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던 놀이/이오닉스 - 안힐라스 1기'에 해당하는 글 28건

  1. 2010/06/16 로키 이오닉스 7화 (5): 걸맞는 죽음 (5)
  2. 2010/06/16 로키 이오닉스 7화 (4): 호접몽 (胡蝶夢)
  3. 2010/06/16 로키 이오닉스 7화 (3): 헤루모르로 가는 길
  4. 2010/06/16 로키 이오닉스 7화 (2): 예정이 어긋나다
  5. 2010/06/16 로키 이오닉스 7화 (1): 편지 I
  6. 2010/06/05 로키 이오닉스 4~6화 (3)&(4): 마법사들, 프리포트의 새벽 (2)
  7. 2010/06/05 로키 이오닉스 4~6화 (2): 싸운다는 의미
  8. 2010/06/05 로키 이오닉스 4~6화 (1): 연회장에서
  9. 2010/05/26 로키 이오닉스 2화 외전: 로스로리엘로 가는 길
  10. 2010/05/11 로키 이오닉스 외전 - 그들만의 게임
  11. 2010/04/08 로키 이오닉스 3화 (4): 셀라나 (2)
  12. 2010/04/08 로키 이오닉스 3화 (3): 시장에서
  13. 2010/04/08 로키 이오닉스 3화 (2): 제임스의 집
  14. 2010/04/07 로키 이오닉스 3화 (1): 프리포트 도착
  15. 2010/03/26 로키 이오닉스 2화 (3): 프리포트로
  16. 2010/03/25 로키 이오닉스 2화 (2): 안식의 로스로리엘
  17. 2010/03/22 로키 이오닉스 2화 (1):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18. 2010/03/21 로키 이오닉스 1화 (7)~(8): 추적, 동굴 앞에서 (3)
  19. 2010/03/21 로키 이오닉스 1화 (6): 재앙
  20. 2010/03/21 로키 이오닉스 1화 (5): 잔인한 낙원 에미넴
  21. 2010/03/21 로키 이오닉스 1화 (4): 숲의 보석, 알쿠알론데 (1)
  22. 2010/03/21 로키 이오닉스 1화 (3): 출발
  23. 2010/03/19 로키 이오닉스 1화 (2): 잿빛 메타포노비아
  24. 2010/03/15 로키 이오닉스 1화 (1): 안힐라스로!
  25. 2010/03/14 로키 이오닉스 서주 - 신세계를 떠나며 (2)
  26. 2010/03/04 로키 이오닉스 외전 - 어떤 작별 (5)
  27. 2010/02/26 로키 이오닉스 시범 세션 - 월광(月狂) (4)
  28. 2010/02/26 로키 RPG와 소설의 시점 (월광을 쓰면서)

“무슨 일인가!”

지카리는 의무실 문을 열고 문 꼭대기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그런 그의 뒤로 아라가 서둘러 들어왔다.

“해독제는 찾았지만 발작이 심합니다.”

하얀 작업복을 입고 수염을 천에 말아 감아놓은 드워프가 침착하게, 그러나 한가운데 병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침대 위에는 랜돌프가 척 봐도 극심한 고통에 떨리는 몸을 뒤틀고 있었다. 상처인지 토혈인지 하얀 침대보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떨쳐버리고,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드워프 치유사의 차분한 설명은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해독제 투여일을 너무 많이 늦춘 데다가, 창고를 뒤지는 동안 진통제로 발작을 눌러놓은 것이 오히려 도졌군요.”

“무슨 일 처리를 그렇게…!”

아라가 언성을 높이자 드워프는 그녀를 조용히 마주보았다.

“투여 날짜를 놓친 것은 우리 쪽이 아닐 텐데요?”

랜돌프는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비명도 아닌 끄윽…거리는 신음을 내지르며 침대보를 찢어지도록 세게 쥐었다. 주변의 하얀 옷 입은 치유사들은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노예사냥꾼을 어떻게 살리느냐겠지요.”

랜돌프를 잠시 보다가 치유사는 덧붙였다.

“살리고자 한다면.”

“그는 대원으로서 충실히 활동해 왔네.”

지카리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은 걸맞는 죽음이 아니야.”

“지카리공이 잡아주시겠습니까?”

아라가 그에게 물었다.

“경련이 심하지만, 공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해보겠네.”

고개를 끄덕이고 지카리가 침대로 다가가는 동안, 연청색 액체가 찰랑이는 투명한 병을 든 치유사 조수가 드래고니안을 따라갔다. 그 뒤로 아라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지카리의 손이 닿자 랜돌프는 완강히 저항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지카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고하게 그를 앉혀 뒤에서 양팔을 붙들고 몸을 고정시켰다. 몇 번 더 몸부림치다가 랜돌프는 헉헉거리며 몸이 처졌다.

그러나 조수가 병을 들고 다가가자 그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발버둥을 쳤다.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젖히고 먹이려 하자, 그는 병이 닿는 순간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머리를 잡은 손에서 벗어났다. 해독제가 몇 방울 이불보 위로 쏟아지자 조수는 황급히 병을 바로잡으며 물러났다. 바로 세우자 병은 뚜껑이 저절로 닫히며 액체가 쏟아지지 않게 막았다.

“이런 식입니다.”

아라 옆에서 치유사가 감정 없이 말했다.

“그렇다고 수면제를 더 주었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즉, 책임전가인가.”

아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드워프는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

“낯선 사람보다는 동료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지카리의 팔에 랜돌프가 가만히 붙잡힌 모습을 눈짓하고 아라를 올려다보았다.

“해보시겠습니까?”

“모르는 사람보다 나을 지는 모르겠다만…”

아라는 쓴웃음을 짓더니, 조수에게 손을 내밀어 병을 받았다.

“해독제는 얼마 없습니다.”

치유사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있었다.

“창고에서 찾아낸 것은 그게 다입니다. 더 찾아보라고 지시는 해놓았지만…”

아라는 병을 들고 침대에 다가갔다. 눈만 희번득거리며 가끔 고통스럽게 경련하는 랜돌프를 그녀는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꼴사납구나, 다사케타. 인사불성이라니.”

그녀는 그의 머리에 손을 뻗으며 병을 그의 입술에 가져갔다. 기울이자 병은 뚜껑이 열렸지만, 랜돌프가 진저리를 치자 아라는 쏟아지기 전에 병을 도로 세워 뚜껑을 닫았다. 물러나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숟가락을 달라고 해서 맑은 연청색 해독제를 조심조심 덜어냈다.

“쏟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치유사의 경고에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궁수다.”

아라는 병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숟가락만 든 채 다시 접근했다.

“손이 떨릴 일은 없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를 밀자 랜돌프는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다. 그녀는 그의 입에다가 숟가락으로 해독제를 흘려넣었다.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자 몇 방울이 턱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무심코 그의 머리를 잡았다. 그는 거의 짖듯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연청색 방울이 공중에 흩날려 침대보에 투둑 떨어졌다.

“더 이상의 손실은 안 됩니다.”

드워프 치유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으로 잠재우거나, 더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서…”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라는 뒷걸음질쳐 숟가락을 병 옆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다시 재웠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소?”

치유사는 손을 펼쳐보였다가 떨구었다.

아라는 대답 없이 랜돌프를 내려보다가 빈손으로 다가섰다. 그는 기도가 막히는지 쌔액쌔액 힘겹게 공기를 빨아들이며 눈만 굴려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구석에 몰린 짐승 같구나.”

그녀는 다크엘프어로 낮게 말했다.

“두려우냐, 인간 아이야?”

그녀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이마에 갖다대었다. 잠시 벗어날 듯 몸을 틀다가 그는 지친 기색으로 이마를 손에 기댔다.

“이해할 수 있다…”

아라는 속삭였다.

“나도 그러니까.”

이마에 얹은 손을 천천히 옮겨 아라는 그의 뒤통수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갖다댔다. 에디우스는 놀라서 순간 굳었다가 짧은 고함을 내지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는 내내 입술을 대고 있다가 아라는 그가 조용해지자 다시 허리를 펴고 내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창백하게 땀에 젖은 채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뒷통수에 축축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며 아라는 턱을 받친 손을 떼어 침대가 탁자에 대고 저었다. 치유사 조수가 서둘러 병을 집어드는 동안 지카리는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니아카…?”

아라는 치유사가 건네주는 병을 받았다.

“대신 하실 분을 구해도…”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맡아주실 분이 없겠지요.”

“훌륭하게 하고 있으니 계속하시지요.”

치유사는 헛기침을 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거의 동시에 다른 치유사와 조수들도 무심코 물러났다.

“이래서 아는 분이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입술이 없는 데다가…”

지카리는 날카로운 이빨이 길게 줄지은 주둥이를 벌리며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긁는 소리를 냈다.

“랜돌프를 잡고 있어야지 않겠나.”

눈썹을 치켜들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아라는 병을 기울여 해독제를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옆에서 기다리는 조수에게 병을 건네주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랜돌프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녀는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포갰다. 턱과 목을 주물러서 그가 약을 꿀꺽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아라는 다시 손을 뻗어 해독제 병을 받았다.

다섯 번 반복했을 때쯤 랜돌프의 얼굴에는 조금씩 화색이 돌았고,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채 지카리에게 기대어 늘어졌다. 아라는 병에 조금 남은 해독제를 그의 입안으로 흘려넣고 마지막으로 턱밑을 주물러 삼키게 했다. 치유사의 손짓에 지카리는 랜돌프를 놓고 침대에 눕히는 것을 거들었다. 침대 발치로 발과 발목이 비어져나온 채 환자는 가볍게 기침하다가 축 늘어져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호흡했다. 그 위로 치유사 조수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제 몇 시간 쉬고 깨어나면 괜찮습니다.”

치유사가 랜돌프의 눈을 까뒤집어 보며 말했다.

“체력은 좀 회복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정상이지요.”

“무슨 일이 또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아라는 기운없이 말하고 돌아섰다. 지카리의 묵직한 걸음이 의무실에서 그녀를 따라나왔다.

“솔직히 좀 의외로군.”

의무실 복도로 나와서 그가 말했다.

“랜돌프를 싫어하는 줄 알았네.”

“싫어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황망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른 복도로 접어들었다. 환한 등잔이 몇 발짝마다 벽감 속에 빛나는 지하 통로는 통풍도 충분해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햇빛이나 표지물 없이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비현실감이 있었다.

지카리의 커다란 손이 어깨에 와 닿자 아라는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재빨리 손을 떼고 갈고리발톱이 난 손가락으로 다른 통로를 가리켜보였다. 그녀는 목례하고 그가 가리킨 통로로 방향을 바꾸었다.

“만약 그가 배신해서 죽는 것이었다면 저는 맨 앞줄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습니다.”

“동의하네.”

따라가는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끈하게 넓히고 다듬은 곧은 돌 통로에 그들의 발걸음이 울렸다. 아라가 숙소 문을 여는 동안 지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자네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럽군.”

그 말에 아라는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감사합니다. 그저…”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그자에게 아무 말씀 말아주시겠습니까.”

“약속하지. 쉬게.”

지카리의 그녀가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고는 옆방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몸을 한껏 숙여 들어간 뒤 복도는 가끔 등잔이 퍼득거릴 뿐 긴 고요에 빠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무실에서는 세 번째 일행, 겁에 질렸던 맹수가 꿈 없이 어둡고 따뜻하기만 한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소감

죄송합니다 안 죽었어요(?). 역시 로그에는 절대 없는 창작 분량입니다. 원래 로그의 7화에 내용이 더 있는데, 랜디의 독 중독과 그에 얽힌 과거에 초점을 유지하려고 소설본 7화는 여기에서 끊었습니다. 입으로 약을 먹여줘서 낫게 한다...는 발상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는데, 삭풍님과 이방인님 모두 오케이하시니 뭐 까짓거.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위로해줄 따뜻한 접촉을 원하는 랜디의 무의식적 욕구를 표현하는 의미도 있고요. 그럼 이걸로 7화는 끝~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2010/06/16 01:52 2010/06/16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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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삭풍 2010/06/16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이팅! 파이팅[...]

  2. 비밀방문자 2010/06/21 1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로키 2010/06/23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작자와 국내출판 계약을 진행하고 있는 룰이기는 한데, 어차피 번역 플레이테스트가 필요하니 플레이에 참관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번역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면 플레이테스트를 위해 공개하겠습니다. 혹시 비밀댓글로 메신져 연락처 남겨주실 수 있는지요?

  3. 비밀방문자 2010/06/25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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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번 편에는 성적 폭력에 대한 암시와 언급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그렇게 헤루모르에 도착해 마침내 전언을 무사히 전할 수 있었어요. 그걸로 원래는 끝이어야 했죠.


짧아서 자꾸 발이 빠져나오는 낯선 침대에 누워, 정신이 드는 사이사이 낯선 돌 천장을 올려다보며 랜디는 꿈을 꾸었다.

지금 헤루모르에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알고는 있었다. 거친 산길을 넘어오느라 예정보다도 더 걸려 독이 파먹은 몸은 엉망이었다. 다크엘프가 드워프들에게 그렇게 재촉했지만 해독제는 없거나 아직 못 찾은 듯, 뭘 먹으라고 주기는 줬는데 해독제가 아니라 무슨 수면제나 진통제인 듯 마시고 나니 잠만 쏟아졌다. 해독약이나 대령하란 말이다, 노스탤지아 새끼들아. 이거 계약 위반이야…

다시 돌 천장이 흐릿해지면서 그는 바이포드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뒤에는 브램과 그 패거리가 쫓아오는 소리에 얻어맞은 상처가 다시 쓰려왔다. 이를 악물고 달리던 그는 낯익은 문을 헉헉거리며 열어젖혔다.

삐걱이는 가구 몇 점에 벽은 습기에 변색된 집안에는 부모가 다투는 소리만 들려왔다. 별 감정도 없이 그저 습관적인 의례였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것이냐며 에드레드 아주버님께 편지는 써보았느냐, 던햄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단조로운 푸념에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형님이 사정이 되면 어지간히 도와주시겠느냐, 아무 계획도 없이 던햄에 어떻게 가느냐며 신대륙으로 가보자는 소리로 응대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 위험하고 야만적인 곳을 어떻게 가느냐며 펄쩍 뛰었다. 이 모든 것이 투자를 한다고 속이고 아버지 돈을 가로채 도망간 고트프리드 탓이라는 것만은 두 분은 언제나처럼 의견이 일치했다.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열한 살 랜디는 잘 알고 있었다. 에드레드 숙부는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던햄으로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안힐라스는 더더욱. 고트프리드는 아버지 돈으로 부자가 되어 언제까지고 편하게 살 것이다. 집에 앉아 과거를 그리워하며 남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지 불평하는 정도가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문득 방 구석에 이전의 집기 중 팔지 않은 유일한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점점 허름한 집으로 몇 번이나 이사하면서도 어머니의 고집으로 끌고다닌 무거운 마호가니 찬장, 바로 옆에 선 칠이 벗겨지는 벽과 기우뚱한 탁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검은 광택에 소년은 가슴이 답답해왔다.

“랜돌프 왔니?”

방문이 끼익… 열리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문가에 비쳤다.

“어머니가 지금 몸이 좀 안 좋구나. 점심 챙겨먹을 수 있지?”

요리나 청소같은 일을 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언제나 몸이 좀 안 좋았다. 옆집에 혼자 사는 노파가 보다못해 와서 좀 챙겨주는 때가 아니면 랜돌프는 집에서 더운 음식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예…”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뒷문에 가서 귀를 기울였다. 브램네 패거리는 지나간 것 같았다. 랜돌프는 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 밥을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했다. 노점에서 뭐 하나 훔치거나, 성 메르다 광장으로 가보면 지금쯤 교회에서 뭐 나눠주고 있을 지도 몰랐다. 집에서 멀어지는 랜돌프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가 어느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듯이.

랜돌프는 숲속으로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속을 달려 벌목꾼 오두막촌에 도착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울타리를 훌쩍 짚어넘은 그는 얼기설기 대충 지은 오두막 두 채를 지나 세 채째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가자, 얼간이들!”

열아홉 청년은 놀라서 돌아보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난 오늘부로 이곳에서 벗어난다. 엘프 좀 잡아 보시겠다 이 말이야.”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서 나무나 하면서 썩고 싶은 놈은 남고, 돈 좀 만져보고 싶으면 따라와라.”

그의 동료들은 서로 마주보다가 각자 말없이 결론에 도달했다. 몇 명이 고개를 저으며 벌목나갈 준비를 마치는 동안 나머지는 그에게 몰려와 질문을 던지거나 꼭 끼워주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랜돌프는 득의양양하게 미소지었다. 여기 남아 고되게 일하면서 빚만 쌓여갈 동료들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기회의 땅 안힐라스에서 그 정도로 끝내는 건 낭비였다, 낭비. 아무것도 없이 두 쪽만 차고 내린 놈에게도 야심과 배짱만 있다면 이 땅은 끝없는 가능성을 약속했다. 그 생각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쉭쉭쉭- 양쪽에 추가 달린 끈이 회전하며 날아가 가느다란 다리에 휘감기자 숲속을 달리던 걸음이 갑자기 끊겼다. 여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아씨, 그러게 도망치기는.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라고.”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 옆으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꿇은 랜돌프는 턱을 잡아 살짝 돌렸다. 쏟아지는 연갈색 머리 사이로 눈물에 젖은 우미한 얼굴선을 확인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얼굴은 안 다쳤군. 남편놈도 지하에서 기뻐할 거다.”

그는 단검에 흥건한 피를 털어버리고 풀에 슥슥 닦은 후 단검집에 꽂았다. 여자의 눈물섞인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는 밧줄을 꺼내 그녀의 손목을 묶고, 다리를 동여맨 볼라를 풀어내며 매끈한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10만 골드는 가볍게 나올 상품이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만 밧줄 매듭을 익숙하게 조였다. 이 여린 손목들이 쓸리지 않게 고급 대마 밧줄을 사느라 수익이 다 나간다니깐. 이 정도면 꽤 인도주의적이지 않은가.

“어이, 울지 말라고, 잠깐 고생하면 이런 숲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호사가 평생 기다리고 있으니까.”

랜돌프는 흐느끼는 여자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고, 여자가 경악해서 굳어버린 사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신선한 체취를 들이마셨다.

“뭐라고 지껄여도 너희 여자들은 편하게 사는 게 최고잖아? 난 먹고살고, 넌 호강하고, 서로 좋은 거지.”

몸을 일으키며 그는 씩 웃었다.

“과부 됐다고 걱정은 말고. 가는 길에 충분히 재밌게 해줄 테니.”

그는 초저녁의 어스름이 내리는 숲속을 달려갔다. 숲은 빠르게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워낙 뻔질나게 드나든 길이었기에 잘 안 보여도 얼마든지 뛰어갈 수 있었다. 돌 옆에 고개를 내민 수선화, 개울가에 고개를 끄덕이는 물망초가 눈에 띄자 그는 점점 가슴이 설레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개울을 따라 내리막길로 내려오면서 양옆에는 계곡 벽이 환영해주는 팔처럼 감싸왔다. 라벤더와 별패랭이, 아지랑이꽃의 향기가 따스한 공기를 타고 폐부에 스몄다. 랜디는 걸음을 늦추어서 꽃을 밟지 않게 하나하나 피해, 노래하듯 흐르는 개울을 따라 벨벳처럼 부드러운 풀밭을 걸어갔다.

꽃들 사이로 하나둘 색색의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왔어?” “왔어!” “노래꾼이다!” “거인! 꺄악!”

빛무리 한가운데마다 조그마한 여자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개울의 즐거운 음악에 섞여들었다. 대답 없이 그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그가 평소 즐겨찾는 장소, 개울 옆에 쓰러진 나무가 걸쳐있는 움푹 파인 땅을 찾았다. 이끼로 파란 나무둥치 옆에 주저앉아 바위에 기대자 다시 페어리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날아다녔다.

“노래해줘!” “뭐 가져왔어?” “노래!”

가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페어리를 손을 저어 내쫓고, 노래해달라고 떼쓰며 머리카락을 당기는 페어리를 무시한 채 랜돌프는 바위에 편하게 기대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계곡과 그에 가득 핀 꽃, 그리고 그 위에 춤추는 빛무리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그는 향기로운 공기를 깊이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오 아름다운 포트모어, 빛나는 그 정경
너를 그리면 그릴 수록 생각하건대
네가 예전처럼 나의 것이었더면
아린의 모든 영주라도 빼앗지 못하리

나직한 노래소리에 주변에 페어리들이 날아들어 가만히 앉았다. 그들이 턱을 괴며, 혹은 춤추듯 가볍게 움직이며 지켜보는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그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숲의 새들이 슬피 우는구나
이제 어디서 쉬고 어디서 잘까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베어가고
아름다운 포트모어를 허물었으니…1

아름다운 노래였지만 너무 구슬펐다. 여기서 부르기는 솔직히 좀 재수없는 노래라고 생각하며 랜돌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나둘 별이 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풀벌레가 또르륵 또르륵 우는 소리에 섞여 귀찮은 날파리놈들이 웃으며 조잘거렸다. 천화의 계곡에 가득 핀 꽃은 그윽한 향기를 밤공기중에 내뿜었다. 그 한없는 평화 속에 침잠해 랜돌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랜돌프는 풀섶 사이를 달리다가 잠시 웅크려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저기 앞에 또 하나 있었다. 알프 연방 척후를 알아보고 그는 몸을 낮게 낮추며 육박해갔다.

뭔가 느끼고 척후병이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랜돌프는 그의 등허리부터 단검을 찔러 올라갔고, 척후는 몸을 활처럼 뒤로 젖혀 커억거리더니 긴 풀이 흔들리는 풀섶으로 털썩 쓰러졌다.

“세 놈째인가…”

그 순간 쉬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랜돌프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보이지 않는 척후가 던진 단검은 바로 그의 귓가의 나무둥치에 퍽! 꽂혔다. 작은 나무껍질 조각이 얼굴에 팍 튀었다.

랜돌프는 나무 뒤에 급히 몸을 숨기며 풀섶을 살폈다. 저쪽에 작은 움직임이 보였지만, 해치우려면 더 가까이 끌어내야 했다. 들키지 않고 하나씩 처리하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날파리 같은 것들…”

그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네놈들 때문에 죽게 될 줄 알았지.”

알프 연방의 척후대가 천화의 계곡을 발견했을 때 그는 페어리들에게 급히 경고했었지만, 그 멍청한 날파리들은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언제나처럼 실없는 소리나 해댔다. 결국 그들이 소집했던 회의라는 것도 난장판으로 끝나버린 후 랜돌프는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와 척후대를 찾았다. 그들이 천화의 계곡, 페어리가 가득한 금광의 존재를 인간들에게 알릴 수 없도록. 계곡 가득 핀 기화요초를 군화발로 짓밟고, 골빈 날파리들을 잡아다가 날개나 뜯어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을 숨긴 척후가 다가오면서 풀섶이 푸스스… 흔들렸다. 동시에 왼쪽과 오른쪽에서도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그들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랜돌프는 나무에서 떨어져 숲속으로 달려갔다. 물레바위까지 가면 놈들을 따돌리고 한동안은 흩어놓을 수 있었다. 어쩌면 한둘쯤은 더 해치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떤 이는 달콤한 행복을 타고나고…”

속삭이듯 작게 노래하며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어떤 이는 끝없는 밤을 타고나지.2

침묵하는 추적자 여럿을 꼬리에 단 채 그는 밤의 숲속을 달렸다. 그에게 약속된 끝없는 밤을 향해.

“웃기는군…”

질문이 너무나 우스워서 랜돌프는 저절로 입술을 젖히며 이를 드러냈다. 사람이 웃는 얼굴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표정과 근본이 같다고 록윌 장터에서 늙은 사냥꾼이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3 그는 으르렁거리는 얼굴 그대로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정면의 가장 높은 돌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늙은 엘프를 올려다보았다.

“가우르가 토끼를 잡아먹고 나서 눈물 흘리면 가우르가 죄책감을 안다며 감동할 테냐?”

죄책감을 느끼냐고? 그야말로 가우르가 웃을 소리였다. 가우르가 웃으면 사람이 보기에는 으르렁거리는 것 같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사는 주제에, 잡아먹은 상대에 대해 죄책감이라고?”

그가 앉은 의자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두른 돌 의자에 앉은 열두 명의 엘프 장로는 침묵했다. 공터 가장자리의 숲에서는 새가 울었다. 그의 재판관인 그들은 희미하게 주름진 얼굴과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를 품은 눈빛 너머로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았다. 세상을 멀리서 관조하는 듯한 그들의 초연한 얼굴은 지금 그에게는 노스탤지아의 얼굴이기도 했다. 천화의 계곡 페어리들의 연락을 받고 알프 연방 척후병에게서 그를 구출한 동시에 포로로 잡은, 그 알 수 없는 집단의…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엘프 이터를 정성껏 치료한 후 이 기묘한 재판정에 세우고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동틀 때부터 숲 위로 석양이 내비치는 초저녁인 지금까지 장로들은 차분한 질문을 던져왔고, 사실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었기에 그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에미넴 숲의 엘프 중심지인 로리니엔 근처에 숨어지내며 혼자 있거나 소규모 집단에 있는 엘프 여자들을 노렸고, 기억하는 한 10여년 동안 서른아홉 명의 남자를 죽이고 마흔세 명의 여자를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겨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끌고가는 길에 몇 번씩 겁탈했다. 천화의 계곡을 구하려고 알프 연방 척후대를 단신으로 습격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죄책감을 느끼느냐고?

“엘프들보다 강했기에 그들을 잡아먹고 살았을 뿐이다.”

아마도 재판장에 해당하는, 정면에 앉은 장로의 눈빛이 희미하게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 역시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엘프들의 눈물과 고통, 수치, 그리고 죽음이 그에게는 돈과 생계, 그리고 얼마간의 쾌락이 되어 돌아왔다. 가우르가 쏜 화살에 맞은 토끼의 고통과 공포, 그 작은 생명의 끝이 하룻저녁 식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때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뭐가 이상한지 깨닫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도 노스탤지아 대원보다 약했기에 잡혀왔을 뿐이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삐딱하게 웃었다. 백날 정의를 외쳐봐라, 에미넴 숲의 악명높은 '엘프 이터'를 잡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알프 연방 척후대를 쓰러뜨리고 빈사 상태의 부상자를 죽음에서 건져낸 노스탤지아의 힘이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희에게 먹히더라도 원망이나 후회 따위는 없다.”

장로들은 마치 눈빛만으로 이야기가 통하는 듯 서로 표정 없이 시선을 던졌다. 그 묘한 태도가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랜돌프는 기세좋게 말을 마쳤다.

“뜻대로 해라. 그것이 승자의 권리이니까.”

숲 위로 펼쳐진 하늘은 석양의 붉은빛이 더욱 깊어졌다. 어스름 속에 가끔 우는 저녁새와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외에는 침묵이 깊어졌다. 랜돌프는 종일 돌 의자에 앉아 쑤시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이놈들! 아니면 감정이라도 내보이거나. 상대는 너희 동족을 노예로 팔아먹고 강간한 놈이란 말이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그 조용한 눈빛을 마주보며 그는 왠지 식은땀이 났다.

“장로회는 결정을 내렸다, 랜돌프 에디우스.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다.”

아무런 준비나 기척도 없이 재판장이 갑자기 말했다.

“그대는 달의 움직임에 따라 목숨을 취하는 달의 그림자, 카이론 두아스를 마시고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배속되어 사역하도록 한다.”

흐르는 듯 매끄러운 그들의 언어는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새울음처럼 자연스럽게 숲의 소음에 녹아들었다.

“삭월이 돌아올 때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자들이 판단하기에 그대가 신실하고 정직하다면 해독제를 주어 다음 삭월까지 그 생을 유지할 것이다.”

장로가 말을 잇는 동안 랜돌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대 생명은 그대를 우리 과업에 묶는 굴레가 되리라.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리니, 그 속에 운명을 넘어선 자유를 찾을지어다.”

재판장이 말을 마친 침묵 속에서 랜돌프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웃음은 점점 커져 박장대소가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웃으면서 숨이 차고, 배가 아파왔다. 마침내 랜돌프는 숨을 몰아쉬며 돌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 몸을 바로잡았다. 그는 손끝으로 눈물을 쓸어버리며 숨가쁘게 말했다.

“이 지독한 놈들…”

능지처참을 해버리고 싶은 그 지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노예사냥꾼에게 독을 먹여 꼭두각시로 이용해먹겠다는 그 발상은 얼마나 처절하도록 실용적인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라면 그게 누구든 그는 기꺼이 축복할 수 있었다.

어두워진 숲 위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삭월이 얇은 은조각이 되어 떴다. 숲속에서 불빛 하나가 움직이더니, 등잔을 든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로브 입은 마법사 혹은 약제사 하나가 쟁반에 받친 잔을 들고 공터로 나왔다. 그 뒤로는 갑옷 입은 엘프전사 둘이 따랐다.

행렬은 침묵하는 장로들의 원 안으로 들어와 랜돌프 앞에 섰다. 등잔을 든 수행원과 로브 입은 녀석이 그의 앞에 멈춰선 동안, 마시지 않으면 강제로 먹이려는 듯 두 전사는 그의 양옆에 자리잡고 섰다. 추상무늬를 정교하게 조각한 은잔 안에는 검은 액체가 희미하게 치직거리며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랜돌프는 잔을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희들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

그는 잔을 집어들고 쏟지 않게 조심하며 치켜들고 숲에 울리도록 목청을 높였다.

“노스탤지아에 건배다!”

그는 고개를 젖혀 잔을 입에 가져갔다. 머리 위의 삭월이 뿌리는 희미하지만 예리한 빛을 눈에 새기듯 올려다보는 동안 독은 뜨겁고 씁쓸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잔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내고 입가에 묻은 독까지 핥아낸 그는 엘프들에게 씩 웃어보였다.

더 말을 하려다가 그는 뭔가 왈칵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막았다. 내려다보자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어?”

이런 식으로 된 일이 아니라고 머릿속이 아우성을 쳤다. 카이론 두아스는 마시고 바로 발작하는 독이 아니었다. 그는 멀쩡히 일어서서 원래 있던 감방으로 안내받았었다. 그러나 그 지극히 논리적인 지적과 상관없이 날카롭고 차가운 고통이 등골을 통해 뱃속까지 깊게 찔러오더니, 이내 가시덩굴 같은 감촉으로 목을 휘감고 입과 코에 감겼다.

도저히 참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숲과 엘프들은 발작의 안개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아무도 도와주거나 반응하는 이 없이 그는 혼자였다. 몸에 점점 날카로운 가시를 뻗치는 통증만을 남기고...


소감

이번 편은 기본적으로 랜돌프의 인물 배경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로그에는 절대 없습니다. 난 로그 못 따라잡을 거야 아마(..) 나름 마음에 들게 나왔는데, 다른 분들은 어떨까 모르겠군요. 왠지 저는 마호가니 찬장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일단 이방인님과 삭풍님의 OK가 나왔으므로 공개합니다.

랜디라는 인물의 과거 행적이 좀 거식하다 보니 그 시점으로 쓰기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녀자 납치강간범(..)을 너무 긍정적으로 그려서 범죄에 대한 정당화가 되지 않나 하는 염려도 있고요. 그래서 더욱 랜디의 현재 상황은 죄값을 치른다는 걸 7화 내내 강조하려고 했고, 아직 소설은 거기까지 안 갔지만 랜디 자신도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실 재판에서 잘났다고 떠드는 것 자체도 양심의 가책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보면 아시타를 죽인 뒤 아라의 패악질이 떠오르기도 해서 역시 저것들은 동종혐오라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랜돌프 배경과 제일 다른 부분은 재판 대목입니다. 원래는 배경글에 나온 것처럼 배심원 재판으로 했는데, 삭풍님이 엘프 재판은 어떨까 장면 발상을 제안하셔서 그 제안을 골자로 고쳐써보았습니다. 삭풍님께 하소연(?)했듯 제가 중학교 때부터 톨킨광이었습니다만, 엘프는 (게이샤 에루후 말고 톨킨 엘프) 영 이해가 안 가는 족속이더군요. 그래서 그 이해 안 가는 점을 역이용해 기묘한 느낌을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쓰면서 제 생각은 대체로 뭐야 쟤네 완전 이상해(..) 열두 명으로 쓴 건 대충 적당한 수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배심원 수가 열두 명이라 원래 썼던 재판 장면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운명을 넘어서는 자유... 얘기는 엘프다운 이상한 대사기도 하고, 또 랜돌프의 형벌 뒤에 있는 흑막(?)에 대해 삭풍님과 이야기한 걸 반영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랜돌프의 꿈에 나온 대로라면 저런 복잡한 독약을 판결 나오자마다 뚝딱 대령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뭔가 조작의 스멜이? ㅋㅋ 또 뭐, 네 자유의지로 속죄를 해봐라 그런 말을 꼬아서 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으으 역시 엘프란 이상한 족속이에요.


주석
  1. 영국 민요 Bonny Portmore 가사 중 따왔습니다. 로레나 멕케닛 버전을 좋아하는데, 유튜브에도 있더군요. [돌아가기]
  2. William Blake, Auguries of Innocence [돌아가기]
  3. 늙은 사냥꾼의 이름은 김○환이라는 모 RPG인..[퍽] 동환님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옮겨보았습니다^^ [돌아가기]
2010/06/16 01:28 2010/06/16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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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추당한 전령의 임무를 대신 맡은 세 사람은 헤루모르까지 훨씬 먼 길을 가야 했죠. 길이 워낙 험해서 보통 고생이 아니었을 텐데, 다들 별 내색은 하지 않더라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려니 하고 있어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속에 날카로운 바위와 산이 맑은 하늘을 찔러 올라갔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히스 덤불을 군데군데 이고 있는 산도 더러 있었지만, 이곳은 새조차 거의 안 보이는 황량한 땅이었다. 원래 갔어야 할 크레이들 요새에서는 벌써 한참 남쪽으로 빗겨나 그들은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알프 연방에서 닦아놓은 골짜기 길을 벗어나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을 따라가야 했다.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하루에 한두 번쯤 머리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독수리, 몰려다니며 눈앞에 얼쩡거리는 날파리와 한 번은 그들을 보고 도망친 토끼 하나가 다였다. (토끼는 다크엘프가 활로 잡아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나마 샘과 개천이 많아 수통을 채우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여정이 길어지고 휴대용 식량이 바닥난다면 자체조달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랜디에게 심각한 것은 식량보다도 시간이었다. 엘프 기수놈의 임무를 떠맡은지 이틀, 크레이들 요새에서 하루쯤 남쪽 거리에서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시작인가…'

그는 얼굴이 굳으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동안 통증은 배에까지 손을 뻗어 위장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인데…'

다크엘프 여자가 그 빌어먹을 짐승을 바로 옆으로 몰아오자 그는 가뜩이나 힘겨운 상태에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한창 산고개를 넘어가는 중이었으므로 여기서 잘못 넘어졌다가는 저 아래 바위투성이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여자는 그걸 노렸을 지도 모른다.

“독 때문에 그러느냐?”

다크엘프 여자가 물었다.

“산이 싫어서 그래.”

그는 다크엘프를 쳐다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금씩 고통이 잦아들고는 있었지만, 아직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소매로 땀을 신경질적으로 훔쳤다. 이건 앞으로 며칠의 맛배기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왜, 높은 곳이 싫기라도?”

다크엘프는 눈썹을 살짝 쳐들며 미소지었다. 랜디가 고통스러운 것이 즐거운지 그녀는 오히려 이 높은 곳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개같은 드워프놈들.”

랜돌프는 욕을 하며 그 미소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딴 게 왜 좋지.”

“아직 안 죽지 않느냐.”

여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마치 신호기라도 한 듯, 희미해지나 싶었던 통증이 갑자기 갈고리 발톱처럼 머리를 헤집고 폐부를 잡아챘다. 고통에 숨을 못 쉬고 있지 않았더라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잠…깐… 쉬지.”

아픔의 첫 칼날이 지나간 후 그는 간신히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꾸 경련하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에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고통이 한 번 크게 솟아오르며 금방이라도 의식이 멀어질 듯 눈앞에 검은 점이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그 뒤끝에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귀기울이며 랜디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건드려 또 통증이 발작할까 두려웠다.

'아편이라도 챙겨와서 씹을 걸 그랬나.'

“많이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지카리는 옆에 와서 짐을 내려놓고 앉았다.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시간이 없다.”

다크엘프 여자는 해가 중천을 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고 일어났다. 뒤처지는 것은 이전부터 참을 수가 없었다. 약하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으니까.

그런 그를 보다가 다크엘프 아라니아카는 가우르 안장에서 일어났다.

“타거라.”

“필요없어.”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쏘아보며 벌써부터 이를 드러내는 짐승에게 몸을 의지해서 짐이 되느니…

“두 발로 걸어서 못 따라갈 정도가 되면 그냥 죽는 게 낫다.”

그는 억지로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걸어갔다. 약하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에, 강하지 못하다면 강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강한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강했으니까. 빌어먹을 엘프 독과 무능한 노스탤지아놈들 때문에 잠깐 이럴 뿐이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랜돌프 에디우스는 약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편하기는 하겠다만.”

다크엘프는 그의 걸음을 쉽게 따라잡았다.

“죽기까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뒤쳐지지나 마라.”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난 제국력 590년산 와인을 마시며 죽을 계획이야. 아직 한참 남았다고 그러려면.”

랜디는 다소 무리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갔다. 옆에 솟은 암벽의 시원한 그늘에 들어서는 동안 바람은 마치 밀어주듯 그의 등뒤에서 불었다.

“허세부릴 힘이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모양입니다.”

바람을 타고 아라의, 그러니까 그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세 같은 소리 하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 뒤처질까보냐?

암벽에 한쪽 손을 대고 잠시 쉬고 있는데 (오직 잠시 쉬어서 더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옆에 시커먼 것이 휙 지나갔다. 어느새 검은 짐승을 타고 그를 지나친 다크엘프는 앞서가서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어서 따라와보거라, 다사케타.”

짐승조차 그를 비웃듯 노란 눈으로 돌아보더니, 놈과 그의 기수는 둘다 몸을 돌려 쏜살같이 멀어져갔다.

재수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랜디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위에 타오르는 태양과 끝도 없이 멀리까지 펼쳐진 황량한 바위투성이 풍경은 아직도 멀고 험한 길을 예고했다.

'죽기까지 열하루인가.'

약해진 몸, 그리고 무자비하게 흐르는 시간과 싸우며 랜돌프는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걸어갔다. 어딘지 까마득한 빌어먹을 헤루모르를 향해.


소감

분량이 들쭉날쭉(..) 아아 랜디 괴롭히기는 재밌군요 (?) 로그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이런 부분이 어쩌면 가장 리플레이 소설답죠. 끝에 아라의 도발드립만 좀 추가. 긴장감 복선은 계속 이어가고 있고, 랜디라는 인물을 7화의 초점으로 삼으려고 독의 위험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야 헤루모르로 가는 거지만, 그걸 통해서 인물의 내면이라든지 이슈라든지 표현해보려고 말이죠. 과연 남에게도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하고 주변에게라도 재밌게 써보렵니다. 쉬운 작업이 아니라서 제가 재밌어도 될까말까한데, 저한테 재미가 없으면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2010/06/16 00:38 2010/06/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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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맡았던 임무는 보안규정이 아니더라도 크게 쓸 것이 없습니다. 거짓 정보에 속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함정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이지요. 마법사란 언제 봐도 대단해요.


“이쪽입니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섬광이 번쩍할 때마다 썩어 문드러진 채 울부짖는 수많은 얼굴이 보였다. 좀비가 포효하고 요원들이 서로 지시를 외치는 소음 위로 아스타틴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결 길이 좁아지니까 훨씬 쉽게 방어할 수 있어요. 통로를 막아내면서 기수들을 부르도록 해요.”

“그럽시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해 보이는 크세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뚫어볼까요.”

마법사가 눈을 감고 지팡이를 쳐드는 동안 아스타틴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봉을 들었다. 쉴새없이 터지던 섬광이 뜸해지자 좀비 몇몇이 접근했지만, 아스타틴이 휘두르는 봉에 연이어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자 그어어…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 크세노바가 든 지팡이 끝에는 빛의 구가 생겨났다. 그 빛을 곁눈으로 보고 아스타틴은 몸을 빙글 돌리며 비켜주는 순간 크세노바는 지팡이를 내지르듯 휘둘렀다. 구가 날아가면서 공기가 크게 일렁이더니, 다가오던 좀비가 뒤로 날려가 다른 좀비와 사지가 얽혀 진흙탕에 뒹굴었다. 그 틈으로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은 동료들과 함께 달렸다.

갑자기 크세노바가 크게 비틀거리며 거의 쓰러질 뻔했다. 번개가 번쩍하는 빛 속에, 몸의 반이 타 없어진 채 진흙탕에 뒹구는 좀비가 그의 로브자락을 잡은 모습이 보였다.

아스타틴이 휙 돌아서며 좀비의 앙상한 손을 내리치는 순간 천둥이 하늘을 뒤흔들었고, 손가락이 부러진 좀비는 로브를 놓쳤다.

“어서요!”

좀비는 끼이이…하고 신음을 흘리며 기묘한 각도로 꺾인 손을 다시 내뻗었다. 그런 좀비를 역겹게 내려다보며 아스타틴은 크세노바의 팔을 잡아끌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그들은 안전의 가능성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비슷한 시간에 지카리씨와 다른 일행은 남부 난 엘모스 산맥으로 진입하고 있었을 거에요.


남부 난 엘모스 북서부 거점에 도착한 그들의 안내를 맡은 드워프는 복잡하게 꼬인 통로로 그들을 이끈 끝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벽으로 다가섰다.

“막다른 골목이잖아…?”

랜돌프가 중얼거리는 동안, 천장에 머리가 거의 닿은 지카리는 횃불을 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드워프가 바위벽에 손을 대고 중얼거리자 갑자기 문 모양의 윤곽이 벽에 빛나더니 그 모양 그대로 벽의 일부가 끼익… 열렸다. 동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쳐들자 아라는 손을 쳐들어 눈을 가렸다.

“여기가 가장 가까운 출구일세.”

안내원은 손을 뻗어 지카리가 내미는 횃불을 받아들고,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눈앞에는 깎아지른 듯 뻗어올라가는 암산이 가로막았고, 그 너머로 역시 험준한 산이 줄지어 저 멀리에서는 푸르게 흐려졌다. 아래로는 좁은 돌 턱 너머로 까마득한 골짜기가 입을 벌렸다. 아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짝 물러섰고, 랜돌프는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더럽게 황량하군….”

“길을 따라 내려가 아렌고원 방향으로 좀 걸어올라가면 크레이들이 보일 거야.”

드워프는 문밖으로 몸을 내밀며 가리켰다. 문앞의 턱은 암벽 중턱을 따라 쭉 이어져 사람 두셋 정도가 나란히 걸을 만한 길을 이루고 있었다.

“자, 여긴 선물일세.”

안내자는 그들에게 작은 맥주통을 안겨주었다. 지카리는 얼굴이 환해지며 통을 받아들었다.

“안내 고맙네, 작고 단단한 친구.”

지카리가 몸을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드워프의 뿔난 표정을 보고 아라는 헛기침을 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산의 전사여.”

그녀는 드워프에게 말했다.

“승리 속에 또 뵙기를 바라지요.”

표정이 풀어진 드워프는 나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산에 난 문은 잠시 윤곽이 빛나더니 감쪽같이 사라져 다시 아무것도 없는 암벽이 되었다.

길로 나왔다가 저 밑의 골짜기로 눈이 간 아라는 숨을 삼키며 아사나스의 등에 득달같이 올라탔다. 고삐를 꼭 잡은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가르릉거리며 몇 번 돌아보다가 가우르는 날카로운 바위 사이로 펄쩍펄쩍 뛰며 길을 달려내려갔다.

“ㄲ…!”

이를 악물어 비명을 참으며 아라는 고삐를 당겼다.

“저 녀석은 또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지.”

지카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랜돌프는 아라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 말에 지카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라는 간신히 실눈을 뜨며 더듬거렸다.

“누… 눈이 좀 부실 뿐이다.”

지카리는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종의 유머로 생각하면 되나…?”

“무슨 일 있나, 평소같지 않군.”

지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겁을 먹은 것 같아 보이는데…”

그 말에 아라가 항의하기도 전에 랜돌프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하니…”

그는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높은 곳이 싫으냐…?”

그 말에 아라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고, 가우르는 캬악- 이빨을 내보였다.

”…정답이군.”

랜돌프는 히죽 웃었다.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지카리는 턱을 쓸며 미소를 가렸다.

“조금 천천히 가지.”

“그 고양이 잘 다뤄라.”

랜돌프는 아사나스를 마주보다가 여전히 웃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난 나한테 덤비는 건 그냥 놔두지 않거든.”

아라는 그를 싸늘하게 보다가 일부러 그의 옆으로 아사나스를 바싹 몰아 머리에서 꼬리끝까지 스치며 지나갔다. 랜돌프는 가우르와 기수가 지나가며 던지는 눈빛을 마주 노려보았다. 침묵 속에 일행의 발걸음만 골짜기 벽에 가벼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정찰 목표를 향해 가던 길에 세 사람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서 경로를 바꿔야 했죠.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헤루모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결국 삶이란 의미없는 운과 우연에 덧없이 휘둘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거대한 의지나 은총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개입하는 것일까요?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악운이 닥쳐오는 것도 누군가의 뜻이겠지요.


암벽을 돌아 골짜기 바닥으로 내려온 셋은 산봉우리 너머로 모습을 나타낸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저 앞, 골짜기 벽을 이룬 깎아지른 암벽 꼭대기에는 투박하고 튼튼해 보이는 탑이 골짜기 전체를 굽어보았다.

“망루 지척까지는 접근할 수 있겠구나.”

바위에 몸을 숨긴 채 아라는 망루 밑에 골짜기 바닥을 가리켰다. 망루가 선 암벽이 골짜기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에 땅에는 날카로운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 있었고, 군데군데 난 솔처럼 거친 풀섶도 몸을 숨길 장소가 되어주었다.

“망루 밑을 통과한 다음에는 저 산자락을 돌아 지도에 표시된 동굴로 가도록 하자.”

그녀는 망루가 선 암벽 너머로 산자락이 골짜기에서 각도를 이루어 작은 계곡으로 갈라져나가는 지점을 가리켰다. 지카리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드워프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잠시 더 지켜보다가 다시 이동하도록 하세.”

“빡빡하겠는데…”

랜돌프는 망루를 노려보다가 허리의 단검을 점검했다.

“제압해야 할 지도 모른다.”

아라는 그를 보고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지도를 챙겨넣고, 아사나스와 나란히 바위 뒤에서 나섰다.

“조심해서 가보자.”

긴장한 침묵 속에 그들은 망루와 절벽의 그림자를 통해 이동했다. 멀리서 날카로운 새울음 말고는 주변에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망루의 모습이 백 보 앞쯤으로 다가왔을 때, 랜돌프가 손을 휙 들며 귀를 기울였다. 저 위의 망루에서 시끌시끌한 외침과 지시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굳어서 지켜보는 동안 병사들이 망루에서 달려나왔고, 망루 꼭대기에서는 총이 불을 뿜었다.

“이상한데…?”

랜돌프가 중얼거렸다. 병사들이 손으로 가리키고 총을 겨누는 방향은 그들이 있는 골짜기 바닥이 아닌, 건너편 암벽 위의 하늘이었다.

그순간 다시 그 날카로운 새울음이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서 들려왔다. 지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날카롭게 쉭쉭거렸다.

“그리폰!”

그들 위로 날개달린 그림자가 지나갔다. 사자의 몸을 한 그리폰은 독수리 머리로 고통과 공포의 소리를 내질렀고, 기수는 고삐와 안장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폰은 필사적으로 고도를 높이려고 했지만,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공중에 피를 흩뿌리면서 왼쪽 날개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망루에서는 환호성과 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나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그리폰이 일행에게 멀지 않은, 망루 그림자의 가장자리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랜돌프는 눈을 크게 떴다.

“뛰어!”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골짜기를 따라 달려갔다. 지카리도 그를 따라 뛰는 동안 아라는 아사나스의 등에 오르더니, 추락하는 그리폰을 향해 가우르를 달렸다.

“저게 뭐하는…!”

랜돌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돌아보자 지카리도 멈춰섰다. 아라는 그들을 향해 재촉하듯 크게 손을 젓고는 다른 손에 고삐를 모아잡고 그리폰을 향해 질주했다.

“끼에에에에엑—!!!”

그리폰이 땅에 충돌하며 주욱 미끄러지자 돌이 부서져 날았고, 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망루에서는 병사들이 내려오는 듯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가까워왔다.

먼지에 콜록거리며 아라는 그리폰 옆으로 튕겨나간 엘프 기수를 부축해 아사나스의 안장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폰은 끼리리릭… 부리를 벌리고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피투성이 기수를 향해 고개를 뻗었지만, 피를 흘리고 날개는 꺾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폰을 잠시 돌아보다가 아라는 엘프 뒤에 타고 아사나스를 돌려 지카리와 랜돌프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끼에엑- 하는 그리폰의 울부짖음이 그녀를 따라왔다.

“무슨 어울리지 않는 짓을…”

랜돌프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런 모습을 돌아보았다. 지카리가 돌아가려고 하자 랜돌프는 그의 팔을 잡았다.

“가지 마. 이틈에 빨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해.”

그들이 가끔 돌아보며 산자락 너머로 이동하는 사이 이제 차차 가라앉는 먼지구름 속에서 아라는 아사나스를 타고 암벽 그림자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축 늘어진 기수를 한쪽 팔로 안은 채 가우르를 달려 골짜기로 내려오는 병사들에게서 멀어졌다. 병사들이 요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리폰에게 몰려들었을 때쯤 아라와 아사나스는 기수를 데리고 산자락을 돌아 일단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워프들이 표시해준 산자락의 굽이 안쪽에는 이전에 산사태가 있었던 듯 돌과 흙이 쌓여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앞에서 랜돌프와 지카리가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는 아사나스에서 내려 엘프 기수의 등에 손을 대서 균형을 잡아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마치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랜돌프는 마음이 변한 듯 조용히 말했다.

“시선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서 이놈을 살펴보자.”

“여러… 여러분은…”

기수는 헐떡거리며 피투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힘을 아끼도록.”

아라가 말하며 아사나스의 고삐를 끌었다.

“우선은 움직이자고.”

랜돌프가 말했다.

경사를 따라 그들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탕- 하고 날카로운 총성이 등뒤의 골짜기에 울렸다. 병사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랜돌프가 신경쓰지 안고 걸어가는 동안 지카리는 무표정하게 산자락에 가리운 골짜기를 돌아보았고, 아라는 잠시 눈을 감고 서있다가 따라갔다. 아사나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돌과 흙투성이 경사가 산자락과 맞닿는 꼭대기, 서로 엇갈려 쓰러진 두 개의 석판에 거의 가려진 안쪽 그늘에 동굴 입구가 있었다. 안은 살짝 축축했지만 조용했다. 바닥에 아라가 망토를 깔고 지카리가 조심조심 엘프를 들어 눕히자 기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라가 초를 꺼내서 켜는 불빛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던 그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 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라는 엘프의 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붙은 옷을 랜돌프가 찢어내고 피를 대충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빛이 흔들렸다가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탈출했다고 전해다오, 랜돌프.”

랜돌프가 그녀를 흘깃 보자 촛불이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피가 솟는 상처를 누르고 허리띠 주머니에서 꺼낸 연고를 바르며 엘프어로 대충 그 거짓말을 전했다.

랜돌프의 지시에 지카리가 엘프를 천천히 일으켰다. 붕대를 감아 상처를 압박해주고 다시 눕히자 엘프는 한결 편해보였지만, 피묻은 손을 천에 닦으며 랜돌프는 아라와 지카리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신을 잃었던 듯했던 엘프가 조금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저… 전 틀렸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가 낮게 하는 말을 랜돌프가 중얼중얼 통역했다.

“세계수가… 어머니가 절 부르는 게 느껴집니다…”

“세계수…”

그 말에 아라가 표정이 누그러지는 동안, 기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허리띠에 단 주머니에 가져갔다. 그가 힘겨워하자 지카리가 주머니를 열더니 접은 종이를 하나 꺼냈다.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루모르…로 시급한…”

기수의 목소리는 자꾸 희미해졌다.

“그래서 지름길로…”

“헤루모르…?”

아라가 중얼거렸다.

“병신같은 수뇌부 자식들.”

랜돌프는 이를 부득 갈았다.

“하나하나가 중요할 때 겨우 문서 하나를 위해 이게 대체 무슨…”

엘프는 대답 없이 숨을 헉헉거렸다.

“엘…”

동굴 안의 차가운 공기가 움직이자 촛불이 흔들렸다. 그에 맞추어 엘프의 목소리도 자꾸 희미해졌다.

“혼자 남겨지면… 슬퍼할 텐ㄷ…”

목소리가 끊어지면서 그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몸을 숙여 잠시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랜돌프는 몸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아라는 기수의 눈을 감겨주었다.

“둘이 함께 저 창공을 날거라.”

“자연의 품에서 편히 쉬길 바라네.”

지카리의 눈빛은 차분했다. 그는 커다란 손을 잠시 기수의 움직이지 않는 가슴에 얹었다가 떼었다.

“이런 망할.”

지카리가 내려놓았던 문서를 랜돌프가 잡아챘다.

“그놈의 문서라는 게 대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구경이나 하자.”

“대부분 알 수 없더군.”

지카리는 기수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랜돌프에게 말했다.

“암호인 것 같네.”

“헤루모르… 시급…”

랜돌프는 깜박이는 촛불빛 속에 글씨를 눈으로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인가. 헤루모르에 전하는 거라고 했었지?”

“그러나 이제는 전할 이가 없구나.”

아라는 기수의 시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급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지카리의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나왔다.

“이제 우리가 완수해야겠지.”

“급한 것은 그쪽이니 그것이 옳겠지요.”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사나스를 타고 앞서서 가면 같이 가는 것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랜돌프를 쳐다보았다.

"그 동안에 둘이서 정찰을 완료하고 보고하면..."

아라의 말에 랜돌프는 눈쌀을 팍 찌푸렸다.

“저짝이 나고 싶냐?”

그는 엘프 기수의 시체를 가리켰다.

“간다면 셋이 같이 간다. 젠장, 중요한 일이 아니기만 해봐.”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그 말이 옳네, 아라니아카. 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늦어지는 것이 나아.”

랜돌프를 쏘아보다가 아라는 지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스름 속에서 랜돌프는 자신의 손을 불안하게 내려다보았다.

“미치겠군.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데…”

뭔가 생각이 난 듯 그는 엘프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라는 순간 입을 꼭 다물었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대검과 활 외에 개인 소지품인 듯한 목걸이와 반지, 돈 몇 골드를 발견하고 더 나오는 것이 없자 랜돌프는 짜증스러운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왜 그러느냐?”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가자.”

그는 몸을 돌려 동굴 입구로 빠져나갔다. 아라는 그가 가는 것을 잠시 보다가 목걸이와 돈을 챙겨 손수건에 싼 후 아사나스의 안장 주머니에 넣었다.

“유족에게 전해줘야겠구나.”

엘프의 시신 밑에서 피투성이 망토를 빼낸 그녀는 그의 얼굴과 몸을 덮어준 후 양초를 들고 일어섰다. 지카리가 나가는 동안 그녀는 입구에 서서 기수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아사나스를 불러 내보낸 후 그녀가 양초를 불어 끄자 동굴은 입구로 흘러드는 희미한 햇살 말고는 어둠에 잠겼다.


산자락을 돌아서 골짜기를 내다보자 인간 병사들이 말을 동원해 그리폰의 시체를 끌고가는 모습이 보였다. 피와 깃털이 엉긴 흔적이 그 뒤에 길게 남았다.

“저것으로 뭘 하려는 것 같나?”

지카리의 속삭임에 랜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근사한 장식이 되겠지.”

“박제해서 전시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며 아라는 말했다.

“저것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중얼거리며 지카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폰을 끌고가고 자기들끼리 승리를 자축하느라 인간병사들이 골짜기 길을 비운 사이 일행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을 잠시 스쳐간 기수와 그리폰의 마지막 비행을 따라, 헤루모르를 향해.

“여기까지 사흘… 헤루모르까지 다시 사흘인가…”

남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랜돌프는 중얼거렸다.

“제기랄.”


소감

7화는 제노님과 오체스님이 빠졌던지라 아스타틴과 크세노바도 뭐 했다고 시위하려고(..) 두 사람 장면을 써보았습니다. 마법 효과를 정정해주시고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도 제안해주신 제노님께 감사드립니다.

외곽 망루 밑에서 벌어지는 모험은 로그를 꽤 충실하게 따라가지만, 역시 조금씩 재구성과 압축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엘프 기수 줍는 진행이 아니었다고 삭풍님이 그러셨는데, 아라의 돌발행동 때문에 그야말로 예정이 어긋났습니다. 아라는 기수가 혹시 생포당해서 보안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편에 있는데 인간에게 포로로 잡힌다는 생각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반면 냉혹이나 차별주의 (엘프) 같은 단점 RP는 잘 안 된 면이 있지만, 함께 위험을 겪는 순간이라 그랬다고 변명해보렵니다.

아라의 고소기피증 (-1짜리 버릇)이 드러나는 장면 등을 통해 아라와 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보았고요. 헤루모르에서 그 긴장감이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해소가 되니까 복선을 듬뿍 넣어보았습니다. 그 외에 그리폰이나 치유 묘사 같은 부분이 쓰기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2010/06/16 00:26 2010/06/1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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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로그: 7화


안힐라스 1기

7화: 8일의 여정

(1) 편지 I


사랑하는 셀라나에ㄱ


글씨를 차마 다 쓰지도 못하고 아스타틴은 종이를 구겨 구석에 내던져버린다. 혼자 쓰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몇 번이나 보았다고 연인처럼 편지를 쓴다는 말인가. 셀라나 혼자 보는 편지도 아닌데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깃털펜을 씹다가 그는 다시 종이를 앞에 끌어놓는다.


존경하는 셀ㄹ


쓰다 말고 그는 종이를 북 찢어버린다. 지휘부에 쓰는 편지도 아니고 존경하는은 무슨. 물론 존경하기는 하지만 (여윈 얼굴에 수줍고 부드럽던 미소, 바닷바람에 날리던 머리칼 사이로 그를 올려다보던 녹색 눈빛) 이건 너무 형식적이다. 그렇게 편지를 쓰다가는 정말 평생 점잔빼는 사이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종이를 꺼내고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떨리는 펜끝을 백지에 가져간다.


셀라나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 소식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대필과 대서해주시는 에나릴 선생님께도 이 지면을 빌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서툰 글이지만 셀라나의 글공부에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헤루모르 일에 대해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셀라나. 그 소식이 빨리 퍼지기는 퍼졌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임무가 있어 그 일의 시작부터 지켜보지는 못했고, 끝마무리를 할 때 잠깐 있었던 정도입니다. 많이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제가 보고 겪은 것과 전해들은 것을 보안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해드릴게요.

약 열흘 전, 우리 알다론은 분산해서 임무를 떠나게 되었죠. 크세노바씨와 저는 자세히는 얘기할 수 없지만 다른 분 몇몇과 별개의 임무를 맡았고, 나머지 분들은 정찰 임무를 받아 떠났습니다. 그게 남부 난 엘모스 산맥, 헤루모르가 있는 곳이었어요. (에나릴 선생님, 이 대목은 셀라나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해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무사히 또 뵙지요.”

크세노바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옆에서 아스타틴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몸조심하게.”

지카리는 비늘이 반짝이는 손을 들었다. 까마득히 위로는 로스로리엘을 굽어보는 알데아란 나무들의 가지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은 기다리던 마법사와 전사들과 합류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라가 말했다.

“쿠라 그 계집을 놓치다니, 노스탤지아도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령 (死靈) 군대가 습격을 했다니, 중과부적이었겠지.”

지카리는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이 나무 사이의 길을 꺾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랜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뭐, 해독제가 늦을 때부터 그놈들 일처리 수준은 알았다.”

그는 양옆으로 목을 우둑우둑 꺾었다.

“멜코르 그놈을 상대로 그 정도도 버텨내지 못한다면 애당초 도제를 붙잡아놓을 힘도 없었던 거지.”

“쿠라를 굳이 되찾은 것은…”

아라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아사나스의 안장끈을 점검했다.

“노스탤지아의 작전 때문에 도제가 부족해졌던 것일까요.”

“난 오히려 그 계집이 불쌍한데.”

랜돌프는 허리띠의 단검을 확인하며 히죽 웃었다.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쫄딱 털리고서 그런 스승에게 돌아가면.”

“다시 사로잡아야겠지. 크세노바의 마법과 아스타틴의 안내 능력을 믿네.”

지카리는 돌아서서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이 간 반대방향, 알데아란 나무 사이 동쪽으로 굽어지는 길에 발을 딛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일을 하러 가보세.”

걸음을 옮기며 그는 자신의 덩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방해나 안 되었으면 좋겠군.”

“당신은 일이 있을 때를 위해 대기해주면 돼.”

랜돌프는 지카리와 나란히 걸어가며 손마디를 꺾었다.

“일은 반드시 날 테니 말이다.”

“정찰 임무 아니었던가.”

툭 던지듯 말하며 아라는 아사나스를 타고 앞서서 지나갔다. 그런 그녀를 시선으로 따르다가 랜돌프는 걸음을 옮겼다.

“요새까지 4일… 독이 발작을 일으키기까지 지금부터 4일. 죽기까지 다시 12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돌아올 수 있으면 살아돌아와보라는 거냐.”

씩 웃고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노스탤지아 놈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


소감

분명 원래 RPG 블로그였는데, 요즘은 소설 블로그가 된 듯한 기분이(..) 뭐 RPG 소설이니까요 (변명) 처음에는 리플레이를 다른 방식으로 써보자고 시작한 것이 어찌어찌하다보니 블로그와 생활을 점령해가는군요(..) 보시는 분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블로그 트래픽의 대다수는 A5 제본이나 도쿠위키 얘기인 듯하더군요), 최소한 팀원끼리라도 보니까 하나 완결낸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써보렵니다. 괜찮은지 봐달라, 이 부분 설정이 어떻게 되느냐 부탁+질문공세에 시달리면서도 늘 칭찬과 격려, 충고 주시는 팀원분들께는 그저 죄송감사하지요.

얼마전에 다른 참가자분 하나가 플레이와 소설을 합치면 완전한 리플레이가 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플레이 쪽과 연관이 없는 분들에게 이게 얼마나 의미가 있고 알아먹을 만한 얘기인지도 요즘은 의문입니다. 글쓰는 책도 읽어보고 하니 생각없이 쓴 부분이 많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요..ㅎㅎ

소설이 점점 세션에서 벗어나는 게 보이는 것이, 아스타틴의 편지 같은 건 당연히 RPG 세션에는 성립할 수도 없는 부분이고 또 세션에 없는 대사나 장면이 많아졌습니다. 편지를 이야기 액자로 선택한 건 프리포트편에 이어서 아스타틴/셀라나 맥을 이어가고 싶어서기도 했고, 또 로그를 생략하고 압축하면서 상황설명을 추가하고 싶었거든요. 아라와 지카리, 랜돌프의 대사도 로그에는 없는 것으로, 상황을 짧게 설명하고 정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거 리플레이 소설 맞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RPG와 소설은 다른 매체이고 또 로그가 소설의 기본 재료가 되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맞다고 우기렵니다. (음?)

편지 대목은 안힐라스의 체신 체계라든지 서신 보안규정 등에 대해 삭풍님과 얘기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토리 진행상 주로 임무 중인 상황을 보게 되지만, 일상생활이 어떨지 생각하는 것도 재밌더군요. 좋아하는 여자한테 편지를 쓸 때라든지, 그럴 때도 어떤 말은 써도 되고 어떤 말은 안 되는지, 편지는 누가 어떻게 배달하는지 등등. 평범한 젊은 남자다운 아스타틴의 모습을 적어보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2010/06/16 00:08 2010/06/1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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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거기 다들 스톱스톱~”

쿠라, 혹은 엘리샤가 엘프소녀의 가느다란 목에 칼을 대며 꾹 누르자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지카리는 가슴 깊숙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쿠라 뒤편에 있던 형체들이 흐느적흐느적 걸어나왔다. 생전에는 인간이었던 듯한 그들은 군데군데 부패의 흔적이 드러나는 잿빛 피부에 초점 없는 눈을 한 채 저택 입구에서 부시럭부시럭 몰려나와 쿠라와 소녀 양옆에 포진했다. 그들 뒤를 이어 검은 로브를 입은 키큰 남자가 걸어나와 쿠라의 왼편에 섰다.

“얌전히 죽어주면 제대로 미라로 만들어줄게~”

쿠라의 말에 크세노바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는 건 어때?”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 쪽이 뭔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좀비들이 일제히 발을 질질 끄는 걸음으로, 빠르지는 않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러운 생물, 혹은 사물 (死物)의 벌린 입에서는 그어어어.. 하고 고통인지 적개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라는 활을 앞줄의 좀비에게 겨누고 시위를 놓았다. 진흙이 갈라지는 것 같은 팍 소리를 내며 화살이 몸에 박힌 좀비는 잠시 몸을 떨더니 다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라를 보고 쿠라는 킬킬거렸다.

“역시 깜둥이들은 머리가 안 도나봐?”

“화살은 큰 효과가 없어요!”

크세노바의 외침에 어쩌라는 소리냐는 듯 아라가 보자 그는 말을 이었다.

“로브의 마법사를 먼저!”

끄덕이며 아라가 다시 활을 준비하는 동안 지카리는 이를 악물고 좀비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무게가 실린 육중한 걸음이 땅을 쿵쿵 울렸고, 그는 도끼로 좀비 하나를 내리쳐 둘로 갈라놓았다. 그러는 동안 차가운 표정의 아스타틴은 앞으로 나서며 봉으로 좀비 얼굴을 뭉개놓고 뼈를 부러뜨렸고, 랜돌프의 단검이 쉭쉭- 차갑게 빛나며 좀비 머리와 사지를 공중에 흩날렸다.

갑자기 주변에 붉은 기운이 돌고 공기가 열기로 일렁이더니 크세노바와 아라의 머리 위에 불로 만든 구름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며 점점 커졌다. 불구름은 작은 불씨를 비처럼 내렸다. 불씨는 대부분 가죽갑옷에 부딪혀 파스슥 꺼졌지만, 아라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며 욕을 내뱉었다.

크세노바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그는 불의 비 바깥편에 다시 나타났다. 냉정한 집중력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쿠라를 향해 손을 젓자 그녀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꺄…꺄악!”

쿠라가 쿠당 넘어지는 동시에 불의 구름이 흩어지더니 비도 사라졌다. 소녀는 공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머리나 좀 식혀라.”

크세노바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남자 마법사 쪽이 주문을 마치며 손짓하자 지카리 뒤에 드리운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땅에서 똑바로 일어났다. 그 부자연스러운 형체가 도끼를 휙 내리치는 찰나 돌아본 지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공격을 피했다. 마치 어두운 거울을 들여다본 듯 잿빛과 흑색으로 형상을 갖춘 자신과 마주친 그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는 그림자 지카리의 가슴에 콱 박혔지만, 그림자는 잠시 흔들렸을 뿐 멀쩡하게 물러났다.

그 순간,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좀비들이 가장 가까운 지카리에게 먼저 몰려들었다. 그림자 자신의 공격을 피하다가 지카리는 균형을 잃었고, 그 위로 좀비들이 와글와글 몰려들더니 양팔을 쳐들어 내리치며 가격했다.

“지카리공!”

아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 앞에 있는 아스타틴과 랜돌프에게도 이미 좀비들이 덮쳐오고 있었다. 랜돌프는 몸을 날려 일격에 좀비 하나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또 다른 좀비의 눈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다가오는 누더기투성이의 몸집 작은 여자 좀비에게 아스타틴이 봉을 내리치자 콰득! 하고 갈비뼈가 부서지며 날카롭고 하얀 뼛조각이 잿빛 살점 사이로 드러났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가 적대적으로 우어어 포효하자 아스타틴은 다시 봉을 탁 내리쳐 목을 꺾었다.

”…죽여버리겠어.”

저택 입구 앞에 쿠라가 이제 막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앉는 모습을 그는 차갑게 노려보았다.

로브를 펄럭이는 엘프 마법사들이 일행의 뒤편에 서서 주문을 외우자 좀비 사이에 섬광이 일면서 폭발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좀비들이 숯덩이가 되거나 머리나 팔다리가 날아가면서 충격파에 쓰러졌다. 두 다리가 날아간 좀비 몇이 팔로 몸과 잿빛 내장을 끌고 계속 다가왔지만, 또 다른 섬광이 번쩍하다 사라지자 땅에는 끈끈한 재만 남았다. 아라는 엘프 마법사들을 슬쩍 돌아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 느림보들.”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분수의 물이 공중에 높게 솟구치더니 투명한 여인의 형체가 되었다. 물의 정령이 손을 내리치자 그녀의 손은 파도가 되어 좀비들에게 몰아닥쳤다. 거대한 '철썩' 소리와 함께 일행에게도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그렇게 좀비의 수가 줄어가는 사이 지카리를 덮어버렸던 좀비들이 흔들리더니, 지카리가 그들을 한꺼번에 떨쳐내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 지카리가 도끼를 휘둘러오자 어깨에 어두운 도끼형체가 깊이 박힌 지카리는 순간 굳었다가 고목처럼 쓰러졌다. 동시에 그림자 지카리도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납작해져 땅에 누운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지카리에게 좀비들은 다시 양팔을 내리쳤지만, 타격에 좀비들 자신의 팔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날아가면서도 지카리의 갑옷에 막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연이은 마법과 물리 공격에 좀비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아스타틴이 그들 사이로 달려갔다. 휘둘러오는 팔을 몸을 숙여 피하고 또 다른 공격을 봉으로 막아내며 그는 신음하고 발을 끄는 좀비 무리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저 바보놈이…”

좀비의 찐득찐득한 검은 피와 부스러져 내리는 살점을 단검에서 털어내며 랜돌프는 혀를 차다가, 재빨리 몸을 돌려 새로운 좀비 공격을 단검으로 쳐냈다.

병사들을 처리한 도보기병대가 달려와 좀비들과 교전하면서 전세는 본격적으로 기울었다. 비틀거리며 막 일어서려던 쿠라는 얼굴에 아스타틴의 봉을 정면으로 맞고 쿠당 쓰러졌다.

“아사나스 몫이다.”

그녀에게 내뱉어준 아스타틴은 놀란 엘프 소녀와 눈앞의 좀비떼 사이를 막아서고 피와 살점, 노랗게 썩은 뇌수가 묻은 봉을 쳐들었다.

남자 마법사를 노려보며 화살을 조준하고 있던 아라가 마침내 활시위를 놓는 순간, 엘프 마법사가 주문을 마치며 활을 가리키자 활은 하얗게 지지직거리며 번개 같은 불빛을 내뿜었다. 화살은 그 순백의 전광 (電光)을 끌고 좀비떼 위로 높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마법사의 후드 아래 얼굴에 내리꽂혔다. 파지지직- 빛이 번쩍하더니 마법사는 뒤로 천천히 넘어가 풀썩 길게 누웠다. 후드가 뒤로 날리며 드러난 얼굴은 새까맣게 탄 채 김이 올랐다.

“저런 건 또 처음이로구나.”

아라는 번쩍이는 활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부터는 뒤처리에 불과했다. 엘프들이 무기와 마법으로 좀비를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정원은 차차 조용해져갔다. 마지막 남은 몇 마리는 전사들이 담장 구석에 몰아넣는 동안 마법사들이 화염 주문을 쓰자 살아있는 횃불처럼 타오르더니 이내 숯이 되어 하나씩 쓰러졌다. 몇 안 남은 병사는 마법사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곧 항복했다.

“지카리공!”

지카리에게서 좀비들을 쓸어내고 마법사 몇이 둘러서서 주문을 외우자, 지카리는 조금 정신이 드는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 아라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면목이… 없군…”

지카리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눈빛에는 그 부자연스러운 적과 싸운 공포감의 흔적이 그늘졌다.

“아닙니다. 쉬고 계십시오.”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은 쓰러졌습니다.”

떨리는 얼굴근육을 움직이며 지카리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이는…?”

아라는 저택 입구 쪽을 건너다보았다. 그쪽에서는 엘프 전사 일단이 소녀를 둘러싸고 데려가는 동안 아스타틴과 소녀가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너… 너희들… 이런다고…”

쿠라가 입구의 대리석 기둥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서고 있었다. 엉망이 된 연갈색 머리, 코와 뺨에 주근깨가 가볍게 흩뿌린 갸름한 얼굴이 젖혀진 후드 밑으로 드러났다. 아스타틴에게 맞은 광대뼈는 곧 시퍼렇게 멍이 들려는 듯 어둑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랜돌프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넌 졌다, 미친 마법사 계집.”

그가 이를 드러내고 단검을 빛내며 다가가자 쿠라는 뒷걸음질치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멜코르 상고로드림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랜돌프가 척, 걸음을 옮겨 다시 가까워지자 쿠라는 주저앉은 채 입구 옆의 벽에 더욱 등을 갖다붙였다.

“시… 싫…”

아라가 랜돌프의 뒤편에서 걸어오더니 그를 지나쳐 쿠라에게 향했다.

“이 여자는 내 몫이다.”

아라는 여자 마법사의 로브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더니, 쿠라가 겁에 질려 내는 찍 소리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입술에서 피가 팍 튄 쿠라는 멍해진 눈으로 다크엘프를 마주보았다.

“뭐… 뭐야 깜둥이 주제…”

아라가 목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자 쿠라의 목소리는 '큭' 하고 잦아들었다.

“난 깜둥이라 감정만 앞서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아라는 허리의 스몰소드를 뽑아 쿠라의 목젖에 갖다댔다. 속삭이는 소리는 거의 유혹적으로 달콤했다.

“말을 안 들으면 이대로 죽여버릴지도 모르겠구나.”

“꺄… 꺄악!”

마법사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멜코르 상고로드림은 어디 있지?”

아라는 랜돌프의 질문을 반복했다. 쿠라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고개를 저으려 하자 아라는 그녀의 목을 콱 밀쳐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박았다. 아스타틴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동안 랜돌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말해!”

“시… 싫어…”

쿠라는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간신히 말했다.

“마…말했다간 주…죽어…”

“그래? 그렇다면 지금 죽여주지.”

아라는 입술을 핥았다.

“아라니아카, 그 정도면…”

크세노바가 보다못해 나서자 아라는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쿠라에게 몸을 돌렸다.

“아 그렇지, 그 이전에.”

억센 손에 머리채를 확 휘어잡히자 쿠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붙든 손을 할퀴었다. 아사나스가 엘프 전사들 사이로 걸어나오며 그런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제 부상이 말끔히 나은 듯 가우르의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아라는 그 앞으로 쿠라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갔다.

“이년이다, 아사나스.”

아사나스는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저앉아 떠는 쿠라에게 천천히 다가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얼굴을 들이댈 뿐. 얼굴에 핏기가 가신 쿠라가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그녀의 로브 아랫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라는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말하면 죽는댔지, 쿠라?”

“사… 사… 살…”

흑마법사는 가우르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창백한 입술로 더듬거렸다.

“말하지 않으면 이게 네 죽음의 모습이다.”

아라는 무표정했다. 크세노바는 혀를 차고 앞으로 나섰다.

“마탑 전체보다 멜코르가 더 무서워?”

그는 마치 오늘 점심은 뭐 먹었느냐는 듯 태연히 물었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해봐.”

쿠라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밤의 어둠이 더욱 깊어지면서 저택 정문의 기둥 사이에 불길한 암흑이 스멀거렸다. 그 소름끼치는 기운을 알아챈 사람이 하나 둘씩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데 그 어둠의 중심, 저택 입구에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날 찾으러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라는 그 목소리에 흠칫 굳었다.

“수많은 땅을 넘나들었느냐. 저주받은 종족의 딸아.”

정원에 울리는 남자 목소리는 세련되고 풍부했지만, 그 외형적 특징 외에 '사람'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온기나 인격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나락에서 부는 바람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가 부딪쳐 오자 엘프 전사들마저 몸을 떨었다.

저택에 소용돌이치는 어둠은 빛이 없는 공백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빛도 꿰뚫을 수 없을 만큼 짙은 그 순수한 칠흑에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이질감이 있었다. 지카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일어서서는 어두워진 문을 마주보았다.

“네… 네 이놈…”

아라는 이를 악문 채 제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모습… 모습을 드러내거라, 이… 이 겁쟁이놈!”

아라는 활을 잡으며 호통을 치려 했지만,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저택 입구에서 번져나오는 어둠에 마치 삼키운 것 같았다.

“흥분은 금물입니다.”

문을 어리둥절하게 보던 크세노바는 그녀를 말렸다.

“어린아이와 페어리나 죽이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

아라는 얼굴이 공포에 굳은 채 마치 두려움을 쫓으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싸우려면 썩 모습을 드러내거라, 흑마법사.”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공중에 울렸다. 문이 아니라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피부에 불쾌한 압박이 되어 눌러왔고, 공기 중에 죽음과 같은 냉기가 되어 스며들었다. 어둠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엘프 전사들이 무기를 다잡으며 주변을 경계했고, 마법사 하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것이다…”

마침내 웃음을 그치며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 증오… 그 분노… 그 투쟁심…”

말하면서 목소리는 마치 흥분한 듯 고조되었다. 아스타틴은 혐오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余)는 그게 마음에 들어서 너에게 그 구차한 삶을 이을 자비를 주었지.”

마법사의 목소리는 어루만지듯 나지막하고 부드러워졌다.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프라드하나?1

아라는 말을 분간할 수 없는 분노의 소리를 내지르고는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러다가 크게 휘청인 그녀가 돌아보자 아사나스가 맨 발목을 꼭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피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빨은 쓰지 않고 있었지만, 주인을 올려다보는 노란 눈빛은 이로 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그런 가우르를 마치 울 듯 구겨진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아라는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싫어… 싫어… 죽어버려… 이 개자식…”

잠시의 고요 속에 여러 목소리가 청아하게 영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인연을 매듭짓기는 빠르지, 저주받은 종족의 딸아.”

멜코르 생고로드림의 목소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선물을 남겨놓고 가지.”

엘프 마법사가 주문을 외치는 순간 밝은 빛이 확 번지면서 어둠을 거두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저택 앞에는 거대한 형체가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점차 뚜렷해졌다. 불꽃이 일렁이는 가죽 날개가 펄럭 소리를 내며 밤공기를 휘저었고, 미늘처럼 가장자리가 겹치는 비늘로 뒤덮인 몸은 두 발로 선 도마뱀 비슷하면서 엄청나게 근육질이었다. 발톱이 난 한쪽 손에는 사람 둘의 키를 합친 것만한 대검을 들고, 다른 손에는 거구를 가릴 만한 방패를 든 괴생물의 긴 꼬리는 위협적인 갈고리를 번득거리며 쉭쉭 양옆으로 움직였다. 괴물의 모습이 완전한 실체를 갖추는 것과 맞추어 멜코르의 냉기어린 웃음소리는 차차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이건 또 뭐야?”

랜돌프는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뽑아 경계했다. 엘프 전사들은 즉시 소녀를 둘러서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사퀴엘, 하급악마입니다.”

크세노바는 황금빛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그 말에 아라는 이를 악물었다.

“뭐하는 자이길래 악마를…”

샤퀴엘이 고개를 들어 포효하자 소리에 공기가 진동하면서 뼈까지 소름끼치게 울렸다.

“다들 조심해요!”

아스타틴이 외쳤다.

샤퀴엘은 불덩이같이 타오르는 눈을 번득이며 길다란 입을 쩍 벌려 이빨을 잔뜩 드러내더니 펄럭.. 날아올랐다. 날개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는 지상의 전투원을 향해 똑바로 하강했다. 벼락이 시야에 잔광을 남기며 악마에게 내리꽂혔고, 뜨거운 증기가 강타해오자 다시 그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샤퀴엘은 대검을 내리쳤다. 땅에 주저앉아 떨고 있던 쿠라를 향해.

크세노바가 살짝 손을 젓자 쿠라는 좀전에 크세노바가 그랬듯 모습이 희미해졌다가, 샤퀴엘의 대검이 땅에 우지끈 박힌 바로 옆에 다시 나타났다. 눈이 커다래져서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 아사나스가 그런 그녀 뒤로 소리없이 쫓아갔다.

“이 멍청아, 죽기 싫으면…!”

크세노바의 외침에 샤퀴엘의 불타는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쳇.”

콰직… 소리와 함께 악마는 대검을 땅에서 뽑아냈다. 그런 샤퀴엘과 크세노바 사이를 지카리의 덩치가 막아섰다. 샤퀴엘이 가소롭다는 듯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강풍을 일으켰을 뿐 지카리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지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창과 화살, 마법이 지상의 전사와 마법사에게서 샤퀴엘에게 날아들었다. 크세노바 역시 손을 내밀자 공기가 크게 물결치면서 악마는 비틀거렸다.

아라는 활시위를 귀 뒤로 당겼다가 놓았다. 이번에도 화살이 하얀 빛을 번쩍이며 날아가서 샤퀴엘의 근육질 목에 맞자 전광이 확 번쩍하더니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악마는 다시 한 번 포효하고는 크게 휘청거렸다. 날개의 움직임이 점차 약해지면서 샤퀴엘은 땅에 묵직하게 떨어져내렸고, 추락하는 길에 분수를 들이받아 산산조각냈다. 분수를 거쳐 추락의 속도가 줄어든 샤퀴엘의 거대한 형체는 지카리 위로 쿠당탕 무너져내렸다.

“지카리공!”

아라가 활을 내리며 달려갔지만, 샤퀴엘의 형체는 잠시 붉게 빛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흠… 돌아간 건가.”

크세노바는 말하며 아라와 함께 달려가 지카리를 부축했다.

”…점점 힘든 싸움이 되어가는군…”

지카리는 도끼로 땅을 짚어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아라가 걱정하는 말에 괜찮다고 하는 그의 눈은 지쳐보였다.

분수의 물이 새어나오면서 정원은 재와 진흙, 점액이 뒤섞인 진창이 되었다. 그 위로 아사나스는 쿠라의 목을 물고 질질 끌고왔다.

“크..크세노바!”

마법사는 눈의 초점이 풀린 채 절박하게 재잘거렸다.

“우…우리 알던 사이잖아. 그…그러니까…”

“뭐, 마법사 네가 목숨도 구해주기는 했지.”

아라는 그를 흘깃 보며 말했다. 크세노바는 귀찮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가? 저것이 갱생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아라는 눈빛을 어둑하게 빛내면서 활을 꽉 쥐었다

“아니면 생고로드림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자의반 타의반쯤인 것 같아서 물어보겠는데…”

크세노바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는대로 말해봐.”

“모… 몰라.”

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피했다.

“그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기셨을 거야.”

아라가 위협적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크세노바는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잠시 턱선이 경련하며 그를 노려보던 아라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법사들이 다가와 쿠라를 결박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행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시군요.”

그들이 돌아보자 처음 프리포트에서 그들을 맞아주었던 노스탤지아 요원, 깡마르고 키큰 인간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전 페어리 사건의 주범을 모조리 사로잡으시다니.”

“다 잡지 못했다.”

랜돌프가 저항없이 묶이는 쿠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스승이 남아있지.”

다른 생각을 하는 표정으로 아라가 말을 받았다.

“그쪽이 진짜 문제겠지요.”

크세노바는 끄덕이더니, 쿠라를 연행해가는 마법사들에게 가서 눈과 귀를 가리고 입에 재갈도 물리라고 조언했다.

“집주인은 어떻게 되었지?”

아라가 문득 물었다.

“저택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요원이 말했다.

“마법사들이 하는 말로는 내장이 썩어 죽었다는군요.”

“생전에도 그렇지 않았나?”

아라가 무심히 묻자 요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페어리 녀석들은 바다엘프 배에 무사히 실은 거냐?”

랜돌프의 물음에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아이만 기다리고 있지요.”

그는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소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그때 보고했던 여자… 셀라나 역시 같이 보내야겠다.”

소녀를 보며 아라가 말하자 아스타틴은 흠칫 놀라더니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는 것이…좋겠죠.”

그는 다짐하듯이 말을 이었다.

“셀라나를 위해서도… 당장은 안전할…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는구나, 패스파인더.”

그를 곁눈질하며 아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서 셀라나양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요원이 끼어들었다.

“지금 항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쳐들며 푹 패인 눈을 아스타틴에게 향했다.

“다만, 가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스타틴이 얼굴을 붉히는 사이 아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구나. 아사나스!”

끌려가는 쿠라를 입맛을 다시며 보던 아사나스가 잿빛 어둠 속에 노랗게 빛나는 눈을 그녀에게 돌렸다. 아라는 가우르를 향해 아스타틴을 밀쳤다.

“이 녀석을 항구로 태워가주겠느냐?”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길은 네가 알겠지, 패스파인더.”

아스타틴은 어색하게 아라를 돌아보다가 설레는 기색으로 아사나스의 어깨에 한손을 올리고, 한쪽 다리를 안장에 걸쳤다. 그 순간 아사나스가 확 일어서며 출발하자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아야 했지만.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려면 타는 품새는 좀 고쳐야겠구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프리포트의 새벽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등뒤의 하늘이 잿빛으로 첫 새벽 빛을 밝히고 있었고, 바닷바람이 새벽의 청량함을 품고 불었다. 아직 어두운 서쪽 하늘과 그 아래 절벽을 배경으로 선착장에 선 젊은 여자를 보고 아스타틴은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뭇머뭇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아사나스가 고개로 다리를 부드럽게 밀었다.

출발할 준비를 하며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아스타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셀라나 앞에 섰다. 북적거리는 선창 위에 서있는데도 왠지 이 순간만은 둘만 있는 듯 친밀했다.

“안전한 여행 돼요… 셀라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빛에는 평온한 기쁨과 아쉬움이 함께 섞여들었다. 어쩌면 아쉬움은 그의 착각일까.

“노래… 다음에 다시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가볍게 인사했다.

셀라나는 그의 뒤편으로 눈이 가더니 밝게 미소지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잊지 못할 거에요.”

그의 등뒤로 다가온 아라, 랜돌프, 크세노바와 지카리는 역시 셀라나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와 아스타틴은 서로 자꾸 시선이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아스타틴은 가슴이 확 트이면서 동시에 작게 찌르듯 아파왔다.

“이제 가지요.”

다크엘프 요원이 셀라나에게 선창에 묶은 보트를 가리켜 보였다. 어둑한 절벽을 뒤에 두른 채 앞바다에서 기다리는 배를 향해 엘프 전사들과 다른 요원들이 탄 보트가 하나하나 출발하고 있었다. 엘 라세 쿠다라고 불린 어린 소녀가 주변을 경계하는 전사와 마법사 일단과 함께 탄 보트도 새벽의 어스름 속에 움직여가는 모습이 보였다.

셀라나는 어깨에 두른 얇은 쇼올을 꼭 붙들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잡지 못하고 지켜보다가, 유달리 찬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쳐온 순간 아스타틴은 그녀를 불러세웠다.

“셀라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그는 서둘러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느라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는 올려다보는 그녀와 순간 눈을 마주치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과 놓아주어야 하는 당위 사이에 갇혀, 심장이 몇 번 뛰는 사이 아무 말도 못하다가 아스타틴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지 않겠어요?”

“예…”

셀라나는 시선을 낮추며 미소지었다. 뺨에는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

“꼭… 돌려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그 미소에 담긴 약속에 그는 마침내 팔을 풀 수 있었다. 요원이 보트에 타며 다시 부르자 그녀는 황망히 가서 에스코트를 받으며 보트에 탔다. 다시 돌아보는 셀라나에게 아스타틴은 한 손을 들어보였다. 또 인연을 맺고 또 떠나가는 뒷모습은 익숙한 아픔이었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진짜였다. 그 희망을 위해서라면 그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보트는 아침의 첫 황금 빛이 막 비쳐오는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일행은 말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나중에는 또 얼마나 놀림을 받을까 생각하자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지만, 이 순간은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바다 위로 불어오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프리포트의 아침을 함께 맞이했다.

소감

전투장면이란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쓰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는데, 의미가 있게 쓰려면 어렵죠. 플레이의 재미와 글의 재미 사이에 괴리가 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은 거의 리플레이대로, 중복이나 반복 부분은 줄이고 조금씩 재구성하면서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냥 원본 전투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어서 외부 시점을 사용했고요. 이만큼 일행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했다... 하는 게 극적 의미라면 의미겠는데, 여전히 좀 확신은 없습니다.

'마법사들' 꼭지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멜코르 상고로드림의 등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스터 삭풍님도 포스있는 등장이었다고 칭찬해 주셨고, 절대악이라면 절대악이라고 할 수 있는 멜코르의 속성이 드러난 것 같아요. 그러나 과연 실제로 붙으면 그만큼 값을 할 것인가...가 문제로군요. 멜코르가 허망하게 떡실신할 경우 이 부분 글은 차후 수정합니다 (??).

마지막 '새벽' 꼭지는 정서와 심리를 표현하면서도 글을 간결하게 쓰려는 시도였습니다. 아무리 얌전한 남자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음흉해진다는 것이 지론인지라, 원본 로그에서 미묘하게 바꾼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원본: 외투를 얌전히 접어서 셀라나에게 건네준다.
소설본: 외투를 둘러준다는 미명으로 어깨에 팔 한 번 둘러본다!

하는 차이였죠. 물론 저런 건 음흉한 행동은 아니고 신사적인 행동이지만, 너무 좋고 자꾸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꾸 접촉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의도가 음흉해요! (처억) 그래도 역시 개인차는 있는지라 오체스님께 자문을 구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이대로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프리포트 부분이 끝났군요. 여기서부터 일행은 헤루모르, 제국령, 그리고 제국 총독부가 있는 하노버를 누빕니다. 그 다음엔 아직 플레이를 안해서 모르죠, 뭐. 어떻게든 될 거라 믿어요. (룰루랄라)


주석
  1. 다크엘프어로 '전리품' [돌아가기]
2010/06/05 16:26 2010/06/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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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삭풍 2010/06/10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말보른 숲도 간게 되지만[...

    • 로키 2010/06/13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언제 가려나..가 아니라 아 맞다 갔었쥬 (퍽) 로그는 없어도 소설에는 써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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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의사가 없는 것들은 도망쳐라. 휘말리기 싫다면.”

“아…”

돌발적인 행동에 아스타틴은 놀라서 아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드레스 차림으로 정원의 조명을 한몸에 받으며 적들과 마주선 그녀는 한 치도 거리낌이 없이 당당했다. 그녀에게 겹치는 또 다른 전사의 모습, 인정하기 싫은데도 마치…

'텔루르…'

“꺄아아아아악!”

“경비! 경비!”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철문으로 몰려갔다. 그들이 서로 부딪히고 걸려넘어지는 와중에 로시오는 크게 뜬 눈을 희번득거리며 경비를 불렀고, 변장한 연회객과 정원 외곽의 경비들이 무기를 뽑으며 사방에서 다가왔다. 아라가 조명탄을 당기자 정원 혼란 위로 붉은색과 금빛의 불꽃이 높이 솟았다. 마치 환희의 기념처럼, 걷잡을 수 없는 축제의 시작처럼. 담장 밖에서는 마치 화답하듯, 신속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 프리포트의 건물 사이에 메아리치며 가까워왔다.

“후우…”

크세노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팡이에서 리본과 방울을 떼어냈다.

“기습치고는 너무 정직하지 않습니까.”

아라는 대답하지 않고 아사나스의 안장 주머니에 고정했던 일행의 무기를 던져주었다. 지카리의 도끼와 랜돌프의 단검이 주인을 찾아갔고, 아스타틴의 봉 역시 턱 하고 품에 안겨왔다. 크세노바가 눈을 감으며 뭔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아라는 쇼올을 던져버리더니 안장 주머니에서 가죽 갑옷 상의를 꺼내 드레스 위에 걸치고 여밈끈을 대충 당겨 묶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옷의 무릎께에서 치마를 부욱 잘라내서 호리호리한 검은 다리와 청록색 준보석이 반짝이는 은빛 샌달 신은 발을 드러냈다.

단상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는 악사들을 쫓아 단상 위의 경비들이 로시오의 지휘 하에 소녀를 서둘러 저택으로 끌고갔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랜돌프는 양손에 단검을 뽑아들고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고, 아스타틴은 한숨을 내쉬며 준비자세를 취했다. 크세노바가 주문을 마치고 손바닥을 병사들에게 향하자 순간 고막에 팍 압박이 오더니, 병사 한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자신이 느낀 압력은 여파였을 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크세노바는 언제나처럼 그저 평온한 표정이었다.

병사들의 비명이 잦아들기도 전에 철문이 쾅! 열리면서 절도있고 신속한 발걸음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도보 기병대 앞으로! 앞으로!”

청아하고 우렁찬 엘프 목소리가 금속성의 경쾌한 걸음과 함께 울려퍼졌다.

“엘프의 적들에게 죽음을! 죽음을!”

두렵고 우미한 엘프 도보기병대는 정원의 환한 불빛에 희게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마치 한 사람인양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병사들을 빠르게 포위하며 무기를 뽑았다.

병사들이 새로운 적에게 돌아서며 혼란에 빠진 동안 아라는 아사나스의 등에 재빨리 올라타더니, 크세노바의 주문으로 포위망에 생긴 틈을 향해 돌진했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며 그 앞을 서둘러 막아서는 모습을 보고 지카리는 도끼를 내려놓고 옆의 거대한 탁자를 붙들었다. 그의 팔 근육이 불끈 솟자 탁자가 그의 팔에 붙잡힌 채 육중하게 떠올랐다. 그가 무릎을 굽혔다가 팔을 쭉 뻗자 탁자는 훙-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 위로 날아가 병사들에게 내리꽂혔다. 병사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흩어지는 동안 탁자는 귀가 아픈 파열음을 내며 산산히 부서졌고, 그 혼란 사이로 아라는 가우르의 목 위로 낮게 몸을 숙인 채 저택 입구로 달렸다.

다크엘프가 포위망을 막 빠져나가려는 찰나, 공기가 미묘하게 변하면서 저택 앞의 공기가 아지랑이가 핀 듯 일그러졌다. 순간 저택 앞쪽이 밝아오고 살짝 주변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거대한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아라와 아사나스에게 육박해왔다. 아스타틴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루테리.. 아사나스!!”

바로 코앞으로 날아드는 불덩이에 아라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아사나스는, 눈도 못 뜨고 아스타틴의 손가락에서 우유를 할짝할짝 핥아먹던 루테리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바로 굴려 불덩이를 피한 가우르는 주인 위에 납작 엎드려 몸을 덮었다. 바로 그 순간 불덩이는 아사나스 뒤편, 병사들 사이에 내려앉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팔로 눈을 가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도 순간의 잔광이 눈꺼풀 뒤에 하얗게 불탔다. 폭발의 굉음에 발밑의 땅이 흔들리자 아스타틴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몸에 끼쳐오면서 비명이 귀를 찌르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아사나스!'

팔을 내리며 정면을 보자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고, 몸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는 병사가 이내 엘프 기병의 칼에 꿰뚫려 쓰러졌다. 그리고 루테리온, 아사나스는…

매캐한 연기가 걷히면서 아라가 다크엘프 욕설을 중얼거리고 일어나앉았다. 그녀의 앞에 주인을 보호하듯 웅크린 검은 형체의 등은 어긋난 안장 밑에 화상을 입어 짓무른 살에 피와 그을린 털이 엉겨 뭉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스타틴은 속이 뒤집히면서 눈앞이 어질거렸다. 텔루르가 그렇게 떠나갔는데… 루테리온…!

“잘했다.”

아직 상처를 못 본 아라는 가우르의 목을 툭툭 쳐주고 한쪽 무릎을 세우며 일어설 채비를 했다. 아사나스는 크르르릉.. 울부짖으며 일어나지 못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에서 아라는 그의 등에 난 상처를 보고는 천천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흥건한 피와 짓무른 살점이 묻어있을 손을 생각하고 아스타틴은 몸부림이 쳐졌다.

날카로운 여자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이거 재밌네!”

쿠라의 목소리는 이제 아스타틴에게 낯설지 않았다. 엘프소녀를 앞에 잡아세운 채 저택 현관 앞에 선 그 검은 로브 입을 모습을 보고 천천히 피어오르는 증오의 불길도 낯익었다.

“마탑…! 올 줄 알았어!”

쿠라는 반가운 친구가 오기라도 한양 크세노바를 보고 떠들어댔다.

“마탑의 마법사 나으리가 다 오고 말이야. 안녕 크세노바!”

“음? 절 알고 있습니까?”

졸지에 주목받은 크세노바는 자신을 가리켰다.

“어머, 섭섭하네.”

쿠라는 짐짓 손으로 설레발을 쳤다.

“엘리샤라면 기억이 나?”

그녀의 뒤에는 불길한 그림자가 스멀스멀 움직였다. 크세노바는 병사의 불탄 시체를 지나 숯덩이가 된 탁자의 잔해를 밟고 쿠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몇 걸음 더 걷다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났어. 네가 왜 거기 서있는 거냐?”

“멜코르님이 날 받아주셨지~”

쿠라는 깔깔거렸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해줘야 돼?”

“그 양반 오지랖 한 번 넓구만.”

크세노바는 한숨을 쉬었다.

아스타틴은 천천히 아사나스 곁으로 걸어갔다. 달려드는 병사 둘이 랜돌프의 단검에 거의 동시에 쓰러지는 모습도 멀기만 했다.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의 도제나 정원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투, 그 어느것도 상관 없었다. 아사나스가 아파하고 있다는,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남았을 뿐.

“아사…나스.”

그는 가우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상처를 피해 옆구리에 손을 얹자 헐떡헐떡 빠른 호흡이 손에 와닿았다. 아사나스의 확장한 동공과 가슴 깊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분명 상당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지카리가 걸어와 아라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구르는 와중에 한쪽 신이 벗겨진 아라는 다른쪽 신발도 벗어던지고 맨발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크엘프어로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 있거라, 아사나스.”

아사나스를 부드럽게 부르던 목소리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난 저 계집을 죽이고 오마.”

할딱이는 아사나스의 목을 쓸어주고 상처를 살피면서 아스타틴은 그들이, 지카리와 아라와 랜돌프가 크세노바를 따라 저택 정문에 다가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프 전사들이 인간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이제 흑마법사 도제에게 갈 길이 열렸다. 다시 싸움을 위해, 텔루르와 아시타를 앗아가고 아사나스까지 데려갈 뻔한 그 폭력의 진창에.

갑자기 너무나 피곤했다. 죽고 죽이는 저 소용돌이에 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아사나스 곁에서 쓰다듬어주고, 약을 만들어 상처에 붙여주고, 류트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텔루르와 함께 떠돌던 시절처럼 그렇게 서로 상대의 존재를 호흡하며 그 평화에 침잠하고 싶었다.

“제가 치료하지요.”

로브를 걸친 엘프 마법사가 달려와 아사나스를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순간 아스타틴은 싫다고 소리지르며 이 낯선 사람을 밀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이 일었다. 오랜 애정과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의 날실과 씨실로 짠 우리만의 공간에 침범하지 말라고, 바깥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끌고 들어오지 말라고 그렇게….

그러나 아사나스의 눈을 본 아스타틴은 통증에 할딱이는 가우르가 아라를 따르는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주인에 대한 걱정이 아닌, 곁에서 싸울 수 없는 안타까움을. 흑마법사 쿠라 앞에 붙들린 조그만 소녀의 모습이, 그 앞에 맞선 동료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들만의 공간, 그들만의 평화는 이미 없었다. 전쟁으로 격동하는 안힐라스에 그런 평화는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을 지 모른다. 모순일 지는 몰라도 싸우지 않고는 평화도 없었고, 아무도 지킬 수도 없었다. 그렇게 텔루르가 죽지 않았던가. 그래서 노스탤지아에 들어온 것 아니던가.

아사나스의 머리를 쓸어주고 천천히 일어선 아스타틴은 아사나스를 치료하는 마법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저택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원치 않아도 치러야만 하는 그의 싸움을 향해.


소감

도보 기병대가 대체 뭔가 해서 삭풍님께 여쭤보았는데, 보병은 보병인데 무지 빨라서 도보 기병대 (foot cavalry)라는 이름이 붙었던 미국 남북전쟁 때의 부대에서 따왔다고 하시더군요. 잭슨 휘하의 남부군에 있었다는 게 살짝 불길하긴 하지만 뭐 넘어가죠(?). 워낙 신출귀몰했던 이 부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나고는 해서 북군을 크게 혼란시켰다고 하네요.

이 장면에는 이것저것 나오지만, 결국 핵심은 아스타틴의 결심 대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표현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물의 감정선과 심경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를 짜보고 싶었어요. 결국 누구든 싸움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데, 초반에 죽은 안습맨 아시타가 싸우는 이유가 대륙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면 아스타틴은 소중하고 가까운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런 애착 대상이 아사나스 하나가 남은 것 같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일행과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고요.

2010/06/05 11:29 2010/06/0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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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만에(..) 다음편 올라갑니다. 해당 플레이 분량은 4화에서 6화의 총 3세션입니다.



저택은 프리포트에 보기 드문 당당한 건물이었다. 온기를 구하는 걸인처럼 함께 웅크린 빈민촌의 판자집이나 맵시없고 실용적인 가게와 창고가 대부분인 도시 한가운데 하얀 돌로 지은 3층짜리 저택은 마치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돋보였다. 연회를 맞아 정원에 밝힌 등불이 저택의 하얀 전경에 따스하게 비추었다.

정원을 높게 둘러친 담장에 드나드는 철문 앞에는 초저녁부터 무수히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멈춰서서 색색의 의상을 갖춰입은 남녀를 내려놓고 멀어져갔다. 깃털을 바스락거리는 새 의상, 모조 왕관과 드레스와 홀의 여왕 옷, 심지어 뾰족한 귀와 활을 갖춘 엘프 의상까지 상상력을 총동원한 손님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어두워지는 거리에까지 부드럽게 퍼졌다. 누더기 차림으로 거리를 서성이는 꼬마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던졌지만, 대문 앞의 무장경비가 힐긋 쳐다보자 감히 다가가지는 못했다.

또 다른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서더니 안에 탄 사람들이 내렸다. 우선 내린 청년은 금빛 방울이 달린 보라색 모자 밑에 긴 금발을 묶고, 소매 폭이 넓은 짧은 자켓에 셔츠와 풍성한 바지를 받쳐입은 차림 때문에 뭔가 어릿광대 느낌이 났다. 손에 든 지팡이에는 모자와 같은 방울장식을 달고 넓은 보랏빛 리본을 묶어놓고 있었다. 이어서 내린 젊은 남자는 깃털이 달린 모자에 튜닉과 호스 차림이었고, 손에 든 류트가 음유시인 차림을 완성해 주었다. 음유시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여자는 검은 피부 때문에 드레스의 바닷빛 연청록색과 옷단의 은빛이 더욱 돋보였다. 깊이 파인 옷은 무슨 의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연하고 탄탄한 몸매를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은 톡톡히 했다. 그들은 잠시 함께 서서 저택을 보다가 천천히 철문으로 다가갔다.


프리포트의 실질적인 보스, 칼로 데 로씨는 땅딸막한 몸집에 별 특징 없는 얼굴을 한 사내였다. 그러나 페어리를 탈출시킬 배를 조달하고 흑마법사를 유인하는 계획을 도와주는 조건을 제시하는 그의 표정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예전부터 성가시던 자가 있습니다. 아마딤 로시오라는 이름이지요.”

가슴에 백합 문양을 단 부하가 커피를 앞에 내려놓는 동안 데 로씨는 말했다.

“이번에 진귀한 수집품을 손에 넣었다고 좋아하더군요.”

그는 잔에 설탕을 타고는 작은 숟가락으로 갈색 커피를 저었다.

“오늘 연회를 열어 널리 자랑한다고 합니다만…”

커피를 맛본 데 로씨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눈앞에서 물건을 털린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 수집품이란… 설마.”

커피를 건드리지 않은 채 랜돌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 엘프 소녀입니까?”

“이거 상당한 전문가이신가 봅니다.”

잔을 내려놓으며 칼로 데 로씨는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 로씨가 보내준 초대장을 대문 경비에게 보이며 아스타틴은 순간 조마조마했지만, 경비는 초대장은 슥 보더니 지루한 기색으로 그들을 통과시켰다. 일행은 정원의 불빛과 웃음소리 속으로 들어섰다. 정원 한가운데서는 거대한 조각 분수가 뿜어내는 물이 환한 등잔빛을 반사했고, 분수와 저택 정문 사이에 세운 단상 위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다. 가는 길 한켠에서 광대 하나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주변을 순간 대낮같이 밝혔고, 정원에 우거진 나무 사이에는 은은하게 피리와 하프 음악이 맴돌았다.

아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불빛이 환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남자 손님들의 음흉한 시선에 굳으며 창백해졌던 그녀는 몸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인 반투명한 은청색 쇼올을 끌어올리며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눈빛을 여기저기 던졌다. 에스코트하느라 맞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고, 아라는 그런 그를 조금 놀란 표정으로 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을 순간적으로 마주잡는 그녀의 손은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절박했다.

웃으며 이야기하던 손님 중 몇몇이 저택의 정문을 가리키자 시선이 하나하나 그쪽으로 향했다. 손이나 부채로 입을 가린 속삭임이 웅성거리는 목소리 위로 사락거렸다.

체구가 떡 벌어진 중년의 남자가 밝은 조명에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튜닉을 실크 셔츠 위에 차려입고 여유있게 정문에서 걸어나왔다. 아스타틴은 칼로 데 로씨가 보여준 초상화에 나온 아마딤 로시오를 알아볼 수 있었다. 로시오 뒤에 사슬에 묶인 채 병사들에게 끌려나오는 소녀를 보고 손님들 사이로 오오- 탄성이 터져나왔다.

“저기로구나…”

아스타틴 옆에서 아라는 악문 잇새로 작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아스타틴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 꽉 잡았다. 그러는 동안 로시오는 소녀와 경비들을 이끌고 단상 위로 올랐다. 악단이 곡을 끝마친 침묵 속에서 로시오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조촐한 연회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집주인은 큰 덩치에 걸맞게 목소리도 우렁찼다.

“이 로시오, 여러분들을 이렇게 초대할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프리포트 공동체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업을 해온 한 시민으로서 저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도시의 기둥들이신 여러분을 이렇게 뵙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기회를 만든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거들먹거리는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아스타틴은 눈을 돌려 엘프소녀와 경비상태를 살폈다. 창백하고 무력한 채 눈을 내리뜬 소녀는 네 명의 경비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원의 그늘 여기저기에도 무장한 형체가 보였다. 손님도 한 명 이상이 경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로시오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자 아스타틴은 그에게 다시 주의를 돌렸다. 로시오는 몸을 반쯤 돌려 등뒤의 소녀에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손짓했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녀는 흠칫했다. 얼마나 긴장하고 겁먹고 있었으면 그럴까 생각하자 아스타틴은 가슴에 천천히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좀처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품이고 값도 저같은 변변찮은 장사치에게는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이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적은 대가일 뿐이었지요. 이 로시오, 갓 피어나는 초여름과 같은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여러분께 선보임으로써 이 도시를 이끌어오신 노고를 치하하고자 합니다.”

아스타틴은 입안으로 작게 엘프어 욕설을 중얼거렸다. 로시오의 말과 손님들의 환호성에 담긴 의도를 소녀의 어린애처럼 가느다란 팔다리와 겁에 질린 조그만 얼굴에 대치하는 순간 아스타틴은 잘 다듬은 풀밭에 토해버리고 싶어졌다. 애를 두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름다움이라면 적어도…

일행과 합류했다가 낮에 숙소에서 마주쳤던 하프엘프 여자를 불현듯 떠올리고 그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학대의 흔적이 역력한 멍들고 여윈 얼굴에 왜 그렇게 가슴이 덜컹했을까. 가혹한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한 그 불안한 상황에서도 그녀, 셀라나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맑았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의지, 포기하지 않는 그 힘에… 류트 연주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가 혼자 지었던 미소를 떠올리자 그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이곳, 허영과 숨은 폭력의 장소 한가운데서도 무게중심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존경하는 손님 여러분,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로시오는 인사를 하고 단상 위에서 물러났다. 소녀가 경비들의 감시 속에 단상 위 의자에 앉혀지는 동안 악단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로시오는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손님 몇 명에게 둘러싸였다. 그가 가끔 껄껄 웃는 소리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크세노바는 하인이 들고 지나가는 쟁반에서 술잔을 하나 집어들고 짐짓 태연하게 로시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스타틴도 그에게 맞추어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내려다보더니 있던 자리에 남아 주변 동정과 소녀의 감시상태를 살폈다.

어느새 인파 사이로 사라진 로시오를 찾아 크세노바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모습이 경비나 손님의 주의를 끌지 않나 관찰하며 아스타틴은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 취한 듯한 젊은 여자가 짝짝이 눈이 요정 같다며 비틀 몸을 기대오는 것을 적당히 넘기고 다시 둘러보자 크세노바가 정원 산책로 옆의 정원수에 몸을 숨기고 정원 구석의 정자를 감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자의 깊은 그늘 속에 로시오의 금빛 옷이 반사하는 빛이 그가 연신 허리를 숙이는 동작에 따라 언뜻언뜻 보였다.

아스타틴은 눈쌀을 찌푸렸다. 로시오가 굽신거리는 대상은 어둠 속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원 중앙의 밝은 조명을 떠나온 눈이 익숙해지면서 로시오 앞에 선 두 형체, 밤의 그늘보다도 한결 어두운 검정 로브를 알아채고 아스타틴은 차가운 손가락이 가슴을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타틴이 다가가는 사이 크세노바는 그 화려한 외모와 옷 때문에 눈에 띄었는지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리 어디서 본 적 없느냐며 말을 걸었다. 크세노바는 접대용인 것이 역력한 웃음을 만면에 띄며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손님들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동안 크세노바는 아스타틴에게 정자 방향으로 눈짓을 보냈고, 아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원수 사이로 소리없이 걸음을 옮겼다.

“노스… 분명 모습을…”

가까워지면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아스타틴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정자에 더 가까운 정원수에 몸을 붙였다. 조금만 더…

“어르신도 기뻐하…”

저택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움직임에 아스타틴은 심장이 얼어붙었다. 늦은 듯 제복에 단추를 채우며 정원 구석을 서둘러 가로질러가는 급사가 그를 눈치채기 직전에 아스타틴은 정원수의 저택 반대편 이면으로 몸을 옮겼고, 급사의 움직임과 소리가 시선을 끌 것이라는 도박을 걸고 급사가 지나가는 순간을 타 거의 뛰듯 정자 바로 앞의 정원수로 가서 등을 붙였다.

“어르신께서 엘프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시다니 영광입니다.”

역시 눈치채이지 않은 듯, 급사가 지나가는 동안 잠시 말을 멈추었던 로시오의 목소리를 이제 가까운 거리에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아니, 서두를 것 없다.”

검은 후드 밑에서 청량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어차피 노스텔지아 놈들을 꼬여내려고 연 연회니 일을 마무리한 다음이라도 늦지 않지.”

아스타틴은 숨을 삼켰다. 어찌보면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계략이 또 다른 계략의 일부가 되어 서로 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그 거대한 움직임을 일부 엿본 것만으로 순간 현기증이 났다.

“네 사병들은 지금 잘 대기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네.”

여자 흑마법사의 말에 로시오는 더욱 조아렸다.

“지금 연회객 중에 드문드문 섞여서 놈들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습죠.”

역시 손님 중에도… 아스타틴은 슬쩍슬쩍 정원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사병들이 공격해올 것 같은 위기감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아직까지는 평온해 보였다. 크세노바는 아까 말을 건 손님들과 걸음을 옮기며 정원수와 정자에서 떼어놓고 있었다.

“좋아. 나 쿠라의 이름을 걸고…”

쿠라!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로스로리엘에서 추포한 그 흑마법사가 말했던 이름… 그렇다면 이 여자 역시 흑마법사 멜코르의 도제였다.

“일이 성공한다면 스승님께서 크게 만족스러워하실 거라고 보장하지.”

여자의 목소리에는 만족스러운 가르릉 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쳐들어 로시오를 마주보자 후드 밑으로 하얀 턱과 코끝이 보였다. 예예하고 굽신거리는 로시오를 내려다보며 쿠라는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녀석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그것들'을 좀 데려다 놓긴 했지만…”

그녀는 살짝 깔깔거렸다.

“뭐 모자라면 더 죽이면 되겠지.”

차갑고 가벼운 말투에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쳐왔다. 로시오도 그런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때 쿠라 옆의 키큰 로브 쪽이 뭐라고 중얼중얼 말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턱을 매만졌다.

“흐음…”

혹시 들킨 것인가? 아스타틴은 바싹 긴장하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그래서 그 엘프 계집아이 말인데…”

쿠라가 로시오에게 말했다.

“정확히 뭐라고?”

“엘 라세 쿠다던가… 예 뭐 잘 모르겠지만 꽤 귀해보입니다요.”

로시오는 두 손을 비볐다.

“아직 고년이 말을 잘 안하려고 해서 더는 모르겠습니다만…”

'엘 라세 쿠다…?'

아스타틴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게 뭐지…'

이후 로시오와 두 마법사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최대한 기다리라'거나 '한 번에..' 같은 말을 주고받은 후에 로브입은 둘은 저택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아스타틴 역시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한 후 정원수 사이로 빠져나가 정원 중앙으로 돌아갔다. 짐짓 느긋하게 걸어가 크세노바와 합류하자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손님들과의 대화를 끝냈고, 둘은 함께 아라가 있던 단상 앞쪽으로 향했다.

손님들 사이로 아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아스타틴은 아차 했다. 아라를 혼자 두고가는 것이 아니었다. 추근대는 남자 세 명 사이에서 아라는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듯 어깨선이 잔뜩 굳어있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남자가 털을 두른 망토를 땅에 질질 끌고 모조 왕관은 벗겨질 듯 기우뚱한 채 다가서자 아라는 마치 칼자루를 잡으려는 듯 허리에 손을 뻗었다.

아스타틴과 크세노바는 동시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아라가 분노에 눈을 번득이며 막 입을 여는 순간 남자의 뒤로 다가온 갑옷입은 형체가 그의 어깨에 묵직하게 손을 얹었다. 호기롭게 주먹을 쥐며 돌아선 남자는 시선이 상대의 가슴께에 멈추었다가, 한참 위에서야 투구쓴 머리가 눈에 들어오자 술이 확 깨는 기색이었다. 갑옷 의상을 입은 남자 옆으로 적색과 백색의 화려하고 재빠른 형체가 나서며 다른 두 취객에게 말횄다.

“이만 좀 꺼지지? 험한 꼴 보기 전에.”

남자 하나는 그 말에 욱했다가, 동료의 저지를 받고 갑옷입은 남자의 덩치를 흘깃 보더니 짐짓 식식거리며 물러났다. 붉은색과 하얀색 바둑판 무늬의 꼭 맞는 튜닉을 입은 채 한쪽은 붉고 한쪽은 흰 타이즈를 신고, 머리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모자를 쓴 광대 차림의 랜돌프 에디우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바보놈들.”

“물건은 무사히 옮겼느냐?”

아라는 흘러내리려는 쇼올을 당기며 그에게 낮게 물었다. 그런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이 상황이 상당히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비록 그녀에게 그 말을 꺼냈다가는 얻어맞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었지만.

“어이, 좀 반갑게 굴라고.”

랜돌프가 그녀에게 몸을 숙이자 아라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간신히 억제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연회에서 심각하게 무게잡는 거 수상해. 좀 웃지그래?”

아라는 쇼올을 꼭 잡은 채 노예사냥꾼을 노려보았다. 아라가 당황하고 놀라는 것을 그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스타틴은 순간 화가 치밀어 한 발짝 다가섰지만, 먼저 지카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은 무사히 끝났네.”

그가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열자 인간 모습의 얼굴 윗부분과 연녹색 눈이 드러났다. 페어리를 칼로 데 로씨에게 무사히 인계했다는 얘기에 아스타틴은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문제는 데 로씨를 믿을 만한가였지만, 노예장사를 싫어하기로 악명 (혹은 명성)이 높으며 노스탤지아 협력자이기도 한 그를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에서 만난 친구에게 인사하는 서글서글한 태도로 지카리는 말을 이었다.

“더불어 좋은 소식이 있네.”

“그 윗대가리들이…”

랜돌프는 빙글빙글 웃으며 마치 정말 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듯 정원 위의 하늘에 대고 눈짓을 했다.

“지원군을 결국 보내줄 모양이다.”

그 말에 아스타틴은 눈이 크게 떠지면서 동시에 가슴이 확 가벼워졌다. 노스탤지아 남서부 지역 책임자 소나무 로크와 마법 통신으로 지원군 문제로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했다. (마법 통신의 성격상 드워프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신 머릿속에 울려댔으니 더욱…) 랜돌프의 오만불손함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아라의 집요한 설득에 다소 흔들렸던 로크가 결국 지휘부와 상의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낸 모양이었다.

“뭔가 우리 빽이 대단하다고 그러던데… 알게 뭐냐.”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 지카리의 나지막한 보고에 따르면 엘프 전술예비병력인 도보기병대와 마법사들이 프리포트에 막 도착했으며, 바다요정 함대가 프리포트 외해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주변 건물을 장악해 놓았다더군. 신호만 올리면 들이닥친다고 했다.”

랜돌프는 웃으면서, 아까부터 들고 있던 짧은 봉을 다른 손 손바닥에 탁탁 쳤다.

“저 꼬맹이 일이 좀 커진 모양이야.”

그는 봉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단상을 힐긋 보았다.

“바다요정 놈들은 애만 구하고 바로 빠지겠다는 모양이더군.”

“엘프답구나.”

아라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엘 라세 쿠다…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아스타틴은 좀전의 로시오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소중한 아이인 모양이네.”

지카리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틴은 개인적으로 아이라서 소중한 정도를 떠난 문제이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지카리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어차피 드래고니안의 관념으로는 모든 아이가 소중할 텐데, 그런 그에게 계급이나 차등의 개념을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무슨 짓을 해서든 구해내랍신다.”

랜돌프는 이를 히죽 드러냈다.

“무슨 짓을 해도 자유라니 오히려 환영이지만 말야.”

“나 역시…”

지카리는 단상 위의 소녀를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에 눈가가 주름졌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할일을 찾은 것 같네.”

“쉽지는 않을 거에요.”

아스타틴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대비해 준비도 한 모양이고요.”

그는 재빨리 로시오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요약해 들려주었다.

“그렇느냐…”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함정이라고 가정하고 들어오는 것이 옳았겠지.”

아라는 연회장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단상과 그 위의 소녀를 보았다.

“준비는 끝났구나.”

아라가 말했다. 아스타틴은 그녀의 눈빛에서 냉정한 결의를, 차가운 살의를 읽고 조금 불안해졌다.

“기다려서 뭔가 나아질 것이 있느냐?

“연회를 즐기는 척하면서 좀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말했다. 지켜보면서 경비가 몇이나 있는지, 손님으로 위장한 병사의 전력은 어떤지 파악할 수도 있었다. 굳이 일찍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죽음과 폭력이 검게 소용돌이치는 광기 속에 다시 빠져들고 싶지 않은데. 노스탤지아에 들어온 이상 싸움은 당연한 현실인 것을 알면서도, 텔루르가 죽은 절망에 모든 이성과 제어를 잃고 살인을 저지른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라는 그를 똑바로 보더니 이내 말없이 묵살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가 랜돌프의 손안에서 봉을 잡아채자 노예사냥꾼은 욕설을 내뱉었고 주변 손님들이 이상하게 돌아보았지만, 이미 다크엘프는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아사나스!”

그녀의 날카로운 휘파람이 공기를 갈라놓자 모두 일제히 돌아보았고, 경비와 위장 연회객 몇몇이 다가섰다.

그 순간 들려온 크르렁.. 울부짖는 소리에 손님의 대부분은 얼어붙었지만, 아스타틴은 반가움에 기분이 환해지면서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차올랐다. 밤에서 잘라낸 더 깊은 그림자의 한 조각처럼 그의 오랜 친구, 그 우아하고 치명적인 사냥꾼은 저택 지붕에서 뛰어내려 담벼락 위에 내려서더니 몸을 날려 정원에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만한 상황이었지만,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순간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어쩌면 집주인이 준비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여러분…”

아라의 목소리는 저택 정면과 담장에 울렸했다. 얼어붙어 지켜보는 손님 사이로 아사나스가 유유히 다가와서 옆에 서는 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싸울 의사가 없는 것들은 도망쳐라.”

그녀는 랜돌프에게 빼앗은 신호탄을 양손으로 잡고 당길 준비를 했다.

“휘말리기 싫다면.”


소감

로그를 보면 아시겠지만 노스탤지아와의 논쟁이나 칼로 데 로씨와의 면담은 사실 4화 전체를 차지했는데, 소설판에서는 짧은 회상 대목으로 줄여서 끼워넣었습니다. 너무 줄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귀찮았..(퍽) 플레이하기 재밌는 것과 쓰고 읽기 재밌는 건 또 다른 문제인지라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는데, 역시 큰 갈등이 없는 두 장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요약과 회상 처리했습니다.

인물 중 많이 가공한 건 역시 아스타틴이었죠. 감정선을 좀 더 뚜렷하게 잡아보고 행동 좀 추가, 그리고 시점활용을 통해 심리묘사를 많이 추가했습니다. 오체스님도 괜찮다고 하셔서 그대로 공개 들어갑니다. 랜돌프는 원래 등장이 없었는데 정보전달 목적으로 우겨넣었습니다. 나중에는 도로 뺄까도 했는데 등장 부분이 재미있어서 결국 끝까지 유지했죠. 그 외에 가장무도회 하는 김에 의상 묘사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옷이나 생활상 묘사는 사실 좀 더 자주 하고 싶은 부분인데, 머릿속에 그리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아서 대충 하게 되네요.

2010/06/05 10:14 2010/06/0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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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2화와 시간순서상 동시 진행된 랜돌프 외전입니다. 나머지 일행이 흑마법사와 싸우는 동안 랜돌프가 한 일이죠. 마지막 장면은 2화 3부 시작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로그는 삭풍님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Session_randolf.hwp

원본 로그: 랜돌프 외전


열일곱.

살아남은 페어리는 열일곱 명이었다. 이 꽃밭이 탄내 자욱하고 연기가 매캐해진 지금, 수십이 있던 자리에는 열일곱이 남아 있었다. 그의 지시대로 모아온 생존 페어리들, 두려움으로 희미해진 색색의 빛과 공황에 흐려진 눈빛, 파스스 떨리는 날개를 보며 랜돌프는 바닥에 흩어진 피투성이, 혹은 검댕이 된 페어리 시체는 억지로 쳐다보지 않았다.

“다 모았어!”

생존 페어리를 모아오라고 윽박지르듯 지시받았던 연녹색 페어리는 그의 앞으로 쪼르르 날아왔다. 불규칙하고 재빠르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그녀는 공포심을 그대로 움직임으로 방출하듯 불안하게 들떠 있었다.

“잘 들어.”

그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음절에 억지로 입 근육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떠난다.”

“어떻게? 어떻게?”

조그마한 얼굴들이 그를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으면…”

랜돌프는 고개를 저으며 양쪽 팔을 엇갈려 가위 표시를 해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포 중에 부르던 이름을 떠올리고 말을 이었다.

“므우루, 만나게 해줄게.”

“므우루?”

“므우루!”

”..어디? ..가..?”

재잘재잘 그들의 말이 빨라지자 띄엄띄엄 들려오는 요정어에 랜돌프는 이를 갈았다. 왜 이 언어를 장난처럼 몇 단어만 배워놓은 것인가. 시간이 있을 때 진지하게 배워놓았더라면… 그는 열심히 생각하며 한 자씩 천천히 말했다.

“같이.. 같이, 나랑. 므우루, 가자.”

“응! 응!”

“므우루!”

”..가, 가!”

페어리 서넛은 그에게 달려들어 손가락이나 머리칼, 옷자락을 붙잡고 끌며 날아갔다. 문제는 다 서로 다른 방향이었지만.

“사람들, 쳐다보면…”

랜디는 눈앞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안 돼.”

“그럼? 숨어?”

그들의 여왕을 만날 생각에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그 똘망똘망한 눈을 피해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널부러진 오크와 페어리 시체 사이에 새장을 보고 그는 생각이 떠올랐다. 페어리 포획용인 저 우리를 이용해 이들을 보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페어리들이 공포에 빠져 이리저리 도망가버리거나 하나씩 잡히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저기.”

그는 개중 제법 큰 새장을 가리켰다.

“들어가, 잠자.”

랜디는 양손을 포개고 그 위에 뺨을 기대서 자는 시늉을 했다.

“깨어나면 므우루, 만난다.”

”..자.. 위험..”

”..도망?”

“므우루?”

그들은 점차 빛이 돌아오는 초롱초롱한 보석빛 눈을 깜박거렸다.

“졸려!”

하얗게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놀라운 속도로 새장 안으로 날아들어가더니 바닥에 누워 자리를 잡았다. 또 하나가 '므우루!'를 부르며 쫓아들어가자 순식간에 나머지도 따랐고, 삽시간에 열일곱 중 열여섯 명이 랜돌프가 한 자는 시늉 그대로 포갠 손에 고개를 얹고 그 안에 누웠다. 비좁은 공간 속에서 밀치고 뒤척이다 깔깔거리는 모습을 랜디는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므우루…”

분홍빛으로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그의 얼굴 높이로 날아오르더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만나?”

장미수정처럼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랜돌프는 제기랄, 갑자기 바보같게도 목이 메었다. 그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꼭.”

그는 새끼손가락을 페어리 앞으로 들며 애써 웃어보였다.

“약속!”

페어리는 은은한 분홍빛을 내며 그와 새끼손가락을 번갈아 보다가 그의 새끼손가락 끝을 엄숙하게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쪼르르~ 동료들을 쫓아 그 포개진 색색의 자그만 팔다리와 날개더미 위에 누운 그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더니 새장문을 당겨서 닫았다.

이 생지옥 한가운데서 오직 그를, 그의 약속을 믿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랜돌프는 왠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지막으로 울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10년 전, 집을 떠나왔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이었을 지도 몰랐다.

한쪽 무릎을 꿇고, 페어리들이 놀라도 흩어져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장의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 옆의 땅에 누운 오크 시체가 공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남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가슴이 있는지 비웃듯. 마지막 단말마에 크게 벌어진 입은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잠금쇠는 차가운 종국성을 품고 쉽게도 잠겼다. 마치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고 싶어했던 그 풍경이 지금 내 주위에 펼쳐져 있군.'

그는 타버린 들판과 앙상한 숯이 된 나무들, 깨어진 평화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 혼란스러운 대륙의, 파괴당한 모든 것의 축소판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파괴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먼 길을 돌아오고 별별 어울리지 않는 뻘짓을 해도 결국 그의 자리는 이곳, 겁에 질린 페어리가 든 새장을 들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는 듯이.

'웃기는 일이야…'

그는 새장을 집어들고 그 무게를, 희미하게 파닥거리며 빛나는 작은 생명들을 가슴에 꾸욱 끌어안았다. 비록 닿는 것은 차가운 쇠일 뿐이었지만.

'지는 싸움은 안해. 이녀석들만은 반드시 살려간다.'

그 파괴의 현장에 등을 돌리고 그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장면의 종국성을, 그 필연성을 끝까지 부인하며.


로스로리엘을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숲의 지리는 점점 낯이 익었다. 옛 본거지를 향해 이동해가며 그는 가끔 킁킁거리며 수풀을 짓밟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오크떼를 멀리서부터 감지하고 숨어야 했다. 한 번은 페어리들이 소리를 내서 들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세 마리를 처리하고는 페어리들에게 엄격하게 주의를 주어야 했다.

'에미넴숲 안에서 이정도로 긴장해본 건 딱 두 번째로군,'

점점 익숙한 숲을 걸어가며 그는 주위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리폰 라이더가 숲 바닥에 드리우는 그림자, 나무 사이로 녹아드는 엘프 정찰병의 녹색과 갈색 옷을 찾으며.

'랜돌프 에디우스가 에미넴 숲 안에서 엘프 정찰병을 애타게 찾으며 이동한다고?'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개도 웃을 노릇이군…'

그때 랜돌프는 긴장한 감각의 가장자리에서 오크도, 엘프도 아닌 기척을 읽었다. 오크라기에는 조용했고, 엘프라기에는 시끄러운…

'설마…?'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바위와 풀섶 사이에 바로 몸을 웅크려 숨었다. 새장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보이자 페어리들 네다섯 명이 역시 입술에 조그마한 손가락을 대며 그를 마주보았다.

랜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기척이 들려오는 방향을 보았다. 무기와 갑옷이 희미하게 쟁그랑거리는 동안 쇠에 반사한 햇빛이 나무그늘에서 한 줄기 비쳤고, 그를 지나쳐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신속하고 신중했다. 멀지 않은 풀섶 위로 누군가의 망토자락이 쉭 스쳐갔다.

서너 명쯤 되는 그들은 골치아프게도 그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움직임에는 뭔가 찾는 것 같은 목적성이 있었다.

“정말로 이쪽이었단 말이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페어리 부스러기가 있다면 들고 튀었을 거야.”

“게다가 오는 길에 오크 시체까지 봤지. 보통은 아닌 놈이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네 번째,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에는 느긋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랜디는 뭔가 낯익은 기분에 머릿속이 근질거렸다.

“내가 놈이었다면 기척을 들은 순간 몸을 숨겼을 거야.”

페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페어리 마을부터 쫓아왔거나, 뭔가 정보를 듣고 추적해 왔다는 것인가.

'개같은 놈들…'

랜돌프는 쓰게 웃었다.

'그냥 넘어가긴 틀렸군.'

자칫 이곳에서 계속 로스로리엘로 이동하다가는 사냥꾼들을 그대로 달고 갈 수도 있었다. 엘프놈들이 아주 좋아 자지러지겠지. 그러려고 한다손 쳐도 여기까지 따라붙은 놈들에게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연히 선수를 쳐야 했다. 죽이겠다는 결론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도달한 랜돌프는 가만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바위 너머로는 주변을 수색하는 노예사냥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옷과 무장을 보니 벌이가 시원찮거나 초보였다. 갈 데가 없어서 결국 이 일까지 내몰린, 몇 년 전의 그와 다르지 않은 뜨내기. 그녀석 왼편 다섯 보 거리에서 수색하는 놈은 좀 더 경험이 있거나 누굴 죽여서 빼앗을 만한 실력은 있는지 꽤 괜찮아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랜디의 오른편 십오 보에는 또 다른 가죽 갑옷 입은 사냥꾼이 보였고, 뒤편의 나무 저편에서는 미늘갑옷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러왔다. 어차피 포위상태나 마찬가지인 이상 포위망을 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죽여도 들키고, 안 죽이면 더 늦게 들키는 차이뿐.

바위에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있다가 랜디는 가장 가까운 녀석이 지나가게 기다렸다. 수풀을 헤치며 놈이 지나간 후에 랜디는 빠르게 일어서서 왼편 가죽갑옷의 등짝에 달려들었다.

뒤에서 목을 긋는 단검의 감촉은 충실하고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지는 적을 놓고 그는 핏줄기를 피해 물러났다.

“썅, 뭐야!”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또 다른 가죽갑옷은 이쪽을 돌아보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저.. 저기..”

가죽갑주조차 제대로 못 갖춘 총알받이는 떨리는 손이 칼자루에 한 번 빗나갔다가 두 번째에야 잡고 칼을 뽑았다. 망설임 없이 바로 앞까지 달려가자 수염도 안 났을 정도로 젊은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랜디는 칼을 내지르는 손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단검끝은 초보 사냥꾼의 갈빗대 사이를 정확이 찾아내어 파고들었다. 그 동작에 등이 나무둥치에 몰린 젊은이가 일으키는 경련이 손에 똑똑히 전해왔다. 그 눈에 빛이 꺼지는 동안 뒤에서는 발걸음이 달려오고 있었다. 랜디는 칼을 휙 뽑으며 돌아섰다.

가죽갑옷이 휘두른 대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떻게 더 생각하거나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미늘 갑옷이 육박해왔다. 랜디는 막으려고 단검을 들었지만 약간, 아주 약간의 차이로 차가운 금속은 단검을 벗어나 눈앞에 번득인다 싶더니 완만하게 휜 넓은 날이 어깨에 날카롭게 베어들며 뺨에 뜨거운 핏방울을 뿌렸다.

더 몰리기 전에 랜디는 단검으로 몸앞을 방어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두 사냥꾼과의 거리를 가늠해 공격범위 내로 치고 들어갈 틈을 노리며 그는 처음으로 미늘 갑옷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에 얼굴에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거한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언월도를 내민 채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 붉게 빛나는 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랜디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과 희열은 여자를 안는 것만큼이나 강렬해 거의 고통에 닿는 쾌감이었다.

“제법이구나.”

그는 히죽 웃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고통은 익숙했다. 견뎌내야 살 수 있기에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왔다.

“원랜 서로 얼굴볼 일도 없이 끝났어야 하는데 말이지.”

“간은 제법 크구나.”

미늘을 입은 거한의 묵직하고 거친 목소리에 랜디는 다시 뭔가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눈깜짝할 사이에 둘을…어?”

사내는 순간 놀라더니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랜돌프 에디우스냐? 이게 얼마만이지, 10년?”

그제서야 랜돌프는 이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에도 키는 컸지만 지금만큼 체격이 떡 벌어지지 않고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청년의 모습이 눈앞의 거한에 겹쳤다. 워낙 오래전이었던데다 목소리마저 그때는 덜 걸걸했으니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세월이 흘렀던가?

더크 콘웰은 랜돌프가 처음 노예 장사를 시작했던 때에 같은 사냥꾼 패에 있던 녀석이었다. 이제 자기 패를 이끌고 있고 무장도 제법 갖춘 것을 보면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런 더크를 보며 랜돌프는 순간 기시감 비슷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가지만 달랐더라면 이들이 서로 반대방향에서 마주볼 수도 있었을까.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 나은가. 랜돌프는 순간 든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

“허어. 나를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군.”

콘웰을 만났을 때는 엘프 이터라는 이름이 붙기 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옛친구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그는 콘웰의 두 부하의 피가 묻은 단검을 돌리며 고쳐잡고, 어느 방향으로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채 눈앞의 둘의 아주 작은 동작에까지 신경을 집중했다.

“하.. 이거 반갑다고 포옹이라도 못하는 게 유감이군.”

콘웰은 붉게 얼룩진 언월도의 날을 그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꼭 피로 끝날 필요는 없다, 에디우스.”

그는 자신과 부하를 가리켰다.

“상황은 2대 1, 너는 부상을 당했지.”

콘웰은 언월도를 고쳐잡아 날끝이 하늘로 향하게 하고 한손을 내밀었다.

“옛정을 봐서 이익을 나누고 끝내는 건 어때?”

“내 이름은 기억하면서…”

대비태세를 전혀 풀지 않은 채 랜돌프는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영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로군.”

“이봐… 페어리 날개면 어차피 큰돈인데 꼭 비싸게 굴어야겠나.”

고개를 젓는 콘웰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 계곡 하나에 가득한 페어리 날개 수익조차 못 나누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야?1

“물론이다.”

랜돌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가 이곳까지 온 기묘한 여정을 더크 콘웰 같은 녀석에게 설명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이해시킬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자신조차 이해 못하는 것을… 그저 콘웰이 기대하고 있는 노예사냥꾼으로서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한 몸은 점점 약해질 것이라고 피에 물든 어깨의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그에게 상기시켰다. 콘웰이 시간을 끄는 것은 그 이유도 있으리라.

“그 액수에 지금 것까지 더하면 난 여기를 떠서 본토에 가서도 왕으로 살수 있지.”

“마음에 드는 태도로군!”

콘웰은 짧게 짖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 그러면 이 위기를 타개해 보라고… 엘프 이터.”

더크의 손짓에 가죽 갑주 쪽은 랜돌프가 튀어나왔던 풀섶, 페어리가 든 새장을 향해 달렸다. 동시에 더크는 다가오며 랜디를 향해 언월도를 내리쳤다.

랜돌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단검날로 언월도를 쳐낸 그는 다른 손의 단검을 콘웰에게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어차피 미늘을 입은 상대를 이런 허술한 공격으로 맞히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시 물러나 주어서 찰나라도 시간을 벌면 그만이었다. 계산대로 더크가 주춤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몸을 휙 돌려 가죽 갑주를 쫓아갔다.

수풀로 달려가는 더크의 부하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커져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따라잡히게 되자 놈은 히익.. 숨을 삼키며 몸을 돌려 맞서려 했다.

놈이 검을 들었을 때 랜디는 이미 가볍게 몸을 돌려서 검날을 지나쳐 적의 턱 밑에 양쪽 단검을 교차시키고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아주 짧은 순간, 랜돌프는 상대의 눈빛 속에서 죽음의 예감을 읽었다. 랜돌프는 앞으로 몸을 날리는 기세를 늦추지 않은 채 팔을 크게 벌려 단검을 양쪽으로 흩뿌렸고, 상대는 목이 갈라진 틈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오랜 경험으로 이미 피가 어디로 튈지 알고 있었던 랜돌프는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선혈이 땅에 팍 튀면서 풀을 붉에 물들였다. 새장을 놓아둔 풀섶 안쪽에서는 날개가 부스스스거리고 작은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페어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만, 성가신 날파리들.

랜돌프는 휙 돌아서며 다가오는 더크와 풀섶 사이를 막아섰다.

“이거 고맙군그래.”

언월도를 짚고 천천히 다가오는 콘웰은 쓰러진 부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나도 수익을 나눌 생각은 없었거든.”

“수익도 살아야 의미가 있겠지…?”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콘웰은 적의 없이 마주 웃으며 언월도를 두어 번 빙빙 돌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이런 말 안 믿겠지만…”

어깨가 피에 젖어오면서 머리가 어질해졌지만, 몰려오는 것은 불안보다는 오히려 벅찬 즐거움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랜돌프는 이를 드러냈다.

“나는 정말 너희들이 좋아.”

그는 경계하며 더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돈 몇 푼에 목숨거는 걸 보라구. 이게 살아 있다,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랜돌프는 조금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콘웰의 움직임을 탐색했다. 이전에 그들 패가 '멀대'라고 불렀던 콘웰은 느리고 견고한 움직임 때문에 재빠르고 가벼운 랜돌프에게 번번히 놀림감이 되기는 했지만, 덩치를 키우고 갑옷을 갖춘 지금 그는 완연히 자신의 특징을 장점으로 살리고 있었다.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짓밟아서라도, 이 먼 땅에까지 와서 오직 살아남으려고 변하고 강해진 그의 모습은 어떤 말보다도 웅변적이었다.

“철학이 있는 녀석인가.”

더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철학대로 살다 죽어야지!”

덩치큰 사내치고 콘웰은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휘둘러오는 언월도의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따라가며 랜디는 자신이 더 빠르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 반대다.”

랜돌프는 언월도의 날을 쉽게 피해 오히려 그 공격범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먹고 싸고 자는 거 이외에 다른걸 신경쓰는 놈들따위…”

물러나며 거리를 유지하려는 더크에게 랜디는 바짝 따라붙으며 단검을 내질렀다. 더크 콘웰이 어중이떠중이 사냥꾼패의 키만 큰 멀대였을 때나 꽤나 실력있는 사냥꾼이 된 지금이나, 놈은 랜돌프의 손안이었다. 아니, 세상에 누구라도 랜돌프 에디우스에게 싸움으로 붙을 놈은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어버리라는 거다!!”

단검은 몇 번 챙챙거리고 불씨를 튀기며 더크의 미늘갑옷에 튕겨나왔다.

“성가신 놈!”

거의 넘어질 뻔하며 무리하게 뒤로 이탈해 거리를 확보한 콘웰은 랜돌프의 단검을 쳐냈다.

“그쯤 해먹었으면 이제 죽어!”

랜돌프를 향해 한 발짝 내딛으며 팔을 넓게 벌려 언월도를 비스듬히 위로 향하게 잡은 그는 몸의 무게와 속도를 실어 랜돌프의 가슴을 향해 정면으로 찔러왔다.

총력을 당한 그 공격 속에 랜돌프는 파고들 틈새가 보였다.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날을 왼손 단검으로 쳐내서 빗나가게 한 그는 오른손의 단검을 앞세우고 더크를 향해 돌진했다. 단검이 어깨에, 근육과 뼈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은 묵직하고 충실했다.

“윽…!”

뒤의 나무에 등이 몰린 더크의 입술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동공이 확장하면서 얼굴에 핏기가 가셨지만, 이 사내가 이 정도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랜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거리에서 끝내지 않으면!'

그는 갑옷 틈을 노리며 왼손 단검으로 더크의 반대편 어깨를 찍었다. 물러날 데가 없이 어깨를 관통당한 상태에서도 더크는 이를 악물며 몸을 틀었고, 단검은 쨍- 파찰음을 내며 갑옷에 맞아 빗겨났다.

“비켜라!”

더크가 묵직한 부츠를 신은 발을 내지르자 랜돌프는 뒤로 휙 몸을 날렸다가 균형을 잡으며 착지했다.

고통과 분노에 창백해진 콘웰은 어깨에 단검을 박은 채 랜디를 마주보고 식식거렸다. 역시 실전경험이 있는 녀석답게 억지로 단검을 빼려 드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제기랄…”

랜돌프는 상대를 마주 노려보다가 웃음지었다.

“판돈을 크게 걸었는데 별로군, 결과가.”

“아무리 자네라 하더라도 늘 이길 수는 없겠지.”

더크가 중얼거렸다.

뭔가 느끼고 랜돌프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더크도 기색을 보니 거의 동시에 감지한 모양이었다. 나무 사이에 부는 바람만큼이나 조용하고 신속하게 다가오는 움직임을.

“쳇… 여기까지인가.”

더크는 언월도를 거두고는 다가오는 기척의 반대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엘프 따위에게 죽지 마라, 에디우스.”

콘웰은 숲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돌아보았다.

“가능하면 이 단검에 이자를 붙여 돌려주고 싶으니까.”

“내 이름은 기억하는데 내가 누군지는 기억 못하는거 같군?”

랜돌프는 미소지었다. 콘웰은 이를 드러내 보이더니 몸을 돌려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망할…'

랜돌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일대 일로 싸워도 승률이 육할이 안 될 놈을 패거리와 함께 만나다니, 운수 한 번 더러운 일이었다.

이미 포착당한 이상 도망치는 것은 힘을 빼는 짓일 뿐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지나간 지금 어깨가 욱신거리면서 피로가 급격히 몰려오고 있었다. 그는 새장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될 대로 되라지. 최소한 페어리들을 안전한 곳까지 도피시키기는 했다. 자신이 안전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풀섶을 뒤흔드는 바람처럼 재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그들은 랜돌프를 포위했다. 하나같이 우아하고 강한 숲의 아들딸, 아름다운 얼굴 뒤에 차가운 분노를 숨긴 그들이.

'된통 들켰군… 아마 변명해도 안 먹히겠지?'

그는 그들이 무기를 겨누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놈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제기랄, 이래서 들키지 않고 도착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그가 페어리를 빼돌리려고 했다면 북쪽, 에미넴 숲 엘프들의 본거지인 로스로리엘이 아니라 남쪽 알프 연방이나 십자군령으로 빠지는 것이 옳았겠지만, 그가 하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을 거라는 확신은 전혀 없었다. 애써 설명하기도 피곤했다. 목적을 달성한 지금은 그저 쉬고만 싶었다.

“일어서요, 엘프 이터.”

올려다보자 긴 검은 머리를 땋아 머리에 감은 엘프 여인이 그를 향해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얼굴은 차갑고 이지적이었고, 날씬한 몸의 동작은 춤추듯 우아하면서도 잘 훈련받은 절도가 있었다. 부상의 고통과 출혈의 멍한 기분 속에서 랜디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가격을 매기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위험수당 5천 골드, 엘프니까 2만 5천 추가, 젊으니까 4만 추가, 미모로 7만 추가, 품새로 2만 5천 추가,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과 태도 때문에 재훈련 비용으로 1만 2천 감액, 군사훈련을 받았으니 위험부담과 구속·감시 비용으로 10% 할인, 그리고 록윌에서 중개상을 하는 돼지놈 딕 손튼의 배때기에 적당히 칼도 들이대가며 흥정해서 15~20% 인상. 16만 골드인가, 17만 골드인가. 록윌에서의 시장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었다. 이래서 중개상에게 넘기는 바보짓은 그만두고 직접 도시에까지 가서 팔겠다고 수십 번을 다짐했었지만, 결국은 매번 록윌에서 넘기고 숲으로 돌아왔었다.

“무기를 드십시오.”

16만—아마도?—골드짜리 엘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싸우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습니다.”

잠깐, 저 대사는 보통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뜻인데 오히려 무기를 들라고? 검은 눈 뒤에 차갑게 타는 분노를 멍하니 마주보다가 랜디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죽일 수 있게 전투원이 되어달라는 얘기인가. 그는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저 정도 명예감이면 위험부담 할인은 5% 정도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제국에 어떤 바보가 당했다듯 침실에서 칼에 찔려 비명횡사할 놈은 없을 테니.

“나도 여자는 안 죽여.”

지친 목소리는 쉬어서 나왔다.

“그러니 내가 다른놈들을 때려잡고 당신을 잡아다 팔아먹을 수 있게…”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저어보였다.

“뒤로 좀 물러서 주겠나?”

“무기를 들었는지 상관해야 합니까?”

활시위를 당기는 끼긱.. 소리가 났다. 활을 든 궁수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이미 본색을 보인 것 같은데요, 아일리스.”

랜돌프는 단검을 칼집에 꽂고 망토를 벗어 손에 쥐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노예사냥꾼일 수밖에 없다면 철저한 사냥꾼이 되리라. 양심도, 후회도 없는 한 마리 육식동물처럼.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 사냥감에게 죽는다면 운이 다한 것일 뿐, 불평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었다.

“저자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겠지요.”

아일리스라는 여자는 자세를 낮추며 랜돌프를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물러서요.”

“아일리스…!”

동료들은 저지하려고 했지만, 엘프 여인은 한손에는 단검, 다른 손에는 가느다란 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작은 이들을 확보해요.”

그녀가 랜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시하자 엘프 두 명이 서둘러 와서 새장을 가져갔다. 랜디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일리스의 지시대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기를 내려놓은 놈도 없었다. 활까지 쏘기 시작하면 버틸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한두 대를 쏘는 동안인데… 어쨌든 일단 걱정해야 할 건 이 당돌한 엘프 여자였다.

“내가 누군지 아는거 같은데…”

다시 아일리스에게 집중하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감히 나와 일대 일로 싸워보겠다는거냐?”

“나는 그대와 같지 않으니까요, 엘프이터여.”

아일리스의 고요한 눈은 그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폈다.

“이렇게 만나기를 고대했습니다. 나의 친우들이 숲에서 끌려간 이래.”

말을 맺기가 무섭게 그녀는 그의 손을 향해 단검을 던졌고, 랜돌프는 재빨리 망토를 쳐들어 막았다. 북.. 하고 망토가 찢어지면서 햇빛이 그 틈으로 비쳐들었지만, 칼날의 속도를 줄여 튕겨낼 수는 있었다.

엘프는 무표정하게 단검을 또 하나 꺼내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망토에 엉킬까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피는 계속 흘러 어깨와 팔에 차갑게 굳어갔고, 기운은 자꾸 빠져갔다.

“눈빛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지.”

그는 이죽거렸다.

“보아하니 내가 출혈로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 셈이냐?”

“그렇다면 아쉬운 일이겠지요.”

말하며 아일리스는 다시 단검을 던졌다.

제기랄, 더 끌 시간이 없었다.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날을 다시 튕겨내고 랜디는 그 자신의 단검을 휘두르며 바로 달려들었다. 아일리스는 왼손의 검을 침착하게 들어 공격을 흘려냈고, 바로 이은 공격은 허리를 숙여 피했다.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헤쳐왔다.. 나는.'

점점 지쳐가는 것을 느끼며 랜디는 빨리 끝내기로 결심했다. 단검을 막아내느라 너덜너덜해진 망토를 놓으면서 그는 엘프가 검을 휘두르는 공격범위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가 허를 찔린 짧은 순간 속에 단검자루로 내리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긴다!!'

강한 타격감과 함께 뼈에 따악.. 맞는 소리가 나면서 아일리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야지! 날카로운 승리감과 짜릿한 흥분이 올라왔다.

그러나 재빨리 물려나려는 순간 랜돌프는 고통에 눈앞이 아찔했다. 내려다보자 아일리스가 든 가느다란 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해져서 헉헉거리며 엘프가 지그시 칼을 비틀자 통증이 눈앞에 하얗게 점멸했다.

멀어지려는 의식을 이를 부서져라 악물어서 붙들고 그는 무릎을 세게 올렸다. 남은 힘을 쥐어짠 무릎차기가 맞기 전에 아일리스는 칼을 빼면서 몸을 돌려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의 피가 검끝에서 흩날리며 춤추듯 움직이는 동작의 궤적을 따라갔다.

이제 5m 정도의 사이를 두고 아일리스는 숨을 헉헉거리며 그를 마주보았다. 갈빗대에 손을 대고 몸을 숙인 모습이, 아까 칼자루에 맞아서 갈빗대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랜디는 옆구리로 피가 뜨뜻하게 흘러내렸다. 고통 때문에 구토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칼을 내리거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일리스 옆의 어린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자 아일리스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활을 내리게 했다.

“일대 일 싸움이었다.”

말은 궁수에게 하는 것일지 몰라도 시선은 랜디를 향하고 있었고, 그는 어질한 와중에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대 일이었다. 인정하지.”

그러나 둘의 싸움은 끝났을지 몰라도 공기중에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적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일리스가 막든 안 막든 금방이라도 공격이 들어올 태세였다. 자꾸 흐려지는 시선으로 둘러보며 랜디는 어느 방향에서 공격이 다가올지 가늠했다.

그 순간 작고 급한 날갯짓이 웅- 하고 공기를 울리더니, 아까 그 분홍빛으로 빛나는 페어리가 그의 앞에 나타나 공중에 뜬 채 막아섰다.

”..줬어! 므우루.. 만나.. 댔어!”

페어리어로 한 말을 랜디보다는 잘 알아들었는지 아일리스의 가느다란 눈썹이 조금 치켜올라갔다. 페어리를 지나 랜디를 보는 시선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더 견딜 수 없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안도감 때문일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고, 앉을 힘조차 없이 그대로 풀 위로 쓰러졌다.

“들것에 싫도록.”

멀어지는 의식 속에 아일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이번엔 진짜 죽을뻔 했나…'

“잘 감시하라.”

'저 날파리 같은 녀석들이… 구해준… 건가…'

무거운 눈꺼풀을 감기게 내버려두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아마도 괜찮으리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몸으로는 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싸움을, 경계를 잠시 놓아버려도 되었다. 잠시라면. 사무적인 손 여럿이 그를 받쳐올리고 이내 평평한 표면 위에 편히 누워 흔들리는 막연한 인상만을 남기고 그의 의식은 까마득한 어둠에 빠져들었다.


그는 문득 방안에 가득한 햇빛을 인식했다. 눈에 파고드는 햇살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눈을 도로 감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는 시야를 커다랗게 분홍빛으로 차지한 페어리가 눈꺼풀을 억지로 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눈 떴다?” “이제.. 깬..야?” “므우루?”

주변에서는 페어리 목소리들이 종알거렸다.

“저리 가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 쇳소리가 되어 나왔다. 꽤 누워있었던 모양이었다. 성가시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날파리들…”

꺄악! 페어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용어로 한 말이었지만, 언성은 언어를 가리지 않는 법이었다. 페어리들은 자기들끼리 두런거리며 좀 거리를 두고 모여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랜돌프는 그들을 셀 수 있었다. 분홍, 하양, 녹색, 보라, 노랑 색색의 열일곱 개 작은 빛을.

해냈는가. 깨끗하게 붕대를 감아놓은 채 가끔 가볍게 욱신거리는 부상 외에 그가 이렇게 무사히 있고 페어리도 열일곱 모두 괜찮다면 이곳은…

“로스로리엘?”

페어리어로 묻자 작은 요정들은 일제히 재잘거리며 대답했다. 그 속에서 랜돌프는 '로스로리엘!' '엘프!' '이뻐!' '므우루!' 하는 말을 분간했다. 이곳은 로스로리엘이 맞고,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로 그는 대충 이해했다.

“므우루?”

그는 다시 물었다.

“만났어?”

“므우루! 므우루!”

그들은 들떠서는 색색의 빛을 흩뿌리며 방안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춤추는 빛무리 사이로 은은한 푸른 빛으로 빛나며 므우루가 방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전에 봤을 때보다 빛은 조금 약했지만, 건강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그를 보고 그녀는 작은 손을 모으며 환하게 웃음지었다.

“일어나셨군요. 아직은 일어나시지 않는 것이 좋아요.”

'아아.'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다시 푹 누웠다. 신이 난 미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성공했나, 그 떨거지들…'

살아남은 페어리, 그리고 그들의 여왕을 구해낸 것은 그와 그들이 함께 이루어낸 승리였다. 뭐 하나 지킬 것도, 아쉬울 것도 없던 그의 삶에 이런 순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꽃밭 위를 춤추며 날던 므우루와 그녀의 동지들을 떠올렸다. 잔잔한 음악소리에 귀기울이던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맑은 웃음을.

”…미안.”

잠시 침묵하다가 그는 그들의 언어로 말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빨리 못… 갔다. 미안.”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만 있었더라면 이들을 지켜주고 싶었었다. 이들에게는 악귀처럼 살아온 랜돌프마저 믿을 수 있는 순수라는 것이 있었다. 망가지고 다치고 혼탁해지지 않은 한 가지를 남길 수 있다면, 아득바득 살려고 버둥거리며 피에 젖어 살아온 그의 삶마저도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으리라.

그의 말에 므우루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공용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건 우리 잘못이었는 걸요.”

고개를 든 그녀는 묘하게 무표정해지면서 그를 마주보았다.

“이렇게 무사하니 그걸로 되었어요.”

그를 지나 까마득히 먼 곳을 꿰뚫는 므우루의 눈빛에 랜돌프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여전히 그 먼 곳을 보는 눈빛으로 그녀는 말했다.

“무사하니까…”

“너…”

그때 열매를 찾으라며 그들을 보낸 것은 그렇다면 설마… 랜돌프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믿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의 순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말을 잇기 전에 문에서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여자가 하나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일리스는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들더니 자연스럽게 므우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계신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혹시 방해했다면…”

아일리스가 가볍게 목례하고 물러서려고 하자 므우루는 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전혀 아니랍니다. 랜돌프씨 선물인가요?”

“페어리 레이디와 그 친구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

그녀는 랜돌프를 흘깃 쳐다보았다.

“남부 에미넴 숲으로 파견했던 일행이 보냈습니다.”

아일리스는 곱게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므우루의 손짓에 상자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그녀 앞에 와서 뜨더니, 묶은 리본이 스르르 풀어지면서 뚜껑이 열렸다.

므우루가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살짝 들자 상자가 떨어져 내리는 동시에 삐죽삐죽하고 울퉁불퉁한, 게다가 반토막이 난 갈색 열매가 둥실 떠올랐다. 랜돌프는 순간 긴장했지만, 므우루의 부탁으로 찾으러 갔던 저놈의 물건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났던 그 지독한 냄새는 이제 없었다.

“어머…”

므우루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지었다. 아일리스가 어리둥절하게 보는 동안 랜돌프는 피식 웃으며 뒤로 등을 기댔다.

“더럽게도 비싼 열매였어.”

므우루가 이 열매를 찾으러 그들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마법사와 오크떼가 습격했을 때 그들이 페어리 꽃밭에 함께 있었더라면, 그 파괴와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좀전 므우루의 묘한 표정을 떠올리고 그는 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므우루가 손을 저어 아카마카 열매를 방 가운데 있는 탁자에 올려놓자 열일곱 명의 페어리는 웃고 떠들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다가 랜돌프는 아일리스가 다가오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녀가 침대 옆에 와서 서자 그는 페어리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사과할 생각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일리스를 마주보았다.

“나는 그런 놈이 맞으니까. 너는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

아일리스는 그를 무표정하게 보다가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미소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검집을 칼에 씌우고 싸운 것은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될까요.”

“몰라서 물어?”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죽이면 잡아다 팔 수가 없잖아.”

아일리스의 눈빛과 얼굴은 마치 고요한 수면 같았다. 그 이면에 작은 파장이 이는 것처럼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몇 가지 스쳐가더니 그녀는 다시 무표정해졌다.

“얼마였지요?”

“음?”

“저를 잡아다 팔면 얼마가 나왔을지요.”

조용하고 하염없이 깊은 눈빛을 마주보며 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시선을 피해버렸다. 엘프란 다 이런 식이었다. 눈을 마주보다 보면 그 세월과 상념의 깊이에 숨이 막혔다. 잡혀가는 길 내내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어느 엘프 여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좀 보라고 얼굴을 후려쳤던 기억에 그는 그 감각이 선명한 오른손으로 침대보를 꽉 잡았다.

”…최소한 15만 8천 355골드다.”

그는 아카마카 열매와 페어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최소한이야. 중개상에 파는 값이 그러니까 현지에서는 두 배, 세 배다.”

아일리스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엘프 이터.”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당신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녀는 재잘거리며 방안을 날아다니는 페어리들을 눈으로 따랐다.

“그리고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아일리스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일 델 라 쿠데 알라미사. 편히 쉬도록 해요.”

“태양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여…”

경쾌하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엘프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 뜻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길에 빛을 비추기를.”

“나갔다~~” “나간 거야?” “놀자~” “놀자~”

미처 생각할 새도 없이, 페어리들은 아일리스가 나가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 하나가 어깨의 상처에 돌진하듯 부딪히자 그는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를 죽일 셈이냐!”

그는 파리를 쫓듯 손을 저었다.

“저리 가 이 날파리 놈들아! 나도 좀 쉬자!”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은 또 하루 사신 (死神)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기쁨 때문이리라. 삶이라는 끝없는 투쟁 속에서… 소란스러운 방안에 창밖의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며 구석까지 빛을 환하게 밝혔다.

소감

삭풍님 대신 제가 대리진행했던 외전이었는데, 겁스 룰을 잘 모르다 보니 (정확히는 좀 무서워하죠(..)) 전투 부분도 안 굴리고 대충 했습니다. 제가 인터넷이 미친 듯 끊겨서 결국 마무리는 삭풍님이 해주셨죠. 길지 않은 플레이라 대체로 로그를 따라서 썼는데, 끝에 가서는 살짝씩 편집하고 축약한 대사가 있습니다. 특히 므우루가 일행을 열매 심부름 보낸 이유를 나름 만들어 붙였는데, 여기서는 암시 정도로 처리했습니다.

진행에 딱히 준비한 것은 없었지만 이방인님이 생각해두신 게 있어서 둘이 얘기해서 하니 편했습니다. 재밌게 한 플레이였고, 랜돌프라는 인물의 여러 면모가 드러나서 흥미로웠습니다. 소설 형식을 통해 그 깊이를 더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폭력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페어리를 위한 역설적인 헌신 등 한 인물의 복합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1:1 플레이의 묘미죠.

새로 NPC를 만들어서 RP한 것도 이번 플레이의 재미였습니다. 더크 콘웰은 나중에 본편에서도 삭풍님이 등장시키셨고, 아일리스는 이 플레이 이후에 쓴 안식의 로스로리엘 대목에 로스로리엘 묘사를 대폭 추가하면서 제가 활용했습니다. 콘웰이야 뭐 '무자비한 노예사냥꾼 A'로 써먹기 좋은 인물이고, 랜돌프와 지인이기도 하니 더욱 편리하죠. 어찌보면 랜돌프가 될 수 있었던 모습이기도 하고, 사실 성격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 삶의 모습이나 입장은 반대인 점이 역설적입니다.

아일리스는 원래 랜돌프 상대역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아라와 랜돌프 사이의 긴장감이 급부상하면서 좀 밀려난 느낌입니다. 안식의 로스로리엘에 암시를 넣었듯 아스타틴과도 과거에 인연이 있고, 아스타틴 아버지의 먼 친척쯤 될 것 같습니다. 그 뻣뻣한 성격 때문에 이방인님 말씀마따나 놀려먹기 좋아서 다시 등장해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소설판은 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꽤 재밌게 작업했습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은 많이 써보기도 했고, 또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장편과는 달리 쉽고 재밌죠. 결말이 나지 않은 캠페인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과는 달리, 어떻게 끝나는지 아니까 방향성이 확실하기도 하고요. 특히 전투가 두 번 있어서 전투 묘사 연습하기에 좋았고, 쓰기도 재밌더군요.

글 봐주신 천루님 지적대로 왠지 요즘 글은 묘사가 폭주해서 이번에는 좀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래 제가 묘사 그렇게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야 한다는 생각에 좀 열을 올렸던 것 같네요. 이제 어느 정도 기본 묘사를 깔아놓았으니 분량을 적절히 조절해야겠습니다. 4화 본편부터는 전투도 많고 하니 편집과 축약의 미를 더욱 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아일리스의 시세는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계산기까지 두드려가며(..) 열을 올렸는데, 랜디의 과거와 노예사냥꾼으로서의 생활에 구체적인 깊이를 더하는 장치였던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역설정을 하든 인물을 만들든 저는 항상 경제적인 고려를 우선 하는데, 랜돌프와 더크 콘웰도 노예사냥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먹고 살고 유통 구조(..)는 어떤지 생각하니 한결 인물이 구체적으로 잡히더군요. 한편 이종족들도 자신이 노예로 팔리면 얼마나 비싼 몸인지 자기들끼리 농담하면서 가혹한 상황을 유머로 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참가하신 이방인님, 그리고 관전하시고 마무리까지 해주신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분 다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까지 해주셔서 더욱ㅠㅠ 더욱 발전하는 소설로 보답하겠습니다! 비록 느리지만 (엉엉)


주석
  1. 랜돌프 배경 참조 [돌아가기]
2010/05/26 00:54 2010/05/26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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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메타포노비아의 아시타와 아스타틴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아시타 시점은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했는데 거짓말이었..(..?) 나중에는 시간 순서대로 정리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별문으로 올리겠습니다.

내용상 주의사항: 여성 동성애 암시 (과연 암시만?), 폭력과 죽음.


메타포노비아의 잿빛 대지 위에는 잿빛 새벽이 밝아왔다. 그 속에 하품을 하며 아시타는 숙소 밖으로 나섰다. 동료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서늘한 새벽 바람 속에 서자, 오른쪽의 동녘에서 시작해 정면의 남쪽 하늘까지 희미한 홍조를 띈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 다크엘프의 수도 외곽 정착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나는 이들, 아마도 가축 먹이를 주거나 밭에 나가는 사람들이 어스름 속에 그림자처럼 움직여가는 모습이 띄엄띄엄 보였다.

문앞에 기다리는 다크엘프 전사들은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인 것이, 인간 튀기 따위를 그들의 지도자 프리야 마타 앞에 데려가려고 잠을 설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시타는 일부러 더 밝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과장스레 허리숙여 인사했다.

"세계수의 그늘 속에서 축복받은 아침입니다, 용감한 전사들이여."

인간 혼혈이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실에 놀랐다면 그 사실을 들키기에는 자존심이 강하거나 졸린 모양이었다. 창을 든 오른쪽 전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질 뿐, 검을 찬 왼쪽 전사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프리야 마타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일시적이었지만 그들에게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집에 그들을 여주인으로 모시는 남편이 적어도 한둘은 있을 터이고, 한 번도 남자를 동격으로 생각해본 적 없을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남자인데다가 원래는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 죽었어야 할 혼혈인 그가...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분명 작고 날카로운 쾌감이었다. 동맹과 사절의 특권이란, 그리고 인간들의 침탈과 노스탤지아의 존재는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을 상황을,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다.

오른편의 전사는 신발 바닥에 묻은 더러운 것을 보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 절도있게 돌아서더니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잠이 부족했는지 갑자기 피곤했다.

그들은 텅 빈 노스탤지아 연락기지 마당을 가로질러 메타포노비아 남문으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에 목책을 두른 도시의 모습은 정면에 압도해 왔다. 특별히 번영하거나 호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지만, 메타포노비아에는 그런 외형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안에 새끼가 바들바들 떠는 굴을 지키는 암여우처럼, 구석에 몰리면 어떤 제어나 한도도 없이 행사할 폭력과 결코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이.

아아, 여자들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또 새끼 지키는 암컷이 뭐냐. 하지만 정말로 이곳 다크엘프, 그의 아버지를 낳은 민족의 힘은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의 것이었다. 무겁지 않고 예리했고, 무차별적이지는 않았지만 포기를 몰랐다. 어떤 비하하는 의미도 없이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 이곳은 암컷의 도시였다. 그렇기에 시야 가장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보다 빨리 움직이며 단어의 억양 하나, 떨리는 속눈썹의 그림자 하나에 확확 달라지는 이곳의 숨막히는 정치는 그에게 애당초 불리한 그녀들만의 게임이었다.

호위 내지 감시병을 따라 남쪽 문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문득 세계수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남쪽에 있는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에서는 도시의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머니의 폐허를. 아마도 연락기지의 배치는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경비하는 전사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서 세계수를 지켜본 것에 그는 자부심과 다시 유치하고 약간 악의어린 기쁨을 느꼈다.

해뜨기 전의 잿빛 그늘이 무겁게 내린 메타포노비아의 거리를 걸으며 그는 이 길의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생각했다. 원래 프리야 마타는 다크엘프 최고 군사지도자인 라카'쟈나인을 이을 후계자였지만, 현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는 라카'쟈나인이 공석인 상태에서 벌써 근 30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전대 라카'쟈나인인 이샬헤브라의 복수를 하기 전에는 취임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얻은 종교적 정당성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에 힘입어 다크엘프 부족들에게 유례없는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노스탤지아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흔히 번역해서 라카'쟈나인은 '여왕', 프리야 마타는 '공주'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샤나에리스야말로 다크엘프 최초의 여왕이었다. 프리야 마타는 물론이고 어떤 라카'쟈나인도 자긍심 강하고 뻣뻣한, 각자가 자기 집과 부족의 주인인 부족장들에게 이리도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부에 보고할 때마다 본 그녀였지만, 그녀의 본거지인 메타포노비아에서 다른 지도부 없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족의 여왕으로서의 그녀를.

라카'쟈나인의 집이자 지금은 공식적으로 주인 없는 궁, 하타라야로 가는 길은 문에서부터 똑바로 가는 대로가 아니었다. 종종 굽어지고 꺾이는, 불과 수레 두세 대 정도가 나란히 지날 만한 길은 요소요소마다 방어군이 엄호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끼고 돌았다. 올려다보면 종종 목책 위의 거점에서 뚜렷한 사선이 확보되어 있었다. 삼면에 강력한 세력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드워프족은 모두 우방이었고, 엘프들은 파괴당한 세계수를 마주할 수 없어서라도 이곳에까지 올 일은 없을 텐데 왜...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침묵하는 두 전사와 걸음을 옮기면서 아시타는 하타라야로 가는 길이 어떤 공격군을 경계하는지 문득 깨달았다. 내부의 경쟁자. 다른 부족장과 전사들, 하나같이 자신의 집과 부족의 주인인 저 자존심 드높은 쟈나인--여인, 여주인, 여왕, 그들의 언어에는 구분이 없었다--들이 라카'쟈나인의 한 발짝 뒤에서 끝없이 계책을 세우고 지켜보고 기다리고, 때로 움직이는 한 이곳 허무의 대지에 진정한 여왕이 설 수 있을까.

심지어 그들의 그림자 여왕인 샤나에리스마저도 다스리되 군림할 수는 없었다. 하타라야의 접견실에 온전히 그의 편이 있다면 바로 프리야 마타 자신이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지지하는 사안이라 해도 족장들은 정식으로 통합 부족회의 안건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를 올리고 노스탤지아의 요청을 정식 안건으로 내놓는 역할을 맡은 행운아가 바로 아시타 자신이었다. 뭐 실은 전령단 전체였지만, 동료들은 연락 기지에 두고 왔으니 이제는 혼자의 몫이었다.

정신나간 녀석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임무일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계율과 관습상 자신 같은 하프다크엘프는 보자마자 죽여버리는 사회에 호기심이 동해 닥치는 대로 공부할 정도로 미쳤다거나, 세계수를 한 번 보고싶어 이런 임무에 자원할 정도로 무모한 녀석이라면... 그런 바보라면 다크엘프 부족장이 모인 자리에 나가 군 통수권을 이양하라고 요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의 끝에는 허무의 대지치고는 꽤나 높은 하타라야가 버티고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타는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타라야는 드워프 건축가가 보면 수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그 무자비하도록 실용적인 선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1층은 돌, 2층은 나무로 지은 큰 집은 별다른 장식이나 편안함 없이 여기저기 굴뚝과 탑이 솟아나왔고, 유리가 없는 좁은 창문이 경계하는 눈처럼 거리를 내다보았다. 전사들을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이곳 특유의 사나워보이는 닭 몇 마리가 꼭꼭거리며 발앞에 흩어졌다. 주 건물 양옆으로는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앞에 얼쩡거리는 전사들과 가우르, 남자와 아이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두 호위전사는 하타라야 정문을 비껴나 왼편 벽에 난 문으로 그를 데려갔다. 문에 접근하면서 그는 문앞에서 여인들이 뭔가 낮게 얘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그와 말없는 호위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단숨에 그 눈빛이 적의가 되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들의 시선에는 적의를 넘어 살의의 싸늘함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허리로 갔다가 아시타는 하타라야 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주의사항대로 방에 놓고왔다는 것을 기억했다. 이론적으로 그의 안전은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두 전사가 책임지게 되어 있었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을 어쩌랴. 게다가 더욱 살떨리게도, 비교적 고급 옷이나 무장으로 보아서는 부족장 혹은 비슷한 급인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차고 있었다. 아시타는 벌거벗은 듯 무방비가 된 기분이었다.

벌거벗은 생각 하니, 여인들 중 셋은 나이가 좀 지긋했지만 둘은 제법 젊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고위 전사들은 그를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인사하며 한 명씩 문으로 들어갔다. 그 중 하나는 어깨에 활을 멘 궁수였는데... 어라?

"니아?"

순간 너무 반갑고 의외여서 그랬을까,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이름부터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키였지만 당당하게 치켜든 턱과 냉랭한 눈빛에는 그를 굽어보는 것 같은 당당함이 있었다. 그 눈빛은 그를, 모든 접근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입을 살짝 벌렸다. 눈이 마주친 찰나 그는 다시금 마법사의 불타는 실험실에서 오르는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았고, 밤하늘 아래 실험실의 잔해에서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고 있었다. 품안의 죽은 아이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않는, 생존에는 관심도 없는 그 노예 여인을 붙들고 아시타는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었다. 나중에 탈출하는 행렬에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복을 빌어주었었는데...

그런데 이 여인은 임페리얼에서 탈출하는 길에 그에게 즐겁게 재잘거리고, 때로는 죽은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훌쩍훌쩍 울던 그 아이같던 여인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은 전사 귀족의 얼굴을 한 그녀는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들 니아... 혹은... 어쨌든 그 다크엘프 전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것이 아시타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왜 생각없이 그렇게 부른 걸까. 더듬거리며 막 사과하려는 그에게서 돌아서며 니아는 주변의 전사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이 자를 아느냐?"

나이 지긋한,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아마도 니아의 어머니인 여인이 말했다.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잠시 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자 니아의 어머니는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그녀는 딸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들어가서 기다리마."

마주보는 모녀 사이에는 뭔가 말없는 대화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도 엿들을 수도 없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가깝고 긴 연(聯)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대화. 소속도 없고 가족도 없는 그에게 그 침묵의 대화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얘기하던 사람들이 하타라야의 옆문으로 들어간 후에 여인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가 손을 저어보이자 두 호위전사는 즉시 허리를 숙여보이고 물러났다.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원치 않는 목숨을 구제받았던 니아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분명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지금 이곳에서 떠나라."

"예?"

아시타는 당황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하타라야의 문지방까지 와서 돌아가라고?

"목숨을 구해준 것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적대감도, 웃음기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이곳을 떠나. 하타라야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시타도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을 두고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고운 먼지를 품고 부는 바람처럼, 도시의 지붕 위로 비쳐오는 햇살처럼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그가 뭔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 호위전사가 아니면 무기는 소지할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모두가 달려들어 맨손으로 죽이려 드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그전에 프리야 마타의 호위병이 먼저 반응할 것이 틀림없는데.

질문은 끝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한 말만으로도 넘치도록 말했으리라. 남자이고 외부인인 그에게 전사인 그녀가 명령 외에 어떤 이유를 제시하거나 설명할 필요를 느낄 리 없었다. 드물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만으로 이미 의무는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궁수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신분과 종족, 역사의 간극은 너무나 멀어서 서로 보이지도 않았고, 서로 들리지도 않았다.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경고, 아니 명령에 따른다면 영원히 그러리라.

"거절하겠습니다."

니아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시타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남녀 사이의 설렘과는 또 다른, 아니 그보다 한결 강렬한 열망,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던 눈에 하나의 개체로 투사된 그 인지의 순간에...

"...뭐?"

"임무를 띠고 온 사절로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그 시선을 마주치며 아시타는 조용히 말했다.

"사절로서 제 신변은 프리야 마타께 보장받았으므로 지금 와서 임무를 포기하는 것은 프리야 마타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그녀의 시선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니아는 휙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 섰다.

"바보같은 놈."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격렬했다.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냐?"

이제야 나오는가. 더는 돌려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고 이유를 말하는 그녀를 보며 다시 아시타는 날카롭고 다소 잔인한 승리감을 느꼈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래, 날 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목숨을 걸 만한 신념이, 의지가, 열망이 있는 '나'를. 숙소에 두고 온 루카와 미리엘과 아스타틴을, 노예들의 하얀 뼈가 가득한 광산을, 엘프 숲이 있던 불탄 폐허를, 너무나 원통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던 눈앞의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시선을 가린 장막을 모두 잡아뜯고 서로 똑바로 마주볼 수만 있다면.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한 니아는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마치 겁을 먹은 듯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는 등을 돌려버렸다.

"나는 경고했다, 마이레야카.1"

"제 이름은 아시타입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냥 여느 사내, 여느 튀기가 되지는 않으리라. 자신을 무심히 지나가는 시선의 무심한 폭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그를 흘깃 돌아보는 니아의 눈빛에는 싸늘한 분노가 어렸다. 다시 한 번 둘 사이에는 무거운 장막이 드리웠고,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는 까마득히 멀었다. 그녀는 육중한 문을 지나 들어갔다.

"가십시다."

아시타는 호위 전사들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가 통과해야만 하는 눈앞의 문에만 향했다.

"프리야 마타를 기다리시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뱀이 혀를 내밀어 냄새를 맡듯 아시타는 홀 안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혼란과 분노, 오래 묵은 적개감과 반목의 냄새가 났다. 그의 보고는 에미넴 숲을 잠식하는 록윌 요새, 남부 난 엘모스를 압박하는 크레이들 요새, 대륙 동부에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제국과 그나마 운신의 여지가 있었던 서부에마저 내륙으로 치고 들어오는 십자군의 존재라는 대륙의 전황 전체를 포괄했다. 홀의 양옆에 부족별로 모여앉은 전사들은 귀를 기울이고, 토론하고 반박하고, 이익을 저울질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막간에, 전사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고 협상하고 공모하며 웅성거리는 동안 아시타는 단상의 발치 자리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원래는 사절단 전체가 할 보고를 혼자 하다 보니 보고를 마치고서야 쉴 틈이 났다. 돌아가면 아스타틴 녀석을 못살게 굴어서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하인이 내어온 차를 마셨다.

많은 낯선 얼굴을 멀리서 살피며, 이 거대한 연극의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관객이 된 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의견을 내고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짐작하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낯선 얼굴 사이에 낯익은 얼굴 하나에 시선이 갔다가 가슴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한기를 느꼈다.

"저기 잠시..."

그는 일어서서 옆에 무료하게 선 호위전사 중 창을 든 쪽, 동료가 '아루나'라고 부른 전사에게 말했다.

"저... 분은 어째서 무기가 있는 것입니까?"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시선으로 따라갔다가 아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

아라니아카...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던가. 마하스트린이라면 분명 대궁 (大弓)이라는 뜻, 다크엘프 중에서도 최상 수준에 드는 궁수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는 아까 입구에서 얘기할 때 보았던 활을 이 안에서도 당당하게 메고 있었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프리야 마타의 친우이시다."

아루나의 동료가 뭐라고 말하자 (아시타가 알아듣기에는 낮고 빨랐다) 두 전사는 갑자기 자기들끼리 깔깔거렸다. 그런 웃음이라면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남녀가 부쩍 둘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아니면 서둘러 결혼한 신부의 배가 벌써부터 얼마나 불러오는지 얘기할 때면 어디서나 터뜨리는 그런 웃음. 그 웃음을 듣는 순간 아시타는 니아가, 아니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가 어떤 류의 친우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지도.

어머니와 얘기하던 아라니아카는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회의장의 인파 너머로 마주친 그녀의 고요하고 냉정한 시선 속에서 아시타는 자신의 죽음을 읽었다. 활이라면, 그리고 마하스트린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한 실력이라면 프리야 마타의 전사들이 개입하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궁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더니 마침 다가온 다른 전사와 이야기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떤 부인이나 변명도 없던 그녀의 눈빛은 분명 도전이었다.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뚫어져라 보며 아시타는 입안이 말라왔다.

그녀가 던진 선택은 세 가지였다. 통수권 이양이 안건으로 나오기 전에 나갈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이며 연인인 라카'마의 무장해제나 감시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떠나버린다면 통수권 이양이라는 안건은 꺼내기 전부터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외지인이었지만 이것은 어디를 가나 뻔한 일이었다. 노스탤지아에서 제시하는 안건인데 정작 노스탤지아 사절이 없어서야 어떻게 반대의견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를 암살자로 의심한다는 뜻을 내비친다면...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샤나에리스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고 포로가 되어 노예살이를 했었다. (이 빌어먹을 바보놈! 탈출노예 행렬 속의 니아가 그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던가.) 그런 의자매를 공개적으로 의심하는 언행을 했다가는 통수권 이양 반대파뿐 아니라 찬성파까지 마음이 멀어질 것이다. 차라리 등에 표적을 그리고 말지.

세 번째 선택은 예정대로 통수권 이양 안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등에 화살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을 알면서, 좀전에 잘난 듯 떠들어댔듯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다. 귓가에 심장박동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정숙해 주십시오."

의전 책임자인, 화상 흉터 투성이에 한쪽 다리를 저는 나이 지긋한 전사가 단상 발치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타는 절박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벌써 안건을 제시할 시간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제기랄,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이든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삶은 갑자기 가슴이 저리도록 소중했다.

전사들이 자리에 앉고 의전 책임자가 회의 순서를 알리는 동안 아시타는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끓는 나머지 오히려 백짓장이 된 것 같았다. 나가거나 아라니아카에게 주의를 돌릴 시간은 시시각각 바닥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어떻게...

"..시오?"

문득 말의 마지막을 듣고 고개를 들자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 말한 기색으로 의전 책임자는 애써 참을성 있게 말했다.

"노스탤지아에서 온 사절은 제시할 안건이 있으시오?"

그가 천천히 일어서는 동안 회의장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제시할 안건, 안건이 무엇이었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고 도망갈까 그는 생각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미친 여자친구나 좀 챙기시라고 할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그가 할 선택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책무를 그런 식으로 버리려고 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단상 꼭대기의 텅 빈 의자, 라카'쟈나인의 빈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낮추자 단상 앞에 앉은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의 엄격하고 각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표정 없이 마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어떤 열망이 있었다. 그와 같은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로서는 흉내밖에 낼 수 없는 헌신이.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보고 중에, 그리고 그 전후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이 임무에 자원했다고 하자 걱정하는 기색이면서도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이 여인의 시선 속에서만은 그는 명령하고 하대할 남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튀기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였다. 비록 위치는 한없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들은 동지 (同志),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회의장의 수많은 시선, 각자의 목적과 편견과 과거의 바다 속에서 그는 오직 프리야 마타의 시선만을 붙들었다. 등뒤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여인은 돌아보지 않고, 지금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전황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스탤지아에서는 존경하는 프리야 마타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용감하신 전사 여러분께..."

그는 반쯤 몸을 돌려 회의장 전체를 시선으로 훑었다. 아마 친척들 사이에 있을 아라니아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프리야 마타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서 힘을 얻으며.

"부족 연합 전사대의 통수권을 노스탤지아의 휘하에 통합할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기다리던 것이 오자 회의장에 모인 사람 전원이 한꺼번에 한숨을 내쉰 것처럼 공기가 풀리면서 동시에 변했다. 전사들의 낮은 웅성거림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심각하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서로 격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소란 중에 아시타는 아라니아카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야 마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 고요가 회의장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한 번 아시타는 이 고집센 민족에 대한 그녀의 통솔력에 감탄했다.

"앉으십시오, 자매들이여."

샤나에리스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앉아서 차례대로 발언해도 늦지 않습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이미 찬성하시는 것 아닙니까!"

얼굴에 길게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이 단상 앞으로 나섰다.

"당신의 전사들을 빼앗아가려는 인간들의 음모에 속으신 것입니까!"

그녀가 너무 가까워오자 아루나의 동료 전사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아시타는 그녀가 어딘가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그는 작은 움직임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한 발짝 나서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와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얼굴에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했다. 문 앞에 아라니아카와 그녀의 친족들과 함께 서있었고, 그와 니아의 대화를 막으려고 했던 전사. 그녀가 시선을 끌어주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있었다.

"아라!!"

비명에 가까운 샤나에리스의 외침이 회의장의 공기를 갈랐다. 아시타가 몸을 옆으로 던지는 동시에 아루나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찰나 속, 날아오는 화살 너머로 마주친 아라니아카의 눈빛은 구석에 몰린 듯 사나웠고. 그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피하려고 막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뭔가 가슴을 세차게 때리자 아시타는 뒤로 비틀 물러났다. 옆에서 아루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내려다보자 가슴에 박힌 화살대가 눈에 들어왔다. 화살을 인식하는 것이 신호이기라도 했는지 가슴에 타는 듯한 통증이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나왔다. 후벼파는 듯한 기침의 고통 때문에 눈앞에 하얀 반점이 반짝이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나의 승리입니다, 니아.'

고통의 안개 너머로 그는 눈을 들어 아라니아카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멍한 채로 마치 이끌린 듯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의 규칙대로 나를 판에 올려놓고 이겼습니다. 인정하지요?'

다시 기침 때문에 눈앞이 하얘졌다.

'나를... 인정하지요?'

다시 시각이 돌아왔을 때는 저 위에 천장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호흡이 가릉거리면서 입안에는 찝찔한 쇠맛이 가득했고, 숨쉬기가 점점 힘겨웠다.

"괜찮을 것이다, 아시타."

그의 손을 잡아준 손길은 강인하고 따뜻했다.

"조금만 참거라."

그는 힘없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중얼거렸고, 잠시 가슴속에 온기가 피어났지만 이내 통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왈칵... 다시 쇠맛이 올라오자 누군가 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었다. 바닥 위로 퍼지는 선혈을 보고 그는 피에 익사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막상 자신에게 벌어지니 실감이 날 리 없었다.

이렇게 끝인가. 뭔가 기도나 참회라도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딱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맡기고 간다, 루카, 아스타틴, 모두들. 난 여기까지니까 제발 개죽음만은 되지 않게 해줘. 대단한 척 목숨을 걸겠다고 떠든 일이니까, 다들 안심하고 좀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대단한 바람도 아니잖아?

가슴이 빠개질 듯 아파오자 그는 몸을 뒤틀며 피가 그륵거리는 소리를 질렀다. 죽어가는 육체 속에서도 정신은 묘하게 평온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다가 끊어지는 세계수의 부서진 검은 윤곽을 떠올렸다. 한때는 하늘을 가득 뒤덮었을 그 푸르른 생명력의 잔해를...

"마람... 에르 다라...2"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가족도 종족도 없이 떠도는 그에게도 세계를 낳은 어머니의 품에 안길 자격이 있다면. 가로막은 거리와 장벽을 넘어 다가갈 수만 있었더라면 시리도록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눈을 감은 기억은 없는데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 절대적인 평화에 그의 의식은 천천히 침잠했고, 모든 차이를 지워주는 너그러운 어둠 속에는 어떤 장막도 없었다.



쓰러진 사절이 잠잠해진 후, 샤나에리스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는 평생을 곁에서 모신 라하드마저 움찔했다. 사절의 피가 옷과 손에 튄 샤나에리스의 앞을 전사들은 소리없이 비켜주었다.

아라니아카에게 무기를 겨눈 채 포위한 호위전사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 샤나에리스는 의자매 앞에 섰다. 둘이 말없이 서로 마주보는 동안 방안의 침묵에 아주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샤나에리스의 손이 휙 올라갔다. 누군가 놀라서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아라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샤나에리스가 아라의 얼굴을 후려치자 철썩 소리가 회의장 구석까지 울렸다. 고개를 돌린 채 아라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의자매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랬지?"

프리야 마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만큼이나 깊은 비탄에 갈라졌다.

"왜 그랬느냐, 아라!"

"의자매의 안위를 염려함이었습니다."

아라니아카는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목소리는 작고 또렷했고, 눈빛은 맑았다.

"근래 인간과 인간 잡종이 프리야 마타 곁에 빈번히 왕래하며 무례한 요구까지 하니, 프리야 마타께 위해를 가하지나 않을까 저어하였습니다."

전사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녀의 답변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샤나에리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내가 널 어찌하면 좋겠느냐?"

프리야 마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박했다.

"뜻하는 대로 하소서."

아라는 평온히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라의 목숨은 프리야 마타의 것이었습니다."

괴롭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샤나에리스는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마하스트린을 구금하도록."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선 바이두르야 전사들 사이에서 라스카야가 한 발짝 나서자 샤나에리스는 아라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처분은 이후에 결정합니다, 족장이여. 물론 그전에 부족에 먼저 통보하고 불복할 기회도 드리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족장은 다시 물러났다. 전사들에 둘러싸여 나가는 딸을 보는 시선은 안타까웠지만, 표정은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나가다가 아라니아카는 문득 단상 앞에 쓰러진 혼혈 사절을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피투성이 바닥에서 시신을 들어올려 들것에 싣는 모습을 그녀는 홀린 듯 지켜보다가, 뒤에서 인솔하는 전사가 어깨를 가볍게 밀자 그제서야 기억이 난 듯 걸음을 옮겼다. 다른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삼삼오오 회의장을 떠나, 먼지바람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황량한 땅 위에 길게 드리운 세계수의 그늘 속으로 나섰다.


덧: 시점 인물이 죽는 건 이전에 썼다가 묵혀둔 습작 이후 처음인 것 같군요. 다크엘프 정치에 대한 아시타의 생각은 어슐라 르귄 할머니의 '어둠의 왼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미묘한 시프그레서 정치에 주인공 겐리가 답답함을 느끼던 부분 말이죠. 뭐 결국 결론은 아시타 안습이라는 것... 원래 괜찮은 녀석들이 괜히 나서다 죽죠.


주석
  1. 다크엘프어로 '혼혈' [돌아가기]
  2. 나무들의 어머니, 세계수 [돌아가기]
2010/05/11 00:34 2010/05/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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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해보이는 의자와 탁자, 양탄자가 아늑한 방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그녀를 맞아주었다. 셀라나는 바닥에 엎드려 새 주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남자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셀라나가 보기에는 세 명의 인간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친 아라는 손가락의 반지를 붙잡아빼서 휙 던져버렸다. 마법의 막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몸이 가벼웠다.

“일어나.”

그녀는 셀라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붙잡아 일으켰다. 낮에 켈냐와의 재회가 휘저은 기억이, 그녀가 건네준 목걸이의 수수께끼가 아직도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남아있는데 또 이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랜 악몽을 불러일으키는 굴종 같은 것은 다시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릎꿇지 말아라.”

손길에 흠칫했던 셀라나는 끌려 일어나면서 아라를 마주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믿고 싶은데 믿기 두려운 것을 눈에 새기려는 그 눈빛을, 입을 반쯤 벌린 채 목소리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 그 표정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라의 어깨를, 다음은 팔을 붙드는 손길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했다.

“아… 아…”

그렇게 말도 제대로 한 마디 못하고 아라를 붙잡은 채 셀라나는 무너지듯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녀의 발치에 구겨져 웅크린 혼란과 슬픔의 덩어리에서는 추운 밤중에 부는 바람처럼 외로운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손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아라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어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낮에 켈냐는 전사답게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대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움을 청하며 둘러봐도 이 배신자 같은 일행놈들은 아무도 거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엘프 아이는, 처음으로 자유의 놀랍고 두려운 바람이 뺨에 어렴풋이 스친 노예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는 여자에게. 몸이 떨려오는 것을 깨닫고 아라는 흠칫 놀랐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쭈뼛쭈뼛 손을 뻗어 흐느낌으로 들썩이는 셀라나의 어깨를 툭툭 처주었다.

“약하게 굴지 말거라.”

셀라나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곁눈질하자 일행이라는 자들은 틀림없이 재밌어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해도 좋을 텐데.”

지카리공의 눈빛은 흐뭇했다. 아라는 평생 처음으로 드래고니안을 공격하고 싶다는 자살충동을 느꼈다.

“익… 마법사 네가 어떻게 좀 해보거라!”

그녀는 옷자락을 두고 셀라나와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그놈의 하프엘프는 오늘따라 왜 없어서 떠넘길 수도 없잖은가.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요.”

지카리공은 몰라도 마법사라면 나중에 보복을 할 수 있으리라고 아라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마법사가 셀라나 곁에 다가와 무릎을 꿇더니 작게 속삭이자 손에 금빛 광채가 떠올랐다. 희미하게 빛나는 손을 그가 셀라나 위로 움직이자 하얀 피부에 뚜렷했던 멍과 상처가 아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별로 남자가 손대는 거 좋아하지 않을 걸.”

랜돌프는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다리는 꼰 채 쳐다보지도 않고 툭 말했다.

“그냥 네가 돌보는게 나을 거다.”

그 말에 아라는 옷자락에서 셀라나의 손가락을 풀려던 손에 힘이 빠졌다. 그 기분이라면 이가 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보호와 지도의 대상이었던 남자가 평생 처음으로 두려워졌던 순간의 기억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셀라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감싸쥐었다.

그 감촉에 셀라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통과 놀람의 흔적은 역력했지만, 처음의 충격보다 한결 안정되고 또렷한 눈빛에 아라는 안도했다.

“시…실례했습니다.”

아라가 손을 놓아주자 셀라나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옆에서 크세노바가 주문을 마치고 떨어져 앉자 그쪽에 눈이 간 셀라나는 그의 손빛과 자기 피부 위에 막 사라져가는 빛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크세노바에게 물러나 앉으며 마주보았다.

“마…마법사…셨…”

“아까도 본 거 아닌가?”

카사노바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공포에는 뭔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있다는 직감에 아라는 물었다.

“왜 그러지?”

“며칠 전에도… 인간 마법사 분들이…”

셀라나는 말하는 것만으로 두려운 듯 시선을 낮추었다. 랜돌프는 대번에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이를 드러냈다.

“그놈들이 가게에 왔었나?”

셀라나가 움츠러들자 아라는 그에게 경고하는 시선을 던지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셀라나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인간 마법사들이 페어리를 사갔느냐?”

셀라나는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노예생활을 하면서 페어리들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을지 생각하자 아라는 새삼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정성들여 꽃을 키우고 친구가 된 페어리들이 죽고 팔려갈 때마다 그 마음이 어땠을까.

손을 통해 전해오는 떨림과 셀라나의 내리뜬 눈빛을 보고 아라는 그 두려움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혹시 오늘의 '손님'들처럼 흑마법사들 역시 셀라나를 덤으로 얹어주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더라면 셀라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에미넴 숲에 있었던 흑마법사 실험실의 기억이 검고 끈끈한 기분을 남기고 스쳐갔다.

“아,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를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카사… 아니 크세노바, 그 문양 다시 만들어보거라.”

젊은 마법사의 손짓에 공중에는 다시 그 기하학적인 무늬가 떠올랐다. 셀라나는 신기해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과연 프리포트 같은 인간 사회에 마법사란 흔치 않은 존재인 모양이었다.

“혹시 이런 문양이 그들의 옷이나 몸에 있었느냐?”

그 질문에 셀라나는 문양을 뚫어져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사람들의 손등에…”

“역시.”

다시 확인을 얻고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숙인 랜돌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놈들이 맞군.”

“셀라나.”

부르자 셀라나는 바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표정에 두려움과 불안이 엇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눈빛은 맑고 예리했다. 다시 한 번 아라는 이 아이가 상당히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네 앞에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셀라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라는 또렷하게 말했다. 정확하고 정직하게 상황을 설명하면 셀라나가 이해하고 잘 대응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혹시 일이 잘못될 때에 대비해, 우리뿐만 아니라 너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하다.”

셀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아이에 대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많은 것을 묻지 말고 우리 질문에 답해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느냐?”

하프엘프는 더욱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처음으로 스스로 판단해 강제가 아닌 이유 있는 지시에 응하는 그녀의 눈빛은 집중력과 목표의식으로 더욱 강렬해졌다.

이어서 던진 질문마다 셀라나는 아는 대로 성심성의껏 답했다. 두세 달 정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흑마법사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주 전이었으며, 전 주인이 자랑하던 걸로 봐서는 상당량의 페어리 날개를 사간 것 같다는 말에 일행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사이에 간극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아라는 현재는 더 물어볼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 물을 것이 없다면…”

그녀는 셀라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회의를 하자.”

셀라나는 즉시 일어나서 익숙한 기색으로 소리 하나 없이 방으로 물러갔다.

일행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임무의 어려움과 상황의 거대함이 새삼 다가오면서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윽고 카사노바… 아니 크세노바는 한숨을 쉬었다. 젊은 사람치고 한숨이 많은 친구였다.

“프리포트의 분위기가 걱정이군요.”

그는 근심스럽게 금빛 눈쌀을 찌푸렸다.

“몇몇을 빼내는건 어렵지 않을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마법사들도 한두 놈이 아닌거 같은데. 솔직히 마법사는 한 놈 상대하기도 버겁다.”

랜돌프의 말에 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하니 지카리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몇 가지 안을 주고받았다. 아라는 구매계약을 한 페어리를 미끼로 흑마법사들을 끌어내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랜돌프는 아예 도시를 통째로 뒤엎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칼로 데 로씨는 휘하에 많은 패거리들을 데리고 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자식은 노예 장사에 대해서 반감이 커.”

바로 너같은 놈들에 대해서 말이냐?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아라는 참았다. 괜히 이 어린 녀석과 말 섞어서 도움될 일은 없었다.

“노스탤지어에서 요원을 파견해 칼로 데 로씨의 패거리들과 합세해 노예장사꾼을을 대규모로 공격해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돈은 칼로 데 로씨가. 노예들은 노스탤지어가 가져가는 식으로 협상할 순 없을까?”

“그건 너무 큰일이 아닌가.”

역시 젊고 혈기 넘치는 남자들이란 야심만 지나치게 컸다. 뭐 그러니 젊은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아라는 그의 그을린 피부와 근육질 팔을 곁눈질했다. (그만. 네가 단단히 굶주렸구나, 아라.)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어떨까, 마탑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전문가의 크세노바의 의견에 따르면 마법진은 단기간에 설치하기는 어려웠고 마탑에서는 페어리 날개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결국 남은 문제는 일을 얼마나 키우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곳에서 내릴 수 없는 결론이었다. 노스탤지아에서 얼마나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 칼로 데 로씨라는 자는 얼마나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칼로 데 로씨에게 많은 것이 달려있을 것 같구나.”

아라는 얼굴을 비볐다. 낯선 인간 도시의 불쾌감은 온몸에 피로가 되어 젖어들었다.

“어느 쪽이든 노스탤지아에 접촉하고,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자.”

이 참을 수 없는 도시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그 필수품, 마법 반지를 어디다 던져놓았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자 지카리공이 찾았는지 반지를 집어들어 정중하게 내밀었고, 아라는 목례하며 받아들었다. 인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진 연녹색 눈만은 변함없었다. 수많은 변화와 혼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근본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채 반지를 끼고 그 마법적 변장의 안전을 받아들였다. 적지인 프리포트에서 그녀를 유일하게 보호해주는 것, '인간'이라는 사실을.

“내일도 움직여야겠구나. 자두거라.”

나머지 둘에게 말하고 그녀는 셀라나가 들어간 방으로 따라들어갔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셀라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실제로 자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와 불안 와중에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그냥 곯아떨어졌을 지도 몰랐다.

가만히 옷을 벗고 누우면서 아라는 자신이 처음 탈출했을 때의 기억이 싫어도 떠올랐다. 그 넘치는 희열과 막막함, 그리고 가슴 저리는 슬픔이… 젊은 하프엘프 여인도 그럴까 궁금했지만, 사실 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노예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공통점이 있을 뿐 그녀와 셀라나는 살아온 배경도, 상황도 전혀 달랐으니까. 닮은 듯해도 너무 다른 상실 속에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슬픔 속에 혼자였다. 우연히 마주친 옛 전우, 켈냐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고 아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샤나에리스…'

창밖에는 달빛과 시장의 무수한 등잔불이 비쳤다. 프리포트의 밤을 환하게 밝히는 그 빛 속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력한 분노와 절망 속에 자신의 내일을 빼앗긴 채 쇠와 억압의 사슬에 매여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욕망에 몰려 똑같이 두 발로 걷고 말하는 사람을 사고 팔며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까. 피해자도 가해자도 혼이 찢기우는 그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망가지고 뒤틀리는가.

감상주의라고 생각하며 아라는 눈을 세게 비볐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시인이나 철학자라도 된양 쓸데없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도시를 뒤엎자는 랜돌프의 제안이 그런데도 유혹적인 것은 그 분노에서 놓여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도시를 피와 화염으로 씻어내 바다로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이 추악함과 슬픔의 흔적을, 그 기억마저 지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프리포트가 사라지면 이곳에, 아니면 다른 곳에 새로운 프리포트가 생기리라는 것을. 그래서 파괴와 재생의 꿈은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잿빛 여명으로 보답받을 따름이었다.

지붕 위에 육중한 무게가 부드럽게 내려앉더니 뭔가 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으드득… 소리는 아마도 사냥에서 돌아온 아사나스가 오늘의 포획을 즐기는 신호이리라. 이 정글에서 누군가는 수확이 있다니 다행일까, 아라는 미소짓고 자세를 고쳐누우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어둠 속에 검게 물결치는 바다 위로, 폭력과 풍요 속에 잠들지 않는 도시 위로 프리포트의 밤이 흘렀다.

소감

여기까지가 3화입니다. 끝부분에는 제 글쓰기의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감상주의가 좀 많이 드러나서 아쉽군요. 말하기보다는 보여주는 게 효과적인데, 제대로 보여주려면 더 많이 생각하고 정리하고 재구성을 해야 하는지라 결국 쉬운 길로 빠져나왔습니다.

폭력은 휘두르는 이와 맞는 이 모두를 왜곡시키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사람의 가장 긍정적인 면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죠. 그게 안힐라스의, 억압과 폭력의 순환에 갇혀버린 땅의 희망일지도요. 로그의 내용을 확장한 셀라나 묘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으으 그러나 졸려서 뭐가 뭔지(..)

2010/04/08 23:52 2010/04/0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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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방인 2010/04/09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다시 한번 정제해서 소설로 즐기는 리플레이는 역시 각별한 맛이군요. 문제라면 대필작가 로작가(...)님께 부하가 걸린다는거 정도? 뭐 사소하군요(도주)
    아라와 랜디의 관계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일행중에서 가장 서로 닮았기에 가장 서로 으르렁대는 둘 사이에서 묘하게 싹트는 성적 긴장감이라 생각만 해도 흥미롭군요(...)
    이번주에는 꽤나 중요한 씬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이번주에는 이틀 모두 공사현장에 끌려갈것 같습니다(...) 큰 공사가 몇개 겹친 바람에 과장님도 현장에서 공사를 뛰는 판이라(....) 아 중요한 장면인데 슬프군요 ;ㅅ;

    • 로키 2010/04/10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부하야 사소하죠 (훌쩍) 쓸 분량이 많은 건 사실 별 상관없는데, 슬슬 겉돌고 반복적인 느낌이 들어서 좀 더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옮긴다기보다는 각색하는 느낌이어야 할지도요. 몇 세션쯤 기다려서 방향성을 확보한 다음에 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현재는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번주에도 강제동원의 비극입니카(..) 잘 다녀오시고, 다음주에 뵙죠.

[로그인][오픈아이디란?]

프리포트 위로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지만, 불이란 불은 다 켜놓은 야외시장은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제임스라는 자가 가르쳐준 노예시장 구역에서는 노점상 매대에 쌓아놓은 물건처럼 우리와 사슬과 조롱에 갖힌 노예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언성을 높여 흥정하는 상인이나 행인을 붙잡는 열띤 호객은 활발하고 수익성 있는 시장의 증거였다.

그 속을 걸으며 아라는 문득 어릴적 기억이 떠올랐다. 샬란의 시장에 드워프 상단이 오던 장날, 주변 지역에서도 몰려든 다크엘프와 수염이 긴 드워프, 가끔 엘프까지 뒤섞인 활기 속에 무기와 농기구에서 악기와 장난감, 머리장식까지 온갖 물건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던 기억이 선했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시장에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었다. '상품'의 생기 없이 내리뜬 눈빛이나, 좀도둑이 아닌 노예들을 감시하는 삼엄하게 무장한 경비만 아니었다면. 이곳 프리포트 노예시장의 열기는 어딘가 불안하게 들뜬 데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보다도 상인과 손님에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났다. 억압에 기반을 둔 이 구조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외면한다 해도.

'인간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사람 잡는 사냥개야?'

좌도 우도 쳐다보지 않고 그녀는 시장 한가운데를 걸었다. 그러나 섞여들지 않으려고 해도 시장은 그녀에게 덮쳐왔다. 목청껏 소리질러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와 이리저리 몰리고 움직이는 인파,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빼앗기고 남의 처분을 기다리는 남녀노소의 절망에 잠긴 눈빛이.

'샬란에는 이런 시장이 없다. 안힐라스 어디에도 너희들이 오기 전에는 사람을 사고파는 시장은 없었다.'

“유난스럽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며 노예사냥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긴 이쪽에서 왔던 상인놈들은 하나같이 가격을 비싸게 쳐줬었지.”

“엉망이군요.”

마법사 크세노바는 눈쌀을 찌푸렸다.

“랜돌프, 저들도 생존을 위해서 이런일을 한다고 말할수 있겠나?”

지카리공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지만, 눈빛에는 고통이 드러났다.

“저놈들에게 노예상인일을 때려치고 다른 걸로 먹고살아보라고 말해보겠나?”

사냥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픽 웃었다.

“신경쓰지 마. 남을 먹어치우며 사는 놈은 언젠가 다른 놈에게 먹히기 마련이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웃음은 자조적이었다.

“세상은 정글이고, 정글의 법칙은 간단하지만 준엄하지.”

“자네는 자연의 법칙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어.”

지카리공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낯선 인간 얼굴에도 그의 엄숙한 표정은 여전했다.

“자연이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네.”

“지카리. 지카리…”

인간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토끼가 풀을 뜯어먹는다. 그 토끼를 늑대가 잡아먹지. 그 늑대를 사자가 잡아먹는다.”

그는 흉터와 굳은살 투성이인 길고 강한 손으로 손짓을 하며 말을 강조했다. 문득 아라는 첫째 남편 쟈타칸트의 섬세하고도 강한 손을 떠올리고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과정에서 토끼가 늑대에게 왜 넌 나를 해치냐고 따질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사자가 죽고 나서 풀이 되면 또 다른 토끼가 뜯어먹을 것이었다. 노예사냥꾼이 노예가 되듯, 아니면 노예가 노예를 부리듯.

“오오! 이거 귀하신 손님들이 오셨군요.”

비싼 옷을 입은 인간 남자 하나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듯 서더니 침까지 튀겨가며 떠들어댔다.

“어떻습니까? 관상용 페어리가 단돈 4천 골드입니다!”

그는 색색의 빛이 비쳐나오는 조롱을 늘어놓은 판매대를 양손으로 가리켰다. 안에는 하나같이 풀이 죽어 희미한 빛만 발하는 페어리들이 축 늘어져 앉아있거나 빠져나갈 곳을 찾는 듯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꺼져.”

아라는 그자를 확 밀쳤다. 그가 땅에 뒹구는 것을 보며 그녀는 순간적으로 손가락의 반지를 던져버리고 칼을 뽑고 싶었다. 이놈부터 시작해 노예상인과 노예 사냥꾼들을 되도록 많이 길동무로 데려가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론일 것이다. 벌써 여러 해 전, 인간들에게 포로로 잡히느니 그랬어야 했다. 샤나에리스 역시 그쪽이 편한 결론이리라.

그리고는 한 명의 노예도 구하지 못하고 동료들을 위험에 몰아넣거나 역시 마지막 길의 동행으로 데려가겠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노스탤지아의 임무와 계획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고, 결국 안힐라스인은 인간들에게 더 많이 죽고 노예로 잡힐 것이었다.

“그런 정도 물건에는 관심이 없다.”

되도록 냉혹하고 차갑게, 이윤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이 뼛속까지 계산적인 여자처럼 말해야 했다. 다른 상인도 듣기를 바라며 그녀는 언성을 높이고 되도록 또렷하게 말했다.

“이분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돌아서며 크세노바를 가리켰다. 소란에 주의를 돌린 사람들이 로브 입은 마법사를 보고 낮게 오오.. 감탄했다.

“필요한 것은 관상용이 아니라 날개다.”

이곳, 노예상인의 영역에서는 노예상인이 되어야 했다. 저들만큼 잔혹하고 비정해져야 이 싸움에 이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이미 노예라면 하나 데리고 있지 않은가. 노예가 하나이든 백만이든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좋은 물건을 많이 파는 상인을 주선해준다면 수고비도 좀 떨구어주지.”

“이야, 날개말씀이시군요.”

옆에서 다른 남자가 헤헤거리며 끼어들었다. 눈이 실룩실룩 계속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기분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완벽했다.

“너는 괜찮은 가게를 아는가?”

“날개라면 제가 전문이죠.아주 상품의 것들이 많습니다요.”

“흠…”

크세노바는 벌써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는 미심쩍은 고객의 눈빛으로 남자를 훑어보았다.

“마법사 손님이 이렇게 또 찾아와주실 줄은… 이거 아주 영광입니다요.”

남자가 굽신거리는 앞에 아라는 팔짱을 끼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또'라고? 뭘 하는 마법사나부랭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날개를 구해간다는 말이냐.”

“예에. 일전에도 마법사님 같은 분이 날개를 아주 많이 사가셨습죠.”

남자가 헤헤거리며 아부하는 동안 아라는 크세노바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그 흑마법사일까.

“이분처럼 대단한 마법사님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겠습니다만요.”

마치 파리가 앞발 비비듯 손을 비벼대는 남자를 보며 노예사냥꾼 랜돌프는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기세로 손마디를 우둑거렸다. 그가 섣불리 움직이기 전에 아라는 서둘러 말했다.

“설마 가장 좋은 날개를 그자들에게 이미 넘겨버린 건 아니겠지?”

허리춤의 칼자루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하자 노예상인은 더욱 손을 열심히 비비며 굽신거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헤헤헤. 최고의 고객들을 위해 고순도의 날개는 아껴두고 있습죠.”

그자가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오자 지나치게 진한 향수와 향료 냄새가 끼쳐왔다.

“8장급의 페어리 날개도 있슴니다요.”

그가 귓가에 속삭이자 아라는 칼을 뽑아 이자의 배때기에 찔러넣는 것은 만족스러울 지는 몰라도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했다.

“그래도 조금은 물건을 아는 자이구나.”

그녀는 미소지으며 노예상에게서 물러났다.

“물론 신선한 물건 채취를 위해 아직 페어리는 온전하겠지?”

“아, 생걸 찾으시는군요.”

남자는 헤헤 웃으며 손을 비볐다.

“일전에 온 손님도 그런 걸 찾으셨습죠.”

“위대한 카사노바 같은 마법사님이 신선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리가 없지 않겠느냐.”

크세노바의 표정이 잠시 멍해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싫은 상황이라면 마법사라도 놀려먹어야지 않겠는가.

“물론 있습니다요.”

수익을 직감한 사내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생것도, 꽃까지 통채로 캐와서 아주 생생합니다요.”

”…일단 한 번 보지.”

'카사노바' 일격에서 회복하며 마법사는 상인을 재촉했다. 그는 굽신거리며 인파를 헤치고 근처의 건물로 그들을 안내했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정방형의 큰 1층짜리 돌 건물 앞에 지켜서던 경비 둘이 잠시 긴장했다가 상인의 손짓에 그들을 통과시켰다. 안심하지 못하고 주변을 경계하며 아라는 앞장서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우선 꽃향기가 코에 끼쳐왔다. 안의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자 색색의 꽃을 심어놓은 큰 화단이 보였다. 한가운데에 넓은 통로와 직각으로 뻗어나가는 좁은 통로들을 따라 하인들이 오가며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화단 너머의 양쪽 벽을 따라 걸어놓은 등잔불은 넓은 창과 머리 위의 채광창으로 비쳐드는 바깥 조명과 함께 방을 환하게 밝혔다. 등잔 사이의 긴 선반에는 물뿌리개나 꽃삽 같은 도구, 축 늘어진 페어리가 든 조롱과 아마도 채취한 페어리 날개인 듯한 얇게 반짝이는 물건이 가득 든 바구니가 늘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문득 노예사냥꾼에게 생각이 미쳐 돌아보자 그자는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기세로 이를 갈고 있었다. 저 어처구니없는 모순투성이 아이 같으니라고. 그녀는 앞서가는 상인과의 거리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어깨 너머로 말했다.

“참거라. 여기서 일을 그르친다면 배신으로 간주하겠다.”

그것으로 동기부여가 충분하기를 바라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페어리 상인은 뭔가 또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요 마법사님.아주 맘에 드시지 않습니까?”

그는 손을 비비며 잠시 멈춰서서 일행이 따라잡기를 기다린 후 크세노바의 옆에 붙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다른 떨거지들과는 다릅니다요. 아주 철저하게 관리까지 하고 있습죠.”

“흠 나름대로 섬세하게 관리하는 것 같군그래.”

젊은 마법사는 제법 중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요. 헤헤헤.”

“마음에 드십니까, 카사노바님.”

아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개 8장짜리는 어디 있지?”

“잠시만 기다리십쇼.”

상인은 굽신거리더니 중앙 통로를 따라 뒤편의 문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들어갔다. 밖에서 본 건물의 모습과 대충 대조해본 결과 아라는 이곳의 공간은 아마도 전체의 2/3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는 것은 안쪽에는 또 다른 방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정말 좋은 물건은 저 안쪽에서 관리하고 있으리라 그녀는 짐작했다.

”…이런 곳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싫군…”

지카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운없이 늘어진 페어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라도 말없이 동의하며 한 번 무겁게 끄덕였다. 견디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마음 가는 대로 싸우는 것은 무익한 자살일 뿐이었다.

랜돌프가 아무 말없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그녀는 눈이 갔다. 구석마다 선 용병, 그들과의 거리, 그리고 꽃에 물을 주는 하인들을 살핀 그는 살짝 한쪽 눈썹이 올라가더니 입술을 젖히며 이를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싸움에 뛰어들려는 전투의 열기를 알아보고 그녀는 그에게 살짝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중에 기회를 노리자.”

인간 남자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누가 뭐래?”

그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네 볼일 봐.”

고개를 돌리는 그가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아라는 웃음을 참았다. 모습을 봐서는 100살은 되어보이는 그가 얼마나 젊은지 가끔 잊곤 했다. 아무리 세상 다 아는 척 떠들어도 어린 남자란 참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고 순진했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순간 아라는 자신을 심하게 나무랐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라. 하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만… 가슴이 잠시 시려왔다.

“오래 기다렸습죠?”

방 뒤편 문간에서 움직임이 보이더니 노예상인이 조롱 하나를 들고 급히 다가왔다.

“이놈입니다요, 헤헤헤.”

그자가 자랑스레 내민 조롱 안에는 보라색 빛을 은은히 흩뿌리는 페어리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좁은 공간을 배회하고 있었다. 등에는 여덟 장의 날개가 붕붕붕..날갯짓을 했다.

크세노바가 손을 뻗으며 뭔가 중얼거리자 조롱은 상인의 손을 벗어나 둥실 떠오르더니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크세노바 앞에 뜬 채로 멈추었다.

“흐음… 괜찮군. 나쁘지 않아.”

크세노바는 냉정한 눈빛으로 안의 페어리를 살피며 말했다.

“과…과연 마법사님이십니다요.”

상인은 놀란 듯 더듬거렸다. 저자가 좀 겁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화단에서 일하던 하인들도 이쪽을 가리키며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증오! 탐욕! 사악한 자들!”

안의 페어리는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빽 소리를 질렀다. 무기력해 보이는 다른 페어리들과는 다른 기백은 그녀가 귀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잡혀온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아라는 궁금해졌다.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크세노바가 무심히 손을 젓자 조롱은 그의 왼편으로 이동해 둥둥 떴다.

“꽃은 어딨나?”

“헤헤 그거야 마법사님이 다 마치시면 저희가 즉석에서 날개를 바로 해체해드릴 텐데…”

상인은 만면에 비굴한 웃음을 띄었다.

“무슨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요.”

“쯧쯧…”

크세노바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급수 낮은 도제들이나 연연하는 거야.”

여기서 '위대한 카사노바'가 그의 권능을 선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에 마법사가 능력을 쓰고 피로해하던 기억이 난 아라는 마법은 되도록 비상시를 위해 절약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한 발짝 나서며 상인의 멱살을 잡았다.

“뭘 모르는구나.”

놀라서 눈을 꿈벅거리며 내려다보는 인간의 얼굴에 대고 그녀는 으릉거렸다.

“꽃이 신선할 때 카사노바님만의 비법으로 직접 채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최고급의 마정석을 만든다는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지만, 흑마법사들도 '생것' 페어리를 요구했다는 전례에 비추어보면 적어도 먹힐 수는 있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보다는 기세가 더 중요하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노예상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그렇군요. 소인이 몰라뵜습니다요.”

상인은 손을 들어보이며 크세노바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완전히 기가 꺾인 것을 확인하고 아라는 손을 놓았다.

“알았으면 어서 안내하거라.”

상인이 앞장서서 그들은 중앙 통로를 따라 문이 없는 문간을 지나 안쪽 방으로 들어섰다. 이곳의 화단은 바깥쪽 방보다 작았지만, 꽃은 한결 더 크고 색도 생생했다. 벽에 늘어선 것은 조롱이 아닌 튼튼하게 자물쇠를 채운 여러 층의 우리였고, 창살 뒤에 갖힌 페어리들은 밖에서 본 페어리보다 하나같이 날개가 많았다. 페어리 귀족까지 이제 이런 곳에 잡혀오는 것을 확인하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크세노바 옆에 둥둥 떠서 따라오는 조롱 안의 페어리를 보고 우리 안의 페어리들은 자기들끼리 불안하게 속삭이며 창살에 붙어서 내다보았다.

화단의 화려한 꽃 중에서도 그 한가운데, 금빛 중심이 화려한 탐스런 진홍색 꽃이 확 시선을 끌었다. 페어리 날개가 훨씬 돈이 되지 않았더라면 정원 관람료만으로도 이곳은 수익이 나왔으리라고 아라는 생각했다.

꽃 옆에는 이제 갓 소녀기를 벗어난 젊은 여자가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꽃을 쓰다듬고 있었다. 인기척을 보고 돌아본 여자는 상인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츠러들었다. 이때 아라는 두 가지를 눈치챘다. 첫째, 금발머리 사이로 귀가 길게 뻗어나온 그녀는 아마도 인간 혼혈의 엘프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드러난 얼굴과 목, 팔의 창백한 피부가 멍과 상처투성이라는 것. 인간들이 물건으로 취급하는 혼혈이 프리포트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학대의 흔적은 오히려 당연한데도 가슴이 쓰려왔다. 왜 이런 순간에 그때 죽은 인간 혼혈 사절이 떠오르는가. 그리고 그의 친구 혹은 연인, 또 다른 하프엘프가.

“꽃을 관리하랬더니 뭐하는 게야!”

사근사근한 태도가 순식간에 급변한 상인은 거칠게 소리지르면서 하프엘프 여자에게 다가갔다.

“비루먹을 것 같으니. 귀한 손님들 앞에서 썩 꺼져!”

“저것이 꽃을 관리하는가?”

아라는 태연한 질문으로 상인의 발을 붙들었다. 저 아이나 그녀가 아닌 저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본모습과 마찬가지로 저 엘프의 딸 역시 사고 팔고 이용할 물건이었다. (병사들 노리개로 있기는 아까운 물건이구나. 얼마면 되겠느냐? … 이렇게 희귀한 것을 입수하시다니, 많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 눈앞에 검고 붉은 분노가 확 끼쳐오며 심장을 증오로 새카맣게 물들였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도.)

“아, 저런 '잡것'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상인이 그들에게 열심히 굽신거리는 동안 하프엘프는 황급히 일어났다. 엘프 아이가 도망치듯 옆으로 스쳐가는 순간 아라는 쳐다보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꽃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으니 그냥 두거라.”

“예?”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상인에게 그녀는 여전히 하프엘프는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역시 매일 보는 입장에서 제일 잘 알지 않겠느냐.”

“예예, 그렇습죠. 아무렴요.”

상인의 대답에 그녀는 마치 불쾌하다는 듯 젊은 여자를 놓았다. 노예 여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 기억이 손아귀에 생생했기에 완전히 연기만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반응은 놀라면서 저항하는 것이었을 터이고, 동족의 여인이라면 무기나 최소한 주먹이 날아왔으리라.

그러나 하프엘프 아이, 사람이 아닌 물건인 이 여인은 낯선 사람이 팔을 나꿔채는 순간 몸에 힘을 빼며 멈춰섰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아니 그런 취급이 정상적이기에, 덜 맞고 덜 다치려면 물건같은 취급에 굴종으로 반응해야 했을 테니까. 아라는 손을 옷에 세게 문질렀다. 무력하게 힘을 빼던 그 팔의 감촉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상인의 눈짓에 하프엘프 여자는 열심히 주인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다시 꽃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더니,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떴다. 마치 되도록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작아지려는 것 같았다.

“이… 이 꽃입니다요.”

좀 당황한 상태에서도 상인은 그 진홍색 꽃을 가리키며 애써 웃음지었다.

“꽃의 건강상태는 좋은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상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노예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이번에는 상인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좀 멀리 가져가서 채취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꽃을 분갈이해도 견딜 수 있겠는가?”

“물론입죠.”

페어리 상인은 대번에 대답했다.

“에미넴숲에서 여기까지 가져왔는데도 멀쩡합니다요. 물론 마법사님도 계시니 더 쉽겠습죠.”

그가 크세노바의 눈치를 보자 마법사는 끄덕였다.

“괜찮군.”

“에미넴숲…?”

옆에서 랜돌프—다사케타—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가 무슨 짓을 할까 불안해진 아라는 크세노바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신다면 이대로 입수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하프엘프 노예는 눈을 크게 뜨더니 마치 막다른 곳에 몰린 동물처럼 절박하게 그들 일행을, 그리고 크세노바 옆에 뜬 페어리를 보았다. 그녀는 뻣뻣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주인의 옷자락을 당겼다.

“나… 나으리…”

“이거 썩 놔라 이 썩을 것!”

상인이 휙 돌아서며 발길질을 하자 하프엘프는 숙련된 동작으로 재빨리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보호해 발길을 얼굴 대신 팔에 받아냈다. 차여서 나뒹구는 순간에도 그녀는 손을 짚어 넘어지는 방향을 바꾸어서 꽃이 상하지 않게 했다. 조롱 속의 페어리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셀라나! 셀라나!!”

“이거 추태를 보여드렸습니다요.”

상인은 바로 얼굴을 바꾸며 그들에게 돌아섰다.

“그럼 얘기는 밖에 나가서…헤헤헤.”

“너의 취미생활은 우리가 없을 때나 하도록.”

아라는 날카롭게 말하며 상인의 등뒤에서 몸을 일으키는 셀라나를 흘깃 보았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노예였을 셀라나가 그런 애원을 하는 데 얼마만한 용기가 들었을지 그녀로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카사노바님께 성가시지 않은가.”

“예예, 물론입죠.”

“저것도 혹시 덤으로 붙여줄 수 있는가?”

그녀는 셀라나에게 손짓했다. 어쩌면 이 아이는 굴종을 체화한 겉모습보다 한결 용감하고 똑똑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었고, 어쨌든 가능하다면 이곳에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하나라도 건져내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쓸 데가 있다.”

“예?”

상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건 귀하신 나으리들께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요.”

“멀리 이동하는 동안 꽃을 돌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옆에서 랜돌프가—노예사냥꾼이!—맞장구쳤다.

“아무래도 저것이 꽃 키우는 일에는 재주가 있는거 같군.”

“그… 그렇기야 합니다만요…”

상인은 흘끔흘끔 하프엘프를 돌아보았다. 아까운 마음과 얼마나 돈을 더 받을 수 있을까 저울질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의표시로 웃돈은 붙여주지.”

아라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이자의 배에 칼을 쑤셔넣는 상상을 하면 한결 웃기가 쉬웠다.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도움이 될 지는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상인에게 말하고 크세노바는 이번에는 셀라나에게 서늘하게 말했다.

“따라오거라.”

상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셀라나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나 다가왔다. 상인은 마지막으로 한 번 셀라나를 아쉽게 보더니 이내 더 중요한 것에 생각이 미쳤는지 비굴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비볐다.

“그럼 손님, 계산은 어떻게…”

“그전에 궁금한 게 있군.”

크세노바가 말했다.

“이전의 마법사들이 혹시…”

그가 공중에 손을 가볍게 젓자 아까 정육사 제임스의 집에서 본 문양이 허공에 생겨났다.

“이런 문양을 새기고 있던가? 왠지 아는 사람 같아서 말이야.”

“그..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요. 그냥 대금만 후하게 치루고 가셔서.”

잠시 놀라서 문양을 보다가 상인은 '대금'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헤헤 웃었다.

“상계에선 그게 제일 중요한거 아니겠습니까요.”

“그런 마법사나부랭이들에게 카사노바님께서 신경을…”

아라는 짐짓 눈쌀을 찌푸리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카사노바님. 기왕 매입하고 꽃을 키울 노예까지 구입한 김에는 재고를 전량 매입하는 것은 어떨지요?”

조롱 안에 축 늘어진 페어리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일을 저지른다면 차라리 크게 벌이는 것이 나았다.

“흑마법사 나부랭이들이 물건을 가로채는 일은 없어야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상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흠…”

크세노바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여기 있는 재고가 모두 얼마나 되나?”

“예에…그러니까 날개만 20장에…”

상인은 주판을 꺼내 재빨리 튀겼다.

“페어리들까지 모두 치면 9만2천골드 되겠습니다요.”

크세노바는 값이 괜찮느냐는 듯 랜돌프를 쳐다보았고, 노예사냥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말했다.

“우리가 이 많은 것을 번잡하게 옮겨갈 수는 없으니 항만 창고에 옮겨다 주면 그곳에서 대금과 배달비까지 쳐주도록 하지.”

노스탤지아에, 혹은 칼로 데 로씨라는 자에게 요청해서 배를 조달해야 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페어리들을 통해 흑마법사와도 조우하리라.

“창고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요.”

상인은 좋아서 입이 벌어지며 손을 비볐다.

“전량 모두 살아있어야 한다, 꽃도 무사하고.”

그녀가 눈을 부라리자 상인은 움찔했다.

“무…물론입죠.”

배달 시기와 창고 위치에 대해 몇 마디 나누고 그녀는 돌아섰다.

“다시 연락 주겠다. 일단은 물건을 준비해놓고, 맡아두는 의미에서 여긴 계약금이네.”

“예예.”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보석을 하나 꺼내 건네자 상인은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받았다. 영수증을 받은 후 그녀는 크세노바에게 허리를 숙였다.

“가실까요, 카사노바님.”

“다시 오겠다.”

크세노바는 상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상인의 배웅을 받으며 거의 문에까지 갔다가 아라는 문득 돌아섰다.

“아, 잠깐.”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선 셀라나를 쳐다보았다. 상인이 의심하지 않도록 정말 갑작스러운 변덕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했다.

“계약금도 냈는데 저것은 미리 데려갈 수 있을까.”

“지금 던져준 그 보석값만 해도 그 잡종의 가격은 넘기고도 남겠지.”

랜돌프도 덧붙였다.

“그 이를 말씀입니까.”

눈빛에는 아쉬운 기색이 엿보였지만 상인은 역시 프로였다. 그는 조롱 속의 페어리를 돌아보는 셀라나의 팔을 잡아 아예 일행에게 떠밀었고, 아라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놀라고 아파서 작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다시 저항을 포기한 채 셀라나는 순순히 따라왔다. 어차피 그녀의 삶에 저항이란 아무 이득이 없었을 터이니.

“또 보도록 하지.”

악문 이 사이로 중얼거리며 아라는 일행과 함께 상인의 인사를 받으며 거리로 나섰다.

“험하게 다룰 필요는 없지 않겠나?”

옆에 따라오며 지카리공이 낮게 웅웅거렸다.

“그쪽이 오히려 익숙할 거다.”

지카리공의 따스하고 슬픈 눈빛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 그녀는 정면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랜디?”

이자의 애칭을 부르는 것은 낯선데도 묘하게 편안했다. 정말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노예사냥꾼은 즐거움 없이 이를 드러내며 돌아보았다.

“주위를 둘러봐라. 누가 그렇게 얌전하게 끌고가는지.”

그녀는 끄덕이며 길이 비교적 한적한 곳에서 멈춰서서 일행에게 말했다.

“방을 잡도록 할까. 아까 그곳은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니…”

아니면 그저 지하실 생각에 기분이 꺼림칙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정육사의 집에 묵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자.”

랜돌프는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이정도의 돈을 쓴 일행이라면 꼬리가 붙을 거다.”

북적거리는 근처 여관에서 위대한 카사노바님께서 쓰실 방값을 금액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진 위대한 카사노바님이 치른 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침실 세 개와 공동 휴게실이 있는 방은 제법 넓었다.

등뒤로 문을 닫자마자 아라는 데인 듯 셀라나를 놓았다. 아무 침실 문이나 열고 들어간 그녀는 비교적 깨끗한 방과 가구를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다급히 침대 밑의 요강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그 위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속에 들끓던 분노와 불쾌감을 뱉어내듯 아침에 먹은 것이 목구멍에 뜨겁게 역류해 요강에 철벅철벅 쏟아졌다. 더 토할 것이 없어지자 그녀는 컥컥거리며 뒤로 물러나서 요강 뚜껑을 닫았다.

몸이 가벼우면서도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 허무했다. 셀라나를 잡았던 손을 막연히 허벅지에 비비다가 아라는 일어서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수건을 집어들었다. 창가의 작은 탁자 위 대야에 옆 물주전자의 물을 부어 수건 한쪽 구석을 적신 그녀는 입을 닦고 다른 쪽으로 손을 닦았다.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머금은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의 거리에 뱉어냈다. 기분 같아서는 데이도록 뜨거운 물에 온몸을 씻고 또 씻고 싶었다. 이 인간 도시의 더러움을, 오늘 본 것들의 기억마저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멍하니 창밖의 복잡하고 지저분한 도시를 내다보았다. 아무리 씻어도 정신적 오염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억이란 어떤 물이나 천도 닿지 않는 곳에 아로새기게 마련이었다. 눈을 감은 눈꺼풀 뒤에, 악몽의 가장 깊고 어두운 구석에…

지붕 위에서 나지막한 가르릉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미소지었다. 아사나스가 있는 한 그녀는 언제든 가우르의 등 위에 뛰어올라 활을 당길 수 있는 전사였다. 주단과 황금을 두른 노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그녀는 열린 창문에 대고 속삭였다.

“사냥을 하거라, 아사나스."

아라는 엷게 미소지었다.

"이 도시에서는 정글 냄새가 난다는구나.”

실제로 올라오는 것은 오물과 쓰레기 냄새이기는 했지만. 화답하는 가우르의 으르렁 소리를 확인하고 그녀는 창을 닫았다. 숲 바닥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조용하게, 지붕 위로는 커다랗고 부드러운 발걸음이 움직여 갔다. 도시의 밤으로 뛰어드는 맹수의 모습을 상상하자 아라는 기운이 났다. 그 확신과 온기에 떠밀리듯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공동 휴게실로 나갔다.

소감

이 노예시장 부분은 플레이 자체는 아주 재밌게 했던 대목이었습니다. 전술적으로 생각하고 속임수를 펼치는 모험적 재미도 쏠쏠했고, 인물의 감정선이나 서로 다른 생각도 표현이 된 좋은 장면이었죠. 반면 써놓고 나니 소설로서는 좀 의구심이 듭니다. 함축의 묘미 없이 너무 분량대로 쏟아놓은 느낌이랄까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쓴 안힐라스 부분이 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묘사나 서술 연습은 많이 되는데, 소설이라기보는 방향성 없는 사건의 나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방향성을 모른 채로 쓰니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요. 그것이 역시 '하는' RPG와 '보이는' 소설이라는 매체의 근원적 차이겠지요.

그래도 좀 방향성이 보이는 부분이라면 랜디에 대해 아라가 점점 매력을 느끼는 점이겠지요. 이 부분은 이방인님과 협의를 거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에 이야기가 아라 시점이 아닌 부분이 많아서 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요. 뭐 원래 그런 감정이란 종종 갑작스럽기도 하죠. 별로 닭살을 날릴 만한 두 사람은 아니지만 둘의 성적 긴장감은 개인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어찌보면 달콤하고 애정 많은 커플보다 신선해서 좋기도 하고요. 달콤한 애정 커플은 나중에 4화에서 개봉박두~ 때는 봄인 겁니다!

2010/04/08 23:34 2010/04/0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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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길이 급격히 좁아지고 갈라지면서 생겨난 복잡한 골목길을 몇 번 돌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골목 옆쪽 벽을 이룬 집의 나무문을 사내가 두드리고 뭔가 중얼거리자 문이 끼익.. 열렸다.

“들어오시죠.”

남자가 손짓하자 랜돌프는 주변을 경계하며 슥 들어갔고, 나머지 일행도 따라들어갔다.

안의 집은 작은 창에 휘장을 쳐놓아서 어둑했고, 밖에 비해 차가운 공기에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지막한 천장에 별로 크지 않은 방 가운데에는 탁자와 의자가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 벽의 먼 구석에는 문간과 그 너머에 어디론가 이어지는 그늘진 통로가 눈에 띄었다. 통로에서는 희미하게 불쾌한 냄새가 섞인 찬바람이 불며 방안의 공기를 미약하게 저었다.

“일단 여러분.”

일행 뒤로 따라들어와 문을 닫으며 요원이 말했다.

“이 도시에서 노예가 어떻느니 하는 애기는 최대한 자제해주십시오.”

“주의하지.”

랜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곳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사내는 말을 흐렸다. 아라는 금방 도망이라도 칠 듯 팔짱을 끼고 문앞에 서서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사내는 입을 얇게 다물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여러분의 목숨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너희 노스탤지아야말로 어째서 이런 일들을 묵과하는 것이지?”

억눌렀던 것이 터져나오듯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하는 아라의 눈이 차가운 빛을 냈다.

“진정 안힐라스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라면 어떻게 저들을 외면할 수가 있는가.”

“제기랄, 손댈 힘이 없으니까. 그걸 말로 해야 하나?”

랜돌프는 답답한 숨을 짧게 내뱉었다.

“한 놈 두 놈 끌려가는 노예들을 구조하는 건 좋다고 치자.”

그는 성큼성큼 의자 하나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럴 때마다 요원이 한둘씩 죽어나가면 노스탤지어로서는 참 수지맞는 장사겠군그래.”

“너야 아무렇지도 않겠지.”

아라는 내뱉듯 말했다.

“노예 첩의 생활이 괜찮다고 표현할 수 있는 놈이라면.”

랜돌프를 보며 그녀는 이를 드러냈다.

“아니, 바로 그들을 전문적으로 팔아넘기던 너라면.”

랜돌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 그 엘프 소녀에 대해서는…”

요원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저희들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끌려온 건지, 어떤 신원의 아이인지 저희도 궁금해하고 있죠.”

요원이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자 지카리와 크세노바가 가서 앉는 동안 아라는 출입문 오른쪽 벽에 기대선 채 팔짱을 꼈다.

“저희는 그 아이가 도시밖으로 이송될 때를 노릴 겁니다.”

사내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저희들의 일이겠죠. 여러분은 따로 임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행을 보는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흑마법사다.”

무릎에 다른쪽 발목을 올리면서 랜돌프는 이를 갈았다.

“그 개새끼가 여기 있는 게 확실한가?”

그말에 남자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제가 들어야 할 것 이상이로군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나무바닥을 드륵.. 긁었다.

“책임자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방 구석의 통로로 걸어들어가 사라졌다. 이내 발걸음이 살짝 울리며 멀어져갔다.

“정보를 분산하는군. 좋은 생각이다.”

벽에 기대어선 아라는 허리에서 짧고 날씬한 칼을 뽑아 돌리면서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야 누구 한 명이 끌려가서 고문당해도 피해가 제한적이니.”

랜돌프는 단검을 뽑으며 통로 옆의 벽에 몸을 붙였다. 그런 그에게 아라는 흘깃 시선을 던졌다.

“저놈이 뭘 데리고 올지 알 수가 없어.”

랜돌프는 통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선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

그 말에 아라는 랜돌프를 곁눈으로 보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침묵 속에서 지카리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여태까지 가봤던 곳 중에 가장 불쾌한 곳이군…”

아라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인간 도시에는 아마도 처음이시겠지요.”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간들의 도시가 이렇지는 않길 바라네.”

“적어도 안힐라스에서는 좀 무리일 것 같군요.”

크세노바가 한숨을 쉬었다.

“이곳보다 정돈된 곳이라고 덜하지는 않습니다.”

아라도 덧붙였다.

“동쪽에 뉴 임페리얼은…”

무심코 말하다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통로를 따라 발걸음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허허허, 이거 손님들이 벌써 오셨군요.”

호탕한 웃음소리가 통로에 울리더니 인간 남자 하나가 방안으로 걸어나왔다. 중키에 넉넉한 체구인 그는 벗겨진 머리에 눈가에는 웃음자국인 듯 주름이 지고 주먹코 밑에는 두터운 입술이 싱글벙글 웃음짓고 있었다. 둥근 배는 입은 앞치마를 밀어내며 불룩 나와있었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마치 요리하다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앞치마에 묻은 선혈은 무슨 요리인지 심각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라는 칼을 느슨하게 쥔 채 그를 흥미롭게 보았다.

“으음…?”

크세노바의 시선에 앞치마 입은 남자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거 실례. 취미생활을 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는 자신의 배를 철썩 쳐 뱃살을 튕겼다.

“고기라도 손질하시던 모양입니다?”

크세노바가 묻자 뚱뚱한 남자는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기죠. 물론 살아있는 사람고기긴 합니다만.”

그말에 랜돌프는 눈을 치켜뜨며 단검을 쳐들었다. 막 악수하려고 장갑을 벗으며 크세노바에게 다가가던 사람고기 요리사는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고 양손을 쳐들며 움츠러들었다.

“걱정마라, 다사케타.”

아라는 재밌다는 듯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손안에 칼을 돌렸다.

“네 고기는 아무도 안 먹을 테니.”

“설마 농담이시겠죠.”

질린 표정으로 랜돌프를 보며 크세노바가 말했다.

“어허허, 좀 진정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다 같은 편인데.”

뚱뚱한 남자는 애써 웃어보였다. 벗겨진 머리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장난은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어둑한 조명 속에 랜돌프가 씨익 웃자 그의 이빨과 눈 흰자가 희번득거렸다.

“목이 날아가고 싶진 않겠지. 나에겐 별 의미 없지만 당신에겐 소중한 물건일 것 아닌가?”

“바쁜 게 아니라면 복식 좀 차리고 다니시죠.”

크세노바는 남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저런 양반에게 칼 맞으면 어디가서 하소연이라도 하겠습니까.”

“허허허…”

그 말에 중년의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사냥개에게 죽었다가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지.”

벽에 기댄 아라가 맞장구쳤다. 크세노바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일 이야기나 하죠.”

랜돌프는 피식 웃으며 칼을 집어넣고 의자로 걸어가더니, 다리를 크게 벌린 채 의자에서 반쯤 흘러내린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전 제임스입니다.”

남자는 랜돌프를 불안하게 흘끔거리며 웃었다.

“경황중이라 죄송하게 되었군요.”

그가 앞치마를 옆의 벽에 튀어나온 못에 걸자 묻은 피가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다시 통로에서 조용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사람이 또 하나 걸어나왔다. 칠흑처럼 유난히 검은 피부에 흰 머리, 뾰족하고 긴 귀와 마르면서 강인한 체격의 여인은 통로 문간에서 날카롭고 묵묵한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같은 다크엘프를 보고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지만, 여인은 그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라가 입을 열자 흐르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그 흐름이 가끔 거친 파열음에 끊어지는 말이 나왔다. 다크엘프는 그녀의 말에 쳐다는 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서 둘을 번갈아 보다가 제임스가 말했다.

“이쪽은 콰…켈….뭐였더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 친구 말을 못합니다, 아가씨.”

아라의 의아한 시선에 그는 부연했다.

“오래전에 충격을 받을만한 일이 있어서 말을 잃었다더군요.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만. 허허..”

제임스가 의자에 주저앉자 의자는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갑자기 그는 머리를 탁 쳤다.

“아 그래. 이름이 켈냐였지!”

그 이름에 아라는 시선이 바로 여인에게 못박혔다. 손에서 힘이 풀렸는지 들고 있던 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켈냐…”

랜돌프가 한쪽 눈썹을 꿈틀하는 사이 제임스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허허?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라는 켈냐라는 여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다시 그 파열음과 부드러운 흐름이 교차하는 언어로 말을 걸었다. 켈냐는 무심한 시선이 잠시 아라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외면했다. 살짝 목례한 아라는 다시 벽에 기대며 일행을 마주했다. 제임스는 헛기침을 하며 크세노바를 돌아보았다.

“감동의 재회가 원래 이런 겁니까?”

“감동도 주변환경이 받쳐줘야 그림이 나오죠.”

크세노바는 한심하다는 듯 제임스의 피묻은 장갑과 옷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마법사 말대로 일 얘기를 하자꾸나.”

아라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켈냐는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돌아서서 다시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고, 아라는 일부러 통로에 눈길을 주지 않고 명령하듯 말했다.

“사람 고기 정육은 다 했다면 흑마법사 이야기를 하도록.”

“아, 그렇죠. 흑마법사 얘기 말입니까.”

제임스는 손을 깍지껴 넉넉한 배 위에 얹으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저희도 상부에서 얘기를 듣기 전에는 단순히 소문으로 치부했던 정도라 그게…”

그는 벗겨진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전문을 받은 뒤에 그제서야 그 소문들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단 사실을 알았죠, 흠흠.”

“뭐라도 좋다.”

랜돌프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그 개새끼에 관한 이야기라면 뜬구름잡는 작은 소문이어도 좋아.”

“경망떨지 말거라.”

아라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조사한 결과는 어떠한가?”

제임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혀서 칼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칼날을 어루만지면서 그를 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자가 이 도시에 있는가?”

“저희쪽도 손이 부족해 조사는 많이 못했지만, 그 자라면 그 그…”

“멜코 생고로드림.”

아라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아 그랬지, 그랬소. 멜코르 상고로드림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면…”

제임스는 아라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모르겠소.”

“뭐?”

아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도시에 있다는 풍문이 맞긴 한가?”

랜디가 캐물었다.

“흑마법사들이 있다는건 신빙성 높은 얘기요.”

제임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노예들이 정기적으로 어디론가 팔려가 소식이 끊긴다거나, 로브 입은 자들이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소문이 있소.”

“그렇다면 그의 제자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라는 손에 든 검에 시선을 떨구었다.

“됐다. 그럼 잡을수 있어.”

랜돌프는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앉았다.

“어디 있는지도 특정해낼 수 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툭 던지듯 물었다.

“아는 노예상인 있나?”

“노예상인은 아니지만 유명인사 한 명…”

제임스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당장 코앞의 '아는' 노예상인이 하나 있는데 어디로 하시겠소?”

“둘다 얘기하거라.”

아라가 말했다.

“선택은 우리가 하지.”

“그럼 일단 따라오시오.”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은 현재진행형으로 정보를 캐내고 있던 중이었으니 말이오.”

“설마…”

제임스가 피묻은 앞치마를 집어드는 것을 보며 아라는 눈쌀을 찌푸렸다.

“말했잖소.”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코앞에 '아는' 노예상인이 있다고 말이오.”

“노예상인… 그렇다면 조금은 낫다만.”

그러나 아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제임스가 앞치마를 집어들고 통로 안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랜돌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나서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라갔고, 크세노바와 지카리가 뒤를 따랐다. 몇 발짝 들어가 제임스는 방에서 흘러드는 약한 빛에 의지해 벽감에 세워둔 초에 불을 켠 후 촛대째 집어들고 앞장섰다.

촛불빛에 흔들리는 통로는 들어갈 수록 더욱 춥고 습해졌고, 곰팡이와 쥐, 그리고 그 이상으로 뭔가 불길한 냄새가 났다. 제임스가 문득 멈춰서며 걸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그가 높이 쳐든 촛불과 은은히 빛나며 내려가는 그의 대머리에 의지해 일행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일렬로 천천히 내려갔다.

거의 내려와 눈앞에 묵직한 떡갈나무 문이 어둑한 조명 속에 드러난 순간, 정면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공기를 갈랐다. 문 때문에 소리는 귀를 막고 듣는 듯 작았지만 그 완전하고 통제 없는 공포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라는 축축한 벽에 손을 대며 흠칫 멈춰섰고, 그녀의 뒤로 따라오던 크세노바도 멈춰야 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제임스는 촛대를 다른 벽감에 얹어놓더니 휘파람을 불며 피묻은 앞치마를 걸쳤다. 아라 뒤편에서 크세노바는 축축한 지하실을 둘러보며 청소세탁 주문이라도 배울 걸 그랬다고 중얼거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아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나왔다.

“저런 치들은 돈만 몇 푼 쥐어주어도 입을 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물론 그렇기도 하오만…”

제임스는 태연히 장갑을 당겨 고정시켰다.

“가끔 도를 넘는 인간말종들은 손을 봐줘야 하지 않겠소.”

아라가 딱히 대답을 못하는 동안 제임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습기에 경첩이 녹슬었는지 문이 불평하듯 신음하며 열리자 피비린내가 통로에까지 확 끼쳐왔다. 벽에 타닥거리는 횃불빛 속에 문 반대편 벽에는 상처가 몇 개인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짓무른 상처와 선혈과 피딱지 투성이인, 평범한 체격에 둥근 얼굴의 남자가 반라 상태로 십자형 틀에 묶여 있었다. 기절한 듯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그의 한쪽 다리는 부러진 듯 기묘한 각도로 꺾였고, 힘겨운 숨소리는 액체가 걸리는 듯 그륵거리며 방안에 울렸다. 그 앞에는 끝이 붉게 빛나는 인두를 든 켈냐가 서있었다. 그녀 옆에는 화로에 달군 석탄이 창을 맞은 짐승처럼 인두 두어 개를 꽂은 채 벌겋게 무딘 빛을 품었다.

랜돌프는 길게 휘파람을 불더니 제임스를 따라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먹음직하게 요리되고 있는 걸?”

”…이 도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 만하군요.”

희미한 조명 속에 크세노바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아라를 지나 감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뒤에 지카리가 돌처럼 굳어있는 동안 아라는 크게 부릅뜬 눈을 그 광경에서 떼지 못했다.

제임스가 바닥에서 물동이를 하나 들어 포로의 얼굴에 확 끼얹자 그는 간신히 눈꺼풀만 움찔거렸다.

“어이 친구.”

제임스가 그런 포로의 뺨을 장갑낀 손으로 툭툭 치자 그는 눈을 퍼뜩 뜨며 놀랐다. 절박한 시선은 감방을 한 번 둘러보고 다시 체념에 잠겼다.

“이분들이 흑마법사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게 있는데 말이야.”

제임스는 장갑낀 손의 손마디를 두둑거렸다.

“자네 그쪽에도 납품한 적이 있지?”

“으으으…”

남자는 피투성이로 뭉개진 얼굴에 눈만 희번득거리며 피투성이 입을 열었다.

“흐마법사… 모라…”

“모른다고?”

제임스가 부드럽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퍼뜩 놀라더니 고개를 마구 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냈다. 이윽고 그 속에서 '로브! 로브!' 하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로브를 입었다고?”

서두르는 기색 없는 제임스의 말에 남자는 살았다는 듯 끄덕이며 간신히 진정했다.

“여자… 로브…”

포로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거애거… 거… 거래하자고…”

제임스가 달래고 협박해가며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는 한참 걸렸지만, 로브 입은 여자가 제안해온 거래대로 정기적으로 항구 근처의 창고에 노예들을 갖다놓으면 다음날 노예는 없고 대금만 남아있더라는 얘기를 마침내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랜돌프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납품받을 리가 없겠지.”

그는 문간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들어온 노예들 가운데서도 페어리들이 있었다. 그 창고…”

그는 바깥쪽으로 턱짓을 했다.

“오늘도 체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같은 업자인지 어떻게 아느냐.”

포로를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 있는 아라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음 아뇨. 일리가 있습니다. 흑마법사니까요.”

크세노바가 말했다.

“어떻게든 페어리들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가 잠시 뭔가 중얼거리자 공중에 희미하게 빛나는 기하학적 문양이 나타났다.

“이걸 본 적이 있습니까?”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문양을 보다가 노예상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얼굴을 들이댔다.

“어디서 봤냐?”

노예상이 뭐라고 더듬거리자 제임스는 무심히 주먹을 날렸고, 노예상은 고개가 휙 돌아가면서 공중에 핏방울을 날렸다. 아라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봤냐니까 이 친구가…”

포로가 쉴새없이 더듬더듬, 횡설수설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 로브 입은 여자의 손등에서 문양을 보았다고 했다.

“으음… 도제인가.”

크세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한쪽 팔을 넉넉한 배에 가로질러 얹은 채 다른 손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는 건 어떻소?”

“칼로 데 로씨?”

문간에 서서 아라가 되물었다.

“이 도시의 유명한 양반이지. 노스텔지아 소속은 아니오만…”

제임스는 턱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손짓했다.

“우리가 노예 구출하는 데 가끔씩 도움을 주는 고마운 양반이오.”

그는 양쪽 팔을 배 위에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왕초나 다름없으니 흑마법사들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원한다면 만남을 주선해 주겠소만.”

“칼로 데 로씨라고?”

랜돌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거기 갔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별로 가고싶지 않군.”

“만나보는 게 좋겠구나.”

랜돌프를 흘깃 보고 아라는 엷게 미소지었다.

“제기랄… 그놈에게 걸려서 횡사한 노예사냥꾼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다는 풍문이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너야 괜찮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유능하니.”

아라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역시 겁이 나는 것이냐?”

“뭐 소문일 뿐이긴 하지.”

랜돌프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도 실제로 보거나, 그놈에게 당한 자를 만나본 적은 없어.”

노예상에게 창고번호와 납기일을 알아낸 제임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몸을 돌렸다.

“다음 납기일은 5일 후라고 하는군. 창고번호는 적어주겠소.”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마법사를 수소문하면서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자.”

나머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후 그녀는 돌아섰다.

“나는 나가야겠다. 이 냄새는 짜증이 나는구나.”

아라는 지카리가 비켜주는 틈새로 빠져나가더니 벽감의 촛대를 건드리지 않고 층계를 올라갔다. 표정 없이 방안을 한 번 보고는 지카리도 돌아서서 그녀를 따랐다.

“그럼 나머지도 부탁합니다, 제임스.”

다시 정신을 잃은 듯한 노예상을 불편하게 보고 크세노바는 벽감의 촛대를 들고 올라갔다. 랜돌프는 씩 웃고는 촛불빛을 따라갔다. 뒤로는 다크엘프 여인 켈냐가 문을 밀어 닫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횃불과 석탄의 붉은 빛이 사라졌다.


지상의 방은 통로에 비해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아라는 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지카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살짝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버텨주었다.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라는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지카리공.”

”…이곳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네.”

지카리는 탁자 위에 깍지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아라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피곤하게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 제임스라는 자도 우리가 쫓는 자와 다를 바는 없지 않겠는가?”

“유쾌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작자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달래듯 말했다. 그때 통로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크세노바와 랜돌프가 들어왔다.

“웃기는군.”

랜돌프는 툭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서 의자를 조금 물렸다. 크세노바는 그런 둘을 보고 한숨을 쉬며 남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럼 노스탤지어랑 인간놈들은 다를게 뭐지?”

지카리가 그런 랜돌프를 흥미롭게 보는 동안 랜돌프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사엔 옳고 그름이 없어. 각자의 입장이 있을 뿐이지.”

노예사냥꾼은 단검을 슥 꺼내 날을 따라 빛이 흐르도록 기울였다.

“노스탤지어는 옳고, 인간놈들은 틀리다는거냐? 난 그렇게 생각 안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지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은 정의의 사도니 옳은편에 서있다느니…”

단검날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시 보다가 랜돌프는 칼을 집어넣었다.

“그런 생각인 거 같은데 그거 웃긴다고.”

“그러면 너는?”

지카리가 미소짓는 동안 아라는 받아쳤다.

“나? 나는 살기 위해 움직인다. 간단하잖아?”

의자를 뒤로 까딱 젖히며 랜돌프는 삐딱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놈들은 그게 깨지면 아무것도 못해.”

“그렇다면 페어리의 작은 목숨을 위해 열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라는 왼손을 느슨하게 주먹쥐어 탁자에 얹고 오른팔은 의자 팔걸이에 걸친 채 그런 랜돌프를 쏘아보았다.

“페어리를 위하는 것은 너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랜돌프는 젖혔던 의자 앞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아라는 바로 말을 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엘프 여자들을 납치해서 강간하고 팔아넘겼다고 할 테냐?”

탁자에 얹은 그녀의 왼손은 점점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이전에는 늘 굶었느냐, 다사케타?”

“아니. 뭐 뒷골목에서 썩은음식을 가지고 죽고 죽이고 했지만…”

뭔가 떨쳐버리듯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럭저럭 살아갈 수야 있었지.”

“결국 너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 것 아니느냐.”

“그렇다. 그래서?”

랜돌프는 피식 웃었다.

“그러므로, 너같은 놈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짓은 안할 테니 우리에게 설교하지도 말거라.”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반쯤 일어섰다.

“노예는 노예답게 입 다물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아라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아니면 죽거나.”

두 사람이 똑바로 마주보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랜돌프가 입을 열었다.

“난 노스탤지어 놈들이 마음에 들어.”

아라와 시선을 맞춘 채 그는 히죽 웃음지었다.

“점점 더 그렇군.”

아라는 음식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의자를 거칠게 밀치며 일어섰다. 문 옆의 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가 기대서는 동안 지카리가 말했다.

“랜돌프.”

“왜?”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네.”

지카리의 눈빛은 슬프면서도 따뜻했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저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일은 막으려고 할 뿐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랜돌프는 표정 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자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네. 옳고 그름이나 이유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래, 비슷하지.”

랜돌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옳네 그르네 까불지 말고 날 막고 싶으면 힘으로 찍어눌러보라는 거다.”

그는 지카리보다도 방 건너편에 있는 아라에게 말하듯 언성을 높였다. 아라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 팔짱을 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통로에서 가벼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제임스가 아닌 켈냐가 방으로 나오더니 종이쪽지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세 남자는 일제히 쪽지를 들여다보았지만, 지카리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났고 랜돌프는 대충 훑어보고는 뒤로 등을 털썩 기댔다. 크세노바는 쪽지를 보며 말했다.

“제임스씨의 손님은 이번에 페어리 거래는 안하는 모양이지만, 거래하는 곳 정보는 있군요.”

그는 가늘고 흰 손을 뻗어 다른 종이를 들추었다.

“이쪽은 칼로 데 로씨에게 주는 소개장입니다.”

“그러면 시장에 나가보자꾸나.”

아라는 벽에서 떨어져서 바로 섰다.

“마법사도 있으니 마정석 재료를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크세노바를 무표정하게 보았다.

“뭐 저 혼자 만들수도 없는 거긴 하지만..”

크세노바는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보는 것도 좋겠죠.”

“움직여볼까 그럼…”

랜돌프가 포식자의 느긋한 우아함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조용히 있던 켈냐가 움직여 문가의 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는 그런 그녀를 궁금하게, 조금은 경계하며 보았다.

아라 앞에 선 켈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아라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었다. 아라는 놀라서 잠시 굳었다가 그들의 모국어로 안쓰럽게 뭔가 말하며 켈냐를 일으키려 했다. 켈냐는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내 아라의 손에 쥐어주고는 일어서서 정중히 목례했다. 멍해진 아라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켈냐는 다시 통로를 따라 사라져 있었다.

“먼저 가보거라.”

아라는 손에 쥔 목걸이를 내려다보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동료들이 나가는 동안 그녀는 목걸이에 소중하게 입맞추고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추었다. 그녀가 탁자에 앉아 빈 종이와 깃털펜을 집어드는 모습을 돌아보고 랜돌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등뒤로 문을 닫았다.

소감

이 부분은 플레이 중에 프리포트라는 도시의 분위기, 그리고 이 싸움 속의 부조리하고 역설적인 상황이 잘 드러난 대목이었죠. 고문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이 하나하나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 랜디와 아라는 싸우는 척(?) 하면서 서로 꼬시는 것 같은 인상이(..) 이방인님하고 논의한 결과 이런 암시는 나중에 둘의 관계를 통해 살려보기로 했죠. 아라 입장에서는 이 도시에 온 이래 내내 어쩔 줄 모르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일거에 정리가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갈등은 있겠지만요.

인물 표현을 묘사를 통해 해보려고 나름 외부 관찰자 시점을 사용했는데, 이 관찰자는 인간 언어만 알고 다크엘프어는 모르는 모양입니다. 약간 전지적인 느낌도 있는 등 애매한 시점이었지만 표현하려는 바는 그럭저럭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 졸린 관계로(..) 나머지는 내일 올리지요.

2010/04/08 00:08 2010/04/0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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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에 한 3화 플레이입니다. (와 많이 밀렸다...)


프리포트로 가는 길은 척박한 검은 풍경이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가끔 거친 풀과 키작은 나무,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작은 짐승과 새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땅을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지루한 곳이군.”

사냥꾼 랜돌프 에디우스는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겼다.

“당신네들 하는 식으로 한번에 이동해버리면 안 되나?”

아라가 코웃음을 치는 동안 크세노바가 말했다.

“프리포트로 그렇게 갔다가는 눈에 너무 띄겠지요. 에미넴 남쪽까지는 그래도 이동하지 않았습니까.”

“순간이동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때는 좀 아쉽긴 하군요.”

혼잣말처럼 말하던 아스타틴은 황량한 풍경을 돌아보다가 왼편의 나지막한 언덕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쪽입니다.”

“또 방향을 바꾸는 건가?”

그를 따르면서도 랜돌프는 눈쌀을 찌푸렸다.

“정말 헤매지 않겠어?”

“오는 방향을 위장해야 하니까요.”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주변을 확인했다.

“프리포트는 저쪽입니다.”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검고 황량한 풍경 중 별반 달라보이지도 않는 방향을 가리켰다.

“길찾는 머리가 대단하군.”

지카리는 감탄한 목소리였다.

“난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네.”

아스타틴은 미소짓지는 않았지만, 지카리를 잠시 돌아보는 눈빛에는 감사가 담겨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스타틴의 인도를 따라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는, 가볍게 난 수레바퀴 자국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스타틴이 의도적으로 인적이 없는 곳에서 길에 접어든 듯 근 한 시간 동안 사람 그림자도 못 보고 걸어가는 동안 길의 흔적은 더욱 뚜렷해졌다. 수레바퀴 자국은 더 깊어졌고, 사람과 짐승의 최근 흔적도 슬슬 보였다.

길을 구획지으려고 깔아놓은 거친 돌이나 조잡한 표지판이 눈에 띌 때쯤 드디어 다른 여행자들이 보였다. 노새가 끄는 수레에 냄비와 옷가지 등 잡동사니를 가득 실은 상인이 그들 뒤에서 나타나 따라잡더니 앞으로 멀어져갔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용병인 듯한 거친 사내들이 갈림길에서 진입해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걸어갔다.

노스탤지아 일행을 흘깃 쳐다본 용병들이 본 것은 유달리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 약간 예쁘장한 금발 청년, 피부가 검은 무표정한 여자와 한 명은 거칠고 사나운 인상, 다른 하나는 여자처럼 여리여리한 두 젊은 남자였다.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약간의 관심을 표시했지만, 일행의 무장상태와 랜돌프가 단검에 무심히 손을 얹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들개 같은 놈들이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랜돌프가 낮게 말했다.

“약점을 보이는 상대가 아니면 덤비지 않아.”

그의 눈빛은 불쾌하기는커녕 즐거워 보였다. 히죽 웃는 웃음에는 애정마저 어렸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바닷가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대충 쌓은 석축으로 둘러놓은 도시는 돌이나 나무, 벽돌 건물과 작은 움막들이 아무 법칙이나 구조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채 성벽에까지 닿았고, 도시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벽을 넘어 주변의 판자집과 천막촌으로 무질서하게 퍼져나갔다. 앞바다라고 할 만한 것은 배가 두세 척 나란히 드나들 만한 틈새만 남기고 앞을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과 해안 사이의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이 앞바다에는 범선부터 보트까지 각양각색의 배들이 발디딜 틈 없이 서로 붙어 웅크려 있었다. 항구에는 움직이 활발했고, 도시의 길과 건물에도 사람과 탈것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인간들의 도시인가…”

그런 프리포트를 내려다보는 아라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고 말했다.

“가죠.”

아스타틴을 따라 일행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과 수레가 계속 오가는 길에 저 앞에서 수레가 다가오자 일행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다가 수레의 내용물이 눈에 들어자 지카리는 눈에 띄게 흠칫 놀랐다. 서로, 그리고 수레 바닥에 묶인 채 묵묵히 수레 발밑만 내려다보는 드워프와 엘프들은 일행이 얼어서 지켜보는 동안 덜컹덜컹 흔들리며 지나갔다.

“보고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지카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인간들이라는 게 그렇죠.”

아스타틴은 멀어져가는 수레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아라는 굳고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언덕을 척척 걸어내려갔다. 이윽고 길이 북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그는 일행에게 돌아섰다.

“여기서부터는 찾아가실 수 있겠죠?”

그는 등뒤에 멀리 보이는 프리포트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가 다른 길로 접어들자 지카리가 불렀다.

“아스타틴.”

아스타틴이 멈추며 돌아보자 지카리는 말을 이었다.

“조심하게. 내일 보세나.”

“예.”

아스타틴은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행에게 인사하고 그는 북쪽 길로 혼자 향했다. 나머지 일행은 다시 프리포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프리포트에 가까워지면서 주변의 광경은 더욱 비참해졌다. 마침내 검문소 앞에 줄을 섰을 때 주변에는 어디에나 노예를 볼 수 있었다. 서로 목이 묶인 채 일렬로 서서 끌려가는 엘프와 엘프 혼혈의 행렬, 페어리가 여럿씩 든 조롱을 쌓아놓은 수레, 말에 묶여 끌려온 기색이 역력한, 지쳐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드워프… 그들의 탄식과 비명이 공중을 메웠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의 눈빛이었다. 완전히 포기한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공허한 시선은 지울 수 없는 잔상이 되어 눈에, 가슴에 남았다.

아무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아라가 갑자기 움직이며 활에 손을 뻗었다. 랜돌프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탁 쳐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자 그는 이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움직이게 되더라도 나중이다.”

아라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깨가 격한 호흡에 잠시 들썩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확 돌아서며 주변의 모습을 외면했다.

“일이 우선이죠.”

주변의 광경을 아프게 보고 있던 크세노바가 달래듯 말하자, 아라는 여전히 돌아선 채 대답했다.

“우리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임무? 웃기네.”

랜돌프는 양옆으로 목을 투둑투둑 풀었다.

“난 저녀석들을 빼내야겠어.”

그의 시선은 페어리 조롱이 가득 든 수레에 향했다.

“옛 동업자들에게 칼을 들다니, 재미있구나.”

아라마저 그 말에는 돌아보았다.

“아니면 갑자기 인도주의자가 되었다는 핑계로 배신할 생각이냐?”

“동업자…? 난 혼자 움직였다, 언제나.”

랜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난 하고싶은 대로 움직인다.”

“여기서 지금?”

짧게 깎은 머리털 때문에 사각턱이 돋보이는 머리를 돌려 지카리가 랜돌프를 바라보자 굵은 목에 힘줄이 섰다. 인간 모습일 때도 여전한 연녹색 눈을 빛내는 지카리에게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움직이는게 무리라는 뜻이었지. 도시에 들어가고 나면 바로 움직일 거다.”

크세노바가 지카리와 랜돌프를 불안하게 보는 동안 줄은 터벅터벅 움직여 그들은 석벽의 입구를 지키는 초소 앞에 섰다. 검문소를 지키는 남자들은 서로 갑옷이나 무기, 심지어는 옷도 제각기 달랐고, 심지어는 한 사람이 입은 갑옷도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구한 듯 짝이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가슴에는 모두 주황색 바탕에 검은 절벽 위에 앉은 바다새의 윤곽을 그린 문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같은 소속이라는 표시라고는 없었다.

머리에 잘 맞지 않는 투구를 눌러쓴 남자가 초소 앞에 건성으로 서있다가 그들이 다가오자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외지인 냄새가 물씬 나는디, 다들 어디서 오셨수?”

“노예 사냥꾼이다.”

랜돌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아라는 이를 악무느라 턱이 떨렸다.

“도망친 노예를 뒤쫓고 있다.”

그 목소리에 다른 경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처음에 말한 경비의 어깨 너머로 랜돌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음…잠깐, 어디서 많이 봤는데…”

랜돌프는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유연한 경계를 유지한 채 경비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경비는 손뼉을 쳤다.

“오오! 그 유명한 엘프사냥꾼이시로구만!”

“나를 아시오?”

랜돌프는 미세하게 앞으로 옮겼던 무게중심을 뒤로 편안하게 기대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노예시장에 와본 적이 있나보지?”

“이거 오랜만이군! 반갑소,”

경비가 동료 뒤에서 나와 악수를 청하자 랜돌프는 가볍게 맞잡았다. 그런 그를 지카리는 살짝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면 데리고 온 건 노예…가 아니구만.”

경비는 아마 습관적인 듯 아라에게 음흉한 웃음을 짓고는 랜돌프와 일행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통행세만 내고 들어가보쇼.”

경비병이 다음 사람에게 손짓을 해 줄을 움직이는 동안 랜돌프는 동전 몇 닢을 다른 경비에게 떨구어주고 동행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를 따라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성문을 통과해 프리포트의 북적거리는 거리에 오가는 인파와 수레, 짐승의 행렬에 섞여들었다.

“알고 보니 유명했군요.”

크세노바가 별 감정 없이 말했다.

”…노예사냥꾼인 줄은 몰랐군.”

랜돌프를 보는 지카리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범죄집단 내에서나 그렇지. 경비병이 얼굴 알아보는건 처음이야.”

랜돌프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곳이야, 여기는?”

“지금은 노예사냥꾼이 아니길 바라네.”

지카리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하며 랜돌프를 지나쳐 걸어갔다. 인간 모습일 때도 유달리 키가 큰 그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랜디를 완전히 덮었다.

“호랑이는 줄무늬를 못 바꾸는 법이죠.”

아라는 랜돌프를 쳐다보지 않고 지카리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호랑이나 그렇죠. 인간은 염색이든 뭐든… 그나저나…”

크세노바는 프리포트의 복잡하게 꼬인 거리를 혼란스럽게 살폈다. 간격이나 넓이가 들쑥날쑥한 골목과 거리는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방향이 이리저리 구부러졌고, 원래 하나였던 길이 둘로 갈라지는 등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거리를 여섯 번 지나 우물이 있는 광장터라니, 이런 곳에서 이걸 접선책이라고 알려준 건가.”

“좀 웃기게 만들긴 했어도 아주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로군.”

거리를 몇 번 눈으로 살핀 랜돌프는 크세노바와는 달리 기준점을 찾아낸 듯 건물 사이로 여기저기 꼬이는 길의 몇 군데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나머지 셋에게 짧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6개의 거리라고 했지?”

“정말 이름대로 제멋대로인 도시로군요.”

척척 걸음을 옮기는 랜돌프를 따라가며 크세노바가 말했다. 지카리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가는 동안 일행은 사슬에 묶여 멍하니 길가에 선 채 서너 상인의 열띤 흥정의 대상이 된 드워프들을 지나쳤고, 옆에는 빼빼 마른 몸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쓰레기를 돌아가면서 아라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도시인데도 정글 냄새가 나는군.”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는 랜돌프의 입술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난 왠지 이 도시가 마음에 드는데?”

“참으로 어울리는구나.”

아라는 주먹을 꽉 쥐면서 눈을 감더니 깊이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뜨자 눈빛은 좀 더 냉정해져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고 턱은 긴장해 있었다.

“웃어라. 그리고 기뻐해. 이런 도시라면 정말로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거다.”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고 랜디는 씩 웃었다.

“다 죽여버려도 모조리 나쁜놈이니 이거보다 좋은게 어디있냐 말이다.”

그 말에 아라는 즐거움 없이 웃음을 지어 고른 이를 드러냈고, 크세노바는 수긍하는 기색으로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러지 않길 바라네.”

지카리가 타이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야.”

거리가 넓어지면서 그들은 탁 트인 공간으로 나왔다. 사방에는 큰 저택에서 움막까지 건물이 하늘의 가장자리에 들쭉날쭉한 윤곽을 그렸고, 서로 짝이 안 맞는 포장석을 대충 깔아놓은 땅 위에는 좌판과 수레를 펼쳐놓고 상인들이 냄비에서 음식과 무기까지 안 파는 것이 없었다. 그 혼잡 한가운데 돌로 주변을 쌓아놓고 도르레에 두레박을 매단 우물이 보였다.

“여기다.”

랜돌프가 말하는데 광장 저쪽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나무 단상 앞에 사람이 우글우글 몰려있는 곳에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전류처럼 흘렀다.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말하면서 크세노바가 이끌리듯 다가가자 랜돌프도 그의 뒤를 따랐다.

“노래꾼인가?”

누가 단상 위에 서서 뭔가 열심히 말하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모습을 보고 랜돌프가 중얼거렸다. 인파를 헤치고 다가가면서 단상에 선 남자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자자! 이번에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상품을 소개합니다!”

단상에 가까워오면서 남자의 발치에 자그마한 형체가 보였다. 사슬이 짤랑거리면서 햇살에 빛났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려 그 희귀하다는…”

상인의 발치에 주저앉은 아이가 눈에 들어오자 아라는 눈이 커지면서 순간 숨을 멈추었다.

“엘프 소녀!!”

몰려든 인파는 그 말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함성을, 승리감과 욕망과 기대감의 뜨거운 열기를 프리포트의 하늘로 올려보냈다. 발목에 사슬을 찬 채 상인의 발치에 무릎 꿇은 소녀는 인간 기준으로는 12, 13세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아이처럼 가늘고 여린 몸에는 여인의 곡선이 갓 피어나기 시작했고, 멍하고 창백한 얼굴은 의욕이나 희망 같은 것이 남아있었더라면 겁에 질려있었을 것이다.

“비싸게 팔리겠군.”

시끄러운 와중에 랜돌프는 팔짱을 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잘 알겠구나.”

무표정하게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아라는 중얼거렸다. 옆에서 지카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인파의 머리를 넘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려 놀랍게도 처녀!”

그 열기에 대고 상인은 침까지 튀겨가며 열심히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니라면 책임지고 사후보상까지 해드립니다!”

“만약 저 아이가 팔려가면 어떻게 될까…?”

주변을 두른 소음의 벽 속에서 지카리는 혼잣말하듯 나지막히 물었다. 소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라는 작게 몸을 떨었다.

“비싸게 샀으니 아마 죽여버리거나 노역을 시키진 않을 거다.”

랜돌프는 단상과 관중을 냉정한 시선으로 경계하며 대답했다.

“자 그럼 2천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상인의 말에 대번에 누군가가 손을 들며 외쳤다.

“6천!”

그 말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서 아라는 뭔가 누르고 또 누르듯 이를 악물며 단상을 노려보다가 순간 동공이 확장하더니 눈빛이 변했다. 작은 미소를 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단상 위의 소녀를 보고는 손을 들며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샤나!”

높은 목소리에 랜돌프는 눈을 부릅뜨며 시선을 돌렸다. 크세노바가 헉.. 숨을 들이키는 동안 지카리도 아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샤나! 샤나 여기봐!”

즐겁게 손을 흔들면서 아라는 단상을 향해 일파를 밀치고 사람 사이로 빠져나갔다.

“지카리! 잡아!”

랜돌프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카리는 급히 팔을 뻗었지만 미처 닿기 전에 아라는 벌써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카리는 따라가려는 듯 걸음을 옮겼지만, 아라가 쉽게 헤치고 지나간 군중은 그의 덩치에는 무리였다.

그 순간 군중 중 한 명이 움직이더니 아라를 뒤에서 붙잡아서 입을 막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아라는 발버둥을 쳤지만, 주변의 소란 와중에 별로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 랜돌프와 지카리, 크세노바는 사람 사이를 헤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라를 붙잡은 남자가 몇 발짝 걸음을 옮겨 한켠의 벽에 몸을 붙이는 동안 지카리의 넓은 등짝이 그들을 군중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었다. 크세노바는 아라와 단상 사이를 막아서며 그녀의 시야를 차단했다.

“당신인가?”

랜돌프는 목소리를 낮추며 날카롭게 물었다. 사내는 아라의 머리 위로 그들을 마주보았다. 마른 몸에 움푹 들어간 예리한 눈, 두드러지는 매부리코와 광대뼈가 눈에 띄는 그는 입을 열었다.

“까마귀입니다. 여러분은?”

“비둘기다.”

사내가 몸에 긴장을 푸는 동안 아라는 흠칫 놀라더니 눈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남자의 손을 잡아내리며 몸을 떼자 그는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지카리가 그런 그녀를 미심쩍게 보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여러분이 올 거라곤 들었지만, 바로 행동에 나서주실 줄은 몰랐군요.”

그는 아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상 위의 소녀를 흘깃 보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잠깐.”

지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아이가 팔려가면 어떻게 되는가?”

“첩이 될 거다.”

랜돌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카리는 그런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비싸게 산 물건은 막 다루지 않는 법이지.”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노예에 비해서 살기는 괜찮을 거다. 움직여.”

“괜찮다…라.”

아라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먼 곳을 보는 시선이 되면서 쓰게 웃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좋지 않습니다.”

예리한 눈빛의 사내는 주변을 살폈다.

“따라오시죠.”

사내가 인파를 헤치며 단상에서 멀어지고 랜돌프가 그를 따라가는 동안 지카리는 엘프 소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라는 그런 그에게 낮게 말했다.

“가십시다, 지카리공. 저들이 뭔가 계획이 있는 듯도 합니다.”

“우선은… 가지.”

소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겁게 걸음을 옮기자 아라는 단상에 일부러 등을 돌리고 도망치듯 걸어갔고, 크세노바는 뭔가 털어버리듯 고개를 젓고 그녀를 따랐다.

소감

지난 2화의 상당부분이 그랬듯 3화 첫 부분도 삭풍님의 짧은 서술을 자세하게 풀어쓴 예입니다. 3화에는 이런 완전 창작은 첫부분 빼고는 얼마 없지만요. 주인공들의 대사와 행동을 다 만들어야 해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별다른 지적은 없어서 일단은 인물 표현이 괜찮은 걸로 보고 공개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화는 프리포트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플레이 때부터 삭풍님이 무질서하고 비정한 분위기를 잘 잡아주셨고, 그걸 조금 더 확장하기만 하니 글이 나오더군요. 배경 자체가 인물처럼 개성이 뚜렷한 느낌이라 마음에 듭니다. 대강의 큰 줄기는 제가 설정한 곳이기도 해서 더 정이 가는 걸지도요. 프리포트는 여러모로 별일이 다(..) 생길 만한 곳이고, 실제로도 앞으로 보시면 (혹은 로그를 보시면) 알겠지만 별일이 다 벌어집니다.

2010/04/07 23:49 2010/04/07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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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전해주도록.”

아라가 건네준 꾸러미를 들고 엘프 여자, 아일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지요?”

“페어리 레이디 므우루가 부탁했던 것이다. 꼭 직접 전하도록.”

아일리스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하자 어깻죽지와 빗장뼈의 가느다란 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러지요.”

등을 돌려 저 저주받을 나선 계단을 향해 춤추듯 멀어지는 엘프를 잠시 보다가 아라는 방안으로 들어와 화살을 가득 펼쳐놓은 탁자 앞에 앉았다. 창을 마주보는 방향에 앉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창과 자신 사이에 탁자를 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에 등을 돌린 채 그 너머의 까마득한 높이를 상상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보다는 차라리 똑바로 마주보는 것이 나았다. 여전히 지상에서 까마득히 높은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는 이가 갈렸지만. 미친 엘프놈들!

부탁대로 갖다준 화살만 해도 엘프라는 족속은 그녀를 괴롭힐 방안을 찾아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는 것이 틀림없었다. 깃을 이렇게 안 다듬어서야 어떻게 쏘라는 말인가. 아라는 화살 하나를 눈앞에 든 채 무게와 균형을 저울질해보았다. 뭐, 직선도나 결은 나쁘지 않았다. 깃만 좀 다듬고 허술한 것은 다시 묶으면 될 것이다. 구석에서 띄엄띄엄 들려오는 하프엘프의 류트 연습도 신경쓰지 않고 그녀는 화살을 내려놓고 작은 칼을 꺼냈다.

작업의 익숙한 흐름 속에서 아침에 찾아왔던 전령, 귀노샤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귀노샤는 므우루가 에미넴 숲 전체를 관장하는 페어리 귀족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페어리뿐 아니라 노스탤지아에도 엄청난 타격이 되었을 그녀에 대한 위해를 막아낸 일행을 치하했었다.

그러나 므우루를 납치하고 그녀가 관장한 군락지의 페어리를 학살한 배후로 이야기가 넘어갔을 때는 방안에 가득한 햇살마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멜코르 생고로드림은 인간들의 도시 프리포트에 있다고 저희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귓가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귀노샤의 말이 똑똑히 떠올랐다.

'이 자의 안힐라스에서의 최초 행적은 몇 년 전 안힐라스 동부 뉴임페리얼시에서 발견되었죠.'

뉴 임페리얼. 탈출한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가슴이 차가워지는 그 이름을 떠올리자 아라는 화살 깃털을 면도날로 깎아내던 손이 흠칫 멈추었다. 인체실험을 자행하던 흑마법사를 노스탤지아 타격부대가 급습했지만 결국 놓쳤다는 귀노샤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익숙했다. 설마…

허공을 가르던 섬광과 가슴을 찔러오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비탄의 기억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면도날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라는 애써 호흡을 골랐다.

문이 열리더니 바닥이 불안할 정도로 끼익..거리면서 지카리공의 도착을 알렸다. 드래고니안은 그의 무게가 실릴 때면 언제나 위태위태해보이는 계단을 태연하게 하루에도 여러 번 오르내리고는 했다.

“아일리스양에게 무슨 꾸러미를 맡겼나?”

지카리는 등뒤로 문을 닫으며 물었다.

“올라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뭘 들고 가더군.”

올라오는 지카리의 거대한 덩치를 피하면서 저 나선 계단을 내려가는 상상에 아라는 저절로 입안이 말랐지만, 애써 예사롭게 말했다.

“예. 므우루가 부탁했던 물건입니다. 편지는 아스타틴이 써주었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구석에 앉아 어느새 류트도 팽개치고 아사나스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아스타틴은 자기 이름이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다.

“부탁했던…?”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지카리는 생각이 났는지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면서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냈다. 왠만한 짐승의 포효보다 훨씬 위협적인 웃음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좀 익숙했다.

“그걸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약속했으니까요.”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스타틴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다시 얼굴이 심각해지기는 했지만… 방안에는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페어리들에게 전한 두쪽난 아카마카 열매는 잊어서는 안 될 잔혹했던 날, 이곳 로스로리엘에서는 오래 전의 일처럼 멀기만 한 파괴와 죽음의 기념품이었다. 지카리가 바닥을 삐걱.. 밟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라는 다시 탁자 위로 몸을 숙이고 화살깃을 조심조심 깎아냈다. 머릿속에서 귀노샤의 목소리는 이어서 말했다.

'프리포트로 잠입해 정보를 확보하고, 최종적으로 이 흑마법사를 체포 내지는…'

귀노샤는 차분히 말을 이었었다.

'제거해 주십시오.'

화살을 눈앞에 들고 화살깃의 균형이 맞는지 살피다가 아라는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내려놓았다. 그자가 뉴 임페리얼의 그 마법사가 맞다면 당연히 찾아내서 척살해야 했다. 가장으로서나 어미로서나, 뉴 임페리얼의 그날 밤을 떠올릴 때마다 검붉은 증오에 뛰는 심장을 생각하나 그래야만 했다. 노스탤지아와 그녀의 이해가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한은 (이것까지 예상했습니까, 샤나에?) 강제 배속에도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은, 아니 온몸이 그자를 만나기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그 생각만으로도 손은 두려움에 오그라들어 활시위 하나 당기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째서 공포는, 아픔은 그녀를 이렇게도 겁쟁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그 벌레같은 수명을 이어 이곳까지…' 그자의 말이 결국 옳았던 것일까. 아라는 칼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괜찮은가?”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손을 내리며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응접실로 나온 지카리는 연녹색 눈에 호기심과 걱정을 담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스타틴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예. 그저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카리가 더 묻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육중한 상체가 창문을 가려주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곧 프리포트로 떠나겠군.”

탁자 위에 흩어놓은 화살을 보며 지카리가 낮게 말했다.

“예.”

그녀는 손을 뻗어 화살대와 깃을 어루만졌다. 사실 화살깃 손질상태에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그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뭔가 손을 놀리고 싶었을 뿐이다.

“추가 위장 물품은 도착했는지요?”

지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엄숙했다.

노예매매가 성행하는 인간들의 도시, 멜코 생고로드림의 소굴이 있을지 모르는 프리포트에 그들 일행이—인간 둘을 제외하고는—무사히 활동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을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어줄 마법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급받은 반지를 껴보았을 때는 마법의 보이지 않는 막이 몸을 팽팽하게 감싸는 느낌이 잠시 드는 것 말고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나중에 거울 앞에서 해보자 그 효과는 확실했다. 귀가 뭉툭하고 짧아지면서 눈이 조금 둥글어지고, 얼굴의 윤곽이 완만한 곡선을 띄면서 겉보기에 '인간'이 되는 과정을 아라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었다. 그리고는 거울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서둘러 반지를 빼고 자신의 원래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마법이란 편리하되 유쾌하지는 않군.”

지카리가 입을 열었다.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을 거스르고 왜곡하는 마법은 확실히 자연의 정령인 드래고니안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편리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인간 국가들에 대항한 연합 세력의 최대 우위이기도 했으며, 이동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주고 이번 프리포트 임무 같은 잠입 임무를 가능하게 하기도 했으니.

“멜코라는 그 마법사는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물어보고 싶군.”

지카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크세노바가 낮잠을 잤는지 졸린 눈으로 방에서 비틀비틀 나와 탁자에 앉았다. 두 사람에게 대충 인사하고 그는 화살 몇 대를 밀어내며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그런 그를 보며 아라는 말했다.

“마법사이니, 지식의 추구 아니겠습니까?”

크세노바는 일어나 앉으면서 눈을 비비고, 대화에 흥미의 기색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지카리가 물었다.

“크세노바, 자네는 마법사니 멜코르라는 인간이 어째서 그런짓을 하는지 알고 있나?”

“아라니아카의 말대로 비뚤어진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만…”

젊은 마법사는 가볍게 하품을 했다.

“즉… 그것이 필요해서 벌인 일은 아니라는 뜻으로 알겠네.”

지카리는 무겁게 대답했다. 아라는 마법사의 소굴에서 가져왔다가 므우루에게 전하라고 아침에 귀노샤에게 넘긴 페어리 날개 더미를 생각했다. 지식과 권력에 대한 갈망 앞에서 그 작은 생명들에게서 빼앗은 마법이 필요한지 단지 갖고 싶은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고로드림이라는 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필요하다고 대답할지도 몰랐다.

“왜 그러는지가 중요합니까?”

그녀는 탁자 위의 화살을 모아다가 화살통에다가 한 묶음씩 집어넣었다. 손에 좀 더 익게 다듬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은 탁자에 공간이 부족했다.

“멈추게 하면 되지요.”

“그는… 아마도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기준이 있겠지요.”

이제 완전히 잠이 깬 듯 크세노바가 조용히 말했다.

“꼭 폭력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듯 하지만요.”

구석에서 아사나스에게 기댄 채 류트를 집어들며 아스타틴이 말했다.

“그런 자들은 폭력 외에는 어떤 언어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탁자 위에 흩어진 깃털조각을 손으로 쓸어 바닥에 떨군 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불안해져서 자꾸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이번 임무 설명을 들은 이후로 계속 그랬다.

“생각이 변하지도 않아. 남은 것은 누가 더 강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그녀와 수많은 노예를 뉴 임페리얼에서 탈출시킨 것은 설득이나 대화가 아니라 오직 차가운 철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노예를 풀어주는 것이 왜 옳은지 백날을 설명해도 시간낭비일 뿐, 힘없는 자의 웅얼거림은 그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그 교훈은 딸을 잃은 밤 이래 지울 수 없는 각인이 되어 영혼에 남았다.

“그렇습니다.”

크세노바는 유감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들어보는 것이 좋겠지.”

“자신의 잣대만으로 기준을 세우는 자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죠.”

크세노바가 대답했다.

“그자에게 말씀하시려면 뜻대로 하십시오, 지카리공.”

아라는 화살통을 들어올려 메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제 뜻대로 된다면…”

그녀는 벽에 기대 세워두었던 활을 집어들었다.

“시체에게 얘기하시게 될 겁니다.”

지카리와 아스타틴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이윽고 지카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려 하는 건…”

일어서자 그의 덩치가 방안에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그의 웃음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자네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군.”

그는 구석의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아스타틴군, 이 앞에서 드워프 상인이 진짜 난 엘모스산 맥주를 파는데 한 잔 하겠는가?”

하프엘프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섰다. 아라 자신은 드워프 맥주라고는 거의 샬란 교역 거점을 통해 들어오는 헤루모르산만 마셔보았기에 호기심이 동했지만, 술을 마셔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술이 들어갔을 때 '그녀'가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한 이래 음주는 되도록 자제하고 있었다.

지카리와 아스타틴이 뭔가 얘기하며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드래고니안이라면 그녀를 괴롭히는 기억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말씀 묻지요, 지카리공.”

아스타틴에게 난 엘모스산 맥주 발효과정을 설명하다 말고 지카리는 돌아보았다. 둘 사이에 늦은 오후 공기가 살짝 긴장했다.

“그자가 공 앞에서 어린아이를 죽였다면 왜 그랬는지 물어보시겠습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참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꼬마 샤나가 품안에서 점점 숨이 꺼져가는 동안 마법사는 그녀를 비웃었었다. 샤나만큼이나 쉽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냥 가버린 그를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일까.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가슴을 옥죄는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바람이 불면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고 발밑에 발판이 끼익… 살짝 움직였다. 무심코 탁자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낮추면서도 높은 곳에 갇혔다는 불안감은 이 순간에는 멀기만 했다. 공포를 의식하되 지배당하지는 않은 채 그녀는 지카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고 싶네.”

이를 드러내는 그의 미소는 다시 슬퍼보였다.

“하지만 그게 안 될 걸세.”

“예.”

묘하게 기운이 빠지면서도 마음은 가벼웠다. 그의 정직함에 작은 감사를 담아 그녀는 드래고니안에게 목례했다.

“맥주 맛있게 드십시오.”

그들이 나가는 동안 아라는 탁자를 돌아 응접실의 큰 창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에 누워 졸던 아사나스가 고개를 들었다가 헷갈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라?”

크세노바가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아라는 창가에 섰다. 밑으로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얽히고 굽어지며 까마득히 내려갔고, 하늘은 아까보다 조금 어두웠다. 점심에 내렸던 비가 물러간 뒤끝에 오른편의 서쪽 하늘은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스로리엘 숲은 눈앞에서 바람에 누웠다가 또 일어나며 물결쳤다.

길게 숨을 들이쉬며 그녀는 풀벌레와 졸린 새울음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 생동하는 신록의 향을 호흡했다. 가슴이 떨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아마도 곧 물러나야 할 듯했다. 그러나 상상하며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제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영혼 깊숙히 박힌 그 검은 두려움을 피하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시작인가…”

아라는 남쪽 숲을 넘어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린 남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려움과 증오가 검디검게 도사리며 기다리는 프리포트가 남쪽에서 손짓하는 곳을.

소감

이걸로 2화 분량도 마쳤습니다. 실제 2화 플레이한지도 2주가 되어가는군요. 랙(..)이 좀 있는 건 각오했지만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에게 도전을 하는 기분으로 하는 데까지 즐겁게 해보려고 합니다.

임무 브리핑을 받는 대목은 그냥 순서대로 쓸 자신이 도저히 없어서 회상으로 축약해서 처리했습니다. 회상은 또 정보전달의 명확성, 회상과 현재시점의 구분 등 그 나름의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일반 시간 순서를 따르는 것보다는 좀 더 긴장감 있는 진행이 된 것 같습니다.

아일리스는 랜돌프 외전에서 처음 등장시킨 인물인데, 여기서 아라에게 꾸러미를 받아다가 외전 쪽에서 랜디에게 전해줍니다. 나름 마음에 드는 인물인데 어떻게 써먹을지는 아직 애매하네요. 랜디 상대역 얘기가 있는데 두 사람 다 많은 변화를 겪기 전에는 상상이 안 가는 얘기로군요. 물론 그 변화의 과정 자체도 재미있겠지요.

아일리스와 아스타틴은 그가 로스로리엘 살 때 알던 사이라는 설정이고요.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는 혼혈 고아에게 그나마 책임감을 느꼈던, 당시에는 10대에 해당하는 소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인물은 너무 자기통제가 강하고 뭐든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장점이자 단점이죠, 지난번에 크세노바가 치료해주겠다고 했을 때 별 쓸모없는 진료거부(..?)도 그렇고.

이제 또 3화와 랜돌프 외전 작업 들어가야겠군요. 피드백 주시면 감사감사하겠습니다!

2010/03/26 00:06 2010/03/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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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했군요.”

하프엘프 청년이 말했다. 오크 한 떼가 동굴에 닥쳐드는 모습을 그들은 나무 사이로 멀리 지켜보았다.

“잘했다, 아사나스.”

아라는 오크들을 지켜보며 가우르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녀석은 노란 눈을 가늘게 뜨며 좋아했다.

“수고했어… 아사나스.”

가우르를 돌아보며 하프엘프 청년은 웃었다. '아사나스'라고 부르기 전의 공간에는 다른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을 제때 피해오고 사건을 거의 일단락지은 지카리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는 웃으며 아라의 짐승 친구를 돌아보았다.

“맹수같지 않군.”

야생동물의 혼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녀석은 야생의 마음과 충직한 친구의 본능을 둘다 갖추고 있었다. 제때 경고해준 짐승에게 감사하며 지카리는 손을 내밀었다.

“전 주인이 잘 가르친 모양… 아 저, 지카리공…!”

사냥꾼이 검은 털을 바싹 세우며 으르릉거리자 지카리는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조심하십시오.”

아라가 뒤늦게 덧붙였다.

“맹수가 맞군…”

지카리는 어색해진 손으로 목을 쓸었다. 지카리공이 너그러워서 그렇지 앞으로는 상대를 가리고 덤비라고 아라가 타이르자 맹수는 봐줬다는 듯 아라를 보고 좋다고 가릉거렸다. 확실히 충직한 동물이기는 했다… 한 사람에게만.

“일단 움직이죠? 좀 안전한 곳까지.”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던 크세노바가 다가왔다.

“페어리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아라는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우리도 로스로리엘 본부로 돌아가면 되겠지.”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안내하겠는가, 패스파인더.”

역시 뭔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따스한 표정으로 가우르를 보던 하프엘프 청년은 이내 평소의 냉정한 얼굴이 되며 말했다.

”…그러지요.”

그의 표정이 이내 더 싸늘해졌다.

“아마 지금쯤 그 사냥꾼도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착했을테니까요.”

그 남자 얘기에 잠시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분위기인 것일까, 지카리는 몹시 궁금해졌다.

“므우루의 상태는 어떤가?”

아스타틴은 그 보자기 비슷한 옷을 접어 만든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후 소리없이 누워있는 므우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꽃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무사한 것 같아요.”

그는 지카리가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대놓은 흑마법사를 싸늘한 경멸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스승에게 희귀한 종을 바친다고 들떠있었으니.”

“엘프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서두르자.”

그런 므우루를 보는 아라의 눈빛에는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데가 있었다.

“동족과 함께 있으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예…”

그 말을 믿고싶은 듯 간절한 눈빛으로 아스타틴은 끄덕였다. 아라가 걸음을 옮기자 지카리는 흑마법사를 집어들어 어깨에 걸쳤고, 나무 사이로 조용히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의 수도 로스로리엘을 향하여.


마침내 오크들이 흔적을 쫓아왔는지 로스로리엘 오십 리쯤 밖에서 따라잡힐 뻔하자 크세노바는 지친 몸을 추스리며 주문을 준비했지만, 그리폰을 탄 기수들이 나무 위로 조용히 나타나는 광경에 오크들은 감히 더 다가오지 못하고 도망쳤다. 몇몇 기수들이 그들을 역추적하는 동안 두 기수의 비호 하에 그들은 무사히 로스로리엘로 진입했다.

로스로리엘은 마법과 기술, 예술성으로 쌓아올린 알쿠알론데와는 또 달랐다. 나무 사이 길로 개천에 접근하자 목각 그리폰이 나무 다리 앞에 웅크려 그들을 맞아주었다. 다리 난간에는 숲의 온갖 생물을 부조로 새긴 솜씨가 섬세했다. 다리 반대편에 웅크린 똑같은 그리폰을 지나치자 어느새 평생 처음 보는 거목들이 성큼 다가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오래된 떡갈나무의 다섯 배는 가볍게 넘을, 상상도 못한 규모의 거대한 가지와 무수한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속삭임은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이었다. 머리 위의 그리폰 기수는 인사하듯 두어 번 돌더니 외곽으로 이탈했다.

“미친 엘프놈들.”

옆에서 나비... 아니 아사나스를 타고 가는 아라가 중얼거렸다. 한 번 그리폰을 올려다본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크세노바는 갑자기 그녀가 몹시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자작나무와 너도밤나무의 행렬이 끝나고 로스로리엘의 거탑 같은 나무 아래 선 지금, 주변의 꽃이 만발한 풀밭 어디에도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는 나무들의 거대한 가지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 나뭇가지로 엮은 천막이나 작고 정교한 목조 집이 눈에 띌 뿐.

로스로리엘은 높은 곳을 싫어하는 이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늘 속에서, 햇살과 그림자가 아롱진 땅 위를 걸어 가장 가까운 나무에 다가가자 약 5m 위의 가장 낮은 가지에 뭔가 갑작스레 움직인다 싶더니, 두 명의 엘프가 땅에 가볍게 착지하며 그들 앞에 섰다. 녹색과 갈색 튜닉과 바지, 망토 차림의 두 남자 엘프는 그들에게 목례했다.

“로스로리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자들이여.”

긴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겨서 땋고 아라 것보다 한결 긴 활을 멘 남자 엘프가 말했다. 어깨와 가슴, 팔에 가죽으로 댄 경갑주 말고는 갑옷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아르노스, 이쪽은 저의 형제 테르반입니다. 페어리들의 일로 오셨는지요?”

“그들은 무사히 도착했는가?”

아라가 급히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르노스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와 많이 닮은 테르반이 대답했다. 갈색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채 윗부분만 묶어서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한 그는 투창을 하나 들고 등에 세 개를 더 메고 있었다.

“인간… 대원, 랜돌프 에디우스가 생존한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착했습니다.”

아르노스도 테르반도 랜돌프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그래서 크세노바는 그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이 더 신뢰가 갔다. 아라는 묘하게도 오히려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옆에서 아스타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저, 여기…”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말했다. 아르노스와 테르반을 보는 그는 묘하게 기가 죽은 채 조심스레 옷주름에서 므우루를 꺼냈다. 아스타틴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읽기 어려운 감정이 스쳤지만, 기운없이 축 처진 므우루와 그녀의 희미한 빛에 눈이 가자 그들은 대번 심각해졌다.

“페어리 마을을 습격한 자가 납치했던 고위 페어리다.”

아라가 말했다.

“치료가 필요하다. 그녀를 도울 사람이 있는가?”

아르노스가 휙 몸을 돌려 꼭 새울음 같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동안 테르반은 아스타틴에게 다가섰다. 그가 므우루에게 손을 뻗자 아스타틴은 방어적으로 움찔... 뒤로 물러섰다.

“아 저기, 이쪽에 흑마법사도 하나 있습니다만.”

크세노바는 일행의 뒤편에 묵묵히 선 지카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지카리가 어깨에 멘 형체를 곁눈질하고 아르노스가 다시 휘파람을 불자 날카롭고 긴장한 새의 비명이 하늘을 향해 울렸다.

이후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법사와 치유사를 포함한 엘프들과 수염이 하얗게 센 드워프 하나가 몰려와 지카리가 내려놓은 흑마법사를 둘러싼 후, 드워프가 은으로 만든 것 같은 사슬을 붙잡고 주문을 중얼거리자 수족갑이 저절로 열리며 사슬은 흑마법사를 향해 스물스물 움직였다. 아르노스가 짧은 칼을 꺼내 마법사의 포박을 끊자 사슬은 드워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마법사에게 기어가더니 수갑과 족갑을 철컥 채웠다. 한편 테르반에게는 므우루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아스타틴은 여자 치유사 하나가 부드럽게 설득하자 마침내 그녀가 내미는 꽃향기가 나는 천 위에 페어리를 부드럽게 눕혔다.

므우루를 데려가는 치유사와 흑마법사를 연행하는 이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간 후에 테르반과 아르노스와 같은 차림을 한 여자 엘프가 나무에서 내려와 걸어왔다. 아르노스는 그녀를 보더니 눈쌀을 찌푸렸다.

“너는 휴식하라고 명령받았을 텐데, 아일리스?”

검은 머리를 땋아서 머리에 단단히 감아둔, 선이 가는 젊은 엘프 여인은 태연히 말했다.

“로스로리엘 안에서 걸어다니는 것보다 편한 휴식이 있을 리가 없잖아.”

평소에는 유연하면서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것 같은 그녀는 조금 창백한 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일행에게 인사했다.

“아일리스입니다. 숙소로 안내해 드리지요.”

그녀는 문득 갈빗대에 손을 대고 이를 악물었다. 금새 회복하고 아일리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푸스스스… 조금씩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로스로리엘의 거목이 저녁 바람에 바스락거렸다. 바람은 신록과 꽃의 내음을 가득 싣고 왔다. 나무를 몇 그루 지나 계단이 줄기를 돌아 빙빙 올라가는 나무를 향해 아일리스가 그들을 이끄는 동안 크세노바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부상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치유 마법이라도…”

그녀는 돌아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마법사님. 힘을 아끼시지요.”

괜한 말을 했나. 마치 부상을 들킨 것이 개인적인 실패인 것처럼 아일리스는 입매가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비켜서서 계단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금방입니다. 가시지요.”

크세노바 뒤편으로는 주변을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는 아스타틴이 올라왔고, 그들의 뒤에 지카리가 계단에 오르자 계단은 걸음마다 위태하게 삐걱거렸다. 크세노바는 만약을 위해 공중부양 주문을 떠올려 보았다.

지카리가 삐걱거리는 뒤편을 불안하게 돌아보자 아직 올라오지 않는 아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땅에서 자겠다.”

아사나스 위에 앉은 채 아라는 반쯤 넋이 나가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애원조가 섞여들었다.

“천막이라든지…”

“지상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아일리스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일단 올라가시면 숙소는 넓답니다. 정 불안하시면 제 손을 잡고…”

아라는 그 말에 움찔했다. 뒤에서 아스타틴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아라가 기억할 지도 모르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 같았다.

“아니다. 음, 아사나스…”

아라가 층계를 힐끔 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아일리스가 갑자기 강하게 말했다.

“바라트!1

그 소리에 가우르는 마치 누가 엉덩이를 친 듯이 후다닥 층계를 달려올랐고, 아라는 화들짝 놀라 고삐를 있는 힘을 다해 붙들었다. 아사나스가 이내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올라오는 동안 크세노바부터 시작해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일리스가 아라의 뒤를 이어 따라오는 동안 아라가 가우르의 등에 앉아 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녀의 언어로 욕설 같았다.

“괜찮은가?”

지카리가 걱정스레 묻자 아라는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상에서 6미터나 올라왔을까, 두 개의 나뭇가지 사이에 지은 나무집이 보이자 아일리스가 뒤에서 말했다.

“여러분의 숙소입니다. 그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둥근 1층짜리 나무집은 넓은 창 너머로 정갈한 침실이 보였다. 두 개의 나뭇가지에 어른 손목만한 줄을 여러 겹 묶어 고정한 큰 발판에 역시 굵은 줄, 그리고 깎아서 서로 맞물린 나무판으로 세운 집은 거의 지상이나 진배없이 견고해 보였다.

조각해서 장식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으로 탁자와 편한 의자를 배치한 둥근 응접실, 출입문 반대편 벽에는 벽의 둥근 곡선을 따라 낸 큰 창이 보였다. 창밖에는 멀리 왼편과 오른편에 거목 한 그루씩과 그 너머에 넓은 하늘, 그리고 로스로리엘 남쪽의 숲이 가득 펼쳐졌다. 대여섯 걸음쯤 되는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창 양옆으로, 그리고 출입문 양옆으로 난 문이 네 개 보였다. 아까 본 침실들로 통하는 문이리라. 출입문에서 응접실로 가는 통로와 창이 들어있는 우묵한 벽감은 그렇다면 침실 벽 사이의 공간일 것이라고 크세노바는 짐작했다.

“와아…”

그의 뒤로 들어온 아스타틴이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동안 지카리가 들어서자 바닥은 다시 크게 삐걱거렸지만 다행히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 뒤로 가우르의 발걸음이 부드럽게 바닥에 닿아왔다.

돌아보니 아라는 잠시 얼어붙어서 저 밑 창밖에 물결치는 숲을 내려다보더니 허겁지겁 가우르의 등에서 내려 출입문 왼편의 침실, 그러니까 나무에 바로 면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의 큰 창을 무슨 괴물처럼 돌아본 그녀는 창문이 쫓아오기라도 할 듯 문을 쾅! 닫았다. 아사나스가 헷갈리는 표정을 한 채 문을 커다란 앞발로 긁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이 가우르 곁으로 가서 목을 쓰다듬어주었다.

“숙소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일리스가 문으로 들어섰다.

“아 예… 멋지군요.”

크세노바는 창에 대고 손짓했다. 반대의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은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뭐.

“이곳에서 휴식하십시오.”

갈빗대를 조심하는 기색으로 아일리스는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보고를 준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일리스.”

그녀도 휴식을 취할지 크세노바는 좀 걱정이었지만, 얘기했다가는 괜히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아일리스가 문을 닫고 나간 후 그녀의 발걸음은 들릴락말락 조용히 멀어지더니 금새 사라졌다. 다시 응접실로 나오자, 아라의 방문 앞에서 아사나스와 놀던 아스타틴은 아일리스가 나간 출입문을 보더니 작게 찌푸렸다.

“아일리스…”

“아는 사람인가?”

제일 큰 의자에 삐그덕... 앉은 지카리가 웅웅거리며 말했다.

“어쩌면요. 낯이 익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라가 응접실로 성큼성큼 나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내다보고 그녀는 창백해지면서 방에 도로 들어가려다가,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굳은 채 바닥에 앉았다. 이내 그녀는 가우르 뒤로 돌아가 창문과 자신 사이에 아사나스를 둔 채 창을 노려보았다.

방안에 조금씩 어둠이 내리는 동안 일행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치지는 않았는지 서로 묻기도 하고, 전투에서 위험했던 순간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법사의 지옥도 같은 실험실 기억이 떠오르자 그들은 침묵에 빠졌다.

“군락지가 페어리들이 다시 살 수 있는 곳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겠어요.”

마침내 아스타틴이 아사나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을이 붉게 내린 숲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은 잔잔하고 슬펐다.

“보고하라지만 사실 우리도 모르는 것이 더 많군.”

아사나스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아라는 창 반대편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는 대로 보고하면 되겠지요.”

아스타틴이 대꾸했다.

“정보를 듣고 골라내는 것은 위에서 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의 말에는 희미하게 뼈가 있었지만, 말다툼을 하기에는 피곤해 보였다. 그것은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Redivivus.2

집중하며 양손을 펼치자 푸른 빛이 떠오르며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마법을 많이 썼을 때 특유의 그 등골이 쑤시는 피로가 조금씩 녹아 없어지자 좀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바닥에 기듯 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흑마법사 도제가 문득 떠올랐다. 그자는 그렇게까지 거물은 아니었지만, 주문을 외울 여유가 있었더라면 일행이 지금처럼 멀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자가 그 정도라면…

“저 흑마법사의 스승이 걱정이로군요.”

지카리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자 의자 밑에 바닥이 삐걱거렸다.

“자네는 뭔가 짐작가는… 점이 있나 보군.”

“제국에서 죄를 지어서 도망친 자입니다. 악명이 자자하죠.”

악명이 말 그대로 이름의 힘을 가리킨다면, 그 이름만으로도 마법사가 모인 자리 분위기가 싸해지는 멜코르 생고로드림만한 악명도 없으리라. 크세노바는 돌아가면 스승이 자는 동안 수염을 무슨 색으로 물들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죄라면?”

“마탑에서 쫒겨난 사령마법사가 무슨 죄를 지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자신도 잊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금지된 생체 실험, 계약마에게 바친 각종 희생, 피해자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던 악몽의 실험실. 그 생각만으로도 부드럽게 어둠이 내리는 숲의 정경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좀 축소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내도록 하자. 이미 오늘 하루 마법사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본 사람들이었다.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여기로 도망쳐왔을 줄은…”

다 알면서 이리로 보냈단 말이지, 영감님. 무지개빛 턱수염을 한 스승을 떠올리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안힐라스는 본토에서 너희 종족 중 최악이 건너오는 곳인 모양이로군.”

아라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창을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 개중에는 나은 것 같다만.”

그녀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나름 칭찬이리라고 크세노바는 생각했다.

“아마도요.”

가우르가 기지개를 켜며 입을 크게 벌리자 크세노바는 뫵수의 눈치를 보며 살짝 떨어져 앉았다.

“기회의 땅이라는 소문의 실상이 이런 식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첫날부터 신고식 하나는 호되게 치렀다고 생각하며 그는 피곤한 눈을 비볐다.

“대륙에서 막 건너왔다면…”

아스타틴이 말했다.

“소문의 반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 셈이지만요.”

“그 말대로… 더 겪게 되겠지.”

얼굴에 붉은 석양빛이 비친 채 아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회의 땅이 어떤 곳인지.”

그녀가 무심히 가우르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쓸어주자 맹수가 가르릉거렸다.

“인간에게는 기회의 땅일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고향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남쪽 숲보다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 나날이 알아볼 수가 없어지는구나…”

그말에 아스타틴이 가슴에 늘 달고 다니는 브로치를 어루만지자 한 줄기 노을이 브로치의 은빛 표면에 빛났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억 속에만 그리워하는 그 기분을 크세노바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이는 차라리 떠나버린 걸까… 가슴이 답답해왔다.

“지카리공께도 궁금하였습니다만…”

아라는 드래고니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녁바람에 쏴아아… 나뭇잎이 움직이면서 바닥과 그 밑의 거대한 나뭇가지가 끼익... 움직이자 그녀는 잠시 얼었다가, 바람이 잦아들자 말을 이었다.

“무슨 연유로 이 남쪽으로 내려오셨는지 물어도 될지요?”

드래고니언이 고개를 돌리자 단단한 비늘이 가시처럼 두른 그의 눈과 콧구멍만 난 코, 이가 날카로운 긴 입이 석양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전설 속 드래곤을 닮은 그림자를.

“우리는 원래 수가 많지 않네.”

낮게 울리면서 동시에 희미하게 쉬익거리는 특유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래서 대부분이 내려오긴 했지만 보기 힘든 걸지도 모르지.”

“대부분이요?”

아라는 조금 눈이 커졌고, 크세노바도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드래고니언을 더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는 스승의 수염을 물들이는 건 면제해주는 것을 고려했다.

“많은 수가 내려왔지.”

지카리가 끄덕였다.

“더 이상 지켜 볼수 없다는 뜻이 있었네. 인간의 행동을 처음에는 조화를 찾기 위해 벌이는 소음 정도로 생각했지만…”

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새로운 문명, 아니 세계를 만난 과도기일 뿐이니 금방 가라앉으며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그 과도기가 10년 20년 길어지는 동안 본토의 관심은 차차 수그러들었고, 이것이 세력의 균형이라면 그 균형은 꽤나 가혹하고 불안정했다. 탄내가 매캐한 페어리 꽃밭과 흑마법사의 실험실이 떠오르자 크세노바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이런 슬픈 일이 또 벌어지지 않게 하는게 우리들의 목적이랄 수 있지.”

드래고니언은 석양이 식어가며 어둠으로 잦아드는 숲을 내다보았다.

“나의 목적은 조금 다르지만, 그건 개인적인 일이네.”

그는 날카롭게 줄지은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둠 속에서 아라의 목소리에는 뭔가 취약한 것이 있었다. 단단한 갑옷 사이 부지불식간에 내보이는 부드러운 속살처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화를 찾기 위해서네.”

지카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안 된다면…”

방안에는 가우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침묵이 흘렀다.

“자네들, 드워프 맥주가 끝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예?”

허를 찔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라가 말을 이었다.

”…좋은 술이지요.”

“내가 맛본 바로는…”

지카리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들었다.

“드워프들의 맥주라는건 안힐라스의 희망이라고 할 만하더군.”

고되게, 하지만 힘차게 노동한 하루의 끝에 친구들과 마주앉는다. 그들의 목소리와 웃음과 기분좋은 욕설이 맥주에 황금빛으로 녹아든다. 고개를 젖히면 그 포말이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 가슴을 덥힌다. 그 장면이 갑자기 너무나 생생해서 크세노바는 왠지 목이 말라졌다.

”…그런 물건이 있는데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네.”

지카리가 익살스럽게 말을 맺었다.

“농담도…”

웃으면서도 크세노바는 드래고니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고 무거운 이곳이기에 그는 그런 희망을 맛보고 싶었다. 벌컥벌컥 마셔보고 싶었다.

“마법사도 언젠가 마셔봐야겠군.”

아라마저도 좀 느긋한 목소리였다.

“드워프 맥주를 못 마시면 안힐라스에 여행했다고 할 수 없으니.”

“안그래도 그래볼 참이라죠. 마탑에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러고 보니 그의 맥주 환상은 술마실 시간도 없을 정도로 고생을 시킨 스승 때문에 생긴 것일지 모른다. 역시 그양반 수염은 체크무늬로 물들이는 게 어떨까.

“음, 자네도 희망을 느끼게 될 거네.”

드래고니언은 무릎을 가볍게 치며 긁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자네같은 인간들이기도 하지.”

어느새 밖에서는 하나둘 등잔을 밝혀 숲에 작은 빛무리를 만들었다. 하늘에는 화답하듯 하나하나 별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이 파괴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네.”

하늘과 땅의 별빛 속에서 드래고니언은 눈을 희미하게 빛내며 그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파괴를 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지 않습니까.”

아라가 말했다.

“그런 자들의 힘이 더 강하고요.”

“나는 파괴하려고 하는 힘이 더 강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지카리는 깜박이지 않는 눈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사실은 지키려는 힘이 더 강하지만, 그것은 조금 느리고 눈에 잘 안 보일 뿐이라고 말이야.”

아스타틴이 말없이 일어나서 창가의 등잔을 찾아 밝히자, 조그마한 불씨는 금방 커지며 방안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크세노바는 따스한 금빛이 고인 아늑한 응접실을 눈을 깜박이며 둘러보았다.

“그렇게 믿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지카리는 다시 웃었고, 아사나스는 잠결에 가릉거렸다. 드래고니안이 손을 뻗어 아라의 어깨를 두들겨 주자 묵직한 소리가 크세노바가 앉은 데까지 들려왔다. 왠만하면 지카리가 어깨를 두들길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람을 타고 맑은 노래의 선율이 들려오자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밖의 거목은 수많은 등잔불을 품은 채 저녁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처음에 누군가 혼자 부르던 노래는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가 합류해 어느새 수많은 선율이 서로 섞이고 녹아들어 그의 위로 맑은 물처럼 흘러갔다. 저녁별을 반기는 엘프들의 노래에 귀기울이며 크세노바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희망이라는 꿈을 꾸었다.


숙소에서 이틀을 쉰 후, 아침에 전령이 명령사항을 전달하러 온다는 통보를 받은 일행은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눌 뿐 분위기는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남향 창에서 비쳐드는 햇빛에다가 아스타틴의 제안대로 침실 문까지 모두 열어서 둥근 방은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집 바로 위의 가지에서는 엠린 새가 즐겁게 노래했다. 곧 떠날 곳이었지만 그래서 지난 이틀은 더없이 소중했다.

곧 이곳에서도 떠나가겠지. 아스타틴은 편안한 일행과 평화로운 정경을 둘러보았다. 노스탤지아가 생기기 전,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 잠깐 머물렀던 로스로리엘보다 지금의 로스로리엘은 한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루하루 인간들의 침탈에 거의 무방비로 사람이 사라지고, 전투에 지고, 점령당한 땅에서 난민이 밀려오는 와중에 아무도 혼혈의 고아에게 신경을 쓸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기에 그는 텔루르가 탐탁치 않아해도 노스탤지아에 가세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장에 뭔가 어른거리자 그는 햇살이 어디에 반사되나 생각하며 올려보았다. 다만 색이… 분홍색? 그리고 이내 흰색, 노란색, 초록색, 파랑색의 빛무리가 천장에 급격하게 생겨났다. 탁자 앞에 앉아 책을 보던 크세노바와 바닥에 앉아 뭔가 이야기하던 지카리와 아라, 그리고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 속에 등을 대고 누워 졸던 아사나스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그 빛무리로부터 하나하나 뭔가 떨어져 내렸다. 올려다보는 얼굴을 향해 묵직한 것이 날아오자 아스타틴은 급히 얼굴을 가리며 옆으로 피했다. 아사나스는 화들짝 놀라 탁자 밑으로 숨었고, 아사나스 때문에 이번에는 크세노바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벽에 몸을 붙였다.

와르르르- 사과, 들국화, 석류, 토끼풀 화환, 망고, 온갖 꽃과 과일이 쏟아져내리는 와중에 아스타틴은 떨어져내리는 야생화 목걸이를 졸지에 목에 걸게 되었고, 아라는 과일에 머리를 맞자 그가 어려서 텔루르를 따라서 했다가 엉덩이를 맞았던 다크엘프 욕설을 내뱉었다. 지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다가 옆에 떨어지는 과일 하나를 잡아 냄새를 맡았다.

물건의 폭포가 잠시 잦아들자 아사나스는 탁자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눈앞에 오렌지 하나가 툭 떨어지자 캬옹! 하며 도로 숨었다.

”…이건?”

여전히 벽에 붙은 크세노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마치 대답하듯 출입문으로 페어리들이 우르르 날아들었다. 웅웅웅... 색색의 빛을 햇살 속으로 흩뿌리며 그들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선물이야!”

“선물이야!”

“물선이야!”

“물선이 아니고 선물이야 이 바보~”

선물인지 물선인지 잠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자기들끼리 페어리어로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을 지카리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보았다. 아사나스는 조심조심 탁자 밑에서 나오더니,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페어리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눈으로 따랐다.

“므우루는 어떤가?”

아라가 묻자 페어리 하나가 공통어로 대답했다.

“므우루 구해줘서 고마워~”

고마워~ 하는 즐거운 목소리들의 합창이 방안에 울렸다. 창에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돌아보자 응접실 창밖에서도 페어리들이 맴돌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하하…”

가슴 밑바닥에 따뜻하게 고이며 솟구치는 온기는 입을 벌리자 웃음이 되어 나왔다. 웃으면서도 아스타틴은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텔루르, 그의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함께 가슴아파하고 함께 달리고 함께 싸워서 마침내 이루어낸 이 작은 기적에… 이런 순간에 더욱 아스타틴은 엄마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과거 이상으로 미래가, 내일이 가져오는 그 모든 놀라운 가능성에 대한 목마름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속에 날개를 저었다.

“알다론 여러분 계십니ㄲ… 아.”

엘프 여인 하나, 아마도 그들이 기다리던 전령이 숙소에 들어오다가 이 광경에 놀라며 멈추어섰다. 발목까지 꽃과 과일에 파묻혀서 꽃목걸이를 하고, 정신없이 떠들어대며 붕붕 날아다니는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 아스타틴은 그녀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고 더 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작은 개선을 축하하는 그 유쾌한 소란 속에 햇살은 눈이 부셨고, 해처럼 노란 새가 날아오르는 창밖으로 하늘은 드높이 푸르렀다.

소감

로스로리엘은 역시나 반지의 제왕의 로스로리엔에서 이미지를 많이 따왔습니다. 안힐라스는 특히 작명은 중간계에서 바로 따온 게 많은 세계죠. 알쿠알론데나 엘윙,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 등등. 그래서 새로운 작명을 할 때도 엘프 작명은 신다린 사전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다크엘프어는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산스크리트를 약간씩 비튼 게 대부분이죠.

2화는 거의 쉬어가는 화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원래 플레이의 주인공 간 대화도 그랬고, 또 플레이에는 나오기 어려웠던 NPC나 로스로리엘 묘사도 그렇고 안힐라스의 모습이라든지 상황을 드러내보고 싶었습니다. 안힐라스가 완전히 인간들에게 넘어간다면 무엇을 잃어버릴지, 현재 상황에 대한 안힐라스 주민들의 생각이라든지 말이죠.

아스타틴의 회상을 통한 로스로리엘의 과거와 현재 대비는 수단 내전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What Is the What 오디오북을 듣다가 떠오른 것입니다. 주인공 발렌티노 아차크 뎅이 어렸을 때 살던 마을 주민이 정부편 아랍 민병대에 학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가 초토화된 후 혼자 도망쳐 난민이 되고 (여기까진 그야말로 판타지적인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인지라 주인공이 나중에 돌아와서 마왕--혹은 알-바쉬르 대통령--에게 복수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후 에디오피아와 케냐의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여정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작중 발렌티노는 SPLA (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수단민족해방군 정도?)의 세력에 따라 탈출 경험이 얼마나 달랐는지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200여명의 다른 소년과 함께 에디오피아로 도망칠 때 도보로 여행하고 가다가 다른 소년이 사자에 잡아먹히기도 했는데, 이후 출발한 다른 소년 난민 무리는 SPLA 유조선을 타고 에디오피아로 갔다는 대조가 극명했죠. 애당초 발렌티노와 다른 소년들을 에디오피아로 인솔한 사람이 교사 출신인 젊은 SPLA 협력자기도 했고요. 결국 수단 정부가 총을 쥐어준 아랍 부족들에게 학살당하던 이들을 그나마 살린 것이 정부에 대항해 총을 들고, 조직하고, 계획하고, 난민을 탈출시킨 반군의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SPLA가 절대선이라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SPLA도 소년병이라든지 부패, 군벌화 등 문제가 많은 조직이죠. 저는 마찬가지로 노스탤지아가 절대선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어떤 강한 조직 (수단 정부, 안힐라스에 진출한 열강 등)이 조직적으로 다른 집단을 학살하고 땅에서 몰아내고 노예화하는 말살 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반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당연하겠죠. 무장 없이는 안정도, 자유도 없을 테니까요. 어찌보면 모든 악의 근원은 군사력의 큰 불균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노스탤지아는, 그리고 불의한 정부에 대한 반군은 그런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바로잡는 존재라는 면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주석
  1. 다크엘프어로 '가라!' [돌아가기]
  2. 고제국어로 '되살아나다' [돌아가기]
2010/03/25 23:36 2010/03/2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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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플레이한 이오닉스 2화입니다. 첫 부분인 '마법사의 표식'은 짧기도 하고 서로 내용이 바로 이어지므로 그냥 앞에 붙여서 같이 올립니다.


마법사의 표식

동굴 벽을 따라 걸어놓은 횃불이 눈에 연기를 날리면서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발밑에는 더러운 천조각과 썩은내가 나는 고기, 어느 생물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긴 뼈가 채였다. 발끝이 우그러진 채 버려진 갑옷 조각에 닿아 큰 소리를 내려는 찰나 아스타틴은 조마조마하게 발을 빼서 비교적 물건이 없는 데다가 다시 딛었다. 여기저기서 주워온 (혹은 훔쳐온) 듯 짝이 맞지 않는 탁자와 의자 등 잡다한 가구를 조심조심 돌아가야 했다.

이 잡다한 쓰레기에 뒤섞여 벽에는 보랏빛 휘장이 쭉 걸려 있었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걸어둔 횃불 외에 가끔 가구나 바위, 동굴의 자연적 선반 위에 켜둔 촛불은 휘장마다 가득 수놓은 무늬를 비추었다. 무늬는 그림도, 적어도 아스타틴이 아는 어떤 언어의 문자도 아니었고 추상이나 기하학 문양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어딘가 기분이 나빠졌다.

동굴은 천장은 그닥 높지 않았지만 예닐곱 명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너비였으므로1) 그들은 거의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조금 앞선 채 크세노바가 한 발짝쯤 뒤에서 그의 오른편으로 따라왔고, 니아는 크세노바의 머리카락 끝을 한 움큼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쫓아왔다. 다시 그 오른편에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고 있는 지카리 쿤 카타의 조심스럽지만 하나하나 보폭이 큰 걸음은 돌바닥에 깊고 낮은, 소리없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아스타틴의 앞편으로 조금 나선 크세노바는 벽에 붙어서서 휘장을 조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흠, 이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침묵을 깨며 동굴의 공기를 흔들었다. 뭔가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는 멈춰서서 휘장 하나를 살피며 밀빛 눈썹을 찌푸렸다.

“흑마법사들의 표시 같은데요.”

“흑마법사…?”

아스타틴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어차피 인간 마법사들이란 안힐라스 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고 사람을 잡아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따로 흑마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단 말인가.

“인간 마법사들은 다 같은 거 아닌가요?”

“멜코르 상고로드림, 인체실험을 자행하던 악질입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크세노바는 조용히 말했다. 인체 실험… 그 말은 뭔가 불길한 울림을 만들며 어둑한 공간에 울렸다. 아스타틴은 갑자기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보통 악마의 힘을 빌리죠.”

일행의 발걸음이 동굴 안에 울리면서 그들은 점점 깊이 들어갔다. 통로가 약간씩 좁아지면서 발걸음은 더욱 울렸다.

“이들 문양은 그자의 표식입니다. 안힐라스로 도망쳤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횃불을 설치한 구간이 거의 끝나가면서 깊어가는 어둠 속, 앞서가는 크세노바의 목소리는 마치 말하는 사람 없이 허공에서 나오는 듯 그림자 속에서 울려나왔다.

“그 강력한 마법사가 죽었다거나 원혼이 본토에 남아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보다는 도망쳤다는 설이 신뢰성이 있었죠.”

거의 완전한 어둠 속에 그들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쓰레기는 더 발에 채이지 않았고, 균형을 잡으려고 벽을 만지자 휘장의 부드럽고 묘하게 차가운 감촉이 손에 와닿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손을 떼었다. 인체실험… 어쩌면 다른 인간 마법사보다 심한 마법사도 있기는 있는 걸까. 일단 크세노바는 특별히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는 또 모를 일이었지만.

몇 걸음 더 옮기자 앞에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누군가 언성을 높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빛 속에 니아가 휘장을 한 손으로 쓸며 크세노바를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크세노바가 조용히 멈춰서며 말했다.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군.”

앞에서 들려오는 고함은 역정이 나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니아가 살금살금 빛이 비쳐오는 통로 끝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도 소리죽여 그녀를 쫓아갔다.

”..이 …새끼들아! 뒤를 밟혔다고?!”

빛이 흘러나오는 곳까지 닿기도 전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내용은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통로가 살짝 꺾이는 지점 너머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오크들의 거친 억양과는 전혀 달랐고, 언어는 공통어였다. 니아는 벽을 감싸안듯 몸을 붙인 채 꺾인 통로 너머를 빼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녀 옆에 몸을 붙이며 머리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네놈들은 대가리가 처 비었나! 박치기하는데만 머리를 쓰지말고 좀 생각을 하는데 쓰란 말이다!”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갈색 로브를 입은 사내였다. 그 앞에는 오크가 10여 마리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오크들의 시선은 그들을 비스듬히 벗어나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해진 아스타틴은 숨을 죽이며 더욱 벽에 바짝 붙었다.

“이대로서야 스승님께 바칠 선물이…에에이!!!”

스승님… 이곳에는 멜코르 상고로드림의 문양… 마법사 로브를 입은 사내…

직감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아스타틴은 속이 차가워졌다. 그 흑마법사의 제자도 하나하나 그렇게 강력하다면 멜코 상고로드림의 흔적들은 그저 우연이기를 빌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원래 가져가려고 했던 날개뿐만 아니라 진귀한 패달랭이꽃 급의 페어리까지 구해서 스승님의 총애를 듬뿍 받나 했더니 네놈들이 뒷처리를!!”

단번에 거의 숨도 안 쉬고 소리지른 말에 아스타틴은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뱃속의 차가운 감촉은 점점 뜨거운 분노가 되어갔다. 역시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페어리 날개를 가져오고 므우루를 납치한 것은 이 일당이었다. 폭발로 크게 구덩이가 패인 채 불타는 페어리 꽃밭을 생각하자 두려움은 더 설 자리가 없었다.

“제길 이럴줄 알았으면 쿠라 놈이랑 헤어지는게 아닌데!”

마법사가 분에 못이겨 옆에 의자를 걷어차자 의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천천히 돌아보며 니아는 그에게 윙크하더니 조심스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가 상황을 동료들에게 전할 테니 아스타틴은 조금 더 엿듣기로 했다.

제풀에 지쳐 식식거리던 마법사가 홱 돌아보자 아스타틴은 움찔하며 통로쪽으로 움츠러들었다. 갸름하고 마른 얼굴에 마법사의 눈빛은 차갑고 밝았다.

“가만…왜 추적자들을 잡으러 보낸 놈들이 소식이 없지?”

아스타틴이 동굴 입구에 널부러져 있을 시체들을 떠올리는 동안 흑마법사는 오크 두 마리를 가리켰다.

“너하고 너! 가서 확인해봐라.”

뭐라고 킁킁거리며 오크 둘이 칼과 창을 집어들고 아스타틴이 있는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마법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방 가운데 탁자에 있는 수정구로 향했다.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그 말에 귀기울이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만…혹시 일이 잘못될때를 대비해…지원을 요청해야지…제길 빚을 지곤 싶지 않지만…”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과 금속 부딪는 소리가 철컥철컥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쯤 달려가서 일행과 합류할까 생각하는 순간, 오크 두 마리가 통로가 꺾인 데를 돌아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스타틴과 떡하니 마주친 오크들은 순간 멍청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한 마리가 엄니가 비져나온 입을 벌렸다.

“Rakuna dasha!”

아스타틴을 뚫어져라 보던 나머지 하나도 생각난 듯 그 고함에 호응했다.

“Rakuna!”

두 오크의 고함과 그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쫓기듯 아스타틴은 동료들을 향해 통로를 달려내려갔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통로를 가득 차지한 채 돌진하는, 몸에 단 뼈를 덜그덕거리며 우뢰처럼 고함을 지르는 거대한 형체가… 마치 그 분노에 응답하듯 달리는 궤적에 맞추어 벽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깔려버린다. 살해당한다. 죽는다. 순간 그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오크의 노성이—혹은 공포의 비명이?—들려오자 눈앞이 맑아졌다. 아, 지카리! 지카리가 오크를 위협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멈춰선 동안 지카리는 마치 먹이를 내려다보는 포식자 같았지만 아마도 눈인사인 시선을 보내며 그대로 땅을 쿵쿵쿵 울리며 지나갔다. 지카리를 보고 좀전의 자신만큼이나 멍해진 오크들을 돌아서서 마주보며 아스타틴은 봉을 잡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니아와 크세노바, 아시타를 죽인 다크엘프이며 불신해 마지않는 인간이지만, 이 순간은 그의 등뒤에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는 그들을 향하여.

생과 사가 엇갈리는 이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죽이겠다!!”

아무 걱정없이 마음껏 소리를 질러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작은 사람, 특히 아이가 겁을 먹거나 심지어 정신을 잃을까 생각할 필요 없이 명치 밑바닥에서부터 소리를 질러대자 가슴이 어딘가 후련했다. 달려가며 도끼날을 벽에 긁는 파찰음도, 주라-크탄1 뼈갑옷이 흔들리며 부딪는 소리도 그의 고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프엘프 청년이 그를 보고 멈춰서자 지카리는 눈빛으로 살짝 목례를 보내며 달려갔다.

그 기세에 오크들은 얼어붙은 듯 멈춰섰지만,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와 발걸음이 더 들리더니 더 많은 오크가 통로로 우르르 달려나왔다.어림잡아 열 마리는 넘는 그들 앞에 지카리는 떠억 버티며 멈춰섰다. 동공이 확장한 채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그들의 공포의 냄새가 얼굴에 끼쳐왔다. 두려움에서 태어난 공격성으로,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그들은 위협적인 괴성을 질러댔다.

“Kataga! Kataga!”

조금 조용해지면서 앞의 몇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비켜주자, 방패를 든 놈 몇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지카리와 그 너머의 동료들을 노려보며 그들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와봐와봐~ 오는 놈부터 죽여줄게요~”

뒤에서는 아까부터 좀 이상한 아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돌아보자 그녀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지카리는 다짐하듯 덧붙이며 도끼를 쳐들었다. 오크들이 지카리의 존재와 아라의 위협에 잠시 주춤하는 것을 보고 그는 순간 어깨가 가벼워졌다. 짓이겨지는 뼈와 살과 피 속에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멍청이 놈들아! 뭐하고 있는거냐!”

성마르게 소리지르며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통로 끝에 나타났다.

“해치워!”

“당신이 대장인가?”

지카리가 언성을 높이며 통로에 목소리가 울리자 마법사는 움찔했다.

“여기있는 모두… 잃을 필요가 없는 목숨이다.”

필요 없이, 더 큰 균형에 대한 생각 없이 어찌 목숨을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분노에, 쾌락에 겨워서 취하기에는 생명은, 그리고 생명을 위한 죽고 죽임은 너무나 무거웠다. 죽어가던 아내의 마지막 말은 그 뜻이 아니었을까 그는 생각했다. '고마워…' 속삭이며 죽어가던 그녀의 마음은.

“돌려놔야 할 것을 돌려놓고 떠나라.”

그는 마법사를 도끼로 가리키며 낮게 웅웅거렸다. 그래, 어쩌면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일지도 몰랐다. 점점 더 폭력과 죽음으로 젖어드는 안힐라스에서는 공허한 이상주의일지도. 그러나 아무리 허무하다 해도 노력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에르-하라의 기억이, 그녀의 죽음이 그에게 남아있는 동안은. 따라서 그가 호흡하는 한…

“하, 리자드맨이 말도 하는 줄은 몰랐군?”

마법사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없겠지. 죽어라!”

마치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뒤에서 마법사 크세노바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쳤고, 빛이 순간적으로 통로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오크 대부분이 눈을 감싸며 울부짖는 모습에 지카리는 가슴이 쓰려왔다.

결국은…

쉭- 빠르고 예리한 움직임이 그의 옆을 스쳐갔다. 앞에 있던 방패 든 오크가 얼굴에 화살을 박은 채 뒤로 넘어갔다.

다시 이 무의미한 피인가. 다시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인가. 다시…

슬픔과 분노를 넘어 그와 언제나 함께하는 내면의 광기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지카리는 눈을 똑바로 떴다. 되도록 빨리, 희생 없이 끝내야 했다. 에르-하라, 동반자여, 사랑이여, 부디 나를…

도끼를 왼손으로 옮기며 그는 서두르지 않고 바로 앞의, 눈을 가리고 괴성을 지르는 오크에게 손을 뻗었다. 갈고리발톱이 난 손이 목을 움켜잡자 오크는 소리지르는 것조차 잊은 듯 굳었다. 아주 조금, 조금만 손을 조이면 지푸라기처럼 간단히 꺾을 수 있을 목뼈가 손에 잡혔다. 전투와 폭력과 고통의 소음들이 귀에 가득 몰려오는 기묘한 합창에 붙잡힌 오크가 두려움에 찬 괴성을 더하는 동안 지카리는 천천히 그를 들어올렸다.

통로 끝에서는 마법사가 집중하며 주문을 외우다가, 크세노바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끄어억 비명을 지르고 벌벌 떨며 쓰러졌다. 그자의 비명도, 공포에 바지 앞춤이 젖어오는 오크도 감각이 전해오는 정보일 뿐 중요하지 않았다. 지카리는 들어올린 손안의 무게를 앞으로 세차게 던졌다. 앞에 통로를 메운 오크들이 내던진 오크에 깔려 우당탕탕 쓰러지는 것을 그는 감정 없이 지켜보았다. 혼전 중에 가끔 그렇듯 세상이 느려졌다. 크세노바가 아까 걸은 가속 주문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있었다. 고통에 찬 비명, 둔탁한 타격음과 뼈가 나뭇가지처럼 부러지는 소리가 하나하나 그에게 부딪쳐 왔다. 지카리는 통로 끝에 쓰러진 흑마법사를 노려보며 달려갔지만, 혼란에 빠진 오크들이 앞에 걸리적거리며 가로막았다. 눈을 비비며 뭐라고 말하는 오크에 걸리고, 쓰러진 다른 오크에게 발이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지카리는 울부짖었다. 어째서 매번 멈출 수가 없는가? 어째서 이렇게도 무력한가? 에르-하라, 어째서?

두 마리 오크가 두려움에서 태어난 분노에 겨워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무의미한 감정, 무의미한 폭력. 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카리는 허공을 차갑게 갈라오는 날을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비켜라!!”

다시 달리는 그의 앞을 오크 세 마리가 가로막았지만, 그가 그 중 가운데놈에게 세게 부딪치자 오크는 소리도 못 지르고 옆으로 날려갔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더 버틸 수 없다는 듯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돌아보자 그의 뒤편에 있던 오크들도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만한 승리는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손에 무의미한 피를 묻히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봐도 그를 향해 걸어오는 동료들은 모두 무사했다.

'에르-하라…'

큰 승리가, 싸움과 피 없이 이기는 싸움이 아직 손에 닿지 않는다면 이런 순간이라도 소중하게 품어 안으리라. 머리나 몸에서 화살이 튀어나온 채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오크의 시체가 발에 걸리적거렸고, 패주하는 오크 하나는 부러진 다리를 끌고 작게 낑낑거리며 동료들을 열심히 쫓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뒤처리뿐.

지카리는 통로 끝으로 걸어가 그곳에 쓰러진 마법사의 목에 도끼날을 갖다댔다.

“끄으… 네… 네놈… 들…”

눈을 가늘게 뜬 흑마법사가 그를 올려다보며 더듬거렸다. 경련하면서 혀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손발을 묶고 입을 막으면 아무것도 못할 겁니다.”

뒤에서 발걸음이 다가오면서 크세노바가 말했다.

“대화를 하고 싶다.”

지카리는 말에 차가운 확신을 담아 흑마법사에게 말했다. 그의 살생에 의미가 있었는지, 그가 살아감과 죽임의 순환을 더럽혔는지 알고 싶었다. 심증은 있었지만, 무지 속의 확신은 눈이 먼 채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장로들은, 그리고 에르-하라는 그에게 가르쳤었다.

“대화아? 죽이면 되잖아!”

아라가 칼을 뽑으며 그의 앞으로 폴짝 나서자 빛이 칼날 위로 차갑게 흘렀다.

“니아가 금방 할게!”

“므우루를 찾아야죠.”

크세노바가 팔을 붙잡자 아라—혹은 니아?—는 깔깔 웃더니 그의 손에서 가볍게 벗어났다. 그녀는 흑마법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넘어서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자가 아까 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조용해진 사이에 아스타틴이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원군…?”

그 말만으로 지카리는 다시 지치는 기분이었다. 다시 의미없는 살육인가. 그러다면 그가 말한 원군이 오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통로가 꺾이는 곳, 쓰러진 흑마법사 바로 안쪽에는 예의 그 휘장 몇으로 벽을 장식하고 탁자와 의자 등 가구를 비교적 제대로 갖춘 방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수정구 옆에서 조롱를 집어들더니 니아는 짤짤 흔들었다.

“여깄어 여기!”

그녀는 크세노바를 향해 즐겁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크세노바는 흑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차갑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채, 그저 무표정하게 묻는 크세노바를 보며 지카리는 젊은 인간 마법사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예사로울 수 있는 저 표정은 사냥꾼이 사냥을 하고 직조공이 천을 짜듯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 그 자체였다. 다만 조금 더 심각하고 위험한 사냥이기에 청년의 평소 반짝이던 눈빛에서 웃음기를 앗아갔을 뿐.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냥꾼은 위험하고, 또한 신성했다. 지카리는 그런 인간 젊은이를 유심히 살폈다.

“잠깐! 사…살려줘!”

조금씩 몸에 움직임이 돌아오면서 흑마법사는 무력한 방어동작으로 한 손을 들어보였다.

“나…난 그냥 스승님이 시키는대로…그…그러니까-”

“스승? 누구?”

여전히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크세노바는 흑마법사의 말을 끊었다. 흑마법사는 이제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질러댔다.

“오…오크들이 전부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했다고!”

“거짓~말~ 니가 명령했잖아.”

흑마법사가 주충주춤 엉덩이를 끌며 일행에게서 물러나는 동안 니아는 손에 든 조롱을 들여다보며 걸어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조롱에서는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카리는 도끼를 흑마법사의 목에 더욱 바싹 갖다댔다.

“움직이지 마라.”

“거짓말쟁이 아이는 죽어야 하는데…”

니아는 구슬픈 표정으로 허리춤에 꽂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줘 제발!”

마법사는 이제 손을 맞대고 싹싹 빌었다.

“뭐든지 다 할게!”

지카리는 대답없이 도끼날을 그의 목에다 댔다. 흑마법사는 목소리가 으으.. 하는 공포에 질린 신음으로 잦아들면서 눈만 돌려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 그 문양은 멜코 상고로드림이라는 흑마법사의 것이라고 했죠?”

아스타틴이 크세노바를 쳐다보자 젊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 정도는 될 수 있겠지요.”

그는 다시 아무 감정이 없기에 오히려 두려운 눈빛을 바닥에 스멀거리고 있는 흑마법사에게 향했다.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스… 스승님? 글쎄… 누구더라…”

마법사가 허얘진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우는 동안 지카리는 곁눈으로 아라—혹은 니아—가 조롱에서 푸르게 빛나는 작은 형체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까 보았을 때보다 한결 빛이 희미해진 므우루는 니아의 손안에 의식 없이 추욱 늘어졌다.

“어서 대답하는게 좋을 거다.”

목소리에 점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들며 지카리는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지금 화가 많이 나려고 하니까.”

아직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점점 확신이 들었다. 이자가 한 일에는 생명의 신성한 필요라고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이 멀어 달리는 것일까? 이것은 광포에 문을 열어주는 분노인가?

“모른다니 별 수 없군요.”

여전히 그 무서울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크세노바는 지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흑마법사가 움찔하면서 그자는 지카리의 도끼날에 스스로 목을 벨 뻔했다.

“잠깐잠깐! 말할게! 말한다고!”

흑마법사는 손을 내저으려는 모양이었지만, 몸이 너무 굳어서 손바닥을 아주 약간 들어보일 뿐이었다.

“멜…멜코르…멜코르 상고로드림이시란 분….”

구석에서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들리자 지카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처입은 어린 생명이 내는 소리… 의식이 없는 므우루를 안고 이제 도저히 아라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니아가 울고 있었다. 아무 수치심이나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대로 얼굴을 구긴 채, 마치 어린아이처럼.

“샤나 아픈가봐… 정신차려 샤나, 응? 엄마 있으니까…”

지카리는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니아의 복잡하게 엉킨 정신 속에 '샤나'나 '엄마'가 누군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슬픔에 빠진 생명체가 위안을 갈구하는 소리란 누구나 다 비슷했다.

“스…스승님?”

그 목소리에 지카리는 다시 흑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스승님. 제…제가 실수한 건 아니…그러니까…”

그자는 어느새 언색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곳에 없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 역력한 그 눈치에 지카리는 목 뒤의 비늘이 곤두섰다.

“요..용서를 제발!”

공포로 동공이 확장해서 눈이 새까매진 채 흑마법사는 이제 허공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스…스승님! 제발 자비를…!”

흑마법사가 목의 도끼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몸을 뒤틀자 지카리는 그자의 머리가 잘려나가기 전에 서둘러 도끼를 떼었다. 공중에 차가운 기운이 지나가며 뼈갑옷이 희미하게 덜컥거렸다. 이제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의식도 하지 않는 듯한 흑마법사를 아스타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지카리는 한 발짝 물러나 도끼를 챙기고, 혼자 일행과 떨어져 있는 니아를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끄으… 끄아아!”

그 순간 마법사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절규를 내질렀다. 동굴 안이 급속도로 추워지면서 공중에 악의어린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쭈뼛한 그 차가움에 원치 않는데도 시선이 흑마법사에게 내려가자 그자가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마구 뒤트는 모습이 보였다.

“Satis superque…2"

그 초자연적 공포 속에 크세노바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낮았다. 그의 차분한 표정, 침착한 목소리는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처럼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이 있었다. 지카리는 저도 모르게 보호를 구하듯 젊은 마법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Ne plus ultra.3"

크세노바가 손을 들었다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수평으로 움직이자 손의 궤적에는 분명히 하얀 빛이 따랐고, 공기 중에 무언가가 변했다. 차가운 존재감, 공기를 진동시키던 속삭임이 희미해져 마침내 사라지자 몸이 뒤틀리던 흑마법사는 갑자기 늘어지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휴…”

크세노바의 작은 한숨이 침묵을 깼다. 그는 마치 식사가 잘못 오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위험한 자가 적이 된 것 같군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단지 '위험하다'는 표현에는 묘하게 만족을 못하고 있는데 니아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성큼성큼? 흑마법사에게서 고개를 들어서 보자 그녀는 얼굴이 차갑게 굳은 채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니아—혹은 아라?—는 므우루를 옆의 아스타틴에게 떠넘기듯 밀치고는 흑마법사 앞에까지 와서 쓰러진 형체를 발로 쿡쿡 찔렀다.

“뭐지, 이 자는?”

꿈틀거리는 마법사는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정신을 차리지도 않았다. 아라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의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법사는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직였고,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에서는 약하게 숨이 새어나왔다.

“흑마법사라는 자들은… 전부 이러한가요…?”

아스타틴이 두 손에 므우루를 조심스럽게 감싼 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는 말에 문장부호를 붙이듯 아라는 손을 뒤로 젖히더니 흑마법사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짝! 소리가 크게 울리고, 마법사는 입안에 고인 피를 커헉 뱉어내며 주춤주춤 눈을 떴다.

“스승에게 버림받은 일회용 도제랄까요.”

아스타틴과 지카리가 잠시 얼어붙은 동안 크세노바는 벽에 건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

다크엘프는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흑마법사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말했다.

“이젠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

챙… 그녀가 칼을 뽑자 지카리는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여 그녀와 마법사 사이에 팔을 밀어넣었다. 아무리 동료라 해도 필요없는 살생을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거의 동시에 크세노바가 그녀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아뇨, 아직입니다.”

젊은 마법사는 한 손을 들었다. 정중히 말리는 동작이기는 했지만, 언제든 주문의 손동작이 될 수도 있으리라.

“기억을 복구하는 마법도 있으니까요.”

마법사와 지카리를 번갈아 보며 아라는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표정이 변하지 않고 칼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렇다면 데리고 가자.”

아라가 마법사의 머리칼을 잡은 손을 놓자 마법사는 얼굴이 지카리의 팔에 스쳤다가 퍽! 하고 돌투성이 바닥에 박혔다. 옆의 땅에서 아무 천조각이나 집어들어서—묻은 얼룩은 오크 피 같았다—그녀는 흑마법사의 고개를 우악스럽게 돌린 후 살짝 벌어진 입에 쑤셔넣었다.

“페어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지체할 수는 없다.”

“아까 저놈이 페어리들에게 빼앗은 마법석은 어떻게 하죠?”

므우루를 안은 채 아스타틴은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안쪽을 한 번 조사해봐야겠습니다.”

말하고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크세노바를 아라는 흘깃 돌아보았다.

“빨리 하도록.”

“서둘러서 나가는 것이 좋겠죠.”

아스타틴이 맞장구쳤다.

“아까도 말했지만 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으니 곧 들이닥칠 테고요.”

크세노바가 뒤편에 입구를 찾았는지 들어가는 동안 아라는 지카리에게 밧줄을 얻어 마법사의 손발을 꽁꽁 묶었고, 지카리는 배낭을 멘 뒤 밧줄로 잘 포장한 마법사를 어깨에 걸쳤다.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는 마법사가 사라진 문으로 향했다.

“마무리가 되었으니 떠나…”

문간에 잠시 멈추었다가 이제야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크세노바의 머리를 넘어 안쪽 방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지카리의 걸음은 멈추어 있었다. 이 안쪽 방에는 바깥 동굴처럼 오크가 버린 잡다한 쓰레기가 흩어져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저분하게 흩어진 수정구나 유리병, 펜과 책 같은 도구들도 크게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업대에 수북히 쌓아놓은 피투성이 페어리 날개, 그리고 큰 유리 용기 속 액체에 담아놓은 여러 종족의 시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친구들이 즐겁게 재잘거리며 저 날개로 웅웅웅 날아다니던 기억에, 유리병 속에 소리없는 비명에 입을 벌린 채 내장이 배 밖으로 끄집어내어진 페어리의 모습에 배에서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것은 구토감일까, 분노일까. 내면의 광기가 다시 창백하고 차가운 손을 저어보였지만, 그는 그 유혹을 외면하며 버텼다.

“마법사, 언제까지나 거기서…”

날카롭게 말하며 들어오던 아라도 흠칫 멈춰섰다. 뒤늦게서야, 마치 나쁜 꿈을 꾸는 기분으로 지카리는 벽에 묶인 채 울부짖는 오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이 잿빛으로 변색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정상 같지 않았다. 아마도 좀비화한 결과? 곁눈으로 실험실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스타틴이 보였다. 끔찍한 광경을 감추듯 그가 끌어안은 므우루는 날개만 아주 희미하게 저으며 꺼질 듯 희미한 푸른 빛을 냈다.

아라가 뭔가 중얼거리며 비틀 나가는 동안 지카리는 어깨에 멘 인간 흑마법사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웠다.

“이자가 이렇게 한 것일까?”

크세노바에게 묻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쉬어서 나왔다.

“그건 차후에 알아봐야겠지만…”

젊은 마법사는 반대쪽 벽의 좀비 오크에게 손을 저었다.

“일단 이것들부터 좀 치워주시렵니까?”

지카리는 망설이며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을 마주보았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그때 아라의 부름에 응답했는지 그녀의 포식자 친구, 사냥꾼의 혼을 한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뛰어들어왔다. 아라는 아무렇게나 버려진—그들의 신성한 죽음을 마치 쓰레기처럼 그렇게—피묻은 페어리 날개를 천조각에 꼼꼼히 싸서 아사나스의 안장주머니에 넣었다. 줄지은 오크 좀비를 사냥꾼이 노란 눈으로 노려보는 동안 아라는 활에 화살을 매겨 하나씩 쏘았다. 크어어.. 하며 늘어지는 그들을 보며 지카리는 망설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저 부자연스러운 '생명'을 끊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저런 생명이라도 삶의 고리 안에 있는가. 세상은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에게 내놓곤 했다.

“흑마법사도 잡았고… 대충 해결된 거 아닌가요.”

그와 생각이 비슷한 듯 젊은 하프엘프 친구가 아라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혼자 뭔가 중얼거리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핑- 화살이 날았고, 또 다른 좀비가 부패해서 미적미적 흐르는 피를 쏟으며 늘어졌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서랍을 열고 선반을 뒤지며 크세노바가 정신이 팔린 투로 대답했다.

”'저런 걸' 생물로 봐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세노바가 계속 마법사의 악몽 같은 연구실을 뒤지는 동안 아라는 칼을 들고 좀비들에게 다가가 화살을 회수했다. 잿빛으로 부패한 장기가 묻어나오며 썩은내가 진동하자 작은 코를 찡그리며 그녀는 화살촉을 그들이 입은 누더기 옷에 대충 닦았다. 그 냄새에 지카리는 다시 분노인지 구토인지 모를 느낌이 치솟으면서 어깨에 멘 마법사를 들썩여 단단히 잡았다.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이게 너의 짓이라면, 깨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에르-하라, 그의 아내라면 이런 상황에 분노하지 않고 지혜와 인도의 말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리라. 그에게는 그럴 지혜가 없었다. 지카리는 갑자기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녀가 그리웠다.

마법사가 서류나 물품 몇 가지를 대충 챙기는 동안 갑자기 사냥꾼, 가우르가 밖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아라의 옷깃을 입으로 잡아당기자 그녀는 역시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아, 이런.”

하프엘프는 므우루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카리는 흑마법사의 무게를 고쳐잡았다.

“아직인가, 마법사?”

“나가죠.”

마법사만이 차분한 채 손을 젓자 한쪽 쓰레기더미에 불길이 일었다. 빠르게 퍼지는 불길에 머리와 로브가 흔들리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가자.”

앞서가는 아라는 시위에 다시 화살을 매겼고, 아스타틴이 그녀를 바싹 쫓아나갔다.

“부디 명복을…”

크세노바는 말하며 점점 불길이 오르는 실험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매캐한 공기에 기침하며 마법사는 서둘러 나갔다.

흑마법사를 지고 나오다가 지카리는 한 번 돌아보았다. 만족을 모르는 진홍의 포식자가 마법 도구를, 책을, 그리고 다른 슬프고 잔혹한 유물들을 집어삼키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그는 말없는 기도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잠시 나쁜 기억처럼 그를 쫓아오던 불길과 연기는 먹을 것이 없어지자 곧 주춤했고, 지카리는 그 불구덩이를 등뒤에 두고 나왔다. 이미 머리에 새긴 기억을 지울 것은 전투의, 광기의 불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슴 한 구석을 짓눌렀다.

소감

지카리 시점을 처음으로 했다가 지카리라는 인물의 원동력이랄까, 동기를 잘 못 잡아서 많이 헤맸습니다. 무랑님하고 많이 얘기하면서 마침내 인물의 실마리가 잡히니 신이 나더군요. 저는 지카리의 인물 방향을 무심히 겉으로 드러나는 '연민'으로 잡았었는데, '살생의 신성함'이라는 좀 엉뚱할 수도 있는 방향으로 잡으니 덜 전형적이고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지적 주시고 상담해주신 무랑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 크세노바의 마법사적인 면모라든지 위협적인 점을 표현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플레이 로그 때부터 그랬지만 아라-크세노바 대 지카리-아스타틴의 매파와 비둘기파(?)의 전선 형성도 흥미로웠고요. 그 외에 아스타틴이 동료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역시 위험은 사람을 가깝게 묶어준다는 반증인 겁니다. 삭풍님께서도 캠페인을 통해 동료애나 전우애를 표현하고 싶다고 하시기도 했고요.

주석
  1. 카레발리나 섬 남부 해안에 서식하는 용호랑이 [돌아가기]
  2. 라틴어, 아니, 고제국의 언어[...]로 '충분하고도 넘치는구나' [돌아가기]
  3. 고제국어로 '더 이상은 없다' [돌아가기]
2010/03/22 15:33 2010/03/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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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하프엘프는 마치 오크들이 눈앞에서 달리고 있는양 망설임 없이 흔적을 따라갔다. 젖은 흙에 발자국 하나, 꺾인 나뭇가지에 걸린 천조각을 유심히 살피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쫓아가는 그의 실력은 따라가는 일행에게도 신뢰를 주었다. 그는 오히려 흔적이 너무 뚜렷해서 유인책이 아닐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면 신중할 수 있을 뿐 쫓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질이 잡힌 어려움이기도 했다. 아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쪽 산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향해 두어 시간쯤 걸었을까, 가는 길이 점점 오르막길이 되면서 그들은 나무와 풀섶이 빽빽한 작은 산의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턱쯤 와서 아스타틴이 멈추어서자 그의 시선을 쫓은 아라는 150m쯤 위에 인공 구조물을 발견했다. 작은 동굴을 2m 정도 높이의 조잡한 나무 울타리로 대충 두른 중간중간에 나무로 대충 기초를 쌓고 작대기와 가죽으로 위를 가린, 초소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성한 것들이 세 개 있었다. 초소마다 오크가 둘씩 들어가 있었지만, 아직 일행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흔적은 저곳으로 이어지네요.”

아스타틴은 동굴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는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신호한 후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어 나무와 덤불에 몸을 감추며 울타리에 다가갔다. 그런 그를 기다리며 아라는 초소를 어떻게 통과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최소한 바로 주변은 시야를 확보할 생각을 했는지 울타리에서 20m 거리까지는 나무나 큰 풀섶이 없었다. 숲 가장자리에서 울타리 문까지는 오크들이 다닌 흔적인 듯 풀이 얼마 없는 길이 보였다. 문 외에 딱히 들어갈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몸을 숨길 장애물이 없는 저 구간을 어떻게 눈에 띄지 않고 건너느냐, 그리고 일단 건너면 어떻게 들어가느냐. 정 방법이 없다면 그냥 정면돌파할 수도 있었지만, 안에 적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저쪽이 고지를 점거한 상황에서 왠만하면 피하고 싶은 선택이었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다. 마법사가 뭔가 쓸 만한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서 아라는 조용히 아스타틴이 상황을 보고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비탈을 되돌아 내려오는 아스타틴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간간히 보였다. 꽤 가까이 올 때까지 몰랐던 것을 보면 몸을 감추는 데는 익숙한 모양이었다. 일행이 모인 곳에 바싹 다가온 아스타틴은 작게 얘기해도 들리도록 손짓으로 그들을 불러모았다.

“저것들이 바보라서 다행이군요.”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초소에 있는 놈들은 자고 있어요.”

“잔다고?”

지카리가 확인하자 아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쩌면 울타리나 초소 꼴을 봤을 때부터 짐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돌아들어갈 곳은 있습니까?”

마법사 크세노바가 묻자 아스타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진 않았어요. 좀 더 들어가봐야…”

“가자.”

아라는 돌아서서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저것들이 자는 것이 사실이라면 들어가기는 의외로 쉬울지도 몰랐다.

“잠을 깨우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가죠.”

아스타틴이 말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까지 가서 울타리와 초소를 내다보았다. 역시 초소의 오크들은 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정말 함정은 아닐까? 하지만 어차피 함정이라 하더라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울타리를 통과하는 방법은 문을 통하거나 넘어가는 것밖에 없어보였다. 아니면 땅이라도 파야겠지만, 그럴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문은 울타리 전체와 마찬가지로 조잡해 보이기는 해도 굳게 닫혀 있었고, 밖에서 열려면 완력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오크들이 깨어나겠지.

“마법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마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좀 어렵겠지만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저 녀석들이 그걸 보고 있느냐겠죠.”

그는 지카리의 덩치를 한 번 훑어보고 덧붙였다.

“힘도 좀 들긴 하겠군요.”

“혹 안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아스타틴이 지카리에게 묻자 지카리는 울타리 쪽을 건너보더니 나무 밑에서 벗어나 천천히,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며 아라는 혹시 들킬까봐 가슴을 졸였지만, 다행히도 눈치를 챈 기색은 없었다. 물론 유인책이 아니라는 가정이었지만. 이윽고 다른 일행들이 따라가는 것을 보고 아라도 천천히 숲에서 걸어나와 울타리로 다가갔다. 적에게 보이는 위치로 나오자 갑자기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무엇 하나라도 잘못되면 이곳에서 그냥 죽을 수도 있었다. 아라는 그 두려움을 소중히 받아들여 품었다. 삶이 칼날 위에 한없이 위태로운 이 순간의 비할 데 없는 선명함을.

“깨어있는 녀석들이 조금 있네만…”

드래고니안은 돌아보지 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타리 너머에서는 거친 목소리로 전혀 모르겠는 말을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

속삭이는 소리가 살짝 쉭쉭거리며 지카리공은 조용히 덧붙였다.

“뚫고 들어갑니까?”

크세노바가 묻자 지카리공이 반문했다.

“다른 방법이 있나?”

“잠이라도 재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하며 아라니아카는 오크들이 잠들어 널부러진 초소를 흘깃 보았다. 활로 영원한 잠을 재워주고 싶었지만, 깨어있는 놈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가는 나머지를 깨우고 지원군을 부를지도 몰랐다.

“지카리공.”

조용히 부르자 지카리는 그녀를 돌아보며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둘이 깨어 있네.”

둘… 하나인 것만은 못했지만 해볼 만했다. 아직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갑자기 공격이 들어가면 대응을 못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둘을 한꺼번에 죽이면..”

드래고니안의 연녹색 눈이 그녀가 잡은 활을 향했다.

“할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그녀는 한 번 끄덕였다.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배운 대로 심호흡을 해서 손이 떨리지 않도록 심장박동을 가라앉히고 아라는 말했다.

“들어올려 주시겠습니까?”

드래고니안에 대해 들은 전설이 사실이라면, 또 그의 팔과 어깨에 불거진 힘줄과 근육을 보아도 아라를 어렵잖게 들어올릴 수 있으리라. 또 활을 쏠 만큼 흔들림 없이 받쳐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카리는 망설이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라는 마치 그가 자세를 낮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키가 커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깨에 타게.”

드래곤의 사절을 마치 계단에 오르듯 탄다는 점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목례하고 그의 무릎을 밟고 올라가 어깨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돌아보자 마법사는 손짓하며 뭔가 중얼거렸다. 공간이 잠시 일그러진다 싶더니 갑자기 세상이 느려졌다. 숲에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뒤에서 지켜보는 동료들도 마치 물 속에서 움직이듯 형편없이 느렸다. 그러나 마법사가 손을 내리는 속도는 정상이었다. 지카리가 그녀를 태운 채 일어나는 속도도 마찬가지.

땅이 멀어지자 아라는 순간 눈을 꼭 잡으며 지카리공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아, 높은 곳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엘프 그 미친 것들처럼 날짐승을 타고 하늘을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땅이 저 밑에 멀어지자 밑에 받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떨어져버릴 것이라는 오랜 공포감이 몰려왔다.

이윽고 그녀는 억지로 눈을 뜨고 느려진 세상을 내다보았다. 넓은 범위를 느리게 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 아마 그녀와 지카리가 빨라지는 주문을 걸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손을 진정시키고, 드래고니안의 비늘투성이 어깨를 잡은 손을 억지로 풀며 허리춤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냈다. 지카리공은 신기한 듯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마법인가? 썩 유쾌하진 않지만..”

크세노바는 뒤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효과는 1분 정도입니다.”

1분이면 충분했다. 잡동사니와 음식찌꺼기가 지저분하게 흩어진 안쪽 마당 가운데 한놈은 웃통을 벗고, 또 하나는 갑옷을 벗고 옷만 입은 채 치고받고 싸우는 두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울타리에 비스듬히 향하고 있는 반나신의 오크를 노려보며 시위에 화살을 매기고 아라는 긴 숨을 내쉬며 시위를 당겼다. 아마 주문의 영향권 밖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 같으리라. 호흡을 멈추고 그녀는 시위를 놓았다. 1m쯤 날아가고는 갑자기 느려진 화살의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따를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화살은 그녀가 노린 오른편 오크를 비껴갈 뻔했지만, 놈은 결정적인 순간에 동료에게 달려들다가 화살에 스스로 몸을 던진 꼴이 되었다. 맨가슴을 관통당한 오크는 뚝 걸음을 멈추더니 그윽..거리며 아주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투욱.. 소리는 늘어지면서 낮았고, 땅에 닿자 먼지가 느릿느릿 피어올랐다. 상대방 오크는 어안이 벙벙해서 멈춰섰다.

“Gurash?”

다시 운에 기댈 수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 편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아라는 이번에는 한 호흡 동안 정지하며 남은 오크 쪽을 겨누었다. 오크가 돌아서기 시작했을 때 시위를 놓자 화살은 등으로 천천히 파고들어갔다. 놈이 등을 둥글게 꺾으며 고개를 젖히고 소리없는 절규에 누런 이 가득한 입을 크게 벌리는 동안 화살은 가슴으로 뚫고 나오며 공중에 핏방울을 흩뿌렸다.

아라는 지카리의 어깨에서 울타리 너머로 몸을 날렸다. 다른 오크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빨리 안에서 문을 열어야 했다. 뒤에서 크세노바가 급하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다시 세상의 속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떨어지는 것은 싫었지만 땅이 가까워오자 안심이 되었다. 막 착지하려는 찰나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지면서 잠깐 기다려 지금은 아직

동굴 앞에서

폴짝 데굴데굴~ 니아 착지! 10점 만점에 10점이네. 왜 10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똑똑한 니아 과자 받아요~ 으흠, 뭔가 문을 열어야 했지? 아라는 내가 바보인 줄 알지만~ 니아는 사실 똑.똑.해. 정말루 정말로. 문 열어야 하는 거 알거든? 살금살금 하는 것도 알고. 옆에 오크 아저씨들은 계속 자네. 자, 목에 바람구멍을 뚫어줄게요. 자, 아저씨도. 그렇게 하면 어울리죠? 나 왔다고 일어나지 마요, 편하게 편하게 있어요.

영차영차. 빗장을 들면 문이 열리겠지. 자 조용조용, 죽은 아저씨들이 못 듣게. 지카리군같아가 문을 여는 동안 니아는 나머지 아저씨들도 재웁니다. 경비 서다 자면 안 돼요! 떼찌! 푸욱. 떼찌! 푸욱. 아, 이제 초소가 피투성이가 됐네. 다 아저씨들 때문이야. 피가 너무 많으니까, 꼭 피로 채운 주머니 같잖아. 또 찔러도 또 나오네? 와, 정말 많다. 니아가 좀 비워줄게요. 이제 시원하죠?

폴짝폴짝, 랄라랄라. 못생긴 오크 아찌 또 죽여줄까요? 예, 죽여주세요! 어머, 예의바르기도 해라. 어, 아저씨는 왜 깼어요. 더 자요, 네? 자, 이렇게 가슴에 칼을 박아주면 잠이 잘 오죠?

내려가니까 지카리군같아가 뿔났나봐요. 그럴 필요까지 있나? 있어? 있어? 재밌는데 지카리군도 해요~ 얼굴이 끈적끈적. 니아는 고양이세수 할 거에요! 니아아아옹 냐옹. 지카리군같아는 쳐다보지도 않네.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죽이니까 싫어? 죽이지 않고 사는 게 있어? 나에게는 선인 것이 다른 어떤 존재에게 악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선이자 악인 그 위대한 게임의 모든 것을 긍정하지 않고 당신이 자연의 사자라고 할 수 있어? 없어? 있..어?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예쁜아이? 알았어, 더 안 죽일게. 어차피 더 죽일 게 없어, 히잉. 내 화살이나 돌려줘요. 필요하단 말야. 죽일 게 나오면. 더 더 더.. 화살촉이 상한 것 같아. 다시 죽여버리고 싶네. 아저씨들 잠깐 살아나지 않을래요?

어? 목소리다! 다들 숨바꼭질 하네! 니아도 끼워줘요. 잘 숨을게요, 정말로! 술래 온다! 이쁜머리가 이번에는 좀 힘들대. 정말? 우릴 찾기 전에 우와아~ 잡아버리면 되잖아. 어, 술래가 화났어. 화나기 전에 말 좀 걸어주지. 따돌렸다고 이제 놀자고 쫓아오잖아. 나비 왔어? 니아 손 좀 닦을게. 슥슥. 니아는 똑똑한 아이야.

온다온다, 뛰어와! 오크다! 이쁜아이가 붕붕붕 퍼억-! 아프겠다. 또 있어! 여기 오크 가족 사나보다. 엄마 아빠 아기 오크. 오크 세 마리가 한 동굴 있어 아빠 오크 엄마 오크 아기 오크~

어, 조용하라고요 지카리군같아? 나 소리냈었나? 미안미안~ 조용할게요. 쉬잇. 어, 손가락에 피 있다. 빨가면 사과 사아과는 맛있어 먹어봐? 먹어봐? 할짝 우에엑! 퉤퉤. 오늘의 교훈, 아빠오크피는 먹지 맙시다. 하지만 아직 엄마오크 아기오크건 못 먹어봤으니까, 맛있을지도 몰라! 덥지도 차지도 않고 따악 맞으면 되겠지? 따악 다 맞아볼래요?

퉁! 어, 공기가 흔들려. 저 오크는 왜 떨어? 추워? 무서워? 난 항상 무서운 걸. 아라 그 멍청한 미친 계집이 나한테 다 버려버렸어, 그 많은 목소리와 두려움들을. 이 안은 조용하지 않아. 조용하지… 않아… 무서워.

키라키라키라키라.. 술래가 또 온다. 지카리군같아가 그래, 강! 행! 할 수밖에 없대. 강행! 강행! 죽이자! 오크아저씨들 영원히 안 무섭게 해줄까요? 춥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게?

쿵쿵쿵쿵 쿵쿵쿵쿵. 죽으려고 달려온다. 심장이 죽으려고 뛰어. 지카리군같아가 도끼를 들어요. 와아, 산이 움직여. 폭풍우가, 해일이 앞을 막았어. 콰앙! 콰앙! 산과 번개와 바다가 내리치면 무거울 거야, 그치? 눈물날 만큼 아플 거야. 혼자 갇혀버린 어둠 속에서 울부짖을 만큼, 아파 아파 아파…

눈 감으래. 눈 감으래! 깜짝 선물 줄 거야? 언제 뜨면 돼? 언제 언제?

눈 감아도 세상이 번쩍여요. 하늘이 갈라졌어요. 오크가 아야 해요. 어어? 눈이 아야했나봐. 히히. 하하하하하. 안아프게 해줄게요. 눈 아야 고쳐줄게요. 니아가 침 바르면 다 나아~ 아니면 화살침 한 대 콰악! 놔주면. 죽으면 다 낫잖아, 응? 그래도 되죠?

아빠 오크는 피투성이…

산이 무너져내려요. 산사태가 포효하며 달려가서 오크들을 삼켜요. 크아아아아.. 우직. 철퍽. 퍼억. 어? 오크가 둘이다. 위만 있는 오크 하나, 아래만 있는 오크 하나. 위만 있는 오크 얼굴은 놀란 것 같네요. 놀랐지, 응, 놀랐지? 용용용용 용의 조각이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지? 자기는 파리 하나 못 죽일 것처럼 성인군자연하던 저 위선자한테 한 방 맞았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본원적인 공포에 심장이 벌렁벌렁하면서 눈물까지 찔끔 났지? 응? 내가 그러니까. 내가 그러니까!

엄마 오크는 죽었어…

피융 피융- 나는 정의의 니아시다. 어엇? 배를 붙잡고 쓰러지네요. 배아파? 아프다고 내장을 꺼내면 못써. 그럼 죽잖아~ 히히. 죽는대! 죽는데!

덥썩! 나비가 나가신다. 우적우적. 맛있쪄 나비? 와작! 꿀꺽. 잘도 먹네 이쁘기도 해라~ 음식 뺏지 말라고 아앙 물고선 눈 굴리는 것좀 봐. 걱정마요 나비~ 천천히 먹어요. 아무도 안 뺏으니까.

붕붕붕 우웅우웅. 이쁜아이가 작대기를 돌리니까 바람이 나네요. 이쁜머리가 손을 요렇~게 하니까 공기가 오크를 벌벌벌 때려요. 착한 아이는 사이좋게 놀아야지! 자, 이렇게. 피융. 이번엔 목이 갈라졌네. 쿠웅쿠웅. 지카리군같아가 오크를 가루로 빻아요.

아기 오크는 너무 아파요…

이제 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없어, 없어.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면 죽여줄게요, 안 아프게. 나비가 퉷퉷 머리카락을 뱉네요. 피도 맛없고 털도 맛없나봐.

이제는 조용해요. 내가 가지고 싶은 그런 고요가 이곳에는 가득해요. 살점이랑 뼛조각이 흩어진 이 피투성이 진흙 위에 그냥 누워서 이 평화에 묻히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그건 정상이 아니니까.

용의 파편 아저씨는 이제 슬퍼 보이네요. 다른 인연으로 만나자고, 그때는 죽고 죽이지 말자고. 만나긴 어떻게 만나? 죽었는데. 죽였는데. 이제는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어요. 깨어나면 슬퍼서 엉엉 울지도 몰라요.

샤나야…

아야! 아야! 아파요.

아파요…

내가 미쳤다고, 이쁜아이? 안타깝다고요, 지카리군같아? 내가 미쳐? 미친 건 아라야. 아라! 견딜 수가 없어서 날 어둠으로 내쫓은 그 미친년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어. 난? 그녀가 참을 수 없는 모든 걸 끌어안고 언제까지 혼자 걸어가? 샤나, 엄마는 어떡해?

놀 사람만 있으면 이 안은 조금은 조용해져요. 니아는 똑똑하니까, 미치지 않았으니까 위험하고 중요한 일도 할 수 있어. 므우루를 찾자. 므우루! 므우루! 가자 이쁜머리, 이랴!

동굴이 휘잉~ 한숨을 쉬어요. 외롭고 차갑고 더러운 이 바람을 따라가면 그 끝에 내 안의 목소리들을, 하 많은 아픔을 잠재울 것이 있을까요. 견딜 수 없는 것을 마침내 견디게 될까요.

“가시죠.”

가요, 이쁜머리. 내려가요. 너와 나와 모두의 영혼에 있는 그 동굴보다 한결 자비로운 저 어둠 속으로. 아아, 내려가요. 저곳은 조용할지도 모르니까.


기묘한 일행, 대륙을 가로지르며 길고 긴 하루를 보낸 다섯은 땅에 널부러진 시체를 지나 동굴에 발을 들여놓는다. 불신과 불안, 불확실성 속에 토끼굴의 문턱을 넘은 그들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이다.

소감

이것으로 안힐라스 1기 캠페인 1화: 기나긴 하루의 기나긴 소설화가 끝났습니다. 나중에는 랜돌프 외전까지 있지만 그쪽은 먼저 본편부터 하고 써야겠군요. 1화 (7)과 (8)은 분량도 그렇고, 시점상 짝을 이루기도 해서 함께 올렸습니다. 추적자로서 아스타틴의 능력이 드러난 점이 마음에 들었고, 아라의 궁술, 크세노바의 마법, 지카리의 힘 등 일행의 장기가 전반적으로 잘 나타난 대목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대목의 플레이는 전술적으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해가서 즐거웠었죠. 활 쏘는 거나 시간마법의 효과 묘사 등이 신경쓰이면서도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투는 누구 시점으로 할까 좀 고민하다가 결국 니아로 낙착을 봤습니다. 쓰기 귀찮아서 자포자기한 걸지도(..) 모르지만 니아는 일행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또 궁수로서 멀리서 전투를 조망할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해서 시점인물로 가장 적합하기는 했습니다. 게다가 한 번쯤은 이 인물의 머릿속을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자주 들여다보는 건 정신건강에 바람직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의식의 흐름밖에는 이 인물의 시점을 활용할 길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해봤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정보전달 면에서는 좀 명확성이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그런 점도 이 기법의 재미겠지요.

겉으로는 마냥 헤헤거리는 니아가 내면은 의외로 어둡다고 무랑님이나 오체스님이 말씀하신 것도 기억에 남네요. 사실 저도 좀 의외였습니다만,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니아라는 인물은 원래 인격인 아라가 노예생활과 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서 생겼습니다. 아라가 추방한 감성과 충동성, 상처와 취약점의 혼합인 니아는 이성 없이 감성만 있는 불완전한 파편이고, 아라 역시 분노 외에는 감성이 별로 안 남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상처를 회복하거나 제대로 성장하고 변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아라에 대한 니아의 원망은 근거가 있습니다.1 그런 아라가 상처입은 자신을 직면하고 극복해야 그녀의 존재는 완전해지고 회복도 하겠지요. 그건 니아에게는 개체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온전한 삶의 재개이겠고요.

결국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외면의 이야기와 내면의 이야기가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겉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사건의 나열일 뿐이지만, 인물이 변하는 그 내면의 여행이 함께한다면 사건은 의미가 생기고 이야기가 되지요. (이론적 기반이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 생각일 뿐) 그래서 동굴은 물리적 동굴이지만 동시에 존재에 난 구멍이며 마음의 어둠이기도 하고, 일상의 공간에서 혼돈으로 가는 토끼굴의 입구이기도 합니다. 그 너머에서 우리의 일행이 어떤 이상한 나라를 지나 결국 자신의 핵으로 돌아올지 저는 그들의 동행으로서, 그리고 서기로서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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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물론 이 설정은 다중인격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는 별개입니다. 다중인격 자체가 북미 외에는 거의 기록이 없는, 진위 자체가 논란이 있는 병이기도 하고요. [돌아가기]
2010/03/21 15:52 2010/03/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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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스터드젤리 2010/04/18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카리가 아주 멋있는 캐릭터네요.

    • 로키 2010/04/21 2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행의 듬직한 어른이랄까요 ㅋㅋ 대미지 나오는 거 보면 아주 가슴이 떨리더라고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MooRang 2010/04/21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음..[..]
      지카리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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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후, 허탈하고 얼굴이 굳은 채로 그들은 페어리 마을로 가는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부탁받은 아카마카 열매는 구하기는 했다, 비록 반으로 쪼개진 채 아사나스의 안장주머니에 처박혀 있었지만. 열매는 따서 집어넣은지 얼마 안 되어 갈라지며 지독한 악취를 내뿜었고, 마법사가 마법으로 바람 같은 것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하프엘프가 그랬듯 다들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건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마법사가 사람 사냥꾼을 돌아보며 물어보아도 사냥꾼 역시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마법사 역시 덩달아 고개를 저으며 한숨지었다. 옆에 하프엘프는 아직 창백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게 장난이라면 이 작은 친구들은 조금 심한것 같군.”

드래고니안의 말에 아라도 완전히 공감했다. 돌아가자마자 므우루에게 항의할 생각이었다. 이런 일에 사람을 끌어내다니, 노스탤지아 놈들! 아사나스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아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꼭 쥐어졌다.

그 순간 쿠구궁! 하는 폭음이 숲을 뒤흔들더니 이내 나무 위로는 연기가 올랐다. 정면, 분명 페어리 마을 방향이었다. 나무들의 어머니여…

빨라진 심장박동에 맞추어 걸음은 어느새 질주가 되어 있었다. 아사나스가 옆에 나란히 달리는 동안 놀란 동료들이 쫓아왔다. 바람을 타고 기묘한 괴성 또한 들려오자 더 지체할 수가 없이 아라는 달리며 그대로 아사나스의 등에 올라타 무릎으로 박차를 가했다. 양옆으로 나무둥치와 풀섶이 무서운 속도로 스쳐갔고, 얼굴을 때려오는 나뭇가지를 피해 그녀는 아사나스의 검은 목 위로 몸을 낮게 숙였다.

마을이 가까워 오면서 공기중에 연기가 짙어졌고, 탄내가 났다. 두 인간이 고함치듯 주고받는 대화가 등뒤로 멀어져갔다. 달리며 아라는 활을 손에 들고 화살을 시위에 매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폭음이 몇 번 더 땅을 뒤흔들었지만, 아사나스는 그럴 때마다 잠깐씩 속도를 늦추어 균형을 잡으면서도 줄기차게 마을로 달려갔다.

나무가 끝나고 아까 전의 꽃밭이 나오자 아사나스는 우뚝 멈춰섰다.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분노인지, 놀라움인지, 둘 다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화사하던 페어리 꽃밭은 전부 불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날개가 뜯긴 페어리 시체가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고, 탄내와 폭약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찔러왔다. 살아남았지만 거의 정신이 나간 듯한 페어리 몇 마리만 '므우루'라는 이름 외에는 알 수 없는 말을 울부짖으며 배회했다.

“이럴 수가!”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한 마법사의 탄식이 들렸다. 가뜩이나 핼쓱한 하프엘프는 그저 경악해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노예사냥꾼은 살아남은 페어리에게 달려가 그들의 언어로 뭔가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지옥도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간 아라는 바닥에 페어리보다 훨씬 큰 낯선 시체를 몇 구 발견했다. 땅딸막한 체구와 불끈불끈한 근육, 마지막 단말마에 벌린 입에서 삐져나온 긴 엄니에서 그녀는 세계의 어머니를 살해한 저주받은 족속, 오크를 알아보았다.

지카리공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불탄 들판과 페어리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비늘투성이 얼굴은 한없이 슬퍼보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페어리들과 뭔가 열심히 얘기를 하던 노예사냥꾼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오크 시체 하나를 밟았다. 무력한 분노일 뿐이었다. 너무나도 많이 죽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시체를 밟을까봐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공포와 죽음과 화염의 냄새, 팍팍한 재가 숨쉴 때마다 폐에 몰려들었다. 순간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어둠이 손짓하는 동안 오래 전의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지금 얘기하듯 들려왔다.

저주받은 종족의 딸이 벌레같은 수명을 이어 이곳까지…

“제발… 지금은…”

아라는 숨이 가빠지면서 억지로 의식을 붙들었다.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어질어질했지만, 지금은 정신이 끊어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을 쫓아야 했다. 눈을 꼭 감은 채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을 가까스레 내리눌렀다. 사람 사냥꾼이 페어리들과 나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귀기울이며 잠시 기다리자 가까스레 어둠이 물러가고 의식이 또렷해졌다.

“제기랄… 인간들이다.”

조심조심 눈을 뜨자 연기에 흐릿해진 햇살이 눈을 고통스럽게 찔렀다. 대화를 마쳤는지 랜돌프 에디우스는 일어서며 내뱉듯 말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오크들을 끌고왔다고 하는군. 므우루는 그들에게 끌려간 모양이다.”

“인간…”

옆에서는 아스타틴이 낮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남은 페어리들을 대피시켜야 해.”

노예사냥꾼이 말했다.

“지도자가 없이 이들끼리 그냥 이곳에 방치해두는건 위험하다.”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은, 그냥 두면 다시 이런일이 벌어지겠지.”

지카리공은 손을 저어 주변의 파괴상황을 가리켰다. 날개가 뜯긴 채 죽은 페어리도 있었지만, 온전한 모습의 시체가 불탄 꽃 앞에 누워있는 모습도 보였다.

”.. 페어리들은 근원이 되는 꽃이 다치면 자신도 위험해지지.”

하프엘프 아스타틴이 설명하듯 말했다.

“페어리들을 대피시킨다고 해도..”

“에미넴 숲 남쪽까지 위험하다면 어디로 대피시킨다는 말이냐?”

말하며 아라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이만한 파괴를 저들이 자행해도 전에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미가 되어 딸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저 한몸 살아남아 싸우는 것뿐.

이 싸움은 언제까지인가? 다시 시야의 가장자리가 어두워오자 그녀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자신을 유지하려고 버텼다.

“돼지같은 놈들을 모조리 죽여 비료로 써주겠다.”

에디우스는 이를 드러내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크세노바를 돌아보았다.

“마법사, 마법사!”

크세노바를 보는 그의 시선은 간절했다.

“이들을 우리가 돌아올때까지 숨겨둘수 있는 마법 같은건 없을까?”

“전 그런 쪽에는 약해서…죄송합니다.”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고, 다시 눈꺼풀 뒤의 어둠이 몰려가자 아라는 상황을 생각했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있었고, 아직은 싸울 수 있었으니 지고 짓밟히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근처에 노스탤지아 거점이 있다면 그곳으로 일단 피하는 것도 좋겠지.”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갈 만한 곳이 있는가?”

“멀리 가지 못했을 터, 쫓으면 잡을수 있지 않겠나?”

지카리공의 지적에 아라는 끄덕였다. 천천히 계획의 모습이 머릿속에 잡혀가고 있었다.

“페어리들을 저 자가..”

그녀는 노예사냥꾼을 가리켰다.

”..데려가는 동안, 우리는 패스파인더와 마법사의 도움으로 므우루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과연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요.”

아스타틴의 표정은 냉소적이었다. 사실 아라도 심각한 의문이었지만, 남은 페어리들을 지키면서 므우루를 구하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남은 것은 과연 두 발 짐승을 잡는 저 사냥개, 다사케타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뿐.

“에미넴 숲의 기지라면..”

아스타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스로리엘이로군요. 엘프들의 중심지와 가깝죠. 그들이라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마치 옛 기억을 떠올리듯.

“받아줄 겁니다. 반나절 정도 걸리긴 하죠.”

“너 혼자 데려갈 수 있겠는가, 다사케타?”

아라는 노예사냥꾼을 쏘아보았다. 저 연약한 생명들을 이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에디우스 이자가 페어리들을 위하는 마음은, 그들을 위한 분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데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에미넴 숲 안에서라면 가능하다.”

노예사냥꾼은 당당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아라는 짧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들의 언어를 알고, 필요하다면 지시도 내릴 수 있겠지.”

페어리들 대피에 필요한 것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어쩌면 신뢰도 받을 수 있는 그 능력이었다. 므우루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대피 작전은 힘이 아닌 머리를 쓰는 작업이었다. 페어리와 소통할 수 없는 나머지 동료가 따라가봤자 병력 분산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배신한다면… 페어리들을 위하는 것 같은 마음이 거짓이었다면…”

그녀는 에디우스 앞으로 다가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너를 추적하겠다.”

옆에 선 아사나스가 같이 노예사냥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나를…?”

다사케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비웃음을 띄었다.

“에미넴 숲에서 감히 이 나를 추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것이냐? 웃기는군.”

“평생 편하게 살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마음을 정하니 차라리 편했다. 한 번, 이 일에 대해서는 이 자를 믿으리라. 그리고 그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 작자 아니면 그녀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면 되었다.

”.. 에미넴 숲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당신만은 아니죠.”

아스타틴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지카리공이 그들 사이에 육중한 팔을 밀어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가 아닌 것 같네.”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았다.

“엘프들따위의 감정도, 너의 불신도 신경쓸 가치가 없다.”

노예사냥꾼은 거침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녀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겠어. 네놈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나는 간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아서며 한 말은 경고이며, 약속이었다.

“나는 자네 과거가 어떤지 모르네.”

지카리 쿤 카타가 말했다.

“자네 말이 진심이기를 믿을 수밖에.”

3m짜리 용인이 하는 말은 어쩌면 아라 자신이나 아스타틴의 위협보다 훨씬 강력하리라. 효과가 충분하기를 바라며 아라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패스파인더, 앞장서서 흔적을 쫓도록.”

“서두르죠.”

아스타틴은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흔적을 보니 아직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지카리공께서 뒤를 지켜주시겠습니까.”

아라의 말에 드래고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맡도록 하지.”

그녀는 이번에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가자, 마법사.”

지카리공보다 앞서서 아스타틴의 뒤를 쫓는 그녀의 뒤를 크세노바는 바짝 따랐다.

패스파인더를 쫓아 들판을 떠나기 직전, 아라는 살아남은 페어리를 불러모으는 노예사냥꾼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저자가 배신한다면 그때는 노스탤지아고 뭐고 상관하지 않았다. 손은 어느새 활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너의 배신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사케타.'

어깨에 묵직하고 따뜻한 손이 와닿자 그녀는 지카리공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네만.”

그의 눈빛은 산의 뿌리처럼 깊고 견고하면서도 대지의 품처럼 따뜻하고 인자했다.

“지금은 나아갈 일을 생각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하네.”

그래, 그랬었다. 지금은 할일이 있는 때였고, 다가올지 모르는 일은 그때의 일이었다. 불신과 원한에 걸려넘어져 오늘의 일을 그르치는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아라는 목례해서 감사를 표하고 선두의 패스파인더를 쫓아갔다. 이 지상 위의 지옥을 만든 자들을 쫓아서.

소감

여기서도 축약이 좀 나오는군요. 원본 로그에서는 아카마카 열매를 가져오는 부분은 그냥 RP를 했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회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외에 크세노바가 안힐라스에 도착해서 노스탤지어 지도부를 소개받는 장면도 알쿠알론데 장면 중의 회상으로 축약했지요. 어떤 장면을 그대로 쓰고 어떤 장면을 축약할지는 늘 판단하기 쉽지는 않습니다만, 대체로는 너무 많이 잘라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쓰는 사람으로서 자꾸 편해지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시간 순서대로 쓰는 것이 원칙, 회상 등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사용하는 변칙이지요.

이 장면에서는 아라하고 랜디의 대립이 RP할 당시에도, 소설 쓸 때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입장이 다를 뿐이지 저것들 완전 동종혐오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만... 한편 랜디가 페어리들을 무사히 대피시킨 일에 대한 극적 뒤처리는 본편 중에는 못한 감이 있어서 2화와 3화 사이에 배치한 월광 외전 후속을 이어가면서 처리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카마카 열매를 가져오라고 시킨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삭풍님과 합의를 봤습니다. 헤어진 후 랜디는 어디서 뭘했나(..) 하는 외전에 나옵니다. 그거 소설화는 2화 분량을 한 다음에나 나올 것 같습니다만, 로그는 삭풍님 블로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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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1 13:44 2010/03/2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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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프는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끼며 나무 사이로 말을 몰았다. 제기랄, 마법 이동은 언제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 뒤집힌 공간과 엉망이 된 시간감각 속에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정상 공간으로 돌아오면 수천 리 떨어진 곳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래도… 돌아오니 좋기는 했다. 로슬로리엘 근처는 이전에 사냥을 하던 터이기도 했으니 익숙한 곳이었다. 완만하게 경사져 올라가는 땅이나 따뜻하게 부서지는 봄 햇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시냇물과 머리 위에 새울음이 모두 익숙했다. 비루한 생활을 유지하려 아둥바둥하던 그 각박함에서 벗어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혼자 지내던 시절의 기억은 가슴아플 정도로 생생했다. 남쪽으로 말을 달려 점점 낯선 땅이 나오면서 그는 말없이 그 시간에 작별을 고했다.

얼빠진 동료들과 함께 말을 (아까 그 정신나간 여자는 주인을 한입에 잘아먹을 수 있는 맹수를 탔지만) 달린지 반나절쯤 되었을까, 그들은 오른편에 바위투성이 계곡을 내려다보는 언덕길을 나란히 지나고 있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안내한, 여자가 아닌 게 아까운 귀엽게 생긴 하프엘프 꼬마가 뭔가 표지나 표식을 알아보았는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탔고, 꼬마가 하는 대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상한 다크엘프 여자는 내릴 필요도 없이 그 검은 맹수를 타고 앞서 내려갔다. 어느새 또 혼이 나갔는지 눈을 감고 흥얼거리는 주인을 태우고 지나가면서 맹수는 랜디에게 마치 경고하는 듯 노란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말이 신경질적으로 히힝거리며 버티자 랜디는 고삐를 세게 당기며 억지로 끌고갔다. 어차피 짐승 다루는 재주 같은 건 없었다. 자꾸 짜증나게 하면 확 죽여버리지 뭐.

계곡 바닥에 내려와 개천을 따라 이동하면서 랜디는 곳곳에 꽃이 눈에 띄었다. 동백과 산거울, 히아신스가 풀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모습에서 그는 이제 페어리 군락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 귀찮은 날파리 녀석들 때문에 이 꼴이 되고도 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젠장.

계곡이 끝나고 다시 땅이 평평해지는 숲으로 개천을 따라가자 멀리서 벌떼 소리와 비슷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다가가면서 점점 커졌다. 저 앞에 낮은 구릉 너머에 날리는 색색의 빛무리가 랜돌프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도착했는가.

“이젠 아예 숨어 있지도 않는군.. 정신나간 녀석들.”

그는 작게 피식 웃었다. 언제 봐도 엉뚱한 녀석들이었다, 페어리는. 위험 같은 건 자각을 못하는 건가.

“원래 이런 겁니까?”

다른 녀석들보다는 그래도 그를 사람같이 대하는 여리여리하니 계집애처럼 생긴 마법사가 물었다. 여러 해 전에 붙잡았었던 엘프도 금발을 저렇게 기른 여자가 하나 있었다. 끌려가는 내내 심장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서럽게 울다가 급기야 그가 안 보는 사이 개천에 뛰어들어 자살해 버린… 그 머리가 물길을 따라 금빛 구름처럼 퍼지던 기억을 떨쳐버리며 랜돌프는 대답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각오해두는게 좋겠지.”

성가시고 멍청한 녀석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입꼬리가 치켜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위험해도 마냥 즐겁기만 한 그들의 웃음은 더러운 세상에 대한 도전인 것만 같았으니까. 바보같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말이다.

“괜찮은 건가…”

마법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묻혀버렸다. 무수한 날갯짓과 수많은 목소리가 재잘거리는 소음 속에서 랜돌프는 그들의 언어로 '거인'이라는 말을 연신 들을 수 있었다.

둔덕을 올라가 그 위에 서자 페어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눈앞에 선한 천화의 계곡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숲의 나무들이 경비병처럼 두른 들판에 핀 각양각색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취할 정도로 끼쳐왔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가운데에 무수한 페어리가 뭉쳐있는 모습이었다. 노랑, 흰색,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의 빛무리가 3m 높이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그대로 빛의 탑이었다. 자세히 보니 탑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

서둘러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간 후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요정들이 일제히 떠드는 소리와 수천 개의 날개가 한꺼번에 붕붕거리는 소리가 몰려왔다.

“시끄럽다, 날파리들!”

그는 그들의 언어로 소리질렀다. 시끄럽다는 것은 페어리말을 배우면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배워야 했던 표현이었다. 날파리는 정신건강을 위해서였고.

“말은 하나씩, 하나씩!”

별 효과가 없는 듯 페어리들은 계속 떠들어댔다. '용'이라는 말도 들렸고, '용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짜증나는 날파리들!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왠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말로만 듣던 드래고니안?”

마법사 녀석이 옆에 와서 서며 말했다. 아, 드래고니안이라면 그 용인족… 랜디는 더 흥미가 동해서 페어리들이 둘러싼 형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 속에서는 비늘이나 가끔 발톱이 보였다.

“용.. 거인.. 인간?”

하는 말을 듣고 용인지, 거인인지, 인간인지 하는 의문이라고 짐작한 랜디는 말했다.

“다. 용, 거인, 인간.”

주변이 갑자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시끄럽게 떠들던 페어리들의 시선은 이제 랜디와 그 일행에게 향했다. 페어리 하나가 빛의 탑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 뒤의 노란 눈도 랜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둘 페어리가 그들에게 날아오면서 드래고니안의 모습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서서히 드러났다. 단단한 비늘이 둘러싼 깜박이지 않는 눈, 비늘로 뒤덮인 얼굴, 머리에서 시작해 목을 따라 내려오는 칼날 같은 긴 돌기, 장대한 체구에 비늘이 햇살에 반짝이며 물결치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근육과, 한 번 휘두르면 뼈 같은 건 우습게 박살낼 수 있을 꼬리… 마음만 먹으면 바위라도 부술 수 있는 힘, 한 번 분노하면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을 자연재앙 같은 위력이 3m 키의 근육과 힘줄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압도적이군…'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랜디는 용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간' '다크엘프' '하프' 같은 소리를 떠들며 일행 주변을 맴도는 귀찮은 파리떼와 그런 그들에게 이쁘다, 놀자며 잡으려고 폴짝거리는 바보 다크엘프는 어쩔 수 없이 신경쓰였지만.

“당신이 마지막 동료로군요?”

마법사는 손을 내밀며 드래고니안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주변에서 쉴새없이 떠들며 날아다니는 페어리에 눈길을 던지고 그는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좀 그렇지만…여하튼 반갑군요.”

날아다니는 페어리떼를 조용히 바라보던 드래고니안은 새로 도착한 일행을 노란 눈으로 한 번 훑어보더니 마법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용인의 입이 움직이며 날카로운 이빨이 무수히 드러나자 순간 움찔한 랜디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미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들이 명령서에 있던 동료들인가 보군. 반갑네.”

“좀 복잡한 관계 같지만 일단은 동료죠.”

드래고니안은 마법사의 손 정도는 우습게 으스러뜨릴 수 있을 우악스러운 앞발로 가볍게 맞잡았다. 옆에서 페어리들이 뭐라고 계속 조잘거리자 랜디는 요정어가 딸리는 것을 느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질리지도 않는 녀석들이군. 좀 조용히 하지 못하겠어?”

페어리들은 살해당한다느니 어쩌느니 깔깔거리며 흩어졌다. 원래 언성이란 언어를 따지지 않게 마련이다.

“나는 지카리 쿤 카타라고 하네.”

비교적 조용해진 와중에 드래고니안은 사람 머리만한 주먹으로 근육질의 강인한 가슴을 쿵 소리가 나도록 쳤다.

“듣던 대로 독특한 일행이군.”

드래고니안의 눈가가 웃는 듯 주름졌다. 그가 마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쫓겨갔던 페어리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어 다시 조잘대는 동안 랜디는 대체 노스탤지아 놈들은 왜 이곳으로 그들을 부른 것일까 궁금했다. 크세노바와 지카리도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페어리에게서는 제대로 답이 안 나오고 지카리가 받은 명령서도 랜디와 일행이 받은 명령서와 대동소이한 모양이었다.

페어리떼가 '축제' 소리를 연신 해대며 떠들자 랜디는 혹시 거울의 섬에서 여왕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고위 페어리는 다른 종족의 언어도 알고 훨씬 정신도 제대로 박혀있으니 말이 통할 것이다.

“여왕님 어디? 여왕님이.. 노스탤지아..”

'연락'이라는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랜디는 입 앞에 손을 움직이며 말하는 모습을 만들다가 페어리들을 가리켰다.

“말 안했어?”

그 말에 이카무카가 필요하느니 어떻느니 떠들던 페어리들의 조잘거림에는 이윽고 '므우루'와 '패달랭이꽃'이라는 말이 자꾸 나왔다. 곁눈으로는 미친 다크엘프가 뭔가 엄청 황송해하며 드래고니안과 악수하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는 비늘투성이에 키가 3m는 돼야 사람처럼 대해주나?

“므우루! 므우루!”

므우루를 외치며 페어리 한 떼가 우우 나무 사이로 몰려가는 동안 어디선과 음악이 들려왔다. 돌아보자 그 엘프 튀기 녀석이 나무 하나에 기대앉아 류트를 조율하고 있었다. 할일없이 몰려다니던 페어리 빛무리가 하나하나 호기심에 겨워 하프엘프를 중심으로 꽃이나 풀잎에 내려앉았고, 어차피 '므우루'를 찾으러 몰려간 녀석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으니 랜디도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 구경했다. 다른 일행들도 풀밭에 앉거나 서서 지켜보았다.

조율을 마친 하프엘프는 고개를 들고는 갑자기 관객이 생긴 것에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페어리들은 일제히 '해~!'라며 환호성을 울렸다. 랜디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하라는데? 할일도 없는데 들어보자고.”

하프엘프는 여기까지 오면서 랜디에게 던지던 경멸스러운 시선도 잊을 만큼 긴장해 있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잠시 머뭇거리던 하프 녀석이 연주를 시작하자 부드럽고 풍성한 음색이 꽃밭을 감쌌다. 그 속에는 햇살 속에 뛰노는 냇물의 웃음소리가, 잎사귀를 때리는 따뜻한 빗물이, 밤에 읊조리는 외로운 노래가 있었다. 들으면서 랜디는 그가 가장 자유롭던 시절, 하나의 포식동물로서 죽고 죽임의 순환 속에 그저 존재했던 때로 되돌아갔다. 혼자 뛰어들어 목욕하던 달빛이 시원한 강물, 숙소에 몸을 누이면 바람에 춤추던 나무들의 바스락거림, 천화의 계곡에 가득했던 그윽한 꽃향기가 이 순간 그와 함께했다.

어느새 들판의 페어리들은 꽃 위에 자리를 잡고, 혹은 공중에 뜬 채 연주를 듣고 있었다. 몇몇은 음악에 맞춰 빙빙 돌며 그들만의 춤을 추고 있었다. 거대한 드래고니안 지카리도 제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음악에 빠져 있었고, 그의 어깨나 머리에 어느새 와서 앉은 페어리들도 그를 따라하듯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마법사는 작은 미소를 띈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고, 무표정하게 앉은 다크엘프는 눈빛이 가끔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눈을 감고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엘프, 아스타틴이라는 그 꼬마의 표정이었다. 짜증스럽고 사람을 멀리하는 데다 인간이라면 바로 아르릉거리던 저 건방진 꼬마놈은 류트를 잡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입술에 띈 가볍고 슬픈 미소를 띈 채 아무 경계도, 걱정도 없이 음악에 빠져든 그 모습에 랜디는 문득 저 녀석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영원히 동료로서, 혹은 친구로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 그러기에는 가로막힌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음악 속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필요없었다. 그저 귀와 영혼을 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뒤편에서 조용한 날개소리가 웅웅 다가오자 랜디는 몸을 돌렸다. 아까 날아갔던 페어리들을 이끌고 푸르게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날개가.. 하나, 둘, 셋.. 열세 장이었다. 천화의 계곡에서 가장 높은 페어리가 날개가 여덟 장이고 페어리 여왕이 열여섯 장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랜디는 이쪽이 꽤 대단한 페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 튜니카를 날리며 그 고위 페어리—아마도 므우루—가 지나가자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연주하는 아스타틴을 보며 랜디는 그가 연주를 멈출까봐 잠시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므우루와 따르는 페어리들의 조용한 접근은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의 방해도 되지 않았고, 페어리들이 가만히 자리를 비켜주는 가운데 므우루는 음악에 이끌린 듯 아스타틴 앞으로 가서 꽃 하나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마지막 음의 메아리만을 남기고 음악이 천천히 잦아들자 청색으로 빛나는 페어리는 손을 들어 갈채를 보냈고, 다른 페어리들도 박수치며 환호했다. 눈을 뜬 아스타틴은 앞에 모여든 페어리들의 수와 그들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악사님.”

그에게 인사하며 페어리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축제를 이렇게 훌륭한 음악으로 축하해 주셔서.”

“아, 아닙니다..”

아스타틴이 말을 더듬는 동안 므우루는 몸을 돌리며 일행 모두에게 공통어로 말했다.

“모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용의 파편 또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을 뜬 지카리는 므우루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갑네, 작은 친구.”

므우루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 친구와 가족들이 폐를 끼쳤나보군요.”

주변의 페어리들이 그렇다느니 안 끼쳤느니 떠드는 소란 위로 다크엘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될지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축제의 준비죠.”

므우루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떤 준비입니까?”

“곧 있을 4월의 축제는 페어리들에게 가장 큰 축제중 하나랍니다.”

푸른 페어리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살짝 떠올랐다가 도로 내려오며 꽃에 발을 딛었다.

“손님들에게 어려운 것을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퍽이나 한가하시군요, 요정이여.”

다크엘프는 고개를 저었다.

“오크의 활동이 늘었고 에미넴숲을 이미 인간들이 침탈하고 있건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랜디에게 향했다. 재수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축제라니.”

“죄송해요.하지만 불안해서요.”

므우루의 눈썹이 약간 처지자 랜디는 다크엘프에게 새삼 짜증을 느꼈다.

“불안한 분들 치고는 즐거워 보입니다만.”

다크엘프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뾰족하게 굴지 마.”

랜디는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대체 뭘 바라는 것인가, 저 여자는. 다들 저처럼 뻑뻑하게 굴다가 미쳐버리라고?

“저녀석들에게 있어서 축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다. 그런 행사를 앞두고 평소와 달리 뭔가가 느껴졌다면 불안해하는게 당연한 것이다.”

천화의 계곡에서 페어리의 여름 축제를 보았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 웃음과 음악, 춤의 향연에 랜디는 어떤 좋은 술을 마셨을 때보다도 기분좋게 취했었고, 세상에 이런 순수한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었다.

제길, 천화의 계곡이 위험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있던 그 멍청이가 맞군.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랜디를 흘깃 돌아보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더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에미넴 숲에서 아카마카란 열매를 좀 구해다주셨으면 하는 간단한 일입니다.”

“열매..?”

길쭉한 모양새에 가시가 삐죽삐죽하다는 설명에 랜디는 장에서 한 번 만나 술을 마신 늙은 사냥꾼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시가 뾰족한 아카마카 열매는 까기도 어렵고 맛도 지독하게 쓰다고… 별로 축제에 쓸 만한 것이 아닐 텐데?

“그래서 힘센 노스텔지아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해서 요청했답니다.”

므우루는 손을 모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열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크엘프가 묻자 숲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크엘프는 돌아서며 아사나스라는 맹수를 불렀지만, 랜디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아카마카를 어디에 쓰실 생각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무척 쓴 열매다. 도저히 먹을수는 없지.”

“그…그랬죠.그래도 구해다 주시면 좋겠네요.”

페어리는 말을 더듬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확실히 그게 축제에 필요한게 맞겠지?”

“물론이랍니다.”

므우루는 올려다보며 열심히 말했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하는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더 따지기도 전에 지카리의 웅웅 울리면서 살짝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은 이런 일도 좋겠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니 시키지 않았겠나?”

“아 역시 든든하시네요 파편의 일족께선.”

므우루는 도망치듯 지카리의 견고한 몸집 뒤에 숨어버렸다.

“부탁드려요, 꼭.”

드래고니안이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땅이 가볍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노력할거네.”

일어선 그는 웃으며 므우루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속이는 게 있다면 잃게 될 것도 걱정해야 될거야.”

푸른 페어리는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무엇을 감추는지는 몰라도 랜디는 그런 그녀가 불쌍했다. 3m짜리 도마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속이 타는 경험일 것이다.

“가시지요.”

다크엘프 여자는 일어선 드래고니안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숲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멈추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거기 사람 사냥꾼은 안 와도 좋다. 등뒤를 걱정하는 것은 질색이니.”

웃기고 자빠졌네. 미친 계집이 맹수를 끌고 숲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랜돌프는 땅에 침을 뱉었다. 뒤에서는 페어리들이 '실패'니 '두목' 같은 말을 떠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죽도록 고생할지도 모르겠군…”

도대체 이 날파리들과는 무슨 악연인지. 그는 목을 우둑우둑 풀며 동료들과 함께 숲속으로 향했다.

소감

쓸 때 원래의 로그에서 가장 변형과 축약이 많았던 부분으로 기억합니다. 역시 RPG와 소설은 꽤나 다른 매체이니 때로는 과감한 변경도 필요하겠지요. 여기서는 주로 대사 순서를 바꾸고 일부 생략하는 수준이었지만, 아스타틴의 연주 부분은 원본 로그와 많이 다르게 가공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화에도 벌벌 떨다가 이번 분량을 거치면서 각색하기가 좀 편해졌던 것 같군요. 소설 쓰면서 지금까지 제일 많이 가공했던 건 그 연주 장면이랑 재촬영 분량 중 아시타와 아스타틴의 메타포노비아 도착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자는 기본 사건은 같았으니 변형이라기보다는 장면 시점을 바꾸고 정보를 추가한 것에 가깝지만요.

이 장면에는 랜디의 시점을 많이 활용하고 인물에 대한 제 생각도 집어넣어서 이상하지 않은가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방인님이 생각하시는 랜디와 비슷하다는 말씀에 안심했습니다. 노예사냥꾼 출신이며 한 번도 그 점을 뉘우친 적이 없는 랜돌프는 도덕적으로나 사회통념상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라서 시점을 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크게 어렵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같다'라는 사실은 랜디에 대해 가장 불편한 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범죄의 성격이 워낙 거식하다 보니 강간은 차원이 다른 악이라고 (외부 사이트, 영문) 생각해고 싶은 경향도 있습니다만, 실은 노예상이나 강간범이라고 해서 다 공감이 불가능한 사이코패스는 아닐 테니까요. 소수의 병적 인격장애자를 제외하면 결국 악이나 범죄란 대부분 상상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누구든지 조금 비겁해지고 양심의 가책을 조금 외면하면 저지를 수도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의 작품일 것입니다. 편의나 이익, 욕망 앞에서 원칙을 잃지 않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누구든지 환경에 휩쓸려 악을 저지를 수 있지요. 대개의 악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르기에 결코 먼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 랜디 같은 인물의 교훈이라면 교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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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1 13:37 2010/03/2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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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마법진을 바닥에 그린 방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것은 양옆에 까마득히 솟아오른 암벽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고운 잿빛 먼지를 날리는 가운데 얼굴에 문양을 문신한 엘프 여자가 다시 주문을 몇 마디 중얼거렸고, 잠시 후 이번에는 협곡 대신 햇살 가득한 숲이 나타났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머리 위의 새울음에 섞인지 한 호흡 후, 그들은 숲의 또 다른 지역에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나무 사이로는 왼편으로 찰박찰박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공기는 약간 서늘했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엘프 두 명이 대원의 수에 맞게 말 몇 마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이동하지요.”

엘프 여자는 지팡이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솜씨로 맨 앞의 순한 눈을 한 백마에 올라탔다. 정갈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뛰어난 혈통과 훈련이 돋보이는 말을 아스타틴과 다른 요원들이 하나씩 잡아타는 동안 아라는 가우르에 올라탔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들은 숲의 생동감 넘치는 고요, 점점 가까워오는 물소리 속에서 말을 달렸다.

“이쁜아이 상처는 괜찮아?”

아라가 가우르를 아스타틴의 말 옆에 붙이자 말은 신경질적으로 히힝거렸다. 아스타틴은 그런 말의 고삐를 필사적으로 당기며 귓가에 낮게 속삭여 간신히 말을 진정시켰다.

“니아가 침발라서 고쳐줄까?”

그녀는 검지를 입안에 넣었다가 히이 웃으며 들어보였다.

“아, 괜찮아요…”

아스타틴은 말고삐를 당기면서 부드럽게 말의 옆구리에 발뒤꿈치를 찔러 가우르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입가에 팽팽한 긴장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지만, 자신을 '니아'라고 하는 아라를 보는 눈빛에는 연민의 기색이 어렸다.

나무 사이 간격이 띄엄띄엄해지고 땅이 내리막길이 되면서 선두의 대원이 잠시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이어지는 나무들 너머로 완만한 골짝에는 평온한 강물이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굽이쳤다. 강가의 숲속에 희게 빛나는 도시의 탑과 지붕이 나무의 녹색 사이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뻗어올랐다. 대원은 그 모습을 가리켰다.

“알쿠알론데입니다.”


알쿠알론데는 돌 하나하나에도 마법이 서린 도시였다. 넓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정교하게 조각한 수정을 정확한 각도에 통과해 거울과 작은 인공 연못에 반사하고 굴절하며 대리석에 닿는 데마다 작은 빛무리가 일었다. 그런 곳마다 깊고 차분한 마법의 기운이 작은 불씨처럼 튀어오르는 것을 크세노바는 눈을 감고도 영안으로 '볼' 수 있었다. 마탑에서 수련한 것보다 한층 더 견고하고 오랜 힘, 대지의 뿌리만큼이나 깊은 마력이 희미한 진동이 되어 그의 피부에 닿았다.

벤치에 앉아 뒤의 따뜻한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그는 안힐라스에 처음 도착한 순간을 떠올렸다. 이곳 실라엔1 탑 상층의 회의실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꼴사납게 등장한 후, 마탑 대표로 온 그는 그곳에 있던 노스탤지아 지도부를 소개받았었다. 학자 루크 폰 디엠, 냉엄한 얼굴의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크로이엄, 호탕한 성격 이면에 전사의 혼이 엿보이는 드워프 곤드 엔가마르, 고귀한 아름다움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감춘 엘프 여왕 이사벨라, 차가운 불길처럼 안으로 타들어가던 다크엘프 샤나에리스.

소개 끝에 그는 동료를 배정받을 때까지 실라엔에서 대기한 후 그들과 함께 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힐라스를 침략하고 정복하는 인간 국가들을 몰아낸다는 거대하고 두려운 목적을 품고 모인 그들, 노스탤지아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 나부랭이는 놀이판 위 많은 말 중 하나일 뿐이리라. 판을 전부 볼 수도 없는 게임에 뛰어들어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놀이말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희미한 불쾌감이 들었다.

“하아…”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안힐라스는 안 오려고 했건만.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는 한쪽 눈을 떴다. 탑의 거대한 양쪽문으로 사람이 몇 명 들어서고 있었다. 지상층의 드높은 천장 밑에서 순간 개미처럼 작다는 착각이 들었던 그들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 중 하나가 지나치게 빠르게 가까워오고 있었다. 샤나에리스와 마찬가지로 검푸른 피부를 한 다크엘프 여자가 달려오며 내는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넓은 로비에 울렸다.

“와아~ 이쁘다아아아-”

크세노바는 나머지 한쪽 눈도 뜨며 주춤 일어섰다.

“혹시 두 분이 동료- 우왓!”

다크엘프 여자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머리칼을 잡아당기자 크세노바는 고개가 확 꺾이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팔을 휘저었다. 혹시 어린아이를 잘못 보았나 그는 여자를 곁눈질했지만, 조금 키가 작은 편이기는 해도 몸에 꼭 맞는 가죽 갑옷에 드러나는 굴곡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인의 몸이었다. 혹시 저주에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영혼 바꿔치기라든지?

“이쁘다 이쁘다! 니아가 이쁘게 해줄게!”

여자가 머리를 당기면서 갈랐다가 꼬았다가, 마구 엉클어놓는 통에 모발과 두피를 잃지 않으려고 머리를 기울인 크세노바는 들어온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서는 이런 게 인사법은 아니겠지. 니아라는 여자를 그들이 보는 황당한 시선으로 미루어 이런 행동이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짐작한 크세노바는 안힐라스에 대해 조금은 안심했다. 머리카락을 두고 줄다리기를 그만할 수 있으면 더 안심하겠지만.

“이, 일단 이것 좀 놓고.”

성가시기는 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화를 내기는 어려웠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금씩 니아의 주먹에서 구출해내고 그녀의 손가락을 살살 풀어내자 그래도 학습능력이 있는지 니아는 아까처럼 당겨대지는 않았다. 대신 완전히 떨어질 생각은 없는 듯 머리 한 움큼을 느슨하게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대원 중 하나, 엘프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귀가 지금까지 본 엘프보다 더 짧은 어린 청년은 크세노바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한쪽은 녹색, 다른 한쪽은 파란색인 눈이 특이했다.

“이번엔 저런 것도 동료입니까..”

“마침 모두 모여계셨군요.”

대리석 바닥 위에 가벼운 발걸음이 다가왔다. 키가 크고 당당한 체격의 엘프 전사가 안쪽 계단에서 로비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흰 갑옷에는 금 상감 무늬가 반짝였고, 하얀 망토가 걸음에 가볍게 나부꼈다.

“저는 펠러티리스의 엘윙이라고 합니다.”

크세노바가 엘프를 맞으러 걸어가자 니아라는 다크엘프는 여전히 그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왔다. 어미오리가 이런 기분일까. 엘윙은 앞의 크세노바와 니아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무표정하게 한켠에 선 귀짧은 엘프 청년—아마 하프엘프?—을 잠시 보다가 역시 인사했다.

“여러분에게 임무를 설명하는 한편, 마지막 동료 또한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동료 이야기를 하는 순간 엘윙의 예의바르던 표정에는 뭔가 싸늘한 것이 스쳐갔다. 엘프의 눈빛이 딱딱해지는 것을 보며 크세노바는 순간 폭력의 기운을 느꼈다. 뜨겁고 우발적인 분노가 아닌, 빙산처럼 차갑고 거대한 증오를.

“동료라고…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엘윙의 입술이 경멸, 혹은 악의로 희미하게 비틀렸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발걸음이 엘윙이 들어온 입구에서 다가왔다. 그 소리에 크세노바의 머리끝을 헝클어놓고 있던 니아도 고개를 들었다. 엘윙보다는 무구가 덜 화려한 전사 네 명이 중간에 인간 남자 하나를 두른 채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호위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크세노바는 직감했다. 엘윙이 '마지막 동료' 이야기를 했을 때 보인 폭력의 기운을 이 인간 남자를 포위한 엘프 전사들에게도 느낄 수 있었다. 엘프들의 냉랭한 표정을 보며 크세노바는 점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동료라는 자는 아무리 봐도 범죄자 아닌가. 그것도 도둑 같은 수준이 아니라 가장 경멸스럽고 파렴치한 범죄자에게만 가능한 취급을 받는…

동료를 배정해준다더니, 동료가 저 하프엘프의 말마따나 이런 것들? 크세노바는 다시 영혼 밑바닥으로부터 스승에게 이를 갈았다.

전사들이 비켜서며 뒤로 물러나는 동안 그 인간, 마지막 동료는 오만한 눈빛으로 크세노바와 니아, 하프엘프 청년을 훑어보았다. 남자에게서는 어딘가 포식자의 냄새가 났다. 온 세상을 경계하는 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끝없이 정보를, 위험을 찾아 움직였고, 간편하고 실용적인 복장은 사냥꾼이나 숲지기 느낌이 났다. 그의 움직임은 야수처럼 느긋하게 우아하면서도 언제든 폭력으로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시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듯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은 아직 젊은이의 생김새였지만, 젊음의 맑은 순수는 전혀 없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은 표정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부조화가 역설적이게도 엘프와 닮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크세노바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 말을 꺼냈다가는 적을 만나기도 전에 이곳 엘프들과 먼저 전투를 벌이게 될지도 몰랐다. 스승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지.

한편 니아는 뭔가 그의 머리를 땋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는데, 덕분에 머리끝은 엉망으로 엉켜가고 있었다. 크세노바는 손을 저어 허공에 색색의 나비떼를 만들어냈다. 이쯤이면 주의를 돌릴 수 있겠지. 아니나다를까 니아가 '와아~' 환호하며 나비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그는 엉킨 머리끝을 풀어내리며 마지막 동료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쪽 분은?”

크세노바의 물음에 인간 남자는 그를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엘윙이 대답했다.

“엘레베스의 자비로 목숨을 건진 죄수, 랜돌프 에디우스입니다.”

맛이 지독하기라도 한 듯 엘윙이 그 이름을 내뱉자, 이름의 주인은 재밌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불가피하게 이 인간을 여러분과 함께 배속시키라고 전달받았습니다만, 노예사냥꾼이던 천박한 잡니다. 동료의 예우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노예 사냥꾼… 역시, 그렇다면 저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쪽 해안을 중심으로 땅을 차지해 들어가는 인간 국가들은 무수한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노예가 되느니 싸우다 죽는지라 정도는 덜했지만—다크엘프를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려고 아예 이종족을 전문적으로 납치해다 파는 노예사냥꾼은 그 중에서도 특히 증오의 대상이었다. 엘프에게 붙잡히고도 에디우스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게다가 노스탤지아 대원으로 배속받은 점이 크세노바는 오히려 놀라웠다. 엘레베스라면 그들의 여왕, 이사벨라 에르쉬아 호르뉴를 말하는 것일 터. 아까 본 고아하고 슬픈 눈빛의 여성을 떠올리며 크세노바는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눈 짝짝이 하프엘프 청년이 랜돌프 에디우스를 노려보는 시선은 크세노바를 볼 때보다도 한결 차가웠다. 그래도 노예사냥꾼보다는 좀 위라니 나름 다행인 건가. 아마도 인간의 피가 섞였을 청년이 인간을 저토록 싫어한다는 것은 안힐라스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안힐라스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목에 건 펜던트가 왠지 무겁기만 했다.

나비가 다 없어졌는지 아니면 싫증이 났는지 니아는 크세노바를 지나 에디우스에게 다가가더니, 2m쯤 앞에서 멈춰서며 작은 코를 킁킁거렸다.

“피냄새가 나는 아저씨네.”

랜돌프가 배속받은 이유는 목적지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던 엘윙은 그런 니아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저분은 왜 저러시죠?”

“사냥꾼이야..”

그 반응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반쯤 감고 니아는 랜돌프를 보며 말했다.

“포식자의 본능.. 사람 사냥꾼..”

“다른 건 모르겠고…”

하프엘프의 경멸을 무시해버리고 크세노바에게는 중립적이었던 에디우스의 눈빛은 니아에게 머물렀다. 그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는 엘윙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지?”

범죄자가 한 것이긴 해도 좋은 질문이었다. 저주, 영혼 바꿔치기, 아니면 그냥 광기? 원래 성격? 어느 것이든 니아가 노스탤지아 유격대의 일원이 될 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았다.

엘윙은 마치 질문을 넘기듯 하프엘프를 바라보았지만, 청년은 내가 아느냐는 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협조성은 있는지 그는 니아를 불렀다.

“니아.. 이리와요.”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니아에게 말하면서 그의 턱선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뭔가 갈등하는 감정과 싸우는 것처럼… 이 청년 역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으리라는 생각이 크세노바는 문득 들었다. 엘프란 헷갈리는 족속이었다.

“나비야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달래줘야죠.”

음? 나비는 이제 없어졌는.. 하프엘프 오른편으로 시선이 미친 크세노바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떨어졌다. 환하고 하얀 실내에서 잘라낸 한 조각 어둠, 커다란 검은 짐승이 노란 눈을 빛내며 랜돌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 동물원에서 본 적 있는 표범과 비슷하지만 훨씬 큰… 여기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 꿀꺽하실 수 있는 맹수가 소리도 없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크세노바는 소름이 끼쳤다. '나비야'가 언제든지 뛰어오르려는 듯 웅크린 자세, 그리고 그 근육질 목에 곤두선 털을 보고는 이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본능이 발동해 순간 정신없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계는 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위험은 없다고 이성은 겁에 질린 본능을 다독였지만, 여전히 크세노바의 발은 머리의 제어와는 상관없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했다.

니아는 득달같이 그녀의 나비야 곁으로 달려갔다. 앞발 한 번 휘두르면 그녀의 두개골을 계란처럼 부숴버릴 수 있는 짐승의 목을 그녀가 끌어안고 청년과 뭔가 재잘거리는 동안, 랜돌프는—그를 노려보며 낮게 으릉거리는 맹수를 곁눈으로 경계하며—건조한 표정으로 엘윙에게 말했다.

“날 불러내서 이놈들과 함께 묶는 걸 보고 사실 이 일행이 버리는 돌이라는 건 대충 파악할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니아에게 향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녀석까지 일행에 있다는건 좀 웃기지 않나?”

어디선가 스승이 정신없이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을 느끼며 크세노바는 이를 악물었다.

'영감님 어디 두고 보십시다…'

“다 모이셨으니 임무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랜돌프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엘윙은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맹수가 위험해지지 않나 보려고 다시 곁눈질을 하다가 크세노바는 니아가 멍하니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 전에 만난 이래 그녀가 가만히 있었던 건 한 순간도 없었기에 이색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뭔가 답변해주고 있던 하프엘프를 어리둥절하게 보다가 니아는 눈을 깜박이며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의 그 이상하게 들뜬 웃음기가 사라진 채 그녀의 검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뭐지?

한편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 뜯었던 엘윙은 명령서를 보고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마굿간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말은 없어지고 돼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의 표정이랄까. 물론 크세노바가 그런 장난을 아카데미의 동료들에게 친 적은 없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지?”

이제 목소리마저 어린아이 목소리가 아니라 가라앉고 냉정해진 다크엘프 여인이 물었다.

“그게..”

잠시 더듬다가 냉정을 되찾고 엘윙이 말했다.

“에미넴 숲 서쪽의 페어리 마을로 이동해서…”

무엇 때문에 엘프가 저렇게 당황했을까 생각해보던 크세노바는 엘윙의 다음 말을 놓칠 뻔했다.

“축제… 준비를 도우라는 명령입니다.”

페어리라는 말에 눈쌀을 찌푸렸던 랜디는 그 말에 눈썹을 쳐들었다. 엘윙은 그 일대에 오크 활동이 늘어났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축제 준비라니? 설마 잘못 들었겠지?

”…페어리 마을의 축제 준비라고 하셨습니까?”

크세노바가 묻자 엘윙은 나도 모르겠다는 듯 하릴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은 누가 내린 것인가.”

니아—정말 니아?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기분이 변할 수도 있나?—의 목소리는 차갑고 고압적이었다. 짝짝이눈 청년이 엘윙에게 이동 위치를 확인하는 동안 다크엘프는 엘윙의 손에서 명령서를 잡아채더니, 잠시 읽고 땅에 내던지듯 버리며 돌아섰다.

“평소에도 시끌벅적하니 정신없는 놈들이…”

랜돌프 에디우스는 이마를 짚으며 끄응.. 신음을 흘렸다. 니아는 그런 그를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그쪽 인간. 페어리들을 아는가?”

“물론이다.”

랜돌프는 팔짱을 꼈다.

“그 날파리같은것들이 아니었으면 난 여기 잡혀와 있지도 않을 테지.”

“그들의 날개를 뜯어서 마석으로 만들려다가 잡히기라도 했나보군.”

니아의 입술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어렸다. 아니, 좀전에 노예사냥꾼 소리를 못 들었나? 혹시 나비에 너무 열중하느라 몰랐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일관성이 없는 그녀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 노예사냥꾼이라고 하더군요.”

하프엘프 청년은 툭 흘리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니아가 이렇게 변한 때부터 꾹 다문 입과 어깨선의 긴장은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그는 니아의 이런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고 있거나 최소한 익숙한 모양이었다.

다크엘프 여성은 순간 정지했다가 랜돌프를 다시 보았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엘프들만큼이나 깊은, 그러나 폭력의 기운이 더욱 검붉은 증오가 배어났다.

“다사케타…”

뭔가 그녀의 언어로 모욕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크세노바는 그녀 자신의 적의보다도 주인에게 맞장구치듯 다시 으르렁거리는 맹수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주인도 짐승도 랜돌프를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던데, 다크엘프 쪽은 사람을 분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마저도 단정하기는 일렀지만) 맹수는 인간 남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노예사냥꾼은 저쪽' 표지판을 들고다녀야 하나 그가 고민하는 동안 랜돌프는 니아와 나비야에게는 개의치 않는지 엘윙에게 에미넴 숲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후우.”

크세노바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고 머릿속에는 이미 돌아가면 스승의 의자 밑에 심어놓을 폭죽 목록을 짜고 있었지만, 기왕 이곳에 있는 김에는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빨리 돌아갈 수 있겠지.

“주 목적이 설마 축제는 아니겠고 가서 보면 뭐 알겠죠.”

“그곳에 가면 특별한 손님이 있다고 하더군.”

그를 흘깃 보며 니아가 말했다.

“너희들과 다니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특별한 손님? 니아가 엘윙에게 이동 마법진은 어디 있는지 질문하는 동안 크세노바는 니아가 명령서를 버린 데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아까 들은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쭉 읽은 끝에—노스탤지아 인장이 기억과 같은 것을 보니 위조는 아닌 모양이었다—드래고니안 요원 한 명이 마을에 도착해 있다는 대목에 시선이 미치자 그는 눈썹이 저절로 치켜올라갔다.

“가자, 아사나스.”

니아가 돌아서며 부르자 나비야, 아니 아사나스는 바로 일어나 주인을 따랐다. 드래고니안이라… 크세노바는 명령서에서 시선을 들고 아사나스에게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따랐다. 하프엘프 청년은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에디우스는 한숨을 쉬며 뭔가 페어리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 뒤따르면서 이 기묘한, 아니 어쩌면 최악의 일행은 임무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었다.

소감

써둔지 2주 가까이 된 분량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군요. 써놓고서는 다듬으면서 재촬영을 기다렸다가 소설화를 한지라... 랜돌프의 첫 등장 묘사와 그에 대한 크세노바의 반응이 쓰기 재밌었고, 나머지는 RPG 로그를 소설로 옮기느라 고심한 생각이 나는군요. 묘사 넣느라 이 피토하는 분량 같으니라고(..) 1화가 또 모든 것을 소개하는 첫부분이라 유달리 분량이 많은 점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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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엘프어로 '빛나는 눈' [돌아가기]
2010/03/21 11:35 2010/03/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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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스터드젤리 2010/04/18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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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아스타틴은 전령이 주고 간 명령서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에 새 동료와 합류해서 15시까지 알쿠알론데에 귀환 보고.

다시 임무였다. 다시 동료를 만나고, 다시… 떠난다. 머리로 알고는 있었다, 노스탤지아에 있는 한 명령에 따라 임무를 떠날 것은. 그런데도 누가 죽고 누가 슬퍼하든 이 싸움은, 갈 곳과 할일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낯설기만 했다.

다시 사람을 알게 되고, 어쩌면 마음을 열고, 또 잃는다. 아스타틴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더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는가. 부모에 이어 텔루르마저 죽었을 때 그런 일은 이제 겪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 아시타를 만났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털과 커다란 온기를 찾았지만, 만져지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뒤늦게 이제 루테리온도 그의 곁에 없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정신 이상한 다크엘프 여자를 쫓아 떠났으니까. 그것이 녀석의 선택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머리로 아는 것들을 가슴은 납득하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명령서를 손에 쥔 채 무릎을 끌어올려 끌어안았다. 외로움만은 그에게 가장 오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라도 그를 버리지 않을.


창이 없는 방안은 쌀쌀하고 어둑했다. 창살 사이로 복도의 횃불이 비쳐드는 불안정한 조명 속에 구석에 비좁은 침상과 그 밑에 요강 외에는 텅 빈 가로 네 걸음, 세로 세 걸음의 좁은 방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었다.

방 한쪽 구석, 창살 반대편 벽에 양반다리를 하고 기대어 앉은 여인은 무표정하게 감방을 바라보았다. 횃불빛은 올려묶은 은백색 머리에 붉은 반사광이 되었고, 진회색 눈은 횃불의 흔들림에 따라 뜨거운 불길을 품었다가 싸늘한 어둠이 가득 고였다. 반들반들하고 검푸른 피부는 동상의 표면인양 미동도 없는 가운데 조각한 듯 또렷한 광대뼈와 작고 오똑한 코는 얼굴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꾹 다문 입술을 살짝 비튼 표정에는 폭력적인 잔인성과 드높은 긍지가 동시에 드러났다. 튜닉과 바지 위에는 가벼운 가죽 부분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황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무기는 없었다.

발걸음이 들려오자 여자는 긴 귀끝이 살짝 까딱거리면서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인 채 창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라니아카? 알라스입니다.”

감방에 앉은 여인과 비슷한 검은 피부와 긴 귀를 한 여인이 가죽 갑옷에 무장을 한 채 다른 전사들과 함께 창살 밖의 복도에 섰다. 알라스의 눈짓에 전사 둘이 앞으로 나서 창살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라니아카는 벽 구석에 다시 몸을 기대며 물었다. 알라스는 그런 그녀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장로회의가 아라의 처분을 결정했습니다.”

잠시 움직임 없이 앉아있다가 아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서도 알라스보다 키가 작았지만, 턱을 치켜들고 상대를 쏘아보는 그녀의 태도는 당당했다.

알라스 뒤에 있는 전사가 말없이 다가와 아라에게 짧은 칼 한 자루와 화살, 그리고 꽉 찬 화살통을 건넸다. 아라는 눈쌀을 찌푸리며 처음으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면서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눈빛은 묘하게 간절했다.

“오지 않으시는가.”

“프리야 마타께서는 바쁘십니다. 그리고…”

알라스의 표정은 냉정했다.

“아라니아카는 프리야 마타의 자비에 의해 노스텔지아의 요원으로 활동하시게 될 겁니다.”

“뭐?”

아라는 눈을 부릅떴지만 알라스는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이미 노스텔지아의 마중이 나와있습니다.”

알라스는 허리의 대검을 철컥거리며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죠. 거기에 그대의 가우르도 있습니다.”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걸어가버리는 알라스의 뒷모습을 아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따랐다. 전사들은 어느새 그녀 주변을 두른 채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들의 무기와 수에 시선이 미친 아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칼을 찬 후 화살통과 활을 메었다. 절도있게 걸음을 옮기자 전사들은 일제히 그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걸어가는 아라니아카의 눈동자 속에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횃불의 불길이 비쳤다.


노스탤지아 대원들 사이에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아시타를 죽인 것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라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든지, 심지어 그녀가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합류해서 동료로 대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지도부와 가까운 지위 때문에 오히려 고속승진할 지 모른다거나, 심지어 아시타의 죽음 자체가 노스탤지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다크엘프의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연락 기지의 회의실에서 새 동료를 기다리며 아스타틴은 어디까지 믿을 만한지 알 수도 없는 그 소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불안할 때면 쉽게 퍼지는 류의 근거없는 풍문이라 하더라도 들을 때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할 의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열심히들 얘기해준 덕분에 생각하기도 싫은 구설수는 폭넓게 섭렵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동료들과 서서도 그들끼리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좀 일하게 했다가 고속승진시켜서 지휘권을 쥐어줄지도…' '경력관리라는 거로군. 역시 백이 든든해서…' '그걸 우리가 호위할지도 모른다고…'

눈을 감으며 아스타틴은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귀는 더욱 예민해지기만 했다. 대원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사가 죽었는데 그 죽음이란 결국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수단, 권력다툼의 한 수, 이용해먹기 좋은 혼란일 뿐이었던가. 아시타는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창가에 서서 내다보던 대원 하나가 밖에 대고 턱짓을 했다.

“저기 프리야마타의 의자매 나리가 오시는군.”

대원들은 웅성거리며 창가로 몰려갔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쳤다.

“여 아스타틴. 너도 와서 보라고. 꽤 위풍당당한 행차인걸.”

아스타틴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시타를 죽인 살인자를. 어떤 감정이 또 몰려올까, 얼마나 더 다칠까 두려워서 눈도 감고 귀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느새 이끌리듯 창으로 향했다. 살벌한 표정의 전사들에 둘러싸여 걸어오는 다크엘프 여자가 보였다. 어깨에 멘 저 활이 어쩌면 아시타를… 그는 속이 뒤틀렸다. 호위하는 전사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쳐든 머리나 당당한 걸음은 조금도 죄수의 태도나 심지어 일말의 죄책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 일행은 건물 문으로 들어와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귓가에 심장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뭔가 해야할 것, 할말이 있을 것 같았는데 무엇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그들 같은 말단 대원이 뭐라고 생각하든, 아무리 분노하든 저 여자는 동료라는 이름으로 아시타의 자리를 차지한 채 저리도 뻔뻔하게 활개치고 다닐 텐데.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동안 당도했는지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분노와 적의가 재 밑에 숨은 불씨처럼 시무룩하게 타는 방에 다크엘프 일행이 들어섰다. 선두의 전사들이 비켜서자 그들이 호위해온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방안에 있는 사람 대부분보다 키가 작았지만, 자신을 향해 꽂히는 시선을 일체 피하지 않은 채 어깨를 뒤로 젖히며 고개를 쳐드는 그녀는 그들을 올려보기커녕 오히려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는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으며 평가하고, 이내 무시해버렸다.

아. 그녀가 같이 온 다크엘프 전사의 우두머리에게 몸을 돌리는 동안 아스타틴은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냈다. 아시타가 죽기 전날, 그 기억의 검고 탁한 물 너머에서 루테리온과 함께 멀어져가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런 자들과 함께 싸우라는 말인가.”

기억 그대로 냉랭한 말투로 그녀는 다크엘프 전사에게 말했다. 전사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아라니아카.”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 그녀가? 아스타틴은 숨이 턱 막혀왔다.

“아라…니아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아, 너인가.”

그녀는 마치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듯 무덤덤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는 것일까?

“당신인가요?”

아라니아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여전사를 돌아보았다.

“인간과 혼혈들을 동료로 대하라는 말인가?”

적대감으로 더욱 무거워지는 공기는 개의치도 않고 그녀는 여전사와 가시돋힌 말을 주고받았다. 프리야 마타와 이야기하고 싶다며 항의하는 그녀에게 전사는 이것이 프리야 마타의 뜻이라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양어머니에게 배운 다크엘프어를 알아듣는 것은 어려움이 전혀 없었지만, 생각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들의 대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내려가지 않아서, 어떻게든 내보내지 않으면 까맣게 타버릴 것 같았다.

“저년이 그 의자매란다. 아시타를 죽인 놈이야.”

옆에서 동료가 속삭이는 소리는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아시타…'

그러는 동안 아라니아카를 이곳으로 데려온 전사는 그녀에게 종이쪽지를 내밀고 있었다.

“배속 명령서입니다.”

아시타를 죽인 여자는 동족의 전사를 노려만 보면서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받으라고 해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나았다. 감사하다며 굽신거리며 두 손으로 받들어도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아시타?

“프리야 마타께 또 다시 폐를 끼쳐드릴 생각이십니까?”

“폐?”

아라니아카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 때 내가 얼마나 폐를 끼쳤는지 프리야 마타께 직접 묻지 그러느냐.”

“노스탤지아 배속은 프리야 마타께서 직접 지시하신 상황입니다.”

두 여인 사이에는 길게 침묵이 흘렀다. 그 속에 무엇이 오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동료들과 함께 폭력의 기운을, 바람의 방향을 알릴 어떤 신호를 찾아 주시했다.

마침내 아라니아카가 손을 움직이자 몇몇은 움찔 긴장했지만, 그녀는 손등으로 상대의 손을 탁 쳐서 명령서를 떨어뜨리게 했다.

“받은 것으로 치거라, 알라스.”

그녀는 전사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네가 더 관여할 일이 아니다.”

“받지 않으셔도 이미 처리는 끝나 있습니다.”

알라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빛에는 가까스레 억누르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는 그럼 이만.”

아라니아카에게 목례하고 알라스는 몸을 돌려 전사들과 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동안 아라니아카는 가만히 그들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대원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여전사는 입을 열었다.


알라스와 그 부하들이 나간 문을 노려보면서 아라는 눈앞이 잠시 어질거렸다.

“동료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낮고 정확하게 유지했다. 언제 감히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는 신분이었다고 알라스 따위가…

“지금이라도 덤벼보거라. 여럿이라도 좋다.”

감히 프리야 마타의 권위를 업고 죄수 취급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 라스카야의 딸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를?

부족했다. 가슴에서부터 시작해 팔다리, 손끝까지 전율하는 이 불길을 끄기에는 너무나.

“여..이거 대단한 배짱녀가 납셨구만그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며 '동료'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을 달게 된 자들을 마주보았다. 인간과 인간 혼혈들, 노스탤지아가 오기 전이라면 이 땅에서 마주치자마자 죽여버렸어야 할 자들.

“아니면, 노스탤지아에는 전사다운 전사가 없는 것이냐?”

그녀는 팔짱을 끼며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피가, 격한 동작과 위험이 필요했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동료의 복수를 하려는 친구 하나 없다니, 죽은 그 튀기놈이 불쌍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하면 다들 거세한 염소가 아닌 이상 움직이겠지. 어쩌면 이곳에서 그녀가 공격당하면, 심지어 죽으면 노스탤지아와의 동맹은 돌이킬 수 없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름 합당한 처벌 아니겠는가? 놈의 동료들에게 죽는다면.

“어이, 정신나간 아가씨. 지금 댁 처지를 이해 못한 모양인데…”

인간 하나가 울컥하며 나서자 옆에서 그의 동료가 말렸다. 겁쟁이놈들. 어째서 나서지 않는가? 동료를 살해한 살인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복수하지 않는가.

왜 응당한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라는 이를 악물면서 손끝이 떨려왔다.

“당신 역시 전사를 자칭할 자격은 없다고 보는데요.”

침묵 속에 그 하프엘프 녀석, 아사나스를 넘겨주었던 젊은이의 목소리는 유달리 맑고 또렷했다. 그녀를 노려보는 눈에는 깊은 슬픔의 그늘과 차가운… 경멸이 어렸다. 노스탤지아 대원들은 조용해지면서 동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크엘프 여전사라면 최소한 명예는 지킨다고 들었으니까요.”

“명예라…”

쓴웃음을 지으며 아라는 아마도 이 어린 녀석을 키웠을 타하이샤를 떠올렸다. 그런 소리는 타하이샤에게 들은 것이었을까? 민족의 언어를 할 때면 그녀의 억양과 말버릇이 묻어나듯, 그런 순진한 명예관념도 물러빠진 어미에게 배웠겠지.

“저런 것이 동료입니까…”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청년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일부러 등을 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배웠을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생명을 포기한 것일까. 아시타라는 그 인간 튀기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의미였다면 둘은 어쩌면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리드와 생전의 이잔야르처럼? 셋째 남편을 비롯해 너무 많은 이가 쓰러진 그 비탄의 날 이후 하리드를 처음 만났을 때, 수 년의 포로생활에서 갓 돌아온 자신보다도 어쩌면 하리드가 더 변해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었다.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실망이었지만, 슬픔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한 모욕을 마음쓸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돌아서서 나머지 대원들에게 말했다.

“덤비기에는 다들 너무 겁쟁이라면 자리를 옮기자꾸나.”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들어가라는 것은 그녀를 살해하려는 함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노스탤지아가—그리고 어쩌면 가장 불안하게도—샤나에가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새삼 궁금해졌다.

“이 우스운 희극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지?”

“짐싸들고 이동할 준비나 하지 그래. 간만 큰 아가씨.”

인간 남자 하나가 이죽거렸다. 손등으로 저 얼굴을 후려쳐서 버릇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아라는 생각했다. 이런 무례를 참아내는 것이 샤나에가 내린 진짜 형벌일지도 모른다.

“아스타틴과 함께 가야할 테니 등뒤나 조심하라고.”

대원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 무례한 원숭이들을 성안에 들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죽은 튀기는 최소한 예의는 있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엘프 아이야.”

나중에라도 연인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실감이 나면 마침내 용기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들에게 기척을 죽이는 법쯤은 제대로 가르쳤겠지, 타하이샤? 틈을 봐서 확 해치워버리라고 대원 하나가 아스타틴에게 부추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가치가 있는 상대라면요.”

하프엘프의 목소리는 방안의 크고작은 소음 위에 또렷하게 울렸다. 가수나 시인 재능이 엿보이는 좋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나오는 목을 잘리지 않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공격할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전사도 아니죠.”

하프엘프는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대원에게만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연인을 잃고서도 직접 얘기할 용기조차 없어? 그렇게 가르쳤는가, 타하이샤?

”…저희 양어머니께서 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배우자를 잃고 연인마저 등을 돌리는 기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많은 것을 참아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죽임을 당한다 해도 정당한 복수이리라. 그러나 그녀가 옆에 있는데 마치 물건 얘기하듯 평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진귀하지 않은가, 흑요정이라니? 여인답게 꾸며놓으니 문명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다시는 사람 아닌 물건이, 소유물이 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하고 또 맹세했었다.

“어이, 아가씨. 가자고.”

툭툭 치는 손을 그녀는 탁 쳐냈다. 라스카야의 딸 아라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 한 집안의 가장, 한 부족의 전사, 무엇보다 세계수의 딸 중 가장 용맹하고 지략있는 전사와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자매였다. 그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도 그녀는 그 누구의 소유도, 부속물도 아니었다. 누구도 그녀를 지각력도, 목소리도 없는 물건처럼 평할 수는 없었다. 샤나에리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너희가 놀기 싫다면…”

돌아서면서 그녀는 허리의 칼집에서 칼을 휙 빼며 공중에 던져올렸다.

“내가 가겠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녀는 허공에서 칼을 잡아챘다. 앞에 두 명의 대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 한 명과 어깨를 부딪치며 그녀는 둘 사이로 쉽사리 빠져나와 하프엘프 아스타틴, 타하이샤의 아들에게 다가섰다.

“어…어! 지금 뭐하는 거야?”

그들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을 때 이미 그녀는 하프엘프의 목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내 칼끝이 하얀 목에 닿았다. 머리부터 부딪힌 아이는 잠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그녀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고요하고 무표정했다. 마치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더 상처는 받을 수도 없다는 듯이.

“왜요?”

아스타틴이 속삭였다.

“죽이시게요?”

“죽고 싶느냐, 아이야?”

그녀는 칼을 통해 그의 맥박을 느낄 정도로 지그시 눌렀다. 서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이 순간은 묘하게 친밀했다. 피와 생명을 걸고 맞서는 순간만큼의 친밀감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 정신나간 계집, 어서 떨어져라!”

뒤에서 놈들은 무기를 뽑고 있었다. 어지간히 상황 파악이 느린 자들이었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목숨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둔하다면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가까이 오면 이놈부터 죽는다.”

“죽어봤자 슬퍼해줄 존재들은 이미 가고 없으니까요.”

아스타틴은 그들의 대화가 끊기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맑은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 녀석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자비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은 이유로 의미를 잃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버리려는 영원한 중간자, 이 혼혈 아이에게는. 그렇게 할까, 타하이샤? 여기서 끝내고 그의 분노한 동료들에게 죽고, 그렇게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키고 영원한 망각으로 내려가 버릴까? 그렇게 하면 내가 더는 폐가 되지 않을까요, 샤나에?

녀석의 연인, 그 하프다크엘프가 쓰러지던 모습이 그녀는 문득 떠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갇힌 채 수없이 떠올렸듯이.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에게도 물러나라고 경고했었다. 그대로 노스탤지아의 뜻대로 놀아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너무나 많았지만, 그 이유는 하나하나 입속에 재와 모래 같은 맛이었다.

그녀는 살인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기 이 어린 녀석의 멍든 눈빛에 너무나도 뚜렷했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샤나에리스는, 혹은 노스탤지아는 무슨 의도인지 그녀를 살렸다. 이래놓고 죽음으로 도망칠 수 있는가. 마치 도살당하는 새끼양처럼 무력한 이 젊은이까지 길동무로 데리고?

“정말로 분하다면 칼을 들고, 나를 죽일 준비가 되었을 때 해라.”

전사의 명예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타하이샤, 샤나에리스, 자신 모두 지금보다 젊었던 날들의 기억이 아련했다. 그때는 아직 세상에 대해 신뢰가 있었다. 시련은 극복하고, 싸움은 아름답고, 전우는 믿을 수 있던 그런 때였다.

“젊은 녀석이 등뒤에서 노인처럼 푸념하는 소리는 듣기 성가시구나.”

동맥을 피해 칼로 목을 얕게 긋자 청년은 작게 움찔했다. 생에 미련을 심어주는 방법으로는 작은 고통만한 것도 없는 법이었다. 그에게 웃어주며 아라는 칼을 닦고 칼집에 꽂으며 돌아섰다.

“썅! 저년 묶어!”

대원들이 몰려와 팔을 뒤로 세게 당기자 아라는 작은 윽.. 소리를 삼켰다. 뭐,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오히려 부족했다. 벌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바란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피곤했다… 눈꺼풀 뒤에서 몰려오는 편안한 어둠에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맡겨두고 쉬면 되겠지, 잠깐 동안만.


“어, 이쁜아이다!”

표정없이 묶이던 아라가 돌아보며 갑자기 아이처럼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피났네~ 아야했어! 니아가 침발라줘?”

“저, 저기…”

작게 욱신거리는 상처에 아스타틴은 손을 댔다. 금새 손가락이 피에 젖었다. 곧 옷에도 젖어들어 축축해지리라.

“아라…니아카..?”

“연기하는 거야, 저거?”

대원 하나가 수근거렸다.

“혹시 정말 미쳤나…”

다른 대원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니아야!”

그녀는 아라의 얼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알아챌 수 있었다. 둘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니아…”

웃으면서 아스타틴에게 오려다가 니아는 포박 때문에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대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동안 바닥에 뒹굴며 해맑게 깔깔거리는 저 여자가 아시타의 원수, 방금 전에 그에게 칼을 들이댄 여인이란 말인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면 세상에 확실성이란 어디에 있는가? 응, 아시타? 텔루르? 누구라도…

그러나 죽은 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삶의 혼란과 불확실성에 내팽개쳐진 것이 살아남은 이들의 몫, 생존의 형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아스타틴은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감

아라가 엄청난 오해를 했군요. 과연 풀릴 날이 있을지 묵념(..) 아시타가 살아있었다면 애인 맞다고 하면서 아스타틴을 놀려먹었을지, 아니면 아라에게 기습 키스라도 해서 오해를 풀었을지 모르겠군요. 후자였으면 어차피 죽었을 테니 제명에 살다 간 게 맞을지도요.

장면 중간에 시점을 바꾸는 건 선호하지 않지만, 이 경우는 시점전환이 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 대원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라든지 대원들과 아스타틴의 심정은 아스타틴의 시점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웠고, 후반에 아라가 아스타틴을 공격하는 대목은 아라의 시점이 아니었으면 인물이 아스트랄로 날아갔을 테니까요. 그 서술 중에 아라의 배경이나 내면을 의외로 많이 끄집어낼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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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1 09:38 2010/03/2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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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처음으로 스토리 진행이라는 게 좀 나오는군요. 쓰다 보니 앞에 난 엘모스 부분이 생겨서 두 파트를 같이 올립니다. 어차피 긴 쪽은 뒤에 메타포노비아 부분이기도 하고요.

20100307 재촬.html

리플레이: 1화 플레이 재촬영 부분


난 엘모스: 세계의 등줄기

마법의 소용돌이에 색채와 선의 혼란으로 뭉개졌던 공간은 하나씩 자신을 재구성했다. 거의 수직으로 뻗어올라가는 험준한 암산, 바위가 흩어진 까마득한 골짜기, 위에는 흐릿하게 찌푸린 하늘, 저 멀리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의 행진.

골짜기의 한쪽 벽을 이룬 암산 중턱에 한쪽은 암벽, 다른 쪽은 낭떠러지인 길 위에 갑자기 나타난 두 젊은이는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들이 방금 이동해온 곳이 어디인지 확인했다. 그들과 함께 나타난 밤처럼 검은 거대한 큰고양이 맹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털었다. 청년 중 키가 작은 쪽이 고개를 저으며 옆의 맹수의 어깨를 가볍게 짚자, 함께 나타난 검푸른 피부의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지친 건가, 아스타틴?”

검은 피부의 청년보다 키가 반 뼘쯤 작은 금발 청년은 그를 돌아보았다. 산봉우리 사이로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금발머리 사이로는 뾰족한 귀가 손가락 하나 반 정도의 길이로 튀어나왔고, 허벅지 바로 위에까지 늘어뜨린 모포 비슷한 외투 아래로는 단순하고 튼튼한 양모 바지와 많이 걸어서 닳고 부드러운 가죽 부츠가 보였다. 넓은 이마와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매끄러운 볼의 윤곽과 살짝 뾰로통한 입술이 조금은 아이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맹수의 등을 마치 고양이 예뻐하듯 긁어주더니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고 머리야… 우리 이쁜이는 괜찮지?”

맹수는 노란 눈을 빛내며 그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이쁜이가 괜찮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아스타틴은 몸을 세우며 옆의 청년에게 몸을 돌렸다.

“순간이동은 몇 번을 해도 기분이 이상해.”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둘의 뒤편에는 사람이 계속 허공에서 나타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걸어서 이동하면 안 되려나.”

아스타틴은 투덜거렸다.

“편리해서 좋지 않나.”

검은 피부의 청년이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기자 아스타틴도 그를 따랐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회색 피부를 한 청년은 군데군데 구리빛이 섞인 흰색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뒤로 묶고 있었고, 튜닉과 바지 위에는 부분 가죽갑주를 걸쳤다.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긴 귀가 머리카락 사이로 비져나왔다.

“편리는 하다지만…”

불만스럽게 말하며 아스타틴은 여행의 먼지가 앉은 외투를 탈탈 털어냈다. 옆에서 맹수 이쁜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득 내보이며 길게 기지개를 켜더니 다소곳이 앞발을 핥았다.

“괜찮아, 힘내라고. 이제 마지막이니까 말이야.”

청년은 미소지으며 아스타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들의,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암벽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너 말야, 아시타.”

뾰족한 입술을 부루퉁하게 더 내밀며 아스타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을 텐데. 애 취급하지 말라고.”

“요오.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군.”

아시타는 손바닥이 연회색인 양손을 들어보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음에도 그러면 목을 확…”

아스타틴은 손으로 잡아채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봐, 난 말이야.”

아시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짐짓 과장되게 말했다.

“마법멀미를 하는 너를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네. 속으로 킬킬거리는 거 다 알거든.”

말하면서도 아스타틴은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얘기하면서 두 청년과 짐승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 암산 중턱의 큰 돌출부 위에 섰다. 발밑에는 거대한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놓고 여러 색의 준보석으로 상감한 둥근 부조가 거의 바닥 전체를 차지한 채 은은하게 빛났다. 앞으로는 험준한 산과 골짜기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흰 로브와 긴 녹색 외투에 후드를 쓴 여성이 바닥의 부조 가운데에 긴 지팡이를 세워들고 서있었다. 아시타와 아스타틴을 비롯해 각종 생김새의 사람들이 하나씩, 혹은 삼삼오오 도착해 마법진 위에 섰다.

“정숙해 주십시오.”

로브와 녹색 외투를 입은 여자의 엄숙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 위로 울렸다. 조용해지자 그녀는 후드를 내렸다. 드러난 얼굴의 이질적일 정도로 우아한 선과 형태 위에는 기하학적 형태의 문신이 가득 새겨 있었다. 백금빛 머리 사이로 나온 긴 귀는 아스타틴이나 아시타보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더 길게 뒤통수를 넘어 머리 뒤로 나왔다.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그녀가 지팡이를 쳐들며 음악적으로 흐르는 말을 길게 영창하자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면서, 발밑의 상감한 무늬가 눈부신 빛을 냈다. 그녀가 마치면서 지팡이를 내리치자 그 뒤틀림이 훅- 하고 부조의 한가운데로 빨려들면서 그 안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정적 속에 멀리서 새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새울음은 언덕 위로 구슬프게, 소름끼치게 울렸다. 비명을 지르듯, 혹은 흐느껴 울듯 높이는 목청은 잿빛 먼지를 싣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황량한 잿빛 언덕과 들판 위로 내렸다. 나무에 앉은 검은 새가 다시 찢어지는 목청을 높이는 위로는 높고 날카로운 목책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아래로 경사져 내려가는 언덕과 주변 평지에는 집과 농지, 가축우리가 펼쳐 있었다. 목책 위로 보이는 지붕은 몇 개 되지 않았지만, 몇 군데 난 문을 통한 사람과 수레, 짐승의 왕래는 그 안에 활발한 정착촌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목책 아래쪽,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는 나지막한 건물 몇 채와 그 가운데 큰 마당을 가슴높이 정도의 울타리가 두르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다리와 목이 유달리 길다란 새 한 마리가 울타리 주변에 난 얼마 안 되는 풀을 먹으며 걸어다녔다. 마당은 검푸른 피부와 긴 귀, 흰색이나 은색 머리에 가벼운 가죽 갑주를 입은 남녀 10여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빙 둘러 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마당 가운데에 공간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소리로 들리기에는 너무 낮은 진동이 공기를 울렸다. 마당을 두르고 있는 검은 피부의 전사들이 불안한 기색은 없이 살짝 긴장하는 동안 다리가 긴 새는 꿔억거리며 울타리를 따라 달아났다. 이윽고 그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고, 그 수는 점점 늘었다.

“저들인가.”

순간이동자들이 도착하고 있는 마당에서 언덕 위편의 목책에서는 울타리 안이 들여다보였다. 이곳에서는 두 명의 전사가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은 긴 망토에 후드를 쓰고 뿔이나 뼈로 만든 활을 둘러멘 채 목책에 기대어 있었고, 마당에 선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암회색 피부에 긴 귀, 얼굴에는 큰 흉터가 눈에 띄는 쪽은 대검을 차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사 쪽이 목책에 기댄 궁수를 돌아보았다.

“예, 마하스트린,1 이번에 노스탤지아에서 보내는 전령단인 모양입니다.”

궁수는 하나하나 도착하는 전령단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허리에 찬 화살통에 가득한 화살 깃털을 어루만졌다. 후드의 그늘 속에 그녀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빛을 띄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대원을 보내는 것인지… 짐작이 맞다면…”

검사는 이제 살짝 안절부절 못하며 동의를, 혹은 대답을 구하듯 궁수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아라니아카? 정말 인간들이 뜻대로 하게 두실 겁니까?”

마당 가운데서 금발 청년 하나와 검은 피부의 청년이 치고받으며 낄낄거리는 모습을 내려보다가 아라니아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인간과 싸우려는 것이지 그들에게 지배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으면서 결연했다.

"라카'쟈나인,2 그 자리가 공석인 지금은 프리야 마타3께서 우리를 지휘하신다."

마당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동맹이라고 자칭하는 인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그녀를 돌아보는 검사의 뺨에 흉터가 실룩였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저들이 프리야 마타를 알현하기 전에…!”

“서두르지 말거라, 칸드라사.”

궁수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저들의 요구를 듣고 나서도 늦지 않아.”

후드 아래서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오히려 그때가 가장 적기일지도 모르지.”

“아라?”

칸드라사가 불안하게 보는 동안 아라니아카는 화살통 위로 휙 망토를 덮고 목책에서 떨어지더니 유유히 남쪽 문을 지나 들어갔다. 문에 드나드는 상인과 농부, 전사들이 그런 그녀를 보고 인사했다. 아래편, 울타리 안에서는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이들이 경비서던 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칸드라사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역시 돌아섰다. 밑에서 다리가 긴 새는 다시 평온하게 풀을 뜯으며 가끔 하늘을 보고 꿔억거렸다.


다음날 밤…

다크엘프들의 도시, 메타포노비아의 밤은 적막했다. 가끔 밖에서 베하라쟈 새만 비명을 지르듯 우는 동안 아시타는 배정받은 숙소의 공동 접대실에서 부드러운 등잔빛 속에서 서류를 넘겼다. 가뜩이나 환영받지 못하는데 보고까지 대충 해서는 무슨 책을 잡힐지 모른다. 고요의 해안, 아렌 고원, 아나르 시릴에서 들어온 첩보를 보며 그는 머릿속에서 정보를 종합하고 정리했다. 십자군의 내륙 진출, 아렌 고원을 둔 각축, 록윌 요새와 연합개척기지의 존재와 확장하는 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림은 머릿속에 착실히 그릴 수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문에서 나는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손이 칼로 갔다가 그는 아스타틴이 아직 안 들어왔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환영하지 않는 다크엘프들의 눈빛 때문인가, 여기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노스탤지아 대원이 아니었으면 혼혈인 그는 이곳에 오는 순간 죽었다. 게다가 노스탤지아 대원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떨구었다.

“아직도 덜 끝난 거야?”

아스타틴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등잔빛 속에 그의 얼굴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늦었는데 적당히 좀 하고 쉬지.”

“아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이대로 가면 우리는 진다는 생각을...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일 뿐이었으니.

“가우르4는 어쩐 거냐? 밖에 매어놨나?”

늘 옆에 그림자처럼 따르던 루테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사냥이라도 하러 갔나?

잠시 침묵하며 아스타틴은 겉의 그 이불 같은 외투를 벗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네 녀석 단점 하나 말해줄까?”

등잔불 속에 그의 눈은 피곤하고 슬프면서도 어딘가 맑았다. 양쪽 색이 달라서 처음부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또렷하게 녹색과 파란색으로 빛났다.

“지나치게 일에 열심히야. 그리고 궁금증도 많고.”

“아가씨의 비밀이란 말이지… 알았어.”

아시타는 팔짱을 끼며 뒤로 기대앉았다. 아스타틴과 이야기하면 어딘가 기분이 편해졌다. 혼혈이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같은 아픔 때문일까.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누구에게나 가시부터 세우는 아스타틴에게서 이전의 자신을 알아보았고, 아시타 자신이 도움을 받았듯 아스타틴을 도와주고 싶었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원수 대하듯 하는데, 무리할 것 없잖아.”

아스타틴은 쌓인 듯 조금은 격앙된 어조였다.

“억지로 녀석들한테 아부하지 말라고.”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다크엘프 녀석들이 편견과 원한에 매달려 자멸하고 싶다면 그렇게 두라지. 하지만 무엇이 걸렸는지 생각하면…

“그런가, 내 입장에선…”

그는 문득 뉴 임페리얼 작전을 실행한 밤을 떠올렸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울지조차 못했던 노예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수천의 목숨을 생매장한 폐광을, 사람을 죽여 쓰레기처럼 버렸던 그 단체 무덤, 아니 시체 쓰레기장을, 굶어서 퀭한 얼굴의 아이들을, 파헤쳐진 숲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없는 사람들을.

알면서 좌시할 수 있는가. 다크엘프 몇이 좀 불친절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 있어?

”…좀 더 잘 풀렸으면 하는데.”

프리야 마타에게 전해야 하는 노스탤지아의 요청, 여기까지 몰린 그들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진통은 만만찮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 싸움의 주축이었던 이 긍지높은 민족이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원하지 않아도 또 다른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다크엘프들의 적의어린 눈빛,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대화. 사태는 노스탤지아 지도부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심각했다. 어쩌면 프리야 마타조차 잘 모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전사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스타틴.”

“응?”

혼자 뭔가 생각에 빠져있던 하프엘프는 그를 마주보았다.

“내일 보고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 가는걸로 하지. 너와 다른 녀석들은 숙소에서 대기하도록 해.”

“어째서?”

아스타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일 있어?”

“별거 아냐.”

아시타는 웃으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정말 별거 아닐지도 몰랐다. 쓸데없이 예민해져서 걱정만 많고, 이거 노인이 다 됐나. 아무일도 없이 무사히 끝난다면 나중에 아스타틴에게 그의 착각을 털어놓고 실컷 비웃음을 들으리라. 그러기를 바랐다.

“보고하는 자리에 입이 많으면 오히려 번거로우니까.”

등불 심지에 뚜껑을 덮어씌우자 불빛이 나갔다. 이제는 달빛만 방안에 고요히 비쳐들었다.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아시타는 걱정스러운 아스타틴을 보고 미소지었다. 누군가 걱정해주는 것이 얼마나 생소하고 반가운지 녀석은 알까.

“음. 아까 내 단점을 말해준 보답으로 이번엔 너의 단점을 말해주도록 하지.”

아시타는 손을 뻗어 아스타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누가 하고 싶어서 하냐. 시키지나 말지.”

그런 아스타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키고 싶은 전우,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에 너희더러 그 불투명한 먹구름 속으로 동행해달라고 할 수가 없다고. 혼자 살아온 혼혈에게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낯선 만큼이나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겠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신 그는 말했다.

“면담은 새벽녘이라고 하니, 푹 자둬.”

아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지나친 생각이겠지.

“다른 녀석들에게도 나 혼자 갈 거라고 전해두고.”

등잔과 서류를 집어든 그는 아스타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잠들 때까지 보고사항을 더 읽어보면 잠이 올 것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들어온 아시타는 침대가 탁자에 등잔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고요 속에 속삭이는 동안 작은 등잔빛만이 적막하고 거대한 밤을 몰아냈다.


아시타는 아침에도, 심지어 늦은 오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아마 열 번도 넘게 아스타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네 이녀석…”

오른손 손가락은 어느새 왼손 손등 위에 빠른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류트라도 연주하면 마음이 안정할까 싶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켜. 이러다가 '기다렸냐?' 하면서 뻔뻔하게 웃으며 나타날 게 뻔했다.

아시타가 늦는다는 불안 이상으로 이곳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의 공기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문득 깨달았다. 묘한 침묵과 불편한 분위기, 대원들의 눈빛과 속삭임은 끊어지기 직전의 현처럼 잔뜩 긴장한 떨림을 손끝에 전달했다.

자신도 모르게 아스타틴은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그냥 두려워하는 무의미한 시간은 오래 전의 불쾌한 기억을 휘저었다. 아빠, 엄마는 언제 와? 아스타틴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갑작스런 소음이 오후의 침묵을 깨자 아스타틴은 화들짝 돌아보았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문이 우당탕 열리면서 급한 발걸음이 여기저기로 달려갔다.

“본부와 연락을 취해!”

“마법사! 연락 마법사를 불러!”

원하지 않으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문으로 향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아스타틴은 마당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다른 숙소 문을 쾅쾅 두드리는 사람, 마굿간에서 급히 끌어내어지자 고개를 쳐들며 히힝거리는 말, 언성을 높인 대화와 다급한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부딪혀 왔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해야 했다. 난 엘모스에서 같이 이동해온 동료를 알아본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손을 뻗어 그를 불러세웠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대원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가 그를 알아보고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스타틴.”

대원은 순간 피하고 싶은 듯 눈을 양옆으로 굴리다가 그를 마주보며 침을 삼켰다.

“아시타가…”

그의 목소리가 침중하게 가라앉자 아스타틴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혼자 가겠다고 하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게 무슨 잔혹한 장난이란 말인가. 텔루르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다크엘프들은 노스탤지아의 동맹이었고, 아시타는 사자였다.

아시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소란이겠지? 아니면 좀 다치기나 했겠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아스타틴은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죽었다. 회담장에서.”

대원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창백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그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사절이 왜? 동맹의 땅에서 왜? 아시타가 혼혈이라서? 어째서? 뭔가 착오가 있었다. 누군가의 농담이었다. 거짓말이었다.

빨리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를 바라며 쳐다보는 동안 대원이 하는 얘기가 조각조각 아무 의미도 없이 들려왔다. 본부와 사후처리 논의 중.. 네가 아시타와 가까웠다는 건.. 좀 쉬어두도록..

“장난…이라도 치시는 건가요.”

이 사람이 시인하지 않겠다면 아스타틴이 직접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지,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다만 머리가 너무 울려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장난 심한 건 알지만…”

류트 대신 너구리를 가방에다 넣어놓고, 연락 거점으로 간다면서 엉뚱하게 드워프 마을로 데려가서 밤새 술을 먹이던 게 녀석의 수법 아니었던가. 그런 아시타의 장난이 틀림없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비오는 날에 먼지나도록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그랬다. 그렇게 유쾌하게, 완전하게 살아있던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아시타?

“바로 어저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괜찮다고…”

그는 등뒤의 숙소에 손짓하며 바로 어젯밤에 멀쩡하게 저곳에 있던 녀석이 죽…었다는? (죽어? 그게 무슨?) 그런 소리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대원에게 열심히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그 완벽한 논리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끊어졌다.

“루카스!”

루카스는 그쪽을 쳐다보고 아스타틴을 다시 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아스타틴은 갑자기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멱살을 잡으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이 거짓말쟁이, 그 연민은 개나 줘버려. 아시타나 데려와! 그 녀석은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아스타틴… 이건 장난이 아냐.”

아스타틴은 갑자기 모든 분노가 사라지면서 힘이 빠졌다. 루카스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과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서 다리가 풀려왔다.

“미안하다.”

루카스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스타틴은 숙소 문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냐… 그럴 리가…”

왜 아시타가 죽었을 리 없는지 누군가를 설득해야 했다.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믿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사람이 이유도 없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잖은가. 그런 일은…

엄마 어디 갔어? 왜 안 와?

“어째서…”

아스타틴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막았다. 조금이라도 기댄 이는,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데려가고 또 데려가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막아내고 혼자만의 공간에 존재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다시는 아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슴이 꺼질 것 같은 이 고통을 또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목이 뜨겁게 메이더니 감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유쾌하게 웃던 아시타의 모습은 눈을 감아도 없어지지 않았다. 별거 아냐… 하던 그 뻔뻔한 얼굴이.

보고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 가는 걸로 하지.

아스타틴은 손을 내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을 뜨자 안개낀 듯 흐릿한 세상 속에 사람들이 아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래서 그 나쁜놈의 새끼가 혼자 간다고 했던 것인가. 억지로라도 혼자는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위험에는 함께 맞섰어야 했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죽어간 아시타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리면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나 때문이야…”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 말에 반박할 어떤 논리도 찾지 못하고 그는 가만히 앉아 고통을 숨쉬었다. 위기와 목표와 사명과 방향성을 띠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는 많은 이 가운데, 오직 혼자서.


“야 이 녀석, 여기 넋놓고 앉아있긴…”

아시타? 그러나 안쓰럽게 말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은 젖은 재 같은 진회색이 아닌, 기름진 흙처럼 풍부한 갈색이었다. 그 억세면서도 따뜻한 손에 이끌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아스타틴은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온기를 느끼며 (좋은 꿈 꾸렴, 아스타틴) 다시 기억이 끊어졌다. 어쩌면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놓쳐버렸지만, 누워있거나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다 보면 숙소가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일이 몇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루카스나 다른 대원이 한두 명 찾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에서 그는 원치 않아도 상황을 조금씩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다크엘프의 프리야 마타에게 다크엘프 부족 전사대 지휘권 이양이라는 노스탤지아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러 갔던 아시타는 회견장에서 다크엘프 여전사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 (전사. 여전사. 그들의 고위 전사는 모두 여자였다. 모닥불에 은은히 빛나던 텔루르의 하얀 머리칼이 기억을 스쳐갔다.) 인간 국가에 맞서싸우는 동맹 집단의, 설사 적이라 해도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사절을 다크엘프 전사가 쏘아죽였다. 프리야 마타의 눈앞에서.

그것이 프리야 마타의 배신이었다면 아스타틴도 다른 대원들도 여기에 앉아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리야 마타는 암살자를 구금할 것을 명했고, 노스탤지아에 알리며 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휘권 이양 문제도 크게 양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요?”

아스타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루카스는 잠시 쳐다보다가 불편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숙소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살이 갈색 피부에 반질반질 빛났다.

“뭐…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아시타가 죽었다는 얘기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든, 결과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든 못했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루카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문에까지 안내했다. 잘 좀 챙겨먹으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바쁜데 굳이 오시지 말라고 했다. 그가 가는 모습을 외면하며 아스타틴은 굳게 문을 닫았다.

소감

이번 분량은 대부분 1화 장면을 삭풍님, 오체스님, 저 셋이서 재촬영한 대목이군요. 재촬영한 분량 중 안 올라온 건 이제 한 장면쯤 남았습니다. 소수 인원으로 한 만큼 좀 더 긴 호흡으로 사건과 인물을 드러낼 수 있었던 점이 의미깊었던 것 같네요.

이번 화의 주축을 이루는 사건은 이 캠페인의 루바트 오르가나인 아시타의 죽음입니다. 성격 좋고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 캠페인 시작하기도 전에, 혹은 시작하자마자 자기희생하는 현상을 또 보니 재밌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 부분은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 소설 신들이 사랑하는...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1부에서 다룬이 형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의 반응이 생각나더군요.

슬픔의 다섯 단계 중 첫 번째는 부인이라던가요. (지금 장난쳐요?) 다음은 분노 (나쁜 새끼!), 다음은 흥정 (혼자 보내지만 않았어도...), 무기력 (방에서 시체놀이), 그리고 마침내 수용 단계라고 하죠.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순서인 건 아니고 또 단계가 서로 겹치거나 반복할 수도 있지만, 제 경험도 그렇고 글 쓸 때도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 단계를 따르게 되더군요.

아스타틴은 아시타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상처는 굉장히 크겠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엄마의 실종에서부터 시작해 사랑하는 사람을 대부분 잃은 정신적 외상을 건드렸을 것 같아서 어릴 때의 기억도 일부 넣어보았습니다. 상처받기 싫어 다시 사람을 멀리하게 된 그가 플레이 중에 그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가는군요. 그러나 아시타를 죽인 인물과 함께 여행하게 된 현실은 시궁창입죠.

처음이자 마지막일 아시타 시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좀 평면적인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겉보기와 다른 모습이 조금은 들어갔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죠. 안힐라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노스탤지아가 어떤 집단이며 싸움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 암시할 수 있었던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스토리 진행이나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너무 묘사만 해대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시타 시점으로 설명을 대신하니 어느 정도는 구색을 갖춘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래서 시점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점 하니, 메타포노비아 도착 장면도 지켜보는 다크엘프 쪽으로 시점을 바꾸니까 확 달라지는군요. 한편 아라의 살인은 계획적인 모살로 완전히 확정이 되어 인물은 점점 수렁에(..) 이렇게 악당에 가까운 PC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재밌습니다. 물론 랜돌프가 일행에 있는 한 일행 제일의 악당 자리를 먹기는 글렀습니다만... (죽여야지(?)) 아라 역시 플레이를 통해 어떻게 변해갈까 관심이 갑니다.

이 부분은 이전에 한 외전 어떤 작별과도 시간대가 겹칩니다. 아시타 시점 장면에서 숙소로 돌아온 아스타틴은 낮에 왠 정신나간 다크엘프한테 이쁜이를 뺏기고 허탈한 심정으로 종일 메타포노비아 주변을 쏘다닌 후겠죠.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시타의 죽음까지... 흑흑 불쌍해라, 위로하는 의미에서 랜디하고 BL 장면 써줄게요. (??)

전반적으로 이번 재촬영 플레이는 대사와 묘사가 다 좋아서 소설화하기에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좋은 마스터링과 플레이 해주신 삭풍님과 오체스님께 감사드리고요, 가차없는 피드백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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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뛰어난 궁수를 가리키는 다크엘프어 [돌아가기]
  2. 다크엘프의 군사적 지도자, '붉은 여인.' 흔히 '여왕'이라고 번역한다 [돌아가기]
  3. 라카'쟈나인의 후계자, '소중한 어머니.' 흔히 '공주'라고 번역한다 [돌아가기]
  4. 표범 비슷한 검은 큰고양이과 맹수 [돌아가기]
2010/03/19 15:37 2010/03/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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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1편입니다.

20100307.html

리플레이: 이오닉스 1화

벽에 높게 난 창문으로 봄 햇살이 비쳐들며 살짝 어수선한 작은 방을 비추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와 수정, 유리병 따위의 잡동사니가 흩어져 바닥에까지 일부 쏟아졌고, 옆의 소형 책장에는 커다란 책을 넘칠 정도로 꽂아놓아 언제 어느 책이 튀어나올지 위태위태했다. 좁은 침대 발치에 깔아놓은 싸구려 소형 양탄자 구석이 접혀 나무바닥이 드러난 데는 탄 자국이 보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브를 입은 깡마른 형체가 들어섰다. 허리까지 기른 황금빛 머리칼은 햇살을 끌어들여 품듯 빛나며 섬세한 얼굴선을 그윽하게 감싸주었고 가느다란 눈매와 매끈한 광대뼈, 유연한 턱선은 남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입을 벌리면서 나온 한숨은 완연한 남자 목소리였다.

“하아..”

청년이 침대에 몸을 던지자 이불과 침대보가 부풀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잠시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그는 끄응.. 몸을 뒤척여 등을 대고 눕더니 멍하니 햇살 가득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옷 속에서 목걸이에 매달린 펜던트를 꺼낸 그가 낮게 한 마디 중얼거리자, 펜던트가 열리면서 펜던트 뚜껑과 본체에 하나씩 두 여인의 초상이 드러났다. 작은 몸집에 수줍어보이는 긴 금발머리 여인을 그는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무른 쪽은 다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와 길고 우아한 목선,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갈색 눈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청년은 펜던트를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 저편에서는 예의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노바 사형, 스승님께서 부르십니다.”

“응, 간다.”

제노바라고 불린 청년은 펜던트를 다시 로브 속으로 떨어뜨리며 일어나 앉았다.

“크세노바라니까 다들 왜..”

궁시렁거리며 그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책상 가장자리에 버티고 있던 구슬 하나와 매끈한 조약돌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똑또르르 굴러갔고, 이윽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부르셨어요?”

제노바, 아니 크세노바가 입이 잔뜩 부어서 문을 연 방은 청년의 방을 물건의 양과 혼돈의 정도에 맞추어 확장한 느낌이었다. 네 개의 벽을 다 차지한 대형 책장과 선반에는 얇은 책자에서 남자 어른이 간신히 양팔에 안을 만한 크기까지 무수한 책을 비롯하여 약재가 든 병, 약간 놀라보이는 토끼니 쥐 등 작은 동물이 떠있는 커다란 유리병, 물이 없는 어항, 새장 속에 떠도는 빛무리, 속에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수정구, 온갖 크기와 색깔의 깃털, 말린 원숭이 앞발 등등 형언할 수 없는 잡동사니가 꽉꽉 차있었다. 다리끝이 맹수의 발처럼 생긴 거대한 책상은 종이와 책이 넘쳐나서 표면이 보이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긴 작업대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분홍빛 시약이 든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계속 중얼거리는 노인 옆에는 양피지가 펼쳐 있었고—종이가 더 싸고 좋다고 아무리 잔소리해도 듣지 않는 노친네는 있게 마련이었다—그 위에는 노인이 말하는 속도에 맞추어 깃털펜 하나가 혼자 열심히 움직이며 필기를 했다. 문이 열리자 마법사는 무성한 눈썹 밑으로 푸른 눈을 문으로 향하더니, 병을 내려놓고 의자에 뒤로 기대앉았다.

“왔냐, 이 망나니놈아.”

작업대로 다가가면서 마법의 깃털펜이 왔- 냐- 이- 잉크병에 뛰어들었다가 돌아와 망- 나- .. 하고 열심히 적는 것을 보고 크세노바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스승이 짜증스럽게 손을 젓자 깃털펜은 잉크를 몇 방울 흩으며 툭 쓰러졌다. 길게 누운 펜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들려온 것은 아마 착각이리라.

“어떤 일로 부르셨습니까.”

로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무심히 묻는 제자를 보고 노인은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왠만하면 너같은 놈은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제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의자에 깊이 기대앉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허리까지 닿는 길고 풍성한 수염은 그러기에 딱 좋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느냐.”

청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노인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하여튼 내가 왜 너같은 놈을 키웠을꼬… 아무튼 각설하고.”

스승은 작업대에 팔꿈치를 얹으며 제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안힐라스로 가야겠다. 임마.”

크세노바는 잠시 이 노인이 치매인가 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말했다.

”…좀 뜬금없는데.”

“왜 얼굴이 뚱하냐 이놈아?”

스승이 깃털펜을 잡아채서 크세노바에게 대고 흔들자 펜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서 끽 소리를 냈다.

“이 인자한 스승이 해외여행을 시켜주겠다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만 20일은 걸리잖아요.”

청년은 이런 말다툼을 자주 한 기색으로 팔짱을 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스승 역시 익숙한 기색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누군지 잊었느냐? 시간은 걱정 말거라.”

“아, 그러고보니 조만간 어머니 생신이군요.”

오랜 경험으로 패색을 느꼈는지 청년은 조금씩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 불효자식이 되기 싫으니 역시 그냥 가보겠습니다.”

크세노바가 잽싸게 문고리를 잡는 것을 보고도 스승은 느긋하기만 했다.

“어쨌든 그쪽과도 얘기가 끝났고…”

청년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지만, 노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얘기했으니 잘 다녀오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좀…”

청년이 방문을 열면서 도망치듯 나간 순간, 갑자기 부웅- 소리가 나면서 그 주변의 공기가 묘한 왜곡을 일으켰다.

“아 영감님 이러시기요!!”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청년의 고함 위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네놈이 그러리라는건 마탑의 현자 12인중 12인이 동의한 사항이지.”

크세노바의 금빛 머리카락을 더욱 눈부시게 물들이며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그 빛 속에 그는 이를 갈며 스승을 돌아보았다.

“잊지 않겠..!”

“여행 잘 다녀오거라.”

스승이 즐겁게 손을 흔들어주는 동안 빛은 더욱 눈부시게 확 끼쳐왔고, 빛이 사라졌을 때 크세노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더 낄낄거리다가 노마법사는 휘파람을 불며 시약병을 집어들었고, 깃털펜은 지친 한숨을 쉬며 폴짝 뛰어 일어났다.


텔레포트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장거리는 처음이어서 그런지 이전과 경험은 사뭇 달랐다. 어느 순간 그는 아득한 높이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의 땅덩이… 저것이 안힐라스? 끝없는 숲과 험준한 산맥, 바다와 사막과… 아니, 그 이전에 이대로 떨어졌다가는!

마치 헤엄치듯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저었지만, 그에게는 팔도 다리도 없었다. 오직 감각과 사유뿐. 아니, 이 높이에서 얼어죽을 정도로 춥지 않다면 완전한 감각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그 땅덩이는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오기만 했고, 크세노바는 입이 없었지만 비명을 질렀다.

눈을 질끈 감는 기분으로 잠시 인식을 껐던 것일까 (기절이라는 가능성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아니면 이 초자연적 여행의 단계전환을 유한자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한 것일까, 추락의 감각이 문득 끊어지더니 그는 이번에는 끼룩거리는 갈매기떼의 틈에서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저 밑으로는 장난감 같은 배들이 하얀 증기를 내뿜거나 돛을 부풀리며 항구로 들어왔다.

다시 전환. 그는 숲의 나무 사이를 빠른 속도로 날거나 혹은 달렸다. 나뭇가지와 나무둥치가 정면에서 때릴 듯 슉슉 다가왔지만, 그는 마치 바람 그 자체인 듯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더 빨리, 더 빨리…

그리고 산꼭대기를 스치고, 잿빛 모래바람을 헤치고, 도시의 지붕 위와 탁 트인 들판을 달리며 그의 속도는 빨라지기만 했다. 어디 가는지 모르는데도 이제 거의 다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빨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빛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졌다.

소감

이제부터는 어느 정도 실제 기록을 근거로 한 소설화입니다. 제노님의 제노법사 크세노바 등장장면 부분이죠. 리플레이 분량은 별거 아니어도 소설 분량은 의욕에 따라서는 정말 고무줄처럼 늘어나는군요. 실시간으로 하는 성격상 플레이 중에는 자세하게 할 수 없는 묘사를 대폭 추가한 것이 소설의 특유의 재미라면 재미일 것입니다.

마탑 묘사는 해리 포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자동구술 깃털펜이나 생명력 있는 마법물품 같은 건 해리포터 보신 분들은 낯익으시겠고, 엉뚱하고 혼란스러운 마법사들 분위기도 해리포터에 영향을 받았죠. 삭풍님과 제노님의 코믹한 RP를 보고 더 해리포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리플레이와 많이 다른 부분이라면 우선은 크세노바의 안힐라스 도착 후에 있었던 노스탤지아 지도부와의 만남을 뺐다는 점이고 (이 대목은 나중에 간단한 회상으로 축약합니다), 두 번째는 순간이동 중의 경험을 추가하면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 크세노바 관점으로 전환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역시 안힐라스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분위기라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그런 면에서는 서장과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소개가 충분히 되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나중에까지 읽다 보면 안힐라스의 상황이 전달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마법적 이동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고 해서 크세노바는 대륙 간 이동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만, 그의 경험은 워낙에 장거리 이동이라는 점과 크세노바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점에 영향을 받았을 듯합니다. 나중에 나오는 랜돌프의 순간이동 경험이 꽤 다르듯이 순간이동의 구체적 경험은 인물마다, 또 상황마다도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법은 어느 정도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다음 편은 '잿빛 메타포노비아'군요. 이쪽은 내일 저녁 재촬영 일정(..)이 있어서 아마 내일 모레나 그 후에 올라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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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12:22 2010/03/1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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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첫 플레이 후 며칠 동안 리플레이 소설화 작업을 했습니다. 피드백 기간이랑 설정 조율 때문에 또 며칠이 들어갔군요. 그나마도 재조정 관계로 아직 빠진 장면이 있어서 한꺼번에는 못올리겠군요. 게다가 분량도 좀 피를 토하는지라 몇 편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리플레이는 올려두지만, 오늘 올리는 서주는 리플레이에는 안 나오고 소설판에만 추가한 부분입니다.

20100307.html

리플레이: 이오닉스 1화


숲 어귀에는 시원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이곳까지 따라온 길은 숲으로 얼마 들어가지 못해 좁아져 사냥꾼이 다닐 만한 오솔길이 되더니 곧 그마저 없어졌다. 그리고 이곳, 길이 끊기고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두 남녀는 잠시 멈추었다.

“이곳에서부터 안전히 가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묶은머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이른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며 몇 가닥이 가벼운 바람에 흩날렸다. 가볍게 주름지기 시작한 가느스름한 눈매, 흐르듯 부드러운 광대뼈와 턱의 선 때문에 순한 인상이 드는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그 표정에는 다스리려고 태어난 사람의 기품과 절제가, 꾸밀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귀족의 흔적이 뚜렷했다. 그러나 몸짓은 얼굴만큼 차분하지 못했다. 마치 손을 어디다 둘지 모르겠는 듯 그는 양손을 비싼 외투의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빼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다시 서글서글한 눈 앞으로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 작은 짐꾸러미를 꼭 안고 선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잠시 올려다보는 얼굴은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한 번이라도 본 이는 인간이라고 착각할 수 없었으리라. 넓은 이마와 동그란 눈에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 작은 턱을 향해 좁아지는 갸름한 다갈색 얼굴의 선, 그리고 유달리 긴 매끈한 갈색 목에 깃든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우미함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후드를 내린 지금 길고 끝이 뾰족한 귀가 검은 머리칼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 처녀 같았지만, 갈색 눈에 깃든 슬픔과 세월에는 인간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사내는 잠시 말을 잊고 그런 그녀를 마주보았다. 머뭇머뭇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괜찮…겠습니까?”

여인은 그의 말에 가슴이 아릴 정도의 슬픔이 담긴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베인그람 제독님.”

목례하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로엔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들며 눈을 마주치자 로엔은 데인 듯 손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감사드릴 이는 저입니다, 마이아나.”

한결 침착해지며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때 나를 구해주고 산장에서 치료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죽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노예 되어 갖힌 나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하루하루 천천히 죽어갔겠지요.”

그녀는 손바닥을 앞으로 해 오른손을 그의 어깨 높이 정도로 내밀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대와 나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에어그웬드1를 나와 나눈 그대에게 감사해요, 로엔 베인그람.”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해가 더 높이 떠오르면서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그녀의 머리칼 위에 반짝이며 맑은 눈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베인그람은 눈이 부신 듯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마주댄 채 똑바로 눈을 마주친 둘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거울에 손을 대고 응시하듯 그렇게, 모든 차이와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그 영원의 숨결 속에서.

이윽고 마이아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서 손을 떨구었다. 조용히 웃는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 보였고, 옷가지나 음식 따위가 든 짐꾸러미가 형용할 수 없는 무게기라도 한 듯 작은 어깨는 지쳐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에요, 로엔.”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녀는 자신마저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날들에도 축복의 순간은 분명 존재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와주었듯, 내가…”

말을 끊고 마이아나는 돌아서서 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길 없는 숲으로 향했다.

“안녕히.”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는 로엔의 얼굴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과 싸우는 사람처럼 그는 한손을 뻗었다가 억지로 주먹을 쥐어 그 손을 거두고, 부르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그를 순간 돌아보는 마이아나의 형체는 이미 햇살의 일부가 된 듯 현실감이 없었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꿈처럼…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낮추더니, 녹아 없어지듯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어선과 상선, 군함이 정박한 제국령의 앞바다에는 조용히 저녁이 내렸다. 어스름이 깔린 동쪽 하늘에는 하나둘 별이 떴고, 석양의 불타는 광휘 가득 펼쳐진 서쪽 하늘에는 세인트 힐더의 첨탑과 지붕과 더 서쪽의 숲이 검은 윤곽을 만들었다. 이 빛 속에서는 안힐라스의 야생림과 제국 도시의 선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서로 싸우는 두 문화에 속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증기선에 갑판 난간에 기대선 남자는 피곤하게 얼굴을 비볐다. 서쪽을 마주본 그의 뒤로 묶은 머리는 석양에 붉게 물든 채 바닷바람에 가볍게 날렸다. 오전에 출발했어야 하는 배는 그의 명령으로 빠진 여행서류 확인, 빠뜨린 짐 회수, 기후현황 확인 등 온갖 지연 때문에 이미 오후를 넘어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도 간간히 선원들의 투덜거리는 불평이 들려왔지만, 그는 떠나야 할 방향이 아니라 하염없이 서쪽만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 자신도 어쩌면 알지 못한 채 그는 제국 도시 너머에 펼쳐진 먼 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독 각하.”

갑판에 발걸음이 저벅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의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말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이 일대에 폭풍우가 닥쳐오기 전에 벗어나야 합니다.”

폭풍우 얘기에 아주 잠깐 표정이 밝아졌다가 로엔 베인그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부관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는 세인트 힐더에, 그리고 그 너머의 안힐라스에 손짓했다.

“떠나는 것이 아쉽지는 않은가, 데니? 아름다운 땅인데, 그립지 않겠나?”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상관의 옆얼굴을 보다가 부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기도 합니다. 이미 실종되었다가 돌아오셨는데, 이 개척지에서는 되도록 계시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미욱한 마음입니다.”

“위험… 그래, 그 말이 맞네.”

제독은 천천히, 다소 고통스럽게 미소지었다.

“개척지…니까.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옛것을 파괴하는 곳.”

바다의 움직임에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등뒤의 도시와 들판과 숲, 세인트 힐더와 안힐라스를 돌아보았다.

“자아와 타인,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맞닿는 안힐라스이니까.”

“괜찮으십니까, 제독님?”

다시 고개를 돌려 데니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제 괜찮아야겠지. 출항 명령을 전하게.”

“예, 각하.”

데니는 인사하고 서둘러 갑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런 데니가 항해사와 이야기한 순간부터 선원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함치듯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이윽고 배의 거대한 증기 엔진이 가동하면서 하얀 연기가 어둑한 하늘에 퍼지는 모습을 로엔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치 이끌린 것처럼 흐려가는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삐죽삐죽한 검은 선일 뿐인 서쪽 숲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각하!!”

갑자기 난간을 붙잡더니 마치 몸을 던지기라도 할 듯 내미는 제독을 보고 데니는 소리를 질렀다. 로엔이 홱 돌아보는 동작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출항 준비를 중지한다! 승강대를 내리게!”

“예? 각하..”

데니가 저지하기도 전에 로엔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선원들이 서둘러 승강대를 내리는 것도 미처 기다리지 않고 배에서 뛰듯 내리는 그를 부하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았다.

부두에 내린 로엔은 몇 척 건너 정박한 배 뒤편으로 뛰어갔다. 머리에는 후드를 쓴 채 가슴에는 작은 짐꾸러미를 안은 여인은 금새라도 도망갈 사슴처럼 연신 주변을 불안하게 보다가 발걸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로엔이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자 그녀는 작게 소리를 지르면서 짐꾸러미를 떨어뜨렸다.

로엔은 그녀의 어깨를 붙든 채 몸을 조금 떼었다. 그의 목소리는 격정을 간신히 억제한 채 떨리는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했습니까…!”

후드가 벗겨진 마이아나는 동그란 눈이 어둠 속에 물기를 품고 빛났다.

“한 번…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진짜인가 확인하듯 그의 팔을 맞잡더니 마이아나는 천천히 그에게 몸을 기대왔다. 로엔은 치명상을 입은 사람처럼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그의 팔이 올라와 마이아나를 꼭 붙들었다. 그렇게 그저 서로 상대의 존재를 호흡하며 침묵한 긴 순간 끝에 마이아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며 올려다보았다.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마이아나!”

석양의 마지막 빛에 잠긴 그의 얼굴은 잠깐 환해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럴 수는… 당신에게는 완전히 낯선 곳인데, 게다가 그곳에서 당신의 신분은-”

마이아나가 손을 들어 그의 입술에 손끝을 대자 로엔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당신만큼이나 나도 많이 생각했어요. 무모하고 위험한 건 알아요. 다 알지만…”

가끔 갈매기만 우는 조용한 공기중에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어쩌면 비겁하게 도망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슬픔을 피해버리는 걸지도요.”

혼잣말처럼 말하다가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해요. 헤어지고 후회하기보다는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함께하고 후회하고 싶어요.”

시선을 낮추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는데… 여기서 헤어지면 1년 후에 내가 이곳에 있을까요? 당신은? 그러니까..”

로엔은 몸을 숙여 마이아나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추었다. 석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윤곽은 하나가 되어 서로 녹아들었고, 짧은 입맞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한 가지 작은 확신을, 위안을 찾아 서로 기대는 따뜻한 포옹이 되었다.

마이아나의 머리카락에 입맞추고 로엔은 고개를 들었다.

“나와도 좋네, 데니.”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부관이 어망 뒤에서 걸어나왔다.

“부하들은 배에 남아있게 했겠지?”

“물론입니다.”

데니는 마치 질문 자체가 모욕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마이아나는 데니를 보고 놀란 기색은 아니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며 그를 살피고 있었다. 로엔은 그런 그녀의 머리에 부드럽게 후드를 씌워주고 어깨를 감싸안으며 부관을 마주보았다.

“내가… 자네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겠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데니는 이윽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함께 갑판에 서서 멀어져가는 해안을 바라보는 두 사람 위로는 검은 하늘에 저녁별이 빛났다. 세인트 힐더와 그 너머의 안힐라스는 석양의 마지막 빛 속에 붉게 빛나며 멀어져갔다.

“다시 이곳을 볼 날이 있을까요?”

마이아나의 낮은 목소리에 로엔은 그녀를 아프게 보다가 난간에 얹은 가느다란 손에 손을 포갰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자 밤처럼 검은 머리가 바람에 따라 날리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지켜보는 동안 안힐라스는 불꽃빛 석양이 식어가며 점차 어둠에 잠겨들었다.


소감

뭔가 멋지구리한 시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PC 중 한 명의 부모 이야기를 서장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안힐라스와 서대륙의 비극적인 역사를 표현하면서도 최소한 희망의 여지를 남기기에 그쪽 설정이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설정 조율과 확인에 협력해주신 제노님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급조해서 만들어넣은 데니를 가장 좋아하지만(..)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심리 표현을 하는 건 재밌으면서도 어렵더군요. 말해주기보다는 보여주는 게 묘사의 기본인 만큼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첫 플레이는 재밌게 했었는데, 처음이기도 했고 이것저것 마음이 급해서 삐걱거리는 부분은 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겁스 전투규칙의 재미를 느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주로 제가 이전에는 전투형 인물을 안 만들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무엇보다 충분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느낀 플레이였습니다. 다급하게 진행하시느라 마음고생하신 삭풍님과 참가자분들 모두 수고하셨고요, 나머지 소감은 올리면서 그때그때 적겠습니다.

다음: 이오닉스 1편 (1) >>
주석
  1. 엘프어로 '신성한 우정' [돌아가기]
2010/03/14 14:30 2010/03/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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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스터드젤리 2010/04/1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낭만은 우즈를 가슴뛰게 합니다.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오체스님과 진행한, 아스타틴아라의 첫 만남을 다룬 외전입니다. 전에 오체스님과 얘기해서 정한 추가설정 부분을 기반으로 한 역할극이죠. 함께 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20100228.html

리플레이: 첫 만남


허무의 대지에서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세계수의 재라고 하는 발밑의 고운 흙이 바람에 먼지처럼 날렸고, 오늘은 하늘마저 엷은 회색이었다. 북쪽으로는 불타버린 세계수의 잔해가 잿빛 하늘에 거대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저곳이다."

아시타는 세계수의 잔해를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세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

평소의 장난기는 조금도 없이 우수어린 하프다크엘프의 눈빛에서 아스타틴은 또 다른 다크엘프 혼혈, 이제 세상에 없는 이를 떠올렸다. 아시타가 몇 발짝 떨어져 세계수를 묵묵히 바라보는 동안 아스타틴은 늘 가슴에 달고 다니는 애도의 브로치를 어루만졌다.

"돌아왔어요."

브로치에 꼬아넣은 은백색 머리카락 위로 손가락을 쓸며 그는 속삭였다. 어쩌면 텔루르의 추억 때문에 이곳 허무의 대지는 그에게 더욱 잿빛일지도 모른다.

"아닌 척 했지만... 그리워했던 곳으로."

그는 브로치를 손에 꼭 쥐었다.  그의 양어머니 텔루르는 나서 자란 이 땅에 대한 그리움을 한 번도 내색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가끔 북쪽으로 눈을 돌리던 그녀의 눈빛은 세계수의 잔해를 보는 아시타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그들에게 흐르는 다크엘프 피 때문일까, 아무리 배척받고 차별당해도 세계의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천형은.

고운 잿빛 흙을 품은 바람이 불어오자 아스타틴은 외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앉은 언덕 왼편으로 화살이 거의 닿을 만한 거리에는 언덕 위에 선 다크엘프의 수도 메타포노비아를 두른 목책과 그 위로 나온 지붕이 몇 개 보였다. 아래로는 주변의 언덕과 평원에 작은 민가와 가축우리, 밭 몇 뙈기가 메타포노비아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다크엘프의 지도자인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하러 온 노스탤지아 대원들에게 다크엘프들은 (혼혈과 심지어는 인간도 있는 일행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연락기지에 있으라고 무뚝뚝하게 지시했지만, 아시타는 답답하다면서 결국 아스타틴을 밖으로 끌고나왔다. 역시 먼지바람을 피해 얼굴을 가리며 이쪽으로 돌아서는 아시타를 보며 아스타틴은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 서쪽 언덕은 메타포노비아를 제외하고 주변에서 세계수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고, 왜 인간 혼혈 따위가 세계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지 시비걸 다크엘프도 없었다.

발치에서 커다란 하품소리가 들리자 아스타틴은 미소지으며 내려다보았다. 텔루르의 가우르 루테리온은 쭈욱 기지개를 켜고 입맛을 다시며 편안하게 그의 발치에 누웠다. 등을 쓸어주자 낮게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뼛속까지 기분좋은 진동으로 전해왔다. 지시를 어기고 메타포노비아를 나서는 그들을 경비가 굳이 저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녀석 때문이었으리라. 거대한 사냥꾼의 따뜻한 진회색 털과 주변의 잿빛 흙의 빛깔을 비교하며 아스타틴은 그도 루테리온도 처음 와보는 허무의 대지였지만, 루테리온의 조상에게는 고향이었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 아시타처럼 루테리온도 이곳에 애착을 느끼고 있을까? 마치 피를 통해 전해오는 기억처럼...

"태평한 놈이로고."

올려다보자 아시타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루테리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런 아시타 방향으로 잠시 눈을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 꼬리를 탁 털고 눈을 감았다. 그 반응에 아시타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녀석 타기도 해?"

루테리온을 흥미롭게 보며 아시타가 묻자, 아스타틴은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내며 미소지었다.

"아... 날 태워주기엔 저녀석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녀석, 사람보는 눈은 있군."

낄낄거리는 웃음이 밉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이후 분노와 자책에 빠져지냈던 그를 아시타가 내버려두지 않고 말도 걸고 장난도 쳤을 때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네 일이나 신경쓰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아준 아시타에게 이제는 감사하고 있었다. 비록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시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아주 가끔이지만 자존심을 굽혀주기도 해."

텔루르가 죽고 나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인간 장교를 살해한 후에, 쫓아오는 병사들에게서 헐레벌떡 도망치던 그를 루테리온이 등에 태우고 달린 일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폭풍을 탄 것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와 영원히 달리고 싶은 희열의 기묘한 연금술은 그를 취하게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 후, 루테리온의 거죽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싸매주며 미안하다고 되뇌이던 아스타틴의 사과는 어느새 루테리온이 아닌 이제 이곳에 없는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마침내 더 참지 못한 채 루테리온의 목을 끌어안고 밤새 목놓아 울었을 때 루테리온은 그저 조용히 체온을 빌려주고 얼굴을 부비며 차가운 새벽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 여러모로 위로를 받는달까. 루테리온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어느새 아스타틴은 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텔루르 이후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속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기쁨인 동시에 떨리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군사훈련을 받은 가우르인데 저대로 평생 둘 생각이야?"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추궁 역시. 조금의 전력이라도 더 필요한 전황에 훈련받은 가우르 하나가 놀고 있다는 것은 아시타가 보기에는 낭비일지도 몰랐다.

"음..."

아시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루테리온을 그저 유용한 무기로만 볼 수 없는 아스타틴은 자신이 이 상황에 대해 객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값만 해도 꽤 나갈 텐데.. 뭐 팔아버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면서도 한쪽 어깨를 으쓱하는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분명 제안이 들어있었다. 아스타틴은 순간 불쾌감을 느꼈다.

"팔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라면 남동생이나 누이를 팔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아스타틴은 참았다. 아시타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둘째치고라도, 루테리온은 텔루르와 전투를 함께 하던 군용 가우르이지 애완용 고양이가 아니었다. 가끔 녀석의 눈이 먼 곳을 보는 것은 아스타틴도 알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없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이미 텔루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랑 없는 조용한 용맹, 세상이 뭐라 하든 절대 꺾이는 일 없던 긍지, 그러면서도 내밀한 순간에 보여주던 그 따스한 마음. 그래서 아직까지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런 주인을 기억하는 한 어떤 이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다소 안심하는 자신이 아스타틴은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수는 없겠지."

루테리온을 아낀다고 하면서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 슬픔에 가슴이 조여왔지만, 루테리온이 가겠다면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닌 우정의 시간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호~ 짐승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거야?"

아시타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루테리온이 원한다면 헤어질 수 있겠어?"

자기 이름이 들리자 루테리온은 한쪽 귀를 쫑긋했다. 그 모습에 아직 눈도 못 뜨고 낑낑거리던 자그마한 새끼 가우르가 겹치자 아스타틴은 새삼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아려왔다.

".. 저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이뻐라 우유먹이며 키웠으니까."

그는 애써 웃음지었다.

"좀 자신 없기도 해. 근데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달까.. 저 녀석 태어나는 것도 좀 힘들었고.."

루테리온의 어머니 히말은 가우르에게 드문 거의 흰색에 가까운 털이 돋보였었다.1 몇 번이나 임신을 하지 못하고 한 번은 새끼를 사산한 히말이 이미 죽은 새끼를 계속 핥아주던 모습을 텔루르는 차마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렸었고, 아스타틴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시체를 떼어놓았었다.

그랬던 히말이 많이 나이가 들어 근 하루에 거친 힘든 진통 끝에 마침내 작고 유달리 약한 루테리온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동시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 조그만 생명을 살리려고 젖을 못 먹이는 히말 대신 손가락에 우유를 묻혀 빨게 하고, 갑자기 토하는 녀석을 안고 한밤중에 약초사를 찾아 달리던 시간들 끝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건강하게 자라줘서 기뻐."

손을 뻗어 귀를 쓰다듬어주자 루테리온은 귀를 뒤로 젖히며 가릉거렸다.

"그리고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아스타틴은 메이는 목을 살짝 헛기침을 해 풀었다. 역시 먼지바람 때문이리라.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고 싶어."

언젠가부터 아시타가 아니라 루테리온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으며 그는 가우르의 머리에서 목을 따라 긁어주고는 손을 떼었다. 루테리온은 다시 크게 하품을 했다.

"뭐 그렇다면야."

아시타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좀전에 아스타틴이 그랬듯 루테리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녀석 날 선택해주지는 않겠느냐아?"

루테리온은 뒤돌아보면서 고개를 들더니 아시타의 손에 대고 확 깨물었다. 물리기 전에 아시타가 웃으면서 손을 빼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미소지었다. 장난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면 아시타도, 아스타틴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손을 물어챘을 테니까. 역시 루테리온은 성격이 좋은 녀석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아시타는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그럼 난 보고서 정리하러 들어간다."

그는 아스타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섰다.

"응응..."

언덕을 내려가는 아시타의 발걸음이 등뒤로 멀어져갔다.

"역시 넌 여기가 좋을까나...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루테리온 옆에 쪼그려앉아 등을 쓸어주었다. 루테리온이 반쯤 눈을 감고 바라보는 거친 풀섶과 황야, 민가와 가축우리를 내려다보며.

"아시타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녀석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루테리온은 동의한다는 듯 가릉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아스타틴에게 비볐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며 루테리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스타틴의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때였다. 이런 순간이면 텔루르의 기억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때 루테리온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긴장하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작은 짐승을 보거나 냄새맡은 태도와도 비슷했지만, 사냥할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냥할 때보다 훨씬 깊은 열중이 매끈한 근육의 긴장감에 역력한 채 가우르는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라... 어디가...?"

아스타틴을 휙 돌아보는 루테리온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다시 앞을 향하며 가우르는 순식간에 언덕을 달려내려가 풀섶 사이를 내달리더니, 다른 언덕을 돌아 사라졌다.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정신없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이런 모습의 루테리온은 처음이었다. 허무의 대지 특유의 거친 풀섶과 그 잎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큰뿔염소를 지나, 루테리온이 마지막으로 보인 언덕배기를 돌아 작은 집을 지나쳐 얼마나 걸었을까, 허무의 대지의 잿빛보다 한결 어두운 얼룩 같은 루테리온의 모습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도 들려왔다.

"꺄아 나비야아... 나비나비나비."

목소리는 어린아이 목소리처럼 높고 들떴지만, 주변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구걸하는 노인처럼 웅크린 초라하고 작은 나무들 어귀의 땅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루테리온뿐이었다.

나무들의 흐릿하고 앙상한 그늘로 들어서면서 아스타틴은 이 예상치 못한 장면을 살폈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여자는 다크엘프였고, 이곳 전사들이 그렇듯 가죽이 주조를 이루는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다크엘프 전사는, 아니 다크엘프는 처음이었다.

"놀자놀자~ 나비."

깔깔 웃으면서 여자는 루테리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벼대더니 자기 얼굴을 루테리온의 목에 갖대대고 비볐다. 목소리나 말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도 경계심이나 체면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아이 같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루테리온의 반응이었다. 텔루르와 아스타틴 외에는 아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보이던 가우르는 처음 보는,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게 틀림없는 여자에게 '나비' 같은 굴욕적인 이름을 들으면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몸을 기댔다.

'아... 텔루르...'

텔루르가 죽은 이래 루테리온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애교를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잿빛 피부와 은백색 머리, 가벼운 갑옷 차림이 오랜 기억들을 고통스럽게 헤집었다. 입을 여는 그는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루테리온."

루테리온이 돌아보자 다크엘프 여자도 그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듯 올려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니...?"

부드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다크엘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테리온을 보았다.

"누구야 이쁜 아이~? 아는 사이?"

왜 둘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지, 바보같은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여자에게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저기... 아가씨..."

"음?"

루테리온의 목을 쓸어주며 여자는 그의 존재를 거의 잊은 것 같았다.

"그건 제 가우르거든요..."

아까 아시타에게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내것이라고 하기는 좀 남사스럽기도 했지만,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적어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리라.

"음? 니아 아가씨 아냐 애엄만데 우리 샤나 못봤어요?"

재잘거리다가 다크엘프--아마 니아?--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가우르르르르? 나비??"

"아는 사람에게 받았긴 했지만요. 잠깐 뛰어나가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아가씨에게 갔나보네요.."

입술을 핥고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뭔가 불길했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루테리온을 데리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싫어!!"

찢어지는 목소리에 근처 나무에서 파닥거리며 새가 몇 마리 날아올랐다. 니아가 루테리온의 목을 갑자기 콱 끌어안자 루테리온은 아팠는지 캬옹! 하면서 목을 뺐다.

"니아 나비야랑 놀거야아~ 나비~"

"아... 그렇게 안으시면 아파해요..."

당황해서 아스타틴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루테리온은 목을 뺀 후에도 여자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점점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저런 정신나간 여자를 뭐하러 루테리온이 일부러 쫓아온 걸까.

"..데리고 가도 괜찮지요?"

아스타틴은 루테리온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섰다.

"그리고 나비가 아니에요."

"가지 마 나비, 으응?"

니아가 가우르의 귀를 잡아당기자 루테리온은 다시 캬옹.. 고개를 돌렸지만 아스타틴을 따라나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타틴이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니아는 갑자기 뭔가 본 듯 루테리온 왼편의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 샤나 거깄었어?"

"허..."

아무리 봐도 루테리온 왼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니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눈이 좋거나, 아니면...

"나비야는 엄마랑 있는 게 좋지? 샤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이쁜 우리딸~"

마치 어린아이가 서있는 것처럼 허공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쳤다. 역시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여자가 완전히 미쳤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아스타틴은 긴장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루테리온 이리와."

그의 명령에 루테리온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다가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웃고 얘기하는 니아를 돌아보다가 다시 아스타틴을 마주보았다. 마치 고뇌하듯이.

"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루테리온은 주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불안해했던 날이 정말 오늘, 바로 이 순간이라면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자신과 루테리온에게 그렇게 약속했으면서도 아스타틴은 갑자기 자신이 없었다.

"예쁜아이 일루와봐~"

'샤나'에게 할말은 다 했는지 니아는 아스타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옆의 땅을 탁탁 쳤다. 진회색 눈이 아주 맑았다. 이리 오라니 뭘? 무슨 짓을 하려는지 불안해졌다.

"얘기하자~ 응?"

아스타틴이 경계하며 보고만 있자 니아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루테리온이 이 여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조심조심 다가섰다.

"...이야기요?"

"응응, 나비얘기!"

니아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샤나가 좋은 생각을 얘기해줬어. 역시 똑똑하지 우리딸?"

다시 소름이 끼치면서 아스타틴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분명히 이곳에는 노스탤지아 일로,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한다는 아주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임무를 띠고 왔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시타도 메타포노비아도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가우르한테 물어보자~ 응?"

니아는 말을 이었다.

"나비야는 니아 따라올래 이쁜아이 따라올래? 그렇게 말야."

"물어보다니.... 루테리온의 의사에 따르자는 건가요?"

그는 니아와 루테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루테리온의 선택에... 정말로 루테리온이 이런 상대를 선택할까? 그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우리 딸이 그랬어. 샤나가!"

니아는 아주 만족스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아, 그래요?"

아스타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이런 선택을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정말로 그것이 루테리온의 선택이라면 그대로 해야 했다. 루테리온이 그러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아스타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텔루르의 잔영이 함께할 루테리온이 어떻게 그럴까.

"그렇게 해요, 아가씨."

그말에 니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아냐~ 나 애엄마다? 나이도 하나.. 둘.. 스물.. 열다섯.. 백.."

니아가 손을 꼽으며 엉터리로 수를 세는 것은 아스타틴은 냉정하게 끊었다.

"떼는 적당히 부리고요."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요."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이래 쭉 함께했던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 상실의 기분을 니아가 이해할 수나 있을지, 상관은 하는지 생각이 미치자 뜨거운 것이 속에 치밀었다.

그의 말에 마치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순간 시무룩해졌던 니아는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알았어, 그럼 숨바꼭질하자!"

그녀는 달려가며 뒤돌아보고 노래하듯 말했다.

"이쁜아이도 빨리 숨어~"

니아가 돌 던지면 닿을 거리까지 달려가 풀섶에 몸을 숨기자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루테리온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니아가 있는 풀섶과 곁의 아스타틴을 번갈아 보았다. 발이 움찔... 니아 쪽으로 움직였다가 루테리온은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아가씨가 마음에 들은 거니?"

루테리온은 노란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양옆으로 꼬리를 쉬익- 쉬익- 흔들었다. 그 진지한 표정을 보며 아스타틴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스쳐갔다. 루테리온은 이제 온기를 찾아 그의 외투에 파고들던 조그만 새끼가 아니었다. 그 연약하고 위태위태한 털뭉치가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서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난 세월의 의미 아니었던가.

잘 알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네가... 선택한 사람이야?"

루테리온은 니아가 숨은 방향을 한 번 돌아보고, 다가와서 아스타틴의 손 밑으로 따뜻한 머리를 들이밀며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스타틴은 그 모습에서 오래전 그에게 끼잉거리며 고개를 들이밀던 주먹만한 새끼 가우르를 떠올렸다. 15년과 한평생 전, 그들이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의 시작. 루테리온의 눈빛은 마치 이해를 구하는 듯했다. 슬픈 기색은 아스타틴 자신의 바람일 뿐일까.

"루테리온..."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아스타틴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시타에게 말한, 니가 원하는 존재가 그 누구라도 괜찮다고 한 건 사실이야."

이미 다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원할 때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으면, 각자의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니가 선택한 건 누구라도 상관없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이제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루테리온은 위로하듯 나지막히 가르릉거렸다.

"넌 내가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준 친구고..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 영원히 그럴 거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장난치고, 그저 함께 앉아있었던 그 많은 시간이 이제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나갔듯, 텔루르가 떠나갔듯 이제 루테리온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그 기억만으로 버텨야겠지. 루테리온 같은 친구가 곁에 있었던 시간은, 언제까지나 서로 마음과 기억 속에 함께한다는 사실은 따뜻한 위안인 동시에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그걸로 됐어..."

아스타틴의 목소리는 쉰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시종일관 그를 똑바로 보고 있던 루테리온은 묵직한 온기를 그의 다리에 잠시 기대었다가 아스타틴의 손을 한 번 축축하게 까끌까끌한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떨어져서 몇 발짝 걸어가더니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밥을 굶긴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면 돼. 우리 이쁜이."

눈앞이 눈물로 뿌얘서 루테리온의 모습이 잿빛으로 흐릿해졌다.

"자, 가렴."

마치 이해했다는 듯 루테리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빠르게 뒤돌아서 니아의 은빛 머리칼이 빼꼼히 보이는 풀섶을 향해 긴 걸음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있을 곳을 향해 내달리는 그 모습을 아스타틴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디에도 속할 곳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있을 자리는 사랑하는 이들 곁이었는데, 이제 그의 자리는 어디일까. 루테리온처럼 저렇게 자신이 선택한 자리로 달려갈 날이 있을까?

루테리온이 고개를 풀섶에 들이밀자 니아가 꺄아~ 하고 좋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풀섶에서 튀어나와 루테리온을 쓰다듬고 입맞추었다. 저렇게 털 역방향으로 쓸어주면 싫어할 텐데, 평소에는 그러면 바로 도망가던 루테리온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주인 앞에서는 싫어도 참겠다는 것일까 생각하자 가슴이 작게 아파왔다.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갑자기 니아가 떠드는 소리가 조용해지더니, 그 앞에까지 가자 니아는 멍한 표정으로 루테리온을 마주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또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저희 아이를 잘 부탁해요, 아가씨."

아스타틴이 입을 열자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본 유쾌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그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에서 아스타틴은 순간 적과 마주했을 때의 텔루르를 떠올렸다.

"넌 누구지?"

일어서며 말하는 목소리와 말투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 가우르의 주인인가? 하프엘프가..."

하프엘프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은 경멸로 더욱 차가워졌다.

"네 주인에게 가거라."

그녀는 루테리온의 어깨를 아스타틴을 향해 밀었지만, 가우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주인을 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했지요."

이미 작별인사는 한 터였다. 앞으로 더 아프고 더 보고 싶겠지만, 그건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었고 익숙했다. 이제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여인에게 루테리온의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자각시키는 게 먼저였다.

"주인?"

여자는 가느다란 눈썹을 혼란스럽게 찌푸렸다. 정말로 모르겠다고 할 참인가.

"나비야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냉랭한 목소리에 분노를 완전히 숨기기가 어려웠다. 루테리온은 그녀에게는 그저 물건일지는 몰라도 아스타틴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녀석을 데려간다면 최소한 진지한 태도는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이 여자는 왜...

"그렇게 떼를 부려놓고 데려가더니 이제와서 시치미이십니까?"

묘하게도, 그 말에 다크엘프 여자의 얼굴에 스쳐간 당혹감은 진짜였다. 이내 찾아온 체념한 깨달음도.

"내가 그러면... 설마..."

그녀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직하게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최소한 정신이라도 온전한 주인을 골라야지,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이 이제 시치미까지 뗀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스타틴은 분노로 몸이 굳으면서 목소리가 더욱 딱딱하게 나왔다.

"저도 댁같은 미친 다크엘프에게 소중하게 받은 가우르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아니, 사실 주인이 누구라도 싫었지만, 놓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루테리온 저 녀석이 선택했으니까요."

선택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루테리온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가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희생이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이면 이 아픔이 그칠까.

"그런 그녀... 미친 여자를 선택했다는 말이냐."

니아, 혹은 니아의 모습을 한 여인은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루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판단력이 좋지 않구나."

루테리온이 만족스럽게 가르릉거리는 동안 그녀는 이번에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오랫동안 함께했느냐."

"저 녀석이 태어난 직후였죠. 마사다 요새 함락 직후로 기억합니다."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루테리온에게 말했다.

"내가 가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루테리온이 계속 그녀를 보며 가르릉거리자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젓더니 아스타틴에게 말했다.

"공짜로는 받지 않겠다."

그녀는 귀에서 꽤 값이 나가보이는 보석 귀걸이를 떼어 내밀었다.

"나머지는 기회가 되는 대로 갚을 터이니 일단 받거라."

"굳이 주지 않아도..."

그의 손을 붙잡아 귀걸이를 억지로 쥐어주는 손길이 억셌다. 전사답게 굳은살이 박힌 손의 감촉은 다시 본의아니게 텔루르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지 않았느냐, 신세지지 않겠다."

신세지지 않겠다는 말은 호의도, 염치도 아니었다. 인간과 엘프 혼혈인 그, 아스타틴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뜻일 뿐. 그 생각에, 그리고 루테리온을 넘기고 돈을 받는다는 거부감에 그는 억지로 손을 빼고 귀걸이를 든 손을 내밀었다.

"이건 돌려드리죠. 밥이나 굶기지 말아주세요."

눈에 고여오는 눈물을 그는 이를 악물면서 참았다.

"아까처럼 털 역방향으로 문지르지 말고요."

손바닥 위의 귀걸이가 천 근은 되는 듯 무거웠다. 이 순간의 무게가, 시간과 마음과 외로움의 무게가 너무나.

"목 졸라서 숨막히게 하는 것도 위험해요."

그런 그를 보다가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기억하겠다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내가... 아까같을 때 다시 주의줄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 여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10대 이래 그보다 작았는데도 언제나 거인 같던 텔루르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그만큼 양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일까.

"언제까지나 작은 고양이 같은 그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친구를 잃는 것을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귀걸이 위에 아스타틴의 손가락을 쥐어주었다. 굳은살 박힌 손이 따뜻해서 왠지 목이 더 메였다.

"그렇게라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너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싶지는 않구나."

여인은 그의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니 받지 않겠다면 이곳에 내려놓고 가거라. 나는 대가 없이 이 소중한 아이를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니."

그녀와 곁에 의연하게 선 루테리온을 보며 아스타틴은 귀걸이를 쥔 손을 조용히 떨구었다. 그녀 말대로 귀걸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에 못이긴 뗑깡일 뿐이라고 타이르는 텔루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루테리온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정말로 다시 한 번 등에 태울 만한 기수를 만난 것일까, 아스타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나는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라고 한다. 아라, 혹은.."

그녀는 뼈아픈 농담을 떠올리듯 쓴웃음을 지었다.

"니아라고도 하지."

"아스타틴.. 아스타틴 라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양친과 그리고..."

텔루르의 이름은 아직도 말하기가 고통스러웠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텔루르가 떠오르는 이 여인 앞에서는 더더욱... 아스타틴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프다크엘프 텔루르의 양아들."

"텔...루르?"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꿈틀했다.

"혹시 적검의 타하이샤가 아니냐? 내 기억이 옳다면..."

뭔가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던 아라니아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지."

타하이샤?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텔루르라는 이름은 가명이라고 그녀가 얘기한 적은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생각의 갈피를 미처 잡기도 전에 아라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 허락한 선물에 감사를 표한다, 아스타틴 라펠."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했다. 남자이며 혼혈인 그에게 다크엘프 여인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허무의 대지에서 추방당한지 여러 해가 지난 텔루르도 남자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너에게 무운이 함께하기를."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에게 마주 인사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그는 아라 곁에서 노란 눈을 빛내는 가우르를 마주보았다.

"루테리온 너에게도."

'루테리온...' 하고 중얼거리며 아라는 돌아서서 메타포노비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녀를 쫓아가던 루테리온은 문득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마치 망설이듯이, 마치 벌써 그리워하듯이. 아스타틴 자신이 이미 그렇듯... 그런 가우르를 아라니아카는 돌아보지 않고 불렀다.

"가자, 아사나스.2"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는 그 목소리에 몸을 돌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이의 당당한 걸음으로 주인을 쫓아갔다. 혼자 선 아스타틴이 하염없이 지켜보는 동안 전사와 그녀의 가우르는 그렇게 잿빛 정경 속으로 멀어져갔다.

소감

전부터 얘기한 장면이기는 했지만 막상 해보고 또 소설로도 써보니 예상한 것과 다른 새로운 극적 의미가 겹겹이 나와서 재미있네요. 오체스님 얘기를 바탕으로 구체화한 아스타틴과 루테리온이 함께한 일화들도 쓰기 재밌었고, 또 소중한 이가 모두 떠나간 아스타틴의 외로움을 표현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시점에는 이미 명이 얼마 안 남은(..) 아시타의 쾌활한 모습, 여기서는 왠지 사람같이 나오는 아라도 흥미로웠고요. 오체스님 말씀마따나 노예생활하고 샤나를 잃기 전에는 꽤 괜찮은 성격이었을 듯하네요. 아스타틴도 아라도 플레이를 거치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RPG에서 즉석으로 대사를 칠 때하고 소설로 쓸 때하고는 재미나 매체의 특성이 약간씩 다른 것도 좋은 도전입니다. 로그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면 소설의 경제성이랄까, 압축해서 콕 찌르는 언어의 맛은 좀 덜하기도 해요. 아스타틴의 후반부 대사에는 뒷받침할 만한 내면 묘사가 바닥난 기분도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여기서도 로그에 있는 대사를 몇 군데 자르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소설화 작업에는 좀 더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고 압축하는 게 소설의 특성을 더 잘 살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고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 제노님,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에는 이제 본편이군요. 첫 본편 리플레이와 소설도 기대해 주세요! (왠 기대)


주석
  1. 오체스님에 따르면 히말은 히말라야에서 따왔고, '눈'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비노 가우르를 떠올렸어요 ㅋㅋ [돌아가기]
  2. 아스타틴의 '아스' + 다크엘프어로 '아이'라는 뜻인 '아나스', 즉 '아스타틴의 아이' [돌아가기]
2010/03/04 21:36 2010/03/0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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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Xenosia 2010/03/04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또 퍼질러 잔다고[..]

    아스타틴의 행동이나 말투가 꽤 여성스러워보이는데 기분탓이려나요[..]

    • 로키 2010/03/04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으음 일단은 남자로 하기로 정하셨던데 무의식적으로 성전환이...? (..)

    • orches 2010/03/04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틴이는 남성으로 확정. 로키님께도 이야기했지만 전 홍일점을 뺏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어요 (웃음) 그리고 타틴이 말투는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일종의 버릇이 아닐까해요. 낯설거나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존재 앞에선 '~요'체를 사용하는 듯.

  2. 머스터드젤리 2010/03/05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글을 아주 잘 쓰시네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3월에 시작하는 이오닉스 캠페인 PC 시범가동쯤 되는 무룰 역할극입니다. 그 캠페인을 제가 소설로 써볼 생각이어서 RPG 세션 소설화의 예행연습이기도 하고요. 내용 자체는 외전을 넘어 이단이기는 하지만, 인물 성격이나 상호작용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20100221.html

원본 로그: '정찰 임무'


자작나무 사이의 그늘이 길어지면서 숲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렸다. 긴장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아스타틴의 청력에는 나뭇잎을 밟고 가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는 그들의 이동은 조마조마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주변을 살펴도 적의 기척은 없었다. 아직은.

아스타틴은 뒤따라오는 동료 둘을 흘깃 돌아보았다. 이 숲에 살았었던 인간, 랜돌프 에디우스는 주의 깊게 주변을 경계하며 마치 먹이에 몰래 접근하는 육식동물처럼 움직였다. 다크엘프 전사 아라는 언제나처럼 오만한 표정이었지만, 움직임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아라의 곁에서 소리없이 따라오는 가우르1의 눈빛이 어둠 속에 빛났다.

주변에 나무가 엷어지면서 숲속 공터로 나오자 아스타틴은 숙련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공터 주변의 나무와 덤불 사이에 적의 기척은 없었고, 덫이나 위험한 식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록윌 요새는 완만한 구릉을 넘어 있기에 불침번을 세워 알프 연방의 척후를 경계하면 휴식을 취할 만한 곳이었다. 그는 한손을 들어 뒤따라오는 랜돌프와 아라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느냐?”

아라의 건조한 목소리는 살짝 숨이 가빴다. 역시 휴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대답했다.

“좀 쉴 만한 곳을 발견한 것 같아.”

“눈에 띄지는 않겠느냐?”

이 거만한 다크엘프는 여전히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토를 달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대꾸하려는 순간 랜돌프가 끼어들었다.

“록윌 요새 근처는 전에 내가 사용하던 근거지다.”

근거지. 랜돌프가 '엘프 이터'로서 엘프를 사냥해 노예로 팔던 근거지라는 뜻이겠지. 아스타틴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곳은 록윌요새 숏 스카우터들의 수색범위 안이야. 그런상황에서 휴식이라니 위험해”

아라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말은 숨이 차서 헉헉거리지 않고 있을 때나 하거라, 사냥개여.”

아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독기에 차 있었다. 그녀는 랜돌프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이어서야 임무를 수행할 수나 있을까.'

아스타틴이 행장을 내려놓자 가우르는 식량이 들어있는 그의 가방 냄새를 맡으며 주의깊게 다가왔다. 아스타틴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런 가우르의 목과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털의 보드라움과 그 아래 커다란 짐승의 열기가 손을 통해 지친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에구구 힘들다… 울 이쁜이도 그렇지?”

가우르가 스스로 선택한 주인은 아라였지만, 녀석은 루테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아스타틴 곁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다. 아라에게 아사나스라는 새 이름을 받았고 요즘은 모종의 이유로 나비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지고 있기는 해도, 이름이 무엇이든 가우르는 아스타틴이 만져주던 손길을 잊지 않았다. 아스타틴에게는 그것이 늘 다행이었다. 이렇게 가우르가 귀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기분좋게 가르릉거리는 (혹은 가우르니까 가우르릉일까) 순간이면 그래도 누군가는 그의 곁에 남아주는 것 같아서… 그는 그 생각을 떨쳐내며 아라와 랜돌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잠시라도 쉬지 않으면…”

“손톱으로 사람 뼈도 가를 수 있는 맹수를 잘도 가지고 노는군.”

랜돌프는 아스타틴과 가우르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작 중요할때 도망할 힘도 없으면 곤란하겠지. 그럼 일단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

아라는 마치 랜돌프가 전원의 무기와 돈을 맡겨달라고 한 듯 쳐다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또 시작이었다. 어려서 이 숲에 살았고 아버지가 엘프 도망노예였던 아스타틴이라고 에미넴 숲의 악명높은 엘프 이터 랜돌프 에디우스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아라는 악감정을 넘어 랜돌프의 배신을 기정사실로 취급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듣거나 짐작한 것을 종합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세 사람이 어떻게 서로 목숨을 맡기고 싸울지 아스타틴으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

아라의 말에 랜돌프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희들이 잠든사이에 포박해서 노예로 팔아먹기라도 할까봐 말이냐?”

아스타틴의 손길에 기분 좋아하던 아사나스는 마치 랜돌프의 말을 알아들은 듯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긴장했다. 어둠 속에 가우르의 노란 눈이 랜돌프를 지켜보며 빛났다.

“전적이 어디 가겠느냐?”

아라의 대답은 차분했다.

“더군다나 시장이 이렇게도 가까운데 말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알프 요새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군.”

랜돌프의 장난스러운 미소만으로 판단한다면 모르는 사람은 꽤나 유쾌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웃음이 닿지 않는 차가운 눈빛만 아니었다면.

“너는 아쉽게도 별로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 뭐… 생긴 거야 제법 반반하다만…”

그는 아라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평가하며 훑어보았다.

“너희 종족은 애초에 너무 뻣뻣하거든.”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땅에 벌렁 드러누워 버리는 그를 보는 아라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랜돌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날 실망시키는구나, 사냥개야.”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진짜 살의가 담겨 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자칫하면 적진에서 아군끼리의 칼부림을 뜯어말려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쯤이면 이미 배신해서 나에게 빌미를 줄지 알았다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간신히 자신을 제어하며 아라는 좀 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하긴, 마법적으로 구속받은 '노예'에게 큰 선택지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칼에 얹었던 손을 내리며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그녀를 랜돌프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거. 무슨 처치였는지 알고 있나?”

아라는 멈춰서며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눈이 간간히 반짝였다.

“네가 우리를 배신하려는 본능을 막는 것이 아니더냐?”

랜돌프는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시한부 독약 같은 거다. 달마다 꼬박꼬박 해독제를 먹어야 되는거지. 말하자면…”

그는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은 나를 죽일수는 있어도 구속하지 못해.”

“그리고 너는 우리를 배신할 수는 있지만 살 수는 없겠지.”

아까부터 긴장하고 있던 가우르가 마치 아라의 예측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아스타틴은 그런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러고 있다가 적들에게 들키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일까.

“그렇게 싸우다가는 들킬지도…”

“나를 믿고 안믿고는 너희들의 자유다.”

랜돌프는 그의 말을 끊었다. 희미한 조명 속에 웃고 있는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왕에 주어진 자원이라면 좀더 잘 사용해보는건 어때?”

“언제든지 본성을 드러내면 그 죽음을 앞당겨줄 용의는 있다. 다사케타.”

다사케타. 생전에 텔루르가 노예 사냥꾼을 가리켜 그 표현을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옥의 사냥개, 노예 사냥꾼들. 차가운 저녁바람이 스쳐가면서 아스타틴은 문득 몸을 떨었다. 달빛만 희미하게 섞여오는 숲의 어둠 속에서 그 원한과 비탄의 말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저주 같았다.

“그 외에는… 너를 믿지는 않는다. 너의 가치없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라면 조금 더 믿지만.”

순간적인 공포감을 잊으려 애쓰며 아스타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였고, 적도 아니고 동료끼리 싸우다가 죽거나 잡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랜돌프가 지켜서는 것은 아라가 수긍하지 못했고, 아라는 지쳐보이는 데다 불침번을 완전히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언제 또 불청객이 찾아올지 몰랐으니까.

“그럼 공평하게 제가 먼저 불침번 서면 되는 거죠?”

아라는 아스타틴을 돌아보지 않고 시선만 흘깃 던졌다.

“그러거라.”

“나를 믿지 못하겠다니 나는 좀 쉬어두겠다.”

아스타틴이 공터 가운데에서 바싹 마른 낙엽만 빼고 나뭇잎을 치워내는 동안 랜돌프는 말을 이었다.

“마음이 바뀌어서 나에게도 불침번을 맡기려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깨워라. 그리고……”

랜돌프는 일어나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못마땅하다면 언제든지 덤벼봐. 나는 안타깝게도 가짜 싸움같은 걸 배워본적이 없다. 아마 목숨을 걸어야 할걸.”

“네가 진짜 얼굴을 드러냈을 때.”

랜돌프가 방만한 자세로 도로 드러눕는 동안 아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때로 하도록 하지.”

아라가 랜돌프로부터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스타틴은 주변의 나무에서 꺾은 죽은 나뭇가지를 쌓고 조그맣게 불을 지폈다. 이제 아주 대놓고 서로 협박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 둘을 임무에 같이 내보낼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지독한 유머감각의 보유자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가우르 옆, 공터 가장자리에 앉아 숲속을 내다보며 그는 수통에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아까 본 시내에서 떠올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의 공터에서 풀썩.. 하는 소리와 이내 조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타틴은 숲에서 뒤편의 공터로 잠깐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다를까, 아라가 바닥에 주저앉아 작게 노래하며 손가락으로 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생글생글 웃음지었다.

“타틴 타틴~ 같이 놀자아~~”

이런… 또 왔다. 이런 상태일 때면 아라는 아라가 아니었다. 아라의 뻣뻣한 성격과 불같은 성미가 비록 피곤하다 해도, 지금의 그녀는 아라보다도 한결 강적이었다.

“뭐해? 뭐해?”

아스타틴은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녀가 뒤로 슬금슬금 다가앉는 것을 느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더 위험해진 것을 알면서도 왠지 입가에는 웃음이 살짝 떠올랐다.

“안녕, 니아.”

“잘 지냈어어~?”

아라의 다른 인격, 니아는 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부벼댔다. 차가운 저녁 속에 그 온기는 등뒤의 작은 불길보다도 한결 따뜻했다. 그 따스한 안도감에 겨워 아스타틴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덕분에 잘 지냈지.”

“안녕~ 피냄새 나는 아저씨.”

니아가 한쪽 팔을 풀더니 몸을 돌려 랜돌프에게 손 흔들어주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여긴 왜 왔어요? 놀러왔어요?”

“아이들이 잠들 시간이다.”

랜돌프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니아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시키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아스타틴은 요새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무서운 아저씨들이 있는데.. 그 아저씨들이랑 숨바꼭질 중이야.”

“아, 정말?”

니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밝게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들 죽이면 돼?”

“아니아니…”

아스타틴은 고개를 저었다. 니아라는 인격을 그저 어른 몸속의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는 허를 찔리기 십상이었다. 예측불가능하고 유쾌할 뿐, 니아의 근본은 아라와 같았다. 유혈을 결코 피하지 않는 다크엘프 전사인 점은 매한가지였으니... 어찌보면 이성이라는 최소한의 제어가 있는 아라보다 이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들키면 지는 놀이야.”

“히잉… 죽이는 게 좋은데.”

어린애 목소리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아저씨들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하게 갔다가..”

주변의 숲에서 주의를 돌리지 않은 채 그는 슬금슬금 걷는 모습을 손으로 흉내내 보였다. 피에 굶주렸다 해도 니아는 어쩔 수 없이 사람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 조용하게 등 한 대 때리고 오면 된대. 오늘은 안되고.. 다음에 실컷 놀자.”

“나비가 때리면 안 돼?”

최소한 들키면 안 된다는 얘기는 이해했는지 니아는 숨죽여 깔깔 웃었다.

“나비가 때리면 죽을 텐데~”

옆에서 가우르가 다시 가르릉거렸다. 아사나스라는 이름이 있지만 주인이 자꾸 나비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제 나비 소리 나오면 자신을 부르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나비야아~~”

그 소리에 니아는 '나비'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가우르의 목을 끌어안으며 부벼댔다. 털을 땋으며 작게 노래부르는 모습을 아스타틴은 어쩌지도 못하고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저 긍지높은 전사가 이런 모습을 보일 만큼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과 나비하고 노는 니아의 순진무구한 모습은 기묘한 모순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그녀가 아시타를 노스탤지아 대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해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후 처음으로 다가와준… 친구를. 왜 아시타의 생전에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거의 원수나 진배없는 이들과 왜 이런 곳에 있는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나무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렸다.

곁눈으로 움직임이 보였다. 잠들지 않았었거나 자다 깬 듯, 랜돌프가 단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때려서 기절시키겠다. 계속 떠드는것보다 낫겠지.”

너무 열중했는지 니아는 그 말에는 반응도 없이 노래하다 말고 가우르의 어깨를 아앙- 깨물었다. 나비는 가르릉거리며 고갯짓으로 그녀를 장난스럽게 밀어냈다.

“놔두면 알아서 본래대로 돌아와.”

아스타틴은 다시 공터 주변의 숲으로 눈길을 돌렸다. 랜돌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 이 자리에 있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에게 들킨 다음은 늦어.”

랜돌프의 목소리에는 으르렁거리는 저음이 섞여들었다.

갑자기 아스타틴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 자신 '엘프 이터'로서 얼마나 많은 엘프를, 여자들을 이렇게 만들었을지 모를 랜돌프가 무슨 자격으로 아라, 혹은 니아에 대해 뭐라고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니아에게 손을 대겠다고 뻔뻔스럽게 말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만든 게 너희 인간들이면서-”

랜돌프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숲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동시에 가우르가 긴장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잠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m쯤 거리, 요새와의 사이에 있는 구릉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요새에서 나온 정찰일까? 저대로 오다가는 이 야영지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신호탄이라도 올렸다가는 요새에서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등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랜돌프가 작은 모닥불을 껐는지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공터에 랜돌프와 니아는 살짝 흔들리는 한켠의 수풀을 제외하고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가우르는 그의 곁에 서서 눈을 빛내며 숲을 내다보고 있었다.

“착하지, 착하지…”

아스타틴은 가우르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옆의 수풀로 살짝 밀었다. 이곳에 가우르가 숨어있으면 혹시 정찰이 오더라도 랜돌프와 니아를 돕기에는 충분했다.

그 '혹시'의 경우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밤의 숲속에서 아스타틴은 이미 현재가 아닌 오랜 옛날의 시간을 달리고 있었다. 어서 도망쳐요, 텔루르! 수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는 안 됐었다. 그렇게 무작정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수백, 수천 번을 생각했듯이 그는 다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유인했어야 했다. 텔루르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멀리…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듯이 그는 류트를 집어들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숲속으로 달려갔다.


”…잠깐.”

엘프 튀기는 굳어서 숲속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불빛 속에 긴 귀가 두어 번 까딱였다.

그 순간 랜디는 위험을 직감했다. 제길, 역시 록윌에 너무 가까운 위치였다. 하프엘프가 자세를 낮추며 숲을 살피는 동안 랜디는 모닥불을 당장 발로 차 흩어버리고 아직도 넋놓고 앉아있는 다크엘프 여자를 붙잡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입을 막고 함께 수풀로 들어가는 것은 약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지금이 어디 그딴 생각 할 때냐고.

하프엘프가 '니아'라고 불렀던 여자는—이런 꼴일 때면 이름까지 달라지는 건가?—한 박자쯤 늦게 버둥거렸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시점.. 아씨, 이게 아니고! 랜디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 술래다.”

입에 팔뚝을 물려놓자 미친 다크엘프 여자는 앞니로 팔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상처를 입히려고 무는 건 아니었고 (그런 일은 질리도록 많았으니 차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저 뭔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공포에 질려 비명이라도 지르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

랜디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놀랍게도 튀기 녀석은 말 한 마디 없이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냐 저 자식!'

불렀다가는 정찰에게 나 여기 있소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미친 여자를 끌고 쫓아갔다가는 역시 들켜버리기 십상이었다. 결국 말 한 마디 못하고 랜디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대원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별빛과 달빛에 의지해 아스타틴은 숲속을 달렸다. 정찰은 미끼를 물었는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찬 밤공기를 마시며 달려가는 이 상황은, 일이 잘못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감은 가슴 뛰는 기묘한 희열이었다.

이 기분 때문에, 달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노스탤지아라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더 잃을 것이 없어서, 두려움의 날이 선 이 흥분밖에는 남은 것이 없기에…

공터에서 상당한 거리까지 왔을 때 그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차가운 달빛을 마신 듯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지만 왠지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 순간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어쩌면 광기가 몰려왔다.

그는 살아있었다.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지만 그는 매번 죽음을 피해 이 달빛 아래 서있었다. 그것이 가혹한 슬픔인지, 광기어린 희열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 기왕 유인한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정찰이 여럿이라면 공터의 야영지를 찾아낼 지도 몰랐다. 등뒤에 류트의 무게는 든든하고도 가벼웠다. 텔루르는 그의 류트 연주를 좋아했었다.

그는 류트를 손에 잡고 잠시 조율했다. 그리고 공기중으로 맑은 음들을 진혼곡처럼, 달빛 속의 광시곡처럼, 세상에 대한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한 도전장처럼 날려보냈다.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어둠에 귀기울이며 빌어먹을 하프엘프 녀석이나 정찰의 기척을 살피던 랜디는 갑자기 목에 와닿는 차가운 날카로움에 몸이 굳었다.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눈만 돌려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든 화살끝을 그의 목에 댄 다크엘프 여자의 눈빛은 또렷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어둠 속에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놓지 않으면 죽이겠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랜디는 마치 덴 듯 팔뚝을 치우며 이를 드러냈다.

“도대체 지휘부에서 왜 널 믿는지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죽는건 사양이다. 얼간아.”

“어찌 된 상황인가?”

여자는 그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튀기놈은 어디 있지?”

“정신이 들었으면 여기 숨어서 다른놈들이 오지않나 경계해라.”

랜디는 격하게 속삭였다.

“그녀석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그때 달빛과 어둠을 타고 맑은 류트음이 동쪽에서 들려왔다.

“네 말이 맞구나, 왠일로.”

다크엘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석이 시선을 끄는 동안 내가 뒤로 돌아가 정찰병을 해치우겠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는 있는 기회를 되도록 활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넌 내 뒤에 다른놈이 없나 경계해.”

단단히 미쳤긴 해도 활솜씨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수틀려서 랜디 자신의 등짝을 쏴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기랄,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녀석들과… 천화의 계곡과 페어리들을 속으로 저주하며 그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 바보짓을 해서 이 고생이란 말인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얼간이야 젠장.”

새삼 짜증을 느낀 그는 으르렁대듯 중얼거렸다.

나무와 수풀 사이를 이동하면서 차차 눈이 어둑한 환경에 익숙해졌다. 얼마나 갔을까, 류트음을 따라가며 주변을 경계하던 그는 눈앞의 수풀에 조용조용 다가서는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그 너머에는 하프엘프놈이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앉아있었다.

랜디가 소리죽이며 다가가고 있을 때, 하프엘프를 수풀 너머로 지켜보던 알프군 정찰이 뒤돌아보더니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 이런 젠장, 최소한 둘이 있는 모양이었다. 뒤돌아봐도 빽빽한 수풀 속에서 제2의 정찰의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어쨌든 이쪽은 뒤에서 경계하고 있는 궁수라는—좀 불안하기는 해도—카드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랜디는 한손에 단도를 빼어들고 다른 손에는 망토를 벗어들었다. 짜릿한 두려움이 손끝, 발끝까지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정찰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에 망토를 덮어씌우자 상대는 놀라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가 무기에 손을 뻗거나 공격해오기 전에 랜디의 칼은 이미 그의 등에 파고들고 있었다. 늑골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칼의 손맛이 매끄러웠다. 빠른 죽음이 나았다, 불운한 정찰에게나 랜디 자신에게나. 정찰이 내뱉은 단말마의 고함은 망토가 소리를 죽여주었다.

이윽고 정찰의 저항이 약해지더니 그는 푹 늘어졌다. 랜디는 그를 놓으면서 칼을 빼려고 단검 자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등뒤에서 소리를 들었다.


“움직임을 보니… 두 명 정도…”

아스타틴은 류트에서 고개를 들어 두 정찰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까 봐둔 길이 있기는 했는데 어디까지 유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머지 둘과는 어떻게 다시 조우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혼자 말없이 떨어져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그는 억눌렀다. 시간이 없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어차피 일행이란 짐이었다. 그냥 혼자 행동하는 게 편했다.

어차피 모두 떠나가 버릴 테니까,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다. 의지하는 건 위험했다.

눈앞의 수풀이 폭발적인 움직임에 갑자기 심하게 출렁였다. 두 정찰이…? 아니, 저건 분명히 전투였다. 그렇다면 또 한 명은 정찰이 아닌 아군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이 한 명이 쓰러지고, 랜디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달빛 속에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을 숨기고 있던 두 번째 정찰이 랜디의 등뒤로 육박해 왔다.


시간이 없었다. 피할 시간조차, 반격할 시간은 더더욱. 그러나 기분 더럽게도 등뒤에서 누군가 죽이러 달려오는 것을 인식할 시간은 있었다. 더욱 끔찍하게도 그의 생명은 전혀 미덥지 않고 적보다 아군끼리 먼저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동료에게 달려있었다.

'제기랄 늦는다. 쓸모있다는 걸 증명 좀 해봐 미친 계집아!'

눈앞의 하프엘프가 갑자기 움직였다. 얼굴 바로 옆으로 뭔가 스쳐갔다 싶더니 이내 뎅- 하고 현이 한꺼번에 울리는 불협화음이 울렸다. 정찰의 발걸음이 아주 잠시 정지했다.

쐑- 공기중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스쳐갔다. 다시 뎅- 하고 현악기 떨어지는 소리와 섞여 나뭇잎이 푹신한 땅에 무거운 것이 쓰러졌고, 발소리는 완전히 멈추었다.


가만 있기만 하면 된다.

튀기와 노예사냥꾼의 뒤를 따라와 풀섶에 숨어있던 아라는 노예사냥꾼이 등뒤에서 공격받으려는 모습을 보고 화살을 매겨두었던 활시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당겼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위를 놓으려는 손이 멈추었다.

가만 있기만 하면 두 발 짐승을 사냥하던 사냥개는 죽을 것이다. 시위를 당기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아니, 조금 늦기만 해도 된다. 아주 잠시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주받을 다사케타를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 자를 두려워해? 시위를 당긴 손이 움찔했다.

그 순간 하프엘프가, 저 여리여리 어리버리한 녀석이 손에 든 것을 무작정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인책으로 연주하던 류트를.

저 멍청한 녀석이.

이 숲에 살았더라면 바로 저 사냥개에게 붙들려 노예로 팔아넘겨졌을 녀석이 저 사람 잡는 개도 동료라고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다.

류트를 맞고 적이 멈칫한 바로 그 순간, 아라는 시위를 더 세게 당기며 한 번의 심장 박동 동안 화살촉을 정찰의 등 중앙에 조준하고 다음 심장 박동 동안 숨을 멈추고 시위를 놓았다.

죽일 때는 죽여도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노예 사냥꾼이 본색을 드러내는 날에는 기꺼이 죽이겠지만, 그날까지는, 동료인 동안에는 비겁하게 적에게 저 자의 목숨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 그 확신은 예리하게 공기를 찢으며 적에게 날아가는 화살만큼이나 곧고 확고했다.

그러지 않으면 겨우 류트 하나 든 저 하프엘프 튀기에게 져버릴 테니까. 잠시라도 노예 사냥꾼의 죽음을 타인에게 맡길 비열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정찰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는 활을 내리며 일어섰다.


“캠프는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풀섶에서 일어서며 말하는 아라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다.

“하나가 전부였나?”

랜돌프는 천천히 돌아서서, 화살을 맞고 쓰러진 시체와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너머로 그녀를 마주본다.

“둘이 한 조였다.”

“결과적으로 잘 되었네요.”

살짝 말을 더듬는 아스타틴은 악기를 집어던질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아직 역력하다. 랜돌프는 그런 그를 돌아보며 이를 드러낸다.

“한 번만 더 얼빠진 짓을 해봐. 그때는 죽여서 파묻어버리고 갈 테다.”

“그 순간 류트를 맞아 정찰병이 주춤하지 않았으면 너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아라가 지적하는 동안 아스타틴은 구해준 게 누군데… 하고 투덜거린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간 지금 그들 사이에는 어떤 어색함이, 그리고 수풀 위로 달빛을 싣고 부는 바람 같은 시원함이 있다.

가우르가 땅에 떨어진 류트를 주워다 아스타틴에게 갖다주는 동안 아라는 풀섶을 헤치며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캠프를 옮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른 안전하게 쉴 곳이 있는가, 패스파인더?”

랜돌프는 고개를 젓는다.

“적의 경계지역과 너무 가까워. 정찰조가 안돌아오면 반드시 다른 놈들이 올 것이다.”

그는 즐거움 없이 이를 드러내며 멀리 달빛 속에 보이는 요새를 돌아본다.

“오히려 잘됐지. 이쪽으로 적들의 병력이 파견된 동안, 그 공백을 노려 정찰을 속행하자.”

“그러도록 하지.”

내키지는 않는 태도이지만 아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동하자.”

“아까 저녁 무렵 봐둔 곳이 있긴 합니다만.. 정찰을 마치고 거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이제 한결 진정한 기색인 아스타틴을 아라는 흘깃 쳐다보고는, 가우르의 등에 실은 짐을 끌러서 던져준다.

“이 인간들의 소굴에서는 빨리 빠져나갈 수록 좋겠지.”

그녀가 랜돌프에게 짐을 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랜돌프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것만은 동감이군. 솔직히 익숙지가 않아. 사람냄새 나는 지역은….”

아라는 랜돌프를 잠시 표정없이 보고, 아스타틴은 엷게 웃는다.

“간만에 옳은 말씀을 하는군요.”

달빛 속에 흐릿하게 빛나는 요새를 향해 걸음을 떼면서 아스타틴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라에게 고개를 돌린다.

“절묘한 타이밍에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앞으로 단독행동은 삼가도록.”

“집단생활은 좀 무리라서요…”

우물쭈물하는 변명에 아라는 대꾸하지 않고 말한다.

“앞장서겠는가.”

“그러죠.”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수풀을 헤치고 주변을 경계하며 셋은 조용히 이동한다. 단 셋이서 이곳 적진 한가운데서, 공통의 목표와 공동의 위험에 묶여 어쩔 수 없이 함께. 길고 위험한 밤이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을 창백한 달만이 내려다본다.


소감

역시 플레이 내용이 별로 안 길어도 소설로 쓰면 막 고무줄이 되는군요..OTL 삭풍님 말씀마따나 원래의 대사와 선언 사이에 묘사가 들어가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분량을 폭주시킨(..) 묘사와 내면 때문에 인물에 또 새로운 면들을 추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소설의 재미겠지요. 리플레이 제목은 '정찰 임무'였지만 소설 제목은 '월광'이 된 것도 원본 로그에 없는 내용들이 들어가서였으니까요.

플레이의 재미였다면 역시 인물끼리 으르렁거리다가 막상 위기상황에는 서로 목숨을 구해주는 역동적인 인물 관계였습니다. 죽도록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끼리 결정적인 순간에 협력하는 과정이 입체적이어서 좋았습니다. 아직 갈등의 소지는 많고도 많으니 이 임무 하나로 갑자기 우리 친구 아이가를 외치며 닭살을 날릴 리는 없지만, 최소한 일행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물론 월광 자체에서도 드러났듯 동료끼리 으르렁거리다 보니 임무에도 지장이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런 갈등을 해소해가는 게 또 캠페인의 중요한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인물 간의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간의 갈등이 아니라 노예제, 인종차별, 노스탤지어 내의 알력 등 안힐라스 자체의 모순과 문제점이기도 한 만큼, 그런 큰 문제들을 인물의 감정과 고민, 인간관계 내로 끌어들여 표현하고 해소하는 건 좋은 극적 장치라고 봐요.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 큰 사회적 문제가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지만, 최소한 인물의 성장과 깨달음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는 엿볼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고 또 갈등이 가장 컸던 건 랜디와 아라의 충돌이었던 것 같습니다. 둘다 성격 만만찮은 사람끼리 입장까지 정면으로 대립하니 불꽃이 안 튈래야 안 튈 수가 없죠. 랜디가 과연 양심을 찾을 수 있을지, 아라가 원한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둘다 도덕률과 감성의 실마리는 있지만 제대로 발현은 못하고 있는, 어찌보면 가장 성숙하지 못한 인물들인 만큼 입체적인 변화의 소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설로 쓰면서 어렵고도 재밌었던 것은 시점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은 길어서 별문으로 옮깁니다.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과 이방인님, 제노님께 감사드리고, 이단 플레이에 소설까지 공개를 허락하신 삭풍님께도 감사드립니다. 3월부터는 본편 로그도 올릴 수 있겠군요. 많이 부족한데 지적과 질책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m(__)m


월광 세 줄 요약

아라: 이 강아지 같은 녀석 숨만 잘못 쉬면 넌 나한테 죽.. 는... 꺄하하 얘들아 놀자! (헬렐레)

타틴: 싸우지좀 말고... 우헤헤헤 나잡아봐~라~ 디링디링~

랜디: 왜 제정신인 놈이 나밖에 없냐!! (운다)


주석
  1. 흑표범과 유사한 큰고양이과 포식동물 [돌아가기]
2010/02/26 14:10 2010/02/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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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스터드젤리 2010/02/27 0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고 갑니다. 다음 리플레이도 이렇게 글로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 로키 2010/02/27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앞으로 리플레이는 쭉 글로 써보려고 합니다. 일종의 극기훈련이랄까요(..)

  2. Asdee 2010/03/03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어 보이네요~ :)

    이오닉스 캠페인 설정만 봤는데, 이런 플레이를 하는 거군요~ 앞으로도 재밌게 지켜볼게요^^

    • 로키 2010/03/03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가 마스터가 아니니까 본편 캠페인은 아마 좀 다른 스타일이겠지. 어쨌든 재밌게 봐주면 감지덕지! ㅋㅋ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월광 소감 2부에 해당합니다.

RPG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라면 아마도 시점이 아닐까 합니다. RPG는 대체로 외부적인 시점이고,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시점은 단편적일 뿐 지속성이 없지요.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가자나 진행자가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며 그의 내적 서술을 유지하는 것은 RPG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진행자 하나와 참가자 하나가 하는 1:1 플레이 정도에서나 가능하지요.

반면 소설은 1:1이 아닌 여러 인물이 있는 상황에서도 특정 인물의 시점을 유지하면서 그의 내면과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점 인물의 생각이나 성격도 드러낼 수 있고, 인물이라는 관점을 통해 왜곡 혹은 제한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요. 그래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 가까운 RPG를 특정 인물 시점으로 전환하면 인물의 시각과 내면이라는 새로운 면모가 생기는 점이 로그와는 또 다른 소설적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정찰 임무' 로그의 외부 시점에서 인물 시점으로 전환해서 '월광'을 쓰면서 역시 조심스러웠던 것이라면 제가 다루는 인물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인물의 시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월광에 가장 많이 활용한 시점은 오체스님 인물인 아스타틴의 시점이었고, 그 다음은 이방인님의 랜돌프(랜디)였죠. 이 인물의 행동이 어떤 내적 충동에서 나오는지, 동기와 내면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인물에 대한 지식과 대사, 행동을 통해 짐작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조마조마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나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위키에 올렸었고, 앞으로도 그런 과정을 거쳐 공개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물의 내면에 파고들면서 의외의 면모들이 나타난 점이 소설화의 가장 큰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아라에 대한 아스타틴의 동정이라든지 무모한 단독행동을 했을 때의 심정, 언제든 아라에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을 맡기는 랜돌프의 각오, 랜돌프를 죽게 둘까 생각했다가 아스타틴에게 자극받아 마음을 고쳐먹는 아라의 변화 등은 하나같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인물의 새로운 발견이었죠.

시점을 전환해가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으로 진행한 것도 재밌었습니다. 제 인물인 아라의 시점으로 쓰는 게 정석이었겠지만, 아라 시점으로는 이야기가 재밌거나 완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선 랜돌프의 모습이 많이 왜곡되었을 것이고, 니아 시점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한데다 아스타틴과 랜디만 알 수 있는 부분들은 다 빠졌겠지요. 결국 최선의 시점 인물은 '제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혹은 특정 부분을) 가장 잘 끌어갈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인물의 내면은 짐작에 맡기는 게 가장 적절할 때도 있고요.

앞으로도 이오닉스 세션 소설화를 하면서 다양한 시점을 활용할 듯하고, 그때마다 인물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과 기법을 실험해 보면서 RPG와 소설의 서로 다른 문법에 대해 생각도 해볼 수 있겠군요. 그건 인물들이 떠나는 모험과는 또 별개로 제게도 모험이 될 것 같습니다.

2010/02/26 14:02 2010/02/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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