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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캠페인 외전: 부활

10월 10일 플레이입니다.

요약
4년 전, 27세의 체육교사였던 유태영은 약혼녀 최민아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에 재벌가 아들 정혁을 습격했다가 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그랬던 그를 저승사자는 저승 오관대왕과 계약한 암살자가 되는 조건으로 살려주고, 태영은 검시대 위에서 깨어나서 법의관 곽희숙을 혼비백산하게 합니다. 희숙은 갑자기 부활한 태영의 총상을 치료해준 후 그를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 보내지요.
검시실 사진

이곳이 주무대

감상
참가자가 두 분밖에 없어서 태영의 3기 모험을 소재로 한 외전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이게 지금까지의 캠페인 세션 중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극적 긴장감이 살아있고 완급도 괜찮아서, 이번 세션이 엄청 뛰어났다기보다는 이 캠페인이 전반적으로 안습이라(..) 거의 기권승 비슷하게 최고의 세션이었습니다. 비록 기본 윤곽은 시트에 다 나와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하면 한결 상황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앞뒤 맥락을 맞추어야 하는지라 생각지 못한 세부사항들이 나오는 의외성이 있더군요. 예를 들어 이미 박힌 탄환은 어떡할겨 하는 문제라든지, 초자연 세계에는 이런 식으로 병원 못 가는 부상을 치료해줄 의사가 필요할 텐데 희숙이 제격이라든지 하는 얘기가 나와 설정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이 논의의 결과는 삭풍님이 희숙의 면모에 반영하시기도 했고요.
이번 세션의 결과 캐릭터 파악이 될 때까지 몇 세션은 외전 체제로 가기로 했습니다. 각 인물의 3기 모험은 다른 PC와 함께한 모험인 만큼, 이번 태영 이야기처럼 다른 인물과 실제로 함께 플레이를 해보면 인물 간 응집력을 확보하기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고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제일 재밌었던 부분은 물론 희숙이 태영 재살해를 고려하는 대목이었습니다만 (음?), 수명동자와 태영의 대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냉소적으로 말하는 녀석들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고, 죄지은 자들을 천수대로 살게 두면 또 새로운 죄인이 나온다는 논리도 나름 이해는 할 수 있거든요. 위험한 논리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말입니다. 옳고 그름이 반드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사는 게 복잡한 거겠지요. 서울 캠페인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초자연이라는 프리즘으로 보면서 그런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기 전에 파토나 안 나면 다행이지만요. (흑)

이오닉스 외전 – 그들만의 게임

잿빛 메타포노비아의 아시타와 아스타틴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아시타 시점은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했는데 거짓말이었..(..?) 나중에는 시간 순서대로 정리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별문으로 올리겠습니다.

내용상 주의사항: 여성 동성애 암시 (과연 암시만?), 폭력과 죽음.

메타포노비아의 잿빛 대지 위에는 잿빛 새벽이 밝아왔다. 그 속에 하품을 하며 아시타는 숙소 밖으로 나섰다. 동료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서늘한 새벽 바람 속에 서자, 오른쪽의 동녘에서 시작해 정면의 남쪽 하늘까지 희미한 홍조를 띈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 다크엘프의 수도 외곽 정착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나는 이들, 아마도 가축 먹이를 주거나 밭에 나가는 사람들이 어스름 속에 그림자처럼 움직여가는 모습이 띄엄띄엄 보였다.

문앞에 기다리는 다크엘프 전사들은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인 것이, 인간 튀기 따위를 그들의 지도자 프리야 마타 앞에 데려가려고 잠을 설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시타는 일부러 더 밝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과장스레 허리숙여 인사했다.

“세계수의 그늘 속에서 축복받은 아침입니다, 용감한 전사들이여.”

인간 혼혈이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실에 놀랐다면 그 사실을 들키기에는 자존심이 강하거나 졸린 모양이었다. 창을 든 오른쪽 전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질 뿐, 검을 찬 왼쪽 전사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프리야 마타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일시적이었지만 그들에게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집에 그들을 여주인으로 모시는 남편이 적어도 한둘은 있을 터이고, 한 번도 남자를 동격으로 생각해본 적 없을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남자인데다가 원래는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 죽었어야 할 혼혈인 그가…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분명 작고 날카로운 쾌감이었다. 동맹과 사절의 특권이란, 그리고 인간들의 침탈과 노스탤지아의 존재는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을 상황을,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다.

오른편의 전사는 신발 바닥에 묻은 더러운 것을 보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 절도있게 돌아서더니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잠이 부족했는지 갑자기 피곤했다.

그들은 텅 빈 노스탤지아 연락기지 마당을 가로질러 메타포노비아 남문으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에 목책을 두른 도시의 모습은 정면에 압도해 왔다. 특별히 번영하거나 호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지만, 메타포노비아에는 그런 외형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안에 새끼가 바들바들 떠는 굴을 지키는 암여우처럼, 구석에 몰리면 어떤 제어나 한도도 없이 행사할 폭력과 결코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이.

아아, 여자들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또 새끼 지키는 암컷이 뭐냐. 하지만 정말로 이곳 다크엘프, 그의 아버지를 낳은 민족의 힘은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의 것이었다. 무겁지 않고 예리했고, 무차별적이지는 않았지만 포기를 몰랐다. 어떤 비하하는 의미도 없이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 이곳은 암컷의 도시였다. 그렇기에 시야 가장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보다 빨리 움직이며 단어의 억양 하나, 떨리는 속눈썹의 그림자 하나에 확확 달라지는 이곳의 숨막히는 정치는 그에게 애당초 불리한 그녀들만의 게임이었다.

호위 내지 감시병을 따라 남쪽 문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문득 세계수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남쪽에 있는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에서는 도시의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머니의 폐허를. 아마도 연락기지의 배치는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경비하는 전사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서 세계수를 지켜본 것에 그는 자부심과 다시 유치하고 약간 악의어린 기쁨을 느꼈다.

해뜨기 전의 잿빛 그늘이 무겁게 내린 메타포노비아의 거리를 걸으며 그는 이 길의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생각했다. 원래 프리야 마타는 다크엘프 최고 군사지도자인 라카’쟈나인을 이을 후계자였지만, 현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는 라카’쟈나인이 공석인 상태에서 벌써 근 30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전대 라카’쟈나인인 이샬헤브라의 복수를 하기 전에는 취임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얻은 종교적 정당성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에 힘입어 다크엘프 부족들에게 유례없는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노스탤지아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흔히 번역해서 라카’쟈나인은 ‘여왕’, 프리야 마타는 ‘공주’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샤나에리스야말로 다크엘프 최초의 여왕이었다. 프리야 마타는 물론이고 어떤 라카’쟈나인도 자긍심 강하고 뻣뻣한, 각자가 자기 집과 부족의 주인인 부족장들에게 이리도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부에 보고할 때마다 본 그녀였지만, 그녀의 본거지인 메타포노비아에서 다른 지도부 없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족의 여왕으로서의 그녀를.

라카’쟈나인의 집이자 지금은 공식적으로 주인 없는 궁, 하타라야로 가는 길은 문에서부터 똑바로 가는 대로가 아니었다. 종종 굽어지고 꺾이는, 불과 수레 두세 대 정도가 나란히 지날 만한 길은 요소요소마다 방어군이 엄호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끼고 돌았다. 올려다보면 종종 목책 위의 거점에서 뚜렷한 사선이 확보되어 있었다. 삼면에 강력한 세력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드워프족은 모두 우방이었고, 엘프들은 파괴당한 세계수를 마주할 수 없어서라도 이곳에까지 올 일은 없을 텐데 왜…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침묵하는 두 전사와 걸음을 옮기면서 아시타는 하타라야로 가는 길이 어떤 공격군을 경계하는지 문득 깨달았다. 내부의 경쟁자. 다른 부족장과 전사들, 하나같이 자신의 집과 부족의 주인인 저 자존심 드높은 쟈나인–여인, 여주인, 여왕, 그들의 언어에는 구분이 없었다–들이 라카’쟈나인의 한 발짝 뒤에서 끝없이 계책을 세우고 지켜보고 기다리고, 때로 움직이는 한 이곳 허무의 대지에 진정한 여왕이 설 수 있을까.

심지어 그들의 그림자 여왕인 샤나에리스마저도 다스리되 군림할 수는 없었다. 하타라야의 접견실에 온전히 그의 편이 있다면 바로 프리야 마타 자신이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지지하는 사안이라 해도 족장들은 정식으로 통합 부족회의 안건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를 올리고 노스탤지아의 요청을 정식 안건으로 내놓는 역할을 맡은 행운아가 바로 아시타 자신이었다. 뭐 실은 전령단 전체였지만, 동료들은 연락 기지에 두고 왔으니 이제는 혼자의 몫이었다.

정신나간 녀석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임무일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계율과 관습상 자신 같은 하프다크엘프는 보자마자 죽여버리는 사회에 호기심이 동해 닥치는 대로 공부할 정도로 미쳤다거나, 세계수를 한 번 보고싶어 이런 임무에 자원할 정도로 무모한 녀석이라면… 그런 바보라면 다크엘프 부족장이 모인 자리에 나가 군 통수권을 이양하라고 요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의 끝에는 허무의 대지치고는 꽤나 높은 하타라야가 버티고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타는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타라야는 드워프 건축가가 보면 수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그 무자비하도록 실용적인 선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1층은 돌, 2층은 나무로 지은 큰 집은 별다른 장식이나 편안함 없이 여기저기 굴뚝과 탑이 솟아나왔고, 유리가 없는 좁은 창문이 경계하는 눈처럼 거리를 내다보았다. 전사들을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이곳 특유의 사나워보이는 닭 몇 마리가 꼭꼭거리며 발앞에 흩어졌다. 주 건물 양옆으로는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앞에 얼쩡거리는 전사들과 가우르, 남자와 아이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두 호위전사는 하타라야 정문을 비껴나 왼편 벽에 난 문으로 그를 데려갔다. 문에 접근하면서 그는 문앞에서 여인들이 뭔가 낮게 얘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그와 말없는 호위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단숨에 그 눈빛이 적의가 되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들의 시선에는 적의를 넘어 살의의 싸늘함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허리로 갔다가 아시타는 하타라야 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주의사항대로 방에 놓고왔다는 것을 기억했다. 이론적으로 그의 안전은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두 전사가 책임지게 되어 있었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을 어쩌랴. 게다가 더욱 살떨리게도, 비교적 고급 옷이나 무장으로 보아서는 부족장 혹은 비슷한 급인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차고 있었다. 아시타는 벌거벗은 듯 무방비가 된 기분이었다.

벌거벗은 생각 하니, 여인들 중 셋은 나이가 좀 지긋했지만 둘은 제법 젊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고위 전사들은 그를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인사하며 한 명씩 문으로 들어갔다. 그 중 하나는 어깨에 활을 멘 궁수였는데… 어라?

“니아?”

순간 너무 반갑고 의외여서 그랬을까,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이름부터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키였지만 당당하게 치켜든 턱과 냉랭한 눈빛에는 그를 굽어보는 것 같은 당당함이 있었다. 그 눈빛은 그를, 모든 접근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입을 살짝 벌렸다. 눈이 마주친 찰나 그는 다시금 마법사의 불타는 실험실에서 오르는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았고, 밤하늘 아래 실험실의 잔해에서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고 있었다. 품안의 죽은 아이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않는, 생존에는 관심도 없는 그 노예 여인을 붙들고 아시타는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었다. 나중에 탈출하는 행렬에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복을 빌어주었었는데…

그런데 이 여인은 임페리얼에서 탈출하는 길에 그에게 즐겁게 재잘거리고, 때로는 죽은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훌쩍훌쩍 울던 그 아이같던 여인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은 전사 귀족의 얼굴을 한 그녀는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들 니아… 혹은… 어쨌든 그 다크엘프 전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것이 아시타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왜 생각없이 그렇게 부른 걸까. 더듬거리며 막 사과하려는 그에게서 돌아서며 니아는 주변의 전사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이 자를 아느냐?”

나이 지긋한,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아마도 니아의 어머니인 여인이 말했다.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잠시 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자 니아의 어머니는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그녀는 딸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들어가서 기다리마.”

마주보는 모녀 사이에는 뭔가 말없는 대화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도 엿들을 수도 없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가깝고 긴 연(聯)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대화. 소속도 없고 가족도 없는 그에게 그 침묵의 대화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얘기하던 사람들이 하타라야의 옆문으로 들어간 후에 여인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가 손을 저어보이자 두 호위전사는 즉시 허리를 숙여보이고 물러났다.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원치 않는 목숨을 구제받았던 니아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분명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지금 이곳에서 떠나라.”

“예?”

아시타는 당황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하타라야의 문지방까지 와서 돌아가라고?

“목숨을 구해준 것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적대감도, 웃음기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이곳을 떠나. 하타라야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시타도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을 두고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고운 먼지를 품고 부는 바람처럼, 도시의 지붕 위로 비쳐오는 햇살처럼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그가 뭔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 호위전사가 아니면 무기는 소지할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모두가 달려들어 맨손으로 죽이려 드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그전에 프리야 마타의 호위병이 먼저 반응할 것이 틀림없는데.

질문은 끝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한 말만으로도 넘치도록 말했으리라. 남자이고 외부인인 그에게 전사인 그녀가 명령 외에 어떤 이유를 제시하거나 설명할 필요를 느낄 리 없었다. 드물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만으로 이미 의무는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궁수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신분과 종족, 역사의 간극은 너무나 멀어서 서로 보이지도 않았고, 서로 들리지도 않았다.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경고, 아니 명령에 따른다면
영원히 그러리라.

“거절하겠습니다.”

니아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시타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남녀 사이의 설렘과는 또 다른, 아니 그보다 한결 강렬한 열망,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던 눈에 하나의 개체로 투사된 그 인지의 순간에…

“…뭐?”

“임무를 띠고 온 사절로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그 시선을 마주치며 아시타는 조용히 말했다.

“사절로서 제 신변은 프리야 마타께 보장받았으므로 지금 와서 임무를 포기하는 것은 프리야 마타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그녀의 시선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니아는 휙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 섰다.

“바보같은 놈.”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격렬했다.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냐?”

이제야 나오는가. 더는 돌려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고 이유를 말하는 그녀를 보며 다시 아시타는 날카롭고 다소 잔인한 승리감을 느꼈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래, 날 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목숨을 걸 만한 신념이, 의지가, 열망이 있는 ‘나’를. 숙소에 두고 온 루카와 미리엘과 아스타틴을, 노예들의 하얀 뼈가 가득한 광산을, 엘프 숲이 있던
불탄 폐허를, 너무나 원통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던 눈앞의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시선을 가린 장막을 모두 잡아뜯고 서로 똑바로 마주볼 수만 있다면.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한 니아는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마치 겁을 먹은 듯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는 등을 돌려버렸다.

“나는 경고했다, 마이레야카.(주:다크엘프어로 ‘혼혈’)”

“제 이름은 아시타입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냥 여느 사내, 여느 튀기가 되지는 않으리라. 자신을 무심히 지나가는 시선의 무심한 폭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그를 흘깃 돌아보는 니아의 눈빛에는 싸늘한 분노가 어렸다. 다시 한 번 둘 사이에는 무거운 장막이 드리웠고,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는 까마득히 멀었다. 그녀는 육중한 문을 지나 들어갔다.

“가십시다.”

아시타는 호위 전사들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가 통과해야만 하는 눈앞의 문에만 향했다.

“프리야 마타를 기다리시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뱀이 혀를 내밀어 냄새를 맡듯 아시타는 홀 안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혼란과 분노, 오래 묵은 적개감과 반목의 냄새가 났다. 그의 보고는 에미넴 숲을 잠식하는 록윌 요새, 남부 난 엘모스를 압박하는 크레이들 요새, 대륙 동부에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제국과 그나마 운신의 여지가 있었던 서부에마저 내륙으로 치고 들어오는 십자군의 존재라는 대륙의 전황 전체를 포괄했다. 홀의 양옆에 부족별로 모여앉은 전사들은 귀를 기울이고, 토론하고 반박하고, 이익을 저울질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막간에, 전사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고 협상하고 공모하며 웅성거리는 동안 아시타는 단상의 발치 자리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원래는 사절단 전체가 할 보고를 혼자 하다 보니 보고를 마치고서야 쉴 틈이 났다. 돌아가면 아스타틴 녀석을 못살게 굴어서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하인이 내어온 차를 마셨다.

많은 낯선 얼굴을 멀리서 살피며, 이 거대한 연극의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관객이 된 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의견을 내고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짐작하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낯선 얼굴 사이에 낯익은 얼굴 하나에 시선이 갔다가 가슴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한기를 느꼈다.

“저기 잠시…”

그는 일어서서 옆에 무료하게 선 호위전사 중 창을 든 쪽, 동료가 ‘아루나’라고 부른 전사에게 말했다.

“저… 분은 어째서 무기가 있는 것입니까?”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시선으로 따라갔다가 아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

아라니아카…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던가. 마하스트린이라면 분명 대궁 (大弓)이라는 뜻, 다크엘프 중에서도 최상 수준에 드는 궁수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는 아까 입구에서 얘기할 때 보았던 활을 이 안에서도 당당하게 메고 있었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프리야 마타의 친우이시다.”

아루나의 동료가 뭐라고 말하자 (아시타가 알아듣기에는 낮고 빨랐다) 두 전사는 갑자기 자기들끼리 깔깔거렸다. 그런 웃음이라면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남녀가 부쩍 둘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아니면 서둘러 결혼한 신부의 배가 벌써부터 얼마나 불러오는지 얘기할 때면 어디서나 터뜨리는 그런 웃음. 그 웃음을 듣는 순간 아시타는 니아가, 아니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가 어떤 류의 친우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지도.

어머니와 얘기하던 아라니아카는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회의장의 인파 너머로 마주친 그녀의 고요하고 냉정한 시선 속에서 아시타는 자신의 죽음을 읽었다. 활이라면, 그리고 마하스트린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한 실력이라면 프리야 마타의 전사들이 개입하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궁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더니 마침 다가온 다른 전사와 이야기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떤 부인이나 변명도 없던 그녀의 눈빛은 분명 도전이었다.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뚫어져라 보며 아시타는 입안이 말라왔다.

그녀가 던진 선택은 세 가지였다. 통수권 이양이 안건으로 나오기 전에 나갈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이며 연인인 라카’마의 무장해제나 감시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떠나버린다면 통수권 이양이라는 안건은 꺼내기 전부터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외지인이었지만 이것은 어디를 가나 뻔한 일이었다. 노스탤지아에서 제시하는 안건인데 정작 노스탤지아 사절이 없어서야 어떻게 반대의견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를 암살자로 의심한다는 뜻을 내비친다면…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샤나에리스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고 포로가 되어 노예살이를 했었다. (이 빌어먹을 바보놈! 탈출노예 행렬 속의 니아가 그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던가.) 그런 의자매를 공개적으로 의심하는 언행을 했다가는 통수권 이양 반대파뿐 아니라 찬성파까지 마음이 멀어질 것이다. 차라리 등에 표적을 그리고 말지.

세 번째 선택은 예정대로 통수권 이양 안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등에 화살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을 알면서, 좀전에 잘난 듯 떠들어댔듯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다. 귓가에 심장박동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정숙해 주십시오.”

의전 책임자인, 화상 흉터 투성이에 한쪽 다리를 저는 나이 지긋한 전사가 단상 발치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타는 절박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벌써 안건을 제시할 시간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제기랄,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이든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삶은 갑자기 가슴이 저리도록 소중했다.

전사들이 자리에 앉고 의전 책임자가 회의 순서를 알리는 동안 아시타는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끓는 나머지 오히려 백짓장이 된 것 같았다. 나가거나 아라니아카에게 주의를 돌릴 시간은 시시각각 바닥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어떻게…

“..시오?”

문득 말의 마지막을 듣고 고개를 들자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 말한 기색으로 의전 책임자는 애써 참을성 있게 말했다.

“노스탤지아에서 온 사절은 제시할 안건이 있으시오?”

그가 천천히 일어서는 동안 회의장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제시할 안건, 안건이 무엇이었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고 도망갈까 그는 생각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미친 여자친구나 좀 챙기시라고 할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그가 할 선택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책무를 그런 식으로 버리려고 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단상 꼭대기의 텅 빈 의자, 라카’쟈나인의 빈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낮추자 단상 앞에 앉은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의 엄격하고 각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표정 없이 마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어떤 열망이 있었다. 그와 같은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로서는 흉내밖에 낼 수 없는 헌신이.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보고 중에, 그리고 그 전후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이 임무에 자원했다고 하자 걱정하는 기색이면서도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이 여인의 시선 속에서만은 그는 명령하고 하대할 남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튀기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였다. 비록 위치는 한없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들은 동지 (同志),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회의장의 수많은 시선, 각자의 목적과 편견과 과거의 바다 속에서 그는 오직 프리야 마타의 시선만을 붙들었다. 등뒤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여인은 돌아보지 않고, 지금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전황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스탤지아에서는 존경하는 프리야 마타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용감하신 전사 여러분께…”

그는 반쯤 몸을 돌려 회의장 전체를 시선으로 훑었다. 아마 친척들 사이에 있을 아라니아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프리야 마타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서 힘을 얻으며.

“부족 연합 전사대의 통수권을 노스탤지아의 휘하에 통합할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기다리던 것이 오자 회의장에 모인 사람 전원이 한꺼번에 한숨을 내쉰 것처럼 공기가 풀리면서 동시에 변했다. 전사들의 낮은 웅성거림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심각하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서로 격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소란 중에 아시타는 아라니아카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야 마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 고요가 회의장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한 번 아시타는 이 고집센 민족에 대한 그녀의 통솔력에 감탄했다.

“앉으십시오, 자매들이여.”

샤나에리스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앉아서 차례대로 발언해도 늦지 않습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이미 찬성하시는 것 아닙니까!”

얼굴에 길게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이 단상 앞으로 나섰다.

“당신의 전사들을 빼앗아가려는 인간들의 음모에 속으신 것입니까!”

그녀가 너무 가까워오자 아루나의 동료 전사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아시타는 그녀가 어딘가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그는 작은 움직임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한 발짝 나서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와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얼굴에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했다. 문 앞에 아라니아카와 그녀의 친족들과 함께 서있었고, 그와 니아의 대화를 막으려고 했던 전사. 그녀가 시선을 끌어주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있었다.

“아라!!”

비명에 가까운 샤나에리스의 외침이 회의장의 공기를 갈랐다. 아시타가 몸을 옆으로 던지는 동시에 아루나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찰나 속, 날아오는 화살 너머로 마주친 아라니아카의 눈빛은 구석에 몰린 듯 사나웠고. 그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피하려고 막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뭔가 가슴을 세차게 때리자 아시타는 뒤로 비틀 물러났다. 옆에서 아루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내려다보자 가슴에 박힌 화살대가 눈에 들어왔다. 화살을 인식하는 것이 신호이기라도 했는지 가슴에 타는 듯한 통증이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나왔다. 후벼파는 듯한 기침의 고통 때문에 눈앞에 하얀 반점이 반짝이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나의 승리입니다, 니아.’

고통의 안개 너머로 그는 눈을 들어 아라니아카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멍한 채로 마치 이끌린 듯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의 규칙대로 나를 판에 올려놓고 이겼습니다. 인정하지요?’

다시 기침 때문에 눈앞이 하얘졌다.

‘나를… 인정하지요?’

다시 시각이 돌아왔을 때는 저 위에 천장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호흡이 가릉거리면서 입안에는 찝찔한 쇠맛이 가득했고, 숨쉬기가 점점 힘겨웠다.

“괜찮을 것이다, 아시타.”

그의 손을 잡아준 손길은 강인하고 따뜻했다.

“조금만 참거라.”

그는 힘없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중얼거렸고, 잠시 가슴속에 온기가 피어났지만 이내 통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왈칵… 다시 쇠맛이 올라오자 누군가 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었다. 바닥 위로 퍼지는 선혈을 보고 그는 피에 익사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막상 자신에게 벌어지니 실감이 날 리 없었다.

이렇게 끝인가. 뭔가 기도나 참회라도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딱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맡기고 간다, 루카, 아스타틴, 모두들. 난 여기까지니까 제발 개죽음만은 되지 않게 해줘. 대단한 척 목숨을 걸겠다고 떠든 일이니까, 다들 안심하고 좀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대단한 바람도 아니잖아?

가슴이 빠개질 듯 아파오자 그는 몸을 뒤틀며 피가 그륵거리는 소리를 질렀다. 죽어가는 육체 속에서도 정신은 묘하게 평온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다가 끊어지는 세계수의 부서진 검은 윤곽을 떠올렸다. 한때는 하늘을 가득 뒤덮었을 그 푸르른 생명력의 잔해를…

“마람… 에르 다라…(주:나무들의 어머니, 세계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가족도 종족도 없이 떠도는 그에게도 세계를 낳은 어머니의 품에 안길 자격이 있다면. 가로막은 거리와 장벽을 넘어 다가갈 수만 있었더라면 시리도록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눈을 감은 기억은 없는데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 절대적인 평화에 그의 의식은 천천히 침잠했고, 모든 차이를 지워주는 너그러운 어둠 속에는 어떤 장막도 없었다.

쓰러진 사절이 잠잠해진 후, 샤나에리스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는 평생을 곁에서 모신 라하드마저 움찔했다. 사절의 피가 옷과 손에 튄 샤나에리스의 앞을 전사들은 소리없이 비켜주었다.

아라니아카에게 무기를 겨눈 채 포위한 호위전사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 샤나에리스는 의자매 앞에 섰다. 둘이 말없이 서로 마주보는 동안 방안의 침묵에 아주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샤나에리스의 손이 휙 올라갔다. 누군가 놀라서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아라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샤나에리스가 아라의 얼굴을 후려치자 철썩 소리가 회의장 구석까지 울렸다. 고개를 돌린 채 아라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의자매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랬지?”

프리야 마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만큼이나 깊은 비탄에 갈라졌다.

“왜 그랬느냐, 아라!”

“의자매의 안위를 염려함이었습니다.”

아라니아카는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목소리는 작고 또렷했고, 눈빛은 맑았다.

“근래 인간과 인간 잡종이 프리야 마타 곁에 빈번히 왕래하며 무례한 요구까지 하니, 프리야 마타께 위해를 가하지나 않을까 저어하였습니다.”

전사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녀의 답변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샤나에리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내가 널 어찌하면 좋겠느냐?”

프리야 마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박했다.

“뜻하는 대로 하소서.”

아라는 평온히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라의 목숨은 프리야 마타의 것이었습니다.”

괴롭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샤나에리스는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마하스트린을 구금하도록.”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선 바이두르야 전사들 사이에서 라스카야가 한 발짝 나서자 샤나에리스는 아라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처분은 이후에 결정합니다, 족장이여. 물론 그전에 부족에 먼저 통보하고 불복할 기회도 드리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족장은 다시 물러났다. 전사들에 둘러싸여 나가는 딸을 보는 시선은 안타까웠지만, 표정은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나가다가 아라니아카는 문득 단상 앞에 쓰러진 혼혈 사절을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피투성이 바닥에서 시신을 들어올려 들것에 싣는 모습을 그녀는 홀린 듯 지켜보다가, 뒤에서 인솔하는 전사가 어깨를 가볍게 밀자 그제서야 기억이 난 듯 걸음을 옮겼다. 다른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삼삼오오 회의장을 떠나, 먼지바람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황량한 땅 위에 길게 드리운 세계수의 그늘 속으로 나섰다.

덧: 시점 인물이 죽는 건 이전에 썼다가 묵혀둔 습작 이후 처음인 것 같군요. 다크엘프 정치에 대한 아시타의 생각은 어슐라 르귄 할머니의 ‘어둠의 왼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미묘한 시프그레서 정치에 주인공 겐리가 답답함을 느끼던 부분 말이죠. 뭐 결국 결론은 아시타 안습이라는 것… 원래 괜찮은 녀석들이 괜히 나서다 죽죠.

이오닉스 외전 – 어떤 작별

오체스님과 진행한, 아스타틴아라의 첫 만남을 다룬 외전입니다. 전에 오체스님과 얘기해서 정한 추가설정 부분을 기반으로 한 역할극이죠. 함께 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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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대지에서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세계수의 재라고 하는 발밑의 고운 흙이 바람에 먼지처럼 날렸고, 오늘은 하늘마저 엷은 회색이었다. 북쪽으로는 불타버린 세계수의 잔해가 잿빛 하늘에 거대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저곳이다.”

아시타는 세계수의 잔해를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세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

평소의 장난기는 조금도 없이 우수어린 하프다크엘프의 눈빛에서 아스타틴은 또 다른 다크엘프 혼혈, 이제 세상에 없는 이를 떠올렸다. 아시타가 몇 발짝 떨어져 세계수를 묵묵히 바라보는 동안 아스타틴은 늘 가슴에 달고 다니는 애도의 브로치를 어루만졌다.

“돌아왔어요.”

브로치에 꼬아넣은 은백색 머리카락 위로 손가락을 쓸며 그는 속삭였다. 어쩌면 텔루르의 추억 때문에 이곳 허무의 대지는 그에게 더욱 잿빛일지도 모른다.

“아닌 척 했지만… 그리워했던 곳으로.”

그는 브로치를 손에 꼭 쥐었다.  그의 양어머니 텔루르는 나서 자란 이 땅에 대한 그리움을 한 번도 내색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가끔 북쪽으로 눈을 돌리던 그녀의 눈빛은 세계수의 잔해를 보는 아시타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그들에게 흐르는 다크엘프 피 때문일까, 아무리 배척받고 차별당해도 세계의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천형은.

고운 잿빛 흙을 품은 바람이 불어오자 아스타틴은 외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앉은 언덕 왼편으로 화살이 거의 닿을 만한 거리에는 언덕 위에 선 다크엘프의 수도 메타포노비아를 두른 목책과 그 위로 나온 지붕이 몇 개 보였다. 아래로는 주변의 언덕과 평원에 작은 민가와 가축우리, 밭 몇 뙈기가 메타포노비아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다크엘프의 지도자인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하러 온 노스탤지아 대원들에게 다크엘프들은 (혼혈과 심지어는 인간도 있는 일행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연락기지에 있으라고 무뚝뚝하게 지시했지만, 아시타는 답답하다면서 결국 아스타틴을 밖으로 끌고나왔다. 역시 먼지바람을 피해 얼굴을 가리며 이쪽으로 돌아서는 아시타를 보며 아스타틴은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 서쪽 언덕은 메타포노비아를 제외하고 주변에서 세계수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고, 왜 인간 혼혈 따위가 세계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지 시비걸 다크엘프도 없었다.

발치에서 커다란 하품소리가 들리자 아스타틴은 미소지으며 내려다보았다. 텔루르의 가우르 루테리온은 쭈욱 기지개를 켜고 입맛을 다시며 편안하게 그의 발치에 누웠다. 등을 쓸어주자 낮게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뼛속까지 기분좋은 진동으로 전해왔다. 지시를 어기고 메타포노비아를 나서는 그들을 경비가 굳이 저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녀석 때문이었으리라. 거대한 사냥꾼의 따뜻한 진회색 털과 주변의 잿빛 흙의 빛깔을 비교하며 아스타틴은 그도 루테리온도 처음 와보는 허무의 대지였지만, 루테리온의 조상에게는 고향이었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 아시타처럼 루테리온도 이곳에 애착을 느끼고 있을까? 마치 피를 통해 전해오는 기억처럼…

“태평한 놈이로고.”

올려다보자 아시타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루테리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런 아시타 방향으로 잠시 눈을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 꼬리를 탁 털고 눈을 감았다. 그 반응에 아시타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녀석 타기도 해?”

루테리온을 흥미롭게 보며 아시타가 묻자, 아스타틴은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내며 미소지었다.

“아… 날 태워주기엔 저녀석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녀석, 사람보는 눈은 있군.”

낄낄거리는 웃음이 밉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이후 분노와 자책에 빠져지냈던 그를 아시타가 내버려두지 않고 말도 걸고 장난도 쳤을 때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네 일이나 신경쓰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아준 아시타에게 이제는 감사하고 있었다. 비록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시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아주 가끔이지만 자존심을 굽혀주기도 해.”

텔루르가 죽고 나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인간 장교를 살해한 후에, 쫓아오는 병사들에게서 헐레벌떡 도망치던 그를 루테리온이 등에 태우고 달린 일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폭풍을 탄 것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와 영원히 달리고 싶은 희열의 기묘한 연금술은 그를 취하게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 후, 루테리온의 거죽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싸매주며 미안하다고 되뇌이던 아스타틴의 사과는 어느새 루테리온이 아닌 이제 이곳에 없는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마침내 더 참지 못한 채 루테리온의 목을 끌어안고 밤새 목놓아 울었을 때 루테리온은 그저 조용히 체온을 빌려주고 얼굴을 부비며 차가운 새벽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 여러모로 위로를 받는달까. 루테리온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어느새 아스타틴은 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텔루르 이후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속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기쁨인 동시에 떨리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군사훈련을 받은 가우르인데 저대로 평생 둘 생각이야?”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추궁 역시. 조금의 전력이라도 더 필요한 전황에 훈련받은 가우르 하나가 놀고 있다는 것은 아시타가 보기에는 낭비일지도 몰랐다.

“음…”

아시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루테리온을 그저 유용한 무기로만 볼 수 없는 아스타틴은 자신이 이 상황에 대해 객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값만 해도 꽤 나갈 텐데.. 뭐 팔아버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면서도 한쪽 어깨를 으쓱하는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분명 제안이 들어있었다. 아스타틴은 순간 불쾌감을 느꼈다.

“팔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라면 남동생이나 누이를 팔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아스타틴은 참았다. 아시타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둘째치고라도, 루테리온은 텔루르와 전투를 함께 하던 군용 가우르이지 애완용 고양이가 아니었다. 가끔 녀석의 눈이 먼 곳을 보는 것은 아스타틴도 알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없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이미 텔루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랑 없는 조용한 용맹, 세상이 뭐라 하든 절대 꺾이는 일 없던 긍지, 그러면서도 내밀한 순간에 보여주던 그 따스한 마음. 그래서 아직까지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런 주인을 기억하는 한 어떤 이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다소 안심하는 자신이 아스타틴은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수는 없겠지.”

루테리온을 아낀다고 하면서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 슬픔에 가슴이 조여왔지만, 루테리온이 가겠다면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닌 우정의 시간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호~ 짐승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거야?”

아시타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루테리온이 원한다면 헤어질 수 있겠어?”

자기 이름이 들리자 루테리온은 한쪽 귀를 쫑긋했다. 그 모습에 아직 눈도 못 뜨고 낑낑거리던 자그마한 새끼 가우르가 겹치자 아스타틴은 새삼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아려왔다.

“.. 저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이뻐라 우유먹이며 키웠으니까.”

그는 애써 웃음지었다.

“좀 자신 없기도 해. 근데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달까.. 저 녀석 태어나는 것도 좀 힘들었고..”

루테리온의 어머니 히말은 가우르에게 드문 거의 흰색에 가까운 털이 돋보였었다.(주:오체스님에 따르면 히말은 히말라야에서 따왔고, ‘눈’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비노 가우르를 떠올렸어요 ㅋㅋ) 몇 번이나 임신을 하지 못하고 한 번은 새끼를 사산한 히말이 이미 죽은 새끼를 계속 핥아주던 모습을 텔루르는 차마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렸었고, 아스타틴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시체를 떼어놓았었다.

그랬던 히말이 많이 나이가 들어 근 하루에 거친 힘든 진통 끝에 마침내 작고 유달리 약한 루테리온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동시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 조그만 생명을 살리려고 젖을 못 먹이는 히말 대신 손가락에 우유를 묻혀 빨게 하고, 갑자기 토하는 녀석을 안고 한밤중에 약초사를 찾아 달리던 시간들 끝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건강하게 자라줘서 기뻐.”

손을 뻗어 귀를 쓰다듬어주자 루테리온은 귀를 뒤로 젖히며 가릉거렸다.

“그리고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아스타틴은 메이는 목을 살짝 헛기침을 해 풀었다. 역시 먼지바람 때문이리라.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고 싶어.”

언젠가부터 아시타가 아니라 루테리온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으며 그는 가우르의 머리에서 목을 따라 긁어주고는 손을 떼었다. 루테리온은 다시 크게 하품을 했다.

“뭐 그렇다면야.”

아시타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좀전에 아스타틴이 그랬듯 루테리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녀석 날 선택해주지는 않겠느냐아?”

루테리온은 뒤돌아보면서 고개를 들더니 아시타의 손에 대고 확 깨물었다. 물리기 전에 아시타가 웃으면서 손을 빼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미소지었다. 장난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면 아시타도, 아스타틴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손을 물어챘을 테니까. 역시 루테리온은 성격이 좋은 녀석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아시타는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그럼 난 보고서 정리하러 들어간다.”

그는 아스타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섰다.

“응응…”

언덕을 내려가는 아시타의 발걸음이 등뒤로 멀어져갔다.

“역시 넌 여기가 좋을까나…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루테리온 옆에 쪼그려앉아 등을 쓸어주었다. 루테리온이 반쯤 눈을 감고 바라보는 거친 풀섶과 황야, 민가와 가축우리를 내려다보며.

“아시타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녀석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루테리온은 동의한다는 듯 가릉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아스타틴에게 비볐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며 루테리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스타틴의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때였다. 이런 순간이면 텔루르의 기억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때 루테리온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긴장하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작은 짐승을 보거나 냄새맡은 태도와도 비슷했지만, 사냥할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냥할 때보다 훨씬 깊은 열중이 매끈한 근육의 긴장감에 역력한 채 가우르는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라… 어디가…?”

아스타틴을 휙 돌아보는 루테리온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다시 앞을 향하며 가우르는 순식간에 언덕을 달려내려가 풀섶 사이를 내달리더니, 다른 언덕을 돌아 사라졌다.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정신없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이런 모습의 루테리온은 처음이었다. 허무의 대지 특유의 거친 풀섶과 그 잎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큰뿔염소를 지나, 루테리온이 마지막으로 보인 언덕배기를 돌아 작은 집을 지나쳐 얼마나 걸었을까, 허무의 대지의 잿빛보다 한결 어두운 얼룩 같은 루테리온의 모습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도 들려왔다.

“꺄아 나비야아… 나비나비나비.”

목소리는 어린아이 목소리처럼 높고 들떴지만, 주변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구걸하는 노인처럼 웅크린 초라하고 작은 나무들 어귀의 땅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루테리온뿐이었다.

나무들의 흐릿하고 앙상한 그늘로 들어서면서 아스타틴은 이 예상치 못한 장면을 살폈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여자는 다크엘프였고, 이곳 전사들이 그렇듯 가죽이 주조를 이루는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다크엘프 전사는, 아니 다크엘프는 처음이었다.

“놀자놀자~ 나비.”

깔깔 웃으면서 여자는 루테리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벼대더니 자기 얼굴을 루테리온의 목에 갖대대고 비볐다. 목소리나 말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도 경계심이나 체면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아이 같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루테리온의 반응이었다. 텔루르와 아스타틴 외에는 아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보이던 가우르는 처음 보는,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게 틀림없는 여자에게 ‘나비’ 같은 굴욕적인 이름을 들으면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몸을 기댔다.

‘아… 텔루르…’

텔루르가 죽은 이래 루테리온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애교를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잿빛 피부와 은백색 머리, 가벼운 갑옷 차림이 오랜 기억들을 고통스럽게 헤집었다. 입을 여는 그는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루테리온.”

루테리온이 돌아보자 다크엘프 여자도 그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듯 올려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니…?”

부드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다크엘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테리온을 보았다.

“누구야 이쁜 아이~? 아는 사이?”

왜 둘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지, 바보같은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여자에게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저기… 아가씨…”

“음?”

루테리온의 목을 쓸어주며 여자는 그의 존재를 거의 잊은 것 같았다.

“그건 제 가우르거든요…”

아까 아시타에게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내것이라고 하기는 좀 남사스럽기도 했지만,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적어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리라.

“음? 니아 아가씨 아냐 애엄만데 우리 샤나 못봤어요?”

재잘거리다가 다크엘프–아마 니아?–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가우르르르르? 나비??”

“아는 사람에게 받았긴 했지만요. 잠깐 뛰어나가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아가씨에게 갔나보네요..”

입술을 핥고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뭔가 불길했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루테리온을 데리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싫어!!”

찢어지는 목소리에 근처 나무에서 파닥거리며 새가 몇 마리 날아올랐다. 니아가 루테리온의 목을 갑자기 콱 끌어안자 루테리온은 아팠는지 캬옹! 하면서 목을 뺐다.

“니아 나비야랑 놀거야아~ 나비~”

“아… 그렇게 안으시면 아파해요…”

당황해서 아스타틴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루테리온은 목을 뺀 후에도 여자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점점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저런 정신나간 여자를 뭐하러 루테리온이 일부러 쫓아온 걸까.

“..데리고 가도 괜찮지요?”

아스타틴은 루테리온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섰다.

“그리고 나비가 아니에요.”

“가지 마 나비, 으응?”

니아가 가우르의 귀를 잡아당기자 루테리온은 다시 캬옹.. 고개를 돌렸지만 아스타틴을 따라나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타틴이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니아는 갑자기 뭔가 본 듯 루테리온 왼편의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 샤나 거깄었어?”

“허…”

아무리 봐도 루테리온 왼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니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눈이 좋거나, 아니면…

“나비야는 엄마랑 있는 게 좋지? 샤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이쁜 우리딸~”

마치 어린아이가 서있는 것처럼 허공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쳤다. 역시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여자가 완전히 미쳤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아스타틴은 긴장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루테리온 이리와.”

그의 명령에 루테리온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다가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웃고 얘기하는 니아를 돌아보다가 다시 아스타틴을 마주보았다. 마치 고뇌하듯이.

“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루테리온은 주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불안해했던 날이 정말 오늘, 바로 이 순간이라면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자신과 루테리온에게 그렇게 약속했으면서도 아스타틴은 갑자기 자신이 없었다.

“예쁜아이 일루와봐~”

‘샤나’에게 할말은 다 했는지 니아는 아스타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옆의 땅을 탁탁 쳤다. 진회색 눈이 아주 맑았다. 이리 오라니 뭘? 무슨 짓을 하려는지 불안해졌다.

“얘기하자~ 응?”

아스타틴이 경계하며 보고만 있자 니아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루테리온이 이 여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조심조심 다가섰다.

“…이야기요?”

“응응, 나비얘기!”

니아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샤나가 좋은 생각을 얘기해줬어. 역시 똑똑하지 우리딸?”

다시 소름이 끼치면서 아스타틴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분명히 이곳에는 노스탤지아 일로,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한다는 아주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임무를 띠고 왔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시타도 메타포노비아도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가우르한테 물어보자~ 응?”

니아는 말을 이었다.

“나비야는 니아 따라올래 이쁜아이 따라올래? 그렇게 말야.”

“물어보다니…. 루테리온의 의사에 따르자는 건가요?”

그는 니아와 루테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루테리온의 선택에… 정말로 루테리온이 이런 상대를 선택할까? 그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우리 딸이 그랬어. 샤나가!”

니아는 아주 만족스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아, 그래요?”

아스타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이런 선택을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정말로 그것이 루테리온의 선택이라면 그대로 해야 했다. 루테리온이 그러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아스타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텔루르의 잔영이 함께할 루테리온이 어떻게 그럴까.

“그렇게 해요, 아가씨.”

그말에 니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아냐~ 나 애엄마다? 나이도 하나.. 둘.. 스물.. 열다섯.. 백..”

니아가 손을 꼽으며 엉터리로 수를 세는 것은 아스타틴은 냉정하게 끊었다.

“떼는 적당히 부리고요.”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요.”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이래 쭉 함께했던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 상실의 기분을 니아가 이해할 수나 있을지, 상관은 하는지 생각이 미치자 뜨거운 것이 속에 치밀었다.

그의 말에 마치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순간 시무룩해졌던 니아는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알았어, 그럼 숨바꼭질하자!”

그녀는 달려가며 뒤돌아보고 노래하듯 말했다.

“이쁜아이도 빨리 숨어~”

니아가 돌 던지면 닿을 거리까지 달려가 풀섶에 몸을 숨기자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루테리온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니아가 있는 풀섶과 곁의 아스타틴을 번갈아 보았다. 발이 움찔… 니아 쪽으로 움직였다가 루테리온은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아가씨가 마음에 들은 거니?”

루테리온은 노란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양옆으로 꼬리를 쉬익- 쉬익- 흔들었다. 그 진지한 표정을 보며 아스타틴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스쳐갔다. 루테리온은 이제 온기를 찾아 그의 외투에 파고들던 조그만 새끼가 아니었다. 그 연약하고 위태위태한 털뭉치가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서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난 세월의 의미 아니었던가.

잘 알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네가… 선택한 사람이야?”

루테리온은 니아가 숨은 방향을 한 번 돌아보고, 다가와서 아스타틴의 손 밑으로 따뜻한 머리를 들이밀며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스타틴은 그 모습에서 오래전 그에게 끼잉거리며 고개를 들이밀던 주먹만한 새끼 가우르를 떠올렸다. 15년과 한평생 전, 그들이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의 시작. 루테리온의 눈빛은 마치 이해를 구하는 듯했다. 슬픈 기색은 아스타틴 자신의 바람일 뿐일까.

“루테리온…”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아스타틴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시타에게 말한, 니가 원하는 존재가 그 누구라도 괜찮다고 한 건 사실이야.”

이미 다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원할 때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으면, 각자의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니가 선택한 건 누구라도 상관없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이제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루테리온은 위로하듯 나지막히 가르릉거렸다.

“넌 내가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준 친구고..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 영원히 그럴 거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장난치고, 그저 함께 앉아있었던 그 많은 시간이 이제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나갔듯, 텔루르가 떠나갔듯 이제 루테리온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그 기억만으로 버텨야겠지. 루테리온 같은 친구가 곁에 있었던 시간은, 언제까지나 서로 마음과 기억 속에 함께한다는 사실은 따뜻한 위안인 동시에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그걸로 됐어…”

아스타틴의 목소리는 쉰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시종일관 그를 똑바로 보고 있던 루테리온은 묵직한 온기를 그의 다리에 잠시 기대었다가 아스타틴의 손을 한 번 축축하게 까끌까끌한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떨어져서 몇 발짝 걸어가더니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밥을 굶긴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면 돼. 우리 이쁜이.”

눈앞이 눈물로 뿌얘서 루테리온의 모습이 잿빛으로 흐릿해졌다.

“자, 가렴.”

마치 이해했다는 듯 루테리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빠르게 뒤돌아서 니아의 은빛 머리칼이 빼꼼히 보이는 풀섶을 향해 긴 걸음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있을 곳을 향해 내달리는 그 모습을 아스타틴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디에도 속할 곳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있을 자리는 사랑하는 이들 곁이었는데, 이제 그의 자리는 어디일까. 루테리온처럼 저렇게 자신이 선택한 자리로 달려갈 날이 있을까?

루테리온이 고개를 풀섶에 들이밀자 니아가 꺄아~ 하고 좋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풀섶에서 튀어나와 루테리온을 쓰다듬고 입맞추었다. 저렇게 털 역방향으로 쓸어주면 싫어할 텐데, 평소에는 그러면 바로 도망가던 루테리온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주인 앞에서는 싫어도 참겠다는 것일까 생각하자 가슴이 작게 아파왔다.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갑자기 니아가 떠드는 소리가 조용해지더니, 그 앞에까지 가자 니아는 멍한 표정으로 루테리온을 마주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또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저희 아이를 잘 부탁해요, 아가씨.”

아스타틴이 입을 열자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본 유쾌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그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에서 아스타틴은 순간 적과 마주했을 때의 텔루르를 떠올렸다.

“넌 누구지?”

일어서며 말하는 목소리와 말투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 가우르의 주인인가? 하프엘프가…”

하프엘프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은 경멸로 더욱 차가워졌다.

“네 주인에게 가거라.”

그녀는 루테리온의 어깨를 아스타틴을 향해 밀었지만, 가우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주인을 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했지요.”

이미 작별인사는 한 터였다. 앞으로 더 아프고 더 보고 싶겠지만, 그건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었고 익숙했다. 이제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여인에게 루테리온의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자각시키는 게 먼저였다.

“주인?”

여자는 가느다란 눈썹을 혼란스럽게 찌푸렸다. 정말로 모르겠다고 할 참인가.

“나비야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냉랭한 목소리에 분노를 완전히 숨기기가 어려웠다. 루테리온은 그녀에게는 그저 물건일지는 몰라도 아스타틴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녀석을 데려간다면 최소한 진지한 태도는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이 여자는 왜…

“그렇게 떼를 부려놓고 데려가더니 이제와서 시치미이십니까?”

묘하게도, 그 말에 다크엘프 여자의 얼굴에 스쳐간 당혹감은 진짜였다. 이내 찾아온 체념한 깨달음도.

“내가 그러면… 설마…”

그녀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직하게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최소한 정신이라도 온전한 주인을 골라야지,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이 이제 시치미까지 뗀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스타틴은 분노로 몸이 굳으면서 목소리가 더욱 딱딱하게 나왔다.

“저도 댁같은 미친 다크엘프에게 소중하게 받은 가우르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아니, 사실 주인이 누구라도 싫었지만, 놓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루테리온 저 녀석이 선택했으니까요.”

선택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루테리온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가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희생이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이면 이 아픔이 그칠까.

“그런 그녀… 미친 여자를 선택했다는 말이냐.”

니아, 혹은 니아의 모습을 한 여인은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루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판단력이 좋지 않구나.”

루테리온이 만족스럽게 가르릉거리는 동안 그녀는 이번에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오랫동안 함께했느냐.”

“저 녀석이 태어난 직후였죠. 마사다 요새 함락 직후로 기억합니다.”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루테리온에게 말했다.

“내가 가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루테리온이 계속 그녀를 보며 가르릉거리자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젓더니 아스타틴에게 말했다.

“공짜로는 받지 않겠다.”

그녀는 귀에서 꽤 값이 나가보이는 보석 귀걸이를 떼어 내밀었다.

“나머지는 기회가 되는 대로 갚을 터이니 일단 받거라.”

“굳이 주지 않아도…”

그의 손을 붙잡아 귀걸이를 억지로 쥐어주는 손길이 억셌다. 전사답게 굳은살이 박힌 손의 감촉은 다시 본의아니게 텔루르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지 않았느냐, 신세지지 않겠다.”

신세지지 않겠다는 말은 호의도, 염치도 아니었다. 인간과 엘프 혼혈인 그, 아스타틴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뜻일 뿐. 그 생각에, 그리고 루테리온을 넘기고 돈을 받는다는 거부감에 그는 억지로 손을 빼고 귀걸이를 든 손을 내밀었다.

“이건 돌려드리죠. 밥이나 굶기지 말아주세요.”

눈에 고여오는 눈물을 그는 이를 악물면서 참았다.

“아까처럼 털 역방향으로 문지르지 말고요.”

손바닥 위의 귀걸이가 천 근은 되는 듯 무거웠다. 이 순간의 무게가, 시간과 마음과 외로움의 무게가 너무나.

“목 졸라서 숨막히게 하는 것도 위험해요.”

그런 그를 보다가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기억하겠다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내가… 아까같을 때 다시 주의줄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 여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10대 이래 그보다 작았는데도 언제나 거인 같던 텔루르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그만큼 양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일까.

“언제까지나 작은 고양이 같은 그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친구를 잃는 것을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귀걸이 위에 아스타틴의 손가락을 쥐어주었다. 굳은살 박힌 손이 따뜻해서 왠지 목이 더 메였다.

“그렇게라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너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싶지는 않구나.”

여인은 그의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니 받지 않겠다면 이곳에 내려놓고 가거라. 나는 대가 없이 이 소중한 아이를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니.”

그녀와 곁에 의연하게 선 루테리온을 보며 아스타틴은 귀걸이를 쥔 손을 조용히 떨구었다. 그녀 말대로 귀걸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에 못이긴 뗑깡일 뿐이라고 타이르는 텔루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루테리온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정말로 다시 한 번 등에 태울 만한 기수를 만난 것일까, 아스타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나는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라고 한다. 아라, 혹은..”

그녀는 뼈아픈 농담을 떠올리듯 쓴웃음을 지었다.

“니아라고도 하지.”

“아스타틴.. 아스타틴 라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양친과 그리고…”

텔루르의 이름은 아직도 말하기가 고통스러웠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텔루르가 떠오르는 이 여인 앞에서는 더더욱… 아스타틴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프다크엘프 텔루르의 양아들.”

“텔…루르?”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꿈틀했다.

“혹시 적검의 타하이샤가 아니냐? 내 기억이 옳다면…”

뭔가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던 아라니아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지.”

타하이샤?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텔루르라는 이름은 가명이라고 그녀가 얘기한 적은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생각의 갈피를 미처 잡기도 전에 아라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 허락한 선물에 감사를 표한다, 아스타틴 라펠.”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했다. 남자이며 혼혈인 그에게 다크엘프 여인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허무의 대지에서 추방당한지 여러 해가 지난 텔루르도 남자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너에게 무운이 함께하기를.”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에게 마주 인사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그는 아라 곁에서 노란 눈을 빛내는 가우르를 마주보았다.

“루테리온 너에게도.”

‘루테리온…’ 하고 중얼거리며 아라는 돌아서서 메타포노비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녀를 쫓아가던 루테리온은 문득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마치 망설이듯이, 마치 벌써 그리워하듯이. 아스타틴 자신이 이미 그렇듯… 그런 가우르를 아라니아카는 돌아보지 않고 불렀다.

“가자, 아사나스.(주:아스타틴의 ‘아스’ + 다크엘프어로 ‘아이’라는 뜻인 ‘아나스’, 즉 ‘아스타틴의 아이’)”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는 그 목소리에 몸을 돌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이의 당당한 걸음으로 주인을 쫓아갔다. 혼자 선 아스타틴이 하염없이 지켜보는 동안 전사와 그녀의 가우르는 그렇게 잿빛 정경 속으로 멀어져갔다.

소감

전부터 얘기한 장면이기는 했지만 막상 해보고 또 소설로도 써보니 예상한 것과 다른 새로운 극적 의미가 겹겹이 나와서 재미있네요. 오체스님 얘기를 바탕으로 구체화한 아스타틴과 루테리온이 함께한 일화들도 쓰기 재밌었고, 또 소중한 이가 모두 떠나간 아스타틴의 외로움을 표현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시점에는 이미 명이 얼마 안 남은(..) 아시타의 쾌활한 모습, 여기서는 왠지 사람같이 나오는 아라도 흥미로웠고요. 오체스님 말씀마따나 노예생활하고 샤나를 잃기 전에는 꽤 괜찮은 성격이었을 듯하네요. 아스타틴도 아라도 플레이를 거치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RPG에서 즉석으로 대사를 칠 때하고 소설로 쓸 때하고는 재미나 매체의 특성이 약간씩 다른 것도 좋은 도전입니다. 로그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면 소설의 경제성이랄까, 압축해서 콕 찌르는 언어의 맛은 좀 덜하기도 해요. 아스타틴의 후반부 대사에는 뒷받침할 만한 내면 묘사가 바닥난 기분도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여기서도 로그에 있는 대사를 몇 군데 자르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소설화 작업에는 좀 더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고 압축하는 게 소설의 특성을 더 잘 살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고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 제노님,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에는 이제 본편이군요. 첫 본편 리플레이와 소설도 기대해 주세요! (왠 기대)

이오닉스 시범 세션 – 월광(月狂)

3월에 시작하는 이오닉스 캠페인 PC 시범가동쯤 되는 무룰 역할극입니다. 그 캠페인을 제가 소설로 써볼 생각이어서 RPG 세션 소설화의 예행연습이기도 하고요. 내용 자체는 외전을 넘어 이단이기는 하지만, 인물 성격이나 상호작용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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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사이의 그늘이 길어지면서 숲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렸다. 긴장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아스타틴의 청력에는 나뭇잎을 밟고 가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는 그들의 이동은 조마조마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주변을 살펴도 적의 기척은 없었다. 아직은.

아스타틴은 뒤따라오는 동료 둘을 흘깃 돌아보았다. 이 숲에 살았었던 인간, 랜돌프 에디우스는 주의 깊게 주변을 경계하며
마치 먹이에 몰래 접근하는 육식동물처럼 움직였다. 다크엘프 전사 아라는 언제나처럼 오만한 표정이었지만, 움직임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아라의 곁에서 소리없이 따라오는 가우르(주:흑표범과 유사한 큰고양이과 포식동물)의 눈빛이 어둠 속에 빛났다.

주변에 나무가 엷어지면서 숲속 공터로 나오자 아스타틴은 숙련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공터 주변의 나무와 덤불 사이에 적의
기척은 없었고, 덫이나 위험한 식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록윌 요새는 완만한 구릉을 넘어 있기에 불침번을 세워 알프 연방의
척후를 경계하면 휴식을 취할 만한 곳이었다. 그는 한손을 들어 뒤따라오는 랜돌프와 아라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느냐?”

아라의 건조한 목소리는 살짝 숨이 가빴다. 역시 휴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대답했다.

“좀 쉴 만한 곳을 발견한 것 같아.”

“눈에 띄지는 않겠느냐?”

이 거만한 다크엘프는 여전히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토를 달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대꾸하려는 순간 랜돌프가 끼어들었다.

“록윌 요새 근처는 전에 내가 사용하던 근거지다.”

근거지. 랜돌프가 ‘엘프 이터’로서 엘프를 사냥해 노예로 팔던 근거지라는 뜻이겠지. 아스타틴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곳은 록윌요새 숏 스카우터들의 수색범위 안이야. 그런상황에서 휴식이라니 위험해”

아라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말은 숨이 차서 헉헉거리지 않고 있을 때나 하거라, 사냥개여.”

아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독기에 차 있었다. 그녀는 랜돌프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이어서야 임무를 수행할 수나 있을까.’

아스타틴이 행장을 내려놓자 가우르는 식량이 들어있는 그의 가방 냄새를 맡으며 주의깊게 다가왔다. 아스타틴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런 가우르의 목과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털의 보드라움과 그 아래 커다란 짐승의 열기가 손을 통해 지친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에구구 힘들다… 울 이쁜이도 그렇지?”

가우르가 스스로 선택한 주인은 아라였지만, 녀석은 루테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아스타틴 곁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다. 아라에게
아사나스라는 새 이름을 받았고 요즘은 모종의 이유로 나비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지고 있기는 해도, 이름이 무엇이든 가우르는
아스타틴이 만져주던 손길을 잊지 않았다. 아스타틴에게는 그것이 늘 다행이었다. 이렇게 가우르가 귀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기분좋게 가르릉거리는 (혹은 가우르니까 가우르릉일까) 순간이면 그래도 누군가는 그의 곁에 남아주는 것 같아서… 그는 그
생각을 떨쳐내며 아라와 랜돌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잠시라도 쉬지 않으면…”

“손톱으로 사람 뼈도 가를 수 있는 맹수를 잘도 가지고 노는군.”

랜돌프는 아스타틴과 가우르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작 중요할때 도망할 힘도 없으면 곤란하겠지. 그럼 일단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

아라는 마치 랜돌프가 전원의 무기와 돈을 맡겨달라고 한 듯 쳐다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또 시작이었다. 어려서 이 숲에 살았고 아버지가 엘프 도망노예였던 아스타틴이라고 에미넴 숲의 악명높은 엘프 이터 랜돌프
에디우스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아라는 악감정을 넘어 랜돌프의 배신을 기정사실로 취급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듣거나 짐작한 것을 종합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세 사람이 어떻게 서로 목숨을 맡기고 싸울지
아스타틴으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

아라의 말에 랜돌프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희들이 잠든사이에 포박해서 노예로 팔아먹기라도 할까봐 말이냐?”

아스타틴의 손길에 기분 좋아하던 아사나스는 마치 랜돌프의 말을 알아들은 듯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긴장했다. 어둠 속에 가우르의 노란 눈이 랜돌프를 지켜보며 빛났다.

“전적이 어디 가겠느냐?”

아라의 대답은 차분했다.

“더군다나 시장이 이렇게도 가까운데 말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알프 요새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군.”

랜돌프의 장난스러운 미소만으로 판단한다면 모르는 사람은 꽤나 유쾌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웃음이 닿지 않는 차가운 눈빛만 아니었다면.

“너는 아쉽게도 별로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 뭐… 생긴 거야 제법 반반하다만…”

그는 아라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평가하며 훑어보았다.

“너희 종족은 애초에 너무 뻣뻣하거든.”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땅에 벌렁 드러누워 버리는 그를 보는 아라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랜돌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날 실망시키는구나, 사냥개야.”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진짜 살의가 담겨 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자칫하면 적진에서 아군끼리의 칼부림을 뜯어말려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쯤이면 이미 배신해서 나에게 빌미를 줄지 알았다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간신히 자신을 제어하며 아라는 좀 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하긴, 마법적으로 구속받은 ‘노예’에게 큰 선택지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칼에 얹었던 손을 내리며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그녀를 랜돌프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거. 무슨 처치였는지 알고 있나?”

아라는 멈춰서며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눈이 간간히 반짝였다.

“네가 우리를 배신하려는 본능을 막는 것이 아니더냐?”

랜돌프는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시한부 독약 같은 거다. 달마다 꼬박꼬박 해독제를 먹어야 되는거지. 말하자면…”

그는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은 나를 죽일수는 있어도 구속하지 못해.”

“그리고 너는 우리를 배신할 수는 있지만 살 수는 없겠지.”

아까부터 긴장하고 있던 가우르가 마치 아라의 예측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아스타틴은 그런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러고 있다가 적들에게 들키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일까.

“그렇게 싸우다가는 들킬지도…”

“나를 믿고 안믿고는 너희들의 자유다.”

랜돌프는 그의 말을 끊었다. 희미한 조명 속에 웃고 있는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왕에 주어진 자원이라면 좀더 잘 사용해보는건 어때?”

“언제든지 본성을 드러내면 그 죽음을 앞당겨줄 용의는 있다. 다사케타.”

다사케타. 생전에 텔루르가 노예 사냥꾼을 가리켜 그 표현을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옥의 사냥개, 노예 사냥꾼들.
차가운 저녁바람이 스쳐가면서 아스타틴은 문득 몸을 떨었다. 달빛만 희미하게 섞여오는 숲의 어둠 속에서 그 원한과 비탄의 말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저주 같았다.

“그 외에는… 너를 믿지는 않는다. 너의 가치없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라면 조금 더 믿지만.”

순간적인 공포감을 잊으려 애쓰며 아스타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였고, 적도 아니고
동료끼리 싸우다가 죽거나 잡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랜돌프가 지켜서는 것은 아라가 수긍하지 못했고, 아라는 지쳐보이는 데다
불침번을 완전히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언제 또 불청객이 찾아올지 몰랐으니까.

“그럼 공평하게 제가 먼저 불침번 서면 되는 거죠?”

아라는 아스타틴을 돌아보지 않고 시선만 흘깃 던졌다.

“그러거라.”

“나를 믿지 못하겠다니 나는 좀 쉬어두겠다.”

아스타틴이 공터 가운데에서 바싹 마른 낙엽만 빼고 나뭇잎을 치워내는 동안 랜돌프는 말을 이었다.

“마음이 바뀌어서 나에게도 불침번을 맡기려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깨워라. 그리고……”

랜돌프는 일어나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못마땅하다면 언제든지 덤벼봐. 나는 안타깝게도 가짜 싸움같은 걸 배워본적이 없다. 아마 목숨을 걸어야 할걸.”

“네가 진짜 얼굴을 드러냈을 때.”

랜돌프가 방만한 자세로 도로 드러눕는 동안 아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때로 하도록 하지.”

아라가 랜돌프로부터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스타틴은 주변의 나무에서 꺾은 죽은 나뭇가지를 쌓고 조그맣게 불을 지폈다. 이제
아주 대놓고 서로 협박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 둘을 임무에 같이 내보낼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지독한 유머감각의 보유자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가우르 옆, 공터 가장자리에 앉아 숲속을 내다보며 그는 수통에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아까 본 시내에서 떠올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의 공터에서 풀썩.. 하는 소리와 이내 조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타틴은 숲에서 뒤편의 공터로 잠깐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다를까, 아라가 바닥에 주저앉아 작게 노래하며 손가락으로 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생글생글 웃음지었다.

“타틴 타틴~ 같이 놀자아~~”

이런… 또 왔다. 이런 상태일 때면 아라는 아라가 아니었다. 아라의 뻣뻣한 성격과 불같은 성미가 비록 피곤하다 해도, 지금의 그녀는 아라보다도 한결 강적이었다.

“뭐해? 뭐해?”

아스타틴은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녀가 뒤로 슬금슬금 다가앉는 것을 느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더 위험해진 것을 알면서도 왠지 입가에는 웃음이 살짝 떠올랐다.

“안녕, 니아.”

“잘 지냈어어~?”

아라의 다른 인격, 니아는 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부벼댔다. 차가운 저녁 속에 그 온기는 등뒤의 작은 불길보다도 한결 따뜻했다. 그 따스한 안도감에 겨워 아스타틴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덕분에 잘 지냈지.”

“안녕~ 피냄새 나는 아저씨.”

니아가 한쪽 팔을 풀더니 몸을 돌려 랜돌프에게 손 흔들어주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여긴 왜 왔어요? 놀러왔어요?”

“아이들이 잠들 시간이다.”

랜돌프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니아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시키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아스타틴은 요새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무서운 아저씨들이 있는데.. 그 아저씨들이랑 숨바꼭질 중이야.”

“아, 정말?”

니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밝게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들 죽이면 돼?”

“아니아니…”

아스타틴은 고개를 저었다. 니아라는 인격을 그저 어른 몸속의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는 허를 찔리기 십상이었다. 예측불가능하고
유쾌할 뿐, 니아의 근본은 아라와 같았다. 유혈을 결코 피하지 않는 다크엘프 전사인 점은 매한가지였으니… 어찌보면 이성이라는
최소한의 제어가 있는 아라보다 이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들키면 지는 놀이야.”

“히잉… 죽이는 게 좋은데.”

어린애 목소리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아저씨들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하게 갔다가..”

주변의 숲에서 주의를 돌리지 않은 채 그는 슬금슬금 걷는 모습을 손으로 흉내내 보였다. 피에 굶주렸다 해도 니아는 어쩔 수 없이 사람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 조용하게 등 한 대 때리고 오면 된대. 오늘은 안되고.. 다음에 실컷 놀자.”

“나비가 때리면 안 돼?”

최소한 들키면 안 된다는 얘기는 이해했는지 니아는 숨죽여 깔깔 웃었다.

“나비가 때리면 죽을 텐데~”

옆에서 가우르가 다시 가르릉거렸다. 아사나스라는 이름이 있지만 주인이 자꾸 나비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제 나비 소리 나오면 자신을 부르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나비야아~~”

그 소리에 니아는 ‘나비’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가우르의 목을 끌어안으며 부벼댔다. 털을 땋으며 작게 노래부르는
모습을 아스타틴은 어쩌지도 못하고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저 긍지높은 전사가 이런 모습을 보일 만큼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과
나비하고 노는 니아의 순진무구한 모습은 기묘한 모순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그녀가 아시타를 노스탤지아 대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해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후 처음으로 다가와준… 친구를. 왜 아시타의 생전에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거의
원수나 진배없는 이들과 왜 이런 곳에 있는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나무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렸다.

곁눈으로 움직임이 보였다. 잠들지 않았었거나 자다 깬 듯, 랜돌프가 단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때려서 기절시키겠다. 계속 떠드는것보다 낫겠지.”

너무 열중했는지 니아는 그 말에는 반응도 없이 노래하다 말고 가우르의 어깨를 아앙- 깨물었다. 나비는 가르릉거리며 고갯짓으로 그녀를 장난스럽게 밀어냈다.

“놔두면 알아서 본래대로 돌아와.”

아스타틴은 다시 공터 주변의 숲으로 눈길을 돌렸다. 랜돌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 이 자리에 있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에게 들킨 다음은 늦어.”

랜돌프의 목소리에는 으르렁거리는 저음이 섞여들었다.

갑자기 아스타틴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 자신 ‘엘프 이터’로서 얼마나 많은 엘프를, 여자들을 이렇게 만들었을지 모를
랜돌프가 무슨 자격으로 아라, 혹은 니아에 대해 뭐라고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니아에게 손을 대겠다고 뻔뻔스럽게 말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만든 게 너희 인간들이면서-”

랜돌프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숲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동시에 가우르가 긴장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잠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m쯤 거리, 요새와의 사이에 있는 구릉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요새에서 나온 정찰일까? 저대로 오다가는 이 야영지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신호탄이라도 올렸다가는 요새에서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등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랜돌프가 작은 모닥불을 껐는지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공터에 랜돌프와 니아는 살짝
흔들리는 한켠의 수풀을 제외하고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가우르는 그의 곁에 서서 눈을 빛내며 숲을 내다보고 있었다.

“착하지, 착하지…”

아스타틴은 가우르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옆의 수풀로 살짝 밀었다. 이곳에 가우르가 숨어있으면 혹시 정찰이 오더라도 랜돌프와 니아를 돕기에는 충분했다.

그 ‘혹시’의 경우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밤의 숲속에서 아스타틴은 이미 현재가 아닌 오랜 옛날의 시간을 달리고 있었다. 어서 도망쳐요, 텔루르! 수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는 안 됐었다. 그렇게 무작정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수백, 수천 번을 생각했듯이 그는 다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유인했어야 했다. 텔루르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멀리…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듯이 그는 류트를 집어들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숲속으로 달려갔다.

”…잠깐.”

엘프 튀기는 굳어서 숲속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불빛 속에 긴 귀가 두어 번 까딱였다.

그 순간 랜디는 위험을 직감했다. 제길, 역시 록윌에 너무 가까운 위치였다. 하프엘프가 자세를 낮추며 숲을 살피는 동안
랜디는 모닥불을 당장 발로 차 흩어버리고 아직도 넋놓고 앉아있는 다크엘프 여자를 붙잡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입을 막고
함께 수풀로 들어가는 것은 약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지금이 어디 그딴 생각 할 때냐고.

하프엘프가 ‘니아’라고 불렀던 여자는—이런 꼴일 때면 이름까지 달라지는 건가?—한 박자쯤 늦게 버둥거렸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시점.. 아씨, 이게 아니고! 랜디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 술래다.”

입에 팔뚝을 물려놓자 미친 다크엘프 여자는 앞니로 팔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상처를 입히려고 무는 건 아니었고 (그런 일은
질리도록 많았으니 차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저 뭔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공포에 질려 비명이라도 지르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

랜디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놀랍게도 튀기 녀석은 말 한 마디 없이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냐 저 자식!’

불렀다가는 정찰에게 나 여기 있소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미친 여자를 끌고 쫓아갔다가는 역시 들켜버리기 십상이었다.
결국 말 한 마디 못하고 랜디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대원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별빛과 달빛에 의지해 아스타틴은 숲속을 달렸다. 정찰은 미끼를 물었는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찬 밤공기를 마시며 달려가는 이 상황은, 일이 잘못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감은 가슴 뛰는 기묘한 희열이었다.

이 기분 때문에, 달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노스탤지아라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더 잃을 것이 없어서, 두려움의 날이 선 이 흥분밖에는 남은 것이 없기에…

공터에서 상당한 거리까지 왔을 때 그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차가운 달빛을 마신 듯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지만 왠지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 순간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어쩌면 광기가 몰려왔다.

그는 살아있었다.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지만 그는 매번 죽음을 피해 이 달빛 아래 서있었다. 그것이 가혹한 슬픔인지, 광기어린 희열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 기왕 유인한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정찰이 여럿이라면 공터의 야영지를 찾아낼 지도 몰랐다. 등뒤에 류트의 무게는 든든하고도 가벼웠다. 텔루르는 그의 류트 연주를 좋아했었다.

그는 류트를 손에 잡고 잠시 조율했다. 그리고 공기중으로 맑은 음들을 진혼곡처럼, 달빛 속의 광시곡처럼, 세상에 대한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한 도전장처럼 날려보냈다.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어둠에 귀기울이며 빌어먹을 하프엘프 녀석이나 정찰의 기척을 살피던 랜디는 갑자기 목에 와닿는 차가운 날카로움에 몸이 굳었다.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눈만 돌려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든 화살끝을 그의 목에 댄 다크엘프 여자의 눈빛은 또렷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어둠 속에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놓지 않으면 죽이겠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랜디는 마치 덴 듯 팔뚝을 치우며 이를 드러냈다.

“도대체 지휘부에서 왜 널 믿는지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죽는건 사양이다. 얼간아.”

“어찌 된 상황인가?”

여자는 그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튀기놈은 어디 있지?”

“정신이 들었으면 여기 숨어서 다른놈들이 오지않나 경계해라.”

랜디는 격하게 속삭였다.

“그녀석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그때 달빛과 어둠을 타고 맑은 류트음이 동쪽에서 들려왔다.

“네 말이 맞구나, 왠일로.”

다크엘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석이 시선을 끄는 동안 내가 뒤로 돌아가 정찰병을 해치우겠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는 있는 기회를 되도록 활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넌 내 뒤에 다른놈이 없나 경계해.”

단단히 미쳤긴 해도 활솜씨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수틀려서 랜디 자신의 등짝을 쏴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기랄,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녀석들과… 천화의 계곡과 페어리들을 속으로 저주하며 그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 바보짓을 해서 이 고생이란 말인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얼간이야 젠장.”

새삼 짜증을 느낀 그는 으르렁대듯 중얼거렸다.

나무와 수풀 사이를 이동하면서 차차 눈이 어둑한 환경에 익숙해졌다. 얼마나 갔을까, 류트음을 따라가며 주변을 경계하던
그는 눈앞의 수풀에 조용조용 다가서는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그 너머에는 하프엘프놈이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앉아있었다.

랜디가 소리죽이며 다가가고 있을 때, 하프엘프를 수풀 너머로 지켜보던 알프군 정찰이 뒤돌아보더니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
이런 젠장, 최소한 둘이 있는 모양이었다. 뒤돌아봐도 빽빽한 수풀 속에서 제2의 정찰의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어쨌든 이쪽은 뒤에서 경계하고 있는 궁수라는—좀 불안하기는 해도—카드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랜디는 한손에 단도를 빼어들고 다른 손에는 망토를 벗어들었다. 짜릿한 두려움이 손끝, 발끝까지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정찰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에 망토를 덮어씌우자 상대는 놀라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가 무기에 손을 뻗거나 공격해오기 전에 랜디의 칼은 이미 그의
등에 파고들고 있었다. 늑골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칼의 손맛이 매끄러웠다. 빠른 죽음이 나았다, 불운한 정찰에게나 랜디
자신에게나. 정찰이 내뱉은 단말마의 고함은 망토가 소리를 죽여주었다.

이윽고 정찰의 저항이 약해지더니 그는 푹 늘어졌다. 랜디는 그를 놓으면서 칼을 빼려고 단검 자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등뒤에서 소리를 들었다.

“움직임을 보니… 두 명 정도…”

아스타틴은 류트에서 고개를 들어 두 정찰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까 봐둔 길이 있기는 했는데 어디까지 유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머지 둘과는 어떻게 다시 조우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혼자 말없이 떨어져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그는
억눌렀다. 시간이 없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어차피 일행이란 짐이었다. 그냥 혼자 행동하는 게 편했다.

어차피 모두 떠나가 버릴 테니까,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다. 의지하는 건 위험했다.

눈앞의 수풀이 폭발적인 움직임에 갑자기 심하게 출렁였다. 두 정찰이…? 아니, 저건 분명히 전투였다. 그렇다면 또 한 명은 정찰이 아닌 아군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이 한 명이 쓰러지고, 랜디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달빛 속에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을 숨기고 있던 두 번째 정찰이 랜디의 등뒤로 육박해 왔다.

시간이 없었다. 피할 시간조차, 반격할 시간은 더더욱. 그러나 기분 더럽게도 등뒤에서 누군가 죽이러 달려오는 것을 인식할
시간은 있었다. 더욱 끔찍하게도 그의 생명은 전혀 미덥지 않고 적보다 아군끼리 먼저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동료에게
달려있었다.

‘제기랄 늦는다. 쓸모있다는 걸 증명 좀 해봐 미친 계집아!’

눈앞의 하프엘프가 갑자기 움직였다. 얼굴 바로 옆으로 뭔가 스쳐갔다 싶더니 이내 뎅- 하고 현이 한꺼번에 울리는 불협화음이 울렸다. 정찰의 발걸음이 아주 잠시 정지했다.

쐑- 공기중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스쳐갔다. 다시 뎅- 하고 현악기 떨어지는 소리와 섞여 나뭇잎이 푹신한 땅에 무거운 것이 쓰러졌고, 발소리는 완전히 멈추었다.

가만 있기만 하면 된다.

튀기와 노예사냥꾼의 뒤를 따라와 풀섶에 숨어있던 아라는 노예사냥꾼이 등뒤에서 공격받으려는 모습을 보고 화살을 매겨두었던 활시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당겼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위를 놓으려는 손이 멈추었다.

가만 있기만 하면 두 발 짐승을 사냥하던 사냥개는 죽을 것이다. 시위를 당기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아니, 조금 늦기만 해도
된다. 아주 잠시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주받을 다사케타를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 자를 두려워해? 시위를 당긴 손이 움찔했다.

그 순간 하프엘프가, 저 여리여리 어리버리한 녀석이 손에 든 것을 무작정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인책으로 연주하던 류트를.

저 멍청한 녀석이.

이 숲에 살았더라면 바로 저 사냥개에게 붙들려 노예로 팔아넘겨졌을 녀석이 저 사람 잡는 개도 동료라고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다.

류트를 맞고 적이 멈칫한 바로 그 순간, 아라는 시위를 더 세게 당기며 한 번의 심장 박동 동안 화살촉을 정찰의 등 중앙에 조준하고 다음 심장 박동 동안 숨을 멈추고 시위를 놓았다.

죽일 때는 죽여도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노예 사냥꾼이 본색을 드러내는 날에는 기꺼이 죽이겠지만, 그날까지는, 동료인
동안에는 비겁하게 적에게 저 자의 목숨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 그 확신은 예리하게 공기를 찢으며 적에게 날아가는 화살만큼이나
곧고 확고했다.

그러지 않으면 겨우 류트 하나 든 저 하프엘프 튀기에게 져버릴 테니까. 잠시라도 노예 사냥꾼의 죽음을 타인에게 맡길 비열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정찰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는 활을 내리며 일어섰다.

“캠프는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풀섶에서 일어서며 말하는 아라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다.

“하나가 전부였나?”

랜돌프는 천천히 돌아서서, 화살을 맞고 쓰러진 시체와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너머로 그녀를 마주본다.

“둘이 한 조였다.”

“결과적으로 잘 되었네요.”

살짝 말을 더듬는 아스타틴은 악기를 집어던질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아직 역력하다. 랜돌프는 그런 그를 돌아보며 이를 드러낸다.

“한 번만 더 얼빠진 짓을 해봐. 그때는 죽여서 파묻어버리고 갈 테다.”

“그 순간 류트를 맞아 정찰병이 주춤하지 않았으면 너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아라가 지적하는 동안 아스타틴은 구해준 게 누군데… 하고 투덜거린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간 지금 그들 사이에는 어떤 어색함이, 그리고 수풀 위로 달빛을 싣고 부는 바람 같은 시원함이 있다.

가우르가 땅에 떨어진 류트를 주워다 아스타틴에게 갖다주는 동안 아라는 풀섶을 헤치며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캠프를 옮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른 안전하게 쉴 곳이 있는가, 패스파인더?”

랜돌프는 고개를 젓는다.

“적의 경계지역과 너무 가까워. 정찰조가 안돌아오면 반드시 다른 놈들이 올 것이다.”

그는 즐거움 없이 이를 드러내며 멀리 달빛 속에 보이는 요새를 돌아본다.

“오히려 잘됐지. 이쪽으로 적들의 병력이 파견된 동안, 그 공백을 노려 정찰을 속행하자.”

“그러도록 하지.”

내키지는 않는 태도이지만 아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동하자.”

“아까 저녁 무렵 봐둔 곳이 있긴 합니다만.. 정찰을 마치고 거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이제 한결 진정한 기색인 아스타틴을 아라는 흘깃 쳐다보고는, 가우르의 등에 실은 짐을 끌러서 던져준다.

“이 인간들의 소굴에서는 빨리 빠져나갈 수록 좋겠지.”

그녀가 랜돌프에게 짐을 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랜돌프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것만은 동감이군. 솔직히 익숙지가 않아. 사람냄새 나는 지역은….”

아라는 랜돌프를 잠시 표정없이 보고, 아스타틴은 엷게 웃는다.

“간만에 옳은 말씀을 하는군요.”

달빛 속에 흐릿하게 빛나는 요새를 향해 걸음을 떼면서 아스타틴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라에게 고개를 돌린다.

“절묘한 타이밍에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앞으로 단독행동은 삼가도록.”

“집단생활은 좀 무리라서요…”

우물쭈물하는 변명에 아라는 대꾸하지 않고 말한다.

“앞장서겠는가.”

“그러죠.”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수풀을 헤치고 주변을 경계하며 셋은 조용히 이동한다. 단 셋이서 이곳 적진 한가운데서, 공통의 목표와
공동의 위험에 묶여 어쩔 수 없이 함께. 길고 위험한 밤이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을 창백한 달만이 내려다본다.

소감

역시 플레이 내용이 별로 안 길어도 소설로 쓰면 막 고무줄이 되는군요..OTL 삭풍님 말씀마따나 원래의 대사와 선언 사이에 묘사가 들어가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분량을 폭주시킨(..) 묘사와 내면 때문에 인물에 또 새로운 면들을 추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소설의 재미겠지요. 리플레이 제목은 ‘정찰 임무’였지만 소설 제목은 ‘월광’이 된 것도 원본 로그에 없는 내용들이 들어가서였으니까요.

플레이의 재미였다면 역시 인물끼리 으르렁거리다가 막상 위기상황에는 서로 목숨을 구해주는 역동적인 인물 관계였습니다. 죽도록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끼리 결정적인 순간에 협력하는 과정이 입체적이어서 좋았습니다. 아직 갈등의 소지는 많고도 많으니 이 임무 하나로 갑자기 우리 친구 아이가를 외치며 닭살을 날릴 리는 없지만, 최소한 일행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물론 월광 자체에서도 드러났듯 동료끼리 으르렁거리다 보니 임무에도 지장이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런 갈등을 해소해가는 게 또 캠페인의 중요한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인물 간의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간의 갈등이 아니라 노예제, 인종차별, 노스탤지어 내의 알력 등 안힐라스 자체의 모순과 문제점이기도 한 만큼, 그런 큰 문제들을 인물의 감정과 고민, 인간관계 내로 끌어들여 표현하고 해소하는 건 좋은 극적 장치라고 봐요.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 큰 사회적 문제가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지만, 최소한 인물의 성장과 깨달음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는 엿볼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고 또 갈등이 가장 컸던 건 랜디와 아라의 충돌이었던 것 같습니다. 둘다 성격 만만찮은 사람끼리 입장까지 정면으로 대립하니 불꽃이 안 튈래야 안 튈 수가 없죠. 랜디가 과연 양심을 찾을 수 있을지, 아라가 원한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둘다 도덕률과 감성의 실마리는 있지만 제대로 발현은 못하고 있는, 어찌보면 가장 성숙하지 못한 인물들인 만큼 입체적인 변화의 소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설로 쓰면서 어렵고도 재밌었던 것은 시점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은 길어서 별문으로 옮깁니다.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과 이방인님, 제노님께 감사드리고, 이단 플레이에 소설까지 공개를 허락하신 삭풍님께도 감사드립니다. 3월부터는 본편 로그도 올릴 수 있겠군요. 많이 부족한데 지적과 질책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m(__)m

월광 세 줄 요약

아라: 이 강아지 같은 녀석 숨만 잘못 쉬면 넌 나한테 죽.. 는… 꺄하하 얘들아 놀자! (헬렐레)

타틴: 싸우지좀 말고… 우헤헤헤 나잡아봐~라~ 디링디링~

랜디: 왜 제정신인 놈이 나밖에 없냐!! (운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

로그로 가기

15화 끝나고 한 로그를 오체스님께서 정리해 주셨습니다.

요약

마르얌과의 약혼 문제로 시간을 끈 것도 몇 달, 아미르는 어머니 키네니아가 자신의 동의 없이 마르얌 대신 사촌동생 이레네와 혼인 준비를 추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길길히 날뜁니 어머니에게 항의합니다. 마르얌에 대한 아들의 진심을 안 키네니아는 평생 처음 자신의 뜻을 세우며 반항을 해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지요.

감상

원래는 좀 더 본격적인 사회판정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PC방 시간은 어머니도 굴복시킵니다(…) 제목은 중의적입니다. 어머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는 어머니일 수밖에 없으니 아미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는 키네니아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남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가족애와는 다른 의미이니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는 마르얌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회피하던 아미르가 처음으로 폭발하는 모습이라든지, 때로 독단적이면서도 결국은 자식에게 못이기는 키네니아의 자식사랑이 인상깊었습니다. 한편 키네니아가 독단적이었던 건 아미르가 스스로 자기 주관을 못 세우니까 답답해서 그런 거라고도 생각하지만요. 언제나 의사소통은 중요한 것이지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게임의 규칙

이전 마음의 계절이 ‘여명과 석양의 청춘드라마’라면 이번에는 ‘여명과 석양의 막장드라마’ 판이군요. 야한 대목과 폭력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게임의 규칙

I. 절대 주도권을 잃지 말라

“이번 판은 아무래도 엑토라스의 승리 같습니다.”

새파란 하늘에는 티없이 하얀 구름이 흐르며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햇살은 밝지만 너무 뜨겁지는 않고,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식혀준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하고 음악적인 목소리는 품위에 한 치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달콤한 약속을 품고 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젊은이에게 대답한다. 목소리는 낮지만, 주변에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분명 이올라스에요. 10 듀캣을 걸죠.”

“10 듀캣에다가 입맞춤은 어떻겠습니까?”

어깨 너머로 돌아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지만 냉정하고, 철저히 계산적이다. 아마도 그녀 자신의 눈빛이 그렇듯이.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입맞춤 대신 10 듀캣을 더 걸도록 하죠.”

주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스틸리안느 영애의 입맞춤에 10 듀캣의 가치밖에 없는지는 몰랐는데요.”

듣는 사람들이 웃기 전에 스틸리안느는 빠르게 쏘아붙인다.

“추가 10 듀캣은 니키아스 공의 입맞춤을 피하는 대가랍니다.”

좋은 공연을 본 관객이 박수치듯 주변에 앉은 귀족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못 들은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전해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그의 눈빛에도 웃음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며 스틸리안느는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린다. 궁정 무도회의 춤처럼 정교한 대화에도, 관객의 반응에도, 날씨에도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결국 그날은 이올라스 노타라스의 승리로 끝나고, 니키아스 콤네노스 두카스 안겔루스는 시종을 통해 그녀의 시종에게 10 듀캣과 편지를 전한다. 영애의 안목에 감탄을 표하고, 10 듀캣을 되찾을 내기를 위해 훗날 찾아뵐 수 있겠느냐는 편지 내용을 그녀는 만족스럽게 확인한다.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II. 약점을 보이지 말라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절 보내세요.

선택이라는 말은 때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를 볼 생각에 들뜬 동생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바스티아노스는 모르니까,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애의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영원히 변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나는 눈물과 절망의 눅눅한 냄새가 싫었다. 익사하는 사람처럼 세차게 끌어안는 품이 싫었다.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마주 안지도 않고 스틸리안느는 그 포옹 속에 가만히 서서 맞은편 벽만을 쳐다보았다. 절 보내세요. 이 한 마디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펼쳐나가는 미래를 꿰뚫어보듯.

“아..”

눈을 뜨자 어둠 속이다. 은빛과 청색 달빛이 얼룩진 검은 방안은 조용하다. 가슴은 놀란 새의 날갯짓처럼 세차게 뛴다. 눈가가 왜 젖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섯 살이었던 그날도, 아버지 소식이 왔을 때도, 어머니가 뒤를 따르듯 돌아가셨을 때도 한 번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강하고 따스한 팔이 끌어당겨 꼭 안아주자 가슴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던 새는 조금씩 조용해진다. 아직 졸음에 잠긴 그의 쉰 목소리는 걱정스럽다.

“예… 예.”

스틸리안느는 마치 졸음을 몰아내려는 듯 눈을 비벼서 눈물을 지워버린다. 꿈속 어머니의 눈물이 눈가에 묻어난 것일까. 그 기억에 대한 혐오감에 몸이 떨려온다.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머리를 쓸어넘겨주는 부드러운 손에서는 낙엽 태우는 연기와 박하꽃 냄새가 난다. 그 손을 붙잡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금 물러나서 일어나 앉는다.

“아무래도 그렇죠. 귀족 처녀의 자존심도 버리고 잘생긴 불한당과 놀아나는 악몽을 꾸었답니다.”

“아, 저런.”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누구라도 놀라서 깰 만한 꿈이군요. 그래서 그 불한당은 어떻게 됐습니까?”

“불한당부터 걱정하시네요. 그게 유유상종이라는 건가요?”

익숙한 독설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는다. 오랜 악몽을 몰아내주는 그의 온기 속에서, 내밀하고 너그러운 밤의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에서 잠시 자유로울 수 있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용하고 버릴 남자를 이렇게까지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위험했다.

“그자가 어떻게 하던가요. 이렇게… 손길로 영애를 유혹했습니까?”

발을 만지고 발목을 감싸는 손의 온기에 스틸리안느는 흠칫 떤다.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같이!

“그대를 여신이라고 부르고 숭배하듯 어루만지며 순진한 처녀의 마음을 훔치던가요?”

발등에, 무릎에, 허벅지에 입술이 차례대로 닿자 자제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달빛 속에 마주친 그의 눈에도 열정의 빛이 어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결한 입술을 차지하고…”

그가 와락 끌어안으며 입맞추자 그녀는 기꺼이 입을, 몸을, 영혼을 그에게 연다. 이건 미친 짓이다. 달빛 속의 광기, 미래가 없는 소모적인 불길인 것도 알고 있다. 그는 황제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 다 알고, 다 계산하고 있는데도…

나중에, 나른한 만족감 속에 그와 함께 누워서 그녀는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본다. 잠시나마 조금 다른 꿈을 꾸면서,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며. 가슴을 갉아먹는 공허를 잠시나마 충족받은 채, 부질없는 환상인 것을 알면서, 다 알면서.

III.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

“니키아스, 나…”

목소리는 부서진 유리조각이 되어 목을 찢으며 나온다. 떨리는 약한 목소리가 싫다.

그는 반쯤 열린 문앞에서 멈추어선다. 돌아보지는 않고, 그 작은 자비에 스틸리안느는 감사한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 채, 그녀는 말하려고 입을 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스틸리안느.”

그는 어깨 너머로 천천히, 반쯤 돌아본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등잔빛 속에서 익숙한 얼굴의 뚜렷한 윤곽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여신에게는 흠조차 되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해요.”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 우두커니 앉은 스틸리안느는 멍하니 보기만 한다. 잡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

창밖으로는 푸른 달과 하얀 달이 져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스틸리안느는 그가 말을 듣기도 전에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할말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도, 그 의미가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에 천천히 천천히 스며든다.

마침내 그 지식이 젖어들어 이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다가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문다. 비명을 지를까 두렵다. 밤의 자락을 갈기갈기 찢는 비명을 듣고 모두가 달려온다면, 그때야말로 마지막 긍지마저 내버린 후일 테니.

그가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반역자의 딸이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의 장자와 결혼하는 것은 니키아스가 황제의 신뢰를 잃는 것을 뜻했다. 여러 가문에 결혼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니키아스가 벌써,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죽은 반역자의 딸과 그 여자의 사생아를 위해 그가 왜…

이불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소리없는 긴 비명을 토해낸다. 목표를 위해 이용할 남자였을 뿐인데, 어떤 광기 때문에 이 지경에… 그가 버리고 갔을 수많은 여자들처럼, 문을 닫은 그의 등뒤에 남겨졌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틸리안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노려본다. ‘자신만을 생각해요.’ 단순하고 착각의 여지가 없는 대답.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한… 다른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신에게 인정하면서 그녀는 굴욕감과 분노가 타고 남은 재를 가슴 가득 안고 잿빛 새벽을 맞이한다.

IV.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워라

의사는 실력이 최고이며,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킨다고 했다. 그녀가 시술한 환자들은 이후에도 문제없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모두들 쉬쉬하는,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

“마음을 확실히 정하셨습니까?”

의사의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 앞에서 스틸리안느는 긴 순간 침묵한다. 확실히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은 있지도 않은데 가슴 속의 새는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할 수 있다면 뱃속의 아이도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칠까. 심장과 아이는 모두 그녀의 몸속에 갇혀 있다, 그녀 자신이 그렇듯이. 이 지독한 감옥을 찢어발겨 모두를 풀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듯 그녀는 눈을 꽉 감는다. 잠을 제대로 잔지 너무 오래 되었다…

의사가 조용히 일어서자 의자가 바닥을 가볍게 긁는다. 그 소리가 귀에 크게 울리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하실 수 있는 수술이 아닙니다. 가보십시오.”

마치 누군가 손을 붙잡아서 당긴 것처럼 멈칫멈칫, 부자연스럽게 스틸리안느는 팔을 뻗어 의사를 제지한다. 그리고 누군가 고개를 잡아 움직이듯이 천천히 끄덕인다. 선택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는 막다른 길에 서서. 의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침상 위에 누우십시오.”

자리에 눕자 신분을 숨기려고 얼굴을 가린 너울 너머로 깔끔한 하얀 석회 천장이 보인다. 가만히 누워 심장 소리에 귀기울이며 스틸리안느는 어려서 시골 별장에 새하얗게 내렸던 눈을 떠올린다. 눈밭 한가운데 지독히도 붉었던 선혈의 기억이 눈을 태울 듯 선명하다.

별장 일꾼의 아들은 솔개를 하나 길들여 마당의 닭과 싸움을 붙이고는 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몇 살 위였던 그 아이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녔고, 새들의 싸움을 조마조마하면서도 두근거리며 지켜보곤 했다. 몇 번 쪼이면 물러나는 수탉의 모습을 보기 지루해진 스틸리안느는 홱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평소라면 누나 뒤를 쫓아왔을 바스티안은 들어올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놀란 세바스티아노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스틸리안느는 벌떡 일어나서 마당으로 달렸다. 그리고 눈밭 한가운데 튄 피를 보고 우뚝 섰다…

의사가 들어와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갈색 액체가 든 잔을 건넨다.

“드십시오. 잠이 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겠지. 얼룩진 핏자국만을 남기고.

여덟 살 스틸리안느는 우는 세바스티아노스를 가로막으면서 일꾼의 열두 살짜리 아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팔레오로고스의 후계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 남은 건 동생밖에 없어요, 신이여 부디 자비를-) 당장 말하지 않으면 황궁의 고문실에서 코를 베어내고 눈을 뽑아버린다는 말에, 가뜩이나 얼이 나가있던 소년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누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리질렀다. 누나 하지마! 그게 아냐!

소년이 안고 있던 것이 눈밭에 툭 떨어졌을 때에야 스틸리안느는 눈앞을 가린 핏빛 안개가 걷혔다. 구겨지듯 눈밭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솔개… 도망치지 못하게 한쪽 다리에 묶었던 실이 피가 방울진 깃털에 엉켜 바람에 흔들렸다.

마당에서 제일 큰 수탉도 이겼던 솔개의 시체를 잠시 보다가 스틸리안느는 고개를 돌려 마당을 살폈다. 얼굴에 눈물이 얼룩진 채 얼어붙어 서있는 소년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당 저편에, 까다롭게 꼭꼭거리며 병아리 주변을 맴도는 자그마한 암탉이 눈에 들어왔다. 암탉의 부리와 깃털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잔은 내용물을 길게 쏟으면서 포물선을 그린 끝에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다. 스틸리안느는 너울 너머로 의사를 마주보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더러운 킨다스 마녀.”

목소리가 낯설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 울부짖는 암늑대, 꼭꼭거리는 암탉. 이성이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아주 멀리서 그녀는 생각한다.

“이 일을 누구에게라도 얘기하면 다시는 아무것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해주겠다.”

의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잠시 마주보다가 돌아서서 바닥에 흩어진 잔 조각과 약물을 쳐다본다.

“기물을 파손하실 생각이라면 나가주십시오.”

한쪽 팔로 배를 감싼 채 스틸리안느는 자리에서 비틀 일어난다. 잔을 치우려던 의사는 마치 부축하려는 듯 다가오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러난다. 스틸리안느는 가져왔던 돈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주머니가 풀어지면서 바닥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흩어진다. 의사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밤거리로 나선다.

자신만 생각하라고? 찬바람 속에 허허로운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래주지, 이 후레자식. 네 이야기 같은 건 듣지 않겠어. 너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오직 나만, 그리고 나의…

밤의 도시에서 어두운 미궁을 헤매며, 스틸리안느는 어릴적 시골의 눈밭 위를 걷고 있다. 발밑에는 걸음걸음마다 붉게 물든 눈이 버석거리며 부스러져내린다.

V. 사랑에 빠지지 말라

대리석 벽을 따라 날아오르는 천사들은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남에게는 저렇게 보일까, 스틸리안느는 생각한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마다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이 초월적인 것을 바라보는 그들은 이해할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저들을 만든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차가운 바닥에 혼자 죽어가면서 그는 천사들과 같은 초월을 보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를 오늘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은 신도, 어떤 초월성이나 신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세속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진창을 딛고 이곳까지 왔다. 천사들은 천상의 신성, 태양의 찬란한 빛만을 우러르겠지만 그녀는…
그녀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을 위하여. 구름과 광휘가 아닌 단단한 바닥을 딛고 그녀는 무수한 시선
사이로, 성당을 장식한 천상의 영광 아래 제단으로 걸어간다.

제3 군단의 장교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를 연회에서 만났을 때에 그녀는 그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아 블라스티아가 5년의 결혼생활 끝에 죽었을 때 두 사람 슬하에는 아이가 없었다. 율리아노폴리스 근무지에서 그가 정부로 두었던 여자도 둘이 관계를 지속한 동안에는 아이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와 헤어진 이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아들을 낳았다.

황궁 연회에서 그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추고 미소지으면서 스틸리안느는 그의 전처와 옛 정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와 소문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콘스탄티노스라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걸고 자신을 도박판에 올려놓았다.

사랑을 필요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콘스탄티노스만큼 남자를 뜨겁게 사랑한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줄 남자, 귀대 날짜가 걸려서 서둘러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다른 아이가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남자라면 더욱 좋았다. 그래서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는 그녀에게는 꿈같은 이상형이었다. 그녀를 등뒤로 버려두고 문을 닫던 그 뒷모습의 기억이 아무리 아파도, 달빛 속의 열정이 때로는 못 견디게 그리워도 그것은 죽어버린 꿈일 뿐, 그녀에게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 더 절실하게 그 꿈을 사랑했다.

그 소박하고 강직한 콘스탄티노스가 그녀를 보는 눈길에 열정의 불길이 어린 순간 설레는 마음은 진짜였다. 사슴을 함정으로 몰아가는 사냥꾼의 가슴이 뛰는 흥분이 진짜이듯이. 만난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그가 참지 못하고 청혼했을 때 흘린 눈물도 진짜였다. 사막을 헤매이다 멀리에서 녹지를 발견한 여행자의 안도감만큼 진실한 감정이 있을까.

제단 앞에 무릎꿇기 직전에 스틸리안느는 다시 한 순간 차가운 대리석 천사들에게 눈길이 간다. 무표정하고 엄숙한 환희에 빠진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구애했던 조각가는 여지가 없이 거절당한 후 미친 듯 작업에 몰두했고, 마지막 천사를 완성한 다음날 아침 작업 도구로 손목을 그은 싸늘한 시체를 인부들이 발견했다. (새하얀 대리석 위에 붉게 흐르는 피.) 니키아스가 예술가의 죽음을 낙상으로 무마한 덕분에 성당은 예정대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으면서 그녀는 조각가의 죽음이 잠시 가슴에 남는다. 끝내 모르는 사람이었던 소녀 때문에 재능과 목숨을 내던진 그 무모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 파괴적인 불길을 통과해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하얀 대리석 위에 선명했을 붉은 피의 가르침을 가슴에 단단히 새긴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망칠 힘을 쥐어주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VI. 길을 정했다면 끝까지 걸어라

콘스탄티노스가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자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퍼진다.

“많이 컸구나, 이녀석!”

아리스가 조막만한 손을 내밀어 콘스탄티노스의 코끝을 만지자 그는 웃으며 아이를 던졌다 받고, 스틸리안느는 아리스가 꺄악 웃으며 공중을 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면서도 미소짓는다. 머리에 햇살이 따뜻하고, 정원의 나무에서는 새가 지저귄다. 한여름의 정원에서 아리스가 웃는 세상에는 어둠도, 두려움도 한 점 없다.

“그동안 잘 지냈소?”

옹알거리는 아리스를 꼭 안은 채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팔로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맞춘다. 그 포근한  체온과 넓은 가슴에 안겨 스틸리안느는 그에게 웃어준다.

“그럼요. 율리아노플은 어땠나요?”

“당신과 아리스가 없었지. 보고 싶었소.”

막 대꾸하려는 순간 뒤에서 작은 헛기침이 들린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마님. 나으리를 빨리 뵈어야겠다고 하셔서…”

연기와 박하꽃 향. 잠시 돌아보지 않고 서서 스틸리안느는 태연하고 무심한 표정을 얼굴에 갑옷처럼 두른다. 콘스탄티노스에게 아리스를 받아들고 그녀는 천천히 돌아선다. 남편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손님에게 다가서고 있다.

“니키아스 공.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오시자마자 이렇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콘스탄티노스 경.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도록 하지요. 건강하셨습니까, 스틸리안느 부인?”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린 것은 오랜 감정의 습관일 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헤집어진 옛 상처의 고통 앞에 그녀는 자신을 다잡고, 낯선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아리스를 꼭 끌어안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말씀 나누시지요. 마실 것을 올려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쪽은 아리스 공자인가요? 아주 잘생긴 아드님이군요. 두 분 많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녀는 엷고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 귓전에 울려온다.

“감사합니다, 공. 당신을 꼭 닮았죠, 여보?”

“당신을 더 닮은 것 같은데.”

콘스탄티노스는 웃으며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춘다.

“먼저 들어가보겠소.”

“예.”

그녀는 인사하고 지나쳐가는 니키아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품안의 아들,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 순진무구한 눈빛과 포근한 아기 냄새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녀와 아이를 쳐다볼 자격조차 없는 남자와 그런 남자 앞에서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소리는 등뒤로 멀어져서 사라져간다.

가끔 그녀는 꿈을 꾼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런 꿈. 권력에 가족을 잃고 피눈물 흘린 사람이 어디 그녀뿐일까.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운은 좋았다. 이걸로 끝내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다른 꿈을 꾸고는 한다.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어머니의 눈물, 그녀에게 반갑게 고개 돌리던 아버지. 절 보내세요.

전쟁이나 다름없이 싸워서 얻은 행복에 잠기다가도 순간순간, 스틸리안느는 자신이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린 공허를 채우는 피의 꿈을 꾼다. 평온한 일상의 틈새에서 끝없이, 언제나.

아리스가 배가 고픈 듯 품안에서 칭얼거린다. 조그마한 등을 토닥여주며 스틸리안느는 집으로 돌아선다.

“미안해, 아리스.”

보드라운 머리칼에 입맞추고 그녀는 아들의 귀에 속삭인다.

“엄마를 용서하렴.”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용서를 비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도. 칭얼대는 아리스를 안고 그녀는 조용히 햇살 가득한 정원에 등을 돌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생명을 끌어안고 죽음의 그림자를 끌며, 가슴에는 재와 폐허 가득한 채 삶의 전장 한가운데로.

솔개를 길들여 닭과 싸움붙이는 얘기는 고등학교 때 들은 것인데 계속 기억에 남았었습니다. 이름없는 인물 중 하나는 (스틸리안느는 아랫것들 이름에 관심이 없뜸) 짐작하시겠지만 본편 캠페인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스틸리안느에게 얻어맞았던 소년은 지금도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등장할지도 모르죠.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보레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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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리스의 다섯 살 생일을 구실로 검을 선물하러 팔레오로고스 저택으로 간 라이산드로스는 아리스의 예리하고 영특한 모습에 죽은 친구 니키아스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그는 검을 선물하고, 아리스가 검을 잡을 나이가 되면 검술을 가르쳐주기로 약속하지요. 아리스와 혈연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라이산드로스와 에이레네는 할 수 있는 한 아리스 곁에서 아이를 훈육하고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감상

나왔습니다 일일드라마 여명과 석양의 도시! 아리스 미크루라케스 출생의 비밀..입죠. 매우 복잡한 정치적, 감정적 상황 속에서 아리스라는 인물은 폭풍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폭풍 중심은 고요하게 마련인..(…) 서로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적인 사람들이 한 아이에 대한 사랑만은 똑같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참 신기하지요. 스틸리안느도 여기서는 정말 이 여자가 악역인가 싶을 정도로 정중했고요. (따지고 보면 면전에서 특별히 악당짓 한 건 없긴 하죠. 등뒤에서 비수 찌르는 게 특기…)

그래서 인간의 갈등은 명백한 선악으로 나누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다 인간 얘기니까요. 누구 말마따나 악당도 어머니는 사랑하고, 영웅도 기분 안 좋은 날은 있게 마련. 스틸리안느가 아무리 독한 여자라도 아들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건 사실이고, 라이산드로스 내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니키아스의 유일한 흔적인 아리스를 억지로라도 데려오고 싶은 유혹이 없을 리 없죠. 그래서 인간은 다 숭고하고 이기적이고 헷갈리도록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이 외전의 중심이자 백미는 라이산드로스와 아리스의 대화였다고 봅니다. 처음 보는데 꽤나 서로 파장이 맞는다는 느낌이었달까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지… 꽤나 좋아했던, 그리고 좋아하는 인물인 니키아스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서 재미도 있고요. 앞으로도 여러 해 라이산드로스는 아리스의 영웅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과연 언제까지나 그럴지는 모르지만요!

저도 석한군도 이 복잡한 가족·정치사의 결과는 비극일 거라고 예상하지만, 그 비극을 내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스틸리안느도, 라이산드로스도, 에이레네도 아리스를 그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래가 정해진 것은 인간이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는(주:씰: 운명의 여행자들 [1999년 가람과 바람] 중) 게 사실이라면, 그 정해진 미래는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진심이겠지요. 어쩌면 바꿀 수 있더라도 바꾸지 않을…

제목인 보레알리스는 아리스가 검에 붙인 이름입니다. ‘북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검의 깨끗한 윤곽과 북풍처럼 차가운 빛도 있겠고, 라이산드로스의 검과 말이 동과 서의 방위 이름이 붙은 것을 따라하는 의미도 있겠고, 거의 집에서 떠나있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가 북풍처럼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일지도 모르죠. 나중에는 어쩌면 사란티움에 불어닥치는 혹독한 원한과 피의 바람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 어느 용자가 그꼴 나기 전에 영아살해좀..(타앙)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필리포스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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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하쉬르는 플로리앙 습격을 사주한 필리포스를 찾으라고 부하 샬림을 보냅니다. 필리포스는 도시를 떠났으리라는 소문이 돌지만 샬림은 필리포스가 아직 도시에 있다고 짐작하고, 필리포스의 위치를 알아내면 하쉬르에게 알려주기로 한 채로 다시 도시로 그를 찾으러 나섭니다. 한편 하쉬르는 샬림의 눈치에서 자신의 황자 신분을 안다는 것을 깨닫고…

감상

수사반장 하쉬르의 활약상…이라기보다는 샬림 형사의 수사력이 돋보인 무난한 수사물이었습니다. 역시 부하 있는 게 최고라는 게 교훈(?) 하지만 물론 샬림에게 지시를 내린 건 하쉬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조연 활용이라는 또 다른 게임성과 전술성을 살렸다는 점이 특이점입니다. 본편 스토리를 진행시킨 점도 마음에 들었고, 샬림이 하쉬르 신분을 아는 떡밥이 나중에 어떻게 살아날지도 흥미진진하군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하비브의 제안

오체스님이 로그를 정리해주셨습니다.

요약
사란티움에 억류된 마르얌 문제를 논의하고자 마르얌의 사촌 하비브는 마르얌의 약혼자인 아미르 황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아미르의 어머니 키네니아의 사람인 시녀장 세헤라자드가 하비브를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종장 카림의 제보로 아미르는 직접 나와 하비브를 맞아주고, 하비브와 아미르는 점잖은 신경전을 벌입니다. 약혼을 유지한 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은 아미르와 성혼을 시키고 싶은 하비브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대립한 끝에 하비브는 아미르가 마르얌을 되찾는 사절로 가서 사란티움에서 혼인을 올리고 마르얌을 세레니아로 옮기는 방안을 제시하지요. 아미르는 생각해보겠다고 합니다.
감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사회판정을 해보았는데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 갈등에 리듬감과 긴장감이 생기는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인물에게 중요한 결정을 판정으로 강요당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끝까지 판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초기에 틀을 좀 잡고서는 나머지는 그대로 흘러가게 두었지요.
판정에 대해 묘한 점이라면, 어차피 하비브가 수치상 유리한 판정이라 질 걸 알면서도 판정에 지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조연을 잡은 제가 그렇다면 오체스님은 더 그러셨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RPG의 게임적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습니다. 어차피 판정에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면, 지는 데서도 게임적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판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승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무도 기분 상하지 않고 다들 재밌으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요즘에 플레이할 때 저는 참여자라기보다는 관망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묘한 기분입니다. 참가자들이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인데 저는 먼발치에서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요. 캠페인은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제 취향에도 맞는 복잡하고 정서적인 이야기인데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제가 낄 자리가 별로 없다는 느낌? 어떻게 하면 저도 캠페인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까 생각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