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자료와 잡동사니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본 던젼 지도

요즘 맵툴로 패스파인더를 하고 또 자작 설정도 구상하면서 플레이에 지도를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지도를 만들어보자!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를 외치며, 지도 제작 사이트 Cartographer’s Guild에서 만드는 법을 보고 김프로 초간단한 던젼부터 만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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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이보다 훨씬 원대한 듯도 하지만 별로 상관없어!
에, 정말 아무것도 없지만 가구라도 좀 가져다놓으면 낫겠죠 (먼산). 축적이 한 칸에 5피트 (약 1.5m)라고 한다면 통로는 계속 좁군요. 비집고 들어가서 적과 아군의 선두가 1:1로 마주해야 하는 처절한 비비적 던전입니다. 김프는 이전부터 쓰고 있었지만 그리드 활용법, 그리드 렌더링 등 유용한 기능을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제 던젼의 달인이 되었으니(??) 김프로 간단한 산지 지형도 만들어보고 싶은데, 가입과정에 삑사리가 나서 예제 그림을 봐가며 할 수가 없군요. 어쨌든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남대문 시장의 큰손 박물군자 이야기

요즘은 도서관에서 서울 지리와 민담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펼친 민담집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책이 앞에 없어서 (엄청나게 육중해서 집에까지 가져오기가 좀…) 기억을 더듬어 제 표현대로 적습니다. 원래 민담이란 그런 거기도 하니까요.

남대문 시장 사진

오늘날의 남대문 시장

조선시대에 남대문 시장에는 성은 박, 이름은 물군자라고 하는 (아무래도 뻥카 같지만…) 큰 상인이 있었어. 이 사람은 물건 가격이나 가치라면 모르는 게 없이 훤히 꿰둟고 있어서 있어서 온 시장 장사치가 찾아와서 가격을 묻지 않았겠어. 박물군자가 물건 가격을 정확하게 알려주니까 속임수 당하는 일이 없고, 파는 사람하고 살 사람 중개도 해줘서 박물군자는 돈도 많이 벌었고 신용도 참 좋았지.
박물군자가 얼마나 물건값을 잘 아느냐 하면, 한번은 어떤 사람이 누가 알아볼까 시험해 보려고 짚에다가 댓 냥을 집어넣고 꼬아서 시장 바닥에 버렸어. 시장 바닥에 버린 짚을 아무도 눈여겨볼 리가 없는데, 박물군자는 지나가다가 떠억 멈춰서더니 이야, 저 짚을 줍는 사람은 다섯 냥 벌겠다 했다는 거야.
어쨌든 그런 사람이야. 그러다가 어느날 밤, 박물군자는 큰 거래를 성사시키고 취기도 좀 오른 채로 집에 가고 있었어. 기분도 좋겠다, 평소하고는 다른 길로 집에 들어가기로 했지.
걸어가다가 보니 길가에 다 무너져가는 폐가가 하나 있었어. 그런데 왠걸, 사람도 안 살 거 같은 집인데 안에서 어떤 여자가 너무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솔직히 얼마나 소름이 끼쳤겠어. 나같으면 그대로 도망갔을 것 같은데, 박물군자는 좀 귀기울여 봐도 귀신이 아니라 사람 곡성 같아.

이게 무슨 일인가, 이상타 싶어서 가려고 해도 발이 안 떨어지네. 그래서 다 허물어진 대문 앞에 가서 이리 오너라~ 불렀지. 몇 번 부르니까 옷은 남루하지만 기개가 꼿꼿하고 품위있는 노인이 나와.
박물군자 왈, 내가 지나가다 보니까 이 집 안에서 어떤 부인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인가 좀 알고 싶어서 들렀다고 했어. 노인은 남이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집안일이라고 정중히 보내려고 하는데, 우리의 박사장은 그냥 안 간 거지. 사람이 서로 돕고 살아야지, 도움을 주면 나중에 도움도 받고 좋은 거 아니냐고 설득하니까 노인이 그것도 그렇다고 들어오라고 그랬어.
밖에서 봐도 쓰러져가는 집이었지만 안에 보니까 정말 귀신나오게 생겼데. 을씨년스러운 집안에 사람이라고는 노인하고 노부인밖에 없는데, 아까 통곡하고 있던 건 부인이었어.

사정을 들어보니까 노인은, 아 부르기 쉽게 김대감이라고 하자. 김대감은 평생 청렴한 관리였는데, 부부 슬하에 자식이 없었어. 은퇴해서 나라 녹을 그만 먹게 되고 나니, 축재해놓은 것도 없고 돈이 없어진 거지. 그래서 하인들은 다 도망가고, 모아놓은 돈도 다 쓰고 그나마 있는 물건 다 팔아 끼니를 때우다 보니까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야. 부인이 말하길, 자기는 자식도 못 낳아준 칠거지악을 했는데 이제 영감이 굶어 돌아가시게 생겼으니 너무 가슴이 아파 울고 있었대.

박물군자는 이 노후대책 대실패 커플을 어떻게 살려볼 길이 없나 궁리를 하지. 집안에 뭐 하나라도 더 팔아서 돈을 만들 물건이 없나 하고 둘러보는데, 하도 팔아먹었던지라 장대를 휘둘러도 걸릴 게 없어.
그러다가 김대감이 깔고앉은 방석이 눈에 딱 들어오는거야. 삽살이 털로 만든 방석인데, 앉아있으면 엉덩이가 뜨뜻해진다나.

박물군자가 벌떡 일어서면서 그 방석 나 좀 줘보라고, 이걸로 돈 만들어오겠다고 그래. 노부부는 이 낡은 방석이 무슨 돈이 되냐고 그러는데, 이미 봤겠지만 박사장으로 말하면 조르기가 특기인 사람 아니겠어. 내가 알아서 해드리겠다며 박물군자는 그나마 김대감 할아버지 엉덩이 뜨뜻하게라도 해주던 방석을 들고 날르지. 김대감하고 마님은 왠 미친놈인가 했을 거야.

이 낡은 개털 방석을 들고 박물군자는 그대로 남대문 시장으로 돌아가서 잘 아는 도매상네 집으로 가. 그리고 밤이 늦었는데 상인을 막무가내로 깨우네? 부르기 편하게 도매상은 이사장이라고 할게. 이사장이 아니 박사장 이 시간에 왠일인가 하니까 박사장이 이사장님 이 방석 좀 사셔야겠습니다 하는 거야. 아니 그런 다 떨어진 방석을 사다니? 이사장은 황당한 거야. 얼마에?
그러니까 이 천하의 물건값을 모르는 거라고는 없는 박물군자 하는 소리, 백 냥만 주십쇼 그래. 오늘날로 치면 그게 1억원이라나.
오밤중에 일어난 이사장, 그대로 뒷목잡고 쓰러지실 뻔하지. 아니 이 사람아, 누가 그런 방석을 백 냥을 주고 사? 여기서부터 박사장 다시 매달리기 작전 들어간다. 이사장님, 제가 언제 허튼소리 하는 거 보셨습니까? 제가 언제 값을 속이데요? 이거 사면 이사장님 가게 잘 되실 걸 아니까 제가 특별히 팔려고 하는 겁니다.
그 그건 맞지 박사장.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사장님이 이 방석 안 사시면요, 그대로 가져다가 저 건너편 최사장님께 팔 겁니다. 그럼 최사장님네가 잘 되고 이사장님네는 안 될 텐데, 그래도 정말 괜찮으세요? 그때 가서 후회하시나 안하시나 두고 봅시다.
원래 사람이란 게 말이야, 자기가 잘 된다는 소리에는 주저를 좀 해도 자기보다 남이 잘 된다는 말에는 벌써 아랫배가 슬슬 아파오잖아. 이사장은 결국 항복해버리지. 알았네 알았어, 내 자네를 믿고 그리 하지. 틀림없는 거겠지?
어디 이를 말씀입니까, 싸장님. 저 그러면, 지금 선금으로 석 냥 주시고 나머지는 내일 이러저러한 곳에 있는 집으로 갖다주시는 겁니다. 정말 후회 안하실 겁니다. 방석은 꼭 잘 보관하셔야 합니다.
이사장은 좀 입맛이 썼겠지만 그게 최사장한테 안 간 것만 해도 어디야. 박물군자는 계약금 세 냥을 챙겨다가 당장 굶고 있는 김대감 내외가 먹을 음식부터 사서 그 집으로 돌아가.
음식 싸들고 다시 나타난 박물군자를 보고 노부부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박사장은 일단 밥부터 먹고 보자고, 이러고도 돈이 남았다고 거스름돈을 드리지. 그리고 셋이서 야참 먹은 후에 돈 만든 게 이게 다가 아니고 내일 아흔일곱 냥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김대감네는 반신반의해. 세상에 어떻게 그 낡은 개털 방석으로 백 냥을 만들어?
그런데 정말로 다음날에 이사장네서 보낸 돈짐을 지고 찾아와서 아흔일곱 냥 계산해서 주고 가네. 노부부는 상상도 못한 돈을 만져보고 서로 눈이 이만해져서 보고 있는데, 박물군자가 그래. (집에서 재워줬거나 아니면 아침 일찍 김대감네로 출근했나봐.) 대감님, 마님, 이 돈 그대로 쓰시면 얼마 안 가서 또 굶습니다. 장사를 해야 합니다. 저도 밀양 박씨로서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남대문 장사치로 살아가고 있는데, 제가 점포 하나 얻어드리고 다 가르쳐드릴 테니까 돈을 불려서 노후대책 좀 해보시렵니까?
김대감하고 마님은 막, 우리 은인한테 무슨 토를 달겠냐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그러지. 그래서 그날부터 두 노인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거야. 그 뒤에는 박물군자의 노하우가 있으니 성공은 따논 당상 아니었겠어?
그렇게 몇 년 열심히 장사를 하니까 아흔 일곱 냥 초기투자액을 불리고 불려서 무려 삼만 냥을 번 거부가 되어있던 거야. 두 부부가 당장 일 관두고 평생 쓰기만 해도 다 못쓸 만큼 돈을 번 거지.
그러자 박물군자가 두 사람에게 물어봐. 김대감님, 마님, 두 분께서 이제 삼만 냥이 있으신데, 이 중에서 일만 냥 떠나보내도 생활에 지장은 없으시겠지요?
김대감네가 그래. 이만 냥이면 두 늙은이 은퇴해서 평생 써도 한참 남고, 박사장이 사실 돈 다 벌어준 은인인데 당연히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하고 아주 혼쾌하게 대답을 하지.
박물군자가 끄덕끄덕…하더니 하는 말이,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그대로 하십시오. 사람을 보내서 남대문의 이러저러한 도매상을 하는 이사장님네로… 하고 쑥덕쑥덕 지시를 해.
다음날, 남대문 도매상 이사장네에 박물군자가 놀러와 있는데 누가 찾아와서 물건 좀 사자 그래. 뭘 찾으시냐 하니까 여기서 보관하고 있는 개털 방석이 필요하다는 거야.
으잉, 방석? 이사장님은 그런 물건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박사장이 아 왜 그때 그거 있지 않습니까 해서 찾게 시키는데, 아무래도 다 낡은 방석을 백 냥에 사고 입맛이 썼던지 대들보 위에 대충 쑤셔넣고 있었던 모양이야.
직원 시켜서 내리게 해서 보니까 방석은 낡다 못해 곰팡이 슬고 군데군데 썩었어. 그런데 찾아온 손님이 이 물건을 꼭 만 냥에 사야겠다는 거야. 그리고서는 사태 파악이 안 된 이사장이 황당하게 보는 동안 준비해온 만 냥을 내려놓고 그 방석을 들고 가버린 거지.
이사장님 너무 놀라 뒷목 잡고 쓰러지시게 생겼는데, 옆에 박물군자가 태연하게 한 마디 하지. 그러게 내가 뭐랬습니까? 그 방석을 사야 이사장님이 잘 된댔지요? 그래서 남대문 상인들이 역시 박물군자의 말은 틀림이 없다고 다들 감탄을 했대.
여러모로 박물군자 이야기는 우리나라 민담으로서는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지식이 일천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소설이나 설화에 상업이 소재로 등장하는 일은 좀처럼 없고, 허생전에서처럼 등장하는 일이 있을 때에도 투기와 사재기 같은 부정적인 각도인 것 같거든요. 반면 박물군자 이야기는 신용과 정직성, 정당한 대가 등 상업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고, 청렴한 공직이라는 유교적 삶을 오히려 굶어죽기 딱 좋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박물군자 자신도 양반 태생의 상인이라는 설정으로 보아서는 양반 계층이 몰락하고 상업이 조금씩 발달한 조선 후기에 나타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다른 가능성이라면 일본 이야기가 일제시대 때 건너와서 우리식으로 변형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혹시 아시는 분 있나요?
박물군자 이야기가 우리나라 설화가 맞다면 알려지지 않은 건 참 아쉬운 일입니다. 너도나도 고시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거나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시대에, 박물군자 이야기에 나타난 정직한 상업, 베푸는 상업은 정말 소중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참 기분좋게 읽은 이야기라서 조금이라도 알려볼까 하여 이렇게 올려봅니다.

당신의 두뇌를 접수한다: 뉴욕 공공도서관 전자회랑

Story Games에서 옛~날에 보았던 링크인데,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다가 다시 그 마의 수렁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NYPL Digital Gallery

자연사, 역사, 지리 등에 관련한 온갖 그림과 사진 자료를 모아놓은 곳입니다. 시각적 자료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정신 놓고 시간 보내기 딱 좋지요. 터키 자료만 백 장 넘게 내려받은 것 같습니다. 혼자 폐인 되기는 억울해서 올려둡니다.

한국사에 대한 재밌는 글들

이번 달 말 일일플레이 준비하면서 자유시 참변 자료를 찾다가 한국사에 관한 재밌는 글들이 있는 블로그를 발견하여 올려둡니다.

신들의 황혼 (한국사 분류)
덕분에 자유시 참변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고, 다른 글들도 시간을 두고 읽어보고 싶네요.
아울러 일제시대 및 항일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 (책, 영화, 웹사이트 등) 아시는 것 있으면 알려주세요~

이들이야말로 진짜 일루미나티인가

미국에서는 최근 한 의원과 주지사(주:네바다 상원의원 John Ensign,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 Mark Sanford)의 스캔들과 관련하여 이들이 속한 종교단체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가족’ (The Family)라는 이름의 이 보수적 기독교 단체는 워싱턴 D.C.의 C가(街)에 집을 소유하고 있어서 (The C Street House) ‘가족’에 속한 정치인들에게 집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해당 의원과 주지사는 C가에 있는 집에서 영적 상담을 받는 등 연고가 있다고 하는군요.

세간의 관심을 끈 점은 ‘가족’의 신념과 신앙이 일반적인 종교 계율이나 도덕률과는 좀 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가족’에 대해 책을 쓴 작가 제프 샬렛 (Jeff Sharlet)에 따르면 ‘가족’은 권력자가 곧 신의 선택받은 자이며, 성공적인 권력자가 하는 행동은 뭐든지 옳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자에게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모아주고 없는 이를 위한 정부의 사회보장을 모두 없애며, 빈민은 소수의 엘리트의 자비에만 기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군요.

‘가족’의 신념에 따르면 성공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도덕과 법의 적용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를 강간했다고 하더라도 권력자에게는 일반 규범을 적용할 수 없다고 말이지요. 또한, 이들은 권력을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의 예로 히틀러, 폴 포트, 레닌 등을 든다고 합니다. 결국 권력이야말로 선이고 신성하며, 권력이 있는 사람이 나머지를 짓밟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 ‘가족’의 기본 신앙인 셈입니다. (아래 두 인터뷰 동영상 참조)

상식인 로키로서는 참 골때리는 얘기입니다만, RPG인, 그리고 진행자로서의 로키는 ‘이야! 재밌다! +_+’ 하고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면 슬픈 일이죠. (…) 제프 샬렛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일단 제쳐두도록 합시다. 위와 같이 도덕과는 별 상관없는 행동 계율을 기반으로 삼고 있고, 또 막후의 권력이 되고자 로비스트 등록도 포기하고 그늘 속에서만 일하는 권력자 집단이라니… 이건 마치…

일루미나티!!

도덕과 괴리된 권력 숭상, 그리고 그늘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정말 훌륭한 일루미나티 집단의 요소가 아닐까요. 등장하는 시대는 21세기 혹은 그 이후, 행동하는 공간은 민주국가인 것이 어울리겠지요. 너무 옛날이거나 이미 독재인 국가라면 그 악은 반감되어 버리니. 무엇을 해도 자신은 옳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그늘 속에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평등, 평화와 안정이라는 사회적 기반을 천천히, 꾸준히 잠식하는 집단이라니, 생각만 해도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이런 집단은 주인공 일행이 맞설 만한 좋은 악역 집단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꽤나 매력적인 악역도 나올 수 있겠고요. 이 집단의 일루미나투스 (혹은 일루미나타)가 주인공에게 할만한 일장 연설도 이미 떠오르는군요. 사탄이 예수를 산꼭대기로 데려간 순간부터 수퍼히어로 만화와 스타워즈까지 역사가 유구한, 모든 인간 사회와 인간 영혼의 갈등의 중심에 선 바로 그 말들이.

“권력이 곧 선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너희가 여기까지 우리를 추적하고 또 때로 우리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지? 네가 도덕적이어서인가? 아니다, 네가 강하기 때문이다. 너는 이미 힘이 곧 선인 것을 머리로 부정하더라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을 부정하지 말아라. 우리가 너에게 펼쳐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외면한 채 약하고 무가치한 자들을 위해 희생할 때는 지났다. 너는 이미 ‘가족’의 일원이다!”

아니면 주인공 집단이 아예 일루미나티인 것도 재밌는 상상입니다. 악 캠페인을 돌리는 일반적인 문제에 봉착하기 쉽겠지만요. 주인공들은 그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도덕과 괴리된 권력에 대한 숭상은 그들의 삶에 어던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들은 어떤 내적 갈등을 겪을까? 하는 질문들이 중심적이겠지요. 규칙은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소서러 (Sorcerer), 혹은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 같은 것이 가능할 테고요.

뭐, 진행자가 아닌 상식인으로서 로키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권력 숭상은 너무 유치하고 유아기적인 발상이라서 도저히 눈뜨고 못 봐주겠다는 쪽이기는 합니다. 성공은 재능과 환경 노력과 운이 받쳐줘서 되는 거지 무슨 신의 선택이나 선의 징표하고는 개념상 무관하니까요. 내가 잘나서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나르시시즘의 종교적 정당화인지라 솔직히 콧방귀도 안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소재가 극적으로는 흥미가 가는 것은 역시 어딘가에는 끌리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겠죠. 무엇보다, 나르시시즘을 종교적, 이념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신념이 강한 사람은 최소한 자신에 대한 믿음은 확고할 테니까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적어도 자신과 권력에 대한 확신은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겠죠. 도덕적 역설과 회색 지대에 정신이 팔린 우리 건전한 상식인들은 그에 대응할만한 확신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사회라는 거대한 일루미나티 캠페인은 끝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너는 무엇을 믿는가?’ 그에 대해 사람마다 다양한 답을 찾아낼 테고, 일루미나티가 되는 사람들은 ‘자신과 권력’이라는 한 가지 답을 찾아냈을 뿐일지도요. 일루미나티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아낼까요? 혹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한 우리들은?

빌 마허 인터뷰:

레이첼 매도우 인터뷰:

장 발장과 쟈베르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며칠 푹 빠져서 지냈습니다. 고등학교 때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던 소설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최근 수전 보일 비디오 때문에 뮤지컬에 대한 관심도 불붙었죠.

[#M_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닫기|서사적인 작품답게 레 미제라블은 연애에서 혁명까지 인간사의 온갖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심축을 이루는 갈등이라면 주인공 장 발장과 그의 숙적 쟈베르 형사의 자갸 나 잡아봐라 끈질긴 추격전과 근본적인 가치관 대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RPG인 입장에서 흥미가 간 점이라면 역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사상 대립은 AD&D식 성향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을까요. 법의 손을 피해 도망치는 범죄자이면서도 늘 자비를 베풀고 올곧게 행동하는 장 발장은 CG (혼돈 선) 내지는 NG (중립 선)이겠고, 법과 질서에 절대적으로 집착하고 어떤 자비나 인간적 고려도 거부하는 쟈베르는 LN (질서 중립) 성향이겠죠.

쟈베르가 워낙에 무자비하게 나오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LE (질서 악)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는 건 또 아니니까 역시 LN 분류가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저 법 앞에서는 다른 어떤 고려사항도 그에게 무의미할 뿐이죠. 쟈베르에게 법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음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비디오는 레미제라블 10주년 콘서트 영상)

Stars

별들이여

There, out in the darkness
A fugitive running
Fallen from God
Fallen from grace
God be my witness
I never shall yield
Till we come face to face
Till we come face to face

저 밖에, 어둠 속에
도망치는 불쌍한 자
추락해서 신에게서
그 은혜에서 멀어진…
신께 맹세하리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와 대면하는 순간까지
그와 대면하는 순간까지

He knows his way in the dark
Mine is the way of the Lord
And those who follow the path of the righteous
Shall have their reward
And if they fall
As Lucifer fell
The flame
The sword!

그는 어둠의 길을 알지만
내 길은 주님의 길이니
옳은 길을 따르는 이들은
상 받을지라
그리고 루시퍼가 추락했듯
추락하는 자에게는
화염이 있을 뿐
검이 있을 뿐!

Stars
In your multitudes
Scarce to be counted
Filling the darkness
With order and light
You are the sentinels
Silent and sure
Keeping watch in the night
Keeping watch in the night

별들이여
헤아릴 수도 없이
무수히 그대들은
어둠 속에 가득
질서와 빛을 채우네
침묵하는 확고한
그대 파수병이여
어둔 밤을 지키는
어둔 밤을 지키는

You know your place in the sky
You hold your course and your aim
And each in your season
Returns and returns
And is always the same
And if you fall as Lucifer fell
You fall in flame!

천공 중에 제자리를 지키고
방향과 길에서 어긋나지 않네
그리고 각자의 철에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변함없는 항상성이여
루시퍼가 추락했듯 추락할 때면
화염에 휩싸이나니!

And so it must be and so it is written
On the doorway to paradise
That those who falter and those who fall
Must pay the price!

그래야만 하고 그렇게 기록되었으니
천국의 문에 새기었듯
흔들리는 자, 추락하는 자는
대가를 받으리라!

Lord let me find him
That I may see him
Safe behind bars
I will never rest
Till then
This I swear
This I swear by the stars!

주여 그를 찾게 하소서
안전히 그를
제자리에 되돌리도록
그날까지 나는
쉬지 않으리다
나 그렇게 맹세하니
별들에 걸고 맹세하노니!

자칫 밋밋한 악역이 되기 쉬운 인물에 이 정도 깊이를 부여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감탄한 대목이었습니다. 어둡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질서, 별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죄수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쟈베르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절절하게 와닿았죠. 그것은 밑에도 나오는, 그가 감옥에서 태어나 비참하게 자라난 어린 시절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그 혼돈과 어둠에 빠질 수 있다는 불안이 그의 삶을 얼마나 크게 지배했을까요.

그래서 쟈베르는 법을 권력으로 삼아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는 위선자라기보다는 법과 질서라는 이상 앞에서는 자비고 사정이고 뭐고 상관도 안하는 이상주의자라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 이상은 법과 무관한 선을 실천하는 장 발장이라는 인물에게 도전받고, 그 대립은 다음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죄수를 체포하러 온 형사, 불쌍한 여인이 남기고 죽은 어린 딸을 보호하기로 맹세한 죄수. 한쪽은 법과 질서, 다른 쪽은 자비와 인정의 언어를 말하는 상태에서 이들의 대립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죠.

Confrontation

대면

[JAVERT]
Valjean, at last,
We see each other plain
`M’sieur le Mayor,’
You’ll wear a different chain!

[쟈베르]
발장, 마침내
똑바로 보게 되었군
시장 나으리
전과는 다른 사슬을 둘렀어(주:죄수를 묶은 사슬과 시장이 목에 거는 관직의 증표를 빗댄 것)

[VALJEAN]
Before you say another word, Javert
Before you chain me up like a slave again
Listen to me! There is something I must do.
This woman leaves behind a suffering child.
There is none but me who can intercede,
In Mercy’s name, three days are all I need.
Then I’ll return, I pledge my word.
Then I’ll return…

[발장]
기다려 주게, 쟈베르
다시 날 노예처럼 사슬로 묶기 전에
내 말을 들어! 난 해야 할 일이 있네
이 여인은 고통받는 아이를 남겨두고 갔네
나밖에는 개입할 사람이 없어
자비의 이름으로, 사흘이면 되네
그러고 나면 돌아오겠네, 맹세코
그러고 나면 돌아오겠어

[JAVERT]
You must think me mad!
I’ve hunted you across the years
A man like you can never change
A man such as you.

[쟈베르]
누굴 바보로 아는가!
몇 년이나 너를 추적했다
너 같은 자는 변하지 않아
너 같은 자는…

[VALJEAN/JAVERT]
Believe of me what you will/Men like me can never change
There is a duty that I’m sworn to do/Men like you can never change
You know nothing of my life/No, 24601
All I did was steal some bread/My duty’s to the law
You know nothing of the world/You have no rights
You would sooner see me dead/Come with me, 24601
But not before I see this justice done/Now the wheel has turned around

[발장/쟈베르]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나 같은 이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맹세한 의무가 있다/너 같은 자도 변하지 않아
나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아니지, 죄수 24601
나는 빵을 훔쳤을 뿐이다/나는 법에 대해 의무가 있다
세상에 대해 무얼 안다고/네게 권리 따위는 없다
내가 죽은 꼴을 보고 싶겠지만/따라와라, 24601
정의를 행하기 전에는 안 된다/이제 수레바퀴는 돌아왔고

[JAVERT]
Jean Valjean is nothing now!

[쟈베르]
장 발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VALJEAN/JAVERT]
I am warning you Javert/Dare you talk to me of crime
I’m a stronger man by far/And the price you had to pay
There is power in me yet/Every man is born in sin
My race is not yet run/Every man must choose his way
I am warning you Javert/You know nothing of Javert
There is nothing I won’t dare/I was born inside a jail
If I have to kill you here/I was born with scum like you
I’ll do what must be done!/I am from the gutter too!

[발장/쟈베르]
경고한다 쟈베르/감히 나에게 말하느냐
훨씬 강한 쪽은 나야/죄와 네가 치른 대가를?
나는 아직 힘이 있고/누구든 죄 중에 태어나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누구든 스스로 선택한다
경고한다 쟈베르/네놈은 쟈베르를 몰라!
난 못할 짓이 없다/감옥에서 태어난 나다
여기서 널 죽이는 한이 있어도/너 같은 쓰레기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을 하겠어!/나도 시궁창에서 나왔다!

[Valjean breaks a chair and threatens Javert with the broken piece. Turns to Fantine]

(발장은 의자를 부수고 부서진 조각으로 쟈베르를 위협한다.)

[VALJEAN]
[to Fantine] And this I swear to you tonight

[발장]
(팡틴에게) 이것을 맹세하리다

[JAVERT]
[to Valjean] There is no place for you to hide

[쟈베르]
(발장에게) 숨을 수 있을 줄 아느냐

[VALJEAN]
Your child will live within my care

[발장]
당신 아이는 내가 돌보겠소

[JAVERT]
Wherever you may hide away

[쟈베르]
네가 어디에 숨는다 해도

[VALJEAN]
And I will raise her to the light.

[발장]
그 아이를 빛 속에서 키우겠소

[VALJEAN AND JAVERT]
I swear to you, I will be there!

[발장/쟈베르]
그곳에 내가 있으리!

[They fight, Javert is knocked out. Valjean escapes]

(격투 후 발장은 쟈베르를 제압하고 탈출한다)

이전의 폭력성과 세상에 대한 원한을 극복한 장 발장도 (주교 덕분에 CE -> CG로 개과천선!) 쟈베르 앞에서는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쟈베르가 발장의 존재에 위협받는 것 못지않게 발장 역시 쟈베르에게 위협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는 물론이지만 세계관 자체를 말이지요.

그리고 발장이 팡틴의 딸 코제트를 양녀로 키우면서 세월이 흐릅니다. 코제트는 젊은 학생 마리우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마리우스는 반왕정 폭동 중 부상을 입고, 발장은 그런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구로 탈출합니다. 그 과정에서 발장은 쟈베르의 목숨을 손에 쥐고도 그를 살려주지요. 그리고 그 모순을 견딜 수 없는 쟈베르가 센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면서 둘의 오랜 대립은 결말을 맺습니다.



Javert’s Suicide

쟈베르의 자살

[VALJEAN]
It’s you, Javert
I knew you wouldn’t wait too long
The faithful servant at his post once more
This man’s done no wrong
And he needs a doctor’s care

[발장]
자네로군, 쟈베르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줄 알았지
자리를 지키는 충직한 하인처럼
이 사람은 잘못한 게 없네
치료를 받아야 해

[JAVERT]
I warned you I would not give in
I won’t be swayed

[쟈베르]
경고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나는 흔들리지 않아

[VALJEAN]
Another hour yet
And then I’m yours
And all our debts are paid

[발장]
한 시간이면 되네
그러면 끝이야
그 후에는 모든 빚을 갚는다

[JAVERT]
The man of mercy comes again
And talks of justice!

[쟈베르]
자비의 화신이 또 나타나
정의를 외치는군!

[VALJEAN]
Come, time is running short
Look down, Javert
He’s standing in his grave

[발장]
부디, 시간이 없네
발밑을 보게, 쟈베르
젊은 목숨이 죽어가네!

[VALJEAN/JAVERT]
Give way, Javert/Take him, Valjean
There is a life to save/Before I change my mind

[발장/쟈베르]
비켜라, 쟈베르/데려가라, 발장
구할 목숨이 있어/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JAVERT]
I will be waiting, 24601

[쟈베르]
기다리겠다, 24601

Who is this man?
What sort of devil is he?
To have me caught in a trap
And choose to let me go free?
It was his hour at last
To put a seal on my fate
Wipe out the past
And wash me clean off the slate!
All it would take
Was a flick of his knife
Vengence was his
And he gave me back my life!

이 자는 누구인가?
무슨 악마인가?
나를 함정에 잡고도
스스로 놓아주다니?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 운명을 결정할
과거를 지우고
나를 지울 수 있었는데!
칼 한 번 휘두르면
되는 일이었건만
복수의 기회를 쥐고도
내 생명을 돌려주다니!

Damned if I’ll live in the debt of a theif!
Damned if I’ll yield at the end of the chase.
I am the Law and the Law is not mocked
I’ll spit his pity right back in his face
There is nothing on earth that we share
It is either Valjean or Javert!

도둑에게 빚지고 살 줄 아느냐!
추적의 마지막에 포기할 것 같은가!
나는 법이며, 법은 절대적이다!
그 알량한 동정심은 면상에 되뱉어주지
우리에게 공통점이란 없다
발장 아니면 쟈베르인 거야!

How can I now allow this man
To hold dominion over me?
This desperate man whom I have hunted
He gave me my life, he gave me freedom.
I should have perished by his hand!
It was his right.
It was my right to die as well
Instead I live, but live in hell!

이제 어떻게 저 자에게
마음으로 빚을 지고 살아갈까
내가 사냥한 저 흉악범이
내게 삶과 자유를 주다니
그의 손에 죽었어야 했다
그것이 그의 권리
죽는 것은 나의 권리기도 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삶이 곧 지옥이구나

And my thoughts fly apart
Can this man be believed?
Shall his sins be forgiven?
Shall his crimes be reprieved?

생각을 걷잡을 수 없네
이자를 믿을 수 있는가
그의 죄가 용서받을까
그의 범죄에 참회가 있는가?

And must I now begin to doubt
Who never doubted all these years?
My heart is stone and still it trembles
The world I have known is lost in shadow.

이 오랜 세월 의심 없던 내가
이제 의심을 품어야 하는가?
돌과 같은 내 심장이 떠는구나
내 알았던 세상은 그림자에 묻혔네

Is he from heaven or from hell?
And does he know
That granting me my life today
This man has killed me even so?

이는 천국에서, 혹은 지옥에서 온 자인가?
그는 알고 있을까
오늘 내게 생명을 줌으로써
똑같이 죽였다는 사실을?

I am reaching, but I fall
And the stars are black and cold.
As I stare into the void
Of a world that cannot hold

손을 뻗으나 닿지 않아
별빛은 검고 어둡네
산산히 분열하는 세계의
거대한 공허를 들여다보며

I’ll escape now from the world
From the world of Jean Valjean
There is nowhere I can turn
There is no way to go on…..

그 세계에서 탈출하리라
장 발장의 세계에서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아
더는 갈 길이 없다…..!

결국 법이 절대적이었던 쟈베르의 세계관 속에서 법과 도덕의 모순은 설 자리가 없었죠. 그의 경직된 세계관에 균열이 드러난 순간 쟈베르는 삶 자체를 버립니다. 장 발장의 세계에서 벗어난다고 표현했듯, 쟈베르를 살려줌으로써 발장은 쟈베르의 세계관을 깨고 발장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지만, 쟈베르는 평생 절대적이었던 신념을 버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쉬웠겠지요. 부러지되 휘지 않는 철처럼. 세상은 발장 아니면 쟈베르여야 했고, 그 답이 발장이 된 이상 쟈베르는 부정당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발장을 끈질기게 쫓으면서 쟈베르가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혼자 쫓는다는 것은 고집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 결과는 예정되어 있기도 했죠. 그렇게 해서 발장이 더 참지 못하고, 혹은 탈출하려고 쟈베르를 죽이면 올바른 질서는 흐트러지지 않으니까요. 범죄자를 쫓다 순직하는 형사, 형사를 살해하는 흉악범. 마치 별들의 운행처럼 자연스러운 질서는 변함이 없겠죠. 죽이는 것이 발장의 권리였듯이, 죽는 것은 쟈베르의 권리였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렇게 있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 시나리오가 어긋난 순간 질서는 어그러졌고, 지극히 조화로웠던 별들은 어둠을 지켜주던 그 변함없는 빛을 잃었습니다. 그 세계 속에 더는 쟈베르가 설 자리가 없었죠. 아니, 그런 세계를 쟈베르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져버린 세상 속에서 유일한 확실성을 찾아 떠납니다. 죽음이라는 확실성, 인간사의 유일한 절대적인 질서를 찾아._M#]
장 발장과 쟈베르의 경우와 같은 세계관 대립은 굉장히 흥미진진한 소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RPG에서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표현할 규칙이라는 추가적인 도구도 있죠. 성향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고, 면모로 표현할 수도 있고, 장단점일 수도 있고…

갈등은 극을 끌어가는 주요 요소이며, 특히 그것이 근원적인 세계관 충돌의 표현일 때 더욱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허구에서 그렇듯 RPG에서도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모든 재미있는 허구의 끝에는 진실의 일면이 있기에.

네덜란드는 왠지 멋지다

네이버 TRPG 카페 일일 플레이 인물을 짜던 와중에 네덜란드인 이름을 설정하느라 관련 위키피디아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인은 멋지다는 걸 느껴버렸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811년 프랑스에 정복당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성씨는 의무사항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때 성씨를 등록하라고 지시받았는데, 이건 임시적일 거라고 생각한 많은 네덜란드인이 장난으로 등록한 일도 많다네요. 예를 들어:
De Keizer (더 케이제어): 황제. “이름은?” “나는 (나폴레옹) 황제다!” “나 서기 안할래..ㅠ_ㅠ”
Rotmensen (로트멘센): 썩은 인간들
Poepjes (푸폐스): X. 음 그러니까, 대변.
Piest (피스트): 소변본다. (…)
Naaktgeboren (나크트허보렌): 알몸으로 태어났다
Zeldenthuis (젤덴터이스): 집에 잘 없다
발음은 더 잘 아는 분이 고쳐주시고… 플레이 배경은 17세기인지라 인물 이름 뒤에는 성 대신 아버지 이름을 땄습니다만, 위의 장난스러운 성씨 등록은 정복자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기도 했겠죠. 그러면서도 해학과 재치를 잊지 않았던 면모가 엿보여서 재밌습니다. 오늘날까지 저 성씨들이 남아있다면 물론 후손들을 위해 묵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