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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7화 (5): 걸맞는 죽음

“무슨 일인가!”

지카리는 의무실 문을 열고 문 꼭대기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그런 그의 뒤로 아라가 서둘러 들어왔다.

“해독제는 찾았지만 발작이 심합니다.”

하얀 작업복을 입고 수염을 천에 말아 감아놓은 드워프가 침착하게, 그러나 한가운데 병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침대
위에는 랜돌프가 척 봐도 극심한 고통에 떨리는 몸을 뒤틀고 있었다. 상처인지 토혈인지 하얀 침대보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떨쳐버리고,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드워프
치유사의 차분한 설명은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해독제 투여일을 너무 많이 늦춘 데다가, 창고를 뒤지는 동안 진통제로 발작을 눌러놓은 것이 오히려 도졌군요.”

“무슨 일 처리를 그렇게…!”

아라가 언성을 높이자 드워프는 그녀를 조용히 마주보았다.

“투여 날짜를 놓친 것은 우리 쪽이 아닐 텐데요?”

랜돌프는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비명도 아닌 끄윽…거리는 신음을 내지르며 침대보를 찢어지도록 세게 쥐었다. 주변의 하얀 옷 입은
치유사들은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노예사냥꾼을 어떻게 살리느냐겠지요.”

랜돌프를 잠시 보다가 치유사는 덧붙였다.

“살리고자 한다면.”

“그는 대원으로서 충실히 활동해 왔네.”

지카리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은 걸맞는 죽음이 아니야.”

“지카리공이 잡아주시겠습니까?”

아라가 그에게 물었다.

“경련이 심하지만, 공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해보겠네.”

고개를 끄덕이고 지카리가 침대로 다가가는 동안, 연청색 액체가 찰랑이는 투명한 병을 든 치유사 조수가 드래고니안을 따라갔다. 그
뒤로 아라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지카리의 손이 닿자 랜돌프는 완강히 저항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지카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고하게 그를 앉혀 뒤에서 양팔을 붙들고
몸을 고정시켰다. 몇 번 더 몸부림치다가 랜돌프는 헉헉거리며 몸이 처졌다.

그러나 조수가 병을 들고 다가가자 그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발버둥을 쳤다.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젖히고 먹이려 하자, 그는 병이
닿는 순간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머리를 잡은 손에서 벗어났다. 해독제가 몇 방울 이불보 위로 쏟아지자 조수는 황급히 병을
바로잡으며 물러났다. 바로 세우자 병은 뚜껑이 저절로 닫히며 액체가 쏟아지지 않게 막았다.

“이런 식입니다.”

아라 옆에서 치유사가 감정 없이 말했다.

“그렇다고 수면제를 더 주었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즉, 책임전가인가.”

아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드워프는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

“낯선 사람보다는 동료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지카리의 팔에 랜돌프가 가만히 붙잡힌 모습을 눈짓하고 아라를 올려다보았다.

“해보시겠습니까?”

“모르는 사람보다 나을 지는 모르겠다만…”

아라는 쓴웃음을 짓더니, 조수에게 손을 내밀어 병을 받았다.

“해독제는 얼마 없습니다.”

치유사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있었다.

“창고에서 찾아낸 것은 그게 다입니다. 더 찾아보라고 지시는 해놓았지만…”

아라는 병을 들고 침대에 다가갔다. 눈만 희번득거리며 가끔 고통스럽게 경련하는 랜돌프를 그녀는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꼴사납구나, 다사케타. 인사불성이라니.”

그녀는 그의 머리에 손을 뻗으며 병을 그의 입술에 가져갔다. 기울이자 병은 뚜껑이 열렸지만, 랜돌프가 진저리를 치자 아라는
쏟아지기 전에 병을 도로 세워 뚜껑을 닫았다. 물러나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숟가락을 달라고 해서 맑은 연청색 해독제를 조심조심
덜어냈다.

“쏟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치유사의 경고에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궁수다.”

아라는 병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숟가락만 든 채 다시 접근했다.

“손이 떨릴 일은 없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를 밀자 랜돌프는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다. 그녀는 그의 입에다가 숟가락으로 해독제를
흘려넣었다.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자 몇 방울이 턱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무심코 그의 머리를 잡았다. 그는 거의 짖듯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연청색 방울이 공중에 흩날려 침대보에 투둑 떨어졌다.

“더 이상의 손실은 안 됩니다.”

드워프 치유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으로 잠재우거나, 더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서…”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라는 뒷걸음질쳐 숟가락을 병 옆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다시 재웠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소?”

치유사는 손을 펼쳐보였다가 떨구었다.

아라는 대답 없이 랜돌프를 내려보다가 빈손으로 다가섰다. 그는 기도가 막히는지 쌔액쌔액 힘겹게 공기를 빨아들이며 눈만 굴려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구석에 몰린 짐승 같구나.”

그녀는 다크엘프어로 낮게 말했다.

“두려우냐, 인간 아이야?”

그녀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이마에 갖다대었다. 잠시 벗어날 듯 몸을 틀다가 그는 지친 기색으로 이마를 손에 기댔다.

“이해할 수 있다…”

아라는 속삭였다.

“나도 그러니까.”

이마에 얹은 손을 천천히 옮겨 아라는 그의 뒤통수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갖다댔다. 에디우스는 놀라서 순간 굳었다가 짧은 고함을 내지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는 내내 입술을 대고 있다가 아라는 그가 조용해지자 다시 허리를 펴고 내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창백하게 땀에 젖은 채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뒷통수에 축축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며 아라는 턱을 받친 손을 떼어 침대가 탁자에 대고 저었다. 치유사 조수가 서둘러 병을
집어드는 동안 지카리는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니아카…?”

아라는 치유사가 건네주는 병을 받았다.

“대신 하실 분을 구해도…”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맡아주실 분이 없겠지요.”

“훌륭하게 하고 있으니 계속하시지요.”

치유사는 헛기침을 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거의 동시에 다른 치유사와 조수들도 무심코 물러났다.

“이래서 아는 분이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입술이 없는 데다가…”

지카리는 날카로운 이빨이 길게 줄지은 주둥이를 벌리며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긁는 소리를 냈다.

“랜돌프를 잡고 있어야지 않겠나.”

눈썹을 치켜들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아라는 병을 기울여 해독제를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옆에서 기다리는 조수에게 병을 건네주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랜돌프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녀는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포갰다. 턱과 목을 주물러서
그가 약을 꿀꺽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아라는 다시 손을 뻗어 해독제 병을 받았다.

다섯 번 반복했을 때쯤 랜돌프의 얼굴에는 조금씩 화색이 돌았고,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채 지카리에게 기대어 늘어졌다. 아라는
병에 조금 남은 해독제를 그의 입안으로 흘려넣고 마지막으로 턱밑을 주물러 삼키게 했다. 치유사의 손짓에 지카리는 랜돌프를 놓고
침대에 눕히는 것을 거들었다. 침대 발치로 발과 발목이 비어져나온 채 환자는 가볍게 기침하다가 축 늘어져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호흡했다. 그 위로 치유사 조수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제 몇 시간 쉬고 깨어나면 괜찮습니다.”

치유사가 랜돌프의 눈을 까뒤집어 보며 말했다.

“체력은 좀 회복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정상이지요.”

“무슨 일이 또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아라는 기운없이 말하고 돌아섰다. 지카리의 묵직한 걸음이 의무실에서 그녀를 따라나왔다.

“솔직히 좀 의외로군.”

의무실 복도로 나와서 그가 말했다.

“랜돌프를 싫어하는 줄 알았네.”

“싫어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황망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른 복도로 접어들었다. 환한 등잔이 몇 발짝마다 벽감 속에 빛나는 지하 통로는 통풍도 충분해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햇빛이나 표지물 없이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비현실감이 있었다.

지카리의 커다란 손이 어깨에 와 닿자 아라는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재빨리 손을 떼고 갈고리발톱이 난
손가락으로 다른 통로를 가리켜보였다. 그녀는 목례하고 그가 가리킨 통로로 방향을 바꾸었다.

“만약 그가 배신해서 죽는 것이었다면 저는 맨 앞줄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습니다.”

“동의하네.”

따라가는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끈하게 넓히고 다듬은 곧은 돌 통로에 그들의 발걸음이 울렸다. 아라가 숙소 문을 여는 동안
지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자네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럽군.”

그 말에 아라는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감사합니다. 그저…”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그자에게 아무 말씀 말아주시겠습니까.”

“약속하지. 쉬게.”

지카리의 그녀가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고는 옆방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몸을 한껏 숙여
들어간 뒤 복도는 가끔 등잔이 퍼득거릴 뿐 긴 고요에 빠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무실에서는 세 번째 일행, 겁에 질렸던 맹수가
꿈 없이 어둡고 따뜻하기만 한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소감

죄송합니다 안 죽었어요(?). 역시 로그에는 절대 없는 창작 분량입니다. 원래 로그의 7화에 내용이 더 있는데, 랜디의 독 중독과 그에 얽힌 과거에 초점을 유지하려고 소설본 7화는 여기에서 끊었습니다. 입으로 약을 먹여줘서 낫게 한다…는 발상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는데, 삭풍님과 이방인님 모두 오케이하시니 뭐 까짓거.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위로해줄 따뜻한 접촉을 원하는 랜디의 무의식적 욕구를 표현하는 의미도 있고요. 그럼 이걸로 7화는 끝~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오닉스 7화 (4): 호접몽 (胡蝶夢)

주의: 이번 편에는 성적 폭력에 대한 암시와 언급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그렇게 헤루모르에 도착해 마침내 전언을 무사히 전할 수 있었어요. 그걸로 원래는 끝이어야 했죠.

짧아서 자꾸 발이 빠져나오는 낯선 침대에 누워, 정신이 드는 사이사이 낯선 돌 천장을 올려다보며 랜디는 꿈을 꾸었다.

지금 헤루모르에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알고는 있었다. 거친 산길을 넘어오느라 예정보다도 더 걸려 독이 파먹은 몸은 엉망이었다.
다크엘프가 드워프들에게 그렇게 재촉했지만 해독제는 없거나 아직 못 찾은 듯, 뭘 먹으라고 주기는 줬는데 해독제가 아니라 무슨
수면제나 진통제인 듯 마시고 나니 잠만 쏟아졌다. 해독약이나 대령하란 말이다, 노스탤지아 새끼들아. 이거 계약 위반이야…

다시 돌 천장이 흐릿해지면서 그는 바이포드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뒤에는 브램과 그 패거리가 쫓아오는 소리에 얻어맞은
상처가 다시 쓰려왔다. 이를 악물고 달리던 그는 낯익은 문을 헉헉거리며 열어젖혔다.

삐걱이는 가구 몇 점에 벽은 습기에 변색된 집안에는 부모가 다투는 소리만 들려왔다. 별 감정도 없이 그저 습관적인 의례였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것이냐며 에드레드 아주버님께 편지는 써보았느냐, 던햄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단조로운 푸념에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형님이 사정이 되면 어지간히 도와주시겠느냐, 아무 계획도 없이 던햄에 어떻게 가느냐며 신대륙으로 가보자는
소리로 응대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 위험하고 야만적인 곳을 어떻게 가느냐며 펄쩍 뛰었다. 이 모든 것이 투자를 한다고 속이고
아버지 돈을 가로채 도망간 고트프리드 탓이라는 것만은 두 분은 언제나처럼 의견이 일치했다.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열한 살 랜디는 잘 알고 있었다. 에드레드 숙부는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던햄으로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안힐라스는 더더욱. 고트프리드는 아버지 돈으로 부자가 되어 언제까지고 편하게 살 것이다. 집에 앉아 과거를 그리워하며
남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지 불평하는 정도가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문득 방 구석에 이전의 집기 중 팔지 않은 유일한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점점 허름한 집으로 몇 번이나 이사하면서도 어머니의
고집으로 끌고다닌 무거운 마호가니 찬장, 바로 옆에 선 칠이 벗겨지는 벽과 기우뚱한 탁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검은
광택에 소년은 가슴이 답답해왔다.

“랜돌프 왔니?”

방문이 끼익… 열리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문가에 비쳤다.

“어머니가 지금 몸이 좀 안 좋구나. 점심 챙겨먹을 수 있지?”

요리나 청소같은 일을 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언제나 몸이 좀 안 좋았다. 옆집에 혼자 사는 노파가 보다못해 와서 좀 챙겨주는 때가
아니면 랜돌프는 집에서 더운 음식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예…”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뒷문에 가서 귀를 기울였다. 브램네 패거리는 지나간 것 같았다. 랜돌프는 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 밥을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했다. 노점에서 뭐 하나 훔치거나, 성 메르다 광장으로 가보면 지금쯤 교회에서 뭐 나눠주고 있을 지도 몰랐다.
집에서 멀어지는 랜돌프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가 어느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듯이.

랜돌프는 숲속으로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속을 달려 벌목꾼 오두막촌에 도착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울타리를 훌쩍 짚어넘은 그는
얼기설기 대충 지은 오두막 두 채를 지나 세 채째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가자, 얼간이들!”

열아홉 청년은 놀라서 돌아보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난 오늘부로 이곳에서 벗어난다. 엘프 좀 잡아 보시겠다 이 말이야.”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서 나무나 하면서 썩고 싶은 놈은 남고, 돈 좀 만져보고 싶으면 따라와라.”

그의 동료들은 서로 마주보다가 각자 말없이 결론에 도달했다. 몇 명이 고개를 저으며 벌목나갈 준비를 마치는 동안 나머지는 그에게
몰려와 질문을 던지거나 꼭 끼워주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랜돌프는 득의양양하게 미소지었다. 여기 남아 고되게
일하면서 빚만 쌓여갈 동료들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기회의 땅 안힐라스에서 그 정도로 끝내는 건 낭비였다, 낭비. 아무것도 없이 두
쪽만 차고 내린 놈에게도 야심과 배짱만 있다면 이 땅은 끝없는 가능성을 약속했다. 그 생각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쉭쉭쉭- 양쪽에 추가 달린 끈이 회전하며 날아가 가느다란 다리에 휘감기자 숲속을 달리던 걸음이 갑자기 끊겼다. 여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아씨, 그러게 도망치기는.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라고.”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 옆으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꿇은 랜돌프는 턱을 잡아 살짝 돌렸다. 쏟아지는 연갈색
머리 사이로 눈물에 젖은 우미한 얼굴선을 확인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얼굴은 안 다쳤군. 남편놈도 지하에서 기뻐할 거다.”

그는 단검에 흥건한 피를 털어버리고 풀에 슥슥 닦은 후 단검집에 꽂았다. 여자의 눈물섞인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는 밧줄을
꺼내 그녀의 손목을 묶고, 다리를 동여맨 볼라를 풀어내며 매끈한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10만 골드는 가볍게 나올
상품이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만 밧줄 매듭을 익숙하게 조였다. 이 여린 손목들이 쓸리지 않게 고급 대마
밧줄을 사느라 수익이 다 나간다니깐. 이 정도면 꽤 인도주의적이지 않은가.

“어이, 울지 말라고, 잠깐 고생하면 이런 숲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호사가 평생 기다리고 있으니까.”

랜돌프는 흐느끼는 여자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고, 여자가 경악해서 굳어버린 사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신선한 체취를
들이마셨다.

“뭐라고 지껄여도 너희 여자들은 편하게 사는 게 최고잖아? 난 먹고살고, 넌 호강하고, 서로 좋은 거지.”

몸을 일으키며 그는 씩 웃었다.

“과부 됐다고 걱정은 말고. 가는 길에 충분히 재밌게 해줄 테니.”

그는 초저녁의 어스름이 내리는 숲속을 달려갔다. 숲은 빠르게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워낙 뻔질나게 드나든 길이었기에 잘 안 보여도
얼마든지 뛰어갈 수 있었다. 돌 옆에 고개를 내민 수선화, 개울가에 고개를 끄덕이는 물망초가 눈에 띄자 그는 점점 가슴이 설레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개울을 따라 내리막길로 내려오면서 양옆에는 계곡 벽이 환영해주는 팔처럼 감싸왔다. 라벤더와 별패랭이, 아지랑이꽃의 향기가 따스한
공기를 타고 폐부에 스몄다. 랜디는 걸음을 늦추어서 꽃을 밟지 않게 하나하나 피해, 노래하듯 흐르는 개울을 따라 벨벳처럼 부드러운
풀밭을 걸어갔다.

꽃들 사이로 하나둘 색색의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왔어?” “왔어!” “노래꾼이다!” “거인! 꺄악!”

빛무리 한가운데마다 조그마한 여자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개울의 즐거운 음악에 섞여들었다. 대답 없이 그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그가
평소 즐겨찾는 장소, 개울 옆에 쓰러진 나무가 걸쳐있는 움푹 파인 땅을 찾았다. 이끼로 파란 나무둥치 옆에 주저앉아 바위에 기대자
다시 페어리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날아다녔다.

“노래해줘!” “뭐 가져왔어?” “노래!”

가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페어리를 손을 저어 내쫓고, 노래해달라고 떼쓰며 머리카락을 당기는 페어리를 무시한 채 랜돌프는 바위에
편하게 기대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계곡과 그에 가득 핀 꽃, 그리고 그 위에 춤추는 빛무리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그는 향기로운
공기를 깊이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오 아름다운 포트모어, 빛나는 그 정경
너를 그리면 그릴 수록 생각하건대
네가 예전처럼 나의 것이었더면
아린의 모든 영주라도 빼앗지 못하리

나직한 노래소리에 주변에 페어리들이 날아들어 가만히 앉았다. 그들이 턱을 괴며, 혹은 춤추듯 가볍게 움직이며 지켜보는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그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숲의 새들이 슬피 우는구나
이제 어디서 쉬고 어디서 잘까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베어가고
아름다운 포트모어를 허물었으니…(주:영국 민요 Bonny Portmore 가사 중 따왔습니다. 로레나 멕케닛 버전을 좋아하는데, 유튜브에도 있더군요.)

아름다운 노래였지만 너무 구슬펐다. 여기서 부르기는 솔직히 좀 재수없는 노래라고 생각하며 랜돌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나둘 별이
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풀벌레가 또르륵 또르륵 우는 소리에 섞여 귀찮은 날파리놈들이 웃으며 조잘거렸다. 천화의 계곡에 가득
핀 꽃은 그윽한 향기를 밤공기중에 내뿜었다. 그 한없는 평화 속에 침잠해 랜돌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랜돌프는 풀섶 사이를 달리다가 잠시 웅크려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저기 앞에 또 하나 있었다. 알프 연방 척후를 알아보고 그는
몸을 낮게 낮추며 육박해갔다.

뭔가 느끼고 척후병이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랜돌프는 그의 등허리부터 단검을 찔러 올라갔고, 척후는 몸을 활처럼 뒤로 젖혀
커억거리더니 긴 풀이 흔들리는 풀섶으로 털썩 쓰러졌다.

“세 놈째인가…”

그 순간 쉬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랜돌프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보이지 않는 척후가 던진 단검은 바로 그의 귓가의
나무둥치에 퍽! 꽂혔다. 작은 나무껍질 조각이 얼굴에 팍 튀었다.

랜돌프는 나무 뒤에 급히 몸을 숨기며 풀섶을 살폈다. 저쪽에 작은 움직임이 보였지만, 해치우려면 더 가까이 끌어내야 했다. 들키지
않고 하나씩 처리하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날파리 같은 것들…”

그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네놈들 때문에 죽게 될 줄 알았지.”

알프 연방의 척후대가 천화의 계곡을 발견했을 때 그는 페어리들에게 급히 경고했었지만, 그 멍청한 날파리들은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언제나처럼 실없는 소리나 해댔다. 결국 그들이 소집했던 회의라는 것도 난장판으로 끝나버린 후 랜돌프는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와
척후대를 찾았다. 그들이 천화의 계곡, 페어리가 가득한 금광의 존재를 인간들에게 알릴 수 없도록. 계곡 가득 핀 기화요초를
군화발로 짓밟고, 골빈 날파리들을 잡아다가 날개나 뜯어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을 숨긴 척후가 다가오면서 풀섶이 푸스스… 흔들렸다. 동시에 왼쪽과 오른쪽에서도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그들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랜돌프는 나무에서 떨어져 숲속으로 달려갔다. 물레바위까지 가면 놈들을 따돌리고 한동안은 흩어놓을 수 있었다. 어쩌면
한둘쯤은 더 해치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떤 이는 달콤한 행복을 타고나고…”

속삭이듯 작게 노래하며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어떤 이는 끝없는 밤을 타고나지.(주:William Blake, Auguries of Innocence)”

침묵하는 추적자 여럿을 꼬리에 단 채 그는 밤의 숲속을 달렸다. 그에게 약속된 끝없는 밤을 향해.

“웃기는군…”

질문이 너무나 우스워서 랜돌프는 저절로 입술을 젖히며 이를 드러냈다. 사람이 웃는 얼굴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표정과 근본이 같다고
록윌 장터에서 늙은 사냥꾼이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주:늙은 사냥꾼의 이름은 김○환이라는 모 RPG인..[퍽] 동환님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옮겨보았습니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얼굴 그대로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정면의 가장 높은 돌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늙은 엘프를 올려다보았다.

“가우르가 토끼를 잡아먹고 나서 눈물 흘리면 가우르가 죄책감을 안다며 감동할 테냐?”

죄책감을 느끼냐고? 그야말로 가우르가 웃을 소리였다. 가우르가 웃으면 사람이 보기에는 으르렁거리는 것 같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사는 주제에, 잡아먹은 상대에 대해 죄책감이라고?”

그가 앉은 의자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두른 돌 의자에 앉은 열두 명의 엘프 장로는 침묵했다. 공터 가장자리의 숲에서는 새가 울었다.
그의 재판관인 그들은 희미하게 주름진 얼굴과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를 품은 눈빛 너머로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았다. 세상을
멀리서 관조하는 듯한 그들의 초연한 얼굴은 지금 그에게는 노스탤지아의 얼굴이기도 했다. 천화의 계곡 페어리들의 연락을 받고 알프
연방 척후병에게서 그를 구출한 동시에 포로로 잡은, 그 알 수 없는 집단의…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엘프 이터를 정성껏 치료한 후 이
기묘한 재판정에 세우고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동틀 때부터 숲 위로 석양이 내비치는 초저녁인 지금까지 장로들은 차분한 질문을 던져왔고, 사실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었기에 그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에미넴 숲의 엘프 중심지인 로리니엔 근처에 숨어지내며 혼자 있거나 소규모 집단에 있는 엘프 여자들을 노렸고,
기억하는 한 10여년 동안 서른아홉 명의 남자를 죽이고 마흔세 명의 여자를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겨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끌고가는 길에 몇 번씩 겁탈했다. 천화의 계곡을 구하려고 알프 연방
척후대를 단신으로 습격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죄책감을 느끼느냐고?

“엘프들보다 강했기에 그들을 잡아먹고 살았을 뿐이다.”

아마도 재판장에 해당하는, 정면에 앉은 장로의 눈빛이 희미하게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 역시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엘프들의 눈물과
고통, 수치, 그리고 죽음이 그에게는 돈과 생계, 그리고 얼마간의 쾌락이 되어 돌아왔다. 가우르가 쏜 화살에 맞은 토끼의 고통과
공포, 그 작은 생명의 끝이 하룻저녁 식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때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뭐가 이상한지
깨닫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도 노스탤지아 대원보다 약했기에 잡혀왔을 뿐이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삐딱하게 웃었다. 백날 정의를 외쳐봐라, 에미넴 숲의 악명높은 ‘엘프 이터’를 잡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알프 연방 척후대를
쓰러뜨리고 빈사 상태의 부상자를 죽음에서 건져낸 노스탤지아의 힘이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희에게 먹히더라도 원망이나 후회 따위는 없다.”

장로들은 마치 눈빛만으로 이야기가 통하는 듯 서로 표정 없이 시선을 던졌다. 그 묘한 태도가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랜돌프는 기세좋게 말을 마쳤다.

“뜻대로 해라. 그것이 승자의 권리이니까.”

숲 위로 펼쳐진 하늘은 석양의 붉은빛이 더욱 깊어졌다. 어스름 속에 가끔 우는 저녁새와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외에는
침묵이 깊어졌다. 랜돌프는 종일 돌 의자에 앉아 쑤시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이놈들! 아니면 감정이라도 내보이거나. 상대는 너희 동족을 노예로 팔아먹고 강간한 놈이란 말이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그
조용한 눈빛을 마주보며 그는 왠지 식은땀이 났다.

“장로회는 결정을 내렸다, 랜돌프 에디우스.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다.”

아무런 준비나 기척도 없이 재판장이 갑자기 말했다.

“그대는 달의 움직임에 따라 목숨을 취하는 달의 그림자, 카이론 두아스를 마시고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배속되어 사역하도록 한다.”

흐르는 듯 매끄러운 그들의 언어는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새울음처럼 자연스럽게 숲의 소음에 녹아들었다.

“삭월이 돌아올 때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자들이 판단하기에 그대가 신실하고 정직하다면 해독제를 주어 다음 삭월까지 그 생을 유지할
것이다.”

장로가 말을 잇는 동안 랜돌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대 생명은 그대를 우리 과업에 묶는 굴레가 되리라.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리니, 그 속에 운명을 넘어선 자유를 찾을지어다.”

재판장이 말을 마친 침묵 속에서 랜돌프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웃음은 점점 커져 박장대소가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웃으면서 숨이 차고, 배가 아파왔다.
마침내 랜돌프는 숨을 몰아쉬며 돌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 몸을 바로잡았다. 그는 손끝으로 눈물을 쓸어버리며 숨가쁘게 말했다.

“이 지독한 놈들…”

능지처참을 해버리고 싶은 그 지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노예사냥꾼에게 독을 먹여 꼭두각시로 이용해먹겠다는 그
발상은 얼마나 처절하도록 실용적인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라면 그게 누구든 그는 기꺼이 축복할 수 있었다.

어두워진 숲 위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삭월이 얇은 은조각이 되어 떴다. 숲속에서 불빛 하나가 움직이더니, 등잔을 든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로브 입은 마법사 혹은 약제사 하나가 쟁반에 받친 잔을 들고 공터로 나왔다. 그 뒤로는 갑옷 입은 엘프전사 둘이 따랐다.

행렬은 침묵하는 장로들의 원 안으로 들어와 랜돌프 앞에 섰다. 등잔을 든 수행원과 로브 입은 녀석이 그의 앞에 멈춰선 동안, 마시지 않으면 강제로
먹이려는 듯 두 전사는 그의 양옆에 자리잡고 섰다. 추상무늬를 정교하게 조각한 은잔 안에는 검은 액체가 희미하게
치직거리며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랜돌프는 잔을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희들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

그는 잔을 집어들고 쏟지 않게 조심하며 치켜들고 숲에 울리도록 목청을 높였다.

“노스탤지아에 건배다!”

그는 고개를 젖혀 잔을 입에 가져갔다. 머리 위의 삭월이 뿌리는 희미하지만 예리한 빛을 눈에 새기듯 올려다보는 동안
독은 뜨겁고 씁쓸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잔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내고 입가에 묻은 독까지 핥아낸 그는 엘프들에게 씩
웃어보였다.

더 말을 하려다가 그는 뭔가 왈칵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막았다. 내려다보자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어?”

이런 식으로 된 일이 아니라고 머릿속이 아우성을 쳤다. 카이론 두아스는 마시고 바로 발작하는 독이 아니었다. 그는 멀쩡히 일어서서
원래 있던 감방으로 안내받았었다. 그러나 그 지극히 논리적인 지적과 상관없이 날카롭고 차가운 고통이 등골을 통해 뱃속까지 깊게
찔러오더니, 이내 가시덩굴 같은 감촉으로 목을 휘감고 입과 코에 감겼다.

도저히 참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숲과 엘프들은 발작의 안개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아무도 도와주거나 반응하는 이 없이 그는
혼자였다. 몸에 점점 날카로운 가시를 뻗치는 통증만을 남기고…

소감

이번 편은 기본적으로 랜돌프의 인물 배경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로그에는 절대 없습니다. 난 로그 못 따라잡을 거야 아마(..) 나름 마음에 들게 나왔는데, 다른 분들은 어떨까 모르겠군요. 왠지 저는 마호가니 찬장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일단 이방인님과 삭풍님의 OK가 나왔으므로 공개합니다.

랜디라는 인물의 과거 행적이 좀 거식하다 보니 그 시점으로 쓰기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녀자 납치강간범(..)을 너무 긍정적으로 그려서 범죄에 대한 정당화가 되지 않나 하는 염려도 있고요. 그래서 더욱 랜디의 현재 상황은 죄값을 치른다는 걸 7화 내내 강조하려고 했고, 아직 소설은 거기까지 안 갔지만 랜디 자신도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실 재판에서 잘났다고 떠드는 것 자체도 양심의 가책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보면 아시타를 죽인 뒤 아라의 패악질이 떠오르기도 해서 역시 저것들은 동종혐오라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랜돌프 배경과 제일 다른 부분은 재판 대목입니다. 원래는 배경글에 나온 것처럼 배심원 재판으로 했는데, 삭풍님이 엘프 재판은 어떨까 장면 발상을 제안하셔서 그 제안을 골자로 고쳐써보았습니다. 삭풍님께 하소연(?)했듯 제가 중학교 때부터 톨킨광이었습니다만, 엘프는 (게이샤 에루후 말고 톨킨 엘프) 영 이해가 안 가는 족속이더군요. 그래서 그 이해 안 가는 점을 역이용해 기묘한 느낌을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쓰면서 제 생각은 대체로 뭐야 쟤네 완전 이상해(..) 열두 명으로 쓴 건 대충 적당한 수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배심원 수가 열두 명이라 원래 썼던 재판 장면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운명을 넘어서는 자유… 얘기는 엘프다운 이상한 대사기도 하고, 또 랜돌프의 형벌 뒤에 있는 흑막(?)에 대해 삭풍님과 이야기한 걸 반영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랜돌프의 꿈에 나온 대로라면 저런 복잡한 독약을 판결 나오자마다 뚝딱 대령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뭔가 조작의 스멜이? ㅋㅋ 또 뭐, 네 자유의지로 속죄를 해봐라 그런 말을 꼬아서 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으으 역시 엘프란 이상한 족속이에요.

이오닉스 7화 (3): 헤루모르로 가는 길

격추당한 전령의 임무를 대신 맡은 세 사람은 헤루모르까지 훨씬 먼 길을 가야 했죠. 길이 워낙 험해서 보통 고생이 아니었을 텐데,
다들 별 내색은 하지 않더라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려니 하고 있어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속에 날카로운 바위와 산이 맑은 하늘을 찔러 올라갔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히스 덤불을 군데군데 이고 있는
산도 더러 있었지만, 이곳은 새조차 거의 안 보이는 황량한 땅이었다. 원래 갔어야 할 크레이들 요새에서는 벌써 한참 남쪽으로
빗겨나 그들은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알프 연방에서 닦아놓은 골짜기 길을 벗어나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을 따라가야
했다.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하루에 한두 번쯤 머리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독수리, 몰려다니며 눈앞에 얼쩡거리는 날파리와 한 번은
그들을 보고 도망친 토끼 하나가 다였다. (토끼는 다크엘프가 활로 잡아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나마 샘과 개천이
많아 수통을 채우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여정이 길어지고 휴대용 식량이 바닥난다면 자체조달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랜디에게 심각한 것은 식량보다도 시간이었다. 엘프 기수놈의 임무를 떠맡은지 이틀, 크레이들 요새에서 하루쯤 남쪽 거리에서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시작인가…’

그는 얼굴이 굳으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동안 통증은 배에까지 손을 뻗어 위장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인데…’

다크엘프 여자가 그 빌어먹을 짐승을 바로 옆으로 몰아오자 그는 가뜩이나 힘겨운 상태에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한창 산고개를
넘어가는 중이었으므로 여기서 잘못 넘어졌다가는 저 아래 바위투성이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여자는 그걸 노렸을 지도
모른다.

“독 때문에 그러느냐?”

다크엘프 여자가 물었다.

“산이 싫어서 그래.”

그는 다크엘프를 쳐다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금씩 고통이 잦아들고는 있었지만, 아직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소매로 땀을 신경질적으로 훔쳤다. 이건 앞으로 며칠의 맛배기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왜, 높은 곳이 싫기라도?”

다크엘프는 눈썹을 살짝 쳐들며 미소지었다. 랜디가 고통스러운 것이 즐거운지 그녀는 오히려 이 높은 곳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개같은 드워프놈들.”

랜돌프는 욕을 하며 그 미소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딴 게 왜 좋지.”

“아직 안 죽지 않느냐.”

여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마치 신호기라도 한 듯, 희미해지나 싶었던 통증이 갑자기 갈고리 발톱처럼 머리를 헤집고 폐부를 잡아챘다. 고통에 숨을 못
쉬고 있지 않았더라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잠…깐… 쉬지.”

아픔의 첫 칼날이 지나간 후 그는 간신히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꾸 경련하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에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고통이 한 번 크게 솟아오르며 금방이라도 의식이 멀어질 듯 눈앞에 검은 점이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그 뒤끝에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귀기울이며 랜디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건드려 또 통증이 발작할까
두려웠다.

‘아편이라도 챙겨와서 씹을 걸 그랬나.’

“많이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지카리는 옆에 와서 짐을 내려놓고 앉았다.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시간이 없다.”

다크엘프 여자는 해가 중천을 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고 일어났다. 뒤처지는 것은 이전부터 참을 수가 없었다. 약하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으니까.

그런 그를 보다가 다크엘프 아라니아카는 가우르 안장에서 일어났다.

“타거라.”

“필요없어.”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쏘아보며 벌써부터 이를 드러내는 짐승에게 몸을 의지해서 짐이 되느니…

“두 발로 걸어서 못 따라갈 정도가 되면 그냥 죽는 게 낫다.”

그는 억지로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걸어갔다. 약하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에, 강하지 못하다면 강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강한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강했으니까. 빌어먹을 엘프 독과 무능한 노스탤지아놈들 때문에 잠깐 이럴 뿐이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랜돌프 에디우스는 약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편하기는 하겠다만.”

다크엘프는 그의 걸음을 쉽게 따라잡았다.

“죽기까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뒤쳐지지나 마라.”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난 제국력 590년산 와인을 마시며 죽을 계획이야. 아직 한참 남았다고 그러려면.”

랜디는 다소 무리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갔다. 옆에 솟은 암벽의 시원한 그늘에 들어서는 동안 바람은
마치 밀어주듯 그의 등뒤에서 불었다.

“허세부릴 힘이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모양입니다.”

바람을 타고 아라의, 그러니까 그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세 같은 소리 하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
뒤처질까보냐?

암벽에 한쪽 손을 대고 잠시 쉬고 있는데 (오직 잠시 쉬어서 더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옆에 시커먼 것이 휙 지나갔다. 어느새
검은 짐승을 타고 그를 지나친 다크엘프는 앞서가서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어서 따라와보거라, 다사케타.”

짐승조차 그를 비웃듯 노란 눈으로 돌아보더니, 놈과 그의 기수는 둘다 몸을 돌려 쏜살같이 멀어져갔다.

재수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랜디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위에 타오르는 태양과 끝도 없이 멀리까지 펼쳐진 황량한
바위투성이 풍경은 아직도 멀고 험한 길을 예고했다.

‘죽기까지 열하루인가.’

약해진 몸, 그리고 무자비하게 흐르는 시간과 싸우며 랜돌프는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걸어갔다. 어딘지 까마득한 빌어먹을
헤루모르를 향해.

소감

분량이 들쭉날쭉(..) 아아 랜디 괴롭히기는 재밌군요 (?) 로그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이런 부분이 어쩌면 가장 리플레이 소설답죠. 끝에 아라의 도발드립만 좀 추가. 긴장감 복선은 계속 이어가고 있고, 랜디라는 인물을 7화의 초점으로 삼으려고 독의 위험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야 헤루모르로 가는 거지만, 그걸 통해서 인물의 내면이라든지 이슈라든지 표현해보려고 말이죠. 과연 남에게도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하고 주변에게라도 재밌게 써보렵니다. 쉬운 작업이 아니라서 제가 재밌어도 될까말까한데, 저한테 재미가 없으면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이오닉스 7화 (2): 예정이 어긋나다

제가 맡았던 임무는 보안규정이 아니더라도 크게 쓸 것이 없습니다. 거짓 정보에 속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함정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이지요.
마법사란 언제 봐도 대단해요.

“이쪽입니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섬광이 번쩍할 때마다 썩어 문드러진 채 울부짖는 수많은 얼굴이 보였다. 좀비가 포효하고
요원들이 서로 지시를 외치는 소음 위로 아스타틴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결 길이 좁아지니까 훨씬 쉽게 방어할 수 있어요. 통로를 막아내면서 기수들을 부르도록 해요.”

“그럽시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해 보이는 크세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뚫어볼까요.”

마법사가 눈을 감고 지팡이를 쳐드는 동안 아스타틴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봉을 들었다. 쉴새없이 터지던 섬광이 뜸해지자 좀비 몇몇이
접근했지만, 아스타틴이 휘두르는 봉에 연이어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자 그어어…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 크세노바가 든 지팡이 끝에는 빛의 구가 생겨났다. 그 빛을 곁눈으로 보고 아스타틴은 몸을 빙글 돌리며 비켜주는 순간 크세노바는 지팡이를 내지르듯 휘둘렀다. 구가 날아가면서 공기가 크게 일렁이더니, 다가오던 좀비가 뒤로 날려가 다른 좀비와 사지가 얽혀 진흙탕에 뒹굴었다. 그 틈으로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은 동료들과 함께 달렸다.

갑자기 크세노바가 크게 비틀거리며 거의 쓰러질 뻔했다. 번개가 번쩍하는 빛 속에, 몸의 반이 타 없어진 채 진흙탕에 뒹구는 좀비가
그의 로브자락을 잡은 모습이 보였다.

아스타틴이 휙 돌아서며 좀비의 앙상한 손을 내리치는 순간 천둥이 하늘을 뒤흔들었고, 손가락이 부러진 좀비는 로브를 놓쳤다.

“어서요!”

좀비는 끼이이…하고 신음을 흘리며 기묘한 각도로 꺾인 손을 다시 내뻗었다. 그런 좀비를 역겹게 내려다보며 아스타틴은 크세노바의
팔을 잡아끌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그들은 안전의 가능성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비슷한 시간에 지카리씨와 다른 일행은 남부 난 엘모스 산맥으로 진입하고 있었을 거에요.

남부 난 엘모스 북서부 거점에 도착한 그들의 안내를 맡은 드워프는 복잡하게 꼬인 통로로 그들을 이끈 끝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벽으로 다가섰다.

“막다른 골목이잖아…?”

랜돌프가 중얼거리는 동안, 천장에 머리가 거의 닿은 지카리는 횃불을 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드워프가 바위벽에 손을 대고 중얼거리자 갑자기 문 모양의 윤곽이 벽에 빛나더니 그 모양 그대로 벽의 일부가 끼익… 열렸다. 동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쳐들자 아라는 손을 쳐들어 눈을 가렸다.

“여기가 가장 가까운 출구일세.”

안내원은 손을 뻗어 지카리가 내미는 횃불을 받아들고,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눈앞에는 깎아지른 듯 뻗어올라가는 암산이 가로막았고, 그 너머로 역시 험준한 산이 줄지어 저 멀리에서는 푸르게 흐려졌다. 아래로는
좁은 돌 턱 너머로 까마득한 골짜기가 입을 벌렸다. 아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짝 물러섰고, 랜돌프는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더럽게 황량하군….”

“길을 따라 내려가 아렌고원 방향으로 좀 걸어올라가면 크레이들이 보일 거야.”

드워프는 문밖으로 몸을 내밀며 가리켰다. 문앞의 턱은 암벽 중턱을 따라 쭉 이어져 사람 두셋 정도가 나란히 걸을 만한 길을 이루고
있었다.

“자, 여긴 선물일세.”

안내자는 그들에게 작은 맥주통을 안겨주었다. 지카리는 얼굴이 환해지며 통을 받아들었다.

“안내 고맙네, 작고 단단한 친구.”

지카리가 몸을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드워프의 뿔난 표정을 보고 아라는 헛기침을 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산의 전사여.”

그녀는 드워프에게 말했다.

“승리 속에 또 뵙기를 바라지요.”

표정이 풀어진 드워프는 나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산에 난 문은 잠시 윤곽이 빛나더니 감쪽같이 사라져 다시 아무것도
없는 암벽이 되었다.

길로 나왔다가 저 밑의 골짜기로 눈이 간 아라는 숨을 삼키며 아사나스의 등에 득달같이 올라탔다. 고삐를 꼭 잡은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가르릉거리며 몇 번 돌아보다가 가우르는 날카로운 바위 사이로 펄쩍펄쩍 뛰며 길을 달려내려갔다.

“ㄲ…!”

이를 악물어 비명을 참으며 아라는 고삐를 당겼다.

“저 녀석은 또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지.”

지카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랜돌프는 아라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 말에 지카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라는 간신히 실눈을
뜨며 더듬거렸다.

“누… 눈이 좀 부실 뿐이다.”

지카리는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종의 유머로 생각하면 되나…?”

“무슨 일 있나, 평소같지 않군.”

지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겁을 먹은 것 같아 보이는데…”

그 말에 아라가 항의하기도 전에 랜돌프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하니…”

그는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높은 곳이 싫으냐…?”

그 말에 아라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고, 가우르는 캬악- 이빨을 내보였다.

”…정답이군.”

랜돌프는 히죽 웃었다.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지카리는 턱을 쓸며 미소를 가렸다.

“조금 천천히 가지.”

“그 고양이 잘 다뤄라.”

랜돌프는 아사나스를 마주보다가 여전히 웃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난 나한테 덤비는 건 그냥 놔두지 않거든.”

아라는 그를 싸늘하게 보다가 일부러 그의 옆으로 아사나스를 바싹 몰아 머리에서 꼬리끝까지 스치며 지나갔다. 랜돌프는 가우르와
기수가 지나가며 던지는 눈빛을 마주 노려보았다. 침묵 속에 일행의 발걸음만 골짜기 벽에 가벼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정찰 목표를 향해 가던 길에 세 사람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서 경로를 바꿔야 했죠.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헤루모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결국 삶이란 의미없는 운과 우연에 덧없이 휘둘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거대한 의지나 은총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개입하는 것일까요?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악운이 닥쳐오는 것도 누군가의 뜻이겠지요.

암벽을 돌아 골짜기 바닥으로 내려온 셋은 산봉우리 너머로 모습을 나타낸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저 앞, 골짜기 벽을 이룬 깎아지른
암벽 꼭대기에는 투박하고 튼튼해 보이는 탑이 골짜기 전체를 굽어보았다.

“망루 지척까지는 접근할 수 있겠구나.”

바위에 몸을 숨긴 채 아라는 망루 밑에 골짜기 바닥을 가리켰다. 망루가 선 암벽이 골짜기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에 땅에는
날카로운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 있었고, 군데군데 난 솔처럼 거친 풀섶도 몸을 숨길 장소가 되어주었다.

“망루 밑을 통과한 다음에는 저 산자락을 돌아 지도에 표시된 동굴로 가도록 하자.”

그녀는 망루가 선 암벽 너머로 산자락이 골짜기에서 각도를 이루어 작은 계곡으로 갈라져나가는 지점을 가리켰다. 지카리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드워프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잠시 더 지켜보다가 다시 이동하도록 하세.”

“빡빡하겠는데…”

랜돌프는 망루를 노려보다가 허리의 단검을 점검했다.

“제압해야 할 지도 모른다.”

아라는 그를 보고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지도를 챙겨넣고, 아사나스와 나란히 바위 뒤에서 나섰다.

“조심해서 가보자.”

긴장한 침묵 속에 그들은 망루와 절벽의 그림자를 통해 이동했다. 멀리서 날카로운 새울음 말고는 주변에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망루의 모습이 백 보 앞쯤으로 다가왔을 때, 랜돌프가 손을 휙 들며 귀를 기울였다. 저 위의 망루에서 시끌시끌한 외침과 지시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굳어서 지켜보는 동안 병사들이 망루에서 달려나왔고, 망루 꼭대기에서는 총이 불을 뿜었다.

“이상한데…?”

랜돌프가 중얼거렸다. 병사들이 손으로 가리키고 총을 겨누는 방향은 그들이 있는 골짜기 바닥이 아닌, 건너편 암벽 위의 하늘이었다.

그순간 다시 그 날카로운 새울음이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서 들려왔다. 지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날카롭게 쉭쉭거렸다.

“그리폰!”

그들 위로 날개달린 그림자가 지나갔다. 사자의 몸을 한 그리폰은 독수리 머리로 고통과 공포의 소리를 내질렀고, 기수는 고삐와
안장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폰은 필사적으로 고도를 높이려고 했지만,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공중에 피를 흩뿌리면서
왼쪽 날개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망루에서는 환호성과 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나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그리폰이 일행에게 멀지
않은, 망루 그림자의 가장자리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랜돌프는 눈을 크게 떴다.

“뛰어!”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골짜기를 따라 달려갔다. 지카리도 그를 따라 뛰는 동안 아라는 아사나스의 등에 오르더니, 추락하는
그리폰을 향해 가우르를 달렸다.

“저게 뭐하는…!”

랜돌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돌아보자 지카리도 멈춰섰다. 아라는 그들을 향해 재촉하듯 크게 손을 젓고는 다른 손에 고삐를 모아잡고
그리폰을 향해 질주했다.

“끼에에에에엑—!!!”

그리폰이 땅에 충돌하며 주욱 미끄러지자 돌이 부서져 날았고, 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망루에서는 병사들이 내려오는 듯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가까워왔다.

먼지에 콜록거리며 아라는 그리폰 옆으로 튕겨나간 엘프 기수를 부축해 아사나스의 안장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폰은 끼리리릭… 부리를
벌리고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피투성이 기수를 향해 고개를 뻗었지만, 피를 흘리고 날개는 꺾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폰을 잠시 돌아보다가 아라는 엘프 뒤에 타고 아사나스를 돌려 지카리와 랜돌프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끼에엑- 하는 그리폰의
울부짖음이 그녀를 따라왔다.

“무슨 어울리지 않는 짓을…”

랜돌프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런 모습을 돌아보았다. 지카리가 돌아가려고 하자 랜돌프는 그의 팔을 잡았다.

“가지 마. 이틈에 빨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해.”

그들이 가끔 돌아보며 산자락 너머로 이동하는 사이 이제 차차 가라앉는 먼지구름 속에서 아라는 아사나스를 타고 암벽 그림자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축 늘어진 기수를 한쪽 팔로 안은 채 가우르를 달려 골짜기로 내려오는 병사들에게서 멀어졌다. 병사들이 요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리폰에게 몰려들었을 때쯤 아라와 아사나스는 기수를 데리고 산자락을 돌아 일단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워프들이 표시해준 산자락의 굽이 안쪽에는 이전에 산사태가 있었던 듯 돌과 흙이 쌓여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앞에서 랜돌프와
지카리가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는 아사나스에서 내려 엘프 기수의 등에 손을 대서 균형을 잡아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마치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랜돌프는 마음이 변한 듯 조용히 말했다.

“시선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서 이놈을 살펴보자.”

“여러… 여러분은…”

기수는 헐떡거리며 피투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힘을 아끼도록.”

아라가 말하며 아사나스의 고삐를 끌었다.

“우선은 움직이자고.”

랜돌프가 말했다.

경사를 따라 그들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탕- 하고 날카로운 총성이 등뒤의 골짜기에 울렸다. 병사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랜돌프가 신경쓰지 안고 걸어가는 동안 지카리는 무표정하게 산자락에 가리운 골짜기를 돌아보았고, 아라는 잠시 눈을 감고
서있다가 따라갔다. 아사나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돌과 흙투성이 경사가 산자락과 맞닿는 꼭대기, 서로 엇갈려 쓰러진 두 개의 석판에 거의 가려진 안쪽 그늘에 동굴 입구가 있었다.
안은 살짝 축축했지만 조용했다. 바닥에 아라가 망토를 깔고 지카리가 조심조심 엘프를 들어 눕히자 기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라가
초를 꺼내서 켜는 불빛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던 그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 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라는 엘프의 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붙은 옷을 랜돌프가 찢어내고 피를 대충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빛이 흔들렸다가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탈출했다고 전해다오, 랜돌프.”

랜돌프가 그녀를 흘깃 보자 촛불이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피가 솟는 상처를 누르고 허리띠
주머니에서 꺼낸 연고를 바르며 엘프어로 대충 그 거짓말을 전했다.

랜돌프의 지시에 지카리가 엘프를 천천히 일으켰다. 붕대를 감아 상처를 압박해주고 다시 눕히자 엘프는 한결 편해보였지만, 피묻은
손을 천에 닦으며 랜돌프는 아라와 지카리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신을 잃었던 듯했던 엘프가 조금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저… 전 틀렸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가 낮게 하는 말을 랜돌프가 중얼중얼 통역했다.

“세계수가… 어머니가 절 부르는 게 느껴집니다…”

“세계수…”

그 말에 아라가 표정이 누그러지는 동안, 기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허리띠에 단 주머니에 가져갔다. 그가 힘겨워하자 지카리가
주머니를 열더니 접은 종이를 하나 꺼냈다.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루모르…로 시급한…”

기수의 목소리는 자꾸 희미해졌다.

“그래서 지름길로…”

“헤루모르…?”

아라가 중얼거렸다.

“병신같은 수뇌부 자식들.”

랜돌프는 이를 부득 갈았다.

“하나하나가 중요할 때 겨우 문서 하나를 위해 이게 대체 무슨…”

엘프는 대답 없이 숨을 헉헉거렸다.

“엘…”

동굴 안의 차가운 공기가 움직이자 촛불이 흔들렸다. 그에 맞추어 엘프의 목소리도 자꾸 희미해졌다.

“혼자 남겨지면… 슬퍼할 텐ㄷ…”

목소리가 끊어지면서 그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몸을 숙여 잠시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랜돌프는 몸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아라는 기수의 눈을 감겨주었다.

“둘이 함께 저 창공을 날거라.”

“자연의 품에서 편히 쉬길 바라네.”

지카리의 눈빛은 차분했다. 그는 커다란 손을 잠시 기수의 움직이지 않는 가슴에 얹었다가 떼었다.

“이런 망할.”

지카리가 내려놓았던 문서를 랜돌프가 잡아챘다.

“그놈의 문서라는 게 대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구경이나 하자.”

“대부분 알 수 없더군.”

지카리는 기수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랜돌프에게 말했다.

“암호인 것 같네.”

“헤루모르… 시급…”

랜돌프는 깜박이는 촛불빛 속에 글씨를 눈으로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인가. 헤루모르에 전하는 거라고 했었지?”

“그러나 이제는 전할 이가 없구나.”

아라는 기수의 시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급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지카리의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나왔다.

“이제 우리가 완수해야겠지.”

“급한 것은 그쪽이니 그것이 옳겠지요.”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사나스를 타고 앞서서 가면 같이 가는 것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랜돌프를 쳐다보았다.

“그 동안에 둘이서 정찰을 완료하고 보고하면…”

아라의 말에 랜돌프는 눈쌀을 팍 찌푸렸다.

“저짝이 나고 싶냐?”

그는 엘프 기수의 시체를 가리켰다.

“간다면 셋이 같이 간다. 젠장, 중요한 일이 아니기만 해봐.”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그 말이 옳네, 아라니아카. 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늦어지는 것이 나아.”

랜돌프를 쏘아보다가 아라는 지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스름 속에서 랜돌프는 자신의 손을 불안하게
내려다보았다.

“미치겠군.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데…”

뭔가 생각이 난 듯 그는 엘프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라는 순간 입을 꼭 다물었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대검과 활 외에 개인 소지품인 듯한 목걸이와 반지, 돈 몇 골드를 발견하고 더 나오는 것이 없자 랜돌프는 짜증스러운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왜 그러느냐?”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가자.”

그는 몸을 돌려 동굴 입구로 빠져나갔다. 아라는 그가 가는 것을 잠시 보다가 목걸이와 돈을 챙겨 손수건에 싼 후 아사나스의 안장
주머니에 넣었다.

“유족에게 전해줘야겠구나.”

엘프의 시신 밑에서 피투성이 망토를 빼낸 그녀는 그의 얼굴과 몸을 덮어준 후 양초를 들고 일어섰다. 지카리가 나가는 동안 그녀는
입구에 서서 기수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아사나스를 불러 내보낸 후 그녀가 양초를 불어 끄자 동굴은 입구로 흘러드는 희미한
햇살 말고는 어둠에 잠겼다.

산자락을 돌아서 골짜기를 내다보자 인간 병사들이 말을 동원해 그리폰의 시체를 끌고가는 모습이 보였다. 피와 깃털이 엉긴 흔적이 그
뒤에 길게 남았다.

“저것으로 뭘 하려는 것 같나?”

지카리의 속삭임에 랜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근사한 장식이 되겠지.”

“박제해서 전시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며 아라는 말했다.

“저것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중얼거리며 지카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폰을 끌고가고 자기들끼리 승리를 자축하느라 인간병사들이 골짜기 길을 비운 사이 일행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을
잠시 스쳐간 기수와 그리폰의 마지막 비행을 따라, 헤루모르를 향해.

“여기까지 사흘… 헤루모르까지 다시 사흘인가…”

남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랜돌프는 중얼거렸다.

“제기랄.”

소감

7화는 제노님과 오체스님이 빠졌던지라 아스타틴과 크세노바도 뭐 했다고 시위하려고(..) 두 사람 장면을 써보았습니다. 마법 효과를 정정해주시고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도 제안해주신 제노님께 감사드립니다.

외곽 망루 밑에서 벌어지는 모험은 로그를 꽤 충실하게 따라가지만, 역시 조금씩 재구성과 압축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엘프 기수 줍는 진행이 아니었다고 삭풍님이 그러셨는데, 아라의 돌발행동 때문에 그야말로 예정이 어긋났습니다. 아라는 기수가 혹시 생포당해서 보안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편에 있는데 인간에게 포로로 잡힌다는 생각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반면 냉혹이나 차별주의 (엘프) 같은 단점 RP는 잘 안 된 면이 있지만, 함께 위험을 겪는 순간이라 그랬다고 변명해보렵니다.

아라의 고소기피증 (-1짜리 버릇)이 드러나는 장면 등을 통해 아라와 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보았고요. 헤루모르에서 그 긴장감이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해소가 되니까 복선을 듬뿍 넣어보았습니다. 그 외에 그리폰이나 치유 묘사 같은 부분이 쓰기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오닉스 7화 (1): 편지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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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힐라스 1기

7화: 8일의 여정

(1) 편지 I

사랑하는 셀라나에ㄱ

글씨를 차마 다 쓰지도 못하고 아스타틴은 종이를 구겨 구석에 내던져버린다. 혼자 쓰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몇 번이나 보았다고 연인처럼 편지를 쓴다는 말인가. 셀라나 혼자 보는 편지도 아닌데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깃털펜을
씹다가 그는 다시 종이를 앞에 끌어놓는다.

존경하는 셀ㄹ

쓰다 말고 그는 종이를 북 찢어버린다. 지휘부에 쓰는 편지도 아니고 존경하는은 무슨. 물론 존경하기는 하지만 (여윈 얼굴에
수줍고 부드럽던 미소, 바닷바람에 날리던 머리칼 사이로 그를 올려다보던 녹색 눈빛) 이건 너무 형식적이다. 그렇게 편지를 쓰다가는
정말 평생 점잔빼는 사이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종이를 꺼내고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떨리는 펜끝을 백지에 가져간다.

셀라나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 소식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대필과 대서해주시는 에나릴 선생님께도 이 지면을 빌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서툰
글이지만 셀라나의 글공부에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헤루모르 일에 대해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셀라나. 그 소식이 빨리 퍼지기는 퍼졌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임무가 있어 그
일의 시작부터 지켜보지는 못했고, 끝마무리를 할 때 잠깐 있었던 정도입니다. 많이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제가 보고 겪은 것과
전해들은 것을 보안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해드릴게요.

약 열흘 전, 우리 알다론은 분산해서 임무를 떠나게 되었죠. 크세노바씨와 저는 자세히는 얘기할 수 없지만 다른 분 몇몇과 별개의
임무를 맡았고, 나머지 분들은 정찰 임무를 받아 떠났습니다. 그게 남부 난 엘모스 산맥, 헤루모르가 있는 곳이었어요. (에나릴
선생님, 이 대목은 셀라나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해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무사히 또 뵙지요.”

크세노바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옆에서 아스타틴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몸조심하게.”

지카리는 비늘이 반짝이는 손을 들었다. 까마득히 위로는 로스로리엘을 굽어보는 알데아란 나무들의 가지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은 기다리던 마법사와 전사들과 합류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라가 말했다.

“쿠라 그 계집을 놓치다니, 노스탤지아도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령 (死靈) 군대가 습격을 했다니, 중과부적이었겠지.”

지카리는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이 나무 사이의 길을 꺾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랜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뭐, 해독제가 늦을 때부터 그놈들 일처리 수준은 알았다.”

그는 양옆으로 목을 우둑우둑 꺾었다.

“멜코르 그놈을 상대로 그 정도도 버텨내지 못한다면 애당초 도제를 붙잡아놓을 힘도 없었던 거지.”

“쿠라를 굳이 되찾은 것은…”

아라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아사나스의 안장끈을 점검했다.

“노스탤지아의 작전 때문에 도제가 부족해졌던 것일까요.”

“난 오히려 그 계집이 불쌍한데.”

랜돌프는 허리띠의 단검을 확인하며 히죽 웃었다.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쫄딱 털리고서 그런 스승에게 돌아가면.”

“다시 사로잡아야겠지. 크세노바의 마법과 아스타틴의 안내 능력을 믿네.”

지카리는 돌아서서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이 간 반대방향, 알데아란 나무 사이 동쪽으로 굽어지는 길에 발을 딛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일을 하러 가보세.”

걸음을 옮기며 그는 자신의 덩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방해나 안 되었으면 좋겠군.”

“당신은 일이 있을 때를 위해 대기해주면 돼.”

랜돌프는 지카리와 나란히 걸어가며 손마디를 꺾었다.

“일은 반드시 날 테니 말이다.”

“정찰 임무 아니었던가.”

툭 던지듯 말하며 아라는 아사나스를 타고 앞서서 지나갔다. 그런 그녀를 시선으로 따르다가 랜돌프는 걸음을 옮겼다.

“요새까지 4일… 독이 발작을 일으키기까지 지금부터 4일. 죽기까지 다시 12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돌아올 수 있으면 살아돌아와보라는 거냐.”

씩 웃고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노스탤지아 놈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

소감

분명 원래 RPG 블로그였는데, 요즘은 소설 블로그가 된 듯한 기분이(..) 뭐 RPG 소설이니까요 (변명) 처음에는 리플레이를 다른 방식으로 써보자고 시작한 것이 어찌어찌하다보니 블로그와 생활을 점령해가는군요(..) 보시는 분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블로그 트래픽의 대다수는 A5 제본이나 도쿠위키 얘기인 듯하더군요), 최소한 팀원끼리라도 보니까 하나 완결낸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써보렵니다. 괜찮은지 봐달라, 이 부분 설정이 어떻게 되느냐 부탁+질문공세에 시달리면서도 늘 칭찬과 격려, 충고 주시는 팀원분들께는 그저 죄송감사하지요.

얼마전에 다른 참가자분 하나가 플레이와 소설을 합치면 완전한 리플레이가 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플레이 쪽과 연관이 없는 분들에게 이게 얼마나 의미가 있고 알아먹을 만한 얘기인지도 요즘은 의문입니다. 글쓰는 책도 읽어보고 하니 생각없이 쓴 부분이 많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요..ㅎㅎ

소설이 점점 세션에서 벗어나는 게 보이는 것이, 아스타틴의 편지 같은 건 당연히 RPG 세션에는 성립할 수도 없는 부분이고 또 세션에 없는 대사나 장면이 많아졌습니다. 편지를 이야기 액자로 선택한 건 프리포트편에 이어서 아스타틴/셀라나 맥을 이어가고 싶어서기도 했고, 또 로그를 생략하고 압축하면서 상황설명을 추가하고 싶었거든요. 아라와 지카리, 랜돌프의 대사도 로그에는 없는 것으로, 상황을 짧게 설명하고 정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거 리플레이 소설 맞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RPG와 소설은 다른 매체이고 또 로그가 소설의 기본 재료가 되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맞다고 우기렵니다. (음?)

편지 대목은 안힐라스의 체신 체계라든지 서신 보안규정 등에 대해 삭풍님과 얘기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토리 진행상 주로 임무 중인 상황을 보게 되지만, 일상생활이 어떨지 생각하는 것도 재밌더군요. 좋아하는 여자한테 편지를 쓸 때라든지, 그럴 때도 어떤 말은 써도 되고 어떤 말은 안 되는지, 편지는 누가 어떻게 배달하는지 등등. 평범한 젊은 남자다운 아스타틴의 모습을 적어보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이오닉스 4~6화 (3)&(4): 마법사들, 프리포트의 새벽

마법사들

“거기 다들 스톱스톱~”

쿠라, 혹은 엘리샤가 엘프소녀의 가느다란 목에 칼을 대며 꾹 누르자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지카리는 가슴 깊숙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쿠라 뒤편에 있던 형체들이 흐느적흐느적 걸어나왔다. 생전에는 인간이었던 듯한 그들은 군데군데 부패의 흔적이 드러나는 잿빛 피부에
초점 없는 눈을 한 채 저택 입구에서 부시럭부시럭 몰려나와 쿠라와 소녀 양옆에 포진했다. 그들 뒤를 이어 검은 로브를 입은 키큰
남자가 걸어나와 쿠라의 왼편에 섰다.

“얌전히 죽어주면 제대로 미라로 만들어줄게~”

쿠라의 말에 크세노바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는 건 어때?”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 쪽이 뭔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좀비들이 일제히 발을 질질 끄는 걸음으로, 빠르지는 않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러운 생물, 혹은 사물 (死物)의 벌린 입에서는 그어어어.. 하고 고통인지 적개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라는 활을 앞줄의 좀비에게 겨누고 시위를 놓았다. 진흙이 갈라지는 것 같은 팍 소리를 내며 화살이 몸에 박힌 좀비는 잠시 몸을
떨더니 다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라를 보고 쿠라는 킬킬거렸다.

“역시 깜둥이들은 머리가 안 도나봐?”

“화살은 큰 효과가 없어요!”

크세노바의 외침에 어쩌라는 소리냐는 듯 아라가 보자 그는 말을 이었다.

“로브의 마법사를 먼저!”

끄덕이며 아라가 다시 활을 준비하는 동안 지카리는 이를 악물고 좀비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무게가 실린 육중한 걸음이 땅을 쿵쿵
울렸고, 그는 도끼로 좀비 하나를 내리쳐 둘로 갈라놓았다. 그러는 동안 차가운 표정의 아스타틴은 앞으로 나서며 봉으로 좀비
얼굴을 뭉개놓고 뼈를 부러뜨렸고, 랜돌프의 단검이 쉭쉭- 차갑게 빛나며 좀비 머리와 사지를 공중에 흩날렸다.

갑자기 주변에 붉은 기운이 돌고 공기가 열기로 일렁이더니 크세노바와 아라의 머리 위에 불로 만든 구름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며 점점
커졌다. 불구름은 작은 불씨를 비처럼 내렸다. 불씨는 대부분 가죽갑옷에 부딪혀 파스슥 꺼졌지만, 아라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며 욕을 내뱉었다.

크세노바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그는 불의 비 바깥편에 다시 나타났다. 냉정한 집중력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쿠라를 향해 손을 젓자
그녀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꺄…꺄악!”

쿠라가 쿠당 넘어지는 동시에 불의 구름이 흩어지더니 비도 사라졌다. 소녀는 공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머리나 좀 식혀라.”

크세노바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남자 마법사 쪽이 주문을 마치며 손짓하자 지카리 뒤에 드리운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땅에서 똑바로 일어났다. 그 부자연스러운 형체가
도끼를 휙 내리치는 찰나 돌아본 지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공격을 피했다. 마치 어두운 거울을 들여다본 듯
잿빛과 흑색으로 형상을 갖춘 자신과 마주친 그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는 그림자 지카리의 가슴에 콱 박혔지만, 그림자는
잠시 흔들렸을 뿐 멀쩡하게 물러났다.

그 순간,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좀비들이 가장 가까운 지카리에게 먼저 몰려들었다. 그림자 자신의 공격을 피하다가 지카리는 균형을
잃었고, 그 위로 좀비들이 와글와글 몰려들더니 양팔을 쳐들어 내리치며 가격했다.

“지카리공!”

아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 앞에 있는 아스타틴과 랜돌프에게도 이미 좀비들이 덮쳐오고 있었다. 랜돌프는 몸을
날려 일격에 좀비 하나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또 다른 좀비의 눈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다가오는 누더기투성이의 몸집 작은 여자
좀비에게 아스타틴이 봉을 내리치자 콰득! 하고 갈비뼈가 부서지며 날카롭고 하얀 뼛조각이 잿빛 살점 사이로 드러났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가 적대적으로 우어어 포효하자 아스타틴은 다시 봉을 탁 내리쳐 목을 꺾었다.

”…죽여버리겠어.”

저택 입구 앞에 쿠라가 이제 막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앉는 모습을 그는 차갑게 노려보았다.

로브를 펄럭이는 엘프 마법사들이 일행의 뒤편에 서서 주문을 외우자 좀비 사이에 섬광이 일면서 폭발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좀비들이
숯덩이가 되거나 머리나 팔다리가 날아가면서 충격파에 쓰러졌다. 두 다리가 날아간 좀비 몇이 팔로 몸과 잿빛 내장을 끌고 계속
다가왔지만, 또 다른 섬광이 번쩍하다 사라지자 땅에는 끈끈한 재만 남았다. 아라는 엘프 마법사들을 슬쩍 돌아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 느림보들.”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분수의 물이 공중에 높게 솟구치더니 투명한 여인의 형체가 되었다. 물의 정령이 손을 내리치자 그녀의 손은
파도가 되어 좀비들에게 몰아닥쳤다. 거대한 ‘철썩’ 소리와 함께 일행에게도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그렇게 좀비의 수가 줄어가는 사이 지카리를 덮어버렸던 좀비들이 흔들리더니, 지카리가 그들을 한꺼번에 떨쳐내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 지카리가 도끼를 휘둘러오자 어깨에 어두운 도끼형체가 깊이 박힌 지카리는 순간 굳었다가 고목처럼
쓰러졌다. 동시에 그림자 지카리도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납작해져 땅에 누운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지카리에게 좀비들은 다시
양팔을 내리쳤지만, 타격에 좀비들 자신의 팔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날아가면서도 지카리의 갑옷에 막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연이은 마법과 물리 공격에 좀비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아스타틴이 그들 사이로 달려갔다. 휘둘러오는 팔을 몸을 숙여 피하고 또 다른 공격을 봉으로 막아내며
그는 신음하고 발을 끄는 좀비 무리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저 바보놈이…”

좀비의 찐득찐득한 검은 피와 부스러져 내리는 살점을 단검에서 털어내며 랜돌프는 혀를 차다가, 재빨리 몸을 돌려 새로운 좀비 공격을
단검으로 쳐냈다.

병사들을 처리한 도보기병대가 달려와 좀비들과 교전하면서 전세는 본격적으로 기울었다. 비틀거리며 막 일어서려던 쿠라는 얼굴에
아스타틴의 봉을 정면으로 맞고 쿠당 쓰러졌다.

“아사나스 몫이다.”

그녀에게 내뱉어준 아스타틴은 놀란 엘프 소녀와 눈앞의 좀비떼 사이를 막아서고 피와 살점, 노랗게 썩은 뇌수가 묻은 봉을 쳐들었다.

남자 마법사를 노려보며 화살을 조준하고 있던 아라가 마침내 활시위를 놓는 순간, 엘프 마법사가 주문을 마치며 활을 가리키자 활은
하얗게 지지직거리며 번개 같은 불빛을 내뿜었다. 화살은 그 순백의 전광 (電光)을 끌고 좀비떼 위로 높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마법사의 후드 아래 얼굴에 내리꽂혔다. 파지지직- 빛이 번쩍하더니 마법사는 뒤로 천천히 넘어가 풀썩 길게 누웠다. 후드가 뒤로
날리며 드러난 얼굴은 새까맣게 탄 채 김이 올랐다.

“저런 건 또 처음이로구나.”

아라는 번쩍이는 활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부터는 뒤처리에 불과했다. 엘프들이 무기와 마법으로 좀비를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정원은 차차 조용해져갔다. 마지막 남은 몇
마리는 전사들이 담장 구석에 몰아넣는 동안 마법사들이 화염 주문을 쓰자 살아있는 횃불처럼 타오르더니 이내 숯이 되어 하나씩
쓰러졌다. 몇 안 남은 병사는 마법사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곧 항복했다.

“지카리공!”

지카리에게서 좀비들을 쓸어내고 마법사 몇이 둘러서서 주문을 외우자, 지카리는 조금 정신이 드는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 아라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면목이… 없군…”

지카리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눈빛에는 그 부자연스러운 적과 싸운 공포감의 흔적이 그늘졌다.

“아닙니다. 쉬고 계십시오.”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은 쓰러졌습니다.”

떨리는 얼굴근육을 움직이며 지카리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이는…?”

아라는 저택 입구 쪽을 건너다보았다. 그쪽에서는 엘프 전사 일단이 소녀를 둘러싸고 데려가는 동안 아스타틴과 소녀가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너… 너희들… 이런다고…”

쿠라가 입구의 대리석 기둥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서고 있었다. 엉망이 된 연갈색 머리, 코와 뺨에 주근깨가 가볍게 흩뿌린 갸름한
얼굴이 젖혀진 후드 밑으로 드러났다. 아스타틴에게 맞은 광대뼈는 곧 시퍼렇게 멍이 들려는 듯 어둑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랜돌프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넌 졌다, 미친 마법사 계집.”

그가 이를 드러내고 단검을 빛내며 다가가자 쿠라는 뒷걸음질치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멜코르 상고로드림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랜돌프가 척, 걸음을 옮겨 다시 가까워지자 쿠라는 주저앉은 채 입구 옆의 벽에 더욱 등을 갖다붙였다.

“시… 싫…”

아라가 랜돌프의 뒤편에서 걸어오더니 그를 지나쳐 쿠라에게 향했다.

“이 여자는 내 몫이다.”

아라는 여자 마법사의 로브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더니, 쿠라가 겁에 질려 내는 찍 소리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입술에서 피가 팍 튄 쿠라는 멍해진 눈으로 다크엘프를 마주보았다.

“뭐… 뭐야 깜둥이 주제…”

아라가 목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자 쿠라의 목소리는 ‘큭’ 하고 잦아들었다.

“난 깜둥이라 감정만 앞서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아라는 허리의 스몰소드를 뽑아 쿠라의 목젖에 갖다댔다. 속삭이는 소리는 거의 유혹적으로 달콤했다.

“말을 안 들으면 이대로 죽여버릴지도 모르겠구나.”

“꺄… 꺄악!”

마법사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멜코르 상고로드림은 어디 있지?”

아라는 랜돌프의 질문을 반복했다. 쿠라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고개를 저으려 하자 아라는 그녀의 목을 콱 밀쳐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박았다. 아스타틴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동안 랜돌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말해!”

“시… 싫어…”

쿠라는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간신히 말했다.

“마…말했다간 주…죽어…”

“그래? 그렇다면 지금 죽여주지.”

아라는 입술을 핥았다.

“아라니아카, 그 정도면…”

크세노바가 보다못해 나서자 아라는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쿠라에게 몸을 돌렸다.

“아 그렇지, 그 이전에.”

억센 손에 머리채를 확 휘어잡히자 쿠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붙든 손을 할퀴었다. 아사나스가 엘프 전사들 사이로 걸어나오며 그런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제 부상이 말끔히 나은 듯 가우르의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아라는 그 앞으로 쿠라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갔다.

“이년이다, 아사나스.”

아사나스는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저앉아 떠는 쿠라에게 천천히 다가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얼굴을 들이댈 뿐. 얼굴에 핏기가 가신 쿠라가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그녀의 로브 아랫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라는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말하면 죽는댔지, 쿠라?”

“사… 사… 살…”

흑마법사는 가우르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창백한 입술로 더듬거렸다.

“말하지 않으면 이게 네 죽음의 모습이다.”

아라는 무표정했다. 크세노바는 혀를 차고 앞으로 나섰다.

“마탑 전체보다 멜코르가 더 무서워?”

그는 마치 오늘 점심은 뭐 먹었느냐는 듯 태연히 물었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해봐.”

쿠라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밤의 어둠이 더욱 깊어지면서 저택 정문의 기둥 사이에 불길한 암흑이 스멀거렸다. 그 소름끼치는 기운을 알아챈 사람이 하나 둘씩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데 그 어둠의 중심, 저택 입구에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날 찾으러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라는 그 목소리에 흠칫 굳었다.

“수많은 땅을 넘나들었느냐. 저주받은 종족의 딸아.”

정원에 울리는 남자 목소리는 세련되고 풍부했지만, 그 외형적 특징 외에 ‘사람’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온기나 인격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나락에서 부는 바람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가 부딪쳐 오자 엘프 전사들마저 몸을 떨었다.

저택에 소용돌이치는 어둠은 빛이 없는 공백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빛도 꿰뚫을 수 없을 만큼 짙은 그 순수한 칠흑에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이질감이 있었다. 지카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일어서서는 어두워진 문을 마주보았다.

“네… 네 이놈…”

아라는 이를 악문 채 제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모습… 모습을 드러내거라, 이… 이 겁쟁이놈!”

아라는 활을 잡으며 호통을 치려 했지만,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저택 입구에서 번져나오는 어둠에 마치 삼키운 것 같았다.

“흥분은 금물입니다.”

문을 어리둥절하게 보던 크세노바는 그녀를 말렸다.

“어린아이와 페어리나 죽이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

아라는 얼굴이 공포에 굳은 채 마치 두려움을 쫓으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싸우려면 썩 모습을 드러내거라, 흑마법사.”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공중에 울렸다. 문이 아니라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피부에 불쾌한 압박이 되어 눌러왔고, 공기 중에 죽음과
같은 냉기가 되어 스며들었다. 어둠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엘프 전사들이 무기를 다잡으며 주변을 경계했고, 마법사 하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것이다…”

마침내 웃음을 그치며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 증오… 그 분노… 그 투쟁심…”

말하면서 목소리는 마치 흥분한 듯 고조되었다. 아스타틴은 혐오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余)는 그게 마음에 들어서 너에게 그 구차한 삶을 이을 자비를 주었지.”

마법사의 목소리는 어루만지듯 나지막하고 부드러워졌다.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프라드하나?(주:다크엘프어로 ‘전리품’)”

아라는 말을 분간할 수 없는 분노의 소리를 내지르고는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러다가 크게 휘청인 그녀가 돌아보자 아사나스가 맨
발목을 꼭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피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빨은 쓰지 않고 있었지만, 주인을 올려다보는 노란 눈빛은
이로 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그런 가우르를 마치 울 듯 구겨진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아라는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싫어… 싫어… 죽어버려… 이 개자식…”

잠시의 고요 속에 여러 목소리가 청아하게 영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인연을 매듭짓기는 빠르지, 저주받은 종족의 딸아.”

멜코르 생고로드림의 목소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선물을 남겨놓고 가지.”

엘프 마법사가 주문을 외치는 순간 밝은 빛이 확 번지면서 어둠을 거두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저택 앞에는 거대한 형체가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점차 뚜렷해졌다. 불꽃이 일렁이는 가죽 날개가 펄럭 소리를 내며 밤공기를 휘저었고, 미늘처럼 가장자리가 겹치는
비늘로 뒤덮인 몸은 두 발로 선 도마뱀 비슷하면서 엄청나게 근육질이었다. 발톱이 난 한쪽 손에는 사람 둘의 키를 합친 것만한
대검을 들고, 다른 손에는 거구를 가릴 만한 방패를 든 괴생물의 긴 꼬리는 위협적인 갈고리를 번득거리며 쉭쉭 양옆으로 움직였다.
괴물의 모습이 완전한 실체를 갖추는 것과 맞추어 멜코르의 냉기어린 웃음소리는 차차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이건 또 뭐야?”

랜돌프는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뽑아 경계했다. 엘프 전사들은 즉시 소녀를 둘러서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사퀴엘, 하급악마입니다.”

크세노바는 황금빛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그 말에 아라는 이를 악물었다.

“뭐하는 자이길래 악마를…”

샤퀴엘이 고개를 들어 포효하자 소리에 공기가 진동하면서 뼈까지 소름끼치게 울렸다.

“다들 조심해요!”

아스타틴이 외쳤다.

샤퀴엘은 불덩이같이 타오르는 눈을 번득이며 길다란 입을 쩍 벌려 이빨을 잔뜩 드러내더니 펄럭.. 날아올랐다. 날개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는 지상의 전투원을 향해 똑바로 하강했다. 벼락이 시야에 잔광을 남기며 악마에게 내리꽂혔고, 뜨거운 증기가 강타해오자
다시 그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샤퀴엘은 대검을 내리쳤다. 땅에 주저앉아 떨고 있던 쿠라를 향해.

크세노바가 살짝 손을 젓자 쿠라는 좀전에 크세노바가 그랬듯 모습이 희미해졌다가, 샤퀴엘의 대검이 땅에 우지끈 박힌 바로 옆에 다시
나타났다. 눈이 커다래져서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 아사나스가 그런 그녀 뒤로 소리없이 쫓아갔다.

“이 멍청아, 죽기 싫으면…!”

크세노바의 외침에 샤퀴엘의 불타는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쳇.”

콰직… 소리와 함께 악마는 대검을 땅에서 뽑아냈다. 그런 샤퀴엘과 크세노바 사이를 지카리의 덩치가 막아섰다. 샤퀴엘이 가소롭다는 듯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강풍을 일으켰을 뿐 지카리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지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창과 화살, 마법이 지상의 전사와 마법사에게서 샤퀴엘에게 날아들었다. 크세노바 역시 손을 내밀자 공기가 크게 물결치면서 악마는
비틀거렸다.

아라는 활시위를 귀 뒤로 당겼다가 놓았다. 이번에도 화살이 하얀 빛을 번쩍이며 날아가서 샤퀴엘의 근육질 목에 맞자 전광이 확
번쩍하더니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악마는 다시 한 번 포효하고는 크게 휘청거렸다. 날개의 움직임이 점차 약해지면서 샤퀴엘은
땅에 묵직하게 떨어져내렸고, 추락하는 길에 분수를 들이받아 산산조각냈다. 분수를 거쳐 추락의 속도가 줄어든 샤퀴엘의 거대한 형체는
지카리 위로 쿠당탕 무너져내렸다.

“지카리공!”

아라가 활을 내리며 달려갔지만, 샤퀴엘의 형체는 잠시 붉게 빛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흠… 돌아간 건가.”

크세노바는 말하며 아라와 함께 달려가 지카리를 부축했다.

”…점점 힘든 싸움이 되어가는군…”

지카리는 도끼로 땅을 짚어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아라가 걱정하는 말에 괜찮다고 하는 그의 눈은 지쳐보였다.

분수의 물이 새어나오면서 정원은 재와 진흙, 점액이 뒤섞인 진창이 되었다. 그 위로 아사나스는 쿠라의 목을 물고 질질 끌고왔다.

“크..크세노바!”

마법사는 눈의 초점이 풀린 채 절박하게 재잘거렸다.

“우…우리 알던 사이잖아. 그…그러니까…”

“뭐, 마법사 네가 목숨도 구해주기는 했지.”

아라는 그를 흘깃 보며 말했다. 크세노바는 귀찮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가? 저것이 갱생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아라는 눈빛을 어둑하게 빛내면서 활을 꽉 쥐었다

“아니면 생고로드림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자의반 타의반쯤인 것 같아서 물어보겠는데…”

크세노바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는대로 말해봐.”

“모… 몰라.”

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피했다.

“그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기셨을 거야.”

아라가 위협적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크세노바는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잠시 턱선이 경련하며 그를 노려보던 아라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법사들이 다가와 쿠라를 결박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행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시군요.”

그들이 돌아보자 처음 프리포트에서 그들을 맞아주었던 노스탤지아 요원, 깡마르고 키큰 인간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전 페어리 사건의 주범을 모조리 사로잡으시다니.”

“다 잡지 못했다.”

랜돌프가 저항없이 묶이는 쿠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스승이 남아있지.”

다른 생각을 하는 표정으로 아라가 말을 받았다.

“그쪽이 진짜 문제겠지요.”

크세노바는 끄덕이더니, 쿠라를 연행해가는 마법사들에게 가서 눈과 귀를 가리고 입에 재갈도 물리라고 조언했다.

“집주인은 어떻게 되었지?”

아라가 문득 물었다.

“저택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요원이 말했다.

“마법사들이 하는 말로는 내장이 썩어 죽었다는군요.”

“생전에도 그렇지 않았나?”

아라가 무심히 묻자 요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페어리 녀석들은 바다엘프 배에 무사히 실은 거냐?”

랜돌프의 물음에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아이만 기다리고 있지요.”

그는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소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그때 보고했던 여자… 셀라나 역시 같이 보내야겠다.”

소녀를 보며 아라가 말하자 아스타틴은 흠칫 놀라더니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는 것이…좋겠죠.”

그는 다짐하듯이 말을 이었다.

“셀라나를 위해서도… 당장은 안전할…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는구나, 패스파인더.”

그를 곁눈질하며 아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서 셀라나양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요원이 끼어들었다.

“지금 항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쳐들며 푹 패인 눈을 아스타틴에게 향했다.

“다만, 가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스타틴이 얼굴을 붉히는 사이 아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구나. 아사나스!”

끌려가는 쿠라를 입맛을 다시며 보던 아사나스가 잿빛 어둠 속에 노랗게 빛나는 눈을 그녀에게 돌렸다. 아라는 가우르를 향해
아스타틴을 밀쳤다.

“이 녀석을 항구로 태워가주겠느냐?”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길은 네가 알겠지, 패스파인더.”

아스타틴은 어색하게 아라를 돌아보다가 설레는 기색으로 아사나스의 어깨에 한손을 올리고, 한쪽 다리를 안장에 걸쳤다. 그 순간
아사나스가 확 일어서며 출발하자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아야 했지만.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려면 타는 품새는 좀 고쳐야겠구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프리포트의 새벽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등뒤의 하늘이 잿빛으로 첫 새벽 빛을 밝히고 있었고, 바닷바람이 새벽의 청량함을 품고 불었다. 아직
어두운 서쪽 하늘과 그 아래 절벽을 배경으로 선착장에 선 젊은 여자를 보고 아스타틴은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뭇머뭇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아사나스가 고개로 다리를 부드럽게 밀었다.

출발할 준비를 하며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아스타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셀라나 앞에 섰다. 북적거리는 선창 위에
서있는데도 왠지 이 순간만은 둘만 있는 듯 친밀했다.

“안전한 여행 돼요… 셀라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빛에는 평온한 기쁨과 아쉬움이 함께 섞여들었다. 어쩌면 아쉬움은 그의 착각일까.

“노래… 다음에 다시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가볍게 인사했다.

셀라나는 그의 뒤편으로 눈이 가더니 밝게 미소지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잊지 못할 거에요.”

그의 등뒤로 다가온 아라, 랜돌프, 크세노바와 지카리는 역시 셀라나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와 아스타틴은 서로
자꾸 시선이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아스타틴은 가슴이 확 트이면서 동시에 작게 찌르듯 아파왔다.

“이제 가지요.”

다크엘프 요원이 셀라나에게 선창에 묶은 보트를 가리켜 보였다. 어둑한 절벽을 뒤에 두른 채 앞바다에서 기다리는 배를 향해 엘프
전사들과 다른 요원들이 탄 보트가 하나하나 출발하고 있었다. 엘 라세 쿠다라고 불린 어린 소녀가 주변을 경계하는 전사와 마법사
일단과 함께 탄 보트도 새벽의 어스름 속에 움직여가는 모습이 보였다.

셀라나는 어깨에 두른 얇은 쇼올을 꼭 붙들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잡지 못하고 지켜보다가, 유달리 찬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쳐온 순간 아스타틴은 그녀를 불러세웠다.

“셀라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그는 서둘러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느라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는 올려다보는 그녀와 순간 눈을 마주치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과 놓아주어야 하는 당위 사이에
갇혀, 심장이 몇 번 뛰는 사이 아무 말도 못하다가 아스타틴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지 않겠어요?”

“예…”

셀라나는 시선을 낮추며 미소지었다. 뺨에는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

“꼭… 돌려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그 미소에 담긴 약속에 그는 마침내 팔을 풀 수 있었다. 요원이 보트에 타며 다시 부르자 그녀는 황망히 가서
에스코트를 받으며 보트에 탔다. 다시 돌아보는 셀라나에게 아스타틴은 한 손을 들어보였다. 또 인연을 맺고 또 떠나가는 뒷모습은
익숙한 아픔이었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진짜였다. 그 희망을 위해서라면 그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보트는 아침의 첫 황금 빛이 막 비쳐오는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일행은 말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나중에는 또 얼마나 놀림을 받을까 생각하자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지만, 이 순간은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바다 위로 불어오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프리포트의 아침을 함께 맞이했다.

소감

전투장면이란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쓰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는데, 의미가 있게 쓰려면 어렵죠. 플레이의 재미와 글의 재미 사이에 괴리가 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은 거의 리플레이대로, 중복이나 반복 부분은 줄이고 조금씩 재구성하면서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냥 원본 전투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어서 외부 시점을 사용했고요. 이만큼 일행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했다… 하는 게 극적 의미라면 의미겠는데, 여전히 좀 확신은 없습니다.

‘마법사들’ 꼭지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멜코르 상고로드림의 등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스터 삭풍님도 포스있는 등장이었다고 칭찬해 주셨고, 절대악이라면 절대악이라고 할 수 있는 멜코르의 속성이 드러난 것 같아요. 그러나 과연 실제로 붙으면 그만큼 값을 할 것인가…가 문제로군요. 멜코르가 허망하게 떡실신할 경우 이 부분 글은 차후 수정합니다 (??).

마지막 ‘새벽’ 꼭지는 정서와 심리를 표현하면서도 글을 간결하게 쓰려는 시도였습니다. 아무리 얌전한 남자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음흉해진다는 것이 지론인지라, 원본 로그에서 미묘하게 바꾼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원본: 외투를 얌전히 접어서 셀라나에게 건네준다.
소설본: 외투를 둘러준다는 미명으로 어깨에 팔 한 번 둘러본다!

하는 차이였죠. 물론 저런 건 음흉한 행동은 아니고 신사적인 행동이지만, 너무 좋고 자꾸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꾸 접촉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의도가 음흉해요! (처억) 그래도 역시 개인차는 있는지라 오체스님께 자문을 구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이대로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프리포트 부분이 끝났군요. 여기서부터 일행은 헤루모르, 제국령, 그리고 제국 총독부가 있는 하노버를 누빕니다. 그 다음엔 아직 플레이를 안해서 모르죠, 뭐. 어떻게든 될 거라 믿어요. (룰루랄라)

이오닉스 4~6화 (2): 싸운다는 의미

“싸울 의사가 없는 것들은 도망쳐라. 휘말리기 싫다면.”

“아…”

돌발적인 행동에 아스타틴은 놀라서 아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드레스 차림으로 정원의 조명을 한몸에 받으며 적들과 마주선 그녀는 한
치도 거리낌이 없이 당당했다. 그녀에게 겹치는 또 다른 전사의 모습, 인정하기 싫은데도 마치…

‘텔루르…’

“꺄아아아아악!”

“경비! 경비!”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철문으로 몰려갔다. 그들이 서로 부딪히고 걸려넘어지는 와중에 로시오는 크게 뜬 눈을 희번득거리며 경비를
불렀고, 변장한 연회객과 정원 외곽의 경비들이 무기를 뽑으며 사방에서 다가왔다. 아라가 조명탄을 당기자 정원 혼란 위로 붉은색과
금빛의 불꽃이 높이 솟았다. 마치 환희의 기념처럼, 걷잡을 수 없는 축제의 시작처럼. 담장 밖에서는 마치 화답하듯, 신속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 프리포트의 건물 사이에 메아리치며 가까워왔다.

“후우…”

크세노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팡이에서 리본과 방울을 떼어냈다.

“기습치고는 너무 정직하지 않습니까.”

아라는 대답하지 않고 아사나스의 안장 주머니에 고정했던 일행의 무기를 던져주었다. 지카리의 도끼와 랜돌프의 단검이 주인을
찾아갔고, 아스타틴의 봉 역시 턱 하고 품에 안겨왔다. 크세노바가 눈을 감으며 뭔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아라는 쇼올을 던져버리더니
안장 주머니에서 가죽 갑옷 상의를 꺼내 드레스 위에 걸치고 여밈끈을 대충 당겨 묶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옷의
무릎께에서 치마를 부욱 잘라내서 호리호리한 검은 다리와 청록색 준보석이 반짝이는 은빛 샌달 신은 발을 드러냈다.

단상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는 악사들을 쫓아 단상 위의 경비들이 로시오의 지휘 하에 소녀를 서둘러 저택으로 끌고갔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랜돌프는 양손에 단검을 뽑아들고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고, 아스타틴은 한숨을 내쉬며 준비자세를 취했다. 크세노바가 주문을 마치고 손바닥을 병사들에게 향하자 순간 고막에 팍 압박이
오더니, 병사 한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자신이 느낀
압력은 여파였을 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크세노바는 언제나처럼 그저 평온한 표정이었다.

병사들의 비명이 잦아들기도 전에 철문이 쾅! 열리면서 절도있고 신속한 발걸음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도보 기병대 앞으로! 앞으로!”

청아하고 우렁찬 엘프 목소리가 금속성의 경쾌한 걸음과 함께 울려퍼졌다.

“엘프의 적들에게 죽음을! 죽음을!”

두렵고 우미한 엘프 도보기병대는 정원의 환한 불빛에 희게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마치 한 사람인양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병사들을 빠르게 포위하며 무기를 뽑았다.

병사들이 새로운 적에게 돌아서며 혼란에 빠진 동안 아라는 아사나스의 등에 재빨리 올라타더니, 크세노바의 주문으로 포위망에 생긴
틈을 향해 돌진했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며 그 앞을 서둘러 막아서는 모습을 보고 지카리는 도끼를 내려놓고 옆의 거대한
탁자를 붙들었다. 그의 팔 근육이 불끈 솟자 탁자가 그의 팔에 붙잡힌 채 육중하게 떠올랐다. 그가 무릎을 굽혔다가 팔을 쭉 뻗자
탁자는 훙-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 위로 날아가 병사들에게 내리꽂혔다. 병사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흩어지는 동안 탁자는 귀가
아픈 파열음을 내며 산산히 부서졌고, 그 혼란 사이로 아라는 가우르의 목 위로 낮게 몸을 숙인 채 저택 입구로 달렸다.

다크엘프가 포위망을 막 빠져나가려는 찰나, 공기가 미묘하게 변하면서 저택 앞의 공기가 아지랑이가 핀 듯 일그러졌다. 순간 저택
앞쪽이 밝아오고 살짝 주변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거대한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아라와 아사나스에게 육박해왔다. 아스타틴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루테리.. 아사나스!!”

바로 코앞으로 날아드는 불덩이에 아라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아사나스는, 눈도 못 뜨고 아스타틴의 손가락에서 우유를 할짝할짝
핥아먹던 루테리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바로 굴려 불덩이를 피한 가우르는 주인 위에 납작 엎드려 몸을 덮었다. 바로 그
순간 불덩이는 아사나스 뒤편, 병사들 사이에 내려앉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팔로 눈을 가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도 순간의 잔광이 눈꺼풀 뒤에 하얗게 불탔다. 폭발의 굉음에 발밑의 땅이 흔들리자
아스타틴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몸에 끼쳐오면서 비명이 귀를 찌르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아사나스!’

팔을 내리며 정면을 보자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고, 몸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는 병사가 이내 엘프 기병의 칼에
꿰뚫려 쓰러졌다. 그리고 루테리온, 아사나스는…

매캐한 연기가 걷히면서 아라가 다크엘프 욕설을 중얼거리고 일어나앉았다. 그녀의 앞에 주인을 보호하듯 웅크린 검은
형체의 등은 어긋난 안장 밑에 화상을 입어 짓무른 살에 피와 그을린 털이 엉겨 뭉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스타틴은 속이
뒤집히면서 눈앞이 어질거렸다. 텔루르가 그렇게 떠나갔는데… 루테리온…!

“잘했다.”

아직 상처를 못 본 아라는 가우르의 목을 툭툭 쳐주고 한쪽 무릎을 세우며 일어설 채비를 했다. 아사나스는 크르르릉.. 울부짖으며
일어나지 못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에서 아라는 그의 등에 난 상처를 보고는 천천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흥건한 피와
짓무른 살점이 묻어있을 손을 생각하고 아스타틴은 몸부림이 쳐졌다.

날카로운 여자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이거 재밌네!”

쿠라의 목소리는 이제 아스타틴에게 낯설지 않았다. 엘프소녀를 앞에 잡아세운 채 저택 현관 앞에 선 그 검은 로브 입을 모습을 보고
천천히 피어오르는 증오의 불길도 낯익었다.

“마탑…! 올 줄 알았어!”

쿠라는 반가운 친구가 오기라도 한양 크세노바를 보고 떠들어댔다.

“마탑의 마법사 나으리가 다 오고 말이야. 안녕 크세노바!”

“음? 절 알고 있습니까?”

졸지에 주목받은 크세노바는 자신을 가리켰다.

“어머, 섭섭하네.”

쿠라는 짐짓 손으로 설레발을 쳤다.

“엘리샤라면 기억이 나?”

그녀의 뒤에는 불길한 그림자가 스멀스멀 움직였다. 크세노바는 병사의 불탄 시체를 지나 숯덩이가 된 탁자의 잔해를 밟고 쿠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몇 걸음 더 걷다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났어. 네가 왜 거기 서있는 거냐?”

“멜코르님이 날 받아주셨지~”

쿠라는 깔깔거렸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해줘야 돼?”

“그 양반 오지랖 한 번 넓구만.”

크세노바는 한숨을 쉬었다.

아스타틴은 천천히 아사나스 곁으로 걸어갔다. 달려드는 병사 둘이 랜돌프의 단검에 거의 동시에 쓰러지는 모습도 멀기만 했다.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의 도제나 정원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투, 그 어느것도 상관 없었다. 아사나스가 아파하고 있다는,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남았을 뿐.

“아사…나스.”

그는 가우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상처를 피해 옆구리에 손을 얹자 헐떡헐떡 빠른 호흡이 손에 와닿았다. 아사나스의 확장한 동공과
가슴 깊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분명 상당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지카리가 걸어와 아라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구르는 와중에 한쪽 신이 벗겨진 아라는 다른쪽 신발도 벗어던지고 맨발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크엘프어로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 있거라, 아사나스.”

아사나스를 부드럽게 부르던 목소리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난 저 계집을 죽이고 오마.”

할딱이는 아사나스의 목을 쓸어주고 상처를 살피면서 아스타틴은 그들이, 지카리와 아라와 랜돌프가 크세노바를 따라 저택 정문에
다가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프 전사들이 인간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이제 흑마법사 도제에게 갈 길이 열렸다. 다시 싸움을
위해, 텔루르와 아시타를 앗아가고 아사나스까지 데려갈 뻔한 그 폭력의 진창에.

갑자기 너무나 피곤했다. 죽고 죽이는 저 소용돌이에 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아사나스 곁에서 쓰다듬어주고, 약을 만들어 상처에
붙여주고, 류트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텔루르와 함께 떠돌던 시절처럼 그렇게 서로 상대의 존재를 호흡하며 그 평화에 침잠하고
싶었다.

“제가 치료하지요.”

로브를 걸친 엘프 마법사가 달려와 아사나스를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순간 아스타틴은 싫다고 소리지르며
이 낯선 사람을 밀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이 일었다. 오랜 애정과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의 날실과 씨실로 짠 우리만의 공간에
침범하지 말라고, 바깥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끌고 들어오지 말라고 그렇게….

그러나 아사나스의 눈을 본 아스타틴은 통증에 할딱이는 가우르가 아라를 따르는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주인에 대한 걱정이 아닌,
곁에서 싸울 수 없는 안타까움을. 흑마법사 쿠라 앞에 붙들린 조그만 소녀의 모습이, 그 앞에 맞선 동료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들만의 공간, 그들만의 평화는 이미 없었다. 전쟁으로 격동하는 안힐라스에 그런 평화는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을 지 모른다.
모순일 지는 몰라도 싸우지 않고는 평화도 없었고, 아무도 지킬 수도 없었다. 그렇게 텔루르가 죽지 않았던가. 그래서
노스탤지아에 들어온 것 아니던가.

아사나스의 머리를 쓸어주고 천천히 일어선 아스타틴은 아사나스를 치료하는 마법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저택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원치 않아도 치러야만 하는 그의 싸움을 향해.

소감

도보 기병대가 대체 뭔가 해서 삭풍님께 여쭤보았는데, 보병은 보병인데 무지 빨라서 도보 기병대 (foot cavalry)라는 이름이 붙었던 미국 남북전쟁 때의 부대에서 따왔다고 하시더군요. 잭슨 휘하의 남부군에 있었다는 게 살짝 불길하긴 하지만 뭐 넘어가죠(?). 워낙 신출귀몰했던 이 부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나고는 해서 북군을 크게 혼란시켰다고 하네요.

이 장면에는 이것저것 나오지만, 결국 핵심은 아스타틴의 결심 대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표현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물의 감정선과 심경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를 짜보고 싶었어요. 결국 누구든 싸움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데, 초반에 죽은 안습맨 아시타가 싸우는 이유가 대륙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면 아스타틴은 소중하고 가까운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런 애착 대상이 아사나스 하나가 남은 것 같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일행과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고요.

이오닉스 4~6화 (1): 연회장에서

백만 년만에(..) 다음편 올라갑니다. 해당 플레이 분량은 4화에서 6화의 총 3세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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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은 프리포트에 보기 드문 당당한 건물이었다. 온기를 구하는 걸인처럼 함께 웅크린 빈민촌의 판자집이나 맵시없고 실용적인 가게와
창고가 대부분인 도시 한가운데 하얀 돌로 지은 3층짜리 저택은 마치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돋보였다. 연회를 맞아 정원에 밝힌
등불이 저택의 하얀 전경에 따스하게 비추었다.

정원을 높게 둘러친 담장에 드나드는 철문 앞에는 초저녁부터 무수히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멈춰서서 색색의 의상을 갖춰입은 남녀를
내려놓고 멀어져갔다. 깃털을 바스락거리는 새 의상, 모조 왕관과 드레스와 홀의 여왕 옷, 심지어 뾰족한 귀와 활을 갖춘 엘프
의상까지 상상력을 총동원한 손님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어두워지는 거리에까지 부드럽게 퍼졌다. 누더기 차림으로 거리를 서성이는
꼬마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던졌지만, 대문 앞의 무장경비가 힐긋 쳐다보자 감히 다가가지는 못했다.

또 다른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서더니 안에 탄 사람들이 내렸다. 우선 내린 청년은 금빛 방울이 달린 보라색 모자 밑에 긴 금발을
묶고, 소매 폭이 넓은 짧은 자켓에 셔츠와 풍성한 바지를 받쳐입은 차림 때문에 뭔가 어릿광대 느낌이 났다. 손에 든 지팡이에는
모자와 같은 방울장식을 달고 넓은 보랏빛 리본을 묶어놓고 있었다. 이어서 내린 젊은 남자는 깃털이 달린 모자에 튜닉과 호스
차림이었고, 손에 든 류트가 음유시인 차림을 완성해 주었다. 음유시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여자는 검은 피부 때문에 드레스의
바닷빛 연청록색과 옷단의 은빛이 더욱 돋보였다. 깊이 파인 옷은 무슨 의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연하고 탄탄한 몸매를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은 톡톡히 했다. 그들은 잠시 함께 서서 저택을 보다가 천천히 철문으로 다가갔다.

프리포트의 실질적인 보스, 칼로 데 로씨는 땅딸막한 몸집에 별 특징 없는 얼굴을 한 사내였다. 그러나 페어리를 탈출시킬 배를
조달하고 흑마법사를 유인하는 계획을 도와주는 조건을 제시하는 그의 표정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예전부터 성가시던 자가 있습니다. 아마딤 로시오라는 이름이지요.”

가슴에 백합 문양을 단 부하가 커피를 앞에 내려놓는 동안 데 로씨는 말했다.

“이번에 진귀한 수집품을 손에 넣었다고 좋아하더군요.”

그는 잔에 설탕을 타고는 작은 숟가락으로 갈색 커피를 저었다.

“오늘 연회를 열어 널리 자랑한다고 합니다만…”

커피를 맛본 데 로씨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눈앞에서 물건을 털린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 수집품이란… 설마.”

커피를 건드리지 않은 채 랜돌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 엘프 소녀입니까?”

“이거 상당한 전문가이신가 봅니다.”

잔을 내려놓으며 칼로 데 로씨는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 로씨가 보내준 초대장을 대문 경비에게 보이며 아스타틴은 순간 조마조마했지만, 경비는 초대장은 슥 보더니 지루한 기색으로 그들을 통과시켰다. 일행은 정원의 불빛과 웃음소리 속으로 들어섰다. 정원 한가운데서는 거대한 조각 분수가
뿜어내는 물이 환한 등잔빛을 반사했고, 분수와 저택 정문 사이에 세운 단상 위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다. 가는 길 한켠에서
광대 하나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주변을 순간 대낮같이 밝혔고, 정원에 우거진 나무 사이에는 은은하게 피리와 하프 음악이 맴돌았다.

아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불빛이 환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남자 손님들의 음흉한 시선에 굳으며 창백해졌던 그녀는 몸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인 반투명한 은청색 쇼올을 끌어올리며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눈빛을 여기저기 던졌다. 에스코트하느라 맞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고, 아라는 그런 그를 조금 놀란 표정으로 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을 순간적으로 마주잡는 그녀의 손은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절박했다.

웃으며 이야기하던 손님 중 몇몇이 저택의 정문을 가리키자 시선이 하나하나 그쪽으로 향했다. 손이나 부채로 입을 가린 속삭임이
웅성거리는 목소리 위로 사락거렸다.

체구가 떡 벌어진 중년의 남자가 밝은 조명에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튜닉을 실크 셔츠 위에 차려입고 여유있게 정문에서 걸어나왔다.
아스타틴은 칼로 데 로씨가 보여준 초상화에 나온 아마딤 로시오를 알아볼 수 있었다. 로시오 뒤에 사슬에 묶인 채 병사들에게
끌려나오는 소녀를 보고 손님들 사이로 오오- 탄성이 터져나왔다.

“저기로구나…”

아스타틴 옆에서 아라는 악문 잇새로 작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아스타틴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 꽉 잡았다. 그러는 동안 로시오는
소녀와 경비들을 이끌고 단상 위로 올랐다. 악단이 곡을 끝마친 침묵 속에서 로시오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조촐한 연회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집주인은 큰 덩치에 걸맞게 목소리도 우렁찼다.

“이 로시오, 여러분들을 이렇게 초대할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프리포트 공동체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업을 해온 한
시민으로서 저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도시의 기둥들이신 여러분을 이렇게 뵙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기회를 만든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거들먹거리는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아스타틴은 눈을 돌려 엘프소녀와 경비상태를 살폈다. 창백하고 무력한 채 눈을 내리뜬
소녀는 네 명의 경비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원의 그늘 여기저기에도 무장한 형체가 보였다. 손님도 한 명 이상이 경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로시오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자 아스타틴은 그에게 다시 주의를 돌렸다. 로시오는 몸을 반쯤 돌려 등뒤의 소녀에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손짓했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녀는 흠칫했다. 얼마나 긴장하고 겁먹고 있었으면 그럴까 생각하자 아스타틴은 가슴에 천천히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좀처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품이고 값도 저같은 변변찮은 장사치에게는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이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적은 대가일 뿐이었지요. 이 로시오, 갓 피어나는 초여름과 같은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여러분께 선보임으로써 이 도시를
이끌어오신 노고를 치하하고자 합니다.”

아스타틴은 입안으로 작게 엘프어 욕설을 중얼거렸다. 로시오의 말과 손님들의 환호성에 담긴 의도를 소녀의 어린애처럼 가느다란
팔다리와 겁에 질린 조그만 얼굴에 대치하는 순간 아스타틴은 잘 다듬은 풀밭에 토해버리고 싶어졌다. 애를 두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름다움이라면 적어도…

일행과 합류했다가 낮에 숙소에서 마주쳤던 하프엘프 여자를 불현듯 떠올리고 그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학대의 흔적이
역력한 멍들고 여윈 얼굴에 왜 그렇게 가슴이 덜컹했을까. 가혹한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한 그 불안한
상황에서도 그녀, 셀라나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맑았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의지, 포기하지 않는 그
힘에… 류트 연주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가 혼자 지었던 미소를 떠올리자 그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이곳, 허영과 숨은 폭력의 장소
한가운데서도 무게중심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존경하는 손님 여러분,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로시오는 인사를 하고 단상 위에서 물러났다. 소녀가 경비들의 감시 속에 단상 위 의자에 앉혀지는 동안 악단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로시오는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손님 몇 명에게 둘러싸였다. 그가 가끔 껄껄 웃는 소리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크세노바는 하인이 들고 지나가는 쟁반에서 술잔을 하나 집어들고 짐짓 태연하게 로시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스타틴도 그에게
맞추어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내려다보더니 있던 자리에 남아 주변 동정과 소녀의 감시상태를 살폈다.

어느새 인파 사이로 사라진 로시오를 찾아 크세노바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모습이 경비나 손님의 주의를 끌지
않나 관찰하며 아스타틴은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 취한 듯한 젊은 여자가 짝짝이 눈이 요정 같다며 비틀 몸을 기대오는 것을 적당히
넘기고 다시 둘러보자 크세노바가 정원 산책로 옆의 정원수에 몸을 숨기고 정원 구석의 정자를 감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자의 깊은
그늘 속에 로시오의 금빛 옷이 반사하는 빛이 그가 연신 허리를 숙이는 동작에 따라 언뜻언뜻 보였다.

아스타틴은 눈쌀을 찌푸렸다. 로시오가 굽신거리는 대상은 어둠 속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원 중앙의 밝은 조명을 떠나온
눈이 익숙해지면서 로시오 앞에 선 두 형체, 밤의 그늘보다도 한결 어두운 검정 로브를 알아채고 아스타틴은 차가운 손가락이 가슴을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타틴이 다가가는 사이 크세노바는 그 화려한 외모와 옷 때문에 눈에 띄었는지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리 어디서 본 적 없느냐며
말을 걸었다. 크세노바는 접대용인 것이 역력한 웃음을 만면에 띄며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손님들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동안
크세노바는 아스타틴에게 정자 방향으로 눈짓을 보냈고, 아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원수 사이로 소리없이 걸음을 옮겼다.

“노스… 분명 모습을…”

가까워지면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아스타틴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정자에 더 가까운 정원수에 몸을 붙였다. 조금만 더…

“어르신도 기뻐하…”

저택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움직임에 아스타틴은 심장이 얼어붙었다. 늦은 듯 제복에 단추를 채우며 정원 구석을 서둘러 가로질러가는
급사가 그를 눈치채기 직전에 아스타틴은 정원수의 저택 반대편 이면으로 몸을 옮겼고, 급사의 움직임과 소리가 시선을 끌 것이라는
도박을 걸고 급사가 지나가는 순간을 타 거의 뛰듯 정자 바로 앞의 정원수로 가서 등을 붙였다.

“어르신께서 엘프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시다니 영광입니다.”

역시 눈치채이지 않은 듯, 급사가 지나가는 동안 잠시 말을 멈추었던 로시오의 목소리를 이제 가까운 거리에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아니, 서두를 것 없다.”

검은 후드 밑에서 청량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어차피 노스텔지아 놈들을 꼬여내려고 연 연회니 일을 마무리한 다음이라도 늦지 않지.”

아스타틴은 숨을 삼켰다. 어찌보면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계략이 또 다른 계략의 일부가 되어 서로 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그 거대한 움직임을 일부 엿본 것만으로 순간 현기증이 났다.

“네 사병들은 지금 잘 대기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네.”

여자 흑마법사의 말에 로시오는 더욱 조아렸다.

“지금 연회객 중에 드문드문 섞여서 놈들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습죠.”

역시 손님 중에도… 아스타틴은 슬쩍슬쩍 정원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사병들이 공격해올 것 같은 위기감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아직까지는 평온해 보였다. 크세노바는 아까 말을 건 손님들과 걸음을 옮기며 정원수와 정자에서 떼어놓고 있었다.

“좋아. 나 쿠라의 이름을 걸고…”

쿠라!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로스로리엘에서 추포한 그 흑마법사가 말했던 이름… 그렇다면 이 여자 역시 흑마법사 멜코르의
도제였다.

“일이 성공한다면 스승님께서 크게 만족스러워하실 거라고 보장하지.”

여자의 목소리에는 만족스러운 가르릉 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쳐들어 로시오를 마주보자 후드 밑으로 하얀 턱과 코끝이
보였다. 예예하고 굽신거리는 로시오를 내려다보며 쿠라는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녀석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그것들’을 좀 데려다 놓긴 했지만…”

그녀는 살짝 깔깔거렸다.

“뭐 모자라면 더 죽이면 되겠지.”

차갑고 가벼운 말투에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쳐왔다. 로시오도 그런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때 쿠라 옆의 키큰 로브 쪽이 뭐라고 중얼중얼 말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턱을 매만졌다.

“흐음…”

혹시 들킨 것인가? 아스타틴은 바싹 긴장하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그래서 그 엘프 계집아이 말인데…”

쿠라가 로시오에게 말했다.

“정확히 뭐라고?”

“엘 라세 쿠다던가… 예 뭐 잘 모르겠지만 꽤 귀해보입니다요.”

로시오는 두 손을 비볐다.

“아직 고년이 말을 잘 안하려고 해서 더는 모르겠습니다만…”

‘엘 라세 쿠다…?’

아스타틴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게 뭐지…’

이후 로시오와 두 마법사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최대한 기다리라’거나 ‘한 번에..’ 같은 말을 주고받은 후에 로브입은 둘은
저택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아스타틴 역시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한 후 정원수 사이로 빠져나가 정원 중앙으로 돌아갔다.
짐짓 느긋하게 걸어가 크세노바와 합류하자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손님들과의 대화를 끝냈고, 둘은 함께 아라가 있던 단상 앞쪽으로
향했다.

손님들 사이로 아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아스타틴은 아차 했다. 아라를 혼자 두고가는 것이 아니었다. 추근대는 남자 세 명
사이에서 아라는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듯 어깨선이 잔뜩 굳어있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남자가 털을 두른 망토를 땅에 질질
끌고 모조 왕관은 벗겨질 듯 기우뚱한 채 다가서자 아라는 마치 칼자루를 잡으려는 듯 허리에 손을 뻗었다.

아스타틴과 크세노바는 동시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아라가 분노에 눈을 번득이며 막 입을 여는 순간 남자의 뒤로 다가온 갑옷입은
형체가 그의 어깨에 묵직하게 손을 얹었다. 호기롭게 주먹을 쥐며 돌아선 남자는 시선이 상대의 가슴께에 멈추었다가, 한참 위에서야
투구쓴 머리가 눈에 들어오자 술이 확 깨는 기색이었다. 갑옷 의상을 입은 남자 옆으로 적색과 백색의 화려하고 재빠른 형체가 나서며
다른 두 취객에게 말횄다.

“이만 좀 꺼지지? 험한 꼴 보기 전에.”

남자 하나는 그 말에 욱했다가, 동료의 저지를 받고 갑옷입은 남자의 덩치를 흘깃 보더니 짐짓 식식거리며 물러났다. 붉은색과 하얀색
바둑판 무늬의 꼭 맞는 튜닉을 입은 채 한쪽은 붉고 한쪽은 흰 타이즈를 신고, 머리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모자를 쓴 광대 차림의
랜돌프 에디우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바보놈들.”

“물건은 무사히 옮겼느냐?”

아라는 흘러내리려는 쇼올을 당기며 그에게 낮게 물었다. 그런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이 상황이 상당히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비록 그녀에게 그 말을 꺼냈다가는 얻어맞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었지만.

“어이, 좀 반갑게 굴라고.”

랜돌프가 그녀에게 몸을 숙이자 아라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간신히 억제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연회에서 심각하게 무게잡는 거 수상해. 좀 웃지그래?”

아라는 쇼올을 꼭 잡은 채 노예사냥꾼을 노려보았다. 아라가 당황하고 놀라는 것을 그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스타틴은 순간
화가 치밀어 한 발짝 다가섰지만, 먼저 지카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은 무사히 끝났네.”

그가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열자 인간 모습의 얼굴 윗부분과 연녹색 눈이 드러났다. 페어리를 칼로 데 로씨에게 무사히 인계했다는
얘기에 아스타틴은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문제는 데 로씨를 믿을 만한가였지만, 노예장사를 싫어하기로 악명 (혹은
명성)이 높으며 노스탤지아 협력자이기도 한 그를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에서 만난 친구에게 인사하는 서글서글한 태도로 지카리는 말을 이었다.

“더불어 좋은 소식이 있네.”

“그 윗대가리들이…”

랜돌프는 빙글빙글 웃으며 마치 정말 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듯 정원 위의 하늘에 대고 눈짓을 했다.

“지원군을 결국 보내줄 모양이다.”

그 말에 아스타틴은 눈이 크게 떠지면서 동시에 가슴이 확 가벼워졌다. 노스탤지아 남서부 지역 책임자 소나무 로크와 마법 통신으로
지원군 문제로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했다. (마법 통신의 성격상 드워프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신 머릿속에 울려댔으니
더욱…) 랜돌프의 오만불손함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아라의 집요한 설득에 다소 흔들렸던 로크가 결국 지휘부와 상의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낸 모양이었다.

“뭔가 우리 빽이 대단하다고 그러던데… 알게 뭐냐.”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 지카리의 나지막한 보고에 따르면 엘프 전술예비병력인 도보기병대와 마법사들이 프리포트에 막
도착했으며, 바다요정 함대가 프리포트 외해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주변 건물을 장악해 놓았다더군. 신호만 올리면 들이닥친다고 했다.”

랜돌프는 웃으면서, 아까부터 들고 있던 짧은 봉을 다른 손 손바닥에 탁탁 쳤다.

“저 꼬맹이 일이 좀 커진 모양이야.”

그는 봉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단상을 힐긋 보았다.

“바다요정 놈들은 애만 구하고 바로 빠지겠다는 모양이더군.”

“엘프답구나.”

아라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엘 라세 쿠다…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아스타틴은 좀전의 로시오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소중한 아이인 모양이네.”

지카리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틴은 개인적으로 아이라서 소중한 정도를 떠난 문제이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지카리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어차피 드래고니안의 관념으로는 모든 아이가 소중할 텐데, 그런 그에게 계급이나 차등의 개념을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무슨 짓을 해서든 구해내랍신다.”

랜돌프는 이를 히죽 드러냈다.

“무슨 짓을 해도 자유라니 오히려 환영이지만 말야.”

“나 역시…”

지카리는 단상 위의 소녀를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에 눈가가 주름졌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할일을 찾은 것 같네.”

“쉽지는 않을 거에요.”

아스타틴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대비해 준비도 한 모양이고요.”

그는 재빨리 로시오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요약해 들려주었다.

“그렇느냐…”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함정이라고 가정하고 들어오는 것이 옳았겠지.”

아라는 연회장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단상과 그 위의 소녀를 보았다.

“준비는 끝났구나.”

아라가 말했다. 아스타틴은 그녀의 눈빛에서 냉정한 결의를, 차가운 살의를 읽고 조금 불안해졌다.

“기다려서 뭔가 나아질 것이 있느냐?

“연회를 즐기는 척하면서 좀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말했다. 지켜보면서 경비가 몇이나 있는지, 손님으로 위장한 병사의 전력은 어떤지 파악할 수도 있었다. 굳이
일찍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죽음과 폭력이 검게 소용돌이치는 광기 속에 다시 빠져들고 싶지 않은데. 노스탤지아에 들어온 이상
싸움은 당연한 현실인 것을 알면서도, 텔루르가 죽은 절망에 모든 이성과 제어를 잃고 살인을 저지른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라는 그를 똑바로 보더니 이내 말없이 묵살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가 랜돌프의 손안에서 봉을 잡아채자 노예사냥꾼은 욕설을
내뱉었고 주변 손님들이 이상하게 돌아보았지만, 이미 다크엘프는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아사나스!”

그녀의 날카로운 휘파람이 공기를 갈라놓자 모두 일제히 돌아보았고, 경비와 위장 연회객 몇몇이 다가섰다.

그 순간 들려온 크르렁.. 울부짖는 소리에 손님의 대부분은 얼어붙었지만, 아스타틴은 반가움에 기분이 환해지면서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차올랐다. 밤에서 잘라낸 더 깊은 그림자의 한 조각처럼 그의 오랜 친구, 그 우아하고 치명적인 사냥꾼은 저택 지붕에서
뛰어내려 담벼락 위에 내려서더니 몸을 날려 정원에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만한 상황이었지만,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순간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어쩌면 집주인이 준비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여러분…”

아라의 목소리는 저택 정면과 담장에 울렸했다. 얼어붙어 지켜보는 손님 사이로 아사나스가 유유히 다가와서 옆에 서는 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싸울 의사가 없는 것들은 도망쳐라.”

그녀는 랜돌프에게 빼앗은 신호탄을 양손으로 잡고 당길 준비를 했다.

“휘말리기 싫다면.”

소감

로그를 보면 아시겠지만 노스탤지아와의 논쟁이나 칼로 데 로씨와의 면담은 사실 4화 전체를 차지했는데, 소설판에서는 짧은 회상 대목으로 줄여서 끼워넣었습니다. 너무 줄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귀찮았..(퍽) 플레이하기 재밌는 것과 쓰고 읽기 재밌는 건 또 다른 문제인지라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는데, 역시 큰 갈등이 없는 두 장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요약과 회상 처리했습니다.

인물 중 많이 가공한 건 역시 아스타틴이었죠. 감정선을 좀 더 뚜렷하게 잡아보고 행동 좀 추가, 그리고 시점활용을 통해 심리묘사를 많이 추가했습니다. 오체스님도 괜찮다고 하셔서 그대로 공개 들어갑니다. 랜돌프는 원래 등장이 없었는데 정보전달 목적으로 우겨넣었습니다. 나중에는 도로 뺄까도 했는데 등장 부분이 재미있어서 결국 끝까지 유지했죠. 그 외에 가장무도회 하는 김에 의상 묘사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옷이나 생활상 묘사는 사실 좀 더 자주 하고 싶은 부분인데, 머릿속에 그리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아서 대충 하게 되네요.

이오닉스 2화 외전: 로스로리엘로 가는 길

이오닉스 2화와 시간순서상 동시 진행된 랜돌프 외전입니다. 나머지 일행이 흑마법사와 싸우는 동안 랜돌프가 한 일이죠. 마지막 장면은 2화 3부 시작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로그는 삭풍님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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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아남은 페어리는 열일곱 명이었다. 이 꽃밭이 탄내 자욱하고 연기가 매캐해진 지금, 수십이 있던 자리에는 열일곱이 남아 있었다.
그의 지시대로 모아온 생존 페어리들, 두려움으로 희미해진 색색의 빛과 공황에 흐려진 눈빛, 파스스 떨리는 날개를 보며 랜돌프는
바닥에 흩어진 피투성이, 혹은 검댕이 된 페어리 시체는 억지로 쳐다보지 않았다.

“다 모았어!”

생존 페어리를 모아오라고 윽박지르듯 지시받았던 연녹색 페어리는 그의 앞으로 쪼르르 날아왔다. 불규칙하고 재빠르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그녀는 공포심을 그대로 움직임으로 방출하듯 불안하게 들떠 있었다.

“잘 들어.”

그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음절에 억지로 입 근육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떠난다.”

“어떻게? 어떻게?”

조그마한 얼굴들이 그를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으면…”

랜돌프는 고개를 저으며 양쪽 팔을 엇갈려 가위 표시를 해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포 중에 부르던 이름을 떠올리고 말을 이었다.

“므우루, 만나게 해줄게.”

“므우루?”

“므우루!”

”..어디? ..가..?”

재잘재잘 그들의 말이 빨라지자 띄엄띄엄 들려오는 요정어에 랜돌프는 이를 갈았다. 왜 이 언어를 장난처럼 몇 단어만 배워놓은
것인가. 시간이 있을 때 진지하게 배워놓았더라면… 그는 열심히 생각하며 한 자씩 천천히 말했다.

“같이.. 같이, 나랑. 므우루, 가자.”

“응! 응!”

“므우루!”

”..가, 가!”

페어리 서넛은 그에게 달려들어 손가락이나 머리칼, 옷자락을 붙잡고 끌며 날아갔다. 문제는 다 서로 다른 방향이었지만.

“사람들, 쳐다보면…”

랜디는 눈앞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안 돼.”

“그럼? 숨어?”

그들의 여왕을 만날 생각에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그 똘망똘망한 눈을 피해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널부러진 오크와 페어리 시체
사이에 새장을 보고 그는 생각이 떠올랐다. 페어리 포획용인 저 우리를 이용해 이들을 보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페어리들이
공포에 빠져 이리저리 도망가버리거나 하나씩 잡히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저기.”

그는 개중 제법 큰 새장을 가리켰다.

“들어가, 잠자.”

랜디는 양손을 포개고 그 위에 뺨을 기대서 자는 시늉을 했다.

“깨어나면 므우루, 만난다.”

”..자.. 위험..”

”..도망?”

“므우루?”

그들은 점차 빛이 돌아오는 초롱초롱한 보석빛 눈을 깜박거렸다.

“졸려!”

하얗게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놀라운 속도로 새장 안으로 날아들어가더니 바닥에 누워 자리를 잡았다. 또 하나가 ‘므우루!’를 부르며
쫓아들어가자 순식간에 나머지도 따랐고, 삽시간에 열일곱 중 열여섯 명이 랜돌프가 한 자는 시늉 그대로 포갠 손에 고개를 얹고 그
안에 누웠다. 비좁은 공간 속에서 밀치고 뒤척이다 깔깔거리는 모습을 랜디는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므우루…”

분홍빛으로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그의 얼굴 높이로 날아오르더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만나?”

장미수정처럼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랜돌프는 제기랄, 갑자기 바보같게도 목이 메었다. 그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꼭.”

그는 새끼손가락을 페어리 앞으로 들며 애써 웃어보였다.

“약속!”

페어리는 은은한 분홍빛을 내며 그와 새끼손가락을 번갈아 보다가 그의 새끼손가락 끝을 엄숙하게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쪼르르~ 동료들을 쫓아 그 포개진 색색의 자그만 팔다리와 날개더미 위에 누운 그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더니 새장문을 당겨서
닫았다.

이 생지옥 한가운데서 오직 그를, 그의 약속을 믿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랜돌프는 왠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지막으로 울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10년 전, 집을 떠나왔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이었을 지도 몰랐다.

한쪽 무릎을 꿇고, 페어리들이 놀라도 흩어져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장의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 옆의 땅에 누운 오크 시체가 공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남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가슴이 있는지 비웃듯. 마지막 단말마에 크게 벌어진 입은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잠금쇠는 차가운 종국성을 품고 쉽게도 잠겼다. 마치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고 싶어했던 그 풍경이 지금 내 주위에 펼쳐져 있군.’

그는 타버린 들판과 앙상한 숯이 된 나무들, 깨어진 평화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 혼란스러운 대륙의, 파괴당한 모든 것의 축소판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파괴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먼 길을 돌아오고 별별 어울리지 않는 뻘짓을 해도 결국 그의 자리는
이곳, 겁에 질린 페어리가 든 새장을 들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는 듯이.

‘웃기는 일이야…’

그는 새장을 집어들고 그 무게를, 희미하게 파닥거리며 빛나는 작은 생명들을 가슴에 꾸욱 끌어안았다. 비록 닿는 것은 차가운 쇠일
뿐이었지만.

‘지는 싸움은 안해. 이녀석들만은 반드시 살려간다.’

그 파괴의 현장에 등을 돌리고 그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장면의 종국성을, 그 필연성을 끝까지 부인하며.

로스로리엘을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숲의 지리는 점점 낯이 익었다. 옛 본거지를 향해 이동해가며 그는 가끔 킁킁거리며 수풀을
짓밟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오크떼를 멀리서부터 감지하고 숨어야 했다. 한 번은 페어리들이 소리를 내서 들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세
마리를 처리하고는 페어리들에게 엄격하게 주의를 주어야 했다.

‘에미넴숲 안에서 이정도로 긴장해본 건 딱 두 번째로군,’

점점 익숙한 숲을 걸어가며 그는 주위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리폰 라이더가 숲 바닥에 드리우는 그림자, 나무 사이로 녹아드는 엘프
정찰병의 녹색과 갈색 옷을 찾으며.

‘랜돌프 에디우스가 에미넴 숲 안에서 엘프 정찰병을 애타게 찾으며 이동한다고?’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개도 웃을 노릇이군…’

그때 랜돌프는 긴장한 감각의 가장자리에서 오크도, 엘프도 아닌 기척을 읽었다. 오크라기에는 조용했고, 엘프라기에는 시끄러운…

‘설마…?’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바위와 풀섶 사이에 바로 몸을 웅크려 숨었다. 새장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보이자 페어리들 네다섯 명이 역시 입술에 조그마한 손가락을 대며 그를 마주보았다.

랜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기척이 들려오는 방향을 보았다. 무기와 갑옷이 희미하게 쟁그랑거리는 동안 쇠에 반사한 햇빛이
나무그늘에서 한 줄기 비쳤고, 그를 지나쳐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신속하고 신중했다. 멀지 않은 풀섶 위로 누군가의 망토자락이 쉭
스쳐갔다.

서너 명쯤 되는 그들은 골치아프게도 그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움직임에는 뭔가 찾는 것 같은 목적성이 있었다.

“정말로 이쪽이었단 말이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페어리 부스러기가 있다면 들고 튀었을 거야.”

“게다가 오는 길에 오크 시체까지 봤지. 보통은 아닌 놈이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네 번째,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에는 느긋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랜디는 뭔가 낯익은 기분에 머릿속이 근질거렸다.

“내가 놈이었다면 기척을 들은 순간 몸을 숨겼을 거야.”

페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페어리 마을부터 쫓아왔거나, 뭔가 정보를 듣고 추적해 왔다는 것인가.

‘개같은 놈들…’

랜돌프는 쓰게 웃었다.

‘그냥 넘어가긴 틀렸군.’

자칫 이곳에서 계속 로스로리엘로 이동하다가는 사냥꾼들을 그대로 달고 갈 수도 있었다. 엘프놈들이 아주 좋아 자지러지겠지. 그러려고
한다손 쳐도 여기까지 따라붙은 놈들에게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연히 선수를 쳐야 했다. 죽이겠다는 결론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도달한 랜돌프는 가만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바위 너머로는 주변을 수색하는 노예사냥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옷과 무장을 보니 벌이가 시원찮거나 초보였다. 갈 데가
없어서 결국 이 일까지 내몰린, 몇 년 전의 그와 다르지 않은 뜨내기. 그녀석 왼편 다섯 보 거리에서 수색하는 놈은 좀 더 경험이
있거나 누굴 죽여서 빼앗을 만한 실력은 있는지 꽤 괜찮아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랜디의 오른편 십오 보에는 또 다른
가죽 갑옷 입은 사냥꾼이 보였고, 뒤편의 나무 저편에서는 미늘갑옷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러왔다. 어차피 포위상태나 마찬가지인 이상
포위망을 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죽여도 들키고, 안 죽이면 더 늦게 들키는 차이뿐.

바위에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있다가 랜디는 가장 가까운 녀석이 지나가게 기다렸다. 수풀을 헤치며 놈이 지나간 후에 랜디는 빠르게
일어서서 왼편 가죽갑옷의 등짝에 달려들었다.

뒤에서 목을 긋는 단검의 감촉은 충실하고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지는 적을 놓고 그는 핏줄기를 피해 물러났다.

“썅, 뭐야!”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또 다른 가죽갑옷은 이쪽을 돌아보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저.. 저기..”

가죽갑주조차 제대로 못 갖춘 총알받이는 떨리는 손이 칼자루에 한 번 빗나갔다가 두 번째에야 잡고 칼을 뽑았다. 망설임 없이 바로
앞까지 달려가자 수염도 안 났을 정도로 젊은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랜디는 칼을 내지르는 손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단검끝은
초보 사냥꾼의 갈빗대 사이를 정확이 찾아내어 파고들었다. 그 동작에 등이 나무둥치에 몰린 젊은이가 일으키는 경련이 손에 똑똑히
전해왔다. 그 눈에 빛이 꺼지는 동안 뒤에서는 발걸음이 달려오고 있었다. 랜디는 칼을 휙 뽑으며 돌아섰다.

가죽갑옷이 휘두른 대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떻게 더 생각하거나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미늘 갑옷이
육박해왔다. 랜디는 막으려고 단검을 들었지만 약간, 아주 약간의 차이로 차가운 금속은 단검을 벗어나 눈앞에 번득인다 싶더니
완만하게 휜 넓은 날이 어깨에 날카롭게 베어들며 뺨에 뜨거운 핏방울을 뿌렸다.

더 몰리기 전에 랜디는 단검으로 몸앞을 방어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두 사냥꾼과의 거리를 가늠해 공격범위 내로 치고 들어갈
틈을 노리며 그는 처음으로 미늘 갑옷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에 얼굴에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거한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언월도를 내민 채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 붉게 빛나는 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랜디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과 희열은 여자를 안는 것만큼이나 강렬해 거의 고통에 닿는 쾌감이었다.

“제법이구나.”

그는 히죽 웃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고통은 익숙했다. 견뎌내야 살 수 있기에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왔다.

“원랜 서로 얼굴볼 일도 없이 끝났어야 하는데 말이지.”

“간은 제법 크구나.”

미늘을 입은 거한의 묵직하고 거친 목소리에 랜디는 다시 뭔가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눈깜짝할 사이에 둘을…어?”

사내는 순간 놀라더니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랜돌프 에디우스냐? 이게 얼마만이지, 10년?”

그제서야 랜돌프는 이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에도 키는 컸지만 지금만큼 체격이 떡 벌어지지 않고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청년의 모습이 눈앞의 거한에 겹쳤다. 워낙 오래전이었던데다 목소리마저 그때는 덜 걸걸했으니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세월이 흘렀던가?

더크 콘웰은 랜돌프가 처음 노예 장사를 시작했던 때에 같은 사냥꾼 패에 있던 녀석이었다. 이제 자기 패를 이끌고 있고 무장도 제법
갖춘 것을 보면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런 더크를 보며 랜돌프는 순간 기시감 비슷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가지만 달랐더라면
이들이 서로 반대방향에서 마주볼 수도 있었을까.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 나은가. 랜돌프는 순간 든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

“허어. 나를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군.”

콘웰을 만났을 때는 엘프 이터라는 이름이 붙기 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옛친구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그는 콘웰의 두 부하의 피가 묻은 단검을 돌리며 고쳐잡고, 어느 방향으로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채 눈앞의 둘의
아주 작은 동작에까지 신경을 집중했다.

“하.. 이거 반갑다고 포옹이라도 못하는 게 유감이군.”

콘웰은 붉게 얼룩진 언월도의 날을 그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꼭 피로 끝날 필요는 없다, 에디우스.”

그는 자신과 부하를 가리켰다.

“상황은 2대 1, 너는 부상을 당했지.”

콘웰은 언월도를 고쳐잡아 날끝이 하늘로 향하게 하고 한손을 내밀었다.

“옛정을 봐서 이익을 나누고 끝내는 건 어때?”

“내 이름은 기억하면서…”

대비태세를 전혀 풀지 않은 채 랜돌프는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영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로군.”

“이봐… 페어리 날개면 어차피 큰돈인데 꼭 비싸게 굴어야겠나.”

고개를 젓는 콘웰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 계곡 하나에 가득한 페어리 날개 수익조차 못 나누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야?(주:랜돌프 배경 참조)”

“물론이다.”

랜돌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가 이곳까지 온 기묘한 여정을 더크 콘웰 같은 녀석에게 설명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이해시킬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자신조차 이해 못하는 것을… 그저 콘웰이 기대하고 있는 노예사냥꾼으로서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한 몸은 점점 약해질 것이라고 피에 물든 어깨의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그에게 상기시켰다.
콘웰이 시간을 끄는 것은 그 이유도 있으리라.

“그 액수에 지금 것까지 더하면 난 여기를 떠서 본토에 가서도 왕으로 살수 있지.”

“마음에 드는 태도로군!”

콘웰은 짧게 짖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 그러면 이 위기를 타개해 보라고… 엘프 이터.”

더크의 손짓에 가죽 갑주 쪽은 랜돌프가 튀어나왔던 풀섶, 페어리가 든 새장을 향해 달렸다. 동시에 더크는 다가오며 랜디를 향해
언월도를 내리쳤다.

랜돌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단검날로 언월도를 쳐낸 그는 다른 손의 단검을 콘웰에게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어차피 미늘을 입은
상대를 이런 허술한 공격으로 맞히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시 물러나 주어서 찰나라도 시간을 벌면 그만이었다. 계산대로
더크가 주춤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몸을 휙 돌려 가죽 갑주를 쫓아갔다.

수풀로 달려가는 더크의 부하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커져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따라잡히게 되자 놈은 히익.. 숨을 삼키며
몸을 돌려 맞서려 했다.

놈이 검을 들었을 때 랜디는 이미 가볍게 몸을 돌려서 검날을 지나쳐 적의 턱 밑에 양쪽 단검을 교차시키고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아주 짧은 순간, 랜돌프는 상대의 눈빛 속에서 죽음의 예감을 읽었다. 랜돌프는 앞으로 몸을 날리는 기세를 늦추지 않은
채 팔을 크게 벌려 단검을 양쪽으로 흩뿌렸고, 상대는 목이 갈라진 틈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오랜 경험으로 이미
피가 어디로 튈지 알고 있었던 랜돌프는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선혈이 땅에 팍 튀면서 풀을 붉에 물들였다. 새장을 놓아둔 풀섶 안쪽에서는 날개가 부스스스거리고 작은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페어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만, 성가신 날파리들.

랜돌프는 휙 돌아서며 다가오는 더크와 풀섶 사이를 막아섰다.

“이거 고맙군그래.”

언월도를 짚고 천천히 다가오는 콘웰은 쓰러진 부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나도 수익을 나눌 생각은 없었거든.”

“수익도 살아야 의미가 있겠지…?”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콘웰은 적의 없이 마주 웃으며 언월도를 두어 번 빙빙 돌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이런 말 안 믿겠지만…”

어깨가 피에 젖어오면서 머리가 어질해졌지만, 몰려오는 것은 불안보다는 오히려 벅찬 즐거움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랜돌프는 이를 드러냈다.

“나는 정말 너희들이 좋아.”

그는 경계하며 더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돈 몇 푼에 목숨거는 걸 보라구. 이게 살아 있다,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랜돌프는 조금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콘웰의 움직임을 탐색했다. 이전에 그들 패가 ‘멀대’라고 불렀던 콘웰은 느리고 견고한 움직임
때문에 재빠르고 가벼운 랜돌프에게 번번히 놀림감이 되기는 했지만, 덩치를 키우고 갑옷을 갖춘 지금 그는 완연히 자신의 특징을
장점으로 살리고 있었다.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짓밟아서라도, 이 먼 땅에까지 와서 오직 살아남으려고 변하고 강해진 그의
모습은 어떤 말보다도 웅변적이었다.

“철학이 있는 녀석인가.”

더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철학대로 살다 죽어야지!”

덩치큰 사내치고 콘웰은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휘둘러오는 언월도의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따라가며 랜디는 자신이 더
빠르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 반대다.”

랜돌프는 언월도의 날을 쉽게 피해 오히려 그 공격범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먹고 싸고 자는 거 이외에 다른걸 신경쓰는 놈들따위…”

물러나며 거리를 유지하려는 더크에게 랜디는 바짝 따라붙으며 단검을 내질렀다. 더크 콘웰이 어중이떠중이 사냥꾼패의 키만 큰 멀대였을
때나 꽤나 실력있는 사냥꾼이 된 지금이나, 놈은 랜돌프의 손안이었다. 아니, 세상에 누구라도 랜돌프 에디우스에게 싸움으로 붙을
놈은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어버리라는 거다!!”

단검은 몇 번 챙챙거리고 불씨를 튀기며 더크의 미늘갑옷에 튕겨나왔다.

“성가신 놈!”

거의 넘어질 뻔하며 무리하게 뒤로 이탈해 거리를 확보한 콘웰은 랜돌프의 단검을 쳐냈다.

“그쯤 해먹었으면 이제 죽어!”

랜돌프를 향해 한 발짝 내딛으며 팔을 넓게 벌려 언월도를 비스듬히 위로 향하게 잡은 그는 몸의 무게와 속도를 실어 랜돌프의 가슴을
향해 정면으로 찔러왔다.

총력을 당한 그 공격 속에 랜돌프는 파고들 틈새가 보였다.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날을 왼손 단검으로 쳐내서 빗나가게 한 그는
오른손의 단검을 앞세우고 더크를 향해 돌진했다. 단검이 어깨에, 근육과 뼈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은 묵직하고 충실했다.

“윽…!”

뒤의 나무에 등이 몰린 더크의 입술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동공이 확장하면서 얼굴에 핏기가 가셨지만, 이 사내가 이
정도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랜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거리에서 끝내지 않으면!’

그는 갑옷 틈을 노리며 왼손 단검으로 더크의 반대편 어깨를 찍었다. 물러날 데가 없이 어깨를 관통당한 상태에서도 더크는 이를
악물며 몸을 틀었고, 단검은 쨍- 파찰음을 내며 갑옷에 맞아 빗겨났다.

“비켜라!”

더크가 묵직한 부츠를 신은 발을 내지르자 랜돌프는 뒤로 휙 몸을 날렸다가 균형을 잡으며 착지했다.

고통과 분노에 창백해진 콘웰은 어깨에 단검을 박은 채 랜디를 마주보고 식식거렸다. 역시 실전경험이 있는 녀석답게 억지로 단검을
빼려 드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제기랄…”

랜돌프는 상대를 마주 노려보다가 웃음지었다.

“판돈을 크게 걸었는데 별로군, 결과가.”

“아무리 자네라 하더라도 늘 이길 수는 없겠지.”

더크가 중얼거렸다.

뭔가 느끼고 랜돌프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더크도 기색을 보니 거의 동시에 감지한 모양이었다. 나무 사이에 부는 바람만큼이나
조용하고 신속하게 다가오는 움직임을.

“쳇… 여기까지인가.”

더크는 언월도를 거두고는 다가오는 기척의 반대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엘프 따위에게 죽지 마라, 에디우스.”

콘웰은 숲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돌아보았다.

“가능하면 이 단검에 이자를 붙여 돌려주고 싶으니까.”

“내 이름은 기억하는데 내가 누군지는 기억 못하는거 같군?”

랜돌프는 미소지었다. 콘웰은 이를 드러내 보이더니 몸을 돌려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망할…’

랜돌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일대 일로 싸워도 승률이 육할이 안 될 놈을 패거리와 함께 만나다니, 운수 한 번
더러운 일이었다.

이미 포착당한 이상 도망치는 것은 힘을 빼는 짓일 뿐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지나간 지금 어깨가 욱신거리면서 피로가 급격히 몰려오고
있었다. 그는 새장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될 대로 되라지. 최소한 페어리들을 안전한 곳까지 도피시키기는 했다. 자신이
안전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풀섶을 뒤흔드는 바람처럼 재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그들은 랜돌프를 포위했다. 하나같이 우아하고 강한 숲의 아들딸, 아름다운 얼굴
뒤에 차가운 분노를 숨긴 그들이.

‘된통 들켰군… 아마 변명해도 안 먹히겠지?’

그는 그들이 무기를 겨누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놈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제기랄, 이래서 들키지 않고 도착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그가 페어리를 빼돌리려고 했다면 북쪽, 에미넴 숲 엘프들의 본거지인 로스로리엘이 아니라 남쪽 알프 연방이나 십자군령으로
빠지는 것이 옳았겠지만, 그가 하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을 거라는 확신은 전혀 없었다. 애써 설명하기도 피곤했다. 목적을 달성한
지금은 그저 쉬고만 싶었다.

“일어서요, 엘프 이터.”

올려다보자 긴 검은 머리를 땋아 머리에 감은 엘프 여인이 그를 향해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얼굴은 차갑고 이지적이었고, 날씬한
몸의 동작은 춤추듯 우아하면서도 잘 훈련받은 절도가 있었다. 부상의 고통과 출혈의 멍한 기분 속에서 랜디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가격을 매기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위험수당 5천 골드, 엘프니까 2만 5천 추가, 젊으니까 4만 추가, 미모로 7만 추가, 품새로
2만 5천 추가,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과 태도 때문에 재훈련 비용으로 1만 2천 감액, 군사훈련을 받았으니 위험부담과
구속·감시 비용으로 10% 할인, 그리고 록윌에서 중개상을 하는 돼지놈 딕 손튼의 배때기에 적당히 칼도 들이대가며 흥정해서
15~20% 인상. 16만 골드인가, 17만 골드인가. 록윌에서의 시장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었다. 이래서 중개상에게 넘기는
바보짓은 그만두고 직접 도시에까지 가서 팔겠다고 수십 번을 다짐했었지만, 결국은 매번 록윌에서 넘기고 숲으로 돌아왔었다.

“무기를 드십시오.”

16만—아마도?—골드짜리 엘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싸우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습니다.”

잠깐, 저 대사는 보통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뜻인데 오히려 무기를 들라고? 검은 눈 뒤에 차갑게 타는 분노를 멍하니 마주보다가
랜디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죽일 수 있게 전투원이 되어달라는 얘기인가. 그는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저
정도 명예감이면 위험부담 할인은 5% 정도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제국에 어떤 바보가 당했다듯 침실에서 칼에
찔려 비명횡사할 놈은 없을 테니.

“나도 여자는 안 죽여.”

지친 목소리는 쉬어서 나왔다.

“그러니 내가 다른놈들을 때려잡고 당신을 잡아다 팔아먹을 수 있게…”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저어보였다.

“뒤로 좀 물러서 주겠나?”

“무기를 들었는지 상관해야 합니까?”

활시위를 당기는 끼긱.. 소리가 났다. 활을 든 궁수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이미 본색을 보인 것 같은데요, 아일리스.”

랜돌프는 단검을 칼집에 꽂고 망토를 벗어 손에 쥐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노예사냥꾼일 수밖에 없다면 철저한 사냥꾼이
되리라. 양심도, 후회도 없는 한 마리 육식동물처럼.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 사냥감에게 죽는다면 운이 다한 것일 뿐, 불평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었다.

“저자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겠지요.”

아일리스라는 여자는 자세를 낮추며 랜돌프를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물러서요.”

“아일리스…!”

동료들은 저지하려고 했지만, 엘프 여인은 한손에는 단검, 다른 손에는 가느다란 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작은 이들을 확보해요.”

그녀가 랜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시하자 엘프 두 명이 서둘러 와서 새장을 가져갔다. 랜디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일리스의
지시대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기를 내려놓은 놈도 없었다. 활까지 쏘기 시작하면 버틸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한두 대를
쏘는 동안인데… 어쨌든 일단 걱정해야 할 건 이 당돌한 엘프 여자였다.

“내가 누군지 아는거 같은데…”

다시 아일리스에게 집중하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감히 나와 일대 일로 싸워보겠다는거냐?”

“나는 그대와 같지 않으니까요, 엘프이터여.”

아일리스의 고요한 눈은 그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폈다.

“이렇게 만나기를 고대했습니다. 나의 친우들이 숲에서 끌려간 이래.”

말을 맺기가 무섭게 그녀는 그의 손을 향해 단검을 던졌고, 랜돌프는 재빨리 망토를 쳐들어 막았다. 북.. 하고 망토가 찢어지면서
햇빛이 그 틈으로 비쳐들었지만, 칼날의 속도를 줄여 튕겨낼 수는 있었다.

엘프는 무표정하게 단검을 또 하나 꺼내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망토에 엉킬까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피는 계속
흘러 어깨와 팔에 차갑게 굳어갔고, 기운은 자꾸 빠져갔다.

“눈빛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지.”

그는 이죽거렸다.

“보아하니 내가 출혈로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 셈이냐?”

“그렇다면 아쉬운 일이겠지요.”

말하며 아일리스는 다시 단검을 던졌다.

제기랄, 더 끌 시간이 없었다.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날을 다시 튕겨내고 랜디는 그 자신의 단검을 휘두르며 바로 달려들었다.
아일리스는 왼손의 검을 침착하게 들어 공격을 흘려냈고, 바로 이은 공격은 허리를 숙여 피했다.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헤쳐왔다.. 나는.’

점점 지쳐가는 것을 느끼며 랜디는 빨리 끝내기로 결심했다. 단검을 막아내느라 너덜너덜해진 망토를 놓으면서 그는 엘프가 검을
휘두르는 공격범위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가 허를 찔린 짧은 순간 속에 단검자루로 내리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긴다!!’

강한 타격감과 함께 뼈에 따악.. 맞는 소리가 나면서 아일리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야지! 날카로운 승리감과 짜릿한 흥분이
올라왔다.

그러나 재빨리 물려나려는 순간 랜돌프는 고통에 눈앞이 아찔했다. 내려다보자 아일리스가 든 가느다란 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해져서 헉헉거리며 엘프가 지그시 칼을 비틀자 통증이 눈앞에 하얗게 점멸했다.

멀어지려는 의식을 이를 부서져라 악물어서 붙들고 그는 무릎을 세게 올렸다. 남은 힘을 쥐어짠 무릎차기가 맞기 전에 아일리스는 칼을
빼면서 몸을 돌려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의 피가 검끝에서 흩날리며 춤추듯 움직이는 동작의 궤적을 따라갔다.

이제 5m 정도의 사이를 두고 아일리스는 숨을 헉헉거리며 그를 마주보았다. 갈빗대에 손을 대고 몸을 숙인 모습이, 아까 칼자루에
맞아서 갈빗대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랜디는 옆구리로 피가 뜨뜻하게 흘러내렸다. 고통 때문에 구토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칼을
내리거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일리스 옆의 어린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자 아일리스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활을 내리게 했다.

“일대 일 싸움이었다.”

말은 궁수에게 하는 것일지 몰라도 시선은 랜디를 향하고 있었고, 그는 어질한 와중에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대 일이었다. 인정하지.”

그러나 둘의 싸움은 끝났을지 몰라도 공기중에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적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일리스가 막든 안 막든
금방이라도 공격이 들어올 태세였다. 자꾸 흐려지는 시선으로 둘러보며 랜디는 어느 방향에서 공격이 다가올지 가늠했다.

그 순간 작고 급한 날갯짓이 웅- 하고 공기를 울리더니, 아까 그 분홍빛으로 빛나는 페어리가 그의 앞에 나타나 공중에 뜬 채
막아섰다.

”..줬어! 므우루.. 만나.. 댔어!”

페어리어로 한 말을 랜디보다는 잘 알아들었는지 아일리스의 가느다란 눈썹이 조금 치켜올라갔다. 페어리를 지나 랜디를 보는 시선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더 견딜 수 없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안도감 때문일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고, 앉을 힘조차 없이
그대로 풀 위로 쓰러졌다.

“들것에 싫도록.”

멀어지는 의식 속에 아일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이번엔 진짜 죽을뻔 했나…’

“잘 감시하라.”

‘저 날파리 같은 녀석들이… 구해준… 건가…’

무거운 눈꺼풀을 감기게 내버려두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아마도 괜찮으리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몸으로는 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싸움을, 경계를 잠시 놓아버려도 되었다. 잠시라면. 사무적인 손 여럿이 그를 받쳐올리고 이내 평평한 표면 위에
편히 누워 흔들리는 막연한 인상만을 남기고 그의 의식은 까마득한 어둠에 빠져들었다.

그는 문득 방안에 가득한 햇빛을 인식했다. 눈에 파고드는 햇살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눈을 도로 감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는 시야를 커다랗게 분홍빛으로 차지한 페어리가 눈꺼풀을 억지로 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눈 떴다?” “이제.. 깬..야?” “므우루?”

주변에서는 페어리 목소리들이 종알거렸다.

“저리 가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 쇳소리가 되어 나왔다. 꽤 누워있었던 모양이었다. 성가시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날파리들…”

꺄악! 페어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용어로 한 말이었지만, 언성은 언어를 가리지 않는 법이었다. 페어리들은
자기들끼리 두런거리며 좀 거리를 두고 모여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랜돌프는 그들을 셀 수 있었다. 분홍, 하양,
녹색, 보라, 노랑 색색의 열일곱 개 작은 빛을.

해냈는가. 깨끗하게 붕대를 감아놓은 채 가끔 가볍게 욱신거리는 부상 외에 그가 이렇게 무사히 있고 페어리도 열일곱 모두 괜찮다면
이곳은…

“로스로리엘?”

페어리어로 묻자 작은 요정들은 일제히 재잘거리며 대답했다. 그 속에서 랜돌프는 ‘로스로리엘!’ ‘엘프!’ ‘이뻐!’ ‘므우루!’
하는 말을 분간했다. 이곳은 로스로리엘이 맞고,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로 그는 대충 이해했다.

“므우루?”

그는 다시 물었다.

“만났어?”

“므우루! 므우루!”

그들은 들떠서는 색색의 빛을 흩뿌리며 방안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춤추는 빛무리 사이로 은은한 푸른 빛으로 빛나며
므우루가 방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전에 봤을 때보다 빛은 조금 약했지만, 건강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그를 보고 그녀는 작은 손을
모으며 환하게 웃음지었다.

“일어나셨군요. 아직은 일어나시지 않는 것이 좋아요.”

‘아아.’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다시 푹 누웠다. 신이 난 미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성공했나, 그 떨거지들…’

살아남은 페어리, 그리고 그들의 여왕을 구해낸 것은 그와 그들이 함께 이루어낸 승리였다. 뭐 하나 지킬 것도, 아쉬울 것도 없던
그의 삶에 이런 순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꽃밭 위를 춤추며 날던 므우루와 그녀의 동지들을 떠올렸다. 잔잔한 음악소리에 귀기울이던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맑은 웃음을.

”…미안.”

잠시 침묵하다가 그는 그들의 언어로 말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빨리 못… 갔다. 미안.”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만 있었더라면 이들을 지켜주고 싶었었다. 이들에게는 악귀처럼 살아온 랜돌프마저 믿을 수 있는
순수라는 것이 있었다. 망가지고 다치고 혼탁해지지 않은 한 가지를 남길 수 있다면, 아득바득 살려고 버둥거리며 피에 젖어 살아온
그의 삶마저도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으리라.

그의 말에 므우루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공용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건 우리 잘못이었는 걸요.”

고개를 든 그녀는 묘하게 무표정해지면서 그를 마주보았다.

“이렇게 무사하니 그걸로 되었어요.”

그를 지나 까마득히 먼 곳을 꿰뚫는 므우루의 눈빛에 랜돌프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여전히 그 먼 곳을 보는 눈빛으로 그녀는
말했다.

“무사하니까…”

“너…”

그때 열매를 찾으라며 그들을 보낸 것은 그렇다면 설마… 랜돌프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믿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의 순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말을 잇기 전에 문에서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여자가 하나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일리스는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들더니 자연스럽게 므우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계신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혹시 방해했다면…”

아일리스가 가볍게 목례하고 물러서려고 하자 므우루는 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전혀 아니랍니다. 랜돌프씨 선물인가요?”

“페어리 레이디와 그 친구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

그녀는 랜돌프를 흘깃 쳐다보았다.

“남부 에미넴 숲으로 파견했던 일행이 보냈습니다.”

아일리스는 곱게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므우루의 손짓에 상자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그녀 앞에 와서 뜨더니, 묶은 리본이
스르르 풀어지면서 뚜껑이 열렸다.

므우루가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살짝 들자 상자가 떨어져 내리는 동시에 삐죽삐죽하고 울퉁불퉁한, 게다가 반토막이 난 갈색 열매가
둥실 떠올랐다. 랜돌프는 순간 긴장했지만, 므우루의 부탁으로 찾으러 갔던 저놈의 물건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났던 그 지독한 냄새는
이제 없었다.

“어머…”

므우루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지었다. 아일리스가 어리둥절하게 보는 동안 랜돌프는 피식 웃으며 뒤로 등을 기댔다.

“더럽게도 비싼 열매였어.”

므우루가 이 열매를 찾으러 그들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마법사와 오크떼가 습격했을 때 그들이 페어리 꽃밭에 함께
있었더라면, 그 파괴와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좀전 므우루의 묘한 표정을 떠올리고 그는 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므우루가 손을 저어 아카마카 열매를 방 가운데 있는 탁자에 올려놓자 열일곱 명의 페어리는 웃고 떠들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다가 랜돌프는 아일리스가 다가오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녀가 침대 옆에 와서 서자 그는 페어리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사과할 생각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일리스를 마주보았다.

“나는 그런 놈이 맞으니까. 너는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

아일리스는 그를 무표정하게 보다가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미소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검집을 칼에 씌우고 싸운 것은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될까요.”

“몰라서 물어?”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죽이면 잡아다 팔 수가 없잖아.”

아일리스의 눈빛과 얼굴은 마치 고요한 수면 같았다. 그 이면에 작은 파장이 이는 것처럼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몇 가지 스쳐가더니
그녀는 다시 무표정해졌다.

“얼마였지요?”

“음?”

“저를 잡아다 팔면 얼마가 나왔을지요.”

조용하고 하염없이 깊은 눈빛을 마주보며 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시선을 피해버렸다. 엘프란 다 이런 식이었다. 눈을 마주보다
보면 그 세월과 상념의 깊이에 숨이 막혔다. 잡혀가는 길 내내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어느 엘프 여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좀 보라고 얼굴을 후려쳤던 기억에 그는 그 감각이 선명한 오른손으로 침대보를 꽉 잡았다.

”…최소한 15만 8천 355골드다.”

그는 아카마카 열매와 페어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최소한이야. 중개상에 파는 값이 그러니까 현지에서는 두 배, 세 배다.”

아일리스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엘프 이터.”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당신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녀는 재잘거리며 방안을 날아다니는 페어리들을 눈으로 따랐다.

“그리고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아일리스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일 델 라 쿠데 알라미사. 편히 쉬도록 해요.”

“태양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여…”

경쾌하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엘프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 뜻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길에 빛을 비추기를.”

“나갔다~~” “나간 거야?” “놀자~” “놀자~”

미처 생각할 새도 없이, 페어리들은 아일리스가 나가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 하나가 어깨의 상처에 돌진하듯 부딪히자 그는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를 죽일 셈이냐!”

그는 파리를 쫓듯 손을 저었다.

“저리 가 이 날파리 놈들아! 나도 좀 쉬자!”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은 또 하루 사신 (死神)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기쁨 때문이리라. 삶이라는 끝없는 투쟁 속에서…
소란스러운 방안에 창밖의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며 구석까지 빛을 환하게 밝혔다.

소감

삭풍님 대신 제가 대리진행했던 외전이었는데, 겁스 룰을 잘 모르다 보니 (정확히는 좀 무서워하죠(..)) 전투 부분도 안 굴리고 대충 했습니다. 제가 인터넷이 미친 듯 끊겨서 결국 마무리는 삭풍님이 해주셨죠. 길지 않은 플레이라 대체로 로그를 따라서 썼는데, 끝에 가서는 살짝씩 편집하고 축약한 대사가 있습니다. 특히 므우루가 일행을 열매 심부름 보낸 이유를 나름 만들어 붙였는데, 여기서는 암시 정도로 처리했습니다.

진행에 딱히 준비한 것은 없었지만 이방인님이 생각해두신 게 있어서 둘이 얘기해서 하니 편했습니다. 재밌게 한 플레이였고, 랜돌프라는 인물의 여러 면모가 드러나서 흥미로웠습니다. 소설 형식을 통해 그 깊이를 더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폭력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페어리를 위한 역설적인 헌신 등 한 인물의 복합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1:1 플레이의 묘미죠.

새로 NPC를 만들어서 RP한 것도 이번 플레이의 재미였습니다. 더크 콘웰은 나중에 본편에서도 삭풍님이 등장시키셨고, 아일리스는 이 플레이 이후에 쓴 안식의 로스로리엘 대목에 로스로리엘 묘사를 대폭 추가하면서 제가 활용했습니다. 콘웰이야 뭐 ‘무자비한 노예사냥꾼 A’로 써먹기 좋은 인물이고, 랜돌프와 지인이기도 하니 더욱 편리하죠. 어찌보면 랜돌프가 될 수 있었던 모습이기도 하고, 사실 성격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 삶의 모습이나 입장은 반대인 점이 역설적입니다.

아일리스는 원래 랜돌프 상대역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아라와 랜돌프 사이의 긴장감이 급부상하면서 좀 밀려난 느낌입니다. 안식의 로스로리엘에 암시를 넣었듯 아스타틴과도 과거에 인연이 있고, 아스타틴 아버지의 먼 친척쯤 될 것 같습니다. 그 뻣뻣한 성격 때문에 이방인님 말씀마따나 놀려먹기 좋아서 다시 등장해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소설판은 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꽤 재밌게 작업했습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은 많이 써보기도 했고, 또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장편과는 달리 쉽고 재밌죠. 결말이 나지 않은 캠페인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과는 달리, 어떻게 끝나는지 아니까 방향성이 확실하기도 하고요. 특히 전투가 두 번 있어서 전투 묘사 연습하기에 좋았고, 쓰기도 재밌더군요.

글 봐주신 천루님 지적대로 왠지 요즘 글은 묘사가 폭주해서 이번에는 좀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래 제가 묘사 그렇게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야 한다는 생각에 좀 열을 올렸던 것 같네요. 이제 어느 정도 기본 묘사를 깔아놓았으니 분량을 적절히 조절해야겠습니다. 4화 본편부터는 전투도 많고 하니 편집과 축약의 미를 더욱 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아일리스의 시세는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계산기까지 두드려가며(..) 열을 올렸는데, 랜디의 과거와 노예사냥꾼으로서의 생활에 구체적인 깊이를 더하는 장치였던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역설정을 하든 인물을 만들든 저는 항상 경제적인 고려를 우선 하는데, 랜돌프와 더크 콘웰도 노예사냥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먹고 살고 유통 구조(..)는 어떤지 생각하니 한결 인물이 구체적으로 잡히더군요. 한편 이종족들도 자신이 노예로 팔리면 얼마나 비싼 몸인지 자기들끼리 농담하면서 가혹한 상황을 유머로 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참가하신 이방인님, 그리고 관전하시고 마무리까지 해주신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분 다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까지 해주셔서 더욱ㅠㅠ 더욱 발전하는 소설로 보답하겠습니다! 비록 느리지만 (엉엉)

이오닉스 외전 – 그들만의 게임

잿빛 메타포노비아의 아시타와 아스타틴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아시타 시점은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했는데 거짓말이었..(..?) 나중에는 시간 순서대로 정리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별문으로 올리겠습니다.

내용상 주의사항: 여성 동성애 암시 (과연 암시만?), 폭력과 죽음.

메타포노비아의 잿빛 대지 위에는 잿빛 새벽이 밝아왔다. 그 속에 하품을 하며 아시타는 숙소 밖으로 나섰다. 동료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서늘한 새벽 바람 속에 서자, 오른쪽의 동녘에서 시작해 정면의 남쪽 하늘까지 희미한 홍조를 띈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 다크엘프의 수도 외곽 정착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나는 이들, 아마도 가축 먹이를 주거나 밭에 나가는 사람들이 어스름 속에 그림자처럼 움직여가는 모습이 띄엄띄엄 보였다.

문앞에 기다리는 다크엘프 전사들은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인 것이, 인간 튀기 따위를 그들의 지도자 프리야 마타 앞에 데려가려고 잠을 설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시타는 일부러 더 밝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과장스레 허리숙여 인사했다.

“세계수의 그늘 속에서 축복받은 아침입니다, 용감한 전사들이여.”

인간 혼혈이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실에 놀랐다면 그 사실을 들키기에는 자존심이 강하거나 졸린 모양이었다. 창을 든 오른쪽 전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질 뿐, 검을 찬 왼쪽 전사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프리야 마타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일시적이었지만 그들에게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집에 그들을 여주인으로 모시는 남편이 적어도 한둘은 있을 터이고, 한 번도 남자를 동격으로 생각해본 적 없을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남자인데다가 원래는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 죽었어야 할 혼혈인 그가…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분명 작고 날카로운 쾌감이었다. 동맹과 사절의 특권이란, 그리고 인간들의 침탈과 노스탤지아의 존재는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을 상황을,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다.

오른편의 전사는 신발 바닥에 묻은 더러운 것을 보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 절도있게 돌아서더니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잠이 부족했는지 갑자기 피곤했다.

그들은 텅 빈 노스탤지아 연락기지 마당을 가로질러 메타포노비아 남문으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에 목책을 두른 도시의 모습은 정면에 압도해 왔다. 특별히 번영하거나 호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지만, 메타포노비아에는 그런 외형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안에 새끼가 바들바들 떠는 굴을 지키는 암여우처럼, 구석에 몰리면 어떤 제어나 한도도 없이 행사할 폭력과 결코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이.

아아, 여자들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또 새끼 지키는 암컷이 뭐냐. 하지만 정말로 이곳 다크엘프, 그의 아버지를 낳은 민족의 힘은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의 것이었다. 무겁지 않고 예리했고, 무차별적이지는 않았지만 포기를 몰랐다. 어떤 비하하는 의미도 없이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 이곳은 암컷의 도시였다. 그렇기에 시야 가장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보다 빨리 움직이며 단어의 억양 하나, 떨리는 속눈썹의 그림자 하나에 확확 달라지는 이곳의 숨막히는 정치는 그에게 애당초 불리한 그녀들만의 게임이었다.

호위 내지 감시병을 따라 남쪽 문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문득 세계수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남쪽에 있는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에서는 도시의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머니의 폐허를. 아마도 연락기지의 배치는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경비하는 전사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서 세계수를 지켜본 것에 그는 자부심과 다시 유치하고 약간 악의어린 기쁨을 느꼈다.

해뜨기 전의 잿빛 그늘이 무겁게 내린 메타포노비아의 거리를 걸으며 그는 이 길의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생각했다. 원래 프리야 마타는 다크엘프 최고 군사지도자인 라카’쟈나인을 이을 후계자였지만, 현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는 라카’쟈나인이 공석인 상태에서 벌써 근 30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전대 라카’쟈나인인 이샬헤브라의 복수를 하기 전에는 취임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얻은 종교적 정당성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에 힘입어 다크엘프 부족들에게 유례없는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노스탤지아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흔히 번역해서 라카’쟈나인은 ‘여왕’, 프리야 마타는 ‘공주’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샤나에리스야말로 다크엘프 최초의 여왕이었다. 프리야 마타는 물론이고 어떤 라카’쟈나인도 자긍심 강하고 뻣뻣한, 각자가 자기 집과 부족의 주인인 부족장들에게 이리도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부에 보고할 때마다 본 그녀였지만, 그녀의 본거지인 메타포노비아에서 다른 지도부 없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족의 여왕으로서의 그녀를.

라카’쟈나인의 집이자 지금은 공식적으로 주인 없는 궁, 하타라야로 가는 길은 문에서부터 똑바로 가는 대로가 아니었다. 종종 굽어지고 꺾이는, 불과 수레 두세 대 정도가 나란히 지날 만한 길은 요소요소마다 방어군이 엄호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끼고 돌았다. 올려다보면 종종 목책 위의 거점에서 뚜렷한 사선이 확보되어 있었다. 삼면에 강력한 세력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드워프족은 모두 우방이었고, 엘프들은 파괴당한 세계수를 마주할 수 없어서라도 이곳에까지 올 일은 없을 텐데 왜…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침묵하는 두 전사와 걸음을 옮기면서 아시타는 하타라야로 가는 길이 어떤 공격군을 경계하는지 문득 깨달았다. 내부의 경쟁자. 다른 부족장과 전사들, 하나같이 자신의 집과 부족의 주인인 저 자존심 드높은 쟈나인–여인, 여주인, 여왕, 그들의 언어에는 구분이 없었다–들이 라카’쟈나인의 한 발짝 뒤에서 끝없이 계책을 세우고 지켜보고 기다리고, 때로 움직이는 한 이곳 허무의 대지에 진정한 여왕이 설 수 있을까.

심지어 그들의 그림자 여왕인 샤나에리스마저도 다스리되 군림할 수는 없었다. 하타라야의 접견실에 온전히 그의 편이 있다면 바로 프리야 마타 자신이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지지하는 사안이라 해도 족장들은 정식으로 통합 부족회의 안건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를 올리고 노스탤지아의 요청을 정식 안건으로 내놓는 역할을 맡은 행운아가 바로 아시타 자신이었다. 뭐 실은 전령단 전체였지만, 동료들은 연락 기지에 두고 왔으니 이제는 혼자의 몫이었다.

정신나간 녀석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임무일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계율과 관습상 자신 같은 하프다크엘프는 보자마자 죽여버리는 사회에 호기심이 동해 닥치는 대로 공부할 정도로 미쳤다거나, 세계수를 한 번 보고싶어 이런 임무에 자원할 정도로 무모한 녀석이라면… 그런 바보라면 다크엘프 부족장이 모인 자리에 나가 군 통수권을 이양하라고 요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의 끝에는 허무의 대지치고는 꽤나 높은 하타라야가 버티고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타는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타라야는 드워프 건축가가 보면 수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그 무자비하도록 실용적인 선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1층은 돌, 2층은 나무로 지은 큰 집은 별다른 장식이나 편안함 없이 여기저기 굴뚝과 탑이 솟아나왔고, 유리가 없는 좁은 창문이 경계하는 눈처럼 거리를 내다보았다. 전사들을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이곳 특유의 사나워보이는 닭 몇 마리가 꼭꼭거리며 발앞에 흩어졌다. 주 건물 양옆으로는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앞에 얼쩡거리는 전사들과 가우르, 남자와 아이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두 호위전사는 하타라야 정문을 비껴나 왼편 벽에 난 문으로 그를 데려갔다. 문에 접근하면서 그는 문앞에서 여인들이 뭔가 낮게 얘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그와 말없는 호위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단숨에 그 눈빛이 적의가 되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들의 시선에는 적의를 넘어 살의의 싸늘함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허리로 갔다가 아시타는 하타라야 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주의사항대로 방에 놓고왔다는 것을 기억했다. 이론적으로 그의 안전은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두 전사가 책임지게 되어 있었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을 어쩌랴. 게다가 더욱 살떨리게도, 비교적 고급 옷이나 무장으로 보아서는 부족장 혹은 비슷한 급인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차고 있었다. 아시타는 벌거벗은 듯 무방비가 된 기분이었다.

벌거벗은 생각 하니, 여인들 중 셋은 나이가 좀 지긋했지만 둘은 제법 젊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고위 전사들은 그를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인사하며 한 명씩 문으로 들어갔다. 그 중 하나는 어깨에 활을 멘 궁수였는데… 어라?

“니아?”

순간 너무 반갑고 의외여서 그랬을까,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이름부터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키였지만 당당하게 치켜든 턱과 냉랭한 눈빛에는 그를 굽어보는 것 같은 당당함이 있었다. 그 눈빛은 그를, 모든 접근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입을 살짝 벌렸다. 눈이 마주친 찰나 그는 다시금 마법사의 불타는 실험실에서 오르는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았고, 밤하늘 아래 실험실의 잔해에서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고 있었다. 품안의 죽은 아이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않는, 생존에는 관심도 없는 그 노예 여인을 붙들고 아시타는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었다. 나중에 탈출하는 행렬에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복을 빌어주었었는데…

그런데 이 여인은 임페리얼에서 탈출하는 길에 그에게 즐겁게 재잘거리고, 때로는 죽은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훌쩍훌쩍 울던 그 아이같던 여인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은 전사 귀족의 얼굴을 한 그녀는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들 니아… 혹은… 어쨌든 그 다크엘프 전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것이 아시타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왜 생각없이 그렇게 부른 걸까. 더듬거리며 막 사과하려는 그에게서 돌아서며 니아는 주변의 전사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이 자를 아느냐?”

나이 지긋한,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아마도 니아의 어머니인 여인이 말했다.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잠시 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자 니아의 어머니는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그녀는 딸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들어가서 기다리마.”

마주보는 모녀 사이에는 뭔가 말없는 대화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도 엿들을 수도 없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가깝고 긴 연(聯)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대화. 소속도 없고 가족도 없는 그에게 그 침묵의 대화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얘기하던 사람들이 하타라야의 옆문으로 들어간 후에 여인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가 손을 저어보이자 두 호위전사는 즉시 허리를 숙여보이고 물러났다.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원치 않는 목숨을 구제받았던 니아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분명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지금 이곳에서 떠나라.”

“예?”

아시타는 당황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하타라야의 문지방까지 와서 돌아가라고?

“목숨을 구해준 것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적대감도, 웃음기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이곳을 떠나. 하타라야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시타도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을 두고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고운 먼지를 품고 부는 바람처럼, 도시의 지붕 위로 비쳐오는 햇살처럼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그가 뭔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 호위전사가 아니면 무기는 소지할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모두가 달려들어 맨손으로 죽이려 드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그전에 프리야 마타의 호위병이 먼저 반응할 것이 틀림없는데.

질문은 끝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한 말만으로도 넘치도록 말했으리라. 남자이고 외부인인 그에게 전사인 그녀가 명령 외에 어떤 이유를 제시하거나 설명할 필요를 느낄 리 없었다. 드물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만으로 이미 의무는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궁수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신분과 종족, 역사의 간극은 너무나 멀어서 서로 보이지도 않았고, 서로 들리지도 않았다.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경고, 아니 명령에 따른다면
영원히 그러리라.

“거절하겠습니다.”

니아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시타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남녀 사이의 설렘과는 또 다른, 아니 그보다 한결 강렬한 열망,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던 눈에 하나의 개체로 투사된 그 인지의 순간에…

“…뭐?”

“임무를 띠고 온 사절로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그 시선을 마주치며 아시타는 조용히 말했다.

“사절로서 제 신변은 프리야 마타께 보장받았으므로 지금 와서 임무를 포기하는 것은 프리야 마타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그녀의 시선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니아는 휙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 섰다.

“바보같은 놈.”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격렬했다.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냐?”

이제야 나오는가. 더는 돌려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고 이유를 말하는 그녀를 보며 다시 아시타는 날카롭고 다소 잔인한 승리감을 느꼈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래, 날 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목숨을 걸 만한 신념이, 의지가, 열망이 있는 ‘나’를. 숙소에 두고 온 루카와 미리엘과 아스타틴을, 노예들의 하얀 뼈가 가득한 광산을, 엘프 숲이 있던
불탄 폐허를, 너무나 원통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던 눈앞의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시선을 가린 장막을 모두 잡아뜯고 서로 똑바로 마주볼 수만 있다면.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한 니아는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마치 겁을 먹은 듯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는 등을 돌려버렸다.

“나는 경고했다, 마이레야카.(주:다크엘프어로 ‘혼혈’)”

“제 이름은 아시타입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냥 여느 사내, 여느 튀기가 되지는 않으리라. 자신을 무심히 지나가는 시선의 무심한 폭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그를 흘깃 돌아보는 니아의 눈빛에는 싸늘한 분노가 어렸다. 다시 한 번 둘 사이에는 무거운 장막이 드리웠고,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는 까마득히 멀었다. 그녀는 육중한 문을 지나 들어갔다.

“가십시다.”

아시타는 호위 전사들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가 통과해야만 하는 눈앞의 문에만 향했다.

“프리야 마타를 기다리시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뱀이 혀를 내밀어 냄새를 맡듯 아시타는 홀 안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혼란과 분노, 오래 묵은 적개감과 반목의 냄새가 났다. 그의 보고는 에미넴 숲을 잠식하는 록윌 요새, 남부 난 엘모스를 압박하는 크레이들 요새, 대륙 동부에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제국과 그나마 운신의 여지가 있었던 서부에마저 내륙으로 치고 들어오는 십자군의 존재라는 대륙의 전황 전체를 포괄했다. 홀의 양옆에 부족별로 모여앉은 전사들은 귀를 기울이고, 토론하고 반박하고, 이익을 저울질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막간에, 전사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고 협상하고 공모하며 웅성거리는 동안 아시타는 단상의 발치 자리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원래는 사절단 전체가 할 보고를 혼자 하다 보니 보고를 마치고서야 쉴 틈이 났다. 돌아가면 아스타틴 녀석을 못살게 굴어서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하인이 내어온 차를 마셨다.

많은 낯선 얼굴을 멀리서 살피며, 이 거대한 연극의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관객이 된 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의견을 내고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짐작하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낯선 얼굴 사이에 낯익은 얼굴 하나에 시선이 갔다가 가슴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한기를 느꼈다.

“저기 잠시…”

그는 일어서서 옆에 무료하게 선 호위전사 중 창을 든 쪽, 동료가 ‘아루나’라고 부른 전사에게 말했다.

“저… 분은 어째서 무기가 있는 것입니까?”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시선으로 따라갔다가 아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

아라니아카…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던가. 마하스트린이라면 분명 대궁 (大弓)이라는 뜻, 다크엘프 중에서도 최상 수준에 드는 궁수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는 아까 입구에서 얘기할 때 보았던 활을 이 안에서도 당당하게 메고 있었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프리야 마타의 친우이시다.”

아루나의 동료가 뭐라고 말하자 (아시타가 알아듣기에는 낮고 빨랐다) 두 전사는 갑자기 자기들끼리 깔깔거렸다. 그런 웃음이라면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남녀가 부쩍 둘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아니면 서둘러 결혼한 신부의 배가 벌써부터 얼마나 불러오는지 얘기할 때면 어디서나 터뜨리는 그런 웃음. 그 웃음을 듣는 순간 아시타는 니아가, 아니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가 어떤 류의 친우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지도.

어머니와 얘기하던 아라니아카는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회의장의 인파 너머로 마주친 그녀의 고요하고 냉정한 시선 속에서 아시타는 자신의 죽음을 읽었다. 활이라면, 그리고 마하스트린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한 실력이라면 프리야 마타의 전사들이 개입하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궁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더니 마침 다가온 다른 전사와 이야기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떤 부인이나 변명도 없던 그녀의 눈빛은 분명 도전이었다.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뚫어져라 보며 아시타는 입안이 말라왔다.

그녀가 던진 선택은 세 가지였다. 통수권 이양이 안건으로 나오기 전에 나갈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이며 연인인 라카’마의 무장해제나 감시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떠나버린다면 통수권 이양이라는 안건은 꺼내기 전부터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외지인이었지만 이것은 어디를 가나 뻔한 일이었다. 노스탤지아에서 제시하는 안건인데 정작 노스탤지아 사절이 없어서야 어떻게 반대의견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를 암살자로 의심한다는 뜻을 내비친다면…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샤나에리스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고 포로가 되어 노예살이를 했었다. (이 빌어먹을 바보놈! 탈출노예 행렬 속의 니아가 그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던가.) 그런 의자매를 공개적으로 의심하는 언행을 했다가는 통수권 이양 반대파뿐 아니라 찬성파까지 마음이 멀어질 것이다. 차라리 등에 표적을 그리고 말지.

세 번째 선택은 예정대로 통수권 이양 안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등에 화살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을 알면서, 좀전에 잘난 듯 떠들어댔듯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다. 귓가에 심장박동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정숙해 주십시오.”

의전 책임자인, 화상 흉터 투성이에 한쪽 다리를 저는 나이 지긋한 전사가 단상 발치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타는 절박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벌써 안건을 제시할 시간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제기랄,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이든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삶은 갑자기 가슴이 저리도록 소중했다.

전사들이 자리에 앉고 의전 책임자가 회의 순서를 알리는 동안 아시타는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끓는 나머지 오히려 백짓장이 된 것 같았다. 나가거나 아라니아카에게 주의를 돌릴 시간은 시시각각 바닥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어떻게…

“..시오?”

문득 말의 마지막을 듣고 고개를 들자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 말한 기색으로 의전 책임자는 애써 참을성 있게 말했다.

“노스탤지아에서 온 사절은 제시할 안건이 있으시오?”

그가 천천히 일어서는 동안 회의장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제시할 안건, 안건이 무엇이었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고 도망갈까 그는 생각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미친 여자친구나 좀 챙기시라고 할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그가 할 선택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책무를 그런 식으로 버리려고 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단상 꼭대기의 텅 빈 의자, 라카’쟈나인의 빈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낮추자 단상 앞에 앉은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의 엄격하고 각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표정 없이 마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어떤 열망이 있었다. 그와 같은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로서는 흉내밖에 낼 수 없는 헌신이.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보고 중에, 그리고 그 전후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이 임무에 자원했다고 하자 걱정하는 기색이면서도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이 여인의 시선 속에서만은 그는 명령하고 하대할 남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튀기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였다. 비록 위치는 한없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들은 동지 (同志),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회의장의 수많은 시선, 각자의 목적과 편견과 과거의 바다 속에서 그는 오직 프리야 마타의 시선만을 붙들었다. 등뒤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여인은 돌아보지 않고, 지금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전황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스탤지아에서는 존경하는 프리야 마타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용감하신 전사 여러분께…”

그는 반쯤 몸을 돌려 회의장 전체를 시선으로 훑었다. 아마 친척들 사이에 있을 아라니아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프리야 마타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서 힘을 얻으며.

“부족 연합 전사대의 통수권을 노스탤지아의 휘하에 통합할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기다리던 것이 오자 회의장에 모인 사람 전원이 한꺼번에 한숨을 내쉰 것처럼 공기가 풀리면서 동시에 변했다. 전사들의 낮은 웅성거림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심각하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서로 격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소란 중에 아시타는 아라니아카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야 마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 고요가 회의장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한 번 아시타는 이 고집센 민족에 대한 그녀의 통솔력에 감탄했다.

“앉으십시오, 자매들이여.”

샤나에리스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앉아서 차례대로 발언해도 늦지 않습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이미 찬성하시는 것 아닙니까!”

얼굴에 길게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이 단상 앞으로 나섰다.

“당신의 전사들을 빼앗아가려는 인간들의 음모에 속으신 것입니까!”

그녀가 너무 가까워오자 아루나의 동료 전사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아시타는 그녀가 어딘가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그는 작은 움직임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한 발짝 나서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와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얼굴에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했다. 문 앞에 아라니아카와 그녀의 친족들과 함께 서있었고, 그와 니아의 대화를 막으려고 했던 전사. 그녀가 시선을 끌어주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있었다.

“아라!!”

비명에 가까운 샤나에리스의 외침이 회의장의 공기를 갈랐다. 아시타가 몸을 옆으로 던지는 동시에 아루나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찰나 속, 날아오는 화살 너머로 마주친 아라니아카의 눈빛은 구석에 몰린 듯 사나웠고. 그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피하려고 막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뭔가 가슴을 세차게 때리자 아시타는 뒤로 비틀 물러났다. 옆에서 아루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내려다보자 가슴에 박힌 화살대가 눈에 들어왔다. 화살을 인식하는 것이 신호이기라도 했는지 가슴에 타는 듯한 통증이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나왔다. 후벼파는 듯한 기침의 고통 때문에 눈앞에 하얀 반점이 반짝이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나의 승리입니다, 니아.’

고통의 안개 너머로 그는 눈을 들어 아라니아카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멍한 채로 마치 이끌린 듯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의 규칙대로 나를 판에 올려놓고 이겼습니다. 인정하지요?’

다시 기침 때문에 눈앞이 하얘졌다.

‘나를… 인정하지요?’

다시 시각이 돌아왔을 때는 저 위에 천장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호흡이 가릉거리면서 입안에는 찝찔한 쇠맛이 가득했고, 숨쉬기가 점점 힘겨웠다.

“괜찮을 것이다, 아시타.”

그의 손을 잡아준 손길은 강인하고 따뜻했다.

“조금만 참거라.”

그는 힘없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중얼거렸고, 잠시 가슴속에 온기가 피어났지만 이내 통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왈칵… 다시 쇠맛이 올라오자 누군가 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었다. 바닥 위로 퍼지는 선혈을 보고 그는 피에 익사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막상 자신에게 벌어지니 실감이 날 리 없었다.

이렇게 끝인가. 뭔가 기도나 참회라도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딱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맡기고 간다, 루카, 아스타틴, 모두들. 난 여기까지니까 제발 개죽음만은 되지 않게 해줘. 대단한 척 목숨을 걸겠다고 떠든 일이니까, 다들 안심하고 좀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대단한 바람도 아니잖아?

가슴이 빠개질 듯 아파오자 그는 몸을 뒤틀며 피가 그륵거리는 소리를 질렀다. 죽어가는 육체 속에서도 정신은 묘하게 평온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다가 끊어지는 세계수의 부서진 검은 윤곽을 떠올렸다. 한때는 하늘을 가득 뒤덮었을 그 푸르른 생명력의 잔해를…

“마람… 에르 다라…(주:나무들의 어머니, 세계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가족도 종족도 없이 떠도는 그에게도 세계를 낳은 어머니의 품에 안길 자격이 있다면. 가로막은 거리와 장벽을 넘어 다가갈 수만 있었더라면 시리도록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눈을 감은 기억은 없는데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 절대적인 평화에 그의 의식은 천천히 침잠했고, 모든 차이를 지워주는 너그러운 어둠 속에는 어떤 장막도 없었다.

쓰러진 사절이 잠잠해진 후, 샤나에리스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는 평생을 곁에서 모신 라하드마저 움찔했다. 사절의 피가 옷과 손에 튄 샤나에리스의 앞을 전사들은 소리없이 비켜주었다.

아라니아카에게 무기를 겨눈 채 포위한 호위전사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 샤나에리스는 의자매 앞에 섰다. 둘이 말없이 서로 마주보는 동안 방안의 침묵에 아주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샤나에리스의 손이 휙 올라갔다. 누군가 놀라서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아라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샤나에리스가 아라의 얼굴을 후려치자 철썩 소리가 회의장 구석까지 울렸다. 고개를 돌린 채 아라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의자매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랬지?”

프리야 마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만큼이나 깊은 비탄에 갈라졌다.

“왜 그랬느냐, 아라!”

“의자매의 안위를 염려함이었습니다.”

아라니아카는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목소리는 작고 또렷했고, 눈빛은 맑았다.

“근래 인간과 인간 잡종이 프리야 마타 곁에 빈번히 왕래하며 무례한 요구까지 하니, 프리야 마타께 위해를 가하지나 않을까 저어하였습니다.”

전사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녀의 답변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샤나에리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내가 널 어찌하면 좋겠느냐?”

프리야 마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박했다.

“뜻하는 대로 하소서.”

아라는 평온히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라의 목숨은 프리야 마타의 것이었습니다.”

괴롭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샤나에리스는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마하스트린을 구금하도록.”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선 바이두르야 전사들 사이에서 라스카야가 한 발짝 나서자 샤나에리스는 아라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처분은 이후에 결정합니다, 족장이여. 물론 그전에 부족에 먼저 통보하고 불복할 기회도 드리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족장은 다시 물러났다. 전사들에 둘러싸여 나가는 딸을 보는 시선은 안타까웠지만, 표정은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나가다가 아라니아카는 문득 단상 앞에 쓰러진 혼혈 사절을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피투성이 바닥에서 시신을 들어올려 들것에 싣는 모습을 그녀는 홀린 듯 지켜보다가, 뒤에서 인솔하는 전사가 어깨를 가볍게 밀자 그제서야 기억이 난 듯 걸음을 옮겼다. 다른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삼삼오오 회의장을 떠나, 먼지바람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황량한 땅 위에 길게 드리운 세계수의 그늘 속으로 나섰다.

덧: 시점 인물이 죽는 건 이전에 썼다가 묵혀둔 습작 이후 처음인 것 같군요. 다크엘프 정치에 대한 아시타의 생각은 어슐라 르귄 할머니의 ‘어둠의 왼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미묘한 시프그레서 정치에 주인공 겐리가 답답함을 느끼던 부분 말이죠. 뭐 결국 결론은 아시타 안습이라는 것… 원래 괜찮은 녀석들이 괜히 나서다 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