정에는 참가자가 참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가자의 극적 욕구가 진행에 직접 반영되며, 실패도 참가자에게 재미있을 가능성이 더 커지니까요. 이것은 참가자의 서술권이 전통적인 참가자의 서술 영역보다 넓어지는 결과가 되므로 가상현실의 환상은 깨지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외부 가상현실이 있다면 활을 쏘는 행동의 극적 결과를 참가자가 정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요.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재미가 중요하다면 갈등 판정의 결과는 진행자가 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진행자의 권한이 강하고 가상현실 경험을 중시하는 RPG에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실현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통해 뭔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는데 그 실현이 판정 성공에 달렸다면 재미가 확률에 의존하는 데다, 진행자에게 극적 권한이 대부분 있으니 참가자가 원하는 상황이 나오는 것도 안정적이지 않죠.

그래도 팀내 의사소통이 활발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진행자가 활발하게 반영한다면 많이 보완할 수 있는 점이니까, 게임성과 가상현실 경험을 보존이 중요하다면 진행자 중심 체제를 유지하면서 의사 소통의 활성화로 참가자의 극적 욕구 충족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가자에게 폭넓은 서술 권한을 주는 편이 참가자의 극적 욕구 실현에 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가상현실 경험보다는 극적이고 역동적인 공통 서사와 극적 욕구 실현을 중시하는 제 취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는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문제라, 목적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좋은 방법이란 없으니까요.

물론 특정 목적을 실현하는 데 어떤 방식이 적합한지는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 판정 개념 도입은 실패가 성공보다 재미없는 현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목적에는 참가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가상현실의 환상 유지라는 또 다른 목적이 중요하다면 진행자가 그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바바와 나 – 내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

2004년 12월, 처음 RPG를 시작했을 때 저는 RPG라는 취미가 어떤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처음 찾은 것이 존 킴 (영문)의 글, 그리고 제가 처음 가입한 RPG 사이트였던 다이스&챗 강좌/토의 란에 있는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였습니다.

바바의 글은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것 같고, 저도 그의 논지에 모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링 강좌를 비롯한 그의 글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제가 RPG를 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재해석이나 비판도 들어갔지만요.

그래서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같이 토론해볼 수 있게 제가 바바 히데카즈의 글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RPG는 게임이다 (+ α)

아마도 제일 논란이 큰 대목인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적습니다. 바바 히데카즈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RPG는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으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수준 향상을 할 수가 없으므로 RPG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발전도 없으니까 게임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는 것이 저의 이해입니다.

즉, ‘RPG는 게임으로밖에 할 수 없으므로 게임이다’라기보다는 ‘RPG는 게임으로 해야 질리지 않고 오래 하므로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논해야 한다’는 것이 바바 히데카즈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규범적인 논의라기보다는 논리적 범주의 논의이기는 했지만 RPG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오는 게임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요지로 글을 쓴 적도 있죠. 특히 규칙하고 관련해서 플레이 내용상 중심적인 부분을 규칙의, 즉 게임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그에 따르는 효과를 활용하면 더욱 즐거운 플레이가 되니까요.

그러나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은 옳긴 옳되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RPG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게임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것은 바바가 주장하는 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RPG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것이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게임이 아니어도 RPG에서 방법론을 고려하면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주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서사, 서술, 혹은 극(劇)입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첫 번째 이유는 RPG에는 게임적 요소 외에도 극적 요소가 있어서입니다. 이것은 바바가 혐오해 마지않는, 방법론이나 발전이 없는 규칙 무시성 덩실덩실 RPG뿐 아니라 계속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RPG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RPG가 게임이라는 것만으로는 RPG를 논하기에 불완전하다고 봅니다.

바바가 RPG의 극적 요소를 논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 배경이 있기는 합니다. 체계도, 방법론도, 규칙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재밌으면 그만이야’ 식의 시장 전략이 일본 RPG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 바바가 얼마나 이를 가는지 보면 이해할 수 있죠.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 자체는 맞지만, 어떻게 하면 재밌는데?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 방법론이 부재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바가 글을 썼던 특수한 배경일 뿐이지 RPG 에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도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RPG의 게임성에 충실하다 보면 극적 서술은 저절로 나오니까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극을 돕는 도구로써 규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저도 규칙이 서사와 따로 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사를 뒷받침하는 플레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도구성 참조.)

그러나 저처럼 규칙과 서사의 관계를 밀접하게 본다 해도 규칙과 게임성은 서사를 도울 뿐이지 서사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극적 감각이나 집단적 서술의 흐름에는 게임성과는 다른 방법론과 발전 방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능력치를 서술해서 판정에 추가로 주사위를 얻는 것은 게임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순간에 어떤 능력치를 어떤 식으로 서술하면 재미있을지는 극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쪽을 잘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쪽도 잘한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술에도 방법론과 발전이 있다는 점은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와 바로 이어집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는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에서도 수준 향상을 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바바의 주장에는 규범적인 데가 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게임이 아니면 수준 향상을 논할 수 없고, 수준 향상이 없으면 RPG계에 발전이 없으므로 게임 아닌 RPG는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러나 게임이 아닌 극적 영역에도 분명 방법론을 세우고 수준 향상을 꾀할 수 있습니다. RPG와 영화나 소설의 기법을 접목한다든지, 즉흥극과 RPG를 연계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시도, RPG 특유의 집단적 서술을 다루는 이론과 방법론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바는 RPG가 게임이 아니라면 연기 지도를 받을 수도 없지 않느냐며 발전의 여지를 부인하지만, 실은 게임이 아닌 영역에서도 발전을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있으며 계속해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RPG에 게임이 아닌 영역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RPG계에 해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이 아니면 발전도 없다는 전제야말로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보고요.

2. RPG를 정말 즐기려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바바가 쓰는 모든 글의 진짜 핵심이며, RPG는 게임이며 게임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이에 잘못된, 정확히는 불완전한 논리 단계가 들어가서 RPG는 게임이라는 결론에도 불완전한 데가 생겼다는 점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RPG를 질리지 않고 계속 즐기려면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흠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라면 RPG에서 계속 높은 수준을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놀이를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제 생각에 RPG의 고유한 재미는 극과 게임성, 사회성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이중 어느 한두 가지에서 RPG보다 우월한 오락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준 높은 극적 재미만 생각한다면 책이나 영화가 나을 수도 있고, 게임성만을 생각한다면 CRPG나 체스가 나을 수도 있겠죠. 함께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냥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서 높은 자유도를 추구할 때에만 RPG를 하는 진짜 의미가 나오면서 다른 활동에 대한 비교우위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의 요소를 의미있게 결합하려고 하면서 발전의 필요성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제가 RPG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강박적으로 글을 쓰니까 바바 히데카즈의 영향입니다. 발전을 추구하면서 RPG를 정말 재미있게 즐기려면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400편을 넘어가는 글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어떻게 하면 더 재밌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답입니다.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최종 결론은 없지만, 그 모색 자체가 즐거움이기도 하죠.

3. 규칙을 많이 접해라

또 하나 많이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면 규칙을 여러 가지 접해보라는 충고였습니다. 당시에는 갓 시작했던 차라 D&D 클래식과 AD&D 정도밖에 몰랐는데, 그 얘기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다양한 RPG를 읽고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상한 규칙만 합니 어떤 규칙이 어떤 용도에 적합한지, 끌어올 수 있는 시도나 발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 취향에 맞는 규칙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익혀갔고 플레이도 그만큼 풍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4. 규칙은 중요하다

바바 히데카즈의 파워 플레이와 론 에드워즈의 System Does Matter (영문)에 특히 영향을 받아 제 나름 생각해본 것이 규칙의 도구성이니 규칙의 효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규칙의 중요성을 정리하자면 규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경향성을 형성하기는 하며, 이러한 효과가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제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들입니다. 이해한 바에는 변형도 있고 가미도 있지만, 결국 핵심은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실험,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RPG는 그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한 놀이이며, 그런 끝없는 새로움이 제게는 RPG의 진짜 재미이니까요.

규칙은 도구다

세션 게시판을 검색하다가 천승민님의 1년 전 글 룰의 본분을 우연히 보고 쓰는 답글입니다.  원문이 옛날 글이라서 승민님의 현재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조심스럽지만, 예전에 RPG에서 규칙의 영역이라는 글에서 한 토론과 연관성이 보이고 규칙의 영역을 더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승민님의 블로그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에 나름 반론이라면 반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쪽에 엮습니다. (황무지에 업데이트를 보고 싶어서 그런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정합니다 (?))

규칙의 도구성

기본적으로 저는 규칙, 혹은 룰은 플레이를 돕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승민님 글에 달린 덧글 중 신승백님이 말씀하시는 지향성의 문제죠. 철저하게 전술적이고 수치화된 워게임식 전투 중심이 원하는 플레이의 형태라면 D&D 3.5는 더없이 좋은 규칙, 즉 도구입니다. 반면 인물의 배경과 인간관계, 감정 등이 원하는 플레이의 중심이라면 승민님과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이유로 규칙과 서사는 두 마리 토끼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후자와 같은 플레이를 D&D 3.5 규칙을 사용해서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할 수 있고, 그런 훌륭한 서사적 플레이도 실제로 많이 나와있죠. 하지만, 규칙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려고 할 때 (피트와 클래스, 수치 등) 플레이의 중요 사항 (망국의 엘프 왕자)에서 주의가 분산된다면 그 분산을 극복하려고 소모하는 시간과 에너지는 효율 면에서는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규칙의 여백

신승백님께서 말씀하신 AD&D에서 나타난 현상도 꽤 일반적입니다. 애매모호한 부분, 즉 규칙이 허술하거나 다루지 않는 부분에서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 말이죠. 저도 WoD 계열 규칙에 대해 생각이 같은데, 사실상 WoD가 정말로 지향하는 플레이는 바로 이 애매모호한 부분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거든요.

제가 그나마 조금 아는 뱀파이어를 예로 들면, 뱀파이어는 정치적 플레이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규칙에서 정치물을 지원하는 지향성은 별로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반 기능 판정과 동료, 연줄 등 몇 가지 장점은 있지만 정치적 구조라든지 인간관계 그 자체를 다루는 규칙은 없는 걸로 알거든요. 결국 정말로 정치적인 플레이는 규칙과 별로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진행자가 재량에 따라 상황을 만들고, 참가자가 그 속에서 필요에 따라 기능 판정을 하기도 하고 제안을 하기도 하지만 규칙은 정치적 상황의 내용은 다루지 않죠.

규칙을 타는 플레이

이처럼 규칙이 비는 부분에서, 말하자면 ‘규칙을 피하며’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D&D 3.5가 수치화된 전술적 전투를 재미있게 지원하듯, 극적이고 서사적인 캠페인이라든지 미묘한 연애 심리, 비정한 정치, 가슴 아픈 비극 등을 직접 규칙의 내용으로 다루는 규칙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규칙을 피하는 대신 규칙의 흐름을 타고 플레이하는 것이죠. 규칙과 플레이 스타일이 두 마리 토끼가 아닌 한 마리 토끼, 아니면 최소한 한 방향으로 나란히 달려가는 두 마리 토끼가 되는… 이 대목이 위의 ‘규칙의 영역’ 글에서 승민님과 토론했던 부분, 즉 어떤 부분이 규칙의 영역에 적합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부분과도 닿는 것 같습니다.

규칙과 서사가 두 마리 토끼가 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묻는다면 뭐, 재미가 있다면 딱히 문제는 없다는 것이 1차적인 대답입니다. 예전에 승한님이 쓰신 RPG의 전제에 대한 답글에서 성일님도 말씀하셨듯, RPG는 자신이 재미있는 것만한 게 없죠. 다만, 플레이의 진짜 지향점을 규칙의 여백에서 다루는 방식은 개별 취향을 벗어나 순수히 효용적인 분석을 할 때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위에 링크한 규칙의 영역 글 본문에서 다룬 내용과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규칙의 영역’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여기서도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뱀파이어 예시를 확장해 보죠. 뱀파이어 규칙에 몽테뉴 궁정음모 규칙처럼 폐쇄된 사회 (예를 들어 한 도시의 혈족 사회) 내에서 복잡하게 얽힌 부탁과 협박, 비밀 관계를 다루는 규칙을 넣는다고 가정해 보지요. 여기서 궁정음모 규칙이 그 목적에 비추어 얼마나 완성도 높은 규칙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좀 있지만, 어쨌든 뱀파이어의 지향이라고 하는 정치를 직접 다루는 규칙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논의를 진행합니다.

규칙의 영역

규칙의 영역을 다룬 이전 글에서는 어떤 내용이 규칙의 영역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효과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영역 내에서 하는 행동에 일정한 경향성을 형성한다는 점, 두 번째는 참가자가 상당 부분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형성력을 갖는 영역이 된다는 점. (첫 번째 효과는 원문에서는 ‘포상’이라는 말을 썼었고 승민님은 진행자의 일방적인 포상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신 것 같은데, 저는 진행자의 포상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규칙 자체의 포상, 즉 규칙상 유리한 방향으로 참가자 행동이 형성되는 경향성이 생긴다는 얘기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경향성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사용하겠습니다.) 뱀파이어 규칙에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하면 이 두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차례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행동의 경향성. 어떤 규칙이 있으면 참가자는 그 규칙 속에서 가능하면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1차적 반응이고, 이것이 규칙이 형성하는 경향성입니다. 이 경향성은 물론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규칙상으로 불리하지만 인물 설정에는 어울리는 선택을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선택 관계여야 할까요? 규칙상 유리한 것이 곧 설정에 어울린다면, 그리고 플레이 스타일에 어울린다면 ‘이기려는’ 본능을 극복하면서 굳이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 없이 이기려는 본능이 곧 캐릭터나 플레이 스타일을 돕도록 할 수 있으니까요.

뱀파이어에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한다는 예시도 같은 맥락입니다.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하면서 규칙상 유리하려면, 곧 이기려고 한다면 우선 남의 부탁을 많이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부탁 점수가 쌓여서 필요할 때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 부탁을 들어주면 부탁 점수가 얼마나 쌓일지, 이 부탁을 하면 자기 부탁 점수가 얼마나 깎일지 하는 의사판단이 플레이의 중심이 되고, 이것은 실제로 부탁과 의무 관계가 복잡하게 쌓이는 폐쇄적이고 정치적인 사회에서 내리는 의사판단과 방향을 같이합니다. 부탁을 하고 들어주는 것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RP와 판정도 들어가므로 그런 의사판단의 과정에서 사건과 서술 또한 쌓여가고요. 이런 식으로 규칙이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 규칙을 피하는 대신 규칙의 흐름을 타는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탁을 들어주는 건 가장 정석적이고 안전한 방법일 뿐이고, 좀 더 빠르지만 위험한 방법으로는 남을 협박하는 것도 있습니다. 협박으로 생기는 유용성 점수는 스스로 부탁 점수를 쌓을 필요가 없다는 점, 즉 대가성이 없다는 점에서 부탁보다 훨씬 효용은 높지만 대신 인간관계는 한층 나빠지고, 이 협박을 우려먹을 때마다 상대가 적이 되는 날은 가까워져 옵니다.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 타기도 정치 플레이의 또 다른 재미이고, 동시에 중요한 규칙상 (혹은 게임적) 의사판단이기도 하죠.

음모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일반 플레이에서도 이러한 경향성은 진행자, 때로는 참가자가 생각하는 상식만큼 나타나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규칙에 그게 들어갔을 때만큼 직접적인 의사판단의 대상이 되거나 참가자 행동의 경향성을 강하게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관점에 따라서는 그게 오히려 장점일지도요. ‘규칙의 영역’에서 승민님이 말씀하신 반복성이나 제약성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역을 다루는 규칙이 없이는 내가 저 인물을 협박하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부탁을 들어주면 그가 내 부탁도 들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진행자의 재량에 따라 꽤 폭넓게 형성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합의에 따른 플레이라 해도 각자의 영역은 대개 존중되니까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이지요. 이 점은 규칙의 두 번째 효과, 즉 참가자의 독자적 상황 형성권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둘째, 참가자의 독자적 판단과 형성권. 일단 규칙의 영역에 들어온 사안은 진행자의 재량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면서 참가자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되므로 그만큼 참가자의 상황 형성권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이고 엄격한 규칙일수록 진행자가 그 규칙에 반해서 규칙에 기반을 둔 참가자 판단을 부인하려면 무거운 ‘입증 책임’을 지게 되니까요.

다시 뱀파이어의 예로 돌아가면, 혈족인 철수는 나중에 영희에게 무슨 부탁을 할 날을 대비해서 열심히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죠. 그러던 어느 날, 철수가 뒤에서 조종하는 기업에 유리하도록 영희가 조종하는 언론사에서 기사를 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궁정 음모 규칙을 사용하지 않을 때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이 부탁은 영희가 안 들어줄 것 같다면 진행자 재량으로 안 들어줄 수도 있고, 합의에 따른 플레이라 하더라도 참가자가 능동적으로 목소리를 내서 ‘내가 영희에게 이러이러한 부탁을 들어줬으니 영희도 이런 부탁 정도는 들어줄 것 같다’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궁정음모 규칙 같은 것을 사용해서 영희에게 들어준 부탁 점수가 4점이 있고 철수가 하는 부탁은 2점이라면, 왜 영희가 부탁을 안 들어주는지는 진행자가 설명할 몫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참가자가 항변할 수 있는 기반도 한결 강해지지요. 그만큼 뭔가가 규칙의 영역에 들어오면 참가자가 독자적으로 예측하고 판단해서 상황을 형성할 여지는 넓어집니다.

규칙의 본분?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규칙과 서사는 논리필연적으로 선택관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워게임에서 시작한 역사적인 이유가 작용해서 규칙의 영역은 전투와 다른 판정, 물리규칙 정도로 제한된다고 흔히 생각하기도 하지만, 다른 영역을 다룸으로써 그 영역에서 규칙의 효과 (경향성 형성, 서사에 대한 참가자 재량 확대)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듯 규칙에 본분이 있다면 플레이를 편하게 하는 도구로서이며, 원하는 플레이스타일을 구현할 때 규칙에 저항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는다면 그 구현은 한결 편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규칙 – 취향을 넘어 기능으로

전에도 다루었듯 RPG계에서 규칙에 대한 논의는 민감한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분적으로는 인터넷 토론의 성격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규칙에 대한 논의는 흔히 기능이나 효용이 아닌 취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합니다.

취향은 근거 제시와 반론이 들어가는 생산적인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공감하거나, 존중하거나, 반대하거나, 싸움이 나거나 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게 아니므로 토론의 효과를 볼 수는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규칙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분일까요? 우리가 어떤 규칙이 좋거나 나쁘다고 할 때, 그것이 개인적 취향을 넘어 객관적인 토론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려면 무엇을 다루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의 목적, 혹은 기능이 아닐까 합니다. 즉 막연히 ‘좋다’ 혹은 ‘싫다’는, 처음부터 취향 얘기이거나 취향 얘기로 흐르기 쉬운 얘기가 아닌, ‘A 규칙책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스타일의 놀이에 적합하다’라거나 ‘B 규칙은 놀이 속에서 이러이러한 기능을 한다’는 식이죠.

예를 들면, ‘나는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 좋아’라든지 ‘나는 장면 신청 규칙이 싫어’는 공감이나 반감을 넘은 의미있는 찬성이나 반론을 할 수 없는 취향 표현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의 개들은 갈등에 새로운 수단을 도입할 때마다 추가로 주사위를 받으므로 상황이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극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는 데에 적합하다’라거나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 장면 신청 규칙은 참가자가 돌아가며 장면의 초점, 배경, 목적을 정하므로 진행자의 전통적인 장면 설정권을 상당 부분 참가자에게 이양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토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점점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므로 오히려 새로운 주사위를 끌어들이지 못하게 위축시킨다’거나 ‘진행자도 토론과 제안을 통해 얼마든지 장면 설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식의 반론도 가능해지죠.

즉, 어떤 규칙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가치 판단은 ‘어떤 목적에 좋은가? 어떤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고려가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개인 취향의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쓸모없는 규칙이다’라고 하면 포도원의 개들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싸움나기 딱 좋지만, ‘포도원의 개들은 주사위의 내용이 “절름발이 2d10″이든 “명사수 2d10″이든 서술에 넣는 상황이 달라질 뿐 규칙상 동일한 가치를 가지므로 치밀한 전술적 시뮬레이션에는 쓸모없는 규칙이다’라고 한다면 수긍하든, 반론하든 소모적인 언쟁을 넘어선 토론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규칙과 그 목적, 혹은 기능에 대해 생산적 토론이 필요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몇 가지 효용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자기가 하려는 플레이에 적합한 규칙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규칙을 사용하는지는 취향이나 친숙도, 시간 사정, 경제성 등 여러 가지 고려가 들어가므로 순수히 기능성만으로 규칙을 고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자신이 하려는 플레이를 원활하게 하는 규칙을 선택할 사정이 된다면 규칙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규칙을 고르는 데 도움을 주겠지요.

두 번째,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규칙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규칙 중 자기가 원하는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혹은 더 좋게 고칠 방향이 있다면 기능 중심적 생각과 토론은 플레이에 적합한 경향성을 만들도록 규칙을 수정하는 지침이 될 수 있죠.

세 번째, 규칙을 새로 디자인하는 사람에게 특히 규칙에 대한 토론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내가 지금 만드는 규칙이 플레이중 어떤 기능을 할 것인지, 다른 규칙과 어떤 식으로 맞물린 것일지 생각하는 것과 안 하는 건 차이가 크죠. 특히 ‘HP 규칙은 다들 쓰니까’ 하는 식의 타성에서 벗어나 HP가 실제로 플레이중 어떤 기능을 하는지, HP가 원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지원하는지 하는 고려가 막연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효용이 클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적 취향을 넘어 (비교적) 객관적인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규칙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방법과 효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규칙에 대해 보다 평화적인(?) 토론을 하는 데 일조하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유형론

Georgios님이 쓴 진행자 유형을 허락을 받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독일어였고 원작자가 영어로 옮긴 걸 제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으니 벌써 3개 국어..(..) RPG는 국제적인 취미인 겁…

로빈 로스의 참가자 유형은 RPG 조언의 고전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진행자는 참가자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가정을 깔고 있어서이다. 물론 책은 참가자가 아닌 진행자가 대상이기는 했지만, 참가자 유형을 알아보는 것은 절반일 뿐이고 정말 재미있는 플레이를 하려면 진행자의 흥미와 욕구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진행자 유형을 정립하는 시도를 했다. 많은 의견과 활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주의사항: 로스의 참가자 유형과 마찬가지로 진행자 유형도 당연히 배타적이지 않다.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진행자는 둘 이상의 유형에 속한다. 또한, 같은 유형에 속하는 진행자라고 반드시 진행 방식이 비슷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진행자 기대치를 파악하는 시작점으로는 제기능을 하리라 본다.)

세계 창조자는 깊이 있는 배경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세계는 얼굴없는 인물이 단조로운 건물 사이를 배회하는 무미건조한 장소가 아니다. 역사가 있는 세계, 다양하고 흥미로운 풍경, 살아 숨쉬며 무궁무진한 세부사항을 자랑하는 세계와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인물 군상이 있는 곳이다. 세계 창조자는 RPG 자료집, 참고 서적과 다큐멘터리, 장르 문학 등에서 엄청난 양의 자료를 가져다가 배경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배경은 그의 작품이며 참가자는 그의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일: 세계 창조자와 플레이한다면 배경에 관심을 두고 그 세밀함을 즐기는 것이 좋다. 특히 진행자가 기존 배경을 사용한다면 많은 참조와 의도적인 모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투가는 참가자와 경쟁하는 진행자이다. 그는 주인공 일행의 적수가 되는 것을 즐긴다. 그에게 플레이는 일행이 무엇인가를 걸고 싸울 때에야 비로소 시작한다. 그렇다고 결투가가 전투에만 가치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참가자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게 얻은 승리, 참가자들이 아슬아슬하게 패배를 피하는 상황을 좋아한다. 하지만, 참가자가 좋은 전술과 전략을 보이면 그들이 쟁취한 승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규칙 판정을 엄격하게, 하지만 공평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승리는 무의미하다.

스타일: 결투가와 플레이한다면 도전을 회피하거나 전술·전략 외의 이유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결투가형 진행자에게서 뭔가 얻어내려면 반드시 노력이 들어가며, 계속해서 실력을 보여야 한다. 결투가의 말은 곧 법이지만, 명예의식 또한 강하므로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편파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

구성의 대가는 자신을 모든 실을 조작하는 인형술사로 여긴다. 그는 참가자들이 풀어내야 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성을 만들어 낸다. 그에게 배경 세계는 장소라기보다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인과의 그물이다. 따라서 때로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발단이 놀라운 반전과 복합적인 줄거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구성의 대가는 참가자들을 계속해서 교란하고 놀라게 하되, 돌아보면 일관적이고 말이 되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스타일: 진행자가 구성의 대가 유형이라면 플레이 내 사건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아무리 작은 세부 사항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퍼즐 조각을 모두 참가자에게 쥐여주는 것을 즐기지만, 맞추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참가자들은 지속적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로 가설을 주고받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가정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플레이 내에서 시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식전(式典) 책임자는 분위기와 몰입감이 넘치는 플레이를 중시한다. 그는 참가자들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독특한 플레이를 진행하고 싶어한다. 현장감을 생생히 살리는 온갖 장치를 사용하는 것도 이 유형의 특징이다. 조명, 배경 음악, 소품, 전단 등. 각 조연의 대사와 행동에 진정성이 있는 것도 식전 책임자 유형에게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에게 RPG는 무엇보다 하나의 경험이자 현실 도피이다.

스타일: 식전 책임자와 잘 지내려면 최대한 몰입하고 농담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엉뚱한 순간에 잡담을 하거나 분위기를 깨는 행동을 하는 것은 미움을 사는 지름길. 이 유형은 특히 주인공 입장에서 벗어나 순수히 참가자로서만 하는 플레이를 싫어한다. (순수한 전술적 플레이도 여기 들어갈 수 있다.)

배우 유형 진행자는 모든 노력을 조연에 쏟아붓는다. 그는 참가자에게 개성 넘치고 특이한 조연을 선보이고 싶어한다. 배우 유형에게 배경 세계는 인물들의 호오(好惡)와 장단점이 중심이 된다. 그에게 RPG는 곧 인물간 상호작용이다. 그러려면 물론 각 조연에게 규칙이나 제약에 제한받지 않는 일관된 성격이 있어야 한다. 배우 유형은 각 인물이, 그리고 그들과 참가자의 관계가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스타일: 배우 유형 진행자와 잘 지내려면 주인공에게도 개성이 있어야 한다. 참가자가 조연과 그들의 행동 동기를 알게 되듯 배우 유형은 참가자 인물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어한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는지. 인물 행동에 모순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떤 내적 갈등이나 충돌이어야 한다. 인물 행동의 일관성에 참가자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이유여서는 안 된다.

감독 유형은 RPG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매체로 여긴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꾸며가려고 그는 모험 구조, 도전, 극적 갈등 등 RPG 내적 수단뿐 아니라 그가 아는 모든 서사 예술에서 장치를 끌어온다. (3막 구조, 장르 법칙, 영화 언어 등.) 감독형 진행자는 중요한 대목을 플레이하는 데만 관심을 보인다. 줄거리를 진행하거나 인물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하는 장면이라면 피하거나 잘라버리기 십상이다.

스타일: 감독 유형은 참가자들도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를 기대한다. 즉, 이야기를 만들어갈 기회를 찾아서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행자는 참가자가 상황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서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을 즐긴다.

제공자는 플레이에 자신만의 욕구가 없는 유형이다. 그의 재미는 곧 참가자가 느끼는 재미이다. 많은 제공자는 모두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즐기며, 종종 진행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진행을 잡곤 한다. 모험은 종종 참가자 선호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또한, 참가자 권한이 많은 편이 참가자에게 재미있다면 제공자형 진행자는 언제든지 참가자에게 권한을 넘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늘 참가자와 기대치를 타협할 의무를 느낀다.

스타일: 제공자 유형과 잘 지내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참가자가 이 유형을 가장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공자도 두 가지 경우에는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 우선, 참가자는 대충이라도 자신이 RPG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공자형 진행자에게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과 실제 선호가 다른 참가자이다. 또한, 제공자는 다른 어떤 진행자보다 플레이가 재미있었다는 확인을 바란다. 진행을 잘했으며 플레이가 즐거웠다는 말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제공자를 소진으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다.

각 유형 설명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유형에도 부정적인 변형이 많다. 결투가는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킬러 진행자가 될 수 있으며, 구성의 대가 중에는 대가는커녕 준비조차 제대로 안 해서 모험 내용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진행자도 보인다. 세계 창조자는 자기 창조물에 넋을 잃고 끝없는 장광설이나 쓸데없는 묘사로 참가자들을 지루하게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작용은 이들 진행자 유형의 잘못된 모습이며, 이를 이유로 진행자의 다양한 욕구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진행자 유형론을 번역해보았습니다. 의구심이 든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진행자도 자신만의 욕구와 필요가 있는 참여자라는 생각의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또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옮겼습니다.

보면서 그동안 제가 겪은 진행자 유형을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더군요. 예를 들어 아루스 캠페인 진행자 아사히라군은 결투가 성향이 강한 것 같았고, 7번째 바다 플레이를 함께했던 란님은 구성의 대가, 언더월드 진행자였던 제노시아님은 세계 창조자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진행자도 유형만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진행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대응하면 서로 재미있는지, 나에게 맞는 진행자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면 더욱 풍요로운 RPG 생활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RPG의 기능적 구분 – 설정, 진행, 참가

지난번에 Wishsong님과 성일님의 글에 답변하면서 떠오른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RPG, 혹은 다른 놀이를 할 때 참여자가 맡을 수 있는 기능에는 크게 설정, 진행, 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의 초기 조건을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정하는 것이고, 진행은 설정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참가는 참가 수단 (RPG의 경우는 인물)을 움직여서 설정의 초기 조건을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수정 (07/06/24 08:19): 성일님의 반론대로 진행과 참가의 구분은 인적 구분이 개입한 면이 큽니다. 참가는 진행 중 서술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정리해보고 싶으니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보통 RPG에서는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의 역할, 참가는 참가자의 역할입니다만, 일반적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가 설정과 진행 권한을 나누어 가질 수도 있으며, 설정과 진행 일부를 규칙책과 카드에 맡겨놓고 진행자 없이 참가자만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인적 구분이라면, 사람이 아닌 기능에 따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기능적 구분입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부 구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리가 평소 놀 때 하는 각 활동이 전체 놀이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효용이 있겠지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각 상세 구분마다 제가 아는 규칙의 예를 들겠습니다.

1. 설정

1.1. 배경 설정

놀이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진행자 권한으로 전부 설정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모두 아는 배경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주로 상황 설정의 맥락이 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2. 상황 설정

놀이의 틀이 될 극적 상황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인물 설정에 제약이자 맥락 역할을 하며, 배경 설정을 의미 있게 활용하는 초점이 되기도 합니다.

1.3. 계획

놀이 속에서 벌어질 사건의 전개나 향방을 정하는 기능입니다. 반드시 소설이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하는 것은 아니고, 시나리오의 종류에서 다루었듯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진행자의 영역이지만,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다룬 성일님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참가자가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많은 순기능이 있습니다.

1.4. 장면 설정

미시적인 설정 기능으로, 한 장면의 초기 조건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습한 지하실입니다’ 하는 식으로 시작해서 이 장면에서 참가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설정의 다른 세부 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장면 설정은 특히 진행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진행 기능에 속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를 두고 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설정에 들어갑니다. 장면 설정도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이지만, 역시 참가자의 의견을 받기도 합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은 장면 설정 처리에서 흥미로운 데가 있는데, 각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원하는 장면을 얘기하는 장면 신청 규칙이 그것입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참가자는 ‘김 장군하고 박 장군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이끌 것인가 조정 앞에서 결판이 나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식으로 원하는 장면을 PD에게 신청합니다. 장면의 결말은 정하지 않고 (둘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지휘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김 장군, 박 장군), 장면의 배경은 무엇인지 (조정), 장면에 나올 사건은 무엇인지 (북방 원정군 지휘관 결정) 얘기하는 형식이지요. 그러면서 서로 제안도 주고받으며 (“조 부인을 사이에 둔 감정 문제도 나오면 재밌겠다”라든지)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의 과정이 있든 없든 각 참가자에게 규칙으로 이러한 장면 설정권을 보장(강제?)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장면 신청 규칙의 부수적 결과라면, 장면 설정 권한을 참가자들에게 주기 때문에 진행자 (PD)에게는 장면 설정권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신청 사항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권한은 있고 또 언제든지 제안이나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장면의 뼈대를 구성하는 창의적 권한은 기본적으로 참가자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진행자가 장면을 구성하고 참가자는 제안만 하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2. 진행

2.1. 서술

놀이 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정의 초기 조건이 변하는 것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기능입니다. 종종 참가에 반응해서 나옵니다. ‘고요한 연못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장면 설정, ‘돌을 던져요’가 참가라면 ‘크툴루가 튀어나옵니다’는 서술일 것입니다. 역시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에 들어갑니다.

폴라리스 (Polaris)는 서술 중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의식(儀式) 언어를 사용한 교섭으로 처리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서사나 설정의 영역도 넘나들지만…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노란색으로 강조한 글자가 의식 언어입니다.)

마음: 강 도령은 “이 간신 놈!” 하고 외치며 이 대감의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
후회: 하지만 그러려면 그 순간 포졸들이 들이닥쳐야 한다.
마음: 그리고 또한 강 도령과 장래를 약속한 선화 낭자가 이 대감의 딸이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선화 낭자’를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복수가 부르는 비극’을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마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강 도령의 축복 중 ‘하인 돌쇠’를 발동해서 울부짖는 선화가 아버지의 죽음을 못 보게 돌쇠가 막았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의 효과로 마지막 서술을 대폭 수정)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아버지를 죽인 강 도령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마음: 일의 전말은 이와 같았더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서술을 받아들이고 갈등을 끝냄.)
후회: 이 대감이 죽어가는 사이 포졸들은 강 도령을 포위하고…

폴라리스의 교섭 규칙은 이처럼 의논이나 합의가 아니라 규칙으로 서술상 의견 충돌을 해소하는 점이 특이합니다. 게다가 서로 기본적으로 적수인 ‘마음’과 ‘후회’는 서로 제안이나 이견 조율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양보 없이 각자 의견을 밀고 나가면서도 일관성 있는 결론을 낼 수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2.2. 조연 RP

넓은 의미에서는 서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조연을 움직이는 것도 진행의 한 가지 기능일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과 조연을 오가는 인물도 있는 만큼 (여러 인물을 참가자와 진행자가 돌려가며 맡을 수 있는 아르스 마기카가 좋은 예죠) 늘 뚜렷한 구분은 아닙니다.

위에서 얘기한 폴라리스에서는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누어서 맡는데, ‘후회’가 전통적인 진행자에 가장 가깝지만 주인공과 사회적, 권력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남자 조연은 ‘보름달’이, 정서적, 감정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여자 조연은 ‘그믐달’이 맡습니다. 조연의 행동은 ‘후회’ 혹은 ‘마음’이 특수 교섭 언어로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2.3. 서사

역시 넓은 의미로는 서술에 들어갑니다만, 주인공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범위에서 생기는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좀 더 거시적으로, 주인공들이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는 범위에서도 배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사라고 조금 욕심을 내어 구분해 보았습니다. 서술과 마찬가지로 참가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참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도적 길드 마스터를 죽여서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옆 나라에서 홍수가 나서 난민이 몰려드는 것은 후자의 예입니다.

2.4. 규칙 운용과 해석

판정의 과정과 결과를 규칙에 따라 서술하고 해석하는 기능입니다. 규칙을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고, 참가자가 개별 판단에 따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단순 서술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규칙으로 규정한 영역에 발생하는 두 번째 효과를 참조하시길. 진행자가 최종 결정권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참가자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로 이러한 마찰의 핵심은 규칙의 올바른 해석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주도권 혹은 참가의 의의가 살지 않는다는 불만의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긴 하지만요.

3. 참가

3.1. 인물 설정과 변화

놀이 속 사건의 주체이자  참가의 수단이 될 인물을 설정하고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참가자 인물 (주인공, PC) 설정을
통해 보통 참가자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설정 기능이기도 합니다. 조연 (NPC) 설정은 배경이나 상황 설정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참가의 기본 틀이며, 참가자의 욕구를 표시하는 중요한 신호가 되어 설정, 진행 기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보통 인물 설정은 참가자 한 명의 권한으로 생각하지만, 이 과정에 진행자와 다른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습니다.

3.2. 선언

참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에서 나온 주인공 행동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에는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라는 전술적 판단, 이 장면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고 싶다는 극적 욕구, 인물의 성격과 배경에는 이런 것이 어울린다는 인물 자체의 성질 등 많은 층이 있습니다. 보통은 개별 참가자의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 제안, 의논, 혹은 합의가 들어갈 수 있겠죠.

3.3. 판정

선언의 일종이지만 위의 규칙 운용과 해석에서 말했듯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한 전술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규칙을 매개로 놀이에 참가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수치상의 능력만 들어가고 주인공의 배경이나 정서, 인간관계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수치상의 능력에 주인공 자체의 특징이 들어간다면 그러한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라면 ‘명사수 1d6’과 마찬가지로 ‘어려서 당한 사고 때문에 다리를 전다 1d6’도 판정에 도움이 되고,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이라면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 면모를 발동해서 판정에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용하려면 이러한 능력치나 면모가 판정에 들어가야 하므로 이런 내용은 판정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에도 영향을 주고, 이렇게 해서 생기는 ‘이야기’는 판정의, 그리고 참가의 또 다른 층을 이룹니다.

이처럼 일단 거칠게 설정, 진행, 참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잡아보았습니다. 말했듯 이 구분을 칼같이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각 활동이 놀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데에 효용이 있는 구분이긴 하지만요. 논의와 사고의 틀이 되는 하나의 도구일 뿐, 이리 비틀고 저리 끼우다 결국 부러지면 버리고 더 좋은 걸 만들면 되겠죠.

참가자와 진행자의 관계에 대한 의견

Wishsong님의 글 플레이어-마스터와의 관계와 이에 대한 성일님의 답변과 반론에 대한 의견입니다. 자칫 복잡해질 수 있으니 Wishsong님의 원문성일님의 원문을 색으로 구분하겠습니다. Wishsong님이 제시하신 전제들은 논의의 핵심이므로 진한 글씨로 나타내겠습니다.


1. RPG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플레이)을 이루기 위해 만드는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쌍방향이 진행자 (마스터)와 참가자 (플레이어) 사이 말씀이라면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Wishsong님의 글에 대한 반론의 중심이기도 하고요. 일단은 쌍방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제한적인 이유를 두 가지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성일님 말씀대로 대립과 긴장, 합의의 양상은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라고 해서 단일한 목적이나 지향이 있지는 않으며, 긴장의 축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입니다.

둘째, 좀 있다 얘기하겠지만 진행자와 참가자는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으로 제한해서 생각하기에는 설명의 일반성이 떨어집니다.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사람인데 진행자의 역할과 참가자의 역할은 반드시 사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략)

저는 RPG라는 형식이 의사소통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원문에서 읽힙니다.

(중략)

꼬투리를 잡는 것 같지만, 글 전체로 봤을 때 승한님께서는 RPG를 어떤 정해진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으로 파악하고 계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짚고 갑니다.

제 생각은 한 편으로는 비슷하고 한 편으로는 다릅니다. RPG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의 양식은 반드시 규정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일부는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칙 (룰)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예로는 ‘내 화살이 맞았나’ 하는 결과를 정하는 의사소통을 판정 규칙으로 양식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덜 흔한 예로는 폴라리스 (Polaris) RPG에서 이야기의 진행 자체를 의식 언어로 교섭하는 것도 들 수 있습니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암시하는 데가 있는 대목이라 일단 얘기해 둡니다.


2.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수단으로 플레이에 참여한다. 양측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속성은 다르다.



RPG는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축(플레이어-마스터) 중 한 쪽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유희입니다. ‘무대’를
만드는 건 마스터이고, 그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서로 적극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이라고 서로가 생각하고, 인정하는 암묵적 경계선은 있기 마련입니다.

RPG에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에 따라 구분한다는 점에서 분석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나치게 제한적인 이해라서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이나 제가 겪은 인디 RPG의 경험을 포괄할 수 없거든요.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RPG 플레이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지만, 그마저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많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일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논의하겠습니다.

(전략)

무대를 만드는 것이 마스터라는 법이 없고,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캐릭터라는 법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Wishsong님이 말씀하신 두 개의 축을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20년 전에 이미 등장한
RPG인 “아르스 마기카”에서는 마스터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세션마다 돌아가면서 한다고 했을 때, 조금 하다 보면
그 “무대”는 어느 한 명이 준비했다고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중략)


아르스 마기카만의 예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PC와 NPC의 구별이 흐리고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역할 분담이 뚜렷하지 않은
시스템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스템을 사용했을 때 RPG가 성립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아르스 마기카처럼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RPG 뿐만 아니라 아예 진행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진행자 역할을 여럿이서 분담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에는 진행자가 없이 참가자만 있고, 폴라리스는 4인이 플레이를 하면 그 중 3인이 전통적인 진행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갈등 제시, 조연 [NPC] 역할) 1인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인적 구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예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기능적 구분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아르스 마기카의 예를 들어서, 진행을 돌아가면서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한 편으로는 진행자 역할이 사람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뒤집어 말하면 진행자라는 기능, 혹은 직능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기능을 채우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적 구분을 부정할 이유가 될 뿐, 기능적 구분은 여전합니다.

폴라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심지어는 돌아가면서 맡지만 그 역할 자체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심지어는 진행자가 없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에서도 인적 구분은 없어도 기능적 구분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진행자의 전통적 역할을 일부는 규칙책에 나오는 기본 설정 (펨버튼 대학, 1년에 6가지의 교내 행사, 각종 행동 카드)에 맡기고, 일부는 참가자들이 나누어 맡습니다 (조연 역할). 이 경우는 설정을 정하고 진행하는 기능을 맡는 사람이 유동적인 정도가 아니라 규칙책과 카드 등 ‘사람이 아닌 것’이 맡지만, 기능 자체는 존재합니다.

일반적인 시스템을 사용한 일반적인 플레이에서도 “암묵적 경계선”의 위치는 팀마다, 캠페인마다 많이 다르게 설정됩니다. (중략)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말씀하신 “경계선”은 취향에 따라, 편의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지 RPG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후략)

제 생각은 여기서 성일님과 갈라집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경계선이 팀이나 규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애당초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이 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건 당연하죠. 경계선은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이 아닌 진행과 참가 기능을 구분하며, 그 기능은 경우에 따라 누구든 맡을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규칙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기능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혹은 무엇에 맡기냐에 따라 RPG라는 놀이가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보드게임적 성향이 짙고, 진행 기능의 모든 것을 컴퓨터에 맡기면 RPG가 아닌 CRPG가 됩니다. 하지만, RPG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 내에서도 이 기능을 누가, 무엇이 맡느냐는 성일님 말씀대로 상당한 유동성이 있습니다.

RPG에서, 혹은 놀이 전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능적 구분은 크게 설정, 진행, 참가라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가 이루어지는 배경, 혹은 상황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진행은 놀이 속 사건의 추이를 움직이고 배경이나 상황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참가는 의사 결정을 통해 그 배경이나 상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고전적인 RPG에서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 참가는 참가자에게 국한되지만 이것은 논리 필연적인 역할 분담은 아니며, 기능적 분담을 인적 분담과 혼동하면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생기기도 합니다. 참가자도 얼마든지 설정이나 진행에 참여할 수 있고, 진행자도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 없이 설정과 진행 기능 일부를 규칙책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고, 진행 역할을 셋이서 분담하고 한 명만 참가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기능적 구분은 존재하되, 그것을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은 유동적입니다.

2-1. 마스터는 RPG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근간 설정을 담당하고 책임진다.

(Wishsong님이 드신 예 생략)

이것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예임에는 확실하나, RPG가 그래야만 한다,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일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한다면 이 전제는 ‘고전 RPG 모델에서 진행자는 일반적으로 설정 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진행자라는 사람, 혹은 위치에 속한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 놀이의 기능을 참여자들에게 분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한 가지 모습입니다.

팀의 합의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마스터가 저렇게 얘기해도 결과가 안 되는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마스터는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팀에서 결정된 내용을 정리하여 발언할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좀 더 보충하자면, 합의에 따른 진행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합의 말고도 설정 혹은 진행 기능을 제어하는 장치도 있습니다. 폴라리스의 서술 교섭과 같은 규칙이 한 예이죠.


2-2. 플레이어는 마스터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면 마스터는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킬 수 없나요? 그렇다면 소설에는 생명이 없고 변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RPG에서 마스터가 소설 쓰듯 혼자 노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

소설과 RPG에서 나타나는 생명력과 변화는 분명히 다르고, 이것은 소설과 RPG의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RPG에서 나타나는 역동성을 소설에서 느끼는 역동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 혼동의 위험이 큽니다. 소설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고, 이미 내용을 알고 읽어도 끝없이 새로운 의미와 상상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RPG에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변할 수 있고, 이것은 참가 기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생명력과 변화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RPG에서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곧 RPG의 생명력이나 변화와 소설의 생명력과 변화는 다르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만… RPG에서 있어야 하는 생명력과 변화가 소설과 같은 것이라면 참가 기능은 의미가 없고,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도 생명력과 변화가 가득한 훌륭한 RPG일 테니까요.

(계속)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유일하게 플레이어에게만 허용된 속성이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후략)

역시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2-2는 참가는 보통 참가자가 맡는다는 일반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다른 기능적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인적으로는 유동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성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Wishsong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참가는, 그리고 참가 기능이 있는 참가자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판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니까요.

반면 성일님 말씀대로 진행자 역시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듯 참가가 설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이라면 진행은 변화 자체의 표현입니다. 진행자, 혹은 진행을 맡은 참여자는 그 변화와 역동성을 표현함으로써 얼마든지 플레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참가자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파급 효과가 있고, 여기에 반응해서 다시 또 변화를 일으키고… 하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죠.

딱히 Wishsong님의 전제에 대한 반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초기 조건이 참가이기 때문입니다. 즉 Wishsong님의 이 전제는 ‘참가자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유일성을 강조했다기보다는 ‘참가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참가의 능동적, 역동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세 구분을 논리적으로 따라가자면 진행자가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과 조연이 대화를 나눈다고 하면 주인공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참가, 조연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진행 기능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은 조연의 반응에 영향을 주고, 조연의 반응은 다시 또 주인공의 반응에 영향을 주면서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위의 설정, 진행, 참가 기능을 나누면서 참가가 기본적으로 작용이라면 진행 기능은 반작용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그 영향의 방향은 일방적이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행과 참가는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이며, 성일님의 말씀대로 진행자도 배경이나 상황에 생명력과 변화를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플레이어는 갈등과 서사를 원한다. 따라서 마스터에게 이 부분을 이양한다.

->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캐릭터가 맞부딪힐 갈등, 그리고 만들어갈 이야기를 관리할 존재로 마스터를 선택하고, 이 부분에 대한 ‘권력’- 갈등의 시작 및 PC를 위한 무대 설정을 위임합니다. 물론 마스터가 ‘이러이러한 캠페인을 합니다~’ 라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근본적으로 RPG의 권력은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세계를 맡기는’ 형태라고 봅니다.

물론 설정과 진행 기능이 일반적으로 진행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고, 여기에 참가자의 이양이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나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의문이 가는 부분은 ‘갈등과 서사에 대한 욕구’와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 설정의 권한을 갖는 것’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입니다. 어째서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에 관련한 권한이 있어야 유토피아가 아닌 갈등과 이야기가 성립하는지 하는 논리적, 혹은 현실적 필연성이 들어가야 완전할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의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플레이어와 마스터 사이의 갈등과 등치시키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플레이 내의 일이고, 마스터와 플레이어 사이의 권력 분배는 플레이 외의 일입니다. 마스터에게
갈등과 서사에 관한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도 갈등을 접하고 서사를 일으킬 수 있음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되었고, 실례도 많이
등장한 바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 성일님이 이미 하신 말씀과 같군요. (퍽)


4. 하지만 마스터도 사람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전략) 마스터는 자신의 생각한 이야기와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이 떠맡긴
잡무(….)를 처리하는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가 잡무를 처리하면서까지 RPG를 하겠다고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건
이런 이유겠죠.

저는 이 현상을 현실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잡무”라고 이야기하신 다양하고도 복잡한 의무들이 사실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권력임을 플레이어들이 깨닫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것을 포기함으로써 플레이는 마스터의 변덕에 그대로
노출되며, 마스터의 수완에 의해 플레이의 질이 결정 나버리는 결과에 달합니다. (후략)

‘잡무 대신 권력’이라는 발상이 위험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설정과 진행 기능이 대부분 진행자에게 있는 것이 곧 참가자가 놀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진행자의 자의에 노출되는 결과가 된다는 데에는 반대합니다. 이것은 참가 기능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설정과 진행은 각각 참가의 틀과 참가에 대한 반응을 이루며, 특히 진행이 참가에 반응하지 않고 진행자의 자의에 따를 때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 생깁니다. 설정과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도 나누어 갖는 것도 이러한 병리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잡무 대신 권력’이 위험하다는 점에서는 성일님과 생각을 같이하지만, 그 근거는 다릅니다.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분담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위험 현상이 아니라는 의견은 방금 얘기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부분은 첫 번째, 설정과 진행 기능을 기능이 아닌 권력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 두 번째, 반대급부라는 대가성을 넣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맡기 때문이 아니라 참가의 의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나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과중한 잡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었어! 따라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진행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기는 플레이 내 병리가 얼마나 많은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위에 말했듯 성일님이 말씀하신 설정과 진행 기능의 분담도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해결책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이지만요.


5.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멋진 것’과 마스터가 생각하는 ‘멋진 것’은 다르다.

-> 마스터도 플레이어도 모두 사람입니다.  서로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다릅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플레이어의 목적은 자신의 PC를 통해 충분히 롤플레이를 하면서 세션에서 드러난, 혹은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마스터의 가치관이 개입된 세계, 그리고 플롯에 맞부딪히면서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전략) 저라면 굳이 “플레이어” “마스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으며,
사전 합의는 이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그 목적의 하나입니다. (후략)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에 따라 저는 이 전제를 성일님이 지적하셨듯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멋진 것”은 서로 다르다’라고 고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역동적 긴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일님 의견하고는 조금 다르게, 플레이 외적 긴장은 플레이 내적 갈등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역동적 긴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겠지요.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플레이 안에서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서로 밀고 당기게 되며, 이 과정을 참여자 간의 파괴적인 갈등이 아닌 플레이 속의 생산적인 갈등, 서로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내면서도 조화로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역동적 긴장을 다루면서 생각한 핵심입니다.

6. 플레이어와 마스터는 사전 합의를 통해 이러한 마찰의 요소를 사전에 최대한 배제시키려고 한다.

-> 이건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권력을 주는 과정에서 합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일님 지적대로 대상이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플레이 외적 마찰은 배제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플레이 내적 갈등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플레이의 재미입니다. 아마도 전자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드신 예를 봐도 이것이 반드시 배제해야 할 마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역동적 긴장이라는 이름으로 했던 구분에 따라 논의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수단에 대한 긴장.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은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는 거인의 수중에 있습니다. 진행자는 거인을 때려잡는 것과 거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열쇠를 얻는 것 사이에 선택시키고 싶습니다. 반면 참가자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노래를 불러 거인을 잠들게 하고 열쇠를 훔친다거나, 열쇠 없이 성벽을 넘어간다거나, 열쇠를 걸고 수수께끼 겨루기를 제안한다거나.

이러한 것이 배제해야 할 갈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역동적인 긴장에 대한 글에서 얘기했듯 상당한 지적, 논리적 도전이 아닐까요? 참가의 의의를 살리면서도 진행자가 어느 정도 원래의 선택지를 유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정당해야겠지요. 성벽을 넘어갈 수 있나 탐사했더니 성벽에 마법 가시나무가 뒤덮여서 잘라내도 잘라내도 계속 자라나고, 부상을 입지 않고 올라가려면 마법이 걸린 보호구가 필요한데 그걸 구하려면 또 멀리 있는 마법사의 탑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이러한 설정들은 특히 규칙을 매개로 하면 참가자에게 의사 결정의 여지를 주며, 결국 참가자가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해서 성벽을 넘어간다면 그것도 즐거운 결론입니다. 아예 무너뜨린다거나, 가시나무를 태워버린다거나, 등등. 반면 무턱대고 너무 높다면서 오르기 판정에 수정치 -20을 붙이는 식의 자의는 참가의 의의를 줄이는 것이며, 자칫 플레이 외적인 감정적 마찰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 시점에서 합의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거인은 나중에 나름 중요한 인물인데 말야, 만나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난 가시나무를 넘어가는 쪽이 더 재밌는걸.’ 이것이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와 일부 나누는 방향입니다. 반면 합의 없이 밀고 나가서 규칙을 매개로 참가자가 성공하면 참가자의 해결책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어느 쪽이든 이것이 미리 배제해야 하는 성격의 충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 목적에 대한 긴장. 마왕에게 반한 주인공의 예를 가져오면, 사실 이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진행자가 생각하지 못한 마왕의 면모를 주인공이 발견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극적 재미는 깊어질 테니까요. 다른 주인공에게 마왕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라면 주인공 일행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반하는 일도 있을 수 있죠.

물론 이 경우도 이것이 플레이 내 갈등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 외적 마찰이 될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끊고 서로 합의를 보든지, 규칙대로 판정해서 해결하든지 해야겠죠. 플레이 내의 갈등은 플레이의 재미 그 자체이지만, 플레이 외적 마찰은 플레이에 독이 되니까요. 서로 생각이 달라서 플레이 내에서 밀고 당기는 것과 서로 감정이 상할 만한 마찰은 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전략) 사전 합의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 중에도 예측 못한
문제(갈등이라는 표현은 쉽게 쓰기 어렵습니다.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아예 다른 물건이니까요)가 발생합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사실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해야 할 문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리가 안 돼서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성일님 말씀대로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다르니까요. 플레이 내의 갈등이라면 그건 플레이의 재미이니까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하자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플레이 외적 갈등이라면 플레이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플레이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넘어서는 안 될 경계나 의사소통의 통로를 정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니까 굳이 얘기하자면 이쪽이려나요.

끝에 좀 헷갈려 버렸지만, 어쨌든 저도 정리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환호성을 지르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

저는 플레이어와 마스터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플레이를 꾸미고 진행하는 방식에 객관적인 장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RPG라는 놀이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봅니다.

객관적인 장점이 있다는 점에는 찬성하고 흥미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논리적 귀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설정, 진행, 참가의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도 반론할 여지가 많겠죠)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은 설정과 진행의 권한을 진행자와 참가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RPG의 병리 현상을 해결하고 모두가 더 재밌게 노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일하고 논리필연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설정과 진행의 권한이 진행자에게 있어도 참가의 의의 또한 확보하고 살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합의와 상관없이 서로 목소리를 내면서 밀고 당기며, 규칙과 논리에 따라 결론을 내서 각자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더 재미있는 결과를 내는 플레이가 제가 역동적 긴장이나 코스티캔의 게임론을 끌어들여서 구현하고자 하는 플레이입니다. RPG는 설정과 진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참가의 기능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일님이 그 가능성을 배제하신 것은 결코 아니니까 반론이라기에도 뭣합니다만..^^ ‘논리적 귀결’이라는 말씀에 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 점은 반박할 수 있는 근거 없이 성일님의 생각이라고 밝히셨으니까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취향이나 신념의 영역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어디에도 논의는 넘쳐나는 곳이 인터넷이지만, Wishsong님이 RPG에 대한 전제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밝히신 의미는 대단히 큰 것 같습니다. 종종 전제 자체가 다른 건 생각 못한 채 꼬리를 물고 도는 논의가 되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그 전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건 크나큰 생각의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정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고요.

RPG에서 규칙의 영역에 대해

천승민님의 을 보고 꼬리글로 작성하다가 분량을 넘겨버려서 엮인글로 씁니다. 이후 이 글은 확장하고 수정해서 규칙의 도구성을 다룬 글에 넣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물리적 내지는 활극적인 부분은 규칙으로, 서사적 내지는 탈활극적인 부분은 합의로 처리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잘못된 이해라면 지적 바랍니다. 일단은 이 전제로 댓글을 작성합니다.)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플레이중 벌어지는 모든 일은 서사의 요소이며, 어차피 RPG는 사회적인 놀이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합의로 정해도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이 상황에서 내 화살이 맞았을까’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대목에서는 성질을 못 이겨서 문제를 일으키는 게 재밌겠다’까지 말이죠. 하지만, 합의에는 시간이 들고, 매우 부정형적인 과정이며 때로는 발언력의 불균형 등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규칙으로 이 과정에 기준을 만들고 시간상으로 압축한 것이 RPG와 규칙 없는 RP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객관성이 생기기 때문에 어떤 영역을 규칙에 넣으면 크게 두 가지 효과가 생긴다고 봅니다.

첫째, 플레이중 장려하고 싶은 행동의 포상, 뒤집어 보면 플레이중 원치 않는 행동을 억제. 예를 들어 활극이라면 규칙은 말도 안 되는 화려한 액션을 장려할 것이고, 역사에 충실한 전쟁물이라면 무모한 행동은 바로 규칙상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둘째, 게임적 강조의 효과. 일단 어떤 영역이 규칙의 대상이 되면 이것은 팀 전체의 합의가 아닌 개인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되고, 따라서 개인 의사판단 혹은 자원 활용의 대상이 됩니다. 즉 게임적 의사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함정을 해제하는 규칙은 있지만 참가자에게 배경 세계에 대한 서술권을 주는 규칙은 없는 RPG라면, 참가자는 자기 인물에게 함정을 해제하는 능력을 줄 수도 있고 실제로 함정을 발견하면 해제하는 시도도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다른 이유로 저지할 수는 있지만 왜 그런지 설명을 해야겠죠.

반면 ‘내 인물이 비밀 결사에 있는데, 이 도시에 그 결사의 지부가 있으면 좋겠어요’ 같은 요청은 순수하게 진행자의 판단 영역, 혹은 모두의 교섭과 합의의 영역이 됩니다. 따라서 필요할 때마다 자기 결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인물의 능력을 키울 수도, 그게 가능하도록 게임 내 자원을 모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영역이 규칙의 대상으로 적합한가, 부적합한가 논의할 때는 위에 말한 규칙의 두 효과가 그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플레이를 더 재미있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활극적인가, 서사적인가 하는 구분 자체가 주요 요소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은 그런 구분의 근거 자체도 잘 모르겠고..) 규칙이 서사적 요소를 반복적으로 만들고 상상의 여지를 제약한다면 활극적 요소에는 어째서 그렇지 않은지, 혹은 활극적 요소는 반복적이 되어도 상관없는 성질이 있는지 같은 논의가 먼저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