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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들어 가는, 우리만의 이야기놀이, TRPG

 

기획회의 486호(2019.04.20)에 기고한 글입니다. (리디북스 링크)

 


 

우리가 만들어 가는, 우리만의 이야기놀이, TRPG

 

어느 놀이 이야기

“여러분 앞에는 3m 정도 높이의 커다란 문이 있습니다. 나무로 만들었고, 튼튼해 보이네요. 덫은 없어 보이지만 문을 열지 못하도록 반대편에서 막은 것 같습니다.”

“문 상태는 어떤가요?”

“적어도 몇백 년은 된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썩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들이받아서 부수겠습니다.”

“근력 판정을 하세요.”

“주사위를 굴려 보겠습니다… 성공했네요!”

“문은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부서집니다. 문 안쪽 방 한가운데는 거대한 악마상이 있고, 석상 앞에는 붉은 피부의 괴물이 이쪽을 바라봅니다. 한눈에 봐도 무척 화난 것 같네요.”

“두말할 것도 없네요. 칼을 뽑습니다.”

“저는 일행들에게 축복의 마법을 걸겠습니다.”

“좋아요, 전투 준비하세요.”

위의 이야기는 즉흥극도 아니고, 소꿉놀이도 아니다. 더더구나 컴퓨터 게임도, 보드게임도 아니다. 바로 TRPG를 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다.

TRPG?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 즉 TRPG는 플레이어들이 테이블에 모여 상상 속 무대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를 맡아서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선언하는 역할연기 놀이이다. 플레이어들은 캐릭터가 가진 능력과 성격 등을 바탕으로 역할을 수행하며, 캐릭터들의 행동이 성공했는지는 정해진 규칙과 지침에 따라 결정한다. 플레이어 중 한 명은 게임마스터 역할을 맡아 캐릭터들이 만날 친구나 적, 그리고 세계 그 자체를 연기하고 전체 플레이를 조율한다.

난독증도 치료하는 TRPG의 매력

2017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서는 ‘던전스 & 드래곤스의 기이한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TRPG의 대표주자인 ‘D&D(던전스 & 드래곤스)’가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을 분석했다. 이 기사에서는 자신의 보드게임 카페에서 아이들을 위해 D&D의 게임마스터를 맡고 있는 존 프리먼이 겪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느 날, 어느 플레이어의 어머니가 길가에서 존을 불러 세우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죠?” 그 여성의 아들은 난독증을 앓고 있었고, 몇 주 전부터 D&D를 플레이하기 전에는 단 몇 초도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아이는 밤을 새워서 자기 캐릭터의 이야기를 쓴다고 한다. “어떻게 했든 간에, 그 비법을 알려주세요.”

난독증을 앓고 있는 아이조차 글을 쓰게 한 TRPG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TRPG는 게임이다

아이가 TRPG에 푹 빠진 이유는, TRPG가 즐거운 놀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식을 갖추고 규칙을 추가한 놀이, 즉 ‘게임’이다.

사람이 즐기면서 무언가를 할 때 발휘되는 잠재력은 무척 크다. 공자는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이 아이 역시 자기 캐릭터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놀이로 인식했기에 장애마저 극복하고 자신의 캐릭터를 위한 글을 쓸 정도로 몰두할 수 있었다.

게임이 즐거운 이유는 무엇인가? 《GAME-상호작용 이야기》(이용설 저)에서는 게임을 스토리텔링과 상호작용성을 조합한 매체로 본다. 스토리텔링은 상대에게 알리려는 내용을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책이나 TV, 영화처럼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매체와는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가 취하는 행동에 반응을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이 행동과 반응이 연쇄 과정을 일으키면서 상호작용성을 만든다. 즉, 게임은 사용자를 스토리텔링 속에 참여하게 하는 매체이다. 직접 경험해서 받아들이는 내용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순자가 “듣지 않음은 듣는 것만 못하고, 듣는 것은 보는 것만 못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만 못하고, 아는 것은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TRPG는 즉흥극이나 소꿉놀이와 어떤 점이 다르기에 형식을 갖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TRPG는 플레이어가 선언한 행동이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 속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결정하는 분명한 규칙을 가졌다. “내가 너를 칼로 찔렀어.” “아냐! 네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내가 널 총으로 쐈어!”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TRPG에서는 규칙을 사용해 결과를 명확하게 정한다.

이처럼 TRPG가 게임이 된 이유는, TRPG가 게임말을 가지고 테이블 위에서 상대의 말과 싸워 이기는 미니어처 워게임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TRPG의 탄생과 발전

TRPG의 역사는 게리 가이각스가 TRPG 회사인 TSR을 세우고 D&D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게리 가이각스는 플레이어들이 각자 게임말을 하나씩 맡아 플레이하는 미니어처 워게임 ‘체인메일’을 만들었는데, 이후 게리 가이각스는 체인메일을 데이브 아네슨의 아이디어에 따라 가상의 세계에서 캐릭터들이 모험을 하는 형식으로 바꾸어서 1974년 최초의 D&D를 완성했다.

하지만 TRPG는 탄생할 때부터 워게임이나 보드게임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TRPG의 진짜 목표는 정량적이고 명확한 승리 대신 플레이어들이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즐기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게리 가이각스와 데이브 아네슨은 D&D 플레이어 핸드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잠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재미를 위해서다. 각각의 플레이들은 재미를 맛보면서 “승리한다” – 그러므로 당신이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면 당신은 승리한 것이다! 당신의 캐릭터가 죽는다고 해도 재미를 맛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당신은 언제나 새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실제의 생활에서 이기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이어가고,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다. 재미는 게임을 즐기는 데 있는 것이지, 끝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게임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게 되고,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전드 오브 더 파이브 링스, ‘세븐스 씨’ 등의 TRPG을 만든 게임 제작자 존 윅은 “만약 체스 말에 이름을 붙이고, 각 말이 가진 동기에 따라 말을 움직인다면, 이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이다.”라고 말했다. 즉, TRPG는 승리를 위해 사용하고 소모하는 게임말을 캐릭터로 삼아 동기를 부여하고 감정을 이입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게임이 된 것이다.

이후 TRPG는 ‘크툴루의 부름’, ‘트레블러’,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등의 작품이 나오면서 호러, SF, 어반 판타지 등 여러 장르로 뻗어 나갔고, 2000년대 이후에는 인디 RPG의 붐과 함께 ‘폴라리스’, ‘평온한 한 해’, ‘퀼’ 등 게임마스터를 두지 않거나, 플레이어들이 게임마스터처럼 세계를 관리하거나, 아예 혼자서 즐기는 규칙을 제공하는 등 실험적인 게임들도 많이 등장했다.

꺼지지 않는 TRPG의 인기

하지만 ‘규칙에 따라 이야기에 참여하는 게임’이라는 TRPG의 형식은 오늘날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이 계승했고, 그에 따라 TRPG가 다른 게임에 비해 가지고 있던 장점은 상당 부분 퇴색되었다. 1970년대 중반 D&D에 영감을 받아 그 경험을 모사하기 위해 등장한 CRPG는 이후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 콘솔의 발전과 함께 플레이어들에게 화려한 영상과 사운드를 제공하며, 인간 게임마스터가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방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펼친다. 게다가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같은 가상 세계 안에서 동시에 협력해서 플레이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TRPG는 오히려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2018년 D&D 5판의 출판사 위자드 오브 더 코스트는 1997년 TSR을 합병한 이후 가장 많은 D&D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2016년 한 해 동안 D&D를 즐긴 미국인의 수는 860만 명에 다다른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또한 TRPG를 즐기는 미국 성우들이 진행하는 D&D 플레이 ‘크리티컬 롤’은 2016년 1월 기준으로 트위치에서 누적 시청 시간 3700만분을 기록했고, 유튜브에서는 1700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한국에서도 현재 TRPG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90년대 중반 D&D(1983년 개정판)가 한국에 소개된 후 잠시 인기를 끌면서 몇몇 작품들이 추가로 소개되었다가, 초여명의 ‘겁스’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긴 침묵에 빠졌던 한국의 RPG 시장은 크라우드 펀딩 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웹툰 작가 및 성우 등이 ‘던전월드’를 플레이한 영상 ‘침X펄X풍 TRPG’가 화제가 되었다.

CRPG의 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여전히 TRPG를 즐길까? CRPG가 대체할 수 없는 TRPG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즉흥성과 커뮤니케이션

CRPG와 TRPG의 가장 큰 차이는 즉흥성과 커뮤니케이션의 유무이다. CRPG는 제작자가 완성한 스토리텔링이다. CRPG의 이야기에는 바꿀 수 없는 끝이 있으며, 플레이어들이 게임 안에서 할 수 있는 행동과 이에 대응하는 게임 세계의 반응 역시 제작자들이 준비한 내용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방대한 내용과 다양한 공략법이 준비된 대작 RPG라도 몇십 시간 동안 플레이를 즐긴 다음에는 콘텐츠 대부분을 소진한 채 다음 작품이나 업데이트, 또는 DLC가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직접 MOD를 만들거나 혹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이메일, SNS를 통해 제작자에게 피드백을 주기도 하지만,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 간에 즉석에서 해결할 수는 없으며, 의사가 제대로 반영된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TRPG는 즉흥적인 창조력과 플레이어들 사이의 상호소통이 필수적인 게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가는 놀이는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게임마스터는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하더라도 모든 경우의 분기와 대응 방법을 생각할 수 없으며, 플레이어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조종할 수도 없다. 플레이어 역시 다른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고, 심지어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를 때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참석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한다. 혼자만의 결정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TRPG는 모두 같이 즐기는 게임이며, 다른 플레이어들을 무시하는 순간 플레이는 재미없어 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게임마스터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세부사항을 덧붙이고 처음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결말이나 반전을 만들곤 한다. 심지어 즉석에서 새 규칙을 고안할 때도 있다. 플레이어 역시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선언을 할 뿐만 아니라, 게임마스터에게 제안을 던져 이야기의 방향을 새로 정하기도 한다.

테이블에서 만들어지는 맥락

이렇게 모두가 함께 창조력을 발휘해 만드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테이블에는 플레이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문화나 배경지식, 즉 그 테이블의 맥락이 생긴다.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플레이어들은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서로를 믿고 플레이하다 보면 결국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맥락이 만들어진 테이블에서는 불확실성이 플레이를 위협하는 불안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질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된다. 맥락은 CRPG처럼 복제나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며, 오직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플레이를 해야 비로소 형성된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우리만의 작품

결국, TRPG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미리 완성된 기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시행착오를 거치고 좌충우돌하며 점점 더 멋지게 만들어 가는, 오직 우리만이 그 내역을 알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겁스에서는 “RPG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런 설명을 했다.

다른 문화는 최대 다수의 관객을 노리고 만들어지지만, RPG 플레이는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순전히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내는 “수제품”입니다.

자기 자신이 빚어낸 작품은 그 어떠한 걸작보다도 사랑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TRPG는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