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과 배경/소개와 감상'에 해당하는 글 26건

  1. 2009/09/03 로키 RPG? 음주게임? 이야기 놀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4)
  2. 2008/12/17 로키 펄프 RPG 세기의 혼: 장르와 범용성, 극과 전략 (2)
  3. 2008/01/26 로키 본격 연애 시뮬레이션 '얼음깨기' (2)
  4. 2008/01/10 로키 비스트 헌터 -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하여 경례! (6)
  5. 2008/01/09 로키 권투와 사람 이야기, Contenders (3)
  6. 2007/05/15 로키 나홀로 플레이테스트 - 펜드래건 (4)
  7. 2007/04/30 로키 실피에나에 대한 바람, 혹은 욕심 (6)
  8. 2007/02/19 로키 AD&D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 배경
  9. 2006/12/27 로키 보드게임적 RPG,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1)
  10. 2006/11/17 로키 여학생들의 삶과 고민 - '팬티폭발' (7)
  11. 2006/11/15 로키 소서러 - 욕망과 오만의 비극, 혹은 희극 (3)
  12. 2006/11/10 로키 세기의 혼 도착! (5)
  13. 2006/10/07 로키 단순성 속의 깊이, 트롤베이브 (2)
  14. 2006/10/03 로키 비극과 아름다움의 함수 - 폴라리스 (7)
  15. 2006/09/28 로키 세기의 혼이 내 손 안에! (6)
  16. 2006/09/07 로키 마스터 없는 RPG, Mythic Roleplaying (6)
  17. 2006/09/06 로키 죄와 심판에 대한 짧은 서사시, 포도원의 개들 (4)
  18. 2006/08/22 로키 악의어린 공포의 장, 원더랜드 (3)
  19. 2006/04/16 로키 Robin's Laws of Good Mastering
  20. 2006/03/14 로키 트래블러 주인공 시범제작 + 기본 판정 (4)
  21. 2006/01/06 로키 던전(Donjon) 나홀로 플레이테스트 (1)
  22. 2006/01/02 로키 7번째 바다에 관심이 생기다
  23. 2005/09/06 로키 극적인 경량 시스템, 페이트--간략한 소개
  24. 2005/08/04 로키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게임, 니코틴 걸즈 (2)
  25. 2005/08/04 로키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게임, 니코틴 걸즈
  26. 2005/02/03 로키 아르스 마기카 4판
요즘 새 RPG를 별로 안 봐서 새로 보는 건 거의 위시송군의 소개로 보는 느낌인데,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건 이미 지난 네이버 TRPG 카페 MT에서 선보여서 꽤 좋은 반응을 얻은 게임이기도 하지요.

원작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 뭔지는 다 아실 겁니다. 뭉크하우젠 남작의 말도 안 되는 허풍 모험담이지요. 게임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그 허풍을 게임으로 재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고 하면 게임을 가리킵니다.

이걸 어떻게 분류할지는 좀 미묘합니다. 일단 RP 요소는 있기는 합니다. 각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하나 설정해서 자신의 인물 입장에서 허풍을 늘어놓는 것이 기본 설정이니까요. 단, RPG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 능력치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규칙은 오직 이야기의 흐름 자체만을 다루지요. 그런 면에서 묘사 요소는 전혀 없이 서사적 규칙만 있는 놀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RPG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 RPG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주사위도, 캐릭터 시트도, 진행자도 없는 이 놀이를 굳이 분류하자면 '음주게임' 내지는 '이야기 놀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규칙책 자체가 음주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고, 술을 마시면 훨씬 재미있을 성격의 놀이라는 점에서 음주게임, 그리고 굳이 RPG인가 일종의 보드게임인가 하는 구분을 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노는 놀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겠지요.

놀이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진행자 없이 모든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한 명 설정합니다. 인물에 능력치 같은 것은 필요없고, 이름과 작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MT에서는 그냥 본명 내지 닉으로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북한 가서 김정일하고 맞장뜨고 우주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긴 했지만요..ㅡㅡ;;)

다음, 돌아가면서 운을 뗍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공작, 하늘의 별을 따서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구한 얘기를 해주시지요'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실마리가 들어오면 그 참가자는 약 5분경 온갖 허풍과 뻥을 섞어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운을 뗍니다. '주교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품 사이에 주교님의 신학서가 있었던 연유를 알려주시지요.'라든지요.

저게 끝이었다면 규칙이랄 게 없으니 놀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 만들어내기였겠지만,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서는 '개입'이라는 간단하고도 강력한 규칙이 놀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게 거의 유일한 규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모험가는 모험가 수만큼의 토큰, 최소 5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MT에서는 포커칩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어떤 모험가이든 잘못 알았다며 토큰을 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중인 모험가는 그 이의를 받아들여서 이야기를 고치고 토큰을 받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자신의 토큰까지 얹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험가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이 포기하거나 토큰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할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백작: 아 그래서 지옥의 파수견한테 주려고 달나라 토끼한테 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러 갔는데 말야-1
주교: 어허 이사람~ 주님이 노하실 소리! 달나라 토끼들은 토끼독감 걸려서 이미 죽은 때가 아니었나. (자기 토큰 하나를 백작에게 밀어주며)
백작: 이양반이 술이 과하셨나, 예수님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시네. 토끼들이 타밀플루 맞고 살아난 거 몰라요? (주교 토큰에 자기 토큰을 얹어서 밀어준다)
주교: 예끼, 타밀플루 알레르기 땜에 다 죽었었지! (토큰을 또 하나 얹어서 총 3개를 백작에게 스윽)
백작: 아 맞아, 그랬죠. (토큰 3개를 챙기며) 저도 달나라에 도착해서야 그게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죽은 토끼들이 남긴 떡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바이러스가 들끓는 폐공장으로 들어갔는데..

이 개입 규칙 때문에 각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독주무대가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되며, 가뜩이나 상식을 씹어드신 허풍담은 더더욱 은하계 저편으로 날아갑니다. 덕분에 더 흥이 살면서 참가자들은 웃느라 숨넘어갑니다. 이렇게 모두 함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우러지는 흥겨움은 허풍선이 남작 최고의 묘미입니다. (더욱 공포스럽게도, 하다보면 종종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생기면서 뭔가 말이 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이렇게 모든 모험가가 이야기를 마치면 각 참가자는 자신 외에 누구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정해서 자기 토큰을 그 사람에게 전부 몰아줍니다. 토큰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승자가 되고, 승자는 모두에게 술을 돌린 후 (음주를 적극 권장하는 놀이라고 했었죠) 다음 라운드에는 승자가 오른쪽 사람에게 운을 떼면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허풍선이 남작은 간단하면서도 굉장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즐거운 자리에서 흥을 돋우며 정신없이 웃는 놀이입니다. 위에 소개한 기본 규칙 외에도 책에는 신밧드 변형 규칙,2 또 토큰조차 필요없는 어린이용 놀이 '우리 삼촌이신 남작은...'도 나옵니다. MT 때에 전부 해봤는데, 기본 규칙이 가장 재미있었고 어린이용 규칙도 시간은 짤막하지만 굉장히 웃으면서 했습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우리가 익숙한 형태의 RPG와는 많이 다르고, 어쩌면 RPG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따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며 즐기는 흥겨운 놀이이기는 하죠. 그런 이야기 놀이는 RPG에서 갈라져나오기는 했지만 전통 RPG의 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들이 어쩌면 RPG라는 취미의 또 다른 지평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말에 동의하시지 않는다면 뭉크하우젠 남작이 코사크 부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 칼을 휘두르며 결투신청을 해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길.


주석
  1. 실제 해보시면 이게 절대 너무 아스트랄한 게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주 두부제국의 위력을 맛보지 못하신 여러분은 아스트랄이 뭔지 모르십니다..ㅠㅠ [돌아가기]
  2. 이 변형의 하이라이트라면 '모험담 중 잘 되는 일마다 알라를 찬양하되, 잘 안 풀렸을 때 알라 탓으로 돌리면 방에서 쫓겨나고 방문 밖에서는 거대한 몸집의 내시가 기다리고 있다가 목을 베어버린다' [돌아가기]
2009/09/03 23:48 2009/09/0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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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의종 2009/09/04 0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도 나온지 벌써 십 년이 됐군요. 당시에도 이걸 과연 RPG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말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로키 2009/09/06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 꽤 됐었군요. RPG는 꽤 확장성이 있는 취미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드게임하고도 닿고, 역극하고도 닿고... 결국 어떤 놀이를 하고 싶은가의 문제겠지요.

  2. 장영운 2009/09/15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주두부제국.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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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능력치와 난이도 표현에 숫자 대신 형용사를 사용하는 퍼지 (Fudge) 규칙을 기반으로 면모와 극점수를 추가한 페이트 (FATE)의 발전형으로서, 범용 규칙인 페이트의 펄프 장르용 변형입니다. 기본 배경은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시작하기 전, '세기 클럽'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벌이는 모험 중심입니다. 세기 클럽의 모험가들은 악당 수학자 메두셀라 박사, 제트팩을 메고 날아다니는 소련 특수요원 로켓 레드 등 다양한 악당을 상대로 고대 유물 탈취전을 벌이고 거대 로봇과 전투를 벌이는 등 세계를 구해내지요.

펄프 자체는 국내에 아주 낯익은 장르는 아닙니다만, 위에 나온 간단한 소개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양한 장르 문학과 영화, 만화의 요소를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펄프의 특징 중 과학과 활극에 초점을 두면 수퍼히어로물과 SF, 초자연에 초점을 두면 호러와 판타지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장르가 펄프의 파생물입니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국내에 잘 알려진 영화도 '펄프'라는 이름과 연관짓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전형적인 펄프물이고요. 이와 같이 펄프는 대중적 장르 작품과 연관이 아주 깊습니다.

일종의 상위 혹은 메타장르, 혹은 기원점인 프로토장르라고 할 수 있는 펄프의 기본 정신은 긴박한 활극과 모험, 서양과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 시대상을 반영하는 지식과 기술에 대한 낙관,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에서 생겨난 미지와 신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각각 나누고 중점을 다르게 하면 위에서 언급했듯 다양한 하위 내지 파생 장르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펄프 RPG를 표방하는 세기의 혼은 펄프를 넘어서는 다양한 장르에 적용할 수 있으며, 펄프 장르를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많은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이 특징은 장르 규칙인 세기의 혼이 역설적으로 범용성을 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기의 혼은 어떤 면에서 펄프 RPG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활극에 특화된 인물 제작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적은 수의 기능이 각각 넓은 분야를 다루므로 (예를 들어 구르기, 곡예, 수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운동신경' 기능 하나로 통합) 각 인물이 상당히 넓은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싸움을 잘한다고 사회성이 떨어질 이유는 없고, 뛰어난 학자도 필요하면 총 (혹은 채찍!)을 들 수 있지요.

넓은 기능 범위의 단점이라면 기능 선택으로는 인물의 개성이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세기의 혼은 기능의 특화 내지는 특수 활용인 스턴트 규칙으로 개성을 확보하고 획일화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영할 때면 운동신경 판정에 자동으로 +2를 받는 스턴트가 있다면 운동신경 등급이 비슷한 다른 인물과 차별화할 수 있지요. 또한, 춤을 출 때면 운동신경을 예술 기능 대신 활용하는 스턴트가 있어도 마찬가지로 높은 운동신경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특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활극의 중요한 요소인 전술적, 극적 연출에도 세기의 혼은 강한 편입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환경이나 장면의 특징을 '면모'로서 조작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연회장에서 모두가 긴장한 상태라면 그 장면에는 '모두 긴장했다' 면모가 있습니다. 이때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해서 위협 기능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술 기능으로 음악이나 춤 등 공연을 해서 긴장한 분위기를 없애고 대신 '부드러운 분위기' 면모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면모로 친화력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지요. 자신이 스스로 판정해서 부여하거나 발견한 면모의 첫 발동은 무료이므로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극점수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무료 발동을 넘길 수도 있으므로 꽤 긴밀한 협력도 할 수 있고요. 이렇게 해서 세기의 혼은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꾸거나 관찰하는 것을 규칙으로 포상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보너스나 페널티가 붙는 것은 거의 모든 RPG에 있는 규칙이지만, 세기의 혼 규칙은 위와 같이 극점수와 면모 발견, 부여, 제거를 매개로 참가자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직접 다루고 포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가자가 훨씬 능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작하고 이용해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극적이면서 동시에 확고한 규칙상 이점도 있으므로 전술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은 활극적 재미를 더욱 강화합니다.

다음 세기의 혼의 펄프적 특징으로 지식 기능의 활용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학술과 과학, 공학, 신비학과 같은 지식 기반 기능의 활용도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단순히 어떤 지식을 아는지 판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 판정을 통해 참가자가 새로운 극적 사실을 선언하고, 그 선언에 따라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림의 부족과 조우했을 때 '이 부족은 여자만을 지도자로 뽑으니까 우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하면 결과가 좋을 거에요.' 하는 같은 선언을 하고 학술을 굴려 성공하면 접선하는 부족에 '여성이 지도자인 것을 당연시한다' 면모를 부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했을 때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이때도 판정을 통해 면모를 부여했으므로 첫 발동은 무료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 돛줄을 자르면 돛이 적을 덮어버릴 거야!' 하고 선언한 후 과학 굴림에 성공하면 동료가 해당 돛줄을 잘랐을 때 적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실패한다면 잘못 판단한 거니까 효과가 없거나 우리편이 돛에 덮여버릴 수도 있겠지요. 공학이라면 '저 깜박거리늘 붉은 빛을 쏘면 차단문이 내려와!' 하는 식으로 선언하고 마찬가지로 판정할 수도 있고요.

지식 판정의 선언 기능 외에도 세기의 혼에는 연구, 기계 제작과 수리 등 학술, 공학, 과학을 활용하는 규칙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신비학은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학술, 과학, 공학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공학으로는 손목에 차는 무전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신비학으로는 같은 제작 규칙을 사용하되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식입니다. 이렇게 과학기술과 신비를 둘다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세기의 혼 규칙은 다분히 펄프적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기의 혼이 펄프적 특징을 잘 반영하는 것은 규칙을 통한 인물 표현의 확보가 아닌가 합니다. 펄프의 원동력이자 펄프적 정신의 표현은 다름아닌 펄프의 영웅들, 강한 개성과 놀라운 지략과 행동력, 교양과 지식이 빛나는 주인공들입니다. 딱히 창의적이거나 새로울 필요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일정한 기존 유형을 잘 활용하면 더 인기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인물성을 표현할 필요는 있지요.

이러한 인물 표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면모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환경이나 장면 면모처럼 인물에게도 면모가 있는데, 환경이나 장면 면모가 주변 환경의 특징을 표현하듯 면모도 '서부 최고의 명사수'라든지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 등 그 인물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하면 해당 판정에 +2를 받을 수 있지요.

위의 예를 계속하자면, 서부 최고의 명사수 면모 당연히 총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면 예쁜 여자 꼬시는 데는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2를 받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점이 인물 자신의 배경이나 특징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면모 발동은 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인물의 배경, 과거, 특징, 내면 등을 플레이 자체에 반영합니다.

면모는 이점뿐만 아니라 약점도 될 수 있습니다. 서부 최대의 명사수에게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나 도전자가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고, 이런 때에 진행자는 면모가 불리하게 (혹은 귀찮게) 드러난 인물의 참가자에게 극점수를 역으로 지급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쁜 얼굴을 보면 사족을 못쓰는 특징도 진행자가 '시장 부인이 엄청 미인이야! 가서 꼬시려고 들면 극점수 줄게' 하는 식으로 불리하게 발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면모가 불리하게 작용해서 극점수를 역으로 받는 것을 강제 발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참가자를 곤란하게 한다기보다는 플레이를 재미있게 유도하는 장치입니다. 극점수가 나온다는 면에서는 전술적인 장치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면모를 통해 등장하는 사건과 갈등은 이점과 마찬가지로 각 인물의 배경과 특징, 사연에서 나오므로 면모 중심 진행은 인물 중심적 전개를 유도하며, 플레이의 극적 재미를 풍요롭게 합니다. 뛰어나면서도 부족한 데가 있는 인물들의 능력과 과거, 갈등에서 나오는 플레이는 참가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진행을 편하게 해주지요.

결국 제가 보는 세기의 혼은 장르 특징에 대한 충실성과 그 장르를 넘어서는 일정한 범용성, 그리고 극적 연출과 전술적 선택이라는, 서로 상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긴장관계에 있는 요소들을 조화시키는 규칙입니다. 그리고 그 긴장을 창의적으로 해소하는 순간 굉장히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죠. 세기의 혼을 플레이하며 그 끝없는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2008/12/17 12:56 2008/12/17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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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ishsong 2008/12/18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면모 부여와 지식 기술 활용은 확실히 멋진 아이디어인 것 같아. 이 부분을 다른 시스템에서도 쓸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어 :)

    • 로키 2008/12/18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존의 밸런스를 유지하면서도 면모의 장점을 도입하는 건 꽤 계산과 테스트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이론적으로 가능은 할 정도로 면모는 범용성이 있는 개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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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깨기 (Breaking the Ice)는 에밀리 케어 보스 (Emily Care Boss)의 2인용 RPG로, 두 주인공이 세 번 데이트하는 내용을 플레이한 후 그들이 이루어지는지 정하는 내용입니다.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연애물이죠. Breaking the ice라는 원제 자체도 모르는 사람끼리 어색하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외에도 여기에서는 맥락상 몇 가지 함축적 의미가 있겠지만요.

규칙이 다루는 것은 곧 그 놀이의 대상입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인 얼음깨기에는 연애 외적 요소인 HP나 힘, 심지어는 기능 규칙도 없습니다. 대신 매혹과 공감, 갈등이 있지요. 그 외에 '직업: 웹 디자이너'라든지 '애완견 뽀삐' 등 주인공의 특징을 표현하는 키워드도 있지만, 그러한 키워드를 포함해 규칙은 연애라는 주제 하나에 몰려 있습니다.

이렇듯 규칙이 제약적인 점은 취향이나 용도에 따라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바바 히데카즈의 강좌에 나왔듯 배경 세계가 무한한 선택에 의미있는 제약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면, 규칙은 그 선택에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주면서 선택을 추가적으로 제약하는 효과를 냅니다. 그 제약의 정도가 규칙을 만들 때 내리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얼음깨기는 그 제약이 심한 편이어서 딱 두 사람이 세 번의 데이트를 하는 얘기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그런 내용의 플레이를 하고 싶다면 규칙의 제약성은 장점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얼음깨기는 의도하는 용도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규칙이겠죠.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얼음깨기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는 상당히 넓습니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세 번의 만남 동안 겪는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는 형태인 것은 맞지만, 그 틀 내에서 세 '데이트'는 철수와 영희가 같이 공부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는 내용일 수도 있고, 두 적대국의 스파이가 임무를 수행하며 총탄과 유혹을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에 시하야님과는 마법사와 전사가 같이 던젼을 탐사하며 연인이 되는 BL물 플레이를 하기도 했죠. 두 주인공의 연애감정을 중심에 놓기만 한다면 거의 어떤 배경의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다는 점이 '제약 내의 범용'이라는 역설입니다.

이렇게 연애감정에만 초점을 맞춘 규칙으로 개별 행동의 성공은 어떻게 정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규칙으로는 행동 판정은 하지 않습니다. 즉, 성공하기 원한다면 성공한다고 서술하면 되고 ('추근대는 깡패들을 단번에 다 때려눕혀요!'), 실패를 원한다면 실패한다고 서술하면 됩니다 ('깡패들한테 덤비다가 늘씬하게 얻어맞습니다'). 개별 행동의 성공과 실패는 규칙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규칙상 성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패를 가리는 대상이 다를 뿐이죠. 규칙은 행동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가리지 않고, 위에서 설명했듯 이 규칙의 진짜 대상인 연애감정, 즉 매혹과 공감이 증가하고 유지되느냐를 판정합니다. 깡패들을 다 때려눕힐 수도 있고 괜히 덤볐다가 실컷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매혹이나 공감을 얻고 데이트 사이에 매혹을 유지하는지는 자유 서술이 아니라 판정으로 정합니다.

참가자가 원하면 무조건 행동에 성공한다는 것은 묘한 일 같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동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원하면 성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실패를 '원하면' 되니까요. 실패를 원할 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대방 참가자가 실패를 제안할 때, 두 번째는 이미 실패한 주사위를 다시 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말이 되게 얼음깨기 규칙을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얼음깨기는 진행자가 따로 없는 대신 두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능동 참가자 (Active player)와 길잡이 (Guide) 역할을 맡습니다. 능동 참가자는 장면 묘사, 조연 담당 등 주변 환경 서술을 맡는 동시에 자기 주인공을 움직여서 상대방 주인공에게 점수를 따려고 애씁니다. 요리를 해준다든지, 깡패를 때려눕힌다든지, 아름다운 호숫가로 데이트 장소를 잡는다든지 등등.

상대방인 길잡이는 능동 참가자의 서술이 마음에 들면, 혹은 주사위 종류에 따라 조건을 충족했다고 판단하면 주사위를 줍니다. 즉, 능동 참가자가 따려는 '점수'를 주사위 형태로 건네주는 것이 길잡이의 역할입니다. 능동 참가자는 길잡이에게 이들 6면체 주사위를 받아서 굴리고, 5 또는 6이 나온 주사위마다 성공입니다. 성공 3개로는 매혹, 4개로는 공감을 하나 올릴 수 있죠.

이와 같이 길잡이가 주사위를 지급하므로 능동 참가자는 길잡이의 마음에 들게 노력해야 하고, 자연히 길잡이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행동에 대해 길잡이의 제안이 있으면 ('여기서는 깡패들한테 얻어맞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은데?') 그 결과가 행동 실패라 하더라도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꽤 큽니다. 이것은 전에 얘기했던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중심 판정 (승민님의 더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묘사 중심과 서사 중심) 중, 후자에서 게임 내 현실을 규칙이 아닌 공감으로 정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실패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아닌 '원해서 하는 실패'라는 점도 재미있고요.

행동이 실패한다고 서술할 만한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재굴림 규칙입니다. 주사위 종류에 따라서는 실패를 다시 굴릴 수 있는데, 그 조건은 망신을 당한다든지, 위험에 처한다든지, 사이가 나빠진다든지 해서 뭔가 데이트가 잘 안 풀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굴림 규칙을 활용하려고 하면 주인공은 완벽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주인공이 상대와 맺어지기 어려운 사유인 갈등을 서술에 등장시키면 주사위를 더 받는 규칙 역시 주인공의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모습 표현을 포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 참가자가 2~3번씩 차례를 돌려가며 하고 나면 한 번의 데이트가 끝나고, 세 번의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그 동안 유지한 매혹 점수를 모두 굴려서 성공만큼 최종 매혹 점수를 냅니다. 그리고 매혹과 공감 수치를 참조해서 두 주인공이 맺어지는지 보고, 그에 맞게 두 사람이 이후 어떻게 되는지 후일담을 서술합니다.

규칙이 자체 완결적인 이야기에 추진력을 더해주고 진행자가 없다는 점 등 얼음깨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규칙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 중 첫째로 꼽고 싶은 것은 게임적 긴장감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두 참가자 사이에는 '얘네를 맺어주자' 하는 공통된 목적이 있어서, 제 경험상 게임 플레이는 '둘이 협력해서 최대한 성공 짜내기'의 연속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주사위 종류마다 한도와 조건이 다르므로 (데이트가 잘 풀릴 때, 잘 안 풀릴 때, 갈등이 나올 때, 공감이 나올 때 등등) 두 참가자가 규칙에 따라 협력하면서 나오는 이야기 자체는 다양하고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얼음깨기 규칙의 진짜 의의일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때로는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더 굴릴 주사위가 없을 때까지 데이트를 질질 끌기도 하는 점은 오히려 이야기의 재미를 해친다고 봅니다. 두 참가자의 이익이 일치하다 보니 (성공을 짜내자!) 데이트를 적당한 데서 끊을 만한 반작용이 얼음깨기에서 시스템상 부족한 점이었다고 봅니다.

두 번째 문제라면 규칙이 좀 복잡하다는 점입니다. 인물 만드는 데까지는 쉬운데, 플레이 절차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매혹 주사위, 보너스 주사위, 재굴림 주사위, 갈등 주사위, 공감 주사위 등등 주사위 종류도 꽤 많고, 보너스와 매혹 중 실패가 재굴림의 한도이며 갈등 주사위는 재굴림에 해당 없고... 어렵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좀 지저분한 느낌이었달까요.

그와 관련해, 규칙에 따르다 보면 데이트의 각 턴이 너무 도식적이기 쉽다는 점도 단점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잘 보이면서 점수를 따다가 (보너스 주사위) 뭔가 계속 잘못되고 (재굴림 주사위 하나씩), 좀 길어지다 보면 (성공이 3개 안 나와! ;ㅁ;) 이 관계에 대한 고민거리가 등장하거나 (갈등 주사위) 두 사람의 공통점이 드러나거나 (공감 주사위) 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 간단한 도식 내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만, 몇 번 하다 보니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같은 디자인상 허점이 있기는 하지만 얼음깨기를 하면서 재미없었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던젼을 헤매는 모험가에서 현대 한국의 남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다뤄본 플레이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고, 여전히 둘이 모여서 가볍게 하기에 괜찮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적당히 밀고 당기는 맛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비해서 너무 다정다감했을지도요. (웃음)

결론적으로 얼음깨기는 중심 소재인 연애에 초점을 맞춘 '연애 시뮬레이션'을 통해 게임성과 극적 재미를 연계시키는 흥미로운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부분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지만, 놀이를 통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잘 보여주는 규칙이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2008/01/26 13:15 2008/01/2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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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년H  2008/01/26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쭈욱 읽어내려가면서 생각한 문제점이 '소재는 흥미로운데, 참가자와 길잡이 간 관계가 딱히 대립된 게 아니라 자칫잘못하면 자기도취적 플레이가 되기 쉽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을 짚어 주셨군요.
    그런 점에서 꽤 플레이어들을 가리는, 아마 정말로 연애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꽤 좋아할지도요. (아니 저런 사람들이면 저런 거 안 하고 실생활에서 (...)) 그 점에서 도식화된 저것도 일종의 패턴화된 '연애'일지도요.

    • 로키  2008/01/27 0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 도식화나 갈등 없는 협력 자체가 어쩌면 연애라는 소재에 어울리는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아도취도? (..)) 그런 의미에서 규칙을 통해 형성되는 참여자 관계가 소재하고 어떻게 맞물리는지도 생각해 볼만한 문제겠어요. 예를 들어 일행 중심 모험물에서는 참가자가 똘똘 뭉쳐서 진행자에게 대항하는 형국이 되기 쉽다는 점에서 '외적 위험에 맞서는 모험자 (혹은 특수부대, 혹은 섀도우러너..) 일행'이라는 기본 서술을 더욱 충실하게 한다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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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비스트 헌터 표지

비스트 헌터 (Beast Hunters)는 기본적으로 1:1로 하는 게임으로, 전쟁과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 살아가는 수렵채집 부족 사회의 괴물 사냥꾼인 비스트 헌터가 주인공입니다. 이들 헌터는 괴물 사냥, 부족 간 중재, 상단 약탈 등 다양한 모험을 하며, 괴물을 성공적으로 사냥하면 그 피로 문신을 새겨서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비스트 헌터 판정은 창의성, 자원 관리, 전술성 등 게임적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도전을 시작했을 때 헌터 (참가자)는 우선 도전자 (진행자)에게 자신이 그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지 얘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자가 보기에 해결책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판정 없이 헌터의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헌터의 창의성과 판단력을 포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RPG든 참가자가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을 제시하면 판정 없이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즘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을 돌리면서 생각해보기도 했고,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플레이에 나오는 게임성 얘기를 하면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다만 비스트 헌터가 특이한 점이라면 도전자가 헌터의 창의성을 인정해 판정을 포기하는 것을 자원 관리와 직접 연관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판정 중 헌터의 맞수는 모두 도전자의 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적대 풀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예산 1점을 들여서 +2짜리 능력을 하나 구입, 예산 4를 들여 우선 순위 5를 구입하는 식입니다. 초보 헌터에게 대충 맞설 만한 적수를 만들려면 예산이 4~5점은 들어가는데, 판정에 들어가기 전에 헌터가 제시한 해결을 인정하고 도전자가 포기하면 적수를 구입할 필요 없이 예산을 2점만 들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도전을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밋밋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하면 헌터가 받는 경험치도 줄거든요. 헌터가 제시한 해결책을 도전자가 바로 받아들이고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 헌터가 받는 경험치는 1점입니다. 반면 판정으로 넘어가면 헌터가 도전에서 이겨서 받는 경험치는 적수의 예산 점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8점짜리 적수라면 이겨서 경험치를 8점 받을수 있으므로 헌터가 판정을 해서 위험을 무릅쓸 이익도 충분히 있습니다.

자원 관리는 판정 중에도 계속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명중과 피해 판정 대신 공격 동작을 통해 이점 점수 (AP, Advantage Point)를 축적하며, AP를 소모해야 피해 주사위를 굴릴 수 있습니다. 공격 동작은 신체 도전이라면 상대를 밀어붙인다든지 고지를 점거한다든지 하는 식이고, 사회적 도전이라면 연맹을 맺거나 소문을 퍼뜨리는 식입니다. 따라서 AP를 아주 많이 축적했다가 한꺼번에 지르면 서로 계속 맴돌며 눈치만 보다가 일거에 강력한 공격으로 끝내는 싸움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피해는 경상, 부상, 중상, 무력화, 사망 단계가 있으므로 일격에 끝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공격 동작과 AP도 헌터와 도전자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전술적 선택을 요구합니다. 헌터가 공격 동작을 하면 도전자는 선언의 창의성, 합리성 등을 고려해 일정량의 AP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헌터는 이 AP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주사위를 굴려서 AP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굴리면 자칫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도 AP가 덜 나오거나 아예 AP를 못 받을 수도 있지요. 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AP를 많이 받을 수도 있고요. 따라서 제시하는 AP 양을 보고 어느쪽이 유리할지 저울질하는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판정 중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고 각자 효과가 다르다는 점도 게임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입니다. 공격 동작과 타격 외에도 방어 동작, 능력치 발동, 자원 박탈, 자원 회복, 특수효과 등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이 총 7가지 있고, 같은 유형 내에서도 선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원 박탈과 회복이 흥미로운데, 창이나 방패, 인맥 등 헌터가 사용할 수 있는 외적 요소인 자원을 박탈해서 상대의 이점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창을 멀리 쳐낸다든지, 인맥에 미리 손을 써놓는다든지 하는 경우죠. 이러한 자원은 회복 시도도 할 수 있는 등,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도 다채로운 전술적 선택 여지가 있다는 점이 비스트 헌터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전체 모험의 구조 역시 판정과 연관성이 깊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도전자는 정해진 예산이 있는데, 이 예산 및 단일 도전에 할당할 수 있는 예산의 한도는 모험마다 도전자와 헌터가 함께 정합니다. 예를 들어 예산 20, 한도 5짜리 모험은 비교적 짧고 쉬운 편에 속합니다. 예산을 모두 소모하면 보통 모험은 끝나고, 비스트 헌트 모험이라면 예산을 다 소모했을 때 비스트가 등장합니다. (즉 최종 보스 개념?) 예산과 모험의 이러한 연관성은 긴장감과 완결성이 있는 모험을 진행하는 데 적합해 보입니다.

비스트 헌터 일러스트 (일부)

꺄아 언니~♡

각 비스트는 최소 예산과 한도 요구량이 있어서 일종의 레벨 내지는 HD 개념이 들어간 점도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급 괴물인 헤크트라탄은 최소 예산 20, 한도 5인 모험에 등장할 수 있고, 전설의 최강 괴물인 쿠림은 최소한 예산 250 (!), 한도 10인 모험에만 등장할 수 있습니다. 모험을 통해 비스트 헌터가 강해지면서 예산과 한도를 늘려가며 점점 강한 비스트와 맞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이렇게 보면 알 수 있듯 비스트 헌터는 도전자와 헌터의 경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임입니다. 동시에 도전자의 역할은 헌터를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서로 승부의 재미를 느끼며, 멋진 발상을 유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쟁적 요소를 게임에 국한시키고 감정이나 인간관계와 분리하는 장치로 비스트 헌터에서는 '경례' 규칙을 사용합니다. 서로 오른손 아랫팔을 붙드는 동작으로 '경례해 들어가면' 게임을 시작하거나 재개했다는 뜻이고, 게임을 끝내거나 논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같은 동작으로 '경례해 나와야' 합니다. 경례는 게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신호이며 서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승복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그리고 상호 존중의 표시이기도 하죠.

야성적인 부족 사회 전사들의 모험을 즐기면서 신비하고 위험한 세계 속에서 인물의 기량을 발휘하고 싶다면 비스트 헌터는 꽤 추천할 만한 RPG입니다. 1:1이 기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만 모여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죠. 정정당당하고 한 치 물러섬이 없는 승부를 약속하며 첼'쿠리 부족의 악수를 주고받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비스트 헌터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섰을 것입니다.
2008/01/10 21:54 2008/01/1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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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sdee 2008/01/11 1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지네요- :) 진행자-참가자 협의를 룰에서 신경썼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 매번 이렇게 새로운 룰을 발굴(?)해내시는 로키님의 열정에 감탄하게 되네요.
    전 그다지 얼리-어답터 체질이 아니다보니;;

    • 로키 2008/01/12 0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협동과 경쟁의 균형을 잡는 방식도 흥미롭고요. 전 그런 식으로 디자인 목적이 확실하고 규칙이 서로 잘 맞물리면서 그 목적을 뒷받침하는 규칙책이 참 재밌더라고요.

  2. 아사히라 2008/01/11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니~♥

  3. ddowan 2008/02/02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1이라는 점이 살짝 아쉽군요.
    아직은 사람이 많은 편이 더 재미있을 것같아 보입니다^^

    • 로키 2008/02/02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멀티플레이어 규칙도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는 ddowan님처럼 기본인 1:1보다 멀티가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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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라군이 도전자에 딱 어울린다고 추천한 록키--로키 아님--주제곡!)

J. J. Prince의 '도전자' (Contenders)는 내기 권투로 돈을 벌어 불우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꿈과 삶 이야기를 그리는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아픈 아내의 병원비를 대려고 낮에는 막일을 하고 밤에는 링에 뛰어드는 가장일 수도 있고, 사업을 시작할 꿈을 안고 밤마다 장롱에서 통장을 꺼내보며 멍투성이 얼굴 가득 웃음짓는 청년일지도 모릅니다. '도전자'는 하나같이 포기할 수 없는 마음과 사연을 안고 링 위에 맞선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내기 복서들을 둘러싼 휴먼 드라마를 구현하는 방법도 흥미로운데, 도전자 규칙은 희망과 고통, 돈 특성치가 권투 링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희망은 주인공의 인간관계를 만날 때면 늘릴 수 있는데, 시합 중 불리한 구석에 몰렸을 때 이 희망을 소모해서 능력 페널티를 만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이 떠오르는 순간 '이렇게 주저앉을 순 없어!' 하고 벌떡 일어나는 분위기랄까요. (열혈!)

삶에서 괴로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오르는 고통도 시합 중 '독이 올라서' 상대를 제압하고 피해를 입히는 판정에 보너스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돈은 권투나 다른 일을 해서 벌고 훈련할 때 소모하며, 무엇보다 인간관계는 늘 돈이 들어갑니다. 그게 아픈 가족이든, 사업이든 말이죠. 희망과 고통은 또한 주인공의 미래가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는지도 결정합니다.1

진행자 없는 RPG로서 도전자는 진행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모든 참가자는 주인공을 하나씩 만들며, 돌아가면서 한 주인공씩 주역이 되는 장면을 만듭니다. 현재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참가자는 조연을 맡을 수 있습니다. 폴라리스 (Polaris)처럼 엄격한 역할분담은 없지만, 폴라리스의 방식을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건너편 참가자는 적대적인 인물을 한다든가, 왼편 참가자는 인간관계, 오른편 참가자는 트레이너 등 동료를 하는 식으로요. 물론 사람이 많거나 적어지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요.

장면의 종류와 효과, 할 수 있는 판정은 미리 정해져 있어서, 예를 들어 인간관계를 만나는 장면을 하면 희망 판정을 해서 희망이 증가하는지 정하며, 일 장면을 하면 돈 판정을 해서 돈을 버는지 정합니다. 그 외에 훈련, 위협, 시합 장면 등 다양한 장면이 얽히면서 수치를 조정하고, 권투 실력을 올리고, 희망을 확보하거나 상대의 희망을 없애는 전술적 판단과 각 주인공의 삶에 대한 입체적 조명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이 인상깊습니다.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시합 장면에서 하는 권투 판정도 간단하면서도 전술적 판단을 요구합니다. 각 라운드마다 공격 위주, 방어 위주 등 전술을 정해서 파괴력과 제어력 사이에 선택한 후 제어력 판정에 성공하면 파괴력 판정을 하며 (이때 각 권투 관련 능력이 보너스가 됩니다), 상대의 방어 판정에 대한 성공 정도에 따라 승리 점수 (VP)를 받습니다. 이 VP로는 상대의 권투 능력을 저하시킬 수도 있으며, 마지막 라운드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VP가 많은 쪽이 판정승을 올립니다.

시합 중에는 위에서 언급했듯 주인공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고통과 희망도 중요하게 작용하므로 시합은 주인공의 삶과 유리된 장면이 아니라 주인공의 모든 것을 건 응축적 투쟁의 장이 됩니다. 직접 시합에 나오지 않은 주인공도 시합 결과에 돈을 건다거나 관중석에서 경기를 남들에게 해설해주는 등 ('지금 빌리는 스네이크의 약점을 끌어내는 거야. 보이지, 잽을 하기 직전에 고개를 돌리는 저 습관?') 시합 장면에 등장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어느 한 주인공이 복서로서 명성이 10점에 도달하면 최종 장면을 하나씩 한 뒤 마지막으로 하룻밤 동안 시합을 연속적으로 벌이고, 각 참가자는 자기 주인공의 최종 결말을 서술합니다. 최종적으로 희망이 고통보다 높으면 행복한 결말, 고통이 더 높으면 불행한 결말, 희망과 고통이 같으면 아직 은 어느 쪽도 아닌 결말을 서술해야 합니다. 엔딩 조건이 확실한 만큼 도전자는 깔끔한 단기 캠페인에 적합해 보이는 규칙입니다. ('주인님과 함께'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결론적으로 도전자는 피와 땀과 눈물에 젖은 열혈 휴먼 스포츠 드라마 (..길다)를 만들면서 전술성과 극적 재미를 동시에 즐기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일독하면서 번역도 해놓았으니 언제 꼭 해보고 싶네요.


주석
  1. 그런 면에서 이전에 소개했던 니코틴 걸즈 [Nicotine Girls]와 비슷하며, 실제로 도전자는 폴 세가의 니코틴 걸즈와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돌아가기]
2008/01/09 13:42 2008/01/0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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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사히라 2008/01/09 2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망이죠

  2. Wishsong 2008/01/10 0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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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P 기반의 아더왕 전설 배경 RPG인 펜드래건 (Pendragon) RPG의 기본 판정을 혼자 인물을 만들어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펜드래건은 BRP 계열 규칙 중에서는 퍼센트 주사위가 아닌 d20 주사위를 사용하는 점이 특이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특이사항이라면 캠페인의 호흡이 훨씬 길다는 점, 개인 못지않게 가문에 중점을 둔 점, 그리고 아더왕 전설에서 종종 나타나는 강력한 성격과 열정을 규칙으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장르에 맞춘 규칙은 BRP 계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지도 하지요.

여러가지로 흥미롭고 평도 좋은 규칙인지라 인물을 두어 명 무작위 방식으로 만들어서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전투같이 복잡한 데까지는 못 들어갔고, 기능 판정을 조금 하고 주로 성격과 열정 판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인물 1: 유안. 전사 아버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서 카멜리아드의 레오데그란스 (기네비어 왕비의 아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펜드래건에서는 16 이상의 성격은 유별난 것이고 20이 정상적인 최대치인데, 순전 무작위로 제작한 결과 유명한 성격이 다섯 개나 되는 엄청난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순결 18, 너그러움 16, 신중함 16, 절제 18, 용기 16이라는 뭔가 장래가 걱정되는(..) 조합이랄까요. 열정 역시 무작위로 굴렸는데 영주에 대한 충성심 18, 명예 18 등 결코 범상치 않더군요.

인물 2: 에니드. 펜드래건에서 주인공은 원칙적으로 기사이지만 여성 인물을 만드는 특칙도 있어서 활용해 보았습니다. 에니드는 교회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의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성격 중에는 순결 16, 정의감 16, 겸손 19가 눈에 띄는군요. 언제나 정숙하게 내리뜬 눈매가 매력 포인트인 그녀..(..)


판정 1: 성격 판정

시녀 에니드와 종자 유안은 부상당한 레오데그란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과 함께  사악한 기사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기사는 위험한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샘에서 물을 한 병 퍼오면 잡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다만, 이 샘은 마법이 걸려서 오직 여자만 물을 길을 수 있다고 하죠.

아직 종자일 따름이나 영주에 대한 충성심만은 뒤지지 않는 유안은 이 임무에 나설 것을 자청합니다. 그는 모인 여성 중 누구 한 명이 자신과 함께 가서 물을 퍼올 것을 간청하지만, 위험한 임무에 선뜻 따라나설 여성은 좀처럼 없었지요. 진행자는 에니드의 참가자에게 용기 판정을 시킵니다. 에니드의 용기는 15, 주사위 결과는 4이므로 용기 판정은 성공. 에니드는 유안을 따라 숲으로 가겠다고 자원하고, 용기에 성장판정 표시를 받습니다.

판정 2: 성격 판정 2

숲속에서 비가 오는 밤, 천막은 하나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에니드와 유안은 천막을 함께 쓰게 됩니다. 함께 위험한 숲을 여행하면서 점점 가까워진 두 사람. 진행자는 유안에게 호색 판정을 시킵니다. 유안의 호색은 2, 주사위 결과는 13이므로 호색 판정은 실패합니다.

호색이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반대쪽 성격인 순결을 판정합니다. 순결은 18, 주사위 결과 역시 18. 능력치와 같은 주사위 결과는 대성공이므로 유안은 그 성격적 특성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게 됩니다.

보통 성공이었다면 두 사람이 누운 자리 사이에 칼을 뽑아 내려놓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유안은 에니드의 만류를 뿌리치고 천막 문앞에서 잠을 청합니다. 덕분에 감기가 단단히 걸려서 진행자는 유안이 2 HP를 잃는다고 선언하고, '치료 필요' 상자에 표시를 합니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차후에 순결 성장 판정이 가능하다는 표시 또한 받습니다.

판정 3: 기능 판정

아침이 되자 에니드는 벌벌 떠는 유안을 치료합니다. 에니드의 치료 기능은 10, 주사위 결과는 불행히도 20. 20은 대실패이므로 유안은 대번에 1d3 HP를 잃고, 상태가 더욱 악화하면서 며칠 후 1d6 HP를 추가로 잃습니다.

판정 4: 열정 판정

유안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도 샘을 지키는 괴물과 혼자 싸웁니다. 그는 포로로 잡힌 레오데그란스를 생각하며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레오데그란스에 대한 충성심은 18, 주사위 결과는 16이므로 열정 굴림은 성공합니다. 그 결과 본래 16인 그의 검 실력은 +10 가산점을 받아 전투가 지속하는 동안 26이 됩니다. 또한 영주에 대한 충성심에 성장 판정 표시를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혼자 펜드래건 규칙을 활용해보았습니다. 해본 감상은 뭐, 나름 재밌어 보이긴 하지만 역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언제 성격과 열정 판정을 한다든지, 언제 성장 표시를 받는지 등, 딱히 객관적 기준 없이 진행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는 점이 거부감이 듭니다. 또 성격과 열정 판정은 요즘에는 별로 특이한 규칙도 아니고, 페이트 (FATE)의 면모 발동이 더 합리적인 방법 같군요. 무엇보다 규칙이 너무 복잡해요..(흑흑)

아더왕 전설을 충실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는 훌륭하지만, 여러 가지로 제 취향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펜드래건은 맬로리나 드 트롸이 등 중세 원전에 나오는 기사 모험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아더왕 전설은 아발론의 안개나 여왕의 목가와 같은 현대적 재해석 쪽이라서요. 정치적 성격이 짙고 여성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아더왕 캠페인에 펜드래건은 부적합해 보입니다.
2007/05/15 12:59 2007/05/1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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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ishsong 2007/05/15 2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룰이라는 건 이전 것에서 나온 문제점들을 개선하면서 나오는 것이니, 과거의 것은 대부분 불편하죠;; 설정과는 다르게.

    • 로키 2007/05/15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역시 옛날 규칙이란..(..) 펜드래건 RPG는 아더왕 전설 참고 자료로서는 뛰어나고 가져오고 싶은 부분도 많지만 (시나리오 하나 진행하고 1년이 흐르는 식의 빠른 시간 흐름이라든지), 규칙 자체는 불편하더군요.

  2. 소년H 2007/05/16 15: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가 흐르는 느낌이라던가...

    대를 이어 진행한다거나..그런 느낌이 들던데요. (정작 시스템 자체는 못 봤지만 (...))

    규칙이야 뭐..랄까, '옛날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걸까?'란 생각이 들죠. 진짜 10년 전에만 해도 (...)

    • 로키 2007/05/17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시나리오 하나 하면 1년 보내고, 노화 규칙 있고, 아들네미 생기고 만드는 규칙 있고 하니 꽤나 시간의 흐름이 유구하죠. 그런 부분은 다른 규모가 큰 캠페인에서도 참고할 게 많아보여요.

      뭐 요즘에야 불편해 보이지만 나올 당시에는 성격과 열정은 꽤 혁신적인 규칙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 기준으로 봐도 장르 적합성이라든가, 내면 표현이라든가 하는 면에서 발상은 좋죠. 다만 구현 방법이 썩 좋진 않아서 실제 쓰기는 그렇겠더라고요. 역시 경험이 쌓이면서 RPG는 발전해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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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초여명에서 겁스용 배경책인 GURPS 실피에나의 출간을 발표하면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저같은 경우 약 2년 전에 국산 d20 규칙인 천명 카라를 예약구매했다가 개발중지 때문에 결국 환불받은 일도 있고 해서 말이죠. D20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예약구매까지 할 정도로 국산 RPG 개발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실피에나에 대해 초여명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도 기대를 고조시키는데 한몫 하고 있습니다. 초점을 가진 자유도, 내지는 제약된 자유도는 제가 보기에는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이라고 여겨집니다. 절대적인 자유도는 대개의 경우 무의미하며, 적절한 제약이야말로 창의성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장 쓸만한 배경 세계들은 그냥 넣고 싶은 걸 아무거나 넣은 배경보다는 아무리 방대해도 그 중심에는 어떤 한가지 주제의식, 혹은 발상이 있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마음에 드는 점은 실피에나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갈등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치물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얘기일 수밖에 없죠. 정치적 갈등이야말로 가장 포괄적인 갈등이기도 한 것이, 치밀한 도덕적 고민이라든지 신나게 치고받는 쌈질, 연인들의 밀고당기는 사랑싸움, 긴박감 넘치는 수사, 말이 비수처럼 날아다니는 외교의 장, 이권을 건 치사한 뒷치기, 전쟁의 참혹함 등등 온갖 종류의 모험과 갈등에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여러모로 기대되는 겁스 실피에나에 추가적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선, 규칙과 설정의 분리. 실피에나 캠페인을 돌려보고 싶지만 겁스를 사용할 생각은 없으므로 가급적이면 규칙은 책 뒷편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책의 대부분은 규칙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순수 설정이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내용을 찾기 위해 필요없는 내용을 많이 뛰어넘어야 하는 건 불편하니까요.

이와 관련해 추가적으로, 겁스 규칙상의 내용을 다른 규칙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잡이도 있으면 더욱 유용할 것입니다. 뭐 꼭 책 자체에서 할 필요는 없고 블로그라든지 다른 방법도 많겠죠. 특히 실피에나에 추가되는 규칙 같은 경우는 어떤 의도로 만든 것인지, 기본 판정과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되어 있는지 디자인 노트 같은 곳에 설명이 있으면 다른 규칙으로 전환하는데도, 또 진행자가 규칙을 고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 설정 자체에 대한 것이지만 권력기반에 대한 부분도 빠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경제력, 혈통, 연맹, 종교 등등. 특히 경제력은 쉽게 도외시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치적 갈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실피에나에서는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엄청나게 자세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계에서 돈과 힘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 짐작은 할 수 있을만큼요. 같은 맥락에서 경제 체제와 경제활동에 대한 정보는 개괄적으로만 있어도 설정을 더욱 풍부하고 진정성 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인간관계의 부각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혼자 생각이긴 하지만 정치적 성격이 짙은 실피에나의 설정은 여성들에게도 매력 요소가 아닐까 하는데, 인간관계는 정치적 갈등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갈등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특히 많은 경우 여성이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거의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백작과 혁명군 지도자가 죽마고우이자 전우였으며 한 여자와 삼각관계에 있다는 식의 멜로드라마를 반드시 바라는 건 아니고 (그런 건 진행자가 만들어 붙이면 됩니..퍽), 설정 속의 인물들 사이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망이 세계 속의 사건과 갈등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볼만한 근거가 있으면 캠페인을 꾸미는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특히 캠페인북으로서의 성격을 생각하면 인물과 조직 관계도가 있어도 도움이 될지도요.

이상과 같이 국내 RPG계에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GURPS 실피에나에 대한 저의 바람, 혹은 욕심을 적어보았습니다. 뭐 개발 진척이 얼마나 됐는지도 잘 모르겠고 반드시 반영해달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점도 생각하면 더욱 멋진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나름 떠오른 것들이랄까요. 가뜩이나 시간에 쫓기고 있을 개발자분들에게 부담을 더해드리려는 의도는 아닌 겁니..<-

실피에나 정말 기대되는군요. (벌써 그 소리만 몇번째냐) 이번 방학때 귀국하면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07/04/30 05:48 2007/04/30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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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8/01/26 0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로키 2007/04/30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바람'인지 '바램'인지 긴가민가하다가 그냥 평소 쓰던 쪽으로 했는데, 그게 잘못된 거였네요. 하나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틀린 것 있으면 지적해 주시고, 눈팅 외에도 기분나면 댓글 남겨주십..(퍽)

  2. Xenosia 2007/05/01 0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축하글 남기고 왔습..
    오늘 서점에서 조금 재밌는 프랙탈 개념을 보고 왔는데
    쬐끔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 저 내일 근로자의 날이라서 과정 휴강입..음하하[퍽]

    • 로키 2007/05/01 08: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배경 세계와 프랙탈의 연관성이라.. 재밌겠는걸요. 왠지 중학교때 본 쥬라기 공원의 추억이(?)

      참, 2만 힛트 이벤트에 아무래도(..?) 당첨되신듯 한데 뭐 할지 나중에 MSN에서 얘기해 보죠. 아마 제가 공사가 덜 망한(..) 2~3주 후에..

  3. orches 2007/05/01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험도 다 끝나고 오랜만에 들린 orches입니다~ 아.. 들어오자마자 이런 멋진 걸 포기할 생각입니까? 자, 동감하시는 동지 여러분 발간되는 순간 지르는 겁니다! 하고 외치시는 걸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로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온다면 굉장히 매력적인 세계관이어서.. 얼마든지 애정 쪽쪽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 [퍽]

    여담으로 현실에서는 로키님께서 말씀하신 '백작과 혁명군 지도자가 죽마고우이자 전우였으며 한 여자와 삼각관계에 있다는 식의 멜로드라마' 보다 더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기막힌 사연이라든지.. 갈등이 많으니까요 (웃음)

    • 로키 2007/05/03 0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대되긴 하지만 뭐 얼마나 좋을지는 나와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 (흥) 서명된 한정판이라든지 나온다면 기다리지 않고 살 용의가 있긴 합니다만..(퍽)

      예, 원래 현실이 더 기가 막히죠. 그렇다 해도 현실과는 달리 허구에는 개연성이 필요한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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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스케이프는 전부터 흥미가 있는 세계관이긴 했지만 이번에 CRPG 플레인스케이프:토먼트 (Planescape:Torment)를 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때맞춰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 (레이디의 그늘)까지 시작하게 되면서 드디어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 배경 (Planescape Campaign Setting) 박스세트를 읽었습니다.

박스세트 구성은 진행자를 위한 설정 개설서인 'DM을 위한 플레인 길잡이' (A DM's Guide to the Planes), 참가자를 위한 개설서인 '참가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 (A Player's Guide to the Planes), 진행자를 위한 시길과 경계지대 설명인 '시길과 그 너머' (Sigil and Beyond),  플레인스케이프에 새로 나오는 생물들을 다루고 있는 Monstrous Supplement, 그리고 각종 지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중 '참가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는 요즘 요약해서 블로그에 올리고 있기도 하지요.

전부터 부분부분 얘기는 듣고 있는 배경세계였지만 막상 체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니 이게 얼마나 규모가 크고 매혹적인 세계인지 알겠더군요. 형이상학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이상학이 곧 매일매일 대응해야 하는 현실이 되는 곳.. 신념과 철학의 갈등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세계.. 멀티버스로 가는 관문, 지저분하고 비참하고 잔혹하고 위험하고 놀라운 도시 시길.. 그리고 그 멀티버스를 집어삼킬듯 위협적이면서도 역으로 악이 멀티버스를 집어삼키는 것을 막고 있는 블러드워. 야심찬 설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시위하는 기분마저 든달까요. (웃음)

'DM을 위한 플레인 길잡이'에서는 플레인스케이프 설정에 대한 소개, 플레인이 마법에 미치는 영향, 플레인의 구조, 플레인간의 이동수단, 내차원계와 각 내차원에 대한 개괄, 외차원계와 각 외차원에 대한 개괄 등 기본적인 얼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외차원계 부분에서는 레이디 오브 페인과 블러드워 등 설정의 중요 요소들 역시 소개 차원으로 다루고 있지요. 시길과 경계지대에 대한 세부 내용은 이 책이 아닌 '시길과 그 너머'에 있고, 이런 식으로 정보가 갈라져 있다는 점은 이 박스세트에 대한 불만 중 하나입니다. 그 얘기는 조금 있다가...

'참가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에서는 플레인의 기본구조, 플레인의 구성원, 그리고 시길의 당파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진행자만 볼 수 있는 'DM을 위한 플레인 길잡이'와 '시길과 그 너머'와는 달리 참가자를 위한 개설서이기 때문에 다소 중복되는 내용도 있지요. 다만 당파에 대한 소개가 나오기 때문에 진행자도 보긴 봐야 하고, 여기서 위에서 지적한 정보의 구조화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또 나오게 됩니다.

'시길과 그 너머'는 위에서 얘기한대로 시길과 경계지대의 설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권의 책 중 진행자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는 책으로, '진행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와 '참가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을 하는 진행자를 위한 조언, 경계지대의 개괄과 경계지대 각 지역에 대한 소개, 그리고 대망의 시길 세부설정이 나옵니다. 차원문, 시길의 구조와 지역, 보안, 각 당파의 역할, 경제생활 등이 소개되어 있어서 특히 유용합니다.

마지막 괴물책(..?)은 다부스, 크래니움 랫 등 12 종류의 생물이 나오는 짤막한 책으로, 캠페인에 AD&D를 쓸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냥 한번 훑어보았습니다. 필요할 때 참고할만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플레인스케이프라는 방대한 설정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박스세트는 전반적으로 플레인스케이프의 개괄을 잡아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봅니다. '참가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는 참가자, 특히 플레이너 주인공을 하는 참가자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잘 추려놓았으며, '시길과 그 너머'는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에 꼭 필요한 조언과 정보가 가득 들어있으니까요. '진행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도 몰라선 안될 내용이고...

다만 비슷비슷한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아쉬움은 좀 듭니다. 진행자를 위한 정보와 참가자를 위한 정보를 서로 다른 책으로 분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진행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와 '시길과 그 너머'는 한권의 책으로 묶었으면 더 짜임새 있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매우 비슷한 내용들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의 분위기와 캠페인을 위한 조언, 플레인이 마법에 미치는 영향과 경계지대가 마법에 미치는 영향, 내차원계·외차원계 소개와 시길·경계지대 소개)이 두 권의 책으로 갈라지는 결과가 되어서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어쨌든 RPG 책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플레인스케이프 기본 세트는 더더욱 '몰라선 안되지만 이것만 알아서는 부족하다'라는 한계랄까, 미진함이랄까 하는 특징이 있지요. 따라서 필요에 따라 서플먼트를 더 찾아보면서 보충해가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책에 돈쓰게 하는 묘미..(..) 플레인스케이프에 대한 탐구는 박스세트를 읽은 것만으로는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인 것 같습니다.

진행 자체에 대해서는... 뭐 이만큼 방대하고 야심찬 설정에 마주했을 때 언제나 막막한 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는 것인데, '시길과 그 너머'에 나오는 조언을 통해 어느정도 이 막막함을 극복할 수는 있긴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플레인스케이프는 마치 수영장 (내지는 물 원소의 내차원?)과 같아서, 눈 딱 감고 미친척하고 뛰어드는 것밖에는 헤엄치는 방법을 배울 길이 없을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운만큼이나 즐거운 과정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지요.
2007/02/19 01:16 2007/02/19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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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의 배경은 펨버튼이라는 가상의 유서깊은 미국 대학입니다. 주인공들은 이 펨버튼 대학의 교수로서, 이들이 1년의 기간에 걸친 여섯가지의 교내 행사 (입학식, 와인 파티 등) 동안 영향력과 명성을 두고 경쟁하는 내용이 게임의 초점입니다.

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존재가 제목에 나오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입니다. 이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기생해 조종하면서 고대 수메르 문명을 지배하던 벌레 일족의 생존자라는 설정입니다. 펨버튼 대학의 애플비-젠킨스 교수가 샤브 알-히리에 있는 유적에서 발견해서 새로운 바퀴벌레 종의 표본으로 미국으로 가져온 이 바퀴벌레는 다시 한번 인간 문명을 지배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 세계는 벌레가 익숙한 4000년 전 수메르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점. 가축처럼 다루면 되었던 고대 수메르 숙주보다 현대인의 정신은 훨씬 반항적이어서 좌절하고 있던 중, 펨버튼 교수들의 권력욕 넘치고 고루한 정신은 매우 익숙한 종류인지라 벌레는 기뻐하고 있지요.

이와 같이 공포와 풍자의 요소를 둘다 갖춘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다분히 RPG와 보드게임의 중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가자만 있을 뿐 진행자는 따로 없으며,  게임 속에서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명성 점수가 제일 높고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승자라는 승리조건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각 교내행사가 시작할 때마다 행동 카드를 뽑는 규칙도 보드게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행방법 자체는 장면 설정과 갈등 해소라는 RPG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요.

각 주인공은 정교수이거나 부교수입니다. 정교수는 학술이나 권력이 관련되었을 때 더 큰 주사위를 굴리고, 부교수는 실용적인 능력이 관련된 갈등에서 더 큰 주사위를 굴립니다. 각 주인공은 또한 한가지 전문분야와 두가지 열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인공 교수들간의 관계, 이름, 대략의 배경 등을 설정하면 시작할 준비가 끝납니다.

각 행사 때마다 모든 참가자는 돌아가면서 자기 주인공이 주역이 되는 장면을 하나 설정합니다. 각 장면은 갈등으로 끝나야 하며, 이 갈등에서 이길 경우 판정에 걸은 명성 점수 (1~5점)를 얻고, 질 경우 판정에 건 명성을 잃습니다. 다른 주인공들은 행동 카드와 이번 장면에서 주역인 참가자의 지정으로 장면에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선택적으로 장면에 참가해서 그 장면 주역의 편을 들거나 반대편을 들 수 있습니다. (주역이 아닌 인물은 갈등에 개입되어도 명성점수 1점만을 걸 수 있습니다.)

갈등해소에 개입하는 인물들은 관련 행동에 해당되는 크기의 주사위를 굴리고, 각 편의 주사위를 모두 합산해 높게 나온 편이 이기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 장면에 다른 주인공과 조연을 되도록 많이 끌어들여야 유리합니다. 이러한 조력자 중 최강은 단연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로, 판정에 d12를 더해줄 수 있는 존재는 이 벌레밖에 없죠.

주인공들은 언제든지 캠퍼스 내를 돌아다니는 바퀴벌레 (알주머니의 알도 깠기 때문에 여러 마리가 있습니다)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갈등 판정에서 추가 d12를 굴릴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벌레의 지배를 받게 되고, 행동 카드를 뽑을 때 그 행동 카드에 나오는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명령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어떤 방법이든 희생이 따릅니다. 열정을 한가지 희생해서 벌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행사 내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 명성 1점을 잃고 한단계 낮은 주사위를 굴릴 수도 있고, 애플비-젠킨스 교수처럼 자살할 수도 있는 겁니..(..)

명령이 정말 사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보통 행동 카드에는 기회와 명령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벌레의 지배를 받게 되는 카드도 10장 있습니다.) 기회도 명령도 다른 인물을 개입시킬 경우가 있는데,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인물은 행동 카드를 뽑고 어떤 기회인지 확인하고 나서 그 대상을 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카드를 뽑기 전에 그 명령의 대상을 미리 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은 대체로는 적대적이기 때문에 사이가 안좋은 인물을 고르면 되지요. 예를 들어

명령하노니 이 자를 모함하라.

라든지

너의 임무는 이 자를 너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다.

하는 식입니다. 문제는 그 명령이 우호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점. 예를 들어

말하노니 이 자는 이제 너의 동맹이다.

..같은 건 그래도 낫지만,

이 자에게 욕망을 느껴 교미하라.

..같은 카드가 나오면 술이 안 넘어갈래야 안 넘어갈 수가..(..)

이와 같이 규칙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틀로 작용하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간단하면서도 흥미로운 규칙입니다. 교수들이 서로 편가르고 배신하고 속이는 학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강력하지만 물정 모르는 벌레의 좌충우돌... 그 유쾌한 내용에 숨은 부조리 때문에 더욱 우스운 샤브 알-하리 바퀴벌레는 한편 웃고 한편 생각하며 즐겨보고 싶은 블랙 코미디이기도 합니다.
2006/12/27 09:11 2006/12/2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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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ishsong 2006/12/27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묘한 게임이군요.... 제목부터가 특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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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Drivethru RPG와 Rpg Now의 통합 사이트에서 첫 구입을 했습니다. 그중 하나인 '팬티폭발 (Panty Explosion)'이라는 당황스러운 제목의 규칙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목이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많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이 규칙책이 다루는 기본 내용은 놀랍게도(!) 외설이나 미성년자 선호증, 속옷 페티시즘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물론 원한다면 위와 같은 내용을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규칙의 방향성은 (이미 표지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팬티폭발(..)의 기본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그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규칙을 간략하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팬티폭발은 기본적으로 일본 여고생들을 플레이하는 규칙으로, 모든 주인공은 여고생입니다. 여고생 주인공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혈액형, 띠, 친구, 가족, 취미에 따른 특성치를 지정합니다. 그리고 오행을 능력치로 사용하고, 판정시 특성치를 사용해 성공율을 높이는 방식이지요. 예를 들어 혈액형 (O형) 특성치로 '쾌활하고 동기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는 것이 있다면 이 특성치를 발동해서 반 아이들이 자기 편을 들어준다고 얘기하면서 주사위를 한단계 큰 것으로 굴리면 됩니다.

여담이지만 다른 문화권을 (이 경우 서양에서 동양을) 볼 때 생기기 쉬운 작은 왜곡들이 보이는 게, 오행이 '물, 불, 땅, 공기, 무(無)'라거나 띠가 태어난 달에 따라 결정된다거나 하는 얘기는 좀 당황스러웠죠. 원래의 화수목금토 오행으로 고치고 띠 대신에 별자리점으로 대체하면 쉽게 수정할 수 있겠지만요. 아마 별자리점 대신 띠를 넣은 것은 '동양적' 색채를 더하기 위한 결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린 여학생들이 십이지신을 알게 뭡니..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달마다 띠가 달라진다는 건 참..(..)

어쨌든 이런 식으로 특성치와 오행을 정한 후 또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단짝과 라이벌, 그리고 목표입니다. 이 목표란 다음 시험에서 성적을 올린다든지, 좋아하는 남학생과 가까워진다든지, 새로 전학온 학교에서 친구를 사귄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내내 진행자는 학생들의 목표를 엮어넣으며, 이 목표를 달성했을 경우 새로운 특성치를 받습니다. 반면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그 시나리오의 보스에게 추가 주사위를 쥐어주게 되지요.

팬티폭발은 또한 등장인물간의 질투, 인기 등 관계를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특이합니다. 위에서 말했듯 모든 주인공에게는 단짝과 라이벌이 있는데, 주인공의 성공은 단짝의 참가자가 서술하고 실패는 라이벌의 참가자가 서술하거든요. 따라서 일단 실패하면 그 실패의 서술이 가차없이 망신스러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쉬운 감정적 가혹함을 본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션 시작 때마다 하는 인기투표도 이 RPG에서 미세한 감정관계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학생들은 지난 세션에 있었던 일들을 고려해서 익명투표로 이번 세션에서는 누가 가장 인기인일 것 같고, 누가 가장 인기가 없을 것 같은지 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인기있는 학생으로 뽑힌 학생은 그 세션 동안 판정을 d10을 굴리고, 가장 인기없는 학생으로 뽑힌 학생은 d6으로 굴리며, 나머지는 d8로 굴립니다. 따라서 판정의 성공율과 학생이 얼마나 유능한지는 인기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죠.

이와 같이 팬티폭발은 평범한 여학생들의 삶과 고민, 감정을 다루고 있지만 (자꾸 팬티폭발 소리 하려니 미치겠..), 여기에 한가지 차원이 더해집니다. 바로 심령소녀의 존재이죠. 심령소녀는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제작하지만 추가로 기묘한 영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영적 현상이나 음모조직에 대해 완전히 무방비 상태는 아닙니다. 반면 그 능력 때문에 악령이나 비밀결사, 정부기관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심령소녀에게는 뭔가 기묘하고 꺼림칙한 데가 있기 때문에 인기투표에서 인기인으로 뽑힐 수 없습니다. (언더월드 3기 11화에 처음 등장한 무당 딸 지연처럼 말이죠)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주인공들을 한 일행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팬티폭발은 버피나 앤젤, 위치크래프트 같은 에덴 RPG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일종의 제한적인 클래스 개념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말이죠.

이러한 인물제작 규칙의 좋은 점이라면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시트)를 보면 그 인물의 포괄적인 모습이 나오고,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엮어가야 할지도 어느정도 보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 하나에게 '유도부 부원' 특성치가 있고 목표는 '유도부 주장으로 선출되는 것'이라면 학교 유도부가 등장하는 게 좋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다른 학생이 유도부에 소속되어 있는 선배를좋아하고 그 선배가 주장이 되도록 도울 생각이라면 충돌하는 목표 때문에 플레이는 더욱 입체적이 될 수 있겠죠. 다만 학생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갈등 판정은 오행 주사위로 하는데, 주사위를 가져다 쓸 때마다 그 판정에 한해서는 소모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일 판정이 지나치게 오래 끌 일은 없고, 자원 관리의 문제 또한 도입한다는 면이 흥미롭습니다. 판정 방식은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결과적으로 매우 이야기 중심적이 될 것 같더군요. 모두가 장면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수미와 지영은 둘다 6반의 도현이를 좋아합니다. 그 때문에 가시돋힌 말을 주고받다가 수미의 참가자는 갈등판정을 시작할 것을 선언하지요. 화가 난 수미는 지영의 뺨을 때린다고 선언하고 적대적인 행동이니까 화(火) 주사위로 판정합니다. 성공하면 수미의 단짝인 혜정의 참가자가 결과를 서술하고, 실패하면 수미의 라이벌인 지영의 참가자가 서술하지요. 수미는 실패하고, 지영의 참가자는 수미가 지영을 때리려고 했지만 지영이 수미의 손을 확 붙잡아서 수미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고 서술합니다.

다음 지영의 차례. 지영은 여전히 수미의 손목을 붙잡은채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로 수미를 겁에 질리게 한다고 서술하고 토(土) 주사위를 굴려서 성공. 따라서 지영의 단짝인 미경의 참가자가 서술합니다. 이때 혜정은 싸움 얘기를 전해듣고 헐레벌떡 교실로 달려오고, 목(木) 주사위를 굴려서 싸움을 말리려고 합니다. 실패한 관계로 혜정의 라이벌인 미경의 참가자가 아무도 혜정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 서술을...

뭐 대충 저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모든 판정이 참가자들이 이야기를 자기 방향으로 끌어오려고 노력하는 형태가 되지요. 단짝과 라이벌 관계에 따라 서술권이 주어지고, 동맹과 적대의 선이 그어지는 것이 재미있어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메기 베이커의 천일야화가 (소개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다만 서술권이 적당히 분배되도록 단짝과 라이벌 관계를 안배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요.

이 규칙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공포가 점점 엄습해 오다가 마지막에는 그 공포의 실체와 맞선다는 식의 진행이 되도록 되어 있어서, 하나의 완결된 시나리오를 장려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끝도 없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대신 깔끔하게 마무리짓는 쪽으로 끝낼 수 있어 보이고요. 학생들이 해소하지 못한 목표가 있거나 심령소녀가 영능력을 쓸 때 보스에게 주사위가 굴러들어가고, 충분히 쌓였을 때쯤 보스와 대면하는 형식으로 될 것 같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꽤 흥미로운 규칙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단 일본 고등학교 뿐만 아니라 어떤 성격의 사회이든 좁고 폐쇄적인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와 경쟁을 다루기에 좋아 보이는군요. 한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해서 시나리오 한개 정도 돌려보면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2006/11/17 02:15 2006/11/17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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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fos 2006/11/17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쿨럭; RPG人에서부터 제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용은 별 상관없을거라도 생각했는데...맞았군요.
    일본만화, 애니메 속 여자고등학생이라는 모에요소-_-가 있는만큼, 그리고 허구로 생각하는 배경이라는 점을 놓고 봤을 때 정말 판타지 아닌 판타지 월드가 되겠군요. 아즈망가대왕처럼 서로 친밀하게 지내는 소소한 일상같은 타입이 아니라 서로와 서로 사이에 경쟁이 생기고, 그에 따른 갈등이 발생하게끔 말이죠. 마리미떼처럼 누군가에게 로자리오를 건네준다거나 학교내 파벌을 만들어 끼리끼리 모여 논다거나 등의 내용이 나올지도요. 플레이 소재로 진부하며 전형적인 학교행사(새학기, 운동회, 방학, 축제, 진급)등 을 써먹는게 오히려 당연할듯 싶네요. 소개한 내용에 따르면 (1~2명정도) 캐릭터가 상황에 따라 등장하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듯싶고, 그에 대한 처리도 어느정도 적혀있으리라 봅니다.
    판정에 따른 서술을 플레이어가 하기 때문에 OR로 하더라도 한눈을 팔면 안될듯 싶고, 판정을 (양적으로) 충분히 해주기만 해도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될듯 싶네요.
    플레이어가 남자인경우 (여고생의 심리파악의 난해함 때문에) 여고생을 조종 하려면 조금 난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성별을 남자로 바꿔버리거나 남&녀 허용하는 것도 될 듯 싶지만 그러면 캐릭터간의 갈등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 ... (먼산) 코멘트가 너무 길어서;; 트랙백했어야했나.

  2. 천승민 2006/11/17 0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종류의 관련 장르 전형성에 대한 전제가 플레이 선결조건으로 좀 필요한 셈일까요? 아니면 그런저런 맥락을 형성할만한 내용이 시스템에 어느정도 설명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여학생이라면 척보면 알만한 보편적인 부분일까요?

    제목 참.... 드러난 내용의 방향성과도 별 관계는 없어 보이는데 ^^ 제목으로 주목을 끄는 에로영화식 수법인지.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 무척이나 관심이 가는 군요. 여성편향적 시스템도 분명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고.

  3. 물고기군 2006/11/17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목은 참 ...스러운데, 내용은 괜찮군요.
    놀만한 꺼리도 풍족해 보이고요. 웬지 모르게 여고괴담같은 영화가 도움이 많이 될 것처럼도 보입니다(웃음).

    nefos/ 모에를 중심으로 한다면... 이걸 한국 고등학교 배경으로 쓰긴 좀 괴악할 듯 하네요. 이땅의 수험생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집안의 어머니 아버지들도 죄다 아는 판에...-_-; 마리미테의 릴리안은 수험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여고생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던 거죠.
    거기다 '심령소녀'를 한국식으로 어떻게 끼워넣어야 하는 지도 좀 난감하구요(혹시 무당집 딸 이나 오컬트 심취한 여자아이 보신분?).
    사실 nefos님의 아이디어는 얼음꺠기에 더 적당해 보입니...(퍽!)

  4. 헤매는넋 2006/11/17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용띠, 범띠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월(음력 11월), 축월, 인월 등의 개념으로 넣지 않았을까요.

  5. 로키 2006/11/18 0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efos// 학교의 분위기는 모두가 재밌겠다 싶은 정도이면 뭐든지 될 것 같습니다. 기본으로는 물고기님이 말씀하신대로 수험에 치이는 평범한 학교생활을 깔고 있지만요. 학원심령물인 팬티폭발에서 어쩌면 가장 큰 공포는 여학생들의 억압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범한 학교생활이 가장 편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고생을 RP하기가 힘들다는 말씀은 솔직히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엘프, 드워프, 외계인, 여전사, 여마법사도 할 수 있는데 길에 흔히 돌아다니고 아마 적어도 한둘쯤은 알고있을 여고생이라고 안될 이유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건 어쩌면 어린 여학생을 '나하고는 달라!' 하고 객체화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생각이 아닐까 해요. 외계인이나 엘프보다도 더...

    배경의 성격 때문에 사실 남학생으로 바꿔서는 감정선이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솔직히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속으로는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같이 몰려다니면서 떠들고... 한다는 건 조금 상상이 안되니까요. 시도로서는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건 그 결과를 생각하고 전혀 새로운 시도로서 해야지, 남자가 여학생은 할 수 없으니까... 라는 생각이라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천승민// 지향하는 장르는 학원 심령공포물 내지는 학원 음모공포물입니다. 아무래도 블로그글만 보고 책 전체를 이해하기는 힘들어서 그렇지, 여학생이 아니더라도 책을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제목으로 주의를 끄는 면이 좀 많죠.^^ 한편으로는 일종의 유쾌한 자의식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제목과 내용에서 느껴지는 괴리는 일본 여고생에 대한 RPG라는 기대와 실제 플레이의 지향성에서 느껴지는 괴리와 일치하는 면이 있으니까요.

    여성편향 시스템은 무슨 말씀이신지 잘... 제작자도 남자고 또 플레이테스트한 사람들 중에도 남자가 있는데 어째서 여성향이라고 보여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성편향이라면 오히려 야오이나 에로 RPG에 더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고기군// 예, 여고괴담 같은 분위기가 확실히 떠올리기 좋죠. ^^ 마지막 반전에서 심령소녀는 사실 귀신이었다! 하는 식도 멋질 것 같고요. 심령소녀 자체가 초자연적이어서 심령능력이 생겼다고 하면...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렸으니 이것은 써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ㅁ;)

    무당 딸이나 오컬트 매니아도 심령소녀로 끼워넣기 좋을 것 같군요. 사실 심령소녀는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할 수 없다는 대목을 봤을 때 바로 무당 딸 생각이 나더라고요. 무당 딸이라면 더군다나 우리 근대사에서 나타난 문화적 갈등, 종교와 뒤얽힌 사회계층 문제까지 엮여서 더 깊이있는 진행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사 아버지가 딸에게 같은 반의 무당집 애하고는 어울리지 말라고 한다든가... 어쩌면 그런 식의 뒤틀림에서 억압의 공간인 학교의 공포가 나오는 것일지도요. 억압적인 사회의 축소 · 농축판으로서의...

    헤매는 넋// 예, 그것도 가능하겠군요. 여전히 여학생들에게는 별점이 더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만요. ^^

  6. nefos 2006/11/23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뒤늦게 답변을 다네요. '여고생은 나와 달라'라기보단 '내 앞에 농부였던 사람이 있는데, 그 앞에서 어설프게 농부를 하느니 안 하고 말지'랄까요. 물론 팬티폭발이 일본 애니나 만화쪽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여성 플레이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도 합니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파티내에 경험자가 있으니 물어보기 쉽고, 따라서 더 나은 플레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요.

    • 로키 2006/11/24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긴, 확실히 그런 면이 있겠군요. 저도 군필자들과 함께 RPG를 할 때는 군인을 하는 것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요. 하지만 역시 말씀하신대로 틀려서 지적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더 지평을 넓힐 계기가 될듯 합니다.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론 에드워즈의 소서러 RPG (Sorcerer RPG)는 포지 계열 인디 RPG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풍으로, 인디 RPG 중에서도 '포지'라는 특징적인 영역을 처음 확보한 책이기도 합니다. 제한된 장르와 주제의식만을 다루면서도 배경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든지, 인간과 도덕성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다든지, 비교적 단순하고 유연한 규칙으로 이를 구현한다든지... 포지가 발전하면서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규칙도 많이 생기게 되지만, 아직까지도 소서러 및 소서러의 영향을 받은 RPG들은 가장 특징적인 포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소서러는 제목 그대로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흔히 떠오르는 판타지의 마법사보다는 좀더 어둡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마법력을 가지고 이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계약해서 악마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얘기해 두자면 악마라고 해도 반드시 지옥과 사탄 같은 기독교적 개념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소서러에서는 악마의 성격을 각 캠페인마다 정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의 무의식이 실체화된 것일 수도 있고, 원혼일 수도 있고, 과거 사건의 잔영일 수도 있고, 지옥에서 나온 악마일 수도 있고, 지성을 가진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습니다.

악마가 순수하게 악한 존재일 필요가 없듯 소서러 역시 반드시 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참가자가 공감할만한 인간적인 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주인공 제작에서 가장 강조되는 점 중 하나죠.

소서러를 규정하는 최대의 특징은 악이 아니라 욕망과 오만입니다. 모든 소서러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염원이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강력한 존재와 계약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존재와 거래하는 유혹과 위험을 자신은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사회법규와 자연법칙을 어겨가며 악마와 계약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강하고 제멋대로인 인간상이라는 면에서 WoD 쪽의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특히 메이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소서러의 악마들은 현실의 법칙에 늘 저항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에 띄는 행동을 거부한다는 점도 메이지와 비슷한 면이 있고요. 어쩌면 소서러도 WoD의 영향을 받았거나 WoD와 공통된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소서러 자신과 마찬가지도 악마도 반드시 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소서러처럼 악마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서러를 통해 그 욕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지요. 살인이나 폭력, 흡혈처럼 반사회적인 욕구를 가진 것이 가장 고전적인 악마겠지만 시사지식이나 이성과의 데이트처럼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욕구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소서러가 악하든 악하지 않든, 악마가 악하든 악하지 않든 이 계약 상황은 근본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소서러에서 마법은 이성적인 법칙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진 다른 존재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소서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구가 있고,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소서러에게 힘을 부여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이렇게 엇갈리는 욕망과 악마가 가진 커다란 힘 사이에서 계약상황은 점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욕과 끝없는 위험, 사회적 파탄의 연속이 되기 쉽습니다.

권력은 타락한다고 했던가요. 소서러는 권력과 권력욕에 대한 RPG이며,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대한 RPG이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얼마만큼 희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지. 그것이 바로 소서러의 이야기입니다.

(위의 얘기가 전에 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감상글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끼신다면, 그 느낌은 정확합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실제로 소서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소서러 서플먼트로 만들 생각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소서러를 뒤집은 반대편의 이야기가 포도원의 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칙상으로 두 RPG는 전혀 다르지만 주제의식 면에서 상당한 접점들이 보이죠. 실제로 포도원의 개들에 보면 악마의 힘을 빌리는 '소서러'라는 존재들이 적으로 나와서 재밌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지원하기 위해 소서러에서는 악마를 다루고 활용하는 규칙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인간성 규칙을 통해 주인공의 도덕성이 타락하거나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솔직히 규칙 면에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좀 복잡하거든요. 능력치도 많지 않고 기본 주사위 굴림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규칙이 조금씩 달라서 한번 읽어본 것만으로는 잘 파악이 안됩니다. 또 전투 규칙이 너무 자세하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들고... 뭐,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정리해봐야겠지만요. 확실히 규칙 깔끔한 것은 소서러보다는 후기의 포지 RPG들이 훨씬 낫습니다.

위에서 포도원의 개들 얘기도 했지만, 포도원이 아니어도 이후 인디 RPG에 소서러가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무엇보다 확고한 주제의식과 초점이 확실한 이야기의 지원, 인간 감정과 도덕성에 대한 초점 등 포지 RPG의 특징을 처음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소서러의 주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포도원의 개들, 소서러의 주사위 굴림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던전 (Donjon), 인간성과 자기혐오 규칙으로 구원과 저주를 다룬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 (주인님과 주인공들의 관계는 소서러와 악마의 관계와 꽤 유사하기도 합니다), 열정을 잃고 피로가 늘면서 비극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는 폴라리스 (Polaris) 등등 많은 규칙들에서 소서러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포지 RPG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소서러에 대해 역사적, 계보적 흥미가 더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서러가 과거의 유물이라거나 하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최근에만 해도 또다른 서플먼트인 '무의 사전'이 나와서 호평을 받고 있고 말이죠. 설사 소서러 자체가 언젠가는 잊혀진다 하더라도 다루고 있는 주제의식, 곧 욕망과 권력의 관계는 결코 그 중요성과 현재성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2006/11/15 01:47 2006/11/15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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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고기군 2006/11/15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전히 좋은 룰을 소개받아 안계를 넓혔습니다.

    그리고 내부를 바꾸셨네요. 한층 읽기 좋아졌습니다^^

  2. ddowan 2007/12/22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도 읽었었지만, 메이드물 RPG가 나온다기에 주인님과 함께를 찾는 김에 덧글을 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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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하하하하하하하!!!!


발매에 앞서 주문했던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하드커버 한정판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앞표지 안쪽에는 세 작가 (로버트 도노휴, 프레드 힉스, 레오나르드 발세라)의 사인이 들어가 있고,  끼워져 나온 책갈피 두장 뒷면에는 형용사 사다리와 시간 단계, 거리 단계, 기능 목록 등 진행에 참고할만한 규칙이 발췌되어 있습니다. 코팅된 세기클럽 회원카드도 끼워넣어져 있군요. (회원번호 97, 센츄리온급 되겠시며..ㅡㅡV)

책도 참 예쁘고 튼튼해 보이고, 크기도 소설책보다 조금 큰 정도라 400여쪽이라는 (인디 RPG로서는 획기적인) 양에 비해 휴대도 편해 보입니다. 종이 질도 좋고... 질낮은 종이와 울퉁불퉁한 페이지 가장자리 때문에 '펄프'라는 이름이 붙은 장르를 지향하는 RPG로서는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책 제본도 깔끔하고 좋습니다.

평소에는 PDF로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물리적인 책에 대한 집착이 없는지라, 세기의 혼에 서슴없이 50불을 처넣은(..) 행동은 저로서도 당황스러울 지경입니다. 어쨌든 그만큼 기쁨도 크군요. 평소 너무너무 좋아했던 페이트 RPG가 이렇게 훌륭한 규칙책으로 나오다니, 50불이 아니라 100불이었어도 행복했을 지경이니까요.

그 외에 최근에 지른 RPG로는 소서러 (Sorcerer RPG)와 화륜전설 (Burning Wheel)이 있습니다. 소서러야 뭐 포지계열 인디 RPG의 고전인데다 최근 높이 평가받고 있는 배경설정인 무의 사전 (Dictionary of Mu)이 나와서 결국 질러버렸죠.

화륜전설 (오륜전설 패러디 번역?) 같은 경우 대개의 인디 RPG와 달리 경량 규칙은 아니지만, 극적인 플레이를 지원하는 신념 및 본능 규칙과 박진감있는 전투규칙으로 널리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 풍의 판타지를 더없이 잘 받쳐준다는 평이 있지만, 저는 염불보다는 잿밥인지라(..) 열사(熱沙)전설: 성전(聖戰) (Burning Sands: Jihad)이라는 무료 배경 때문에 질러버렸죠. 이게 듄을 기반으로 한 배경이라 듄 RPG로 사용할 생각이 있거든요. 과연 역량이 따를지는 그 다음 문제입...

문제는 돌리는 건 둘째치고 언제 다 읽을 것이냐...이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로키의 RPG 생활은 오늘도 즐겁습니다!
2006/11/10 11:19 2006/11/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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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Xenosia 2006/11/10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싸 조쿠나~!' 시군요 [..]
    일단 축하드립니..
    어제 이야기 했던 미딕과 함께 쓸 수 있도록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2. 삭풍 2006/11/10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같이 음하하하하![...]

  3. Wishsong 2006/11/10 1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축하드립니다. :)

    한정판, 그것도 작가 사인이 있는 하드커버라니!!

  4. 아사히라 2006/11/10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씨 저는 침체기인데...ㅠㅠㅠ

  5. 로키 2006/11/11 0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Xenosia// 확실히 미딕을 함께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군요. 다른 규칙과의 융합도 쉬울 것 같고, 써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듯 합니다.

    삭풍// 음하하하하..(..)

    Wishsong// 감사합니다. ^^ 발매전에 알게 된 게 다행이었죠!

    아사히라// 아군은 수험생이니까 뭐..(토닥) 곧 마음껏 할 수 있게 될거야!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론 에드워즈의 트롤베이브는 인간과 트롤의 중간적인 존재인 트롤 아가씨들에 대한 RPG입니다. 트롤 아가씨에게 관심이 없어도 다른 배경으로 옮기기가 쉬우며, 규칙이 간단하면서도 서사성을 잘 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단 가장 간단한 것은 주인공 제작 규칙입니다. 얼마나 간단하냐 하면, 인물의 능력치는 2에서 9 사이의 숫자 단 하나입니다. 숫자가 낮을수록 마법에 강하고, 높을수록 전투에 강하며, 중간에 가까울수록 사회성이 뛰어납니다. 판정시 1d10을 굴려서 마법 성공은 인물의 숫자보다 높게, 사회 판정 성공은 1와 10 중 가까운 쪽에서 그 숫자까지, 전투 성공은 숫자보다 낮게 나오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이 번호는 세션 사이에 1씩 올리거나 낮출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숫자 4인 인물은 전투 판정이 성공하려면 1d10에서 1-3이 나와야 하며, 사회 판정이 성공하려면 1-4, 마법 판정이 성공하려면 5-10이 나와야 합니다. 숫자가 6이라면 전투는 1-5, 사회는 6-10, 마법은 7-10이 되지요. 따라서 숫자만 보면 이 주인공이 전투형인지, 마법형인지, 칼도 좀 쓰고 주문도 몇마디 알고 사람도 잘 속여넘기는 유형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 바로 전사와 마법사와 로그입니다.)

인물 제작의 나머지 부분은 주로 색채를 더하는 것으로, 외모 묘사라든지 마법·사회·전투 각분야의 특화 (예를 들어 점성술·거짓말·단검 사용이라든가), 추억이 담긴 물건 등입니다. 특화가 아니어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각 행동 유형에서 어떤 쪽을 많이 하는지 알 수 있고, 또 주인공의 훈련이나 경험, 성격 또한 알 수 있으니까요.

정말로 규칙이 재미있어지는 부분은 판정입니다. 우선 판정은 참가자만 하며, 진행자는 일체 주사위를 굴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판정이라면 주인공의 사회판정과 주변 인물의 사회판정을 대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성공하면 그 판정에 성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공 외의 주변 인물은 저 숫자 한개짜리 능력치조차 필요없습니다. 주변 인물이 필요하면 내용적인 부분만 만들어내면 되고, 능력치를 준비하느라고 시간 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진행자의 준비 시간을 절약하는 매우 편리한 규칙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본 판정 외에도 트롤베이브는 참가자에게 상당히 많은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등판정의 속도. 전체 갈등에 성공하는데 들어가는 성공의 갯수는 한개, 두개, 혹은 세개가 가능한데, 성공이 많이 들어갈수록 그 갈등에 대한 주목도는 높아지며, 해소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고 피해도 많이 쌓입니다. 진행자든 참가자든 갈등의 시작을 선언한 쪽이 필요한 성공의 갯수를 정하지만, 상대방은 선언자가 제시한 성공 갯수를 하나 높이거나 낮출 수 있습니다. 즉 성공수 두개를 제안했을 경우 상대에게 고르라는 뜻이 되지요.

트롤베이브는 참가자에게 또한 피해에 대해서도 주인공의 죽음에 대해서도 폭넓은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피해 단계는 '불편' '부상' 그리고 '무력화' 세 단계가 있는데, 멀쩡한 상태에서 불편, 불편에서 부상... 하는 식으로 내려가는 유일한 방법은 재굴림이라는 규칙입니다. 재굴림이란 1d10을 굴려서 실패했을 경우 피해 단계를 하나 넘기고 재굴림 사유에 표시한 후 ('들고있는 물품' '지형적 특성' '갑작스러운 아군' 등) 다시 굴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굴림과 재굴림은 모두 하나의 굴림으로 칩니다. 즉, 단일 판정에 실패할 것인지 아니면 재굴림을 시도해서 피해를 입을 것인지는 참가자가 판단할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 피해와 재굴림의 관계에 대한 부분은 제가 착각했습니다. 재굴림을 하든 안하든 굴림에 실패하면 피해 단계가 넘어가는군요.)

주인공의 죽음은 참가자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상을 넘어 무력화 단계까지 피해를 입었을 경우 주인공은 참가자의 제어를 벗어나며, 더이상 능동적인 행동이 안됩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든지, 악마에게 씌인다든지, 실연의 상처로 넋이 빠진다든지.) 여기서 또 재굴림을 해서 성공할 경우 참가자가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일을 서술할 수 있는 탈출구가 있습니다. 반지를 버리고 기진해서 쓰러졌는데 독수리들이 와서 안전한 데로 대피시켰다거나.

만약 이 재굴림마저 실패하는 경우 주인공의 행방은 진행자가 서술합니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참가자는 주인공의 죽음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이며, 무엇보다 한 세션 (혹은 따로 정한 피해 회복 기간)마다 피해는 한단계 회복되므로 다음 세션만 되면 참가자는 다시 한번 주인공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재굴림의 기회는 제한되겠지만요.

트롤베이브 규칙에서 아마 가장 특이한 참가자 권한은 일부 주변 인물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 규칙을 통해서 가능한데, 특정한 조건 (갈등 상황에서 그 인물과 만나고, 차후 또다른 장면에서 만나서 인간관계를 확정짓는 것)을 거치면 그 주변 인물은 이 규칙상 가장 유용한 자원인 인간관계가 됩니다.

일단 어떤 주변 인물을 인간관계로 만들면 참가자는 주변 인물이 하는 행동에 대해 어느정도 제어력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옥쇄를 훔쳐내는데 친구가 망을 봐준다든지, 경비들이 주인공을 찾고 있는데 주인공의 옛 애인이 숨겨준다든지.

이렇게 참가자가 행동방침을 정하면 구체적인 연기는 진행자가 맡습니다. 망보는 친구가 위험하다고 투덜거리든가 돈을 나누자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고, 숨겨주면서 옛 애인이 주인공한테 아쉬우니까 찾아온다고 잔소리를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친구가 망보다가 도망갔다거나 다가오는 경비를 못 봐서 주인공이 잡힌다거나, 옛 애인이 당신 면상은 보기도 싫다고 문전박대하는 등 참가자가 말한 의도에 반하는 결과는 낼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또한 판정에서 인간관계를 사용할 경우 피해를 막아줄 수도 있는 등 다양한 혜택이 있습니다. 또한 유일한 능력치인 번호는 변화할 뿐 성장하지 않으므로 유일한 직선적 성장은 인간관계를 늘리는 것이라는 점도 트롤베이브의 특징입니다.

트롤베이브의 판정 규칙을 보면 '번호를 2(혹은 9)로 하고 모든 문제를 마법(혹은 전투)으로 해결하면 백전 팔십승이겠네?'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진행자와 참가자의 플레이 방향에 대한 합의에 달렸지만, 규칙 자체적으로 이런 단조로운 문제해결은 어느정도 막을 수 있습니다. 판정에 사용할 행동 유형은 갈등 선언자가 결정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번호 2짜리 마법사가 아무리 모든 문제를 마법으로 해결하고 싶어도 진행자 혹은 다른 참가자가 이번 갈등은 사회 혹은 전투로 판정한다고 선언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위와 같은 경우 복합 판정 규칙을 통해 판정의 성공률에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복합 판정이란 갈등 판정에 사용하는 행동 유형에 더해 또다른 행동을 함께 판정한 후, 둘중 하나라도 성공하면 판정에 성공한 것으로 치는 규칙입니다. 예를 들어 전투로 판정하기로 했다면 우리의 번호 2 마법사는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하지만 행동 유형에 마법을 더해 전투·마법 복합판정으로 한다고 하면 전투와 마법을 따로 굴려 마법만 성공해도 그 판정에 성공한 것이지요.

이 경우 성공확률은 상당히 올라가지만, 한가지 위험요소라면 두 주사위가 다 실패할 경우 피해 단계가 하나가 아닌 둘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위의 마법사의 경우 만약 피해 단계가 '불편'에 있었다면 바로 무력화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트롤베이브 피해 규칙이 원래 그렇듯 참가자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또하나,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 유형을 고를 수 있더라도 참가자 스스로가 불리한 행동 유형을 선택할만한 동기도 있습니다. 즉, 실패를 (사실상) 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 짓을 하냐 하면, 트롤베이브 규칙상 성공은 진행자가 서술하고 실패는 참가자가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가자가 서술을 통해 이야기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으로 실패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실패한다고 주인공이 죽는 것도 아니니까요. 참가자가 죽이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물론 진행자와 참가자가 합의한다면 위에 말한 '백전 팔십승' 방식으로 못할 것도 없습니다. 단순 도살이나 마법난무로 가면 한없이 싱거워질 규칙이긴 하지만 (1d10! 8! 트롤 잡았다! 1d10! 6! 오크 잡았다!), 어쨌든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입니다.

또하나 트롤베이브의 특이한 규칙이라면 모험의 규모를 정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모험의 규모에 따라 판정 성공과 실패의 결과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가장 극과 극인 예를 들자면 제일 작은 모험 규모인 '개인'에서 전투에 성공한다는 것은 사람을 한명에서 세명쯤 죽일 수 있는 정도입니다. 반면 가장 큰 모험 단위인 '국가'에서는 전투에 성공해서 전쟁에 이길 수도 있습니다. 큰 규모는 작은 규모를 포함하기 때문에 국가 단위의 모험에서도 한명만 죽일 수도 있습니다.

모험의 규모는 가장 작은 개인 단위에서 시작하며, 필연적으로 점점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션 사이마다 모험의 규모를 확장할지 토론해서 한 사람이라도 원하면 규모를 한단계 올려야 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반지를 배달하러 갔다가 세계의 운명을 손에 쥐게 되는 것처럼 규모가 점점 커지는 이야기를 직접 지원합니다. 광범위한 범주의 능력을 가진 주인공,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강조라는 요소와 함께 트롤베이브가 펄프 판타지의 재현에 썩 어울리는 규칙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딱히 맺을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재미삼아 제노님의 겁스 캠페인인 언더월드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트롤베이브로 컨버젼해 보겠습니다. (그리도 생각나는 말이 없던?) 언제나처럼 공평하게 가나다순!

로렌, 엘리사
번호: 5
전투: 1-4 (화염공격)
마법: 6-10 (음악적 재능)
사회: 1-5 (아름다운 외모)
-> 여기에 인간관계로 환청들이라든지 학교, 매니져 등이 들어갈듯...

리이
번호: 3
전투: 1-2 (주먹질)
마법: 4-10 (영과의 대화)
사회: 1-3 (교란)
-> 인간관계로는 신엄마 (직접 등장은 안해도 기억을 통해서), 카구라 조손, 정도령 등

민설
번호: 8
전투: 1-7 (총기)
마법: 9-10 (원령 보기)
사회: 8-10 (능구렁이)
-> 인간관계로 전태일 요원, 국정원 DB, 정림기업 등 (적도 훌륭한 인간관계가 되는 것입니..)

임희연
번호: 6
전투: 1-5 (검도)
마법: 7-10 (동식물 교감)
사회: 6-10 (건전한 상식)
-> 인간관계로 쟝 메이, 임시준, 작은아버지, 안형사 등

2006/10/07 11:42 2006/10/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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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삭풍 2006/10/08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트롤아가씨들이라 독특하군요[...]

    • 로키 2006/10/09 1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규칙 못지않게 설정도 독특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니코틴 걸즈, 베스트 프렌즈와 함께 (원래대로라면) 의무적으로 주인공이 여자인 몇 안되는 규칙.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벤 레만의 폴라리스(Polaris)는 3~5명의 참가자를 위한 RPG이며, 이상적으로는 4인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제목은 북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내 판타지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와는 상관없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비극이 목적인 폴라리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전 세상의 끝에서 한 민족이 죽어가고 있더라.

그러나 희망은 남아 있어 안타레스에게는 별들의 부름이 들리나니.

그리하여...

일단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의식(儀式) 언어의 사용입니다. 모든 세션은 세상의 끝에서 죽어가는 민족에 대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주인공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가 (이 경우 '안타레스') 별들의 노래를 듣는다는 문장을 얘기해야 하며, 모든 장면은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외에 이야기 교섭, 장면과 한 회의 끝을 위한 말들이 따로 있습니다.

또다른 특징은 참가자의 역할 분배인데, 대개의 RPG와는 달리 한명의 진행자와 다수의 참가자라는 구도가 없습니다. 주인공들의 일행 개념도 희박하지요. 대신 모든 참가자는 주인공을 만들고,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진행합니다. 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진행할 때마다  그 주인공이 속한 참가자는 주인공의 '마음'으로서 주인공의 행동과 선택, 감정 상태 등을 담당합니다. 이쪽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에 가깝겠지요.

반면 진행자 역할은 셋으로 나뉘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분배됩니다. 주인공의 '후회'는 전통적 진행자에 가장 가까운 역할로, 주인공에게 갈등상황을 제시하고 적에 해당하는 인물을 연기합니다. 또한 이야기와 관련해 의견충돌이 있을 때 '마음'과 교섭합니다. 주인공의 '보름달'은 주인공과 권력적·사회적 관계로 얽힌 인물들과 기타 남자 인물들을 연기하며, '초승달'은 주인공과 감정적으로 친밀한 인물들과 기타 여자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마음'과 '후회'가 교섭할 때면 두 달은 중재와 제안을 합니다.

'마음'과 '후회'가 의견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이야기를 교섭할 때도 의식 언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초승달'이나 '보름달'의 주변인물 연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마음'과 '후회'가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은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고 '후회'는 실패를 바랄 때 교섭하는 동안에도 의식 언어를 통해 교섭을 조정합니다.

폴라리스의 또다른 큰 특징은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주인공의 죽음이나 타락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끌어가는 일련의 규칙들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모든 주인공은 '열의'에 넘치지만 결국에는 열의가 점점 없어지고 '피로'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만큼 더 능력있고 뛰어난 인물이 되어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힘든 싸움에 대한 절망과 냉소가 점점 커지고, 일단 '피로'가 '열의'를 대체하면 '마음'은 언제든지 주인공의 죽음을 교섭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어떤 경우에도 주인공의 죽음을 교섭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기사에게는 자비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죽지 않으면 그는 필연적으로 타락하여 그가 싸우는 악의 일부가 될테니까요. 사랑하는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 모든 기사에게 주어지는 운명, 죽어서만 피할 수 있는 파멸입니다.

일은 그렇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폴라리스의 기본 배경은 북극의 정점에 있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얼음과 별빛의 도시입니다. 별빛 속에 모든 것이 완벽하던 아름다움의 시대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 자신의 잘못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괴물들만 사는 거대한 검은 구조물, '후회'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괴물로부터 남은 민족을 지켜야 하는 별빛의 기사단. 그리고 폴라리스의 외곽이었던, 그 옛 영광의 희미한 잔재 속이지만 여전히 기사단의 희생 위에 풍요롭고 화려하게 살아가는 민족이 남았습니다. 무의미한 쾌락과 권력싸움으로 소일하며 기사단의 힘든 싸움을 애써 외면하는, 햇빛에 녹는 눈송이처럼 사라져갈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폴라리스라고 불리던 도시가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폴라리스를 파멸시킨 잘못에 대해서는 수천 수만의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모두 옳고 모두 틀립니다. 폴라리스는 영원했으며, 폴라리스는 덧없는 한 순간만 서있었으며, 존재했으며,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이야기와 전설과 꿈의 영역, 사실의 흔들리는 그림자 틈새에서 점멸하는 진실의 땅입니다.

...라지만 있을 수도 없었던 북극의 도시보다는 좀더 이해하기 쉬운 배경을 사용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폴라리스의 파멸의 전설 중에는 카멜롯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많이 있지요. 왕과 왕비의 완전무결하던 사랑, 왕비를 지키기 위해 시작했던 별빛의 기사단, 그중 필두 기사와 왕비 사이의 금지된 연모의 정. 기네비어와 랜슬롯의 밀회와 모드레드의 음모로 깨어진 카멜롯의 꿈을 다루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혹은 톨킨의 엘프들을 다루어도 괜찮을지도요. 멜코가 세운 거대한 요새에서 끝없이 공격해 오는 괴물들과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중간계의 먼 옛날의 엘프들은 별빛의 기사단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어긋났다는 점 역시. 최종적으로 타락해서 멜코의 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거듭나는 엘프 전사들도 매우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퍽)

결국 이 세상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별빛의 기사단이나 원탁의 기사들이나 엘프만큼이나 있을 법하지 않은, 있었을지도 모르는,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존재들의 슬픈 잔해와 함께.

일은 그렇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것은 오래 전의 일.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도다.


추신: 문득 떠오른 재미있는 (나름대로) 우연. 부록에 보니 한명의 주인공이 처음 시작에서 최종의 타락까지 가는데는 평균 스물 일곱번의 성장 굴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폴라리스의 이상적인 참가자 수는 네명. 그렇다면 27 곱하기 4는? (퍽)
2006/10/03 21:15 2006/10/0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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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rgotten 2006/10/04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기억이 맞다면 이런 종류를 Bardic-이라고 한듯 한데요. 기존의 RPG 시스템과 섞어보면 어떻나 생각해봅니다.

  2. myst 2006/10/04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트라비우스의 Forever가 테마곡으로 딱이군요.
    어찌보면 토먼트의 "에스얀논의 통곡자"도 생각납니다만;

  3. 로키 2006/10/05 0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Forgotten// Bardic이라는 구분이 있었나요? 섞어서 하는 것도 재밌겠군요.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가는 규칙 쪽은 얼마나 호응을 받을지 몰라도 진행자 역할의 분리와 일행 개념의 파괴는 확실히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할지도요.

    myst// 확실히 그렇겠군요. 쓸쓸하고 슬픈 분위기가...

  4. Xenosia 2006/10/05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극의 도시와 정 반대의 환경이긴 하지만,
    어제 이야기 됬던 이오닉스 동부사막의 소수부족같은 경우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지않나 생각해봅니다.

  5. Xenosia 2006/10/05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쪽은 Xandria 의 Kill the Sun 도 괜찮지 어울려보이는군요.

  6. Wishsong 2006/10/06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키님 덕분에 "이런 RPG도 있구나!" 라는 견문을 넓힐 수 있습니다^^

  7. 로키 2006/10/06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Xenosia// 사막 부족 이야기도 멋지겠는데요. Kill the Sun이라.. 제목이 딱 어울리는데요. '후회'에서 나오는 괴물들의 수장이 태양의 검을 든 솔라리스 경이기도 하고요.

    Wishsong//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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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멋대로 '세기의 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Spirit of the Century를 사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아직 책이 나오진 않았고 11월 초쯤에 배송되겠지만, 미리 주문하면 무료 PDF가 나오기 때문에 그 PDF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420쪽짜리의 탄탄한 내용이라 보는 즐거움이 한가득! (광고하냐)

세기의 혼은 본래 무료 규칙책으로 나왔던 페이트를 수정해 펄프 장르에 적용한 것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페이트 3.0으로 통합니다. (현재 번역중인 PDF가 1.0, 페이트 OGL SRD가 2.0, 세기의 혼이 3.0) 펄프에 특화돼 있긴 하지만 펄프가 워낙에 SF, 판타지, 공포물, 추리물, 수퍼히어로물 등 다른 많은 장르로 파생돼 나온지라 (아시모프, 하인라인,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라이스...) 다른 수많은 장르에도 적용할 수 있을듯 합니다.

페이트는 원래부터 좋아하는 규칙이었지만 세기의 혼에 와서는 정말 마음에 들게 바뀐 점이 몇가지 있는 게, 우선 인물 제작이 훨씬 간단해졌다는 점입니다. 면모에는 더이상 칸수가 없이 유무만 있으며 (즉 '아틀란티스의 후예 □□'가 아닌 '아틀란티스의 후예'), 가장 복잡한 부분이었던 기능 피라미드는 이제 '엄청나다'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에다가 기능을 채워넣기만 하면 됩니다.

인물 제작에서 또 좋아진 부분은 주인공들이 전에도 서로 함께 일한 적이 있고 서로 알도록 짜여져 있다는 것. 어차피 모든 주인공은 '세기 클럽'의 구성원이므로 시작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이 논리적이기도 하지만, 인물 제작 과정을 통해서 각 주인공은 두명의 다른 주인공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 총 5기의 인물제작 중 3기에 각 참가자는 자기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펄프 소설의 제목과 대략의 내용을 정합니다. (예를 들어 '정글맨과 리키-티키의 눈'에서 정글맨은 고대 유적에 묻힌 전설의 유물 리키-티키의 눈을 찾는 밀렵꾼들을 물리친다! 라든지요.) 그리고 4기와 5기에는 다른 주인공의 펄프 소설에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글맨은 4기에는 '마타 하리와 아틀란티스의 전설'에 출연하고, 5기에는 '닥터 D와 분노의 고릴라'에 출연할 수 있겠죠.)

각 기마다 그 기의 경험에 어울리는 면모를 두개씩 추가하기 때문에 주인공끼리의 공통된 경험이라든지 인간관계를 면모로 만들어 규칙 자체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4·5기를 거치면서 정글맨에게는 '정글맨은 마타 하리 좋아한다'라거나 '닥터 D는 백인치고 똑똑하다' 면모가 추가될 수도 있는 것이죠. 또한 기존의 모험에서 새로운 모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편합니다.

판정 부분은 아직 다 보지는 못했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은 장면이라든지 주변 인물, 혹은 다른 주인공의 면모를 주인공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면에 '어둡다' '까마득한 절벽' '화재'와 같은 면모가 있다면 페이트 점수를 들여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술성과 극적 재미를 둘다 확보한 규칙이라고 보입니다.

그 외에 페이트 1.0 규칙을 보면서 불확실했던 부분들을 명확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저는 1.0 규칙만 봐서는 주인공의 면모에 의해서 불이익이 생기지만 주인공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일 때 어떻게 할지 잘 알 수가 없었거든요. 예를 들어 '예쁜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 면모가 있는 주인공이 수상한 미녀에게 넘어가는 것은 참가자가 페이트 점수를 내서 자제시킬 수 있지만, '검은 불꽃 형제단의 원수' 면모가 있다고 해서 검은 불꽃 형제단의 출연을 페이트 점수로 막는 것은 이상하니까요.

이 경우 3.0 규칙의 지침은 단순명쾌합니다. 검은 불꽃의 형제단이 등장하는 세션 전에 그 면모가 있는 참가자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페이트 점수를 미리 1점 주라는 것이죠. 또 배경 세계와의 연관, 특히 문제의 소지가 있는 연관을 포상하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명확화는 페이트의 기존 팬들에게도 유용하고, 전체 규칙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펄프는 단일 장르라기보다도 하나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에 세기의 혼으로 실제 펄프 캠페인을 돌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내에서의 친숙도 문제도 있고... 어쨌든 명확하고 잘 다듬어진 규칙 때문에라도 세기의 혼은 구입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읽으면서 한장 한장 음미할 시간이 기대되는군요. ^^
2006/09/28 11:08 2006/09/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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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owan 2006/10/01 1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펄프는 마음가짐 이라는 말이 맘에 드는 군요.
    (한국의 펄프라면 잡타지 로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미국의 펄프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게 있어서 미국 펄프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이성과 공포가 교차하는 배경시대입니다.)
    등장 작품과 활약의 부분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 로키 2006/10/01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글맨은 재밌는 친구인 겁니..(퍽)

      확실히 펄프의 기반에는 이성과 공포의 교차가 있죠. 한편으로는 이성의 힘과 과학에 대한 낙관적인 신뢰, 다른 면에서는 인간 본성의 어둠과 미지의 영역에 대한 신비와 공포가 자리잡고 있는 이율배반적 마음가짐이 펄프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유명한 펄프 영화인 인디아나 존스에서 볼 수 있듯 이성적인 고고학자인 존스가 악령과 야만인, 나치가 득시글거리는 이국적이고 신비한 세계로 가서 위험 끝에 승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펄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죠. 그 외에도 또다른 펄프 영화인 미라 1, 2편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러한 이성과 공포의 대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포 쪽에 무게가 주어진 게 호러, 특히 러브크래프트식 호러 장르고 이성의 승리가 SF인듯 합니다. 르귄 같은 경우 그 구분 자체를 부정해서 SF를 펄프에서 해방시켰고요.

      이러한 이성의 승리라는 게 그런데 꽤 차별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해서 눈썹이 찌푸려지기도 하죠. 펄프에서 백인이 아닌 인물들은 '고귀한 야만인' 아니면 '괴물'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러브크래프트나 에드거 버로우 라이스의 작품만 봐도 말이죠.) 결국 이성 = 익숙한 것, 공포 = 이해할 수 없는 타자였달까요. 어차피 당대의 편견은 펄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거고, 그저 그때는 그런 게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요. 어쨌든 펄프가 꽤 재밌는 장르, 혹은 마음가짐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펄프가 있을 수가 없었던 게, 펄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거 시대에 대한 그리움,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국적이고 신비한 장소에서 겪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뭐... 펄프의 주 메뉴인 3~40년대에 대한 그리움은 가질 수도 없고, 5~60년대, 7~80년대도..(...) 워낙에 고통스러운 근대사 때문에 과거를 그립게 회상하기보다는 더 좋은 내일을 바랄 수밖에 없으니까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도 불의와 모순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가지기 어려웠고요.

      이국적이고 신비한 나라? 그게 곧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우월감 어린 그리움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야만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식민지' 국가, 펄프의 영원한 구경거리이자 타자인 것은 바로 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결국 한국의 '펄프'는 언제나 펄프가 아닌 비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를 그리워할만큼의 천진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치가 아니었으니까요.

      (답변이 길었습..헥헥.)

    • ddowan 2006/10/03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펄프픽션이 나올 당시에는 흔한 통속적인 저급 소설(+잡지)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잡타지나 일본의 라이트 노벨 등이 펄프에 해당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공통점을 가진 장르화 될지는 의문입니다.)
      장르적 의미와 세속적 의미를 섞어서 써버렸군요.

      확실히 지금시대에 보는 펄프는 ('신비(와 무지)'에 대한) 낭만적인 그리움이지만, 나올 당시의 펄프에는 신비는 있어도 그리움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그 당시의 미국도 문제는 많았을 것 같고, 그 당시에는 펄프라는 장르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의 제가 봐도 그 당시의 한국이 '신비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2. 로키 2006/10/05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 어떤 의미에서는 판타지도 통속적이라는 면에서는 펄프와 가깝죠. 미국에서 처음에는 펄프에서 갈라져 나오기도 했고요.

    펄프가 나왔을 때가 5~70년대로 알고 있는데, 이들 펄프의 배경은 3~40년대가 많았죠. 그래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펄프의 요소로 꼽은 것입니다.

    한국에는 펄프가 있을수 없었다고 게거품(..)을 물긴 했지만 한국 배경의 펄프 RPG를 해보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배경으로 말이죠.(..) 시대가 시대인만큼 느와르적 요소가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 ddowan 2006/10/07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RNarsis님과 oWOD식으로 독립군과 일본 헌병과 만주 마적과 문학인등 을 가지고 농담 따먹기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군요.

  3. 로키 2006/10/09 1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폴라리스로 돌려서 필연적으로

    1. 죽거나
    2. 일본에 넘어가는

    독립투사들 얘기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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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물고기님과 얘기하다가 처음 알게 된 Mythic Roleplaying은 진행자 없이도 진행할 수 있는 특이한 규칙입니다. 또한 진행자가 있더라도 아무 준비 없이 시작 장면만 설정하고 진행할 수도 있으며, 혼자 모험하는데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규칙 자체가 판정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의 세부사항까지 생성하니까요. 예를 들어 '뭔가 소리가 들리나요?' 라든지 '오크가 있나요?' 같은 사항입니다.

미씩의 이러한 모험 생성 규칙의 중심에는 운명 챠트 (Fate Chart)가 있습니다. 의외로 간단한 발상인데, 먼저 '예' 아니면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정합니다. 다음, 그 답이 '예'일 확률과 (능동 등급) '아니오'일 확률 을 (저항 등급) 정해서 표에서 찾습니다. 다음, 두 가지가 만나는 칸에 나오는 확률에 비교해서 1d100을 굴립니다. 결과가 그 확률 이하로 나오면 대답은 '예'이고, 그 확률보다 높게 나오면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예를 들면 두 명의 전사가 싸우는데 한 명이 칼로 내리치는 동안 상대는 방패로 막으려고 합니다. 전사는 적을 칠 수 있을까요? 칼을 쓰는 전사의 칼 실력은 높으며, 방패로 막는 전사의 방패 실력은 평균 이상입니다. 능동 등급 '높음'과 저항 등급 '평균 이상'이 만나는 확률은 55%입니다. 따라서, 1d100을 굴려서 55 이하가 나오면 칼을 쓰는 전사는 방패를 쓰는 전사를 칼로 명중시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모험자들이 걸어가고 있는데 혹시 비가 오는지 궁금합니다. 보통은 진행자가 대답하면 그만이지만, 진행자가 없다 하더라도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곳은 건조한 지방이므로 비가 올 확률 (능동 등급)은 낮다고 참가자들이 정합니다. 주변 환경에 대한 내용을 정할 때의 저항 등급은 평균입니다. 낮음과 평균이 만나는 25%이므로 1d100에서 25 이하가 나오면 비가 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기본 규칙의 기반 위에 대성공, 대실패, 혼돈 점수, 우연한 사건, 행운 점수 등 추가 규칙이 작용하면서 미씩은 모험 생성 규칙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진행자가 필요없는 규칙, 내지는 GM 에뮬레이터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씩은 또한 다른 규칙과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판정은 원래 규칙으로 하고, 주변 환경의 사항이라든지 사건 생성 등은 미씩 규칙으로 하는 방식도 책에서는 권하고 있지요.

전반적으로 미씩은 진행자가 없거나 진행자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참가자들의 논리에 의존하는만큼 악용의 여지도 많은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죠. 참가자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원활하게 협력할 수 있다면 미씩은 GM 에뮬레이터로서 그 기능을 십분 발휘할 것이라고 봅니다.

2007/11/9: 다이스&챗 쪽에서 김도완님의 소개로 세션에 예전에 올라온 미씩 (혹은 미딕) 예시를 발견했습니다! 이 규칙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6/09/07 22:42 2006/09/0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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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fos 2006/09/08 1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을 가다 만난 상대의 실력이 나보다 등급이 높을지 낮을지도 페이트 차트로 구하는건가요? 그리고 이 지역이 건조한 지역인지를 정하는건 플레이어들?
    여러 사항을 참가자들끼리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면 TR이면 몰라도 OR에선 굉장히 불편할거 같다는 느낌입니다.

  2. 아사히라 2006/09/08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찮고 흐름이 끊길 것 같네요.

  3. Xenosia 2006/09/09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키님께서 언급하신 원활한 협력하에서의 진행이 아니라도
    진행자에게 이모저모 활용가능한 부분이 많다는 점과
    진행자없이도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것 같습니다.
    참가자들의 합의도출 과정에서 지연이 생기는 문제점은
    플레이어들의 숙련도로 어느정도 무마시킬 수 있어보이고,
    초보유저들이라서 그게 곤란한 경우는 진행자가 없이
    초보들만 진행하는쪽은 당연히 문제가 발생하는게 정상적이니..
    진행자가 없이 진행하면 위의 문제점들이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거의 모든 룰들이 진행자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걸 볼 때
    저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눈여겨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데이터를 얻는 과정이 조금 다르지만
    서버의 AI 퍼지로직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느낍니다.

  4. 삭풍 2006/09/09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스터 없이 진행할수있다는점에서 좀 흥미가 가는데 별로 플레이하고싶지는 않은룰이군요.플레이어들의 기본적인 숙련도가 갖춰줘야할텐데.OR에서 그런걸 기대하기는 참 힘들죠.

  5. 로키 2006/09/09 0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efos// 예, 그렇게 합니다. 보통은 질문의 연속으로 하겠죠. '나보다 세 보여요?' '그럼 엄청난 녀석?' 등등.

    이곳이 건조한 지역인지 하는 것은 지금까지 플레이중 있었던 일이 기반이 됩니다. 지금까지 비온 적이 없었다거나, 얼마 전에 지나온 마을은 가뭄이었다거나... 그런 것들이 판단의 기반이죠. 뭐 그런 게 없으면 적당히 정하거나 평균으로 할 것입니다.

    특히 OR에서 많이 느릴 것 같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판단은 그렇게까지 길게 끄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배경 세계에 대해서 조금 수근수근거리는데 가깝달까... 합의가 안되면 참가자 제안의 평균치로 가고 결정을 지연하지 말라고 규칙책은 조언하고 있습니다.

    아군// ^^;;

    Xenosia// 미씩 같은 경우, 한번쯤 해보면 계속 사용하지는 않아도 다들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 것 같은 규칙이랄까요. 발상부터가 참신하고, 참가자 합의와 판단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요. 퍼지 로직이라...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고야말로 극도의 퍼지 로직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삭풍// 여러가지 규칙을 읽어보면 사용은 안해도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게 되니까요. 기발한 규칙이긴 하지만 사용하기는 역시 녹록치 않은 면이...

  6. 아사히라 2006/09/09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간단한 의견엔 별 할말이 없으셨던 거군요
    다음부턴 길게 써야지 [.......]

    시간이 없었어서 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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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빈센트 베이커가 만든 포도원의 개들(Dogs in the Vineyard)의 기본 배경은 초기 모르몬 교의 역사에 일부 기반한 가상의 미국 서부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배경에 쉽게 차용할 수 있는 것이, 이 규칙책의 기본 내용은 모르몬교나 서부극에 대한 것이 아닌 죄악과 도덕적 판단, 그리고 죄인과 그 심판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최대의 묘미는 '참가자의 선택이 곧 법이며 진리'라는 데에 있습니다. 분명히 지켜야 할 신념은 있지만, 그것을 실제 어떻게 적용하는 길이 가장 잘 지키는 길인지는 불확실하기 쉽습니다. 두 여성이 부부로 함께 살고 있다면 이는 신의 뜻을 어긴 죄일까요, 아니면 축복받을 사랑일까요? 진행자는 절대 어느 쪽이 옳은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RPG가 가진 게임성의 근본이 되는 '선택'이라는 요소를 극도로 살린다는 점에서 이 게임에 대한 호평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녹록치 않은 주제를 다루는 포도원의 개들은 판정 규칙부터 매우 독특해서, 포커식으로 레이즈(Raise)와 시(See)의 연속으로 상대가 거는 주사위의 합계만큼 자신의 주사위를 소모하는 체계로 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거는 주사위를 두 개의 주사위로 막지 못하고 세 개 이상으로 막을 경우 부상을 입고, 상대의 주사위 합계를 더이상 맞출 수 없게 되면 집니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고 했던가요. 주인공은 부상을 입어야 성장 또한 할 수 있다는 점도 이 규칙의 특징입니다. 이 게임에서는 별 깊이없는 인물은 판정 성공률도 높고 부상도 적지만 대신 성장 또한 늦어집니다. 반면 상처가 많고 복잡한 인물은 부서지고 깨지는만큼 더욱 빨리 성장하고, 깊이 또한 깊어진다는 점에 이 규칙의 묘미가 있습니다. 흉터 하나하나에 사연이 있는 인물, 낡은 총과 그을린 외투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그런 인물이 되어가는 것이 '포도원의 개들'에서의 성장입니다. (물론 그만큼 강해지는 것도 틀림없고요.)

사실 강한 인물과 약한 인물에 큰 차이를 둘 것도 없는 것이, 제작 규칙상 주인공은 주변 인물들에게 무조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공의 댓가입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스스로 견딜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요. '상승'이라는 규칙 때문에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새로운 대립 수단을 끌어들임으로써 주사위를 더 얻습니다. 말로 안되면 주먹을 쓰고, 주먹으로도 안되면 총을 뽑는 식으로 점점 갈등의 수위를 높여가게 됩니다. 문제는 정말 그러면서까지 이기고 싶은지 하는 것. 어떤 갈등이든 그 극단까지 끌고 가면 분명히 이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심판,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주인공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늘려갑니다.

이러한 심판과 선택이 이루어지는 극적 공간은 주인공들이 돌아다니는 마을들로, 마을 제작 규칙도 이 책의 별미입니다.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깽판칠 수 있는 극적 상황과 인물들을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오만에서 죄악, 거짓 신앙 등으로 이어지는 죄의 진행은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종교색을 띨 필요도 없습니다. 배경에 따라 주인공들은 제다이, 성기사, 경찰, 범죄조직원 등 어떤 신분도 될 수 있고, 그들이 지키는 신념도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지키려는 신념이 있고 집행할 권위가 있는 한 어떤 배경이든 가능한 것이 포도원의 개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진행자에 대한 조언도 상당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또다른 장점. 제가 본 진행자 조언 중 가히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참가자의 선택을 완전히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시나리오를 절대 짜지 말라는 것도 많은 진행자에게 참 반가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주인공으로 인해 달라질 수 있는 극적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부터는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반응만 하라는 조언은 이후의 제 RPG 진행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지금까지 한 두어번 돌려보기는 했지만 거의 판정 규칙만 따왔을 뿐, 근본적으로는 그 특징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이 규칙을 제대로 활용해서 장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싶군요   . 죄와 심판이라는 무겁고도 흥미로운 주제, 그리고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짧고 격렬한 서사시를...
2006/09/06 02:33 2006/09/06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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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포도원의 개들 감상(Dogs in the Vineyard)

    Tracked from The Adamantine Watchtower of... 2007/01/16 21:35  삭제

    &nbsp;포도원의 개들(Dogs in the Vineyard)&nbsp;&nbsp;2004 by D. Vincent Baker &nbsp;&nbsp;&lt;포도원의 개&gt;들은 근대 미국, 탄압과 박해를 피해 서부 유타 사막에 정착한 모르몬교&nbsp;신앙 공동체를&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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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owan 2006/09/07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공의 댓가라.
    댓가를 치루면 이길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만 할 거 같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치룰 수 있을까요...

    • 로키 2006/09/07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사람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너무 강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오히려 그 강함은 참가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수단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일반적인 하이파워 게임과는 다른 게, 주인공들은 밑도 끝도 없이 센 것은 아니니까요. 갈등 수단을 많이 끌어들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이 판정 규칙의 극적인 면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면서까지 이길 각오가 되어 있는지, 친구의 얼굴에 총을 들이댈만큼 중대한 일인지는 참가자의 판단입니다.

  2. 아사히라 2006/09/09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예시가 왠지 멋진데요.
    즉,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면서까지 이길 각오가 되어 있는지, 친구의 얼굴에 총을 들이댈만큼 중대한 일인지는 참가자의 판단입니다.

    이거 말이죠.

  3. Wishsong 2007/01/16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도원의 개들> 감상, 트랙백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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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이 틈을 내서 범용 RPG 규칙인 JAGS 배경 책 원더랜드를 읽었습니다. 2권인 진행자용 책은 현재 읽는 중. 공짜 RPG 책이 이렇게 질이 높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의 품질과 분량을 자랑하는군요. 풍부한 일러스트와 알찬 내용, 읽기 좋은 레이아웃... 아마추어 RPG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엷은 RPG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목대로 원더랜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어느정도 기반삼고 있지만 원작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장르는 현대 심리 공포물로서, 감염성 정신질환인 CPD에 의한 초현실적 환각과 이상행동으로 점점 생활이 붕괴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환각이라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은 것이 CPD이기도 하죠. 어째서 여러 사람이서 동시에 '에피소드' (CPD 환각증세)를 겪으면서 모두 같은 경험을 기억하는지, 어째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겪는 에피소드 사이에 공통되는 장소나 인물이 등장하는지, 어째서 에피소드가 환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공통된 점이 있다면 원더랜드 역시 부조리하고 악의어린 유머를 추구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무실 천장에 붙은 책상, 멀쩡히 돌아가는 반쪽짜리 TV, 색색의 갈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공룡,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 등, 원더랜드는 엉뚱하고 비정상인 상상이 광기어린 공포와 결코 멀지 않은 공간입니다.

이렇듯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삶이 어긋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은 반드시 무력한 피해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책에서는 모험과 공포의 균형, 즉 주인공에게 원더랜드의 공포와 싸울 힘이 얼마나 주어지는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말하자면 '크툴루의 부름'과 '버피' 중 어느 쪽에 가까운 캠페인을 할지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원더랜드의 악의에 비참하게 잠식당하는 모습인가, 아니면 원더랜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심지어는 원더랜드를 통해 강해지는 모습인가. 이런 고려사항을 자세히 다룬 RPG 책이 별로 없어서 더욱 호감이 가는 부분이군요.

전체적인 인상은 진행이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배경이라는 느낌입니다. 늘 번역의 압박에 시달리는 (...) RPG인으로서도 좋은 게, 참가자들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 부분이야 배경이 현대이니 따로 독서가 필요없고, 원더랜드 쪽에서는 주인공들이 아무것도 모르다가 직접 발로 뛰면서 서서히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까요. 잘못 아는 것도 재미있습..(퍽)

본래 원더랜드는 JAGS를 사용하지만 규칙은 많이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다른 규칙으로 전환하는 것도 쉬워 보입니다. JAGS는 제가 다루기에는 조금 (많이) 복잡하지만 컨버젼 후에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식으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기와 해학과 공포의 장, 원더랜드에 빠져들기 위하여.
2006/08/22 21:27 2006/08/2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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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owan 2006/08/23 1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경은 해봤지만 역시 영어실력의 미숙함으로 금방 관심을 껐었습니다.
    확실히 레이아웃 등에 들어간 정성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2. 불타는도넛 2008/08/13 04: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가 깨졌네요.ㅡㅜ

    • 로키 2008/08/13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적 감사. PDF도 링크 깨져 나오고, 그냥 홈페이지로 링크를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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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s Laws of Good Game Mastering을 질렀습니다. 특히 시나리오를 어떻게 짜는지 전혀 감이 안오는 관계로... 펑 슈에이와 다잉 어스 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들을 만든 디자이너이기도 한 Robin D. Laws씨가 쓴 진행 조언서의 고전이라죠. 한 38쪽 정도의 짧은 책으로, 사람들이 권하는만큼 내용도 좋은지는 이제부터 볼일...

2006/04/16 20:30 2006/04/1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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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밀러의 트래블러(Traveller) 규칙으로 만들어본 인물입니다. 거의 전부 무작위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하달까요. 특성치, 출신지, 기능 등이 모두 무작위입니다. 제가 선택한 부분은 대학에 보낼지 말지, 장교 훈련을 받을지 말지, 그리고 군대에 얼마나 복무시킬지 뿐이었죠. 무작위로 산출된 능력에 맞추느라 스스로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설정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경력관리와 학업의 실제 어려움이 반영된다는 점, 나이가 많을수록 능력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나시하 누르-알-살람
30세

특성치 - 783A69 (2d6 굴려서 결정하므로 범위는 2~12. 7이 평균)
힘  : 7
민첩: 8
끈기: 3 -> 이 황당하게 낮은 수치 때문에 졸지에 건강과 의지력이 약한 인물이 돼버렸지요..;;
지능: 10 -> 원래 9였는데, 퇴역할 때 혜택 표에서 굴려서 지능 +1을 받았죠
교육: 6 -> 평균 미만으로 나온 또다른 특성치. 아파서 지능에 비해 학업은 별로였다고 얼버무렸죠.
지위: 9 -> 11부터가 귀족이라 이정도면 상당히 높은 지위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결국엔 몰락 갑부 정도로... 이 지위 덕분에 대학에도 쉽게 들어갔다죠.

고향 행성 (2d6 굴려서 부피, 대기, 기술수준 등을 결정)
우주항 A급
큰 행성
밀도높은 대기
습한 행성
인구 10억대
치안정도 3
기술수준 E

기능

기관총-1
교역-1
반중력 탈것-2
수사-1
승마-2
위장-1
음악-1
의료-2 -> 의료-1이면 의료기술자는 되고 의료-3이면 의사자격증 취득되는데, 상당히 어중간한 이 실력이란...
인식-1
장총-1
전술-3
지도력-2
지상 탈것-5 -> 순전 무작위로 따라가다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운전솜씨 덕에 속도광이 돼버렸죠..(...)
컴퓨터-2
포탄-1

기타
-소지금: Cr 25,000

설정

나시하 누르-알-살람은 알칸 제 4 행성 리리아 출신으로, 본래 돈이 꽤 많은 집이었는데 할아버지 대에서 전란에 휘말려 사업이 몰락했지요. 때문에 집은 별로 넉넉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 명사들과 많이 알고 지내는 집이었습니다. 살림 규모를 줄이고 분쟁지역에서 멀어지기 위해 가족이 이주한 리리아 행성은 공기밀도가 비교적 높은 행성이었는데, 나시하의 경우 이 점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그 때문에 덩달아 성격도 심약해졌고, 성적도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 보니 어려서부터 병원을 들락거렸고, 특히 주치의와 친해지면서 나시하는 자신도 커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죠. 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산타 마리아 대학에 입학했지만 불행히도 의대에 들어갈만한 성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의외로 2d6에서 7 이하 나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ㅁ;) 대학에서 어느정도 의료훈련은 받았지만 의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는 아니었고, 어려서부터의 꿈이 좌절된 나시하는 크게 실망했지요. 학교 밴드에 들어가 음악에서 위안을 찾으며 뭘 할까 고민하다 못해 별 생각없이 장교훈련을 신청했고, 졸업 후 제국 육군에 소위 임관을 받았습니다.

건강 때문에 가족들은 말렸었지만, 의외로 군대는 그녀의 체질에 잘 맞았습니다. 대학 때부터 한산한 고속도로에서 전력질주하는 것이 유일한 일탈이었던 나시하는 군대에서 아마추어 자동차 경기에 참가해 상당한 운전실력을 쌓았고, 또 전술과 운송에 대해 배우는 것도 즐거워했습니다. 결국 의무 4년 복무 기간을 지나 4년 더 복무해 대위까지 승진했고, 서른살이 된 지금 다른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군에서 제대했습니다. 2만 5천 크레딧의 퇴직금을 들고, 군대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과 문제해결능력이라는 자산을 무기로 새로운 미래를 마주하기 위해... 여전히 소심하고 여전히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래도 군대생활 8년을 무사히 해냈다는 사실은 나시하에게 자신감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규칙

기본판정에서는 (관련 특성치+기능)이 TN이 되며, 기능이 없고 0등급에서 사용가능할 기능일 경우 TN은 (관련 특성치/2)[올림]입니다. 난이도가 높은 판정일수록 많은 d6을 굴려 이 TN 이하로 굴려야 합니다.

쉬움 - 기능이 있으면 자동 성공, 없으면 0등급에서 사용가능한 기능일 경우 1.5d, 아니면 자동 실패
보통 - 2d
어려움 - 2.5d (2d6 + [1d6]/2[소수점 올림])
대단함 - 3d
엄청남 - 3.5d
불가능 - 4d

예: 나시하는 자동차를 미친듯 몰면서 점점 닫히는 게이트를 통과하려고 합니다. 민첩 + 운전은 13, 난이도는 어려우므로 2.5d. 2d6을 굴려서 6이 나오고, 다음 1d6을 굴리자 5가 나와서 반으로 나누면 2.5, 올림해서 3. 결과는 6+3=9로, TN인 13 이하로 나와서 성공.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여기까진 심하진 않는데...문제는 전투부터 팍팍 복잡해지는군요. 기본 판정을 응용해서 전투를 대폭 단순화하면 써먹을만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인디 규칙책은 보통 100쪽 이내인데 기존 규칙책은 2~300쪽은 거뜬하니, 확실히 꽤 많다는 생각이 드는..(...)

2006/03/14 15:09 2006/03/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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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펠군 2006/03/14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라벨라 SF 시스템으로 꽤나 끌리는 시스템입니다, 이건 그 과거에 박스판으로 나온 버전인가요? 뭔가 정보가 적어서 살까 말까 맹 고민을 하고 있는데...

  2. 로키 2006/03/15 1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96년에 마크 밀러가 만든 4판입니다. 박스판으로 나왔는지는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 무작위 인물제작 부분 말고는 특별히 끌리는 규칙이나 세계관이 아니지만, 그건 제 취향일 뿐이니...

  3. Wishsong 2006/03/18 2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트래블러는 캐릭터 메이킹 과정에 죽거나 죽기 직전의 캐릭터도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4. 로키 2006/03/19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화될 때까지 하다 보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캐릭터 만들어본 4판에서는 불의로 죽을 일은 없어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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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실제로 해보니 룰북 읽을 때보다도 색채있고 재밌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가지 룰의 허점이 보이지만 연구하면서 차차 고쳐갈 수 있는 문제... 창의력이 뛰어난 적극적인 플레이어들과 하면 아주 재밌는 플레이가 될듯 하군요. 일단 룰만 알면 꽤 속도감 있는 진행이 가능한, 재미있고 특이한 룰. 가끔 복잡한 거 다 잊어버리고 RPG의 원류, 신나는 던젼탐사를 즐기고 싶을 때면 사용하기 좋을 룰 같습니다. 신나는 모험 와중에서도 깊이있는 극적 설정을 즐길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고요.

2006/01/06 05:22 2006/01/06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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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큼이 2006/01/06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양 잡아갑니다 음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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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owwind.egloos.com/1211882

새해를 맞아 블로그를 다시 살려보렵니다. 게시판 글은 쓰는 편인데 왜 유독 블로그는 유지가 어려운 건지...

게시판이라는 것, 블로그라는 것...차이가 뭔가 싶지만 정말 차이가 있는 것도 같고, 하여튼 헷갈리는!

실은 다른 분들 하는 거 보고 샘나서 해보고 싶어졌다죠..(퍽퍽)

또다른 이유는 RPG 관련 북마크 저장용..(...)

어쨌든! 느닷없이 7번째 바다에 대한 관심이 팍팍 생겨버렸다죠. 연유는 바로 위에 링크한 글입니다. (아, 트랙백 어떻게 쓰는 거지..ㅡㅡ;;) 감동, 또 감동. ㅠㅠ

이전에도 허접하지만 7번째 바다 비평글도 썼었고 또 GM 가이드와 플레이어 가이드도 샀지만, 그저 르네상스 전후의 유럽을 모티프로 한 활극물...정도 이상은 별다른 생각이 없기도 했죠. 그런데 나무님의 저 글을 보고선 오, 저런 풍부한 감성과 드라마라니! 하고 혼자 감동먹어 버린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플레이가 얼마나 극적인가, 얼마나 감동적인가 하는 문제는 시스템 자체보다도 참가자들의 실력일진대, 7번째 바다 플레이에 감동먹었다는 이유만으로 7번째 바다 시스템과 배경에 관심이 팍팍 생겨버리는 건 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거 다 떠나서 7번째 바다의 세계에서, 테아에서 놀아보고픈 생각이 팍팍 듭니다.

이와 관련해서 어제오늘 사이에 완성한 거라면 7번째 바다 mIRC 다이스. 룰앤킵이랑 다이스 터뜨리는 거랑 안 터뜨리는 거랑은 일단 구현을 한... 이로써 일단 한가지 준비는 끝났다! 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럼 뭐합니까. (먼산)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룰적 지식과 배경세계 지식이 필요하거늘.

뭐 나중에 생각하고 내일 마스터링 준비를 해야겠군요. (투덜투덜)

2006/01/02 09:21 2006/01/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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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트 (FATE: Fantastic Adventures in Tabletop Entertainment)는 스테판 오설리반의 퍼지(FUDGE: Freeform Universal Do-It-Yourself Gaming Engine)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창적인 시스템을 많이 가미한 RPG입니다. 제가 마스터링을 맡고 있는 알데마르 캠페인에서 사용하고 있는 룰입니다. 시스템 자체는 간단하고, 극적 메타게임 시스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기본 구조는 일면과 기능 시스템으로, 간단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일면

페이트의 가장 특징적인 시스템입니다. 캐릭터를 4~10가지 키워드로 표현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이실두르의 후손 [][] (같은 일면을 두번 선택함)
사랑하는 아르웬 [][]
레인저 [] (한번만 선택한 일면)

하는 식으로 캐릭터에게 중요한 내용을 키워드로 달아주면 됩니다. 이렇게 정한 일면은 게임중 다양한 효과를 가지는데,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발동해서 긍정적인 효과(판정 보너스, 다시 굴리기)를 받을 수도 있고 GM이 강제로 발동해서 부정적인 효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페이트에는 대개의 RPG와 같은 특성치 시스템이 없습니다. 만약 캐릭터에게 특별히 중요하고 눈에 띄는 특성치가 있다면 일면으로 달아주면 되니까요. ('세기의 천재 []' '넘치는 건강미 [][]' 등등)

2. 기능

페이트 판정의 중심이 되는 것은 기능 시스템입니다. 룰북은 각 GM이 자기 캠페인에 맞는 기능 목록을 설정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죠.

3. 플레이

판정은 퍼지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기능 실력과 난이도는 둘다 '최악'에서 '신적'까지 10단계의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고, 4dF(4d3-8)을 굴려서 나온 결과만큼 기능 실력에서부터 올라가거나 내려갑니다. 그 결과가 난이도와 같거나 더 높으면 성공이고, 난이도보다 낮으면 실패이죠. 예를 들어 '좋음' 단계는 '대단함' 단계보다 1단계 낮습니다. 따라서 좋은 실력의 궁수가 대단한 난이도의 과녁을 맞추려면 +1 혹은 그 이상의 다이스가 나와야 합니다. 4dF는 -4부터 +4까지의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0을 중심으로 종형 곡선을 그리므로 캐릭터 실력전후의 결과가 나올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판정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위에서 말한 일면 시스템으로 결과를 바꿀 수 있습니다. 판정에 도움이 될만한 일면이 캐릭터에게 있을 경우 플레이어는 1 페이트 포인트를 들여 일면을 '발동'합니다. 이것을 자발적 발동이라고 하며, 효과는 주사위를 다시 굴리거나 아니면 이미 나온 결과에 +2 보너스를 더하는 것입니다. 관련 일면은 스토리상 말만 되면 뭐든지 가능합니다. 위에 나온 궁수의 경우, 예를 들어 판정의 목적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맞추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나의 가족 []'과 같은 일면을 사용할 수 있겠죠. 아니면 '뛰어난 사냥꾼 []' 일면을 발동해서 평생 갈고 닦은 실력이 이 순간에 발휘된다고 할 수도 있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렇다면 일면발동의 매개가 되는 페이트 포인트는 어떻게 증가될까요? 해답은 일면의 강제발동입니다. 이것은 GM이 캐릭터의 일면을 강제로 발동해서 부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플레이어는 일면 칸수만큼의 페이트 포인트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힘이 매우 세다 [][]' 일면을 가진 캐릭터가 귀중한 유물을 손에 잡았습니다. 그때 GM은 캐릭터의 손힘이 너무 세기 때문에 유물을 망가뜨렸다고 강제발동을 합니다. 플레이어는 이 강제발동을 받아들이고 2 페이트 포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2 페이트 포인트를 GM에게 주고 강제발동을 막을 수도 있죠. 이와 같이 일면은 플레이 요소요소에 입체적으로 개입됩니다.

4, 평가

제가 지난 2개월간 8회의 세션에 거쳐 사용해 온 페이트는 간단하면서도 굉장한 깊이를 가진 룰입니다. GM 입장에서는 판정시에 적당한 난이도만 설정하면 되는데, 형용사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나마도 별로 어려울 것이 없죠.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판정에 실패했을 경우 일면발동을 통해 결과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좋고요. 또한 일면발동 시스템이 캐릭터의 개성을 잘 살린다는 점도 룰의 강점입니다.

한편 룰을 사용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제 취향에 맞춰 많은 하우스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룰이 단순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그러한 개정룰이나 추가룰도 만들기 쉽더군요. 다음번에는 기회가 되면 세부 규칙과 제가 고친 부분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글루스 가든 - 한국 RPG 대중화의 그 날을 위해

2005/09/06 10:46 2005/09/0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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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Free horse sex movie.

    Tracked from Horse sex women. 2009/11/29 03:57  삭제

    Male and male horse sex. Horse sex. Horse sex pics. Horse sex sample video.

  2. Subject: Danger levaquin zithromax.

    Tracked from Zithromax. 2010/01/29 15:06  삭제

    Zithro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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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lfmeme.com/nicotinegirls.html

저소득층 10대 소녀들이 꿈을 찾으려 노력하는 니코틴 걸즈(Nicotine Girls)의 룰은 다음과 같다.

* 캐릭터 메이킹 - PC는 16세에서 19세 사이의 소녀들이다.

- 동기
PC의 동기로는 희망과 두려움 두가지가 있다. 6점을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 분배하라. 6점 모두를 희망이나 두려움 한가지에 넣을 수는 없다.

- 수단
PC가 동원가능한 4가지 수단은 섹스, 돈, 눈물, 담배이다. 이중 두가지는 2, 두가지는 1에서 시작한다.

- 꿈
PC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한문장으로 적도록.

* 판정

- 판정에는 d10을 사용한다.

- 어떤 행동에 성공하고 싶을 때 플레이어는 동기(희망 혹은 두려움), 그리고 수단(섹스, 돈, 눈물 중에서만)을 고른다.

- 선택한 동기만큼의 d10을 굴린다. 이중 선택한 수단과 같거나 더 적게 나온 주사위는 하나의 성공으로 친다.

- 대개의 행동에서는 성공이 하나라도 있으면 PC는 뜻을 이룬 것이다.

- 담배
다가올 갈등에서 성공률을 높이고 싶다면 플레이어는 언제든지 다른 PC나 NPC와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요청할 수 있다. 담배를 피우면서 충고를 받는데, 이 충고를 받아들이는 경우 그 판정에서 담배 점수만큼의 다이스를 다이스풀에 더할 수 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반대로 다이스풀에서 담배 점수만큼을 뺀다. 만약 담배 점수를 뺀 결과 다이스풀이 0이나 음수가 된다면 자동적으로 실패한다.

- 희망
판정의 동기로 희망을 사용할 경우, 만약 실패하면 그 세션 내에는 다시는 희망을 사용할 수 없다. 희망을 동기로 사용해서 성공했을 경우 두려움이 1 내려간다. 희망으로 판정해서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경우 PC의 희망은 1 올라간다.

- 싸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목적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행동은 무조건 두려움으로 굴리고, 1로 나온 주사위만 성공으로 친다. 같은 여자와 싸울 경우 한 개의 성공, 남자와 싸울 경우 두 개의 성공이 요구된다.

- 두려움
PC는 언제든지 자신의 삶 속에 다음 상황 중 하나가 벌어지게 해서 표시된 만큼 두려움 점수를 늘릴 수 있다.

남자친구나 남편의 죽음 10
이혼이나 별거 7
형을 살다 나옴 6
가족의 죽음 6
심각한 질병이나 부상 5
결혼 5
해고 5
남자친구나 남편과 화해 5
가족 중 하나의 건강의 변화 4
임신 4
성적 어려움 4
가족이 늘다 4
재산관계의 변화 4
가까운 친구의 죽음 4
직장이 바뀜 4
1000만원 이상의 돈을 꿈 3
직장내 위치가 바뀜 3
시댁과의 갈등 3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냄 3
남자친구나 남편이 직장을 시작하거나 관둠 3
학교 입학이나 졸업 3
주거 변화 3
직장 상사와의 갈등 2
직장 환경의 변화(시간 등) 2
이사 2
전학 2
유흥활동의 변화 2
교회 활동의 변화 2
사교활동의 변화 2
1000만원 미만의 돈을 꿈 2
가족 모임 1
식사생활의 변화 1
휴가 1
경미한 범법행위 1

* 결말

캠페인의 끝에서 플레이어는 희망 점수만큼 d10을 굴려서 1로 나온 다이스만을 성공으로 친다. 성공이 두개 이상 있으면 캐릭터는 꿈을 이룬 것이다. 결말은 플레이어가 직접 서술한다.


이와 같이 니코틴 걸즈는 매우 간단한 룰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룰 자체가 하나의 코멘터리로 느껴지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으로 두려움은 희망보다 훨씬 쉽게 늘지만 최종으로 꿈을 이루는 것은 희망에 달렸다는 역설이 그렇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면서 희망은 쉽게 부서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고, 점점 처음에 생각했던 꿈은 현실에서 멀어져 후회로 남는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또하나, 이 게임의 PC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 가정의 10대 소녀라면 벌써 돈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게다가 여자라는 점에서 남성중심적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불리할대로 불리한 출발점인 것이다. 따라서 게임에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성적 매력, 눈물--은 모두 약자의 무기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들이지만 남자들의 성욕이나 타인의 동정심에 기댈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돈' 수단은 돈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돈을 삥땅치거나, 훔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팔거나 해서 없는 돈을 만드는 능력을 말한다.)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니코틴 걸즈는 유쾌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이리 부대끼고 저리 부대끼는 삶 속에서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으며,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어렵다는 현실의 한 일면을 게임으로 표현한 RPG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불리한 조건에서 자기 꿈을 성취한 소녀는 얼마든지 있으며, 앞으로 더욱 많아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소녀들, 그들 니코틴 걸을 위해, 크게든 작게든 현실에 져버린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니코틴 걸에 대한 진혼처럼 나는 '니코틴 걸즈'를 플레이해보고 싶다.

2005/08/04 20:19 2005/08/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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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틴 걸즈(Nicotine Girls, 2002 © Paul Czege)는 걸작 인디게임 '주인님과 함께(My Life with Master)'의 디자이너가 만든 무료 공개룰인데, 여러모로 '주인님과 함께'의 전신이라고 생각되는 게임이다. 몇가지 공통점을 들자면

1. 다이스풀의 사용

메카닉 면에서는 다이스풀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다만 다이스풀은 수많은 RPG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고, '주인님'과 '니코틴'은 사뭇 다이스 사용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있는 비교는 아니다.

2. 극도로 협소한 장르룰

둘다 매우 좁은 배경과 아주 적은 수의 행동만이 가능한 협소 장르 룰이다. '주인님과 함께'는 고딕 호러를 모티프로 하고 있으며, 사악한 주인에게 매인 하인들이 인간성을 되찾고 주인님을 살해하는 내용만을 지원하고 있다. '니코틴 걸스' 같은 경우 도심에 사는 저소득층 소녀들이 자신의 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조금 있다 설명하겠지만 대개 실패한다.)

또한 '주인님과 함께'에서 가능한 행동이 주인님의 명령에 저항하거나, 수행하거나, 마을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주인님을 죽이는 4가지에 한정되어 있듯이 '니코틴 걸즈'에서는 섹스, 돈, 눈물, 담배 피우기 4가지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극도로 협소한 장르 를은 실제로 GM과 플레이어 모두에게 제한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한된 범위의 행동과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는 생각 이상으로 강렬하며, 무한한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은 쉬워진다. '주인님'이나 '니코틴 걸즈'를 플레이하면서 막막한 느낌이 든다면 그건 PC를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또 하나, 이러한 장르 룰은 그 장르의 분위기를 모르면 플레이가 어려워진다. 실제로 '주인님' 캠페인을 돌리면서 깨달은 점이었는데, 고딕 호러 장르가 국내에 친숙하기 않기 때문에 생긴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니코틴 걸즈'도 마찬가지여서, 이 게임에서 저소득층 소녀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플레이가 완전히 엇나갈 가능성이 높다.

3. 정신적 스탯의 사용

'주인님'과 '니코틴'은 둘다 일반 RPG에서 쓰는 힘, 지능, 지혜, 민첩성, 건강 등등의 특성치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주인님'의 PC들에게는 자기혐오와 무력감, 그리고 사랑이 있고, '니코틴 걸즈'의 소녀들에게는 희망과 두려움 두가지 스탯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극도로 제한된 장르에만 유용한 스탯이다. 또 한편으로 이런 정신적 스탯은 시스템과 플레이의 관계를 매우 긴밀하게 해준다. '이번에 강아지에게 먹이를 줘서 사랑을 올리면 주인님을 죽일 수 있어!'라든가 '이번 판정에 희망을 쓰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일단 두려움으로 하고 희망은 다음 기회에 늘리자.'와 같은 판단은 시스템에 대한 판단이면서 동시에 극적인 결정이기도 하다.

4. 장면전환식 플레이

둘다 전통적인 파티플레이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각 플레이어가 돌아가면서 한 장면씩을 플레이하는 형태이다. '주인님'의 경우 다이스 더해주기, '니코틴'의 경우 담배를 통해서 각 플레이어가 서로의 판정에 영향을 줄 방법을 마련하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형태의 플레이는 플레이어가 많을수록 자칫하면 플레이어의 몰입도 저해와 지루함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5. 시작과 끝이 있는 캠페인

마지막으로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둘다 시스템 자체적으로 캠페인의 결말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캠페인은 끝이 나고 결말을 서술하도록 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RPG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2005/08/04 14:32 2005/08/0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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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아르스 마기카 (Ars Magica) 4판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참고로 4판은 무료입니다. 회원 전용 자료실에도 올라온 걸 봤고, rpgnow.com에서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엔 5판도 나왔더군요. 그건 무료가 아니지만요.) 라이언 램팬트가 처음 출판해 화이트 울프,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 그리고 현재는 아틀라스 게임스로 넘겨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시스템은 처음 나온 80년대부터 정교한 디자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D&D 3.5의 조나단 트위트가 디자인한 시스템이기도 하지요.)

뭐 시스템 메카닉을 나열하자면 한도끝도 없으니까 제가 맘에 드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사회성을 전제로 한 시스템

1 플레이어에 1 캐릭터가 원칙인 대개의 게임과 달리 아르스 마기카(이하 AM)에서는 1 플레이어가 적어도 3인의 캐릭터를 갖습니다. 즉 마법사 1인, 전문가 1인, 일꾼 1인이지요.

각 캐릭터 종류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AM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무대는 요정과 드래곤과 악마와 천사와 마법사가 모두 현실인 13세기 유럽으로서, 중심이 되는 곳은 헤르메스 계열에 속한 마법사들의 공동체입니다. (헤르메스 계열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들도 존재하지만 이야기의 주축은 헤르메스계 마법사들입니다.) 시스템의 가장 주요 인물은 물론 마법사들로서 이들은 마법연구와 개발에 일생을 바치며, 한편으로는 마법사 사이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자기 입지를 넓히고 더욱 많은 이익(돈, 실험재료, 영향력 등)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실험실에 틀어박혀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다가 마법적 재능을 가진 이들 마법사는 일반 사회로 들어가면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마법의 기운을 느낀 동물들이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고, 마법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그 기운을 느끼고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죠. 따라서 일반사람과의 반응굴림에서 자동적으로 -3의 페널티를 얻습니다.

이런 마법사들을 구제(?)해 주는 존재가 전문가로서, 직업은 기사, 바드, 도둑, 학자, 한량귀족(...) 등 다양하지만 마법사와 일반 사회 사이에 가교가 되어준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들은 마법능력은 없지만 다양한 경로로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음양으로 마법사들을 도와주면서 자신도 보수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법사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서는 하인, 경비, 요리사 등등이 필요한데, 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일꾼입니다. 엘리트는 아니지만 이들도 자기가 하는 일에서 나름대로 전문인이며, 궁수, 검사, 요리사 등 모험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이들은 고용주인 마법사들이 모험을 떠날 때 함께 따라가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 캐릭터들은 사회에서의 위치와 서로와의 관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고, 마법사들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해서 부대끼고 살아갑니다. 마법사가 연구하고, 전문가가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어슬렁거리고, 일꾼이 고되게 일하는 곳. 고립된 던전에서 몬스터 잡는 세계를 메카닉의 기본으로 상정한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이서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기본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아르스 마기카는 던전탐험을 기반으로 한 D&D와는 반대의 시점에서 출발합니다.


2. 마법, 마법, 마법

몬스터 잡아서 레벨이 오르면 마법이 더 생긴다? 아닙니다. AM의 마법사들이 새로운 마법을 얻는 방법은 오직 연구와 공부입니다. 잡일만 죽어라 시키고 가르쳐주는 건 더럽게 없는...아니지, 자상하시며 훌륭하시며 사려깊고 학식 높으신 스승께 배워서 정식 마법사가 된 후에는 자신이 스스로 마법을 발명할 수도 있고, 다른 마법사의 연구노트를 보고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가 암호라도 걸어놓았으면 그거 푸느라 또 몇 달 끙끙. 자기 연구의 성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적었을지도 모르므로 자칫하면 아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부적이나 마법지팡이가 필요하면 어떻게 할까요? 드래곤 레어를 습격해서 슥삭? 뭐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아크메이지 정도 되어서 드래곤을 건드리면 매우 위험, 보통 메이지가 드래곤을 건드리는 건 그냥 자살입니다. 어쨌거나 스스로 마법을 걸지 않은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마법효과를 알아내는데 또 시간을 바쳐야 하고, 고약한 원주인이 보호 마법이라도 걸었으면 꼼짝없이 걸릴 수도 있죠. 아주 별볼일 있는 물건 같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안정적인 방법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법을 걸려는 물체의 재질과 크기, 형태를 가지고 보너스와 페널티와 다양한 작용효과를 확인하고, 실험재료와 시간을 투자해서 원하는 마법을 겁니다. 하늘을 나는 벨트, 치유의 마법지팡이, 불이 나오는 장갑.... 뭐든지 좋습니다. 다만 마법 이론과 해당 마법의 레벨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니 충분해도 운나쁘게 주사위 잘못 나오면 시간과 마법재료를 날릴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이렇게 맨날 연구만 하면 한평생도 모자라겠다고요? 걱정 없습니다. 수명연장 시약을 만들면 되니까요. (말이 시약이지 문신 같은 것도 괜찮은.) 시약을 만들어 마시면(혹은 새기거나 등등) 100살은 거뜬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수명연장 시약은 시약을 마신 그 나이에 마신 사람의 생명력을 붙들어두므로 일단 시약을 마시고 나면 생명력을 정상적으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일단 마시면 영구 불임이 된다는 소리죠. 어차피 마법사야 연구에 온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마법사의 실험실에 몰래 들어가 생명연장 시약을 마시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유서 쓰고 공증인 세우고 가야 할 겁니다. 실험실은 마법사의 성역이므로 같은 마법사도 남의 실험실에 들어가면 헤르메스 마법사의 법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가 없고, 각 시약의 공식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 만든 걸 마셨다간 뒷일은 책임 못 지거든요.

연구실에서 늘 시간을 보내기가 쓸쓸하십니까? 마법사야 태생적으로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만큼 고독감을 느끼진 않겠지만, 때로는 외로울 수도 있죠. 다른 마법사들이래봤자 전부 당신의 실험성과나 영향력을 뺏으려는 못믿을 족속 뿐이니. 이럴 때는 패밀리어를 만들어 보세요! 마법적 능력을 조금 가진 짐승이 마법사를 자기 의지로 완전히 받아들일 경우 실험실로 데려와 1년에 걸친 패밀리어 과정을 밟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마법사와 동물 모두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그만큼 둘의 마법력과 마음과 몸이 연결된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단 패밀리어를 만들면 마법사에게는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로움도 달래주고 심지어는 마법연구의 성공률도 높여주는 충직한 동료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까마귀를 패밀리어로 둔 마법사가 가끔 깃털손질하는 까마귀처럼 어깨로 얼굴을 닦는 버릇이 생겨도 놀라지 마시길.

아르스 마기카의 세계에는 심지어 다른 마법사와의 무혈 결투를 위한 룰도 따로 있습니다. 이른바 케어타멘인데, 마법사의 가문(헤르메스 마법계열에는 각자 다른 능력과 역할을 가진 열두 가문이 있지요)에 따라서는 스승과 결투해서 이겨야 정식 마법사가 될 수 있는 무서운 곳도 있죠. 하지만 결투는 반드시 두 마법사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니 싫은 결투를 억지로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체면이 깎이는 건 감수해야겠죠.

3. 모험은 왠 얼어죽을 모험? 난 연구해야 돼!

AM에서는 다른 게임들처럼 모든 캐릭터가 사이좋게 모험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행을 떠나는 게 해로울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중인데 열흘 넘게 실험실을 비우면 실험 성공률은 점점 떨어지죠. 바꿔 말하면 모든 플레이어가 모든 세션에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한 명이 없으면 그 캐릭터의 마법사가 한 계절 동안 연구하는 걸로 하고 미리 연구성과 다이스를 굴리게 하면 되니까요. 나머지 캐릭터들은 요정의 숲으로 고고.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모험은 (실생활에서도 그렇듯이) 꽤나 위험한 일입니다. 절벽에서 한번 잘못 떨어졌다간 꼬박 28일을 침대에 누워 지낼 수도 있죠. 치유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80일을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험이나 전투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아, 전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평생 실험실에나 박혀 지내는 마법사는 순 골샌님일 것 같다고요? 그런 말씀은 마법의 화마가 적진을 초토화시킨 다음에나 하시길. 아르스 마기카의 마법사 역시 전투에서 휘황한 능력을 보입니다. 다만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실험실에서의 많은 시간과 자신을 삶을 바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성취는 더욱 값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 보고 무서워하거나 신기해하는 그 마법은 인간적인 삶을 희생하고 그 자리에 수많은 마법노트와 실험물을 남긴 그들, 자손도 없고 친구도 없지만 늦은 밤까지 실험실에 불을 밝히며 탐구욕을 불사른 마법사들이 살아간 흔적이니까요.
2005/02/03 00:02 2005/02/0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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