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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으로 만들어가는 시나리오

전제조건: 어떤 RPG는 아예 시나리오를 만들 수 없거나, 룰과 시나리오 제작법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RPG에 이 내용을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평온한 한 해’나 ‘마이크로스코프’에서는 시나리오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인세인’이나 ‘어둠속의 칼날’ 같은 경우는 룰에 맞춰서 내용을 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울타리 너머’나 ‘미로의 쥐’같은 전통적인 RPG에서는 아래 내용을 잘 활용할 수 있겠지요.

1. RPG 시나리오는 플레이를 위한 빈칸을 마련하는 틀

RPG 시나리오를 만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완성된 이야기’를 꿈꾸고 RPG 시나리오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완성된 이야기는 플레이어의 경험이 고정되어 버립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답든, 이는 RPG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가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자기 팀에서 같은 시나리오를 플레이했습니다.

A: 우리 탁에서도 OOO 시나리오를 플레이했는데, 마지막 대결에서 왕자 PC가 죽을 결심을 하고 왕 앞에서 “소자는 절대 그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칼을 던지는 거, 정말 인상 깊었어.

B: 아, 그 부분 정말 훌륭했지. 어떻게 시나리오 작가는 그런 멋진 대사를 만든 거지?

이 시나리오에는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테이블에서 PC들이 동일한 감정을 느끼면서 동일한 대사와 동일한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감명 깊은 플레이였어도 이는 좋은 RPG는 아닙니다. 이건 대본이지요. RPG 시나리오는 플레이어의 경험이 고정되면 안 됩니다.

소설이나 대본, 게임 등은 레디메이드로 완성된 이야기를 독자들이, 아니면 관객이 보는 매체입니다. 이미 완성된 이야기는 독자가 아무리 무엇을 하더라도 절대 달라질 수 없습니다. 독자나 관객에 따라 다른 감상을 가질 수도 있지만(비극을 코미디로 생각한다든지), 그건 해석의 차이이지, 결국 이야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RPG는 플레이로 완성하는 매체입니다. 제작자 여러분은 캐릭터 작가가 아닙니다. 플레이어들이 캐릭터 작가입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자기 캐릭터의 능력, 맞부딪친 상황, 다른 캐릭터들과의 인터액션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해나갑니다. 이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그 테이블에서 직접 만든 수제품이기 때문에, 결코 다른 테이블의 플레이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즉, 제작자 여러분은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생각 대신, 테이블에서 캐릭터의 경험이 완성되는 틀을 제공해야 합니다, 플레이어들이 플레이로 채울 빈칸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죠. 아포칼립스 월드에서 무척 유명한 강령이 있습니다. “플레이를 통해 알아간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빈칸으로 남겨야 할까요?

2. 빈칸은 질문으로 나타내라

시나리오 제작자는 마스터와 플레이어에게 이 빈칸을 어떤 형태로 전달할까요? 저는 ‘질문’을 그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습니다.”라는 서술은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사랑할까요?” “거북이는 토끼를 어떻게 이길까요?”라고 묻는다면, 상대 마음속에 반응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생각한 답을 찾으려 하지요. 질문은 상대를 행동의 주체로 인정하고, 상대에게 답을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즉, 시나리오는 플레이어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제작자 여러분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이 부딪칠 주제입니다. 시나리오는 질문이지, 완성된 답이 아닙니다. 진정 시나리오로 만들고 싶은 건 질문으로 던지세요.

그리고 주의할 점, 절대로 정답을 만들지 마세요. RPG 제작자 폴 체게는 ‘문제와 해결책을 같은 사람이 정하면 재미가 없다’라는 원칙을 말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만든 시나리오에서는 특정한 답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예시’일 뿐이지, 정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나리오를 즐길 플레이어들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들 역시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3.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과정인가, 선택인가

그렇다면, 제작자 여러분은 시나리오를 만들 때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어떤 질문을 하는지에 따라 시나리오의 형태는 달라집니다. 저는 질문을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행동할래요?” “무슨 선택을 할래요?”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면 적진을 돌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통과할래요?”

“그래서, 당신은 부모의 원수를 용서할 건가요?

첫 번째 질문은 캐릭터의 행동 방식을 강조합니다. 이 시나리오는 아마도 캐릭터가 어떻게 적진에 갈 것인가에 비중을 두겠지요. 반면 두 번째 질문은 캐릭터의 판단을 강조합니다. 아마도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사정, 원수를 갚아야 하는 사정을 늘어놓고, 캐릭터를 심적 고뇌와 갈등에 빠뜨릴 것입니다.

캐릭터의 행동을 물어보는 시나리오는 보통 캐릭터의 목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보물을 얻거나, NPC를 구출하거나, 보스와 싸우거나 등등. 여기서 강조할 부분은 그 과정입니다. 캐릭터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무슨 장애물에 부딪히고, 어떻게 극복할까? 가 핵심 질문이지요. 플레이어들은 어떤 과정을 어떻게 극복할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던전물입니다. 던전은 마지막 방에 캐릭터들의 최종 목표가 있습니다. 목표까지 어떤 길을 선택할지? 어떤 수단을 동원할지? 전투? 비밀문 찾기? 방화? 은신? 전투가 불가피하다면 어떤 식으로 전투할지? 정면으로 부딪칠지? 기습을 할지? 모두 플레이어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사항입니다. 플레이어들은 어떤 장애물을 마주칠지, 혹은 어떤 방법으로 장애물을 마주칠지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과정은 생략될 수도 있고, 어떤 과정은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창의적인 방법을 사용한 플레이어들을 칭찬할 일이지요. 제작자 여러분은 과정의 자유를 플레이어들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캐릭터의 선택을 물어보는 건 그 반대입니다. 캐릭터들은 마지막 순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할까요? 사랑을 위해 왕의 명령을 거역할 건가요?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마지막 선택을 위해 플레이어들이 꼭 얻어야 할 정보나 과정이 있습니다. 원수를 용서할까요? 라는 핵심 질문이 있는 시나리오에서, 캐릭터들의 선택에 고민을 더하려면 그 원수가 사실 어릴 적 생명의 은인이라는 정보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즉, 캐릭터들의 최종 선택을 묻는 시나리오는 반드시 캐릭터들이 마주칠 필수 장면이나 전투가 있을 것입니다. 시나리오를 만들 때 어떤 부분을 강제 진행으로 할지, 어떤 정보를 반드시 줘야 할지 꼭 명시적으로 밝히세요. 그리고 중요한 점, 선택이 쉬워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시나리오 제작자 자신도 정답을 몰라야 합니다. 어느 쪽 선택도 극복할 난관이나 감내할 여파가 있어야 합니다.

4. 후크 만들기

핵심 질문을 정한 다음에는 후크, 즉 갈고리를 만들어보세요. 후킹은 캐릭터들을 시나리오에 끌고 오는 계기입니다. 물론 플레이어들은 시나리오를 하겠다고 동의한 상태지만, 캐릭터가 왜 이 상황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캐릭터들의 개인사나 욕망과 연결한다면 시나리오를 매끄럽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사항은 해당 테이블에서 마스터가 정하겠지만, 제작자 여러분은 마스터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연결시키는 몇 가지 예시를 만드세요. 빚 때문인가요? 그럼 채권자가 캐릭터들을 독촉할 것입니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인가요? 그럼 부모님이 원수에게 죽었다고 알려줘야 할 것입니다.

아예 캐릭터들이 왜 이 시나리오를 하는지 그냥 명확하게 제시하고, 처음부터 상황에 휘말리게 만드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처음부터 거두절미하고 적을 등장시키거나, 던전 입구에 캐릭터들을 보내거나, 말싸움이나 추격전 현장부터 시작해 보세요. 플레이어들이 첫 장면에 뭘 할지 명확하게 알려주세요.

5. 첫 장면 만들기

후크를 정했으면 이제 장면을 만들 차례입니다. 장면에도 시나리오와 마찬가지로 핵심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의 장면은 플레이어들이 이 질문에 답을 내릴 때 끝납니다. “저 성벽을 어떻게 통과할까요?” “친구와 연인이 서로 다투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면 질문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따라 장면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우선, 장면 질문이 액션을 강조하는지, 드라마를 강조하는지 생각해보세요. 장면의 종류가 액션이라면, 캐릭터들이 극복해야 하는 외부적인 난관이 등장합니다. 가장 흔한 난관은 적이나 장애물입니다. 액션 장면은 외부적인, 눈에 보이는 목표가 있고, 캐릭터들이 이 난관을 극복하느냐, 극복하지 못하느냐가 장면의 핵심입니다. 장애물이 무엇인지 소개하면서 장면을 시작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장면을 끝내세요. 원수가 있는 성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할까요? 성벽을 타고? 변장해서? 경비병에게 뇌물을 줘서?

장면의 종류가 드라마라면, 캐릭터들의(혹은 플레이어들의) 정서나 가치를 건드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드라마 장면은 캐릭터가 어떻게 극적 갈등을 해소할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할지가 장면의 핵심입니다. 드라마 장면은 캐릭터들이 어떤 요청이나 질문을 마주하면서 시작하고, 그 질문에 답을 내릴 때 끝납니다. 굶주린 난민이 도움을 호소합니다. 식량이 부족한데, 어떻게 할래요? 사랑하는 상대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릅니다. 어떻게 할래요? 여러분 가족이 감옥에 갇혔는데, 부패한 관리가 재판관이에요. 뇌물을 주면 쉽게 풀어줄 거고, 뇌물을 안 주면 재판을 지연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것입니다. 어떻게 할래요?

어떻게 보면 장면 질문은 중간 과정/마지막 선택을 묻는 시나리오의 핵심 질문과 비슷합니다. 제 경험상, 중간 과정을 강조하는 시나리오에서는 액션이 더 많이 등장하는 경향이 있고, 마지막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에서는 드라마가 더 많이 등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다음, 장면 질문을 일종의 장애물로 구체화하세요. 앞에서 말했듯 장애물은 외부적인 난관일 수도 있고, NPC나 PC 사이의 관계, 혹은 신념이나 정서와 관련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캐릭터들이 장애물을 통해 질문에 부딪히게 만들어보세요. RPG 디자이너 로빈 D. 로스는 의미 있는 장애물을 만들기 위해 네 가지 사항을 강조했습니다.

  • 딜레마: 장애물의 세부사항.

딜레마는 캐릭터들이 직면할 장애물의 상황입니다. “성벽이 높고, 경비가 10분마다 순찰을 돈다”, “오래전 헤어진 동생이 원수의 양자가 되었고, 여러분 앞에 있다.” 같은 식으로 상황을 만들어보세요.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에게 줄 상황 정보를 잔뜩 제시하세요. 플레이가 재미없어지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뭘 할지 모를 때입니다. 누가 봐도 캐릭터들이 뭘 할지 알게 하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목표를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장면 질문이 액션을 강조했다면, 딜레마 역시 외적인 어려움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드라마를 강조했다면, 캐릭터의 사회적, 내적인 문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관심거리: PC들이 장애물을 해결하기를 바라는 이유

관심거리는 PC들이 장애물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장애물을 만들었어도 PC들이 “왜 우리가 이걸 해야 하지?” 라고 말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성벽을 넘어야 연인을 구할 수 있고, 동생을 설득해야 원수와 은원을 풀기 쉬워질 것입니다. 일종의 장면 후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선택: PC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

선택은 PC들이 장애물을 해결할 방식입니다. 어떤 선택은 무척 명확하게 보입니다. 적이 눈 앞에 있다면 제압하거나 피하거나 교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예시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만들어 두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신념이나 가치관과 관련된 문제, 혹은 플레이어의 도덕적 선택과 관련된 문제는 선택지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예시 선택보다는 캐릭터들의 행동 때문에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예시 결과를 몇 가지 만든 다음(만약 상대가 분노한다면? 만약 상대가 기뻐한다면?) 플레이어들의 행동에 따라 마스터가 알맞은 결과를 선택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만약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 캐릭터들이 무언가 필수적인 단서를 찾거나, 필수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면(특히 추리물 같은 데에서), 최소한 세 가지 단서, 혹은 세 가지 해결책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핵심 증거를 찾아야 한다면, 세 가지 단서를 장면 안에 집어넣고 하나라도 찾으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음 방으로 가는 문이 굳게 잠겨 있다면, 문을 통과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적어주세요. 적이 지키고 있는 보물을 손에 넣어야 한다면, 보물을 손에 넣는 방법을 세 가지는 적어 주세요. 왜 세 가지인가? 세션에서 병목 현상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병목 현상은 보통 플레이어들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지 못해 벌어집니다. 이럴 때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다면, 마스터는 어떻게든 플레이어들에게 그 길로 가도록 유도하는 레일로드 플레이를 하거나, 입을 꽉 다물고 플레이어들이 그 방법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세 가지 방법이 있다면, 마스터는 “이런저런 방법이 예로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플레이어들에게 선택권을 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네 번째 길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요.

  • 결과: PC들이 선택한 결과

마지막으로, PC들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 무엇이 달라질지 결과를 만드세요. 드라마를 강조한 장면에서는 여러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혹시, 성공과 실패에 따라 분기점을 만들고 싶나요? 사실 미리 만드는 시나리오에서 분기점을 만드는 건 품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 판정은 실패하면 이야기가 아예 진행이 안 돼!” 같은 부분을 시나리오에 넣는 건 위험합니다. 물론 과감하게 “여기서 시나리오는 실패했습니다.”라고 선언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별로 매력적인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캐릭터들의 성공이나 실패에 따라 캐릭터들을 약화/강화시키거나, 이후 PC들이 맞닥뜨릴 장애물에 변화를 주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PC들이 원수의 양자가 된 동생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면, 동생은 이후 원수의 동료로 등장하거나 영영 PC들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PC들이 성을 넘지 못한다면, 모든 준비를 마친 적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거나 정보 상인이 성안으로 잠입하는 길을 제안할 것입니다. 대신 훨씬 비싼 대가와 원하지 않는 부탁을 들어줘야 하겠지요.

각 장면의 결과는 의미 있어야 합니다. 의미 있는 결과는 캐릭터들이 선택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누군가를 죽였다면 살인자라는 딱지가 붙거나, 그 사람의 지인이나 가족이 새로운 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한번 성을 넘었으면, 일을 마칠 때까지는 성 밖으로 나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6. 시나리오의 기본 구조: 다섯 장면.

이렇게, 총 다섯 장면을 만들어보세요.

과정을 묻는 시나리오라면, 다양한 방향으로 캐릭터를 시험하는 다섯 개의 액션 장면을 준비하세요. 던전이라면 다섯 방을 준비하고, 전쟁터라면 다섯 번의 위험을 준비하세요. 어려운 도전을 준비하되, 플레이어들이 머리를 짜낸다면 난도를 낮추거나 우회할 기회와 정보를 주세요. ‘다섯 방 던전’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세요.

스스로 물어보세요. “어떻게 해야 캐릭터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장애물을 안겨줄까?”

반대로 마지막 선택을 묻는 시나리오라면, 캐릭터의 신념과 믿음을 시험하는 다섯 개의 드라마 장면을 만드세요. 장면마다 새로운 부분을 부각시켜서 캐릭터들을 흔들고 시험하세요.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캐릭터들이 인터액션을 하게 하세요. 이렇게 다섯 장면을 만들고, 지금까지의 선택지를 돌이켜보는 짧은 장면을 덧붙이세요.

스스로 물어보세요. “어떻게 하면 플레이어들이 마지막 선택의 중요함과 그 여파를 고민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다섯 개일까요? 보통 한 장면은 적으면 10분, 많으면 20분에서 30분 정도 시간을 소비합니다. 이 다섯 개의 장면에다가 도입부, 그리고 마지막 결말까지 합치면 대략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저는 이 정도가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최소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 장면을 만든다면 더 깊은 내용을 준비할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선택입니다.

물론 과정을 묻는 시나리오에서 드라마 장면이 나올 수도 있고, 반대로 마지막 선택을 묻는 시나리오에서 액션 장면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보통 과정-액션 위주, 마지막 선택-드라마 위주로 흘러가기 쉬웠습니다.

다섯 장면을 만든 다음에는 최종 장면을 준비하세요. 최종 장면에서는 캐릭터들이 마지막 시련을 마주치고, 마지막으로 내릴 선택을 플레이해야 합니다.

최종 장면이 끝나면, 이 시나리오가 끝난 후 캐릭터가 어떻게 변했는지 플레이어들에게 돌아가면서 서술하게 하는 과정을 넣으세요. 이 과정은 필수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에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고 느끼게 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7. 주의사항

마지막으로, 제작자 여러분이 주의할 사항입니다.

첫 번째, 핵심 질문은 플레이어들이 명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과정을 묻는 시나리오에서 플레이어들은 마지막에 자신들이 무엇을 할지(보스전, 보물 획득, 범인 체포, 기타 등등) 알아야 하며, 결론까지 이르는 과정을 자신들이 만들어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반대로 마지막 선택을 묻는 시나리오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이 결국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시나리오 동안 캐릭터들이 그 선택과 관련된 이야기를 플레이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플레이어들이 핵심 질문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시나리오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핵심 질문과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내용이 나오면 안 됩니다. 핵심 질문은 시나리오의 전제조건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다루고 싶은데, 플레이 동안 “경주 말고 다른 거 하고 싶어요?” 이런 내용이 나오면 시나리오가 흔들립니다.

시나리오의 종류

로빈 로스의 마스터링 법칙 (Robin’s Laws of Good Game Mastering)에 나온 시나리오 편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0. 던젼 등 비구조적 모험

일정한 공간을 준비한 후 그 공간을 탐사하는 모험입니다. 탐험과 전투, 물품 획득이 중심입니다.

1. 에피소드식 구조

서로 큰 상관관계가 없는 장면의 연속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온갖 사건을 겪는 것이죠. 특히 배경세계 제작에 관심이 많고 주인공들에게 자신이 만든 세계를 관광시켜주고 싶은 진행자에게 적합합니다. 또 유머나 모험 중심의 가벼운 분위기가 되기 쉽기 때문에 무거운 이야기 사이사이에 좋은 기분전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피소드식 모험 구조의 예라면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보틀턴 외곽: 춤추는 요정 ⇒ 큄시 근처: 물에 빠진 할머니 ⇒ 다크우드: 거미를 숭배하는 사교 ⇒ 버려진 방앗간: 서큐버스 출몰 ⇒ 채석장: 노예 반란 ⇒ 브라젠의 성문: 골렘 봉쇄

에피소드식 구성은 배우 유형 참가자에게 특히 적합합니다. 인물 표현을 마음껏 해도 지속적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파워 플레이어, 전투중시형, 무심한 참가자 유형도 이 모험 구조의 단순성을 좋아할 것입니다. 반면 이야기꾼 유형은 장면 사이의 연관이 없다는 점과 장기적 결과의 부재에 실망하기 쉽습니다.

2. 세트 중심

세트 중심 모험은 서너개의 줄거리상으로 연결된 대규모의 장면으로 이루어집니다. 주인공들이 대규모 장면을 순서대로 모두 마주치도록 적당히 구성을 조절하긴 하지만,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가는데는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장면전환 방법을 적어도 두가지씩은 생각해 두는 것이 좋으며, 참가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을 생각해 낼지도 모릅니다.

1920년 이집트에서의 모험을 다루는 모험을 예로 들면, 우선 배경에 어울리는 멋진 장면을 4가지 설정합니다. 사막에서 차를 달리며 도굴꾼들과 벌이는 총격전,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있는 무덤 탐사. 미이라를 예상하고 있을 참가자들을 놀래켜 주기 위해 강력한 스핑스와의 전투, 그리고 복엽 비행기가 비행선을 공격하는 공중 전투.

다음은 순서를 정리합니다. 펄프 모험에서는 항상 큰 괴물은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에 스핑크스가 제일 끝입니다. 무덤 도굴꾼은 무덤 탐사 다음에 나오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고공 전투가 무덤 탐사나 도굴꾼들과의 싸움보다 멋지므로 도굴꾼과의 전투와 스핑크스 사이에 세번째로 넣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험 구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덤과 함정 ⇒ 도굴꾼 ⇒ 비행선 전투 ⇒ 스핑크스

이들 장면 사이를 전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가지는 성공했을 경우, 또 한가지는 실패했을 경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위의 예에서 도굴꾼 전투와 비행선 전투 사이의 전환을 생각해 보면, 도굴꾼들에게 이겨서 그들의 옷이나 차를 수색할 경우 프랜시스 스마이스라는 유물 수집가 소유의 비행선을 습격할 계획서가 나옵니다. 도굴꾼들에게 졌을 경우 (혹은 수색할 기회가 없을 경우) 모험자들은 카이로에서 도굴꾼들의 정체를 알아보다가 스마이스라는 부유한 문화재 수집가도 강도 습격을 받은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스마이스의 비행선상 연회에 초대받습니다. 성공에 의한 장면 전환은 실패의 결과보다 빠르고 위험이 적은 것이 보통입니다.

장면 전환의 법칙

(1) 실패와 성공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지의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된다

굴림에 실패해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패와 성공에 따라 각각 다른 경로를 따르게 된다면 몰라도 실패를 이유로 모험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서는 안됩니다.

(2)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주인공 일행이 막지는 못해도 그 정도에는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줄거리상 악당이 꼭 주인공 일행을 피해 결정적인 장면에서 마계의 관문을 열거나 할 필요가 있다면 최소한 부분적인 성공이라도 허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죽이는 것은 막았더라도 부상을 입혀서 나중에 다시 마주쳤을 때 더 유리하다든지, 마계의 문을 여는 장치의 마법을 소모시켜서 관문을 여는데 시간이나 노력이 더 들게 된다든지.

3. 순서도 형식

모든 가능성을 미리 준비한 형식으로, A 장면에서 성공하면 B 장면, 실패하면 C 장면… 하는 식으로 가지를 치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준비하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순서도를 완전히 논리적으로 전개할 경우 완전한 패배로 이어지는 선택지의 연속도 있을 것인데, 이것은 전술가 유형의 참가자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패배의 가능성이 있어야 판단과 계획의 재미가 있으니까요. 반면 이야기꾼 유형은 완전한 실패까지는 가지 않도록 진행자가 적당히 조절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4. 퍼즐 형식

완전한 순서도 형식 모험과 완전히 즉석에서 만든 모험의 중간 형태로, 여기서 퍼즐 조각이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사건과 정보입니다. 퍼즐 형식 모험을 만들려면 주변 인물의 성격과 목적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다음, 중요한 정보의 단편들을 나열하고 어느 인물이 어느 정보를 아는지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들이 갈만한 장소라든지 가능한 행동 순서 등을 생각해 봅니다.

모험을 진행할 때는 이러한 정보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보여주고, 주인공들은 어떤 실마리를 쫓을지 선택하면서 선을 이어갑니다. 모험이 진행되면서 등장 인물들을 만나고 줄거리를 짜맞춰 가는 것입니다. 재미 혹은 논리상 필요할 경우 줄거리를 더욱 진전시키는 사건을 삽입합니다. 정보와 사건을 목록에서 지워가면서 진척 상황을 추적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퍼즐식 모험은 순서도 형식의 모험보다 정보를 더 간략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준비하기도 훨씬 쉽습니다. 또한 진행도 보다 유연해지지만, 그 유연성의 활용은 실력 나름이랄까요.

5. 적 중심

또한 적의 계획과 행동에 중점을 두고 모험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장점은 퍼즐식 모험과 비슷하지만, 사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이 적의 계획을 방해할수록 준비한 내용은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주인공들이 적을 뒤쫓는 추적 형식의 캠페인이라는 제한된 상황에 적합합니다.

단편 각본 사이코유저

사이코유저 (영문) – 역시 책갈피 안 넘치게 블로그에 옮겨놓습니다. 참가자들이 비디오게임 세계로 빠져들어가 게임 주인공이 되는 내용의 단편 각본. (각본이라고 하니 시나리오하고는 어감이 꽤나 다르군요..;;) 이른바 차원이동빙의물(?). 직접 써먹을 생각은 별로 없고, 의식은 참가자 자신인데 몸과 능력은 비디오게임 주인공이라는 발상이 재밌군요. 장르를 격투로 바꾸고 규칙은 우슈를 사용해 신나게 한판 때려부수기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받아라! 12단 콤보!) 스테이지 설계 같은 작업은 준비를 영 안하는 게으름뱅이 진행자에게 좋은 연습이 될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