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생각과 망상

마스터가 룰링을 할 때 명심할 사항

예전에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전 룰링(Ruling)이라는 개념을 무척 좋아합니다. (‘월드 인 페릴과 룰링’(링크) 참조) 룰링이라는 개념을 다시 설명하자면, 모든 상황에 일일이 룰을 적용하는 대신, 마스터의 감각과 상식을 활용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룰링입니다. 룰이 간단할수록 룰링의 비중은 더욱 커지지요. 예를 들어 전사 PC가 수영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RPG에는 능력치 규칙은 있어도 수영 규칙은 없다고 칩시다. 이때 마스터가 “힘을 써야 하니까 근력 판정해!” “지구력이 필요하니까 건강 판정해!”라고 결정을 하면 그게 바로 마스터의 판단, 즉 룰링입니다.

마스터가 룰링을 잘 한다면 규칙을 적게 사용해도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룰보다 룰링에 더 의존할수록 마스터의 부담은 점점 더 커집니다. 명문화된 규칙, 즉 룰과는 달리 룰링은 마스터의 판단과 재치에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썼던 ‘월드 인 페릴과 룰링’은 특히 AWE 마스터링을 할 때 가질 자세에 관한 글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룰링을 할 때 명심할 사항을 적어보겠습니다.

  1. 인과 관계를 명확하게 만듭니다. 전투에서 할 수 있는게 “공격!” 밖에 없는 단순한 RPG를 예로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PC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린 다음 단검으로 찌르려 한다면,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쓰러지는지 보기 위해 규칙에도 없는 근력 판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 근력 판정을 해야 할까요? 넘어지지 않고 버티려면 힘이 필요하니까요. 사기 판정 같은 게 없는 RPG에서 고블린이 HP가 0이 되지도 않았는데 항복합니다. 왜일까요? 더 싸워봤자 승산도 없고 도망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블린이 제정신이라면, 항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항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일까요? PC들이 가는 길에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여기에서 항복하면 죽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룰링을 적용하든, 그 룰링을 뒷받침할 만한 인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2.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인과 관계는 디테일에서 드러납니다. “상대가 세게 몸을 부딪혔네요. 근력 판정하세요.” 보다는 “상대가 세게 몸을 부딪쳤네요. 여러분을 쓰러뜨린 다음 단검으로 찌르려는 것 같습니다. 버티지 못하면 넘어집니다. 근력 판정하세요.” 라고 좀 더 살을 덧붙이면 플레이어들에게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릴 것입니다.
  3. 일관성을 갖춥니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다시 벌어졌을 때는 같은 논리로 룰링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전에 수영할 때는 근력 판정을 했는데 이번에 건강 판정을 했다면 일관성에 맞지 않습니다. 다만, 플레이어들이 이해할만한 묘사를 한다면 다른 논리를 적용해도 괜찮습니다.
  4. 마스터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장르의 지식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 RPG에서 마을에 네이팜탄이 떨어져서 불이 붙었을 때, 플레이어들이 “강물을 부어서 끕니다!”라고 선언하면 마스터는 네이팜탄이 물로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정도의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많이 알수록 룰링도 쉬워집니다. 해당 장르에서 많이 벌어질 만한 상황을 연구하세요.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는 게 자연스러울지 생각하세요. AWE의 강령-원칙-GM 액션은 이런 부분의 70% 정도를 채우지만, 나머지는 마스터 자신의 노력입니다.
  5. 룰링을 할 때는 테이블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성문화된 규칙으로서 누구나 다 따를 수 있는 룰과는 다르게 룰링은 팀 관습과 문화에 가깝습니다. 플레이어들이 동의할 수 없는 룰링은 횡포입니다. 던전 월드의 태그를 잘 활용한 사례로 들곤 하는 HP 16짜리 용 이야기(링크)’는 테이블에 따라서는 마스터의 횡포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입니다.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이루어지면 좋겠네요.

월드 인 페릴의 전투를 처리하는 법

월드 인 페릴에서, 히어로가 악당에게 심각한 상태를 주었다면 편집장은 악당이 전투를 계속 할지 점검하세요. 심각한 상태는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뼈가 으스러지거나, 희망을 잃는 등 정말 ‘심각’한 상태입니다. 도망칠 건가요? 아니면 항복할 건가요? 전투를 계속 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요?

상태 한계가 바닥나지 않더라도 히어로는 악당을 언제든지 무찌를 수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중간 부분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일시적으로나마 체포한 걸 기억하세요.

그렇다면 상태 한계가 바닥나지 않았는데 히어로에게 잡힌 악당은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세요. 힘을 기르고, 음모를 꾸미고, 동료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6-을 굴리면 그런 일이 발생하겠죠.

상태 한계가 바닥났을 때, 악당은 비로소 진짜 패배를 인정합니다. 히어로는 그제서야 발뻗고 잘 수 있습니다… 새로운 악당이 등장할 때까지, 혹은 악당의 상태가 회복될 때까지 말이지요. 하지만 악당(특히 마스터마인드)의 상태 한계가 바닥나면, 하나의 스토리아크가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부분은 책의 FAQ(p.204)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롤플레잉 실력 격차 줄이기

트위터에서 말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RPG에서 사용하는 기능/능력/전투/기타 등등 판정은 대부분 ‘어떻게 하는가?’ 대신 ‘무슨 목적인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기술자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폭주하는 기계를 멈춰서 도시를 구하는 데 목적이 있지, 기계를 어떤 원리로 멈출지는 (아마도) 모를 것입니다. 플레이어들은 보통 캐릭터만큼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많은 경우 판정에 사용하는 특성의 이름(교섭, 민첩성, 공학, 근접전)만으로 캐릭터가 사용하는 수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공학 기능을 사용해 기계를 멈춰요.”로 선언을 끝내는 플레이어가 있는 한편, 상상력을 동원해 “기계를 멈추기 위해 동력부의 에테르 엔진을 냉각기로 얼려서 날개로 가는 동력을 끊어요.”라고 선언하는 플레이어도 있을 것입니다. 마스터는 물론 좋은 롤플레잉에 보너스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실제로 좋은 롤플레잉에 보상을 주는 RPG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롤플레잉에 계속 보너스를 준다면, 캐릭터의 공학 실력 대신 플레이어의 화술 실력이라는 OOC(Out of Character) 요소 때문에 이익/불이익이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말을 잘 하는 플레이어는 서툰 플레이어보다 판정에 분명한 이익을 받아야 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롤플레잉 실력의 격차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를 들겠습니다:

하나, 규칙을 세밀하게 만든다.

첫번째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규칙으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하는가?’를 규칙으로 해결하려면 캐릭터가 사용하는 방법, 드는 노력과 자원, 투입한 역량과 수단으로 기대하는 효과, 치러야 하는 대가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세한 규칙이 필요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전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세한 규칙이 플레이어의 롤플레잉을 저해하고 그저 주사위 굴림의 횟수를 늘릴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자세한 규칙은 플레이어가 롤플레잉 실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캐릭터를 좀 더 그럴듯하게 플레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적을 공격하는 방법이 단순히 “공격!” 이 아니라 “5피트 이동해서 파워 어택으로 피해 3점 늘려 대검으로 공격!”이라면, 플레이어가 검도 고수는 아니더라도 검도의 고수처럼 행동하고 기분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규칙이 자세해지면, Role플레이보다 Roll플레이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지나치게 자세한 규칙에서 어떤 폐해가 생기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규칙을 좀 더 자세히 사용하려면 이 RPG가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는 부분에 규칙을 집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던전 판타지풍 RPG에서 교섭 규칙보다는 던전 탐사와 전투 규칙 비중이 높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둘, 플레이어의 의도와 수단, 그리고 수단을 사용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한다.

앞에서 말했듯 마스터는 판정할 때 플레이어가 무슨 의도로 행동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왜 이 플레이어는 교섭 판정을 하나요? 교섭 판정으로 상대를 자수시키려는 건가요? 아니면 물건값을 깎으려는 건가요? 우선 플레이어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세요.

의도를 파악한 다음, 마스터는 캐릭터가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 즉 “어떻게?”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보통 어느정도 캐릭터의 행동을 묘사하기 마련이므로, 캐릭터가 사용한 수단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될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는 명확하게 이해를 하기 위해 언제든지 플레이어에게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플레이어는 캐릭터만큼 전문가가 아니므로, 구체적인 세부사항 대신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마스터가 이해할 수 있는) 묘사면 충분합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쓰는 마스터링 기법을 소개하겠습니다. 판정 의도와 캐릭터가 사용하는 수단을 파악한 다음에는 “지금 묘사한 방법이 어떤 식으로 의도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세요?”라고 한번 더 물어보세요(즉, 그 수단을 사용한 이유를 물어보세요). 이 질문은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마스터는 이 질문을 해서 플레이어가 이야기 속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혹은 자신이 플레이어가 선언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건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캐릭터가 사용한 수단에 따라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도 명확할 때가 있습니다.

세가지 예시를 들겠습니다.

첫번째 예시:

마스터: “지금 적군의 장군은 침대에서 쿨쿨 자요. 어떻게 할래요?”

플레이어: “살금살금 기어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단검으로 목을 따서 일격에 죽입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민첩성 판정하세요.” (마스터는 추가 질문을 생략합니다. 이미 ‘적을 죽인다(행동 의도)’ ‘단검으로 목을 벤다(수단)’ ‘입을 막고 단검으로 목을 따면 소리없이 곧바로 죽을 테니까(수단을 선언한 이유).’ 라는 세 가지 요인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예시:

마스터: “사무실은 온통 불바다입니다. 어떻게 할래요?”

플레이어: “불을 끕니다.”

마스터: “어떻게요?” (불을 끈다는 의도는 파악했으니 수단을 묻습니다)

플레이어: “사무실에는 정수기통이 있겠죠? 안에 있는 물로 불을 끕니다.”

마스터: “척 봐도 정수기통 물로는 불을 끄기 턱없이 부족해요.“ (수단을 사용한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됩니다. 물로 불을 끄려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이야기 속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알고 지적합니다)

플레이어: “그렇군요. 그럼 사무실에 쓰러진 사람이 있는지 둘러봅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지각력 판정하세요.” (새로 바뀐 선언은 행동의 의도인 ‘쓰러진 사람을 찾는다’와 수단인 ‘눈’, 수단을 사용한 이유인 ‘눈으로 찾는 게 당연하니까’가 명확하므로 마스터는 곧바로 판정을 시킵니다).

세번째 예시:

마스터: “도둑질한 아이가 잡혀 왔습니다. 어떻게 할래요?”

플레이어: “설득합니다.”

마스터: “무슨 내용으로 설득하고 싶나요?” (의도를 묻습니다)

플레이어: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요.”

마스터: “어떻게 설득할래요?” (의도를 실현할 수단을 묻습니다)

플레이어: “손을 꼭 붙듭니다.”

마스터: “왜 그런 수단을 썼나요?” (플레이어가 왜 손을 잡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수단을 동원한 이유를 묻습니다)

플레이어: “이 아이는 태어나서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까요. 아,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하죠.” (플레이어는 마스터에게 답변하면서 롤플레잉을 보강합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교섭 판정하세요.”

좋은 롤플레잉은 마스터에게 이야기 흐름을 이어나갈 소재를 제공하는 롤플레잉입니다. 플레이어가 “기계를 멈추기 위해 동력부의 에테르 엔진을 냉각기로 얼려서 날개로 가는 동력을 멈춰요.”라고 선언하면, 마스터는 판정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플레이어가 언급한 의도인 ‘기계를 멈춘다’, 수단인 ‘동력부’ ‘에테르 엔진’ ‘냉각기’, 그리고 수단을 동원한 이유인 ‘날개로 가는 동력을 끊는다’를 이야기 진행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게다가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마스터가 자기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편이 플레이를 하기 훨씬 편합니다. RPG에서 상대방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대화가 어딘가에서 어긋나 버리고, 불만족스러운 플레이로 끝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롤플레잉은 화려한 묘사가 아니라 마스터에게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명료한 의사 표시이며, 단순히 권장 수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가 필수로 갖춰야 할 기본 태세입니다.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만한 훌륭한 롤플레잉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도, 수단, 수단을 동원한 이유) 요소를 갖출 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참석한 전원이 탄성을 지를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롤플레잉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너스를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정리글

롤플레잉 실력의 격차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력 격차에 상관없이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세부적인 정보를 마스터와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자세한 규칙입니다. 하지만 규칙이 지나치게 자세하면 플레이 자체가 힘들고 느려지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모든 부분을 자세한 규칙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규칙은 해당 RPG로 구현하려는 플레이 방향에 집중해야 하며, 그 외 부분은 다른 요소로 롤플레잉 실력의 격차를 메워야 합니다. 저는 이 요소가 ‘캐릭터 행동의 의도’, ‘행동 수단’, ‘행동 수단을 선택한 이유’을 정확하게 전달하는(혹은 끌어내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장밋빛 입맞춤 : ~ 수많은 연인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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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이야기는 플레이로 생명력을 얻습니다.

며칠 전 주말의 괴물(Monster of the Week) 단편 OR을 했는데, 캐릭터의 배경은 실제로 플레이에 등장해야 생동감을 얻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마스터링을 해 주신 머스터드젤리님과 같이 플레이해 주신 호경님, 퐁당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단편은 타천사들과 싸우는 플레이였는데, 제 캐릭터는 우연히 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얻어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음모론 덕후였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타천사들에게 성물을 탈취당하고 동료들을 잃어서 복수를 꿈꾸는 수녀와, 세상에 닥칠 위험을 예견한 마녀였죠.

셋 중에서 제 캐릭터가 가장 초자연적 요소와는 거리가 먼 일반인에 가까웠지만, 실제 플레이 동안에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무척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장면에서 제 캐릭터의 배경 이야기가 플레이로 생명을 얻은 덕분입니다.

다른 캐릭터의 배경 이야기는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언급이 되는 수준이었고, 플레이어가 직접 언급을 해야 플레이에 드러났지만,  제 캐릭터는 첫 장면에서 그 단서 때문에 친구들을 잃고, 목숨의 위험을 받았습니다. 또한 플레이의 상당 시간을 잃어버린 단서를 되찾기 위한 모험에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친구들을 잃은 슬픔이나 복수심, 천사들에 대한 두려움 같은 롤플레이가 더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WOD에는 처음 플레이를 시작하는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플레이어와 스토리텔러가 일대일로 서막(Prelude) 장면을 가집니다. 사실 WOD를 제대로 해보지 못해서 그 중요성을 지금까지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왜 서막 장면을 플레이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의 배경이나 과거는 자세하게 만들 필요도, 지나치게 많이 만들 필요도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RPG에서 각종 배경과 설정은 식재료입니다. 플레이는 요리하고 먹는 과정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식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또한 식재료의 양이 많으면 쉽게 요리를 만들 수 있지만, 음식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 이상 준비는 낭비일 뿐입니다.

플레이어들을 얼마나 믿을 것인가?

어제 ‘플레이어간의 믿음’에 관해 트위터의 타임라인이 잠시 시끌시끌했고, 저도 어느 정도 논쟁에 참여를 했습니다(사실 불을 지른 당사자 중 하나죠). 어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RPG에서 믿음은 ‘상식’에 관한 믿음과 ‘역량/지식’에 관한 믿음으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상식 : (GM을 포함한) 플레이어들이 서로가 호의와 선의를 가지고 재미있게 플레이할 것으로 생각하는 신뢰지요. 이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믿음이고, 이걸 전제로 하지 않으면 RPG 자체가 재미가 없습니다. 이건 논의의 대상조차 아닙니다.

역량/지식 :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서로 호의와 선의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면 원하는 만큼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끌어갈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의심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RPG 룰북의 의의도 여기에 있고요.

저는 RPG 규칙이 “이 부분은 플레이어들이 모르거나, 혹은 알더라도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갈 때 논쟁이 발생할 부분”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해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누메네라의 ‘마스터 개입’은 RPG 초기부터 여러 훌륭한 마스터들이 플레이를 진행한 방식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왜 굳이 ‘마스터 개입을 할 때 PC들에게 경험치를 준다’라는 규칙으로 명문화시킨 걸까요?

저는 몬티 쿡 씨가 ‘누메네라를 재미있게 즐기려면 때때로 예측 불허의 위험을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수많은 플레이어는 이 방식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서로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만들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다’ 라는 판단을 내려서 이 규칙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플레이어들의 역량/지식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가정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누메네라의 경험치 규칙 같은 경우는 “이 정도는 팀 내에서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다.” 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테고, 저도 이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저도 별다른 문제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냐! 플레이어들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런 부분도 어쩔 줄 모르는 바보라고!” 라고 한 번쯤 의심하는 건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몬티 쿡 씨 역시 이 부분을 “경험치 옵션 룰”에서 짚고 넘어갔고요.

저는 현대적인 RPG, 또는 인디 RPG의 의의 중 하나가 기존 “전통적 RPG”에서 그저 “팀 내에서 논의만 잘 되면 해결될 문제”라고 여기고 넘어간 사항들을 파헤치고 규칙으로 만든 데에 있다고 봅니다. 낯설게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건 혁신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방법이지요!

페이트 코어/기동형 페이트에서 시도해보고 싶은 일 : ‘기회 만들기’ 액션을 다른 액션에 결합시키기.

페이트에서는 무언가 행동을 할 때는 극복/기회 만들기/공격/방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극복은 무언가 행동을 방해하는 요인을 처리하는 액션이고, 공격은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제거하는 액션이며, 방어는 상대의 행동을 저지하고, 기회 만들기는 유리한 상황 면모를 만들거나 쓸 수 있는 면모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액션이지요.

그런데, 페이트 코어 이후 면모는 “이야기 속 현실”의 역할을 한다고 특히 강조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글에서(http://blog.storygames.kr/?p=1339) 말했듯이 ‘수갑에 묶임’ 면모를 얻은 캐릭터는 손을 쓸 수 없고, “날개” 면모가 있으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터널을 파서 성 안으로 들어간다면 극복으로 들어간 걸까요, 기회 만들기로 “터널”이라는 면모를 만든 걸까요? 상대방의 무기를 뺏는 건 무기를 뺏는 극복 행동일까요, “무기 뺏음”이라는 면모를 붙인 걸까요? 숨겨진 고대의 비밀을 발견한다면 이건 그 정보를 “극복” 행동으로 알아낸 걸까요, 숨겨진 “면모”를 파악한 걸까요?

미국 쪽 RPG 커뮤니티에서도 위 문제로 몇 번 논의가 있었고, 게임 디자이너 중 한 명인 Ryan Macklin은 “정보를 밝혀내는 행동은 별도로 “Discovery Action”을 만들자!( http://ryanmacklin.com/2014/10/fate-the-discover-action/) 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페이트 원작자인 Fred Hicks는 도표까지 만들면서 (https://plus.google.com/+FredHicks/posts/FT6DyiLdD3u) 기존 규칙으로 충분히 이런 애매한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요.

페이트 팬들의 의견은 대체로 “기회 만들기는 보조 수단이며, 장면을 확실하게 끝내는 정보나 행동은 공격이나 극복이어야 한다.” 라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이 부분이 좀 불만입니다. 왜 굳이 두 액션을 인위적으로 분리한 걸까요?

면모가 이야기 속 현실이라면, 무언가 행동을 할 때마다 실제 플레이에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면모가 붙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페이트 코어에서도 “딱히 공짜 발현을 얻으려는 건 아니고, 그저 지금 이런 상황 면모가 있는 게 개연성이 있겠다고 생각하여 제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주사위를 굴리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러이러한 면모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하고, 다른 사람들이 수긍하면 바로 써 넣으십시오.” 라고 설명을 하고 있지요(p.84 면모의 창조와 발견). 게다가 누누이 강조했듯, 페이트에서는 굳이 기회 만들기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상황 면모에 따라 특정 행동의 난이도가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고, 심지어는 특정 행동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인위적으로 기회 만들기라는 행동을 따로 분류해서 면모를 활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실 이미 기회 만들기는 다른 액션에 어느 정도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기회 만들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극복이나 공격, 방어에서 대성공이 나오면 목적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증강도 얻고, 공격을 맞아 입은 피해를 흡수하면 타격이라는 면모를 얻으니까요. 저는 이런 부분에서 페이트의 면모보다는 AWE의 ‘태그’ 쪽이 좀 더 이야기와 규칙을 부드럽게 결합했다고 생각합니다. AWE에서는 굳이 별도의 액션을 분리해 면모를 만들거나 활용할 필요 없이 태그라는 요소를 플레이에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극복과 방어, 공격은 캐릭터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반면, 기회 만들기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뭔가 붕 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네요.

그래서 언젠가는 한번 이 기회 만들기를 극복과 공격, 방어 속에 자연스럽게 녹이는 규칙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아직은 그냥 막연한 생각일 뿐이지만…

p.s : 애스디님이 이 글에 답변으로 쓴 좋은 글이 있습니다 : (클릭)

불량 마스터의 벼락치기 세션 준비 1: 계획

준비할 시간은 1개월이 넘게 있었는데 내가 그렇지 뭘 어느덧 제12회 일일플레이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읭? 난 준비가 안 됐는데?
제 사정 같은 건 생각도 없이 시간은 무자비하게 가버렸군요ㅠㅠ 테플도 못했는데 난 안 될 거야 아마
그래도 일주일이면 길다면 긴 시간이겠죠. 원래 마스터링 준비는 제 약점인 만큼 이번에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더는 미룰 수 없도록 공개적으로! 준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하려는 시스템은 RPG 디자이너이자 이론가인 Robin D. Laws 씨가 준비중인 신작 Hillfolk입니다. 킥스타터 후원을 한 위시송씨를 통해 미리보기 PDF판이 있어서 한 번 해보고 싶어졌지요. 인물 간의 인간관계와 감정적 욕구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점, 감정적 균형을 나타내는 극적 판정은 참가자 간의 흥정과 자원관리로 하고 그 외의 절차적 판정은 위험과 이득 사이를 저울질하는 방식으로 한 점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힐포크 이미지
준비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1. 룰 읽어보기
2. 배경 설정
기본 설정: 한국의 철기를 대략의 모티프로 한 설정
– 주변지역 지도 그리기
– 풍속과 문화 설정: 힐포크 방식대로 참가자에게 던질 질문 목록 작성
3. 룰 요약본 완성
4. 인물 설정
– 인물 관계도
– 시트: 인물 능력치, 양극 설정
5. 보조도구 준비
– 플레이어 자리에 놓는 받침 준비 (PC 능력치, 칩 놓을 자리 등)
– 이름표
– 마스터 노트
– 관계도 표시용 인물카드와 화살표, 압정
6. 플레이테스트
– 시간 없으면 집에서 몇 가지 장면을 해보는 간이 플레이테스트로 대체
으으 귀찮아 엉엉엉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