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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음주게임? 이야기 놀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요즘 새 RPG를 별로 안 봐서 새로 보는 건 거의 위시송군의 소개로 보는 느낌인데,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건 이미 지난 네이버 TRPG 카페 MT에서 선보여서 꽤 좋은 반응을 얻은 게임이기도 하지요.

원작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 뭔지는 다 아실 겁니다. 뭉크하우젠 남작의 말도 안 되는 허풍 모험담이지요. 게임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그 허풍을 게임으로 재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고 하면 게임을 가리킵니다.

이걸 어떻게 분류할지는 좀 미묘합니다. 일단 RP 요소는 있기는 합니다. 각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하나 설정해서 자신의 인물 입장에서 허풍을 늘어놓는 것이 기본 설정이니까요. 단, RPG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 능력치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규칙은 오직 이야기의 흐름 자체만을 다루지요. 그런 면에서 묘사 요소는 전혀 없이 서사적 규칙만 있는 놀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RPG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 RPG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주사위도, 캐릭터 시트도, 진행자도 없는 이 놀이를 굳이 분류하자면 ‘음주게임’ 내지는 ‘이야기 놀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규칙책 자체가 음주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고, 술을 마시면 훨씬 재미있을 성격의 놀이라는 점에서 음주게임, 그리고 굳이 RPG인가 일종의 보드게임인가 하는 구분을 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노는 놀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겠지요.

놀이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진행자 없이 모든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한 명 설정합니다. 인물에 능력치 같은 것은 필요없고, 이름과 작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MT에서는 그냥 본명 내지 닉으로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북한 가서 김정일하고 맞장뜨고 우주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긴 했지만요..ㅡㅡ;;)

다음, 돌아가면서 운을 뗍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공작, 하늘의 별을 따서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구한 얘기를 해주시지요’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실마리가 들어오면 그 참가자는 약 5분경 온갖 허풍과 뻥을 섞어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운을 뗍니다. ‘주교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품 사이에 주교님의 신학서가 있었던 연유를 알려주시지요.’라든지요.

저게 끝이었다면 규칙이랄 게 없으니 놀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 만들어내기였겠지만,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서는 ‘개입’이라는 간단하고도 강력한 규칙이 놀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게 거의 유일한 규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모험가는 모험가 수만큼의 토큰, 최소 5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MT에서는 포커칩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어떤 모험가이든 잘못 알았다며 토큰을 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중인 모험가는 그 이의를 받아들여서 이야기를 고치고 토큰을 받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자신의 토큰까지 얹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험가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이 포기하거나 토큰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할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백작: 아 그래서 지옥의 파수견한테 주려고 달나라 토끼한테 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러 갔는데 말야-(주:실제 해보시면 이게 절대 너무 아스트랄한 게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주 두부제국의 위력을 맛보지 못하신 여러분은 아스트랄이 뭔지 모르십니다..ㅠㅠ)
주교: 어허 이사람~ 주님이 노하실 소리! 달나라 토끼들은 토끼독감 걸려서 이미 죽은 때가 아니었나. (자기 토큰 하나를 백작에게 밀어주며)
백작: 이양반이 술이 과하셨나, 예수님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시네. 토끼들이 타밀플루 맞고 살아난 거 몰라요? (주교 토큰에 자기 토큰을 얹어서 밀어준다)
주교: 예끼, 타밀플루 알레르기 땜에 다 죽었었지! (토큰을 또 하나 얹어서 총 3개를 백작에게 스윽)
백작: 아 맞아, 그랬죠. (토큰 3개를 챙기며) 저도 달나라에 도착해서야 그게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죽은 토끼들이 남긴 떡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바이러스가 들끓는 폐공장으로 들어갔는데..

이 개입 규칙 때문에 각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독주무대가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되며, 가뜩이나 상식을 씹어드신 허풍담은 더더욱 은하계 저편으로 날아갑니다. 덕분에 더 흥이 살면서 참가자들은 웃느라 숨넘어갑니다. 이렇게 모두 함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우러지는 흥겨움은 허풍선이 남작 최고의 묘미입니다. (더욱 공포스럽게도, 하다보면 종종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생기면서 뭔가 말이 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이렇게 모든 모험가가 이야기를 마치면 각 참가자는 자신 외에 누구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정해서 자기 토큰을 그 사람에게 전부 몰아줍니다. 토큰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승자가 되고, 승자는 모두에게 술을 돌린 후 (음주를 적극 권장하는 놀이라고 했었죠) 다음 라운드에는 승자가 오른쪽 사람에게 운을 떼면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허풍선이 남작은 간단하면서도 굉장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즐거운 자리에서 흥을 돋우며 정신없이 웃는 놀이입니다. 위에 소개한 기본 규칙 외에도 책에는 신밧드 변형 규칙,(주:이 변형의 하이라이트라면 ‘모험담 중 잘 되는 일마다 알라를 찬양하되, 잘 안 풀렸을 때 알라 탓으로 돌리면 방에서 쫓겨나고 방문 밖에서는 거대한 몸집의 내시가 기다리고 있다가 목을 베어버린다’) 또 토큰조차 필요없는 어린이용 놀이 ‘우리 삼촌이신 남작은…’도 나옵니다. MT 때에 전부 해봤는데, 기본 규칙이 가장 재미있었고 어린이용 규칙도 시간은 짤막하지만 굉장히 웃으면서 했습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우리가 익숙한 형태의 RPG와는 많이 다르고, 어쩌면 RPG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따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며 즐기는 흥겨운 놀이이기는 하죠. 그런 이야기 놀이는 RPG에서 갈라져나오기는 했지만 전통 RPG의 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들이 어쩌면 RPG라는 취미의 또 다른 지평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말에 동의하시지 않는다면 뭉크하우젠 남작이 코사크 부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 칼을 휘두르며 결투신청을 해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