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포도원의 제다이 세션은 소년H님이 못 오셔서 전에 구상했던 외전 플레이를 했습니다. 단순한 외전이 아니라 플레이 형태 자체가 달랐지만요. 각 참가자가 함대 하나의 역할을 맡아서 함대를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규칙으로 제작한 후, 갈등 판정으로 대규모 전투를 처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도전이 예를 들어 ‘제다이 돌격대를 내보낸다’라면 응대는 ‘아군 함선을 조우 경로로 보낸다’ 하는 식이었죠.
물론 이것만으로는 밋밋하니까, 그 도전과 응대의 인간적·극적 결과를 표현하려고 ‘줌인’ 기법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위의 예에서 사령관이 제다이를 출격시키는 결정을 내렸으면 거기서 장면 전환을 해서 출격을 기다리는 제다이들의 모습을 연기한다든가. 이러한 줌인 장면에서는 각자 인물을 즉석에서 만들거나 골라잡아서 자유롭게 RP했습니다. 줌인 장면의 향방은 도전과 응대 결과를 참조해서 같이 결정했고요.
전투는 엑자르 쿤의 전쟁 중 센타레스 주변에서 벌어진 센타레스 전투였습니다. 캠페인 설정에 있는 과거의 사건이어서 이미 있는 설정과 어긋나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죠. 일단 센타레스 전투는 공화국이 승리했다는 설정이었는데, 주사위를 굴려서 규칙대로 판정하다 보면 시스측이 이길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갈등 판정 개념을 살려서 ‘승리’가 무엇인지 규정하면 끝. 의논 끝에 공화국이 센타레스 성역을 차지하는 것은 어느 쪽이 이기든 마찬가지이되, 판정의 결과에는 다른 것을 걸기로 했습니다. 시스가 판정에 이긴다면 소모전으로 공화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공화국군이 판정에 이긴다면 적은 피해만으로 센타레스를 통과해서 기다리는 다른 함대와 합류한다고 말이죠. 즉, 센타레스를 공화국이 차지한다는 결과는 아예 판정에 걸지도 않았습니다. 이로써 억지로 규칙을 비틀어서 ‘바람직한’ 결과를 낼 필요 없이 마음껏 판정할 조건은 갖춰졌죠.
혼자 구상할 때는 나름 재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플레이 방식이었는데, 실제 해보니 그 효과는 정말…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규모감과 박진감에 셋 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꼬박 10시간을 앉아, 결국 우주전 하나를 시작부터 끝까지 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러버렸어요. ;ㅁ; 끝나고 나서 다들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서는 감동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죠. 사실 이게 RPG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뭔가 ‘엄청나게’ 놀았다는 기분이었습니다.
보통 플레이 기록 정리할 때 잡담은 빼는데, 센타레스 전투는 아무 준비 없이 플레이의 모든 것이 저 ‘잡담’에서 나왔기 때문에 도저히 뺄 수가 없더라고요. 플레이 외 대화는 잿빛 배경으로 처리했고 안 보이게 끄는 컨트롤도 달아놓았습니다. 버튼 자체도 보이고 안 보이게 조절할 수 있고요. (ActiveX니 어쩌니 하는 익스플로러의 사기를 믿지 마십… 약간의 DHTML밖에 없는데. 위험하고 불편한 ActiveX는 MS 지들이 하지 내가 하나..ㅡㅡ++)
워낙 기니까 크게 3부로 나누어서 대체로 주요 대목별로 구분했습니다. 앞으로 각 부별로 천천히 요약을 올리도록 하지요.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주 (序奏)
1부: 개전의 포화
(1) 폰을 움직이다
(2) 젊은 파일럿에게 축배를
(3) ‘어쩔 수 없는 것’의 의미
2부: Kings and Queens
(1) 킹을 노리다
(2) 포스가 함께하기를
(3) 퀸을 움직이려면
(4) 목표 수정
(5) 체크메이트를 향하여
(6) 죽은 영웅, 산 청소부
(7) 폭풍이 다가오다
(8) 넷 러닝
(9) 사냥을 시작하다
(10) 사냥감 사냥꾼
3부: 난류 (亂流)
(1) 반격
(2) 반전
(3) 신뢰
(4) My Pace
(5) 결투
(6) 누구의 체크메이트?
(7) 나이트를 위한 만가
에필로그
뭐 이게 왜 이렇게 재밌었는지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일단 셋이서 상당히 손발이 척척 맞았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서로 떠오르는 발상을 활발하게 교환하면서 연출도 구성도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나오는 상승 작용도 상당했습니다. 사실 많은 인디 RPG가 그렇듯 포도원의 개들 규칙책도 이런 식으로 플레이할 것을 권장하는데, 보통은 제가 의견을 구해도 별로 의견이 나오지 않는 느낌이었거든요. 근데 이번은 진짜 백지상태로 들어가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플레이 내용이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굉장히 좋은 발상들이 끝도 없이 나와서 플레이를 풍부하게 만들었죠.
본 캠페인의 사건이나 인물과 이런저런 연관이 들어간 것도 굉장히 다층적인 극적, 감정적 의미를 더했습니다. 몇 년 후면 카론에서 죽을 다쓰 프리아트가 살아서 펄펄 날뛰는(…) 모습이라든지 (1부 (1) ‘폰을 움직이다’ 이하 다수), 캠페인 최초로 등장한 다쓰 세데스의 무시무시한 존재감 (3부 (5) ‘결투’ 등), 센타레스 전투가 설정에 나온 이유였던 칼레나 할라크의 죽음 (3부 (7) ‘나이트를 위한 만가’), 전장에서 아주 짧게 스쳐간 베오나드 코티에르와 자락스 토레이 사이에 싹틀 반목에 대한 암시 (2부 (10) ‘사냥감 사냥꾼’), 소년 시절에도 이미 극도의 기술적 재능과 신비한 인도자의 존재라는 두 세계를 오가는 센의 모습 (3부 (4) ‘My Pace’) 등.
캠페인 주요 인물들 외에도 이번 플레이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들도 인상깊었습니다. 젊은 공화국 파일럿들의 즐거운 모습과 가슴 아픈 죽음 (1부 (2) ‘젊은 파일럿에게 축배를’), 점령지에서 징발당해 소모품 취급받으며 죽어가는 시스 군인들 (1부 (3) ‘”어쩔 수 없는 것”의 의미’), 니모 선장 주제곡이 너무 잘 어울렸던 공화국 측 사령관 르베리에 제독 (2부 (1) ‘킹을 노리다’, 3부 (3) ‘신뢰’ 등), 시스 군 휘하 별동대원들의 왁자지껄한 동료애… (2부 (6) ‘죽은 영웅, 산 청소부’) 줌인 장면 동안 셋이서 어림잡아 스무 명 안팎의 인물을 잡으면서 우주전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상당히 폭넓게 조명한 점이 규모감 표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을 만들려고 있는 규칙을 즉석에서 집단에 적용하다 보니 특히 인간관계 부분이 애매했는데, 이것을 ‘외부 상황’ 정도로 얼버무린 결과 시스 군대를 ‘복잡한 공동체’ 배경으로 만든 의미가 좀 희석된 느낌도 들더군요. 복잡한 공동체 배경에 압도적으로 많은 인간관계 주사위는 군대에 얽힌 복잡한 인간관계와 알력들이 나올 때 사용해야지, 주변 지형물이나 숨겨둔 별동대까지 들어간 것은 지금 생각하면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두 지휘관 사이의 알력이나 시스에 대한 공포 등은 잘 어울렸고요. 생각해 보니 자기폭풍 같은 주변 상황 이용은 즉석 장비 규칙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였는데 하고 뒤늦게 후회중..(…) 그렇게 하면 자꾸 주변 환경을 끌어들이는 도전과 응대를 유도하기 때문에 서술도 더욱 입체적이고 창의적이었을 테고요.
그 외에 처음 시작한 1부는 아무래도 모두 생소한지라 다소 무리가 보이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1부 (2) ‘젊은 파일럿..’에서는 젊고 유쾌한 파일럿들의 희생을 유도하느라 논리적으로는 제가 약간 억지를 썼죠. 그냥 정석적으로 적 파일럿과 도그파이트하다 사망..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그 외에 자꾸만 인물이 바뀌다 보니 나중에는 누가 얘기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점은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부분은 말머리를 붙이거나 누가 얘기한다고 서술해서 간단하게 해결했지만요.
기록을 읽으면서야 알았는데, 자꾸만 아카스트님의 의견을 묵살하는 식으로 간 점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의는 아니었는데, 플레이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나 못 보거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그냥 제 생각대로 밀어붙인 데가 꽤 되더라고요. 좋은 의견이 많았는데… 그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흑흑)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단히 즐거운 플레이였습니다. 이방인님은 서로 죽도록 미워하는 두 시스 로드를 플레이하며 정신 건강에 대한 우려를 유발하시는 등(…) 아마 우리 중 제일 다양한 인물을 넘나드는 카멜레온적 괴력을 과시했고, 전투의 구성을 더욱 조이면서도 설정에 어긋나지 않도록 이끈 1등 공신이시기도 했습니다. 아카스트님이 맡으신 르베리에의 대담한 전술은 결국 전투의 중심 갈등을 끌어냈고, 서버가 나갈 때까지 나온 음악 방송은 영화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습니다. 스타워즈 서주 들으면서 상황 설명하는데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로크락 역을 맡아 어린 나이에도 능청스러운 센하고 농담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고요.
무엇보다 아카스트님의 르베리에와 이방인님의 다쓰 프리아트, 두 사령관의 180도 다른 철학과 목적이 전투 전체의 극적 맥락을 끌어가면서 플레이의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야비한 적 앞에서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부하에 대한 애정 사이에 고뇌하는 르베리에의 인간적인 모습, 전쟁을 체스 게임처럼 생각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적과 아군 모두를 파괴하는 다쓰 프리아트의 냉혹함…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공화국의 이상과 시스의 철학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이기도 하고 (뭐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단서는 늘 붙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본 캠페인의 주제와도 닿아 있지요.
어쨌든 여러모로 제가 참가자 복 하나는 진짜 많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드는 플레이였습니다. (사실 제가 이 플레이의 진행자였는지도 애매한 문제… 일단 이걸 RPG라고 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니까요.) 좋은 플레이 함께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리며, 길면서도 박진감 넘쳤던 이 장대한 플레이에 대한 감상을 일단 접습니다. 정말 캠페인 하나쯤 마친 느낌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