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제목을 보고 야한 상상을 하셨다면 그 상상은 100% 맞습니다! (…) 아군과 한 하쉬르 외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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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장미의 눈물
요약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귀빈을 모시는 법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형제의 대화
요약
열두 살 때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아미르는 이복형 메흐디의 병문안을 받습니다. 아미르는 이제 황자로서 쓸모없어졌다는 불안을 토로하고, 메흐디는 그런 그를 격려하면서 학문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감상
어렸을 때의 아미르와 메흐디 모습, 그리고 사고에 대한 아미르의 반응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 플레이였습니다. 부드러워서 더 무서운 메흐디님(…) 사고의 실체가 무엇이었든 간에 (메흐디는 당시 수도를 비우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용의선상에서 제외할 수는 없죠) 아미르에게 학문이라는 길을 제시해 위협을 제공하는 모습은 역시 메흐디. 아미르가, 그리고 사람들이 왜 따르는지 알 것 같달까요. 무엇보다 두 형제의 대화에 드러난 섬세한 감정적 흐름이 즐거웠습니다. 플레이를 함께해주시고 로그 정리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밤의 미궁 속에서
연회날, 하쉬르는 황후에 대한 암살 계획 제보를 듣고 직접 조사하러 나갑니다.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끝에 단서가 아리칸으로 향하자 그는 아리칸을 쫓아 도시 내의 저택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뜻밖에 아샤신 수뇌부와 마주칩니다. 그들은 황후에 대한 충심과 그의 약점을 잡은 술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하쉬르에게 아샤신의 방식으로 처벌과 경고를 내리고, 후에 정신을 차린 하쉬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아리칸의 도움으로 황궁으로 간신히 돌아갑니다. 그리고 황궁 정원에서 네야와 플로리앙과 마주친 후 쓰러지지요.
감상
제가 개인적으로 진행의 재미로 꼽는 것 중 하나는 의외성입니다. 참가자 못지않게 진행자도 플레이 중 사건의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이 많으니까요. 조연의 의도와 동기, 기존 행동 등을 알고 있다 해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갈지는 참가자와 부딪히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그 결과물은 종종 진행자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시종일관 초현실적인 느낌의 플레이였고, 한 사람의 인물과 그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1:1의 재미가 산 것 같습니다. 아군의 RP도 굉장히 좋았고요. 이렇게 해서 연회의 밤에 하쉬르가 뭘 했는지 하는 의문은 풀 수 있었죠. 역사의 격류 속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할까 하는 더 큰 의문을 남기며…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낙원이 허락된다면
오체스님과 진행한 외전입니다. 로그 정리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를.
요약
사란티움에서 나흐만으로 귀국하던 중 아미르가 탄 배는 해적 습격을 받습니다. 하인 카림이 주인을 지키려 뱃전을 피로 적셔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아미르는 카림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도 카림에게 감사하지요.
감상
카림은 아미르의 제안으로 메흐디가 붙여준 하인으로서, 그 실체는 아샤신입니다. 아미르를 충실하게 섬기다가, 술탄의 명령이 내린다면 언제라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죠. 그리고 귀국길에 아미르는 아마도 애써 외면했던, 카림의 아샤신으로서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됩니다. 카림이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제가 생각하는 카림의 핵심 대사이자 제목을 따온 부분은 다음 대목입니다.
orches: “… 자네 손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미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로키: 카림은 순간 그를 날카롭게 봅니다.
orches: 무심한 어조로, 마치 쇄기를 박아버리는 듯 말합니다. “그렇다는 말이네.”
로키: “감사하다는 말씀이 진심이라면 다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하는군요.
로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낙원에서의 재회는 빠르겠지요.”
로키: “주인을 죽인 하인에게도 낙원이 허락된다면…”
충직한 하인으로든, 치명적인 아샤신으로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카림이 자기 상황의 근원적인 모순에 대한 괴로움을 유일하게 토로한 대사라는 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번 화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저 충실한 하인으로서 주인을 오래오래 모시고 싶다는 것이 카림의 진심이기도 하지요. 등뒤에 겨눈 칼인 자신을 마치 정말로 충직한 종인양 아껴주는 주인이기에 더더욱.
하인이나 하녀 같은 보조역을 하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합니다만, 조연 역시 자신만의 이야기와 꿈이 있게 마련이죠. 이 외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그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러다 카림이 정말로 아미르를 평생 모시며 둘이 오손도손 늙어가면 코미디라고 오체스님과 웃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가장 행복한 코미디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평범한 일상, 평범한 꿈은 깨어지기 쉽기에 더욱 소중하니까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어머니의 향기
지난주 플레이 이후 아군과 진행한 외전입니다.
야심한 시간에 황후에게 불려간 하쉬르는 사란티움의 정세에 대하여 마리사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황후는 황제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해도 황제의 등뒤를 지키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며, 하쉬르를 무리해가며 방어 시찰에 넣은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시의 방어태세를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황제를 떠보는 의미도 있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하쉬르는 황제를 떠보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요.
황후는 니키아스가 남기고 죽은 그림자 전쟁, 도시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정보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쉬르에게 루키아노플의 나흐만 정보망과 그 수장인 아라크네아의 뒤를 캐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쉬르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믿느냐고 극구 사양하다가 결국 자신이 나흐만의 황자인 것을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아라크네아에 보고하는 처지인 것은 얘기하지 않지만요.
마리사는 하사나의 아들이냐며 반가워하고,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서 서로 보고싶어하고 걱정하는 그의 상황에 가슴아파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사나가 준 출국 선물이었던, 어머니의 쟈스민 향이 나는 손수건을 선물합니다.
감상
굉장히 감성이 풍부한 플레이였던 데다가 하쉬르가 충격선언까지 해서 더욱 재미있었죠. 사란티움의 위험한 정세와 전에 석한군과도 얘기했던 그림자 전쟁 설정, 그리고 하쉬르와 마리사라는 인물의 내면을 더 깊이 알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술탄의 하렘에서는 숨죽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마리사가 황후가 된 후에는 키네니아와 더 닮아가는 모습을 보며, 확실히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쉬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벼락선언과 결정적인 순간에 한 줄기 눈물이 가슴 찡한 RP였습니다.
이전에 아군과도 한 얘기지만, 숀 펜이 정치 얘기를 하면서 ‘터프가이는 시종일관 차가워야 한다는 엉터리 연기 조언’을 비웃은 글 (영문, 두 번째 문단)이 있었죠. 아군의 RP는 따스한 인간다움이 터프가이의 진짜 바탕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킬 것이 있는 터프가이가 정말로 강하고 터프하니까요. 무조건 냉소적이고 무자비한 게 아니라, 필요할 때는 차갑지만 인간적인 감성 또한 풍부한 남자야말로 어른스럽고 멋진 사나이죠. (그래서 세 PC는 모두 멋진 싸나이!)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달빛 아래
마음의 계절 쓰려고 석한군과 진행한 외전입니다. 에이레네의 시점은 해당 소설 ‘초여름’ 부분에서 볼 수 있죠.
라이가 열여섯, 에이레네가 열셋 되던 해, 라이산드로스는 여름의 마창대회에 당연히(!) 우승합니다. 언제나 그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상대였던 니키아스는 등록만 한 채 나타나지 않죠. 승리 후에 그는 연회 준비를 하려고 집에 들르고, 자기 방에 숨어있던 니키아스와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분노한 아버지를 피해 한동안 도피생활을 하려고 니키아스는 라이산드로스의 옷을 좀 집어가고, 라이산드로스는 연회장으로 향합니다.
연회에서 다시 에이레네와 이야기를 나누며 라이산드로스는 둘이 같이 정원에 나가려고 하지만, 에이레네 곁을 떠나지 않는 유모라는 장벽에 마주합니다. 그때 니키아스가 시기적절하게 등장해서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두 사람은 정원으로 함께 탈출하고, 달빛 비치는 정원에서 라이산드로스는 승리의 월계관을 에이레네에게 씌워줍니다. 둘은 달빛 아래 침묵하며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요.
감상
온 도시가 떠받드는 젊은 영웅이면서도 마음은 복잡한 라이산드로스의 심정, 에이레네와 깊어가는 마음이 감상 포인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정원 장면은 특별한 닭살대사나 애정표현이 없는데도 감정이 풍부한 여백의 미랄까, 절제미가 마음에 들었고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니키아스도 재밌었습니다.
캠페인 소설은 꽤 써봤지만 PC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일은 처음이라 좀 애먹었는데, 이 외전 덕분에 초여름 장면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도움을 준 석한군에게 감사를. 개인적으로 라이산드로스나 에이레네처럼 원형적이고 ‘완벽한’ 인물은 좀 반감이 드는 편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영웅과 공주님도 결국 인간이겠지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마음의 계절
초봄
제국에서 가장 인내심 넘치는 여성이 에이레네를 숨차게 쫓아나가는 동안 밖에서는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이제 막 꽃망울이 터지는 꽃가지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봄
저택의 육아실 벽에는 군데군데 수평으로 줄을 그은 가느다란 나무판이 고정되어 있다. 칼로 가볍게 표시한 선마다 이니셜과 날짜가 보인다. N, 3월, E, 5월, 그리고 같은 시기의 E보다 한참, N보다도 더 높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L. 달이 가고 계절이 갈 수록 점점 높아가는 눈금, 저택 아이들의 키를 그대로 새긴 기록이다.
유모가 머리를 매만져주는 동안 열한 살 에이레네는 자신과 오빠, 가끔 에이레네가 우겨서 라이산드로스의 키도 기록하는 판을 쳐다본다. 라이산드로스와 자신의 키 사이에 있는 공간을. 라이가 열 세 살일 때 레니는 열 살, 레니가 열세 살이 돼도 라이는 열여섯 살.
라이산드로스는 그녀를 레니라고 부르는 일이 없다. 에이레네라고 부른다. 정식 연회나 만찬에서는 안겔리아 영애라고 하기도 한다. 둘이서만 주고받는 익살스러운 미소와 함께할 때도 흠잡을 데 없는 목례, 에스코트하려고 내미는 팔, 정중한 그 미소도 그가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환하다. 그에게서 빛이 나니까.
“아주 예쁘세요, 아가씨.”
거울 속의 소녀는 에이레네를 엄숙하게 마주본다. 백금빛 머리칼에 비단 꽃을 엮어 땋은 밑으로는 갸름하고 하얀 얼굴과 조용한 연갈색 눈. 자신이 예쁜지 에이레네로서는 알 길이 없다. 유모와 부모님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니키아스 오빠는 ‘우리 못난이’라면서 볼을 쭉 잡아당기며 놀리고는 하지만, 그건 장난이고. 라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고마워요, 유모.”
에이레네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부모님이 준비를 마치시기만 기다리면 황궁에서 여는 성 미카엘 만찬에 갈 수 있다. 라이도 그곳에 있겠지. 가슴이 조금씩 빨리 뛴다.
“머리하고 옷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가씨. 나으리와 마님이 채비가 되셨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유모가 방에서 나간 후 에이레네는–머리와 옷을 조심하며–키를 기록한 나무판 앞에 가서 선다. 저번에 잰 이후로 얼마나 자랐을까? 그녀는 나무판에 등을 돌리고 저 위에, 높아만 보이는 라이의 키를 곁눈질한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르면, 얼마나 더 자라고 어른스러워지면 그의 곁에 설 수 있을까? 그 기다림은 너무나 길어보이고, 저렇게도 빛나는 그가 자신을 영영 돌아볼지도 알 수 없는데. 그 달콤한 기대와 싸아한 안타까움을 에이레네는 혼자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아가씨, 어서 나와보세요! 나으리와 마님께 예쁜 모습 보여드려야죠.”
에이레네는 거울을 보고 환하게 미소짓는다. 오늘 저녁은 부모님과 니키 오빠와 함께, 그리고 라이와 다같이 함께이다.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의 딸답게 당당하게, 눈부시게. 라이산드로스마저도 눈빛을 돌릴 수 없는 빛을 내리라. 아직 그럴 수 없으면 내일이라도, 내년이라도, 키와 영혼이 자라면서 점점 더.
당당하게 그녀는 육아실에서 걸어나온다. 기다리는 세상, 기다려지는 사람을 향해.
초여름
“네 거야, 이제.”
열세 살 에이레네는 순간 말을 할 수가 없다. 방금 그녀의 머리에 월계수관을 씌워준 라이를 올려다볼 뿐. 밤의 정원 위로 희고 푸르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뭔가 더듬더듬 말했던 듯도 하다. 하필이면 라이 앞에서 이렇게 바보스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자신이 한심하지만, 그에게 들릴까 두려울 정도로 심장이 뛰는 동안은 명확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가 준 월계수관에 살짝 댄다. 낮에 그가 우승한 마창대회 승자의 표식, 둘이 정원으로 나오자 그가 말없이 머리에 씌워준 황금관에.
“아까부터 이거 갖고 싶어서 종일 쳐다본 거 다 알아.”
“예? 아…”
눈물이 나오려고 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는다. 그랬다가는 라이가 얼마나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할까. 관이 아니라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듯 그렇게… 마치 영원과 같은 그 이야기를 구비구비 돌아 당신이, 내가 이곳에 서 있다고, 말하려 한다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마음에 들어?”
무심한 듯 던지는 말에 에이레네는 자신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영혼이 흘러넘치면 입술은 오히려 침묵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닫는다.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은 아스라한 휘장 같아서,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며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비추기도 한다. 향기로운 여름 정원에서 마주보며 그의 눈빛에서 영혼의 한 조각을 엿보고 그녀는 작게 몸이 떨려온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환희의 순간이 감미로우면서도 너무나 위태해서…
“…고마워요.”
그가 말없이 정원 위에 뜬 달을 올려다보는 동안 그녀는 더 이상 마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다. 허락 없이 엿본 시선이 죄스러우면서도 그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두려울 정도로 감사하기에.
시원하고 달콤한 달빛 속에 생동하는 여름의 향기가 폐부로 몰려든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침묵의 짧은 영원 속에서.
초가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열다섯 살 에이레네는 일부러 시선을 다잡는다. 연회 음식을 음미하고, 주변에 앉은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고, 축배가 있을 때면 잔을 들며… 성 미카엘 축일 저녁의 공기는 맑고 시원하고, 연회장 벽을 따라 늘어선 벽난로의 불길은 따스하다. 모든 것이 온전한데도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미소는 눈에까지 닿지 않는다.
오른편, 다섯 자리 건너에는 라이가 앉아있다.
그녀의 종용으로 옷을 갈아입고 면도를 했지만 여러날 술과 이름없는 절망으로 지샌 날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눈빛만 매섭도록 형형한 채로 그가 가족과 친구 사이에 마치 이방인처럼 앉아있다는 것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 않아도.
‘녀석의 문제가 뭐냐고? 병에 걸렸지, 아마도.’
니키아스 오빠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다시 울린다.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이 도시가 그의 병이야.’
불빛이 보석과 실크에, 대리석과 마호가니에 영롱하게 빛난다. 사람들의 미소와 웃음이 공기중에 반짝이고, 창밖으로는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역사처럼 길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가, 그녀가 나서 자란 도시 루키아노플은 부모의 피만큼이나 진하게 그들의 피에 흐른다. 그의 존재와 영혼에까지 뿌리내린 것이 병이라면 어떻게 나을 수가 있을까.
‘결국은 녀석이 스스로 결정할 거야. 남이 해줄 수 있는 몫이야 뒷수습 정도지.’
니키아스 오빠의 눈빛은 심각했고, 그녀를 위한 아픔을 마주볼 수 없어 에이레네는 등을 돌렸었다.
‘에이레네…’
“에이레네 영애, 어떻게 생각하나요?”
꿈에서 깨어나듯 에이레네는 현실 대화의 흐름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오른쪽 다섯 자리 건너편은 애써 쳐다보지 않는다.
그때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대화의 매끄러운 흐름을 끊는다.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있는 에이레네는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그 시선을 따라간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의자와 함께 넘어졌던 라이산드로스는 누가 도와주기 전에 혼자 비틀비틀 일어난다. 남의 고통과 추락을 집어삼킬 듯 탐욕스러운 호기심의 눈빛 속에서, 그는 혼자 연회장에서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으면서도, 악의와 연민어린 시선을 막아주고 그 지친 어깨를 보듬고 세상 어떤 일에도 함께 맞서고 싶으면서도 에이레네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연회와 예의바른 대화로 돌아온다. 아무리 (아끼고 갈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눈물 흘리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생각해도 사람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세상의 차가운 진실을 느끼며. 벽난로의 불길을 피한 가을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늦가을
“많이 내리는구나…”
에이레네 부인께,뭐라고 위로할 말씀이 없습니다. 결혼 5년만에 생긴 아이가 잘못되었으니 난 안 될 거라거나, 나이가 많아서 이미 틀렸다는 생각은 부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라비틀어지고 늙은 포도나무에도 열매가 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권능이거늘, 하물며 부인이겠습니까. 몸을 충분히 회복하시는 대로 약재를 들고 찾아뵙겠사옵니다. 아무리 가망이 없는 경우에도 자녀를 내린다는 기적의 약이랍니다.부인과 부인의 가정에 쟈드의 축복과 자비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스틸리안느 팔레오로가 올림.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사랑하는 사람들
요약
니키아스의 난이 끝난지 며칠 후, 플로리앙과 싸웠다가 화해한 네야는 새벽에 그의 숙소로 잠입(!)합니다. 그리고 얘기를 나누면서 플로리앙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설명하지요. 플로리앙은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는 결정의 무게를 네야에게 같이 지우기 싫었다고 실토하고, 네야는 플로리앙이 용병대장으로 있는 것은 부하들이 플로리앙 없이는 못 살아서가 아니라 부하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자신을 상황의 피해자로 여기지 말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행복해 하라는 말에 플로리앙은 네야에게 마음을 열 수 있게 됩니다.
감상
사실 이 외전의 시초는 외전 직전에 이방인님과 나누었던 MSN 대화입니다. 네야가 하쉬르에게 집적거리는(?) 외전과 스토리에 대해서 이방인님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셔서, 제가 생각하기에 네야가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를 설명한 후에 그 부분을 해소하는 외전을 하기로 했죠.
그 결과 처음 생각한 것보다 네야가 많이 성숙한 인물이 되기는 했지만 (플로리앙과의 관계에서 엉킨 부분을 풀지 못하고 하쉬르에게 위안을 구하는 어린 드라마퀸 대신 자신의 감정과 고민을 정확히 알고 플로리앙과 대화로 푸는 모습), 그게 ‘밝고 통통 튀면서도 지혜롭다’는 네야의 설정에 나름 어울리기도 해서 괜찮았습니다.
다만 이방인님을 배려하느라 이번에는 아군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느낌이라 아쉽습니다. 물론 이방인님과 달리 아군은 이 문제에 대한 감정적 애착이 별로 없었고, 또 처음부터 네야는 플로리앙 상대로 만든 인물이었으니 삼각관계 플롯은 없어지는 쪽이 옳았다고는 생각하지만요.
그리고 이방인님 말씀과는 달리 저는 이건 승패하고는 무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플로리앙이 하쉬르보다 잘나거나 못나거나 해서 나온 결과는 아니니까요. (오히려 못나서 나온 결과일지도…? (…)) 서로 배려하고, 극적 흐름과 인물 감정선을 조정해서 낸 결론일 뿐이죠. 진행자 입장에서 참가자 혹은 주인공 사이에 승패를 저울질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결국 이번 대화와 외전을 통해 다시 깨달은 것은 플레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와 대화라는 평범하고 당연한 원칙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배려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잊기 쉬운 점이 배려의 어려움이기도 하다는 걸요. 이래서 인간관계는 RPG의 근본에 있고, 또 삶 자체에도 너무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죠. 이 사안 자체야 뭐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만요.
개인적으로 네야가 플로리앙에게 하는 충고는 제가 종종 하는 (혹은 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상황의 피해자이고 모든 게 괴롭기만 한양 마음을 토로하고는 하지요. 하지만 실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상황에 있는 게 아니라 원해서 있는 것이고, 그 선택과 상황에는 행복이 있다는 점은 순간순간 잊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많이 괴로운 순간에는요.
그런 때에는 지금의 상황이 많은 경우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떠나는 선택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기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보통은 떠날 수 있더라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친구, 연인, 가족–곁에 있는 행복이 너무 크기에. 불편은 불편이고 불평은 불평일 뿐, 지금의 행복을 가릴 만한 불행이 되는 일은 드물지요. 그게 어쩌면 어렵고 복잡한 인간관계의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인 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