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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이야기는 플레이로 생명력을 얻습니다.

며칠 전 주말의 괴물(Monster of the Week) 단편 OR을 했는데, 캐릭터의 배경은 실제로 플레이에 등장해야 생동감을 얻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마스터링을 해 주신 머스터드젤리님과 같이 플레이해 주신 호경님, 퐁당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단편은 타천사들과 싸우는 플레이였는데, 제 캐릭터는 우연히 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얻어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음모론 덕후였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타천사들에게 성물을 탈취당하고 동료들을 잃어서 복수를 꿈꾸는 수녀와, 세상에 닥칠 위험을 예견한 마녀였죠.

셋 중에서 제 캐릭터가 가장 초자연적 요소와는 거리가 먼 일반인에 가까웠지만, 실제 플레이 동안에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무척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장면에서 제 캐릭터의 배경 이야기가 플레이로 생명을 얻은 덕분입니다.

다른 캐릭터의 배경 이야기는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언급이 되는 수준이었고, 플레이어가 직접 언급을 해야 플레이에 드러났지만,  제 캐릭터는 첫 장면에서 그 단서 때문에 친구들을 잃고, 목숨의 위험을 받았습니다. 또한 플레이의 상당 시간을 잃어버린 단서를 되찾기 위한 모험에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친구들을 잃은 슬픔이나 복수심, 천사들에 대한 두려움 같은 롤플레이가 더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WOD에는 처음 플레이를 시작하는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플레이어와 스토리텔러가 일대일로 서막(Prelude) 장면을 가집니다. 사실 WOD를 제대로 해보지 못해서 그 중요성을 지금까지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왜 서막 장면을 플레이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의 배경이나 과거는 자세하게 만들 필요도, 지나치게 많이 만들 필요도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RPG에서 각종 배경과 설정은 식재료입니다. 플레이는 요리하고 먹는 과정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식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또한 식재료의 양이 많으면 쉽게 요리를 만들 수 있지만, 음식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 이상 준비는 낭비일 뿐입니다.

Babylon Babes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치하의 바빌론을 배경으로 한 캠페인입니다. 규칙은 트롤베이브. 역사적 정확도는… 뭐, 바빌론에 검투경기가 있다는 데까지 얘기하면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정확도 = 0)

캠페인 주인공은 동환님의 사사트, 노예명 아스와드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딱히 없고 (둘다 정규 캠페인 틈새에서 하는 것이니) 자주 변할 것 같아서 일단 1:1로 하기로 했습니다.

캠페인 규모는 규칙대로 개인적 규모에서 시작합니다. 과연 어느 규모까지 높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

배경

기원전 6세기 바빌론. (…물론 말로만. 사실은 판타지 도시이지요.) 페르시아의 쿠루스 (그리스식으로는 사이러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점령한지 거의 20년이 지난 바빌론은 학술과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했습니다. 무역과 전쟁 때문에 도시에는 수많은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지요. 한편으로 풍요와 안정의 이면에는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적개심이 끓고 있기도 한, 화려하고 위험한 도시입니다.

주변 지역은 풍요로운 평원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푸라투 (그리스어로는 유프라테스) 강과 이디클랏 (그리스식으로 티그리스) 강 사이에 난 수로를 비롯해 강물을 끌어들인 수로 체계 때문에 고대 세계 기준으로는 교통도 편리합니다. 종교적으로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가 주신이며, 풍요의 여신 이슈탈도 폭넓게 숭배합니다.

자료

바빌론 지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도 – 주인공 사사트가 바빌론을 벗어날 경우에 한동안은 이쪽을 맴돌게 되겠지요.

페르시아 인명사전 – 아마 시간대가 안맞겠지만 알게 뭡니..(퍽)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니 이때부터 1,000년 후에야 나타나는 이슬람 냄새가 나는 이름은 피해야..(…)

아시리아 이름들 – 그때그때 이름이 필요하면 골라서 쓸 자료. 

악의어린 공포의 장, 원더랜드

짬짬이 틈을 내서 범용 RPG 규칙인 JAGS 배경 책 원더랜드를 읽었습니다. 2권인 진행자용 책은 현재 읽는 중. 공짜 RPG 책이 이렇게 질이 높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의 품질과 분량을 자랑하는군요. 풍부한 일러스트와 알찬 내용, 읽기 좋은 레이아웃… 아마추어 RPG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엷은 RPG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목대로 원더랜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어느정도 기반삼고 있지만 원작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장르는 현대 심리 공포물로서, 감염성 정신질환인 CPD에 의한 초현실적 환각과 이상행동으로 점점 생활이 붕괴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환각이라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은 것이 CPD이기도 하죠. 어째서 여러 사람이서 동시에 ‘에피소드’ (CPD 환각증세)를 겪으면서 모두 같은 경험을 기억하는지, 어째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겪는 에피소드 사이에 공통되는 장소나 인물이 등장하는지, 어째서 에피소드가 환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공통된 점이 있다면 원더랜드 역시 부조리하고 악의어린 유머를 추구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무실 천장에 붙은 책상, 멀쩡히 돌아가는 반쪽짜리 TV, 색색의 갈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공룡,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 등, 원더랜드는 엉뚱하고 비정상인 상상이 광기어린 공포와 결코 멀지 않은 공간입니다.

이렇듯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삶이 어긋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은 반드시 무력한 피해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책에서는 모험과 공포의 균형, 즉 주인공에게 원더랜드의 공포와 싸울 힘이 얼마나 주어지는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말하자면 ‘크툴루의 부름’과 ‘버피’ 중 어느 쪽에 가까운 캠페인을 할지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원더랜드의 악의에 비참하게 잠식당하는 모습인가, 아니면 원더랜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심지어는 원더랜드를 통해 강해지는 모습인가. 이런 고려사항을 자세히 다룬 RPG 책이 별로 없어서 더욱 호감이 가는 부분이군요.

전체적인 인상은 진행이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배경이라는 느낌입니다. 늘 번역의 압박에 시달리는 (…) RPG인으로서도 좋은 게, 참가자들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 부분이야 배경이 현대이니 따로 독서가 필요없고, 원더랜드 쪽에서는 주인공들이 아무것도 모르다가 직접 발로 뛰면서 서서히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까요. 잘못 아는 것도 재미있습..(퍽)

본래 원더랜드는 JAGS를 사용하지만 규칙은 많이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다른 규칙으로 전환하는 것도 쉬워 보입니다. JAGS는 제가 다루기에는 조금 (많이) 복잡하지만 컨버젼 후에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식으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기와 해학과 공포의 장, 원더랜드에 빠져들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