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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물 캠페인 구상

아더왕 전설을 역사적으로 해석한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Rosemary Sutcliff)의 소설 ‘황혼의 검 (Sword at Sunset)’을 최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더왕을 인간적으로 다룬 감명깊은 소설이라는 평이 많지만, 사실 제게는 잘 쓴 역사·군사 소설로 더 감명깊게 다가오더군요. 아더왕을 다룬 소설이 보통 영웅성과 전투 묘사에 치중하는 반면 황혼의 검은 군마 양성, 병력 확보, 보급, 정찰 등 실제 군대를 운용하는 어려움을 크게 다루었던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이런 내용을 RPG 혹은 그와 유사한 플레이로 재현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RPG의 뿌리인 워게임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원 관리와 병력 배치 못지 않게 전쟁의 정서적, 인간적 영향도 풍부하게 다룰 수 있는 플레이라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전에 했던 센타레스 성역 전투와 비슷하되, 전술성을 더 강조하는 형태이겠죠.

그 외에 군마 구입과 교배라든지 기병 양성 등 군대를 향상시키는 시도도 하나의 모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군사 지도자의 정치적, 외교적 성공이 군사작전을 더 쉽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군대의 전투 판정과 개별 인물의 판정이 얽힐 수도 있겠죠.

이렇게 정교한 플레이를 지원하는 규칙을 생각하기가 좀 어렵다는 점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의 임시 면모와 부상 규칙입니다. 군대와 주요 인물들을 모두 인물 제작 규칙으로 만들어서 개별 인물의 판정과 모험이 군대에 면모를 부여하는 식으로 말이죠. 센타레스 성역 전투에서처럼 진행자가 딱히 필요없이 참가자끼리 경쟁하고, ‘대규모 전투’ 모드와 ‘모험’ 모드를 구분해서 모험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편에 상관없이 인물을 맡아서 RP하는 형식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가자가 둘을 넘어가면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듯합니다. 참가자가 셋이라면 한 명은 묘사와 규칙 판정을 맡는 진행자 역할을 맡을 수 있고, 넷부터는 편을 나눌 수도 있겠죠.

규칙이라든지 하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나름 즐거운 군사물 캠페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전생 플레이에 대한 생각

어쩌다 보니 아침부터 전생의 사랑을 소재로 한 뮤직 비디오를 연이어 두 편 보았습니다. 뭐 마음에 드는 내용이었는지는 차치하고 (도탄에 빠진 반란 농민의 한복이 얼마나 하얗고 깨끗한지, 새삼 우리가 백의민족이라는 자긍심을 느꼈습..), 어쨌든 전생이라는 소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 하나: 과거의 발견

이와 관련해서 떠오른 것이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뱀파이어 캠페인인 소년H님의 시카고 2007입니다. 시카고 2007에서는 주인공의 과거사도 플레이 소재가 될 수 있는데, 재밌는 건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은 수치상으로 별개라는 점입니다. 한 100년 전에는 알았던 것이라 해도 이후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과거 플레이에서 성장했다고 그걸 현재에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사 자체도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플레이중 ‘발견’하는 성격이 강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대략의 내용은 있을지 몰라도 사건의 세부는 플레이중 드러나겠죠.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플레이상 과거란 현재와 불가분의 연속성을 이루는 고정체가 아닌 일종의 평행 시간대일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시간대와 끝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과거의 사건은, 혹은 그 기억은 현재의 사건과 인간관계에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에 대한 인식을 계속 수정해 갑니다. 기억과 기록이 결코 완전하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심리학, 역사학, 범죄 수사, 재판 등 수많은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과거의 성격은 전생을 소재로 삼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과 현생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야 뭐 자명하고, 생전의 기억도 믿을 게 못 되는데 죽음을 넘은 기억은 또 어떨까요. 과거와 현재를 평행 진행하며 과거의 진실을 깨달아 가고, 과거의 의미가 현재의 사건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는 플레이는 전생 플레이에 특히 적합해 보입니다.

생각 둘: 수정주의 전생?

또하나 떠오른 생각은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 규칙을 고쳐서 공통의 전생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루어도 재밌겠다는 것. 권위도나 연구 자금 대신 인과나 업보, 인연 등이 있겠고, 전생의 사건 못지않게 현생도 중요하게 다루어야겠죠. 전생의 반복을 유도하는 과거의 힘과 이를 청산하려는 의지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도 흥미롭겠고 (전생에 죽인 사람에게 속죄한다거나), 전생의 진실을 깨달아서 현재의 문제를 푸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보물을 묻은 곳은… 바로…!’)

여러모로 전생이란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입니다. 운명과 자유의지, 진실의 성격, 기억의 주관성 등 많은 주제를 다룰 수 있죠. 전생 소재가 다시 유행을 타는 건지 우연히 그랬는지는 몰라도 같은 소재의 뮤직 비디오를 두 편이나 보니 떠오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