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외전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저녁에서 새벽까지

혹시 제목을 보고 야한 상상을 하셨다면 그 상상은 100% 맞습니다! (…) 아군과 한 하쉬르 외전입니다.

요약
황후에게 불려갔던 아리칸은 황후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얘기를 하쉬르에게 합니다. 혼란스러운 정국과 적과 아가 뒤얽히는 역사의 조류 속에 두 사람은 마음을 확인하지요.
감상
야한 외전을 해본 건 처음은 아닌데, 남자 참가자와 해본 건 처음이라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재밌었습니다. 결국 여성 참가자분과 할 때와는 달리 중요한(?) 부분들은 좀 아스라히 처리하긴 했지요. 그래도 아리칸과 하쉬르의 감정, 그리고 복잡한 상황이 잘 드러난 것 같아서 좋네요. 축 두 사람의 동거~(…)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장미의 눈물

요약

입양으로 나흐만 재상 이스마일 파샤의 조카인 하비브는 여동생 베르다(주:’장미’라는 뜻)와 그들의 사촌인 마르얌이 사란티움 황궁에 있다는 소식의 의미에 대해 대화합니다. 하비브가 마르얌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베르다는 마르얌이 무사히 약혼자 아미르 황자와 결혼해서 하비브가 포기하도록 마르얌 언니가 보고 싶다느니 눈물 연출을 합니다. 베르다의 말에 의욕이 충천해진 하비브는 이스마일 파샤를 찾아가 마르얌 귀환과 결혼 작전을 논의하지요.
감상
아마도 캠페인 최고의 막장을 기록할 하비브와 베르다 양남매 등장입니다. 하비브는 노예 출신으로, 이스마일 파샤의 눈에 들어 동생 야샤르에게 입양하게 했죠. 그가 중용한 평민 인재가 꽤 많을 듯한데, 아리칸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베르다는 야샤르의 열두 살짜리 딸로서, 하비브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비브가 마르얌을 잘 결혼시켜 마르얌을 단념시키고 가문에서 입지도 높이는 게 계획이죠. 드라마가 그렇듯 욕하면서 보는 경우일 것 같습니다(…)
베르다의 조숙하고 계산적인 성격, 그리고 이스마일 파샤의 책사인 하비브가 베르다에 대해서는 유독 맹한 점 등이 잘 드러나서 재밌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스틸리안느와 메흐디와 함께 캠페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이스마일 파샤의 첫 등장도 좋았고요. 자 이제 하비브와 아미르의 연계 외전을 하는 것은 시대의 요구인 겁니다! (탕탕)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귀빈을 모시는 법

라이산드로스의 3화 외전입니다. 3.5화쯤 될까요. 밤과 오전에 걸쳐 2화에 한 로그를 합쳐 올립니다. (파일명도 새롭게!)

요약

연회 중 집에 일이 있다고 부름을 받은 라이산드로스를 황제의 심복 라파엘이 만나 비밀 임무에 내보냅니다. 이스마일 파샤의 막내딸이 킨다스 구역에서 신분을 숨기고 지내고 있으니 황궁에 ‘귀빈’으로 모셔오라는 것. 그 아가씨가 바로 아내 에이레네를 구한 의사 라첼레의 친척이며, 에이레네에게 말동무가 되어준 미리암이라는 것을 알고 라이산드로스는 갈등하면서도 미리암에게 어떤 위해도 가지 않도록 책임지겠다고 그녀의 가족에게 약속한 후 황궁으로 정중히 모셔옵니다.
감상
라이산드로스가 불려간 다음에 어떤 장면이 있었을까 둘이 생각하다가, 석한군이 집에 일이 있다는 건 속임수이고 다른 임무가 있는 건 어떨까 제안했고, 제가 아가씨 납치 임무를 제안했습니다. 무서우면서도 용기를 내려고 애쓰는 미리암의 모습이라든지 (어째 이 아가씨가 캠페인 최고의 울보이군요) 임무와 개인적 친분과 고마움 사이에 갈등하는 라이산드로스 등, 다양한 감정의 교차가 재미있는 외전이었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형제의 대화

형제의 대화

요약

열두 살 때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아미르는 이복형 메흐디의 병문안을 받습니다. 아미르는 이제 황자로서 쓸모없어졌다는 불안을 토로하고, 메흐디는 그런 그를 격려하면서 학문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감상

어렸을 때의 아미르와 메흐디 모습, 그리고 사고에 대한 아미르의 반응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 플레이였습니다. 부드러워서 더 무서운 메흐디님(…) 사고의 실체가 무엇이었든 간에 (메흐디는 당시 수도를 비우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용의선상에서 제외할 수는 없죠) 아미르에게 학문이라는 길을 제시해 위협을 제공하는 모습은 역시 메흐디. 아미르가, 그리고 사람들이 왜 따르는지 알 것 같달까요. 무엇보다 두 형제의 대화에 드러난 섬세한 감정적 흐름이 즐거웠습니다. 플레이를 함께해주시고 로그 정리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밤의 미궁 속에서

1229965127.html
요약

연회날, 하쉬르는 황후에 대한 암살 계획 제보를 듣고 직접 조사하러 나갑니다.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끝에 단서가 아리칸으로 향하자 그는 아리칸을 쫓아 도시 내의 저택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뜻밖에 아샤신 수뇌부와 마주칩니다. 그들은 황후에 대한 충심과 그의 약점을 잡은 술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하쉬르에게 아샤신의 방식으로 처벌과 경고를 내리고, 후에 정신을 차린 하쉬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아리칸의 도움으로 황궁으로 간신히 돌아갑니다. 그리고 황궁 정원에서 네야와 플로리앙과 마주친 후 쓰러지지요.

감상

제가 개인적으로 진행의 재미로 꼽는 것 중 하나는 의외성입니다. 참가자 못지않게 진행자도 플레이 중 사건의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이 많으니까요. 조연의 의도와 동기, 기존 행동 등을 알고 있다 해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갈지는 참가자와 부딪히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그 결과물은 종종 진행자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조연의 기존 행동이나 플레이 이전에 있었던 사건마저 모르고 시작하는 때도 있습니다.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변하기도 합니다. 이번 외전처럼 별로 생각한 것 없이 시작할 때가 특히 그렇죠. 황후 암살 얘기의 실체가 아샤신 수뇌부에서 하쉬르를 꾀어내려는 함정이었다… 하는 건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실체일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한 중간 변동 때문에 초기 진행이 좀 산만했던 것이 아쉽다면 아쉽지만, 그래서 미궁 속에 헤매는 느낌이 더 산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샤신의 정신세계로 들어서는 도입부 역할을 한 느낌도 있고요.

결과적으로 시종일관 초현실적인 느낌의 플레이였고, 한 사람의 인물과 그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1:1의 재미가 산 것 같습니다. 아군의 RP도 굉장히 좋았고요. 이렇게 해서 연회의 밤에 하쉬르가 뭘 했는지 하는 의문은 풀 수 있었죠. 역사의 격류 속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할까 하는 더 큰 의문을 남기며…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낙원이 허락된다면

오체스님과 진행한 외전입니다. 로그 정리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를.

요약

사란티움에서 나흐만으로 귀국하던 중 아미르가 탄 배는 해적 습격을 받습니다. 하인 카림이 주인을 지키려 뱃전을 피로 적셔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아미르는 카림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도 카림에게 감사하지요.

감상

카림은 아미르의 제안으로 메흐디가 붙여준 하인으로서, 그 실체는 아샤신입니다. 아미르를 충실하게 섬기다가, 술탄의 명령이 내린다면 언제라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죠. 그리고 귀국길에 아미르는 아마도 애써 외면했던, 카림의 아샤신으로서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됩니다. 카림이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제가 생각하는 카림의 핵심 대사이자 제목을 따온 부분은 다음 대목입니다.

orches: “… 자네 손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미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로키: 카림은 순간 그를 날카롭게 봅니다.
orches: 무심한 어조로, 마치 쇄기를 박아버리는 듯 말합니다. “그렇다는 말이네.”
로키: “감사하다는 말씀이 진심이라면 다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하는군요.
로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낙원에서의 재회는 빠르겠지요.”
로키: “주인을 죽인 하인에게도 낙원이 허락된다면…”

충직한 하인으로든, 치명적인 아샤신으로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카림이 자기 상황의 근원적인 모순에 대한 괴로움을 유일하게 토로한 대사라는 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번 화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저 충실한 하인으로서 주인을 오래오래 모시고 싶다는 것이 카림의 진심이기도 하지요. 등뒤에 겨눈 칼인 자신을 마치 정말로 충직한 종인양 아껴주는 주인이기에 더더욱.

하인이나 하녀 같은 보조역을 하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합니다만, 조연 역시 자신만의 이야기와 꿈이 있게 마련이죠. 이 외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그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러다 카림이 정말로 아미르를 평생 모시며 둘이 오손도손 늙어가면 코미디라고 오체스님과 웃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가장 행복한 코미디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평범한 일상, 평범한 꿈은 깨어지기 쉽기에 더욱 소중하니까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어머니의 향기

지난주 플레이 이후 아군과 진행한 외전입니다.

1136425764.html
요약

야심한 시간에 황후에게 불려간 하쉬르는 사란티움의 정세에 대하여 마리사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황후는 황제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해도 황제의 등뒤를 지키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며, 하쉬르를 무리해가며 방어 시찰에 넣은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시의 방어태세를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황제를 떠보는 의미도 있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하쉬르는 황제를 떠보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요.

황후는 니키아스가 남기고 죽은 그림자 전쟁, 도시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정보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쉬르에게 루키아노플의 나흐만 정보망과 그 수장인 아라크네아의 뒤를 캐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쉬르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믿느냐고 극구 사양하다가 결국 자신이 나흐만의 황자인 것을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아라크네아에 보고하는 처지인 것은 얘기하지 않지만요.

마리사는 하사나의 아들이냐며 반가워하고,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서 서로 보고싶어하고 걱정하는 그의 상황에 가슴아파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사나가 준 출국 선물이었던, 어머니의 쟈스민 향이 나는 손수건을 선물합니다.

감상

굉장히 감성이 풍부한 플레이였던 데다가 하쉬르가 충격선언까지 해서 더욱 재미있었죠. 사란티움의 위험한 정세와 전에 석한군과도 얘기했던 그림자 전쟁 설정, 그리고 하쉬르와 마리사라는 인물의 내면을 더 깊이 알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술탄의 하렘에서는 숨죽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마리사가 황후가 된 후에는 키네니아와 더 닮아가는 모습을 보며, 확실히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쉬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벼락선언과 결정적인 순간에 한 줄기 눈물이 가슴 찡한 RP였습니다.

이전에 아군과도 한 얘기지만, 숀 펜이 정치 얘기를 하면서 ‘터프가이는 시종일관 차가워야 한다는 엉터리 연기 조언’을 비웃은 글 (영문, 두 번째 문단)이 있었죠. 아군의 RP는 따스한 인간다움이 터프가이의 진짜 바탕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킬 것이 있는 터프가이가 정말로 강하고 터프하니까요. 무조건 냉소적이고 무자비한 게 아니라, 필요할 때는 차갑지만 인간적인 감성 또한 풍부한 남자야말로 어른스럽고 멋진 사나이죠. (그래서 세 PC는 모두 멋진 싸나이!)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달빛 아래

마음의 계절 쓰려고 석한군과 진행한 외전입니다. 에이레네의 시점은 해당 소설 ‘초여름’ 부분에서 볼 수 있죠.

1367790458.html
요약

라이가 열여섯, 에이레네가 열셋 되던 해, 라이산드로스는 여름의 마창대회에 당연히(!) 우승합니다. 언제나 그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상대였던 니키아스는 등록만 한 채 나타나지 않죠. 승리 후에 그는 연회 준비를 하려고 집에 들르고, 자기 방에 숨어있던 니키아스와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분노한 아버지를 피해 한동안 도피생활을 하려고 니키아스는 라이산드로스의 옷을 좀 집어가고, 라이산드로스는 연회장으로 향합니다.

연회에서 다시 에이레네와 이야기를 나누며 라이산드로스는 둘이 같이 정원에 나가려고 하지만, 에이레네 곁을 떠나지 않는 유모라는 장벽에 마주합니다. 그때 니키아스가 시기적절하게 등장해서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두 사람은 정원으로 함께 탈출하고, 달빛 비치는 정원에서 라이산드로스는 승리의 월계관을 에이레네에게 씌워줍니다. 둘은 달빛 아래 침묵하며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요.

감상

온 도시가 떠받드는 젊은 영웅이면서도 마음은 복잡한 라이산드로스의 심정, 에이레네와 깊어가는 마음이 감상 포인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정원 장면은 특별한 닭살대사나 애정표현이 없는데도 감정이 풍부한 여백의 미랄까, 절제미가 마음에 들었고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니키아스도 재밌었습니다.

캠페인 소설은 꽤 써봤지만 PC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일은 처음이라 좀 애먹었는데, 이 외전 덕분에 초여름 장면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도움을 준 석한군에게 감사를. 개인적으로 라이산드로스나 에이레네처럼 원형적이고 ‘완벽한’ 인물은 좀 반감이 드는 편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영웅과 공주님도 결국 인간이겠지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마음의 계절

블로그 감염으로 늦어졌던 캠페인 첫 소설 테이프 끊습니다. 주인공은 에이레네입니다. ‘크면 라이하고 결혼할 거야!’ 면모의 형성과 성숙기를 엿볼 수 있죠. 완성하라고 닦달하고 라이산드로스 나오는 부분도 확인해준 석한군에게 이 글을 (구타와 함께) 바치도록 하지요.

초봄

아직 겨울의 날이 서있는 산들바람을 타고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라이가 와요.”
에이레네 콤네니아 두카이나 안겔리아는 글자 연습을 하는 공책에서 고개를 든다. 그녀의 가정교사이자 여섯 살배기 레니의 가족에 따르면 제국에서 가장 인내심 있는 여성인 페트라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에이레네 아가씨, 말발굽 소리로는 그런 것은 알 수 없답니다. 그보다는 엡실론을 써보셔야-“
“글자는 다 쓸 줄 알아요. 라이가 와요. 오빠랑 경주하고 있고, 라이가 이길 거라고요!”
에이레네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페트라 부인이 좀 닫을 수 없겠느냐고 했지만 레니의 고집으로 열어놓은) 창으로 달려간다. 창가 자리에 냉큼 올라가 아이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목청을 높인다.
“힘내요, 라이! 이겨요!”
에이레네가 창밖으로 굴러떨어지기 전에 페트라 부인이 붙잡아 바닥에 내려놓는 동안 라이산드로스 라스카리스는 막 마당으로 말을 달려 들어오며 이쪽으로 의기양양하게 모자를 흔들어보인다. 그리고 그에 뒤이어 에이레네의 오빠 니키아스가 숨이 턱에 닿아 말고삐를 당기며 도착한다.
“라이가 이겼죠?”
에이레네는 다시 창가 의자 등받이에 매달리며 라이산드로스에게 열렬히 손을 흔들어 보답한다. 페트라 부인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창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하게 한다.
“에이레네 아가씨,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패배를 무릅쓰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로 가치있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 가문의 영애로서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정숙한 모습을 보이셔야-“
“페트라 부인, 저 라이에게 인사하고 올게요!”
한 마디도 안 들은 기색이 역력한 에이레네는 가정교사의 손길에서 가볍게 빠져나와 문으로 달려간다.
“에이레네 아가씨!”

제국에서 가장 인내심 넘치는 여성이 에이레네를 숨차게 쫓아나가는 동안 밖에서는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이제 막 꽃망울이 터지는 꽃가지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저택의 육아실 벽에는 군데군데 수평으로 줄을 그은 가느다란 나무판이 고정되어 있다. 칼로 가볍게 표시한 선마다 이니셜과 날짜가 보인다. N, 3월, E, 5월, 그리고 같은 시기의 E보다 한참, N보다도 더 높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L. 달이 가고 계절이 갈 수록 점점 높아가는 눈금, 저택 아이들의 키를 그대로 새긴 기록이다.

유모가 머리를 매만져주는 동안 열한 살 에이레네는 자신과 오빠, 가끔 에이레네가 우겨서 라이산드로스의 키도 기록하는 판을 쳐다본다. 라이산드로스와 자신의 키 사이에 있는 공간을. 라이가 열 세 살일 때 레니는 열 살, 레니가 열세 살이 돼도 라이는 열여섯 살.

라이산드로스는 그녀를 레니라고 부르는 일이 없다. 에이레네라고 부른다. 정식 연회나 만찬에서는 안겔리아 영애라고 하기도 한다. 둘이서만 주고받는 익살스러운 미소와 함께할 때도 흠잡을 데 없는 목례, 에스코트하려고 내미는 팔, 정중한 그 미소도 그가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환하다. 그에게서 빛이 나니까.

“아주 예쁘세요, 아가씨.”

거울 속의 소녀는 에이레네를 엄숙하게 마주본다. 백금빛 머리칼에 비단 꽃을 엮어 땋은 밑으로는 갸름하고 하얀 얼굴과 조용한 연갈색 눈. 자신이 예쁜지 에이레네로서는 알 길이 없다. 유모와 부모님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니키아스 오빠는 ‘우리 못난이’라면서 볼을 쭉 잡아당기며 놀리고는 하지만, 그건 장난이고. 라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고마워요, 유모.”

에이레네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부모님이 준비를 마치시기만 기다리면 황궁에서 여는 성 미카엘 만찬에 갈 수 있다. 라이도 그곳에 있겠지. 가슴이 조금씩 빨리 뛴다.

“머리하고 옷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가씨. 나으리와 마님이 채비가 되셨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유모가 방에서 나간 후 에이레네는–머리와 옷을 조심하며–키를 기록한 나무판 앞에 가서 선다. 저번에 잰 이후로 얼마나 자랐을까? 그녀는 나무판에 등을 돌리고 저 위에, 높아만 보이는 라이의 키를 곁눈질한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르면, 얼마나 더 자라고 어른스러워지면 그의 곁에 설 수 있을까? 그 기다림은 너무나 길어보이고, 저렇게도 빛나는 그가 자신을 영영 돌아볼지도 알 수 없는데. 그 달콤한 기대와 싸아한 안타까움을 에이레네는 혼자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아가씨, 어서 나와보세요! 나으리와 마님께 예쁜 모습 보여드려야죠.”

에이레네는 거울을 보고 환하게 미소짓는다. 오늘 저녁은 부모님과 니키 오빠와 함께, 그리고 라이와 다같이 함께이다.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의 딸답게 당당하게, 눈부시게. 라이산드로스마저도 눈빛을 돌릴 수 없는 빛을 내리라. 아직 그럴 수 없으면 내일이라도, 내년이라도, 키와 영혼이 자라면서 점점 더.

당당하게 그녀는 육아실에서 걸어나온다. 기다리는 세상, 기다려지는 사람을 향해.

초여름

“네 거야, 이제.”

열세 살 에이레네는 순간 말을 할 수가 없다. 방금 그녀의 머리에 월계수관을 씌워준 라이를 올려다볼 뿐. 밤의 정원 위로 희고 푸르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뭔가 더듬더듬 말했던 듯도 하다. 하필이면 라이 앞에서 이렇게 바보스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자신이 한심하지만, 그에게 들릴까 두려울 정도로 심장이 뛰는 동안은 명확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가 준 월계수관에 살짝 댄다. 낮에 그가 우승한 마창대회 승자의 표식, 둘이 정원으로 나오자 그가 말없이 머리에 씌워준 황금관에.

“아까부터 이거 갖고 싶어서 종일 쳐다본 거 다 알아.”

“예? 아…”

눈물이 나오려고 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는다. 그랬다가는 라이가 얼마나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할까. 관이 아니라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듯 그렇게… 마치 영원과 같은 그 이야기를 구비구비 돌아 당신이, 내가 이곳에 서 있다고, 말하려 한다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마음에 들어?”

무심한 듯 던지는 말에 에이레네는 자신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영혼이 흘러넘치면 입술은 오히려 침묵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닫는다.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은 아스라한 휘장 같아서,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며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비추기도 한다. 향기로운 여름 정원에서 마주보며 그의 눈빛에서 영혼의 한 조각을 엿보고 그녀는 작게 몸이 떨려온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환희의 순간이 감미로우면서도 너무나 위태해서…

“…고마워요.”

그가 말없이 정원 위에 뜬 달을 올려다보는 동안 그녀는 더 이상 마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다. 허락 없이 엿본 시선이 죄스러우면서도 그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두려울 정도로 감사하기에.

시원하고 달콤한 달빛 속에 생동하는 여름의 향기가 폐부로 몰려든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침묵의 짧은 영원 속에서.

초가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열다섯 살 에이레네는 일부러 시선을 다잡는다. 연회 음식을 음미하고, 주변에 앉은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고, 축배가 있을 때면 잔을 들며… 성 미카엘 축일 저녁의 공기는 맑고 시원하고, 연회장 벽을 따라 늘어선 벽난로의 불길은 따스하다. 모든 것이 온전한데도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미소는 눈에까지 닿지 않는다.

오른편, 다섯 자리 건너에는 라이가 앉아있다.

그녀의 종용으로 옷을 갈아입고 면도를 했지만 여러날 술과 이름없는 절망으로 지샌 날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눈빛만 매섭도록 형형한 채로 그가 가족과 친구 사이에 마치 이방인처럼 앉아있다는 것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 않아도.

‘녀석의 문제가 뭐냐고? 병에 걸렸지, 아마도.’

니키아스 오빠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다시 울린다.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이 도시가 그의 병이야.’

불빛이 보석과 실크에, 대리석과 마호가니에 영롱하게 빛난다. 사람들의 미소와 웃음이 공기중에 반짝이고, 창밖으로는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역사처럼 길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가, 그녀가 나서 자란 도시 루키아노플은 부모의 피만큼이나 진하게 그들의 피에 흐른다. 그의 존재와 영혼에까지 뿌리내린 것이 병이라면 어떻게 나을 수가 있을까.

‘결국은 녀석이 스스로 결정할 거야. 남이 해줄 수 있는 몫이야 뒷수습 정도지.’

니키아스 오빠의 눈빛은 심각했고, 그녀를 위한 아픔을 마주볼 수 없어 에이레네는 등을 돌렸었다.

‘에이레네…’

“에이레네 영애, 어떻게 생각하나요?”

꿈에서 깨어나듯 에이레네는 현실 대화의 흐름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오른쪽 다섯 자리 건너편은 애써 쳐다보지 않는다.

그때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대화의 매끄러운 흐름을 끊는다.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있는 에이레네는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그 시선을 따라간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의자와 함께 넘어졌던 라이산드로스는 누가 도와주기 전에 혼자 비틀비틀 일어난다. 남의 고통과 추락을 집어삼킬 듯 탐욕스러운 호기심의 눈빛 속에서, 그는 혼자 연회장에서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으면서도, 악의와 연민어린 시선을 막아주고 그 지친 어깨를 보듬고 세상 어떤 일에도 함께 맞서고 싶으면서도 에이레네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연회와 예의바른 대화로 돌아온다. 아무리 (아끼고 갈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눈물 흘리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생각해도 사람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세상의 차가운 진실을 느끼며. 벽난로의 불길을 피한 가을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늦가을

“많이 내리는구나…”

낡은 저택의 지붕과 창문에는 비가 세차게 때려온다. 빈민 병원으로 개조한 저택 복도를 걷다가 에이레네는 잠시 창가에 멈춰서서 비오는 잿빛 정경을 내다보고 있다. 비틀거리는 노인이 아들과 부인인 듯한 사내와 노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정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페트라 부인–아니, 마리아 클레멘티아 원장님께 얘기해서 새 침대를 준비시켜야겠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시선은 도시의 지붕과 수도원의 첨탑, 성 테레지아 돔을 지나 서쪽으로 향한다. 그 너머에 있을 평원과 산과 바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와 수로와 안개의 도시를 향해.
그는 슬퍼하지 말라고 했고, 에이레네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웃었었다. 집에 돌아와 밤새 통곡할 때까지는 잘 참을 수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던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랬었기를 바라는 것뿐일지도. 라이산드로스가 도시를 떠난 날은 온 세상이 잿빛으로 차가워져서 해조차 나지 않는 것이 어울렸을 테니까.
아무리 베개로 입을 막아도 소리가 새어나왔는지 결국 니키아스 오빠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너 정말 이럴 거면 세레니아로 따라가라, 부모님이 반대해도 내가 집안 사병 다 때려눕히고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소리를 질렀었다. 흘리지 못하는 눈물이, 친구와 동생을 위한 아픔이 묻어나는 거친 목소리로.
에이레네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었다. 니키아스 오빠가 어떻게 삼백 명의 병사와 한꺼번에 싸울지는 차치하고라도 그녀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부모님이 계셨고, 오빠가 있었고, 친지들이, 그녀의 도시가 있었다. 등을 돌려 기다리는 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던 그 사람의 병, 그녀의 삶이 모두 이곳에…
그 모든 것을 뿌리뽑는 것은 그도 원하지 않았고, 그녀도 원하지 않았다. 라이산드로스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만을 바라보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와 그녀의 도시라는 병을 피해 떠난 그에게 도시를 고스란히 가지고 쫓아가 괴롭히며 사랑을 구걸할 만큼 비굴하지는 않았다.
그저 많이 아팠다. 아주 많이.
뿌리가 뽑힌 풀은 죽고, 태양이 없는 풀도 죽는다. 그래서 자라는 토양과 햇빛이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 진퇴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뿌리를 선택했지만, 온통 어두워진 세상에서 햇빛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죽어갔다. 그 하룻밤 이후에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성당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집에 와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연회에 나가 가만히 앉아있고, 집에 와서 잠들지 못하고 늦게까지 책을 보며 천천히 시들어갔다. 죽어가는 가을의 풀처럼.
이전에는 그녀의 가정교사 페트라 부인으로 알고 있었고 이후 루키아노플의 카미노회 수녀가 된 마리아 클레멘티아 수녀가 어느날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에이레네는 알 수 없다. 니키아스는 코웃음을 치면서 네가 회복할 준비가 되어서 그랬던 거라고, 마리아 클레멘티아 수녀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에이레네의 생각은 다르다. 이미 필사적으로 햇살을 찾고 있었다고 해서 틈새를 열어준 사람의 공이 덜할까?
마리아 클레멘티아 수녀는 에이레네가 그간 흘려보낸 세상 이야기를 넉넉하고 따스하게 웃으며 들려주었다. 누가 아이를 낳고, 누가 결혼했고, 어디에는 새로운 극장을 짓고 있고, 그 앞에서는 설교사가 극장은 죄라고 설교하고 있고… 부모님 혹은 니키아스 오빠가 보낸 것이 틀림없는, 그러나 변함없이 반가운 옛 가정교사가 들려주는 얘기들에 에이레네는 자신이 도시를 얼마나 아프도록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마리아 클레멘티아 수녀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수녀회에서 빈민 병원을 세우려고 하는데 부지와 자금이 만만찮다는 언급을 했고, 에이레네는 마침내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드는 틈새를 발견했다. 살아갈 이유를.
도시 동쪽에 있는 가문의 낡은 저택을 수리해서 병원으로 기증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에이레네는 마침내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나중에 니키아스는 예의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게 정말 지나가는 언급이었겠느냐고, 네가 마리아 클레멘티아 수녀를 수녀원장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지만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에이레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 빛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아니 어렸을 때 돌봐주고 가르쳐준 보답만으로도 이 병원은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매일 마차를 타고 저택을 수리하는 현장을 들러보며, 완공 이후에는 생각날 때마다 환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게 음식을 가져오고 일도 하면서 에이레네는 다시 밤에 푹 잠들 수 있었고,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종종 라이산드로스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웃으며 보무 당당하게 그녀에게 돌아오는…
“어머나 아가씨. 그건 저 주세요.”
정신을 놓고 창가에 서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오자 에이레네는 흠칫 놀란다. 그러는 사이 이곳에서 몇 번 만났던 젊고 억척스런 수녀 서원자가–이름이 소피아였던가?–바구니를 냉큼 빼앗아든다.
“아… 아니에요. 할 수 있는데…”
“벌써 손에 상처나셨잖아요. 이렇게 와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데요.”
시선을 따라가자 손가락에 작게 피가 맺힌 데가 보인다. 소피아는 그런 에이레네의 손을 잡더니 포옥 한숨을 쉰다.
“손이 이렇게나 고우니까 상처가 나시죠. 나도 이래봤으면… 동여매드릴 테니까 비 더 내리기 전에 들어가세요. 아까부터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손을 이끌려 복도 한쪽 방으로 들어가며 에이레네는 자기 손을 잡은 크고 따뜻한 손을 내려다본다. 수녀회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도 아마 농촌에서 노동한 흔적이 역력한, 거칠고 마디가 굵은 손. 자신도 이렇게도 아름다운 손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하루 정직한 노동을 쌓아가며 원하는 내일을 끈질기게, 꾸준히 만들어가는 손이었으면.
라이산드로스가 그녀에게 돌아올, 그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날을 만들 강인함이 그녀에게 있을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창밖에 몰아치는 차디찬 비를 돌아보며 에이레네는 말 없는 기도를 올린다.
한여름
“…나한테 그런 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너 말고.”
무심코 말하자마자 라이산드로스는 멈칫하며 제자리에 굳어버리고, 에이레네는 (오랜 경험으로) 발을 밟히기 전에 재빨리 빼며 그를 마주본다. 음악은 여전히 공중에 부드럽게 흐르지만 둘의 춤은 그 한가운데 정지해 있다. 누군가가 너무 정직해서 그 흐름을 깨버렸기에.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산드로스는 창백해진 채 그녀를 내려다본다. 열린 창으로 정원의 푸른 내음이, 여름의 향기가 은은하게 흘러든다.
조용히 서서 그를 올려다보며 에이레네는 자신이 방금 사랑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곰씹는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꿈과 염원의 얼굴이었던 남자에게는 처음이다.
아프도록 가슴이 뛰어야 할 것도 같지만, 눈물이 흘러야 할 것도 같지만 이 고백은 달콤쌉싸름한 맛이다. 소녀처럼 마냥 좋아하기에는 흐른 세월이 길고, 긴 밤이 많이 흘렀다.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무심결에 내뱉은 고백에 울며 그의 품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어떻게 될까? 그녀는 그를 지켜보며 어떻게 할지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익숙하다.
창백해졌던 얼굴이 빨개졌다가 뭔가 중얼거리며 라이산드로스는 황망히 돌아서서 손님들을 헤치며 달려나간다. 무도회장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의 발소리가 순간의 침묵 속에 크게 울린다. 그리고 가만히 선 에이레네에게 시선과 속삭임이 몰리지만, 에이레네는 다시 기다린다. 이 순간의 불확실성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여 고요한 중심을 만들며.
남자에게 저렇게 겁을 주다니 에이레네가 성벽 위에 서면 루키아노플은 천하무적이라는 스틸리안느의 농담에 청년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야만인 땅에 유학 다녀오더니 젊은 라스카리스가 이상해졌다는 수근거림도, 측은하게 돌아보는 시선도 인식은 하지만 개의치는 않는다. 그녀의 안에 있는 깊고 편안한 침묵을 흩뜨릴 만한 것은 이 방안에는 없다. 그녀의 삶이, 세계가 위태위태한 중심을 잡은 채 어느 쪽으로든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이 순간 속에는.
그녀만큼 태연한 유일한 사람인 니키아스는 방을 느긋하게 돌며 빈 와인잔을 채우고, 잔이 없는 사람에게는 잔을 건넨다. 와인이 떨어지자 최고급 와인을 직접 시킨다. 너무 낭비가 아닌가 에이레네는 순간 생각한다.
급박한 발걸음이 밖의 복도에 울리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오른손은 주먹을 꼭 쥔 채로 라이산드로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얼굴은 벌개져서 그녀에게 다가온다. 홀린 듯 지켜보는 손님들은 그의 앞에서 예언자 앞의 바다처럼 갈라지며 길을 비켜준다.
“에이레네 콤네니아 두카이나 안겔리아.”
다가오며 점점 냉정을 되찾는 그에게는 이제 당혹감도, 무안함도 없다. 그저 감정마저 넘어서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을 뿐. 그녀 역시 아픔과 한숨과 흔들림을 넘어 이 확신에까지 도달하기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그 역시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고 얼마나 칼날처럼 아픈 순간들을 넘어 여기까지 왔을까 생각하자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자신의 마음을 알기까지, 거울에 비친 얼굴에서 마침내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성장의 길을 오랫동안 각자 걸어 그들은 이 교차로에 왔다. 그녀와 그의 길이 만나는 곳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는 꽃다발을 내민다.
“저와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꽃다발을 받아든다. 그가 주먹쥔 손을 펼쳐보이자 손바닥 위에는 반지가 반짝인다. 모든 길이 만나서 영원한 하나가 되는 원이.
그리고 그 답은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감정의 허영도 아니기에, 설레이고 눈물 흘리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살아온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옳건 그르건 스스로 내린 결론이기에 그녀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왼손을 가만히 그의 손에 얹는 동작은 아주 오래 떠나있던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다.
“물론이에요.”
라이산드로스가 그녀의 손등에 마치 부서질 듯 소중히 입맞추고 천천히, 거의 경건하게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자 니키아스 오빠가 목소리를 높인다.
“두 사람을 위하여!”
가득 찬 와인잔을 치켜드는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축배 속에서 라이산드로스와 에이레네는 둘만의 고요 속에 조용히 마주본다. 그 눈빛 속에는 평생 불행은 한 점 없을 것이다 같은 바보스럽고 절박한 약속은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도 있고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도 있겠지만, 그 속에서도 당신에게는 기댈 수 있으리라 믿는다는 신뢰뿐. 에이레네는 그를 천천히 끌어 일으키고, 그는 그녀를 말없이 가득 끌어안고, 그녀는 편안한 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댄다.
그리고 물론 그들은 온 도시가 축복하는 앞에서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혼인식을 올렸고, 온 도시에 울리는 종소리와 환호하는 군중 앞에 그들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신 앞에 서약했다. 마치 좋은 책에 붙이는 후기처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예쁜 장식. 그리고 그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고 영혼이 시험에 들 만큼 아프지 않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렇게 정의한다면 진짜 행복은 죽은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밖에 없지 않을까.
겨울.
다시 피가 나고 있다. 옷에 젖어오는 축축한 금속성 차가움과 등골을 예리하게 찌르는 아픔은 반갑지 않은 지인처럼 친숙하다. 여자가 걷는 출산이라는 칼날의 한쪽 면은 무한한 기쁨, 다른 한쪽은 고통과 죽음이다. 자신이 잘못 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가문의 딸이어서? 최고의 의사와 주의깊게 지켜주는 식솔들이 있으니까? 남편의 사랑을 받으니까? 그래서 불행은 자신을 피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어떤 오만인가.
아니, 오만은 아니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말한다. 바람이었을 뿐. 움막에 살든 궁전에 살든 누구나 희망의 모양은 비슷하다. 건강하게 잘 태어나 튼튼하게 자라주었으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리고 살해당하지 않아주었으면…
비오는 밤에 길가에 누워 친구의 품안에서 차디차게 식어가지 않았으면. 않았더라면. 막을 수만 있다면. 되돌릴 수 있다면. 혼자 흘리는 눈물은 피만큼이나 익숙하다.
가끔은 이것은 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쁜 꿈이어서 아침에 오빠에게 얘기하면 무슨 헛꿈을 꾸느냐고 웃어버릴 거라고. 혹은 일어날 일의 예지몽이어서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오빠는 반란을, 자신은 계단의 가장자리를. 이미 일어나서 되돌릴 수 없는 일만은, 오 자비로운 주여, 그것만은.
어째서 불행이 너만 피해가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변명. 생각은 쳇바퀴처럼, 결혼반지의 원처럼 끝없이 돌고 돈다.
태어나지 못한 불쌍한 아들은, 그녀가 꿈에서 분명히 보았고 외삼촌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그 아이는 핏덩이 그대로 땅에 묻혔다. 그녀의 오빠는 온몸을 적신 핏물을 씻어내는 빗줄기 속에서 절명했다. (그 어둡고 추운 밤에. 비가 그리도 찼는데, 오빠, 오빠. 한 번만 더 얘기했으면. 한 번만 더 그 손을 잡았으면. 그러나 이제는 아무데도 없다.) 피와 이름으로 이어진 두 명의 니키아스는 하룻밤 사이에 기억만을 남기고 영원히 사라졌다.
남편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친척 아주머니는 좋은 남편 있고 나이도 젊은데 기운내라고 위로했다. 수녀님은 두 사람은 쟈드의 영원한 자비 속에 이제 행복하니 마님도 위안을 찾으셔야 한다고 했다. 모두 맞는 말이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괜찮지 않다. 따뜻한 햇살처럼 쏟아지는 그의 사랑 속에서도, 쟈드의 자비 속에서도, 주변의 걱정과 애정 속에서도 이 아픔은 조금도 덜하지 않다. 눈물이 덜 쓰리지도, 출혈이 덜 아프지도 않다. 언젠가는 지나가겠지.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프지 않다고, 혹은 아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아파도 이것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언젠가는 지나갈,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상처를 영혼에 남기고 지나갈.
묘하게도 이런 때에 어떤 사랑의 말보다 도움이 된 것은 날카로운 비웃음이었다. 친지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주던 하녀가 문득 멈칫했을 때, 팔레오로고스의 인을 놓치지 않은 그녀는 편지를 등뒤에 감추는 하녀에게 직접 읽게 달라고 했고, 마님이 다칠까봐 숨넘어가게 불안해하는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부당하게 편지를 강탈했다.
에이레네 부인께,
뭐라고 위로할 말씀이 없습니다. 결혼 5년만에 생긴 아이가 잘못되었으니 난 안 될 거라거나, 나이가 많아서 이미 틀렸다는 생각은 부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라비틀어지고 늙은 포도나무에도 열매가 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권능이거늘, 하물며 부인이겠습니까. 몸을 충분히 회복하시는 대로 약재를 들고 찾아뵙겠사옵니다. 아무리 가망이 없는 경우에도 자녀를 내린다는 기적의 약이랍니다.
부인과 부인의 가정에 쟈드의 축복과 자비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스틸리안느 팔레오로가 올림.
순간 뜨거운 것이 속을 훒고 지나간 에이레네는 이내 그 분노로 얼마나 기운이 나는지 깨달았다. 스틸리안느가 미소하고 춤추고 재담을 던지며 살아가고 있는 저 바깥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지도 새삼.
울상이 된 라이아에게 에이레네는 편지를 태우라고 지시했다. 남편이 스틸리안느 팔레오로가를 죽이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
창밖에는 창백한 햇살이 그득하고, 멀리서 웃음소리와 고함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누가 죽든, 누가 슬퍼하든 삶의 흐름은 끝이 없었다. 아픔을 두려워하며 피하느냐, 그 한가운데 뛰어드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그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고, 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리며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삶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기로 결정했기에 그녀는 비할 데 없이 애틋한 달콤함과 나락의 고통을 맛보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포기하기에는 삶은 너무나 짧으니까.
결혼 반지에 가만히 입맞추고 되도록 편안히 기대누워 그녀는 이 겨울의 끝을 기다린다. 인고의 겨울 끝에 올 기쁨의 봄을, 삶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다해 부른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사랑하는 사람들

1181125289.html

요약

니키아스의 난이 끝난지 며칠 후, 플로리앙과 싸웠다가 화해한 네야는 새벽에 그의 숙소로 잠입(!)합니다. 그리고 얘기를 나누면서 플로리앙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설명하지요. 플로리앙은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는 결정의 무게를 네야에게 같이 지우기 싫었다고 실토하고, 네야는 플로리앙이 용병대장으로 있는 것은 부하들이 플로리앙 없이는 못 살아서가 아니라 부하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자신을 상황의 피해자로 여기지 말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행복해 하라는 말에 플로리앙은 네야에게 마음을 열 수 있게 됩니다.

감상

사실 이 외전의 시초는 외전 직전에 이방인님과 나누었던 MSN 대화입니다. 네야가 하쉬르에게 집적거리는(?) 외전과 스토리에 대해서 이방인님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셔서, 제가 생각하기에 네야가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를 설명한 후에 그 부분을 해소하는 외전을 하기로 했죠.

그 결과 처음 생각한 것보다 네야가 많이 성숙한 인물이 되기는 했지만 (플로리앙과의 관계에서 엉킨 부분을 풀지 못하고 하쉬르에게 위안을 구하는 어린 드라마퀸 대신 자신의 감정과 고민을 정확히 알고 플로리앙과 대화로 푸는 모습), 그게 ‘밝고 통통 튀면서도 지혜롭다’는 네야의 설정에 나름 어울리기도 해서 괜찮았습니다.

다만 이방인님을 배려하느라 이번에는 아군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느낌이라 아쉽습니다. 물론 이방인님과 달리 아군은 이 문제에 대한 감정적 애착이 별로 없었고, 또 처음부터 네야는 플로리앙 상대로 만든 인물이었으니 삼각관계 플롯은 없어지는 쪽이 옳았다고는 생각하지만요.

그리고 이방인님 말씀과는 달리 저는 이건 승패하고는 무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플로리앙이 하쉬르보다 잘나거나 못나거나 해서 나온 결과는 아니니까요. (오히려 못나서 나온 결과일지도…? (…)) 서로 배려하고, 극적 흐름과 인물 감정선을 조정해서 낸 결론일 뿐이죠. 진행자 입장에서 참가자 혹은 주인공 사이에 승패를 저울질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결국 이번 대화와 외전을 통해 다시 깨달은 것은 플레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와 대화라는 평범하고 당연한 원칙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배려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잊기 쉬운 점이 배려의 어려움이기도 하다는 걸요. 이래서 인간관계는 RPG의 근본에 있고, 또 삶 자체에도 너무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죠. 이 사안 자체야 뭐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만요.

개인적으로 네야가 플로리앙에게 하는 충고는 제가 종종 하는 (혹은 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상황의 피해자이고 모든 게 괴롭기만 한양 마음을 토로하고는 하지요. 하지만 실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상황에 있는 게 아니라 원해서 있는 것이고, 그 선택과 상황에는 행복이 있다는 점은 순간순간 잊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많이 괴로운 순간에는요.

그런 때에는 지금의 상황이 많은 경우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떠나는 선택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기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보통은 떠날 수 있더라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친구, 연인, 가족–곁에 있는 행복이 너무 크기에. 불편은 불편이고 불평은 불평일 뿐, 지금의 행복을 가릴 만한 불행이 되는 일은 드물지요. 그게 어쩌면 어렵고 복잡한 인간관계의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인 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