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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사랑하는…’ 초고

디스크 정리하다 보니 캠페인 설정 소설이었던 ‘신들이 사랑하는…’에서 버린 부분이 있더군요. 원래는 두 형제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전쟁기, 루바트의 죽음, 그리고 그 정치적 파장으로 이어지는 얘기였는데 좀 지지부진해서 첫 부분은 자르고 루바트의 죽음을 가족이 전해듣는 시점부터만 남겼습니다. 그래도 나름 10대의 루바트와 다룬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연 설정 자료처럼 올려둡니다. 스타워즈 세계 사람들의 여가에 대해 상상해본 것도 있고요. 알-하와트는 아랍어로 ‘바람’이라는 뜻의 알-하와에서 따온 것으로, 게임의 내용은 스타 트렉의 벨로시티를 약간 참고했습니다.

1. 연회

저택의 큰 연회장에는 빛이 환했고, 비쓰 밴드가 연주하는 은은한 곡이 복도에까지 흘러나오며 공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두 소년은 연회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가문의 전용 출입구에 대기한 채 회장 안쪽을 기웃거렸다.

“탈브렌 가문 사람들도 왔어? 이번에도 안 왔으면 노르도스 건은 아주 결판을 내겠다는 소린가.”

“아냐, 온 것 같은데. 밀치지 좀 마.”

“나도 좀 보자! 머리만 커가지고, 좀 치워 봐봐.”

“야, 그게 형한테 할 소리냐? 잠깐… 셀레스 베링도 왔다. 지난번 사냥 때 네가 왜 쳐다보다가 다리 사이로 사냥감이 도망가는 줄도 모르고-”

“조용히 안 해? 그땐 그러니까 햇빛 때문에…”

“목소리가 크다.”

등 뒤에서 아버지의 주의가 들려오자 두 형제는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돌아보았다. 알렉산드로스 오르가나는 두 아들을 꼼꼼하게 뜯어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5분 후면 나가야 할 것 같구나. 루바트, 동생 크러뱃좀 다시 매주거라.”

형이 목수건을 풀어서 다시 둘러주는 동안 다룬은 꼼지락거리면서 밖을 내다보려고 애썼다. 셀레스 베링이 오다니… 이번에는 말을 걸어볼 수 있을까?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가만히 좀 있어.”

미끌미끌한 실크를 솜씨 좋게 매듭짓고 남는 부분을 넘기면서 루바트가 조용히 말했다.

“셀레스한테 잘 보여야지.”

“시끄러. 형이야말로 아버지가 시키면 미미 므랄레스하고라도 약혼해야 할걸.”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버릇이 있는 여드름투성이 여자애를 떠올리며 두 형제는 동시에 몸을 과장되게 떨었다. 크러뱃의 매듭을 마무리 지은 루바트는 짐짓 젠체하며 검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뭐, 상관없어. 아무리 므랄레스 영애라도 나하고 결혼하면 2세는 내 미모를 닮지 않겠냐.”

“어우, 정말.”

다룬은 루바트의 팔을 주먹으로 한 대 쳤다.

“내 형이지만 진짜 패버리고 싶다. 형 좋아하는 여자들이 형의 실체를 알았으면-”

“준비해라.”

아버지의 낮은 한마디에 오르가나 형제는 순식간에 낄낄거리는 소년에서 대가문의 엄숙하고 예의바른 도련님으로 변신했다. 다룬은 곁눈으로 형을 흘끔거리며 조금씩 자세를 바로잡았다. 턱을 조금 더 들어야 할까? 어깨를 약간 뒤로 젖히면?

“좀 웃어라.”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형이 한마디 했다.

“그렇게 잔뜩 찌푸려서야 잘 보일 수나 있겠어?”

“참견하지 마.”

루바트가 입가에 살짝 띤 차분한 미소를 보고 다룬은 얼굴을 찡그렸다가 서둘러 폈다. 역시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뻣뻣하고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고,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오스길로스와 테레아, 샴렌의 수호자이며 왕가의 방패인 오르가나 일가의 입장을 알리는 포고관의 선언에 맞추어 그는 연회장의 환한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의 그림자를 따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형이 하는 일은 언제나 그랬다. 만찬상에 모두가 정해진 자리로 안내받는 와중에 루바트가 그의 어깨에 손을 댄 채 아주 약간 방향을 바꾸면서 시종에게 한마디 속삭이고, 다른 손님에게 웃음 한번 지어준다 싶더니 모두가 착석했을 때 다룬은 셀레스 베링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자리 배정이 이렇게 된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에도 바보같이 그는 셀레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서 주변에까지 들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뭐든지 좀 말을 걸어봐야 할 텐데… 무엇보다 집주인의 아들로서 손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건너편 자리에서 형이 호를로 상원의원과 스키기안 앞바다의 어획량에 대해 얘기 나누는 것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다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더 백지가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오르가나 도련님?”

옆쪽에서 부드럽고 예의바른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룬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주춤주춤 돌아보자 셀레스가 푸른 눈을 은은히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안이 타들어갔다.

“죄송하지만 정어구이 접시 좀 집어주시겠어요?”

“아…예예.”

거의 셀레스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는 정어구이를 보았던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와인잔을 쳐서 넘어뜨렸다. 순간 주변이 고요해지자 다룬은 탁자 밑으로 숨어버리면 예의에 어긋날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바보! 모처럼 셀레스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상원의원님. 저번에는 코루선트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루바트가 입을 열자 주변의 주의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고, 그동안 서빙 드로이드가 눈에 띄지 않게 다가와서 쏟아진 와인과 와인잔을 치웠다. 정어구이 접시를 셀레스 앞에 놓아주고 다룬은 땀이 난 손을 연회복 무르팍에 슬쩍 문질러 닦았다. 연회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기만 했고, 금방이라도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다.

“저… 사과드려요. 저 때문에…”

“아, 아녜요. 제가 부주의했던 탓입니다.”

조심스러운 희망으로 다시 가슴이 방망이질쳤다. 바보 같은 어린애라고 치부해버리지 않는 걸까? 계기야 어찌 됐든 셀레스와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 젊은 오르가나 도령을 보니까 생각나는구려.”

호를로 상원의원의 말이 들려왔다.

“내가 제다이 회합에 들르면서 마스터 프루에브를 만나지 않았겠소. 그때 도령 얘기를 하더구먼. 아직도 그때 데려오지 못했던 걸 못내 아쉬워했소이다.”

굴을 입에 가져가며 다룬은 상원의원의 말에 귀기울였다. 형을 데려가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리둥절한 루바트의 물음에 아버지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생각나는구나. 당시에는 나이트 프루에브였지. 너에게 포스 재능이 있으니 제다이 훈련을 받게 데려갈 수 없겠냐고 물었었다.”

“저를…?”

“그랬다마다. 이번에 만났을 때 오르가나 도령 안부를 묻더이다. 그때 데려왔으면 대단한 재목이 됐을 거라고…이제 10년이 넘어가는 일인데 말이지.”

“제가 더 반대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우리 첫아들이자 후계자를 데려가느냐고… 그리고 무엇보다 루바트하고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말이죠.”

어머니가 기품있는 미소를 지으며 형에게 애정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랬었지.”

아버지도 웃음 지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고, 역시 첫아들에게 자부심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루바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뭔가 농담을 하며 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던 중, 다시 셀레스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저… 오르가나 도련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 얼마든지.”

제다이와 형에 대한 것은 순식간에 머리에서 날아가면서 다룬은 셀레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형님이 공중 폴로 좋아하는지 아세요? 이번에 표가 두 장 들어왔는데… 혹시 제가 직접 물어보면 너무 뻔뻔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셀레스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룬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테이블 밑에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지면서 그는 차갑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형님의 사생활을 관리할 책임은 없는지라.”

셀레스의 더듬거리는 사과를 무시한 채 그는 묵묵히 자기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귓가에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 묻혀 주변의 대화가 간간이 들려왔다. 형이 탈브렌 공과 음식을 가져오는 하인, 심지어는 미미 므랄레스하고도 소탈하면서 더없이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루바트 오르가나가 옆에 있는데 다룬 오르가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고, 지금만은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분노인지 수치감인지 얼굴에 불이 붙은 기분이었고, 누구든지 눈여겨보았다가는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챌 테니.

자신에게는 과정 하나하나가 어려운 삶의 흐름을 형은 마치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쉽게 헤쳐갈 수 있는 것은 포스 잠재력이란 것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형이라는 사람이 그렇기 때문일까. 식욕이 사라진 채 음식을 쿡쿡 찌르기만 하며 다룬은 연회가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어땠냐?”

될 수 있으면 피해보려고 했지만, 연회 후 결국 복도에서 형에게 따라잡힌 다룬은 루바트를 노려보았다.

“뭐가?”

“셀레스 베링 말야. 잘 됐어?”

“…형이 공중 폴로 좋아하느냐고 묻던데.”

잠시 혼란스럽던 루바트의 얼굴에 천천히 깨달음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런, 다룬. 정말…”

“미안하다고 하지 마. 무슨 내 애인도 아니었고, 형이 멋대로 옆에 앉힌 것뿐이잖아.”

형이 정말로 자신을 도와주려고 그랬다는 것, 미안하고 곤란해한다는 걸 알아도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사실 셀레스 베링 자체는 이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쩌겠냐, 걔가 좀 눈이 높아서 그런걸. 다음에 적당히 눈 낮은 여자가 나타나면-”

“나타나면. 형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

주먹이 쥐어졌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서 실없는 농담으로라도 위로하려는 형을 한대 패주고라도 싶었지만, 주먹질로도 상대가 안 된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룻저녁에 당할 망신은 이미 다 당하고도 남았으니 참을 수밖에. 정말로 때리고 싶은 게 형인지 자기 자신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일에 더이상 참견하지 마. 형처럼 완벽하지 않다고 나도 생각이 없는 거 아니니까!”

“다룬!”

다룬은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등 뒤로 방문이 스르르 닫히자 도어록을 걸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피곤해서 그냥 눈이 감기려고 했다.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씻어야지, 조금만 쉬다가… 그렇게 연회복 차림으로 잠들면서 엉망인 기분과 뒤죽박죽이 된 머리도 얼마간은 잊을 수 있었다.

2. 게임

다음날 알-하와트 게임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정면의 조명 하나가 켜지면서 누군가의 출입을 알렸다. 게임용 블래스터를 내리고 고글을 올리면서 돌아보자 형이 막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껴도 되냐?”

“맘대로.”

다룬이 고글을 도로 내리고 바닥 위에 떠있는 디스크를 향해 블래스터를 조준하는 동안 형은 선반에서 블래스터를 하나 꺼내더니 균형을 시험해 보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와서 나란히 섰다. 다룬은 형이 설 자리가 있게 조금 비켜주었다.

“고글 써.”

“상관없어.”

다른 생각을 하는 표정으로 루바트는 바로 방아쇠를 당겼고, 작은 금속 디스크가 최고 점수인 2000점 영역을 치고 다시 튕겨 나와 추가점을 내는데도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다룬은 빠르게 움직이는 디스크에 조준했다. 이동 중에 쳐서 리바운드 더블을 낼 수 있다면 점수를 만회할 수도-

“느려.”

형은 다시 조준도 없이 이동 중인 디스크를 쳐서 점수를 내고, 따라갈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튀는 디스크의 방향을 몇 번이나 블래스터를 발사해 바꾸면서 그때마다 점수를 올렸다. 디스크에 반사되는 조명과 블래스터 빔의 현란한 번쩍임 속으로 다룬이 쏘는 블래스터 빔은 번번이 허공만을 갈랐다.

‘조금만 더…!’

소용없다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블래스터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이미 디스크의 위치는 넘어간지 오래였다. 이것이 포스 능력이라는 것일까? 나이뿐만이 아니라 뭘 하든지 항상 한발짝씩 앞서있는 존재, 따라잡으려고 아무리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가도 잡을 수 없는 목표.

디스크가 벽에 한번 크게 튕겨 나왔다가 바닥에 천천히 가라앉았고, 게임 영역의 조명이 꺼지면서 방의 반은 어둠에 잠겼다. 다룬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글을 벗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상대가 되지 않았듯이. 화내고 짜증 내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만 우스워질뿐.

언제 그렇게 땀을 흘렸는지 목과 등이 흥건했다. 시원한 실내 냉방이 목에 선뜻했다. 돌아보자 형은 벽에 기댄 채 게임용 블래스터를 한 손으로 돌리고 있었고, 동생을 마주 보는 얼굴은 묘하게 무표정했다.

“…뭘 증명하고 싶었던 거야?”

다룬의 질문에 루바트는 손에 든 블래스터가 굉장히 흥미롭기라도 한 듯 들여보았다.

“어제 조사했어… 포스 능력이란 것에 대해서.”

다룬은 뻣뻣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했고, 루바트는 말을 이었다.

“약한 예지 능력 같은 거라더군. 강하게 나타나는 때도 있지만. 주로 어떤 일이 벌어지기 조금 전에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반응이 빠른 것처럼 보이지. 때로는 남들보다 더 멀리 앞을 내다보고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다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평소 행동에 대해 설명되는 게 많았다. 어제 자신을 셀레스 베링 옆에 앉힌 일이라든가, 지금도 그렇고 평소에도 보여준 엄청난 운동신경이라든가. 왜 굳이 이런 얘기를 자신에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잘된 일 아냐? 하나라도 더 도움되는 능력이 있다는 건 우리한테 좋은 거니까.”

둘은 잠시 침묵했다. 알데란의 왕위를 차지하려는 오르가나 가문의 야심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르가나가 이대로 패권을 쥐는 것을 쇠퇴해가는 왕가에서 두고 볼지, 아니면 위협을 없애려고 최후의 발악을 할지가 남았을 뿐. 어쩌면 그들의 세대에 벌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대결.

다룬으로서는 자신이 직접 가문의 명운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때로는 뭐든지 잘하는 형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이 시대에 태어난 오르가나 가문의 후계자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일지도 모른다. 오르가나를 알데란의 새로운 왕가로 만들려는 오랜 야심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형을 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분명히 그런 뿌듯함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혹은 확신.

“그래…그렇겠지.”

루바트는 왠지 먼 곳을 보는 표정이었다. 다룬은 드로이드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형을 궁금하게 보았다. 오늘따라 형은 뭔가 묘한 기분인 것 같았다. 어제 제다이 얘기 때문에 그러나?

“다룬…제다이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다룬은 웃음을 터뜨렸다.

“되게 재미없겠지! 맨날 시키는 대로 하고, 여자 하나 못 사귀고 말야.”

다른 아이들처럼 루바트와 다룬도 어렸을 때 막대기 들고 제다이 놀이깨나 했었다. 제다이의 모험담에 가슴 설레기도 하고… 하지만 열넷이면 제다이에 대한 환상은 버릴 때도 되었다. 어쩌면 다른 아이들보다는 이를지도 모르지만 평생 공화국 권력의 중추에 가깝게 지내고 제다이도 수없이 만나본 다룬으로서는 제다이가 어떤 것인지 남들보다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형도 마찬가지겠지.

오르가나 가문 사람들은 다스리려고 태어난 사람들이었고, 제다이는 개인적 능력만 뛰어날 뿐 결국은 공화국의 하인이었다. 부모님의 선택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형만큼 지배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도 미미 므랄레스보다는 낫지 않을까?”

루바트는 짐짓 심각하게 물었고, 두 형제는 함께 웃으며 게임실 문으로 향했다.

형이 먼저 나간 동안 불을 끄려고 돌아서다가 다룬은 문득 점수판에 시선이 갔다.

‘이런 바보 같은…’

형이 얻은 점수가 고스란히 다룬의 점수로 쌓여 있었다. 6만 점이 넘다니, 혹시 기록 같은 게 아닐까. 형이 끼어들면서 따로 블래스터 스캔 등록을 안 했기 때문에 그게 다룬의 점수로 전부 들어온 것이다.

불을 끄고 점수를 초기화하고 나오면서 다룬은 그 바보 같은 실수가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재미로 한 시합이라 굳이 스캔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럼에도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냉방과 흘린 땀 때문인지 잠시 소름이 돋았다.

오스길로스 영지에 며칠 방문 일정이 있던 루바트가 가는 길에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의 일이었다.

[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5/5)

5.

차에서 내려 집안에 들어섰을 때는 노을이 깔려 있었다. 그 붉은 빛이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며 아직도 상중으로 엄숙하게 꾸며진 집안을 비추었다. 장식들이 한 집안 후계자의 죽음에 걸맞는 격식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 다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쪽이 옳았다. 루바트가 죽으면서야 자신은 비로소 진정한 후계자일 수 있었으니까.

하인과 드로이드들이 코루선트에서 돌아온 도련님을 맞으러 한동안 북적거리다가 썰물처럼 빠져버린 끝에, 어머니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저렇게 힘겹게 내려오셨던가? 다룬은 두 계단씩 뛰어올라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카모밀과 바닐라의 향이 그를 포근하게 감싸는 것을 느끼며.

“저 왔어요.”

“왔니? 아버지는 벌써 오셨는데.”

부드러운 손이 아직 쓰린 얼굴을 감싸자 다룬은 흠칫 물러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웃음지었다.

“예, 얘기 좀 하자는 사람들이 있어서 먼저 가시라고 했습니다.”

“하긴, 그럴만도 하더구나.”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홀로비드로 다 봤단다. 어찌나 놀랍던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는 쑥스럽게 뒷목을 긁적였다.

“겸손하구나.”

어머니는 그의 뺨에 입맞춰 주었고, 허리를 숙여 입맞춤을 받으면서 다룬은 다시 얼굴의 고통을 참았다.

“올라가서 씻으렴. 뭐 간단한 요기거리라도 올려보내마.”

“감사합니다. 어머니…”

“응?”

내려가려다가 돌아서는 어머니를 보며 다룬은 이게 지금 꺼내도 되는 얘기일지 좀 머쓱해졌다.

“그때 얘기하셨던 왜… 테레아 별장 있잖아요. 강가에 있는 거요.”

“응, 기억나는구나.”

어머니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다룬은 놓치지 않았다. 역시 많이 바라셨던 일인 걸까. 부모님이 둘다 별장으로 옮기시면 본가는 텅 빈 기분일지도.

“사람을 보내서 좀 치우고 수리하라고 시켰어요. 몇주만 있으면 아버지랑 바로 들어가셔도 될 거예요.”

“어머나…얘야.”

어머니는 난간을 잡으면서 가슴에 한쪽 손을 댔다. 다룬이 놀라서 부축하자 어머니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바라던 바이긴 하지만… 네 아버지도 동의하실까? 아직 은퇴할 준비는 안되셨다고…”

조심스런 희망에 가득한 그 눈빛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룬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동의하실 거예요.”

다정한 말에 담긴 차가운 확신을 눈치채지 못한채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를 대견하게 쓸어주었다.

“이제는 이렇게도 듬직한 아들이 있으니 말이다.”

다룬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는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돌려드릴 때가 되었다… 공화국이나 가문, 알데란에 대한 책임을 떠나 어머니의 남편으로서. 형을 잃은 슬픔 앞에 두분이 평온하게 함께 지내며 서로 위안을 찾으시게 하자. 지금은 납득하지 못한다 해도 아버지는 차차 이해하실 것이다.

“올라가서 쉬렴, 응?”

“예, 어머니.”

인사하고 올라간 다룬은 일단 침대에 몸부터 던졌다. 홀로비드를 켜자 이제는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그 연설이 또 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끝없이 화면에서 본다는 것은 의외로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화면 속의 남자는 묘하게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어둠도, 미움도, 자기불신도 없다는 듯 그저 모든 것이 밝고 자신있는 그 태도. 귀기울이다 보면 다룬 자신마저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맑고 확고한 신념.

‘형님 말고는 그런 사람은 모르는데 말야.’

다룬은 다시 부어오르는 뺨 안쪽을 혀로 짜증스럽게 건드리며 연설의 마무리에 귀를 기울였다.

“ ‘우리는 결코 잊지 않습니다. 제다이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결코… 루바트 오르가나의 죽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

그는 홀로비드를 꺼버렸다. 제다이 공의회에 보내는 지극히 공적인 사적 메시지, 그리고 그들이 알아챌지도 모르는 작은 선전포고. 나이트 리엘은 그 의미를 깨닫고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공의회에 다룬 오르가나만한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게 두자. 크고작은 모욕과 형의 죽음, 그리고 공의회의 배신과 업신여김에도 불구하고 제다이라면 하늘처럼 모실 것이라고 말이다. 굴욕을 참는 세월은 익숙했다. 결국 인내는 더 큰 성과로 돌아올테니.

모트 클라인도 자락스 토레이도, 때가 오면 자신의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용인한 제다이 공의회 역시. 때가 되면…

서버 드로이드가 와인과 과일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다룬 오르가나는 이미 지쳐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쟁반만 내려놓고 나가는 동안 드로이드의 청각 센서는 잠든 공자의 목소리를 감지했다.

“형…”

SRV-36는 마치 질문을 던지듯 계기판의 조명을 깜박거렸지만, 다룬은 조금 뒤척일 뿐 반응하지 않았다. 드로이드 뒤로 문이 닫힌 방안에는 조용하고 고른 숨소리만이 남았다.

신들이 사랑하는 이는 젊어서 죽는다.
– 그리스 격언

[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4/5)

읽는 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꿋꿋이 올라갑니다!

4.

사무실로 들어서자 곧바로 벽의 홀로비드와 비서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르가나 의원 대리로 기조연설을 한 다룬 오르가나의 연설은 전쟁 후 공의회의 위상을..”

“…오늘 의회 앞에 처음으로 선 오르가나 의원의 젊은 후계자는 일대 폭풍…”

“ ‘우리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의 양심으로서-’ ”

“아버지는?”

정신없는 홀로비드 보도의 홍수에 고개를 저으며 다룬은 비서에게 물었다.

“안쪽에 계십니다. 공자님…”

“걱정 말아요. 다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 뿐이니,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어깨를 토닥여준 후 다룬은 빠른 걸음으로 내실로 갔다. 문이 열리기 전에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내실로 들어서자마자 한손에 크리스털 잔을 들고 서서 홀로비드 보도를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허나 저는 형님의 죽음이 아니라 살아간 방식으로 루바트 오르가나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 모습을…’ ”

“아버지.”

아버지는 천천히 화면 속의 아들에게서 현실 속의 아들에게 몸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냉정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평소보다도 더 차가웠다. 다룬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몸이 아팠던 모양이구나. 나도 몰랐는데 말이다.”

다룬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하다고 하는 건 뻔뻔함에 뻔뻔함을 더하는 짓이겠지. 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하지만 아버지의 침묵은 뭔가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는 결국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 뭐… 때로는 모르는 병이 가장 중한 법이지요.”

잔의 내용물이 얼굴에 끼쳐오자 눈이 따끔거려서 감아야 했다. 입으로 흘러들어오는 맛으로는 아마 20년 묵은 아르베니아산 거품와인이라고 생각하며 다룬은 대충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버지는 잔을 내던지며 돌아섰지만 크리스털은 푹신한 카펫 때문에 깨지지 않았고, 벽에서 뻗어나온 청소 드로이드의 팔이 곧 잔을 주워서 치우고 카펫에 진 작은 얼룩을 청소했다.

“어떻게…”

분노로 떨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수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버지를 기조연설에서 따돌리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 어떻게 아버지가 제시하려던 법안을 미리 알 수 있었는지.

어떻게 아버지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는지. 어떻게 루바트의 자리를 뻔뻔스럽게 차지한 채 아비를 능멸할 수 있는지.

질문만큼이나 대답도 많았고, 할 수 없는 대답도 많았기에 다룬은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아버지의 일정을 교란해서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 수행원의 대부분은 이미 제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계획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법안이 완성되자마자 전문이 이미 제게 들어올 정도면 짐작하시겠죠.”

수행원의 대부분이라기보다는 주요 인원 몇몇일 뿐이었고 그걸로 충분했지만, 아버지가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 끝없는 의심에 빠져 자충수를 두면 다룬으로서는 한결 일이 쉬워질 것이었다. 돌아선 아버지의 몸이 분노로 떨리는 모습을 다룬은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속인 것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필요?”

아버지는 천천히 다룬을 마주보면서 손짓으로 홀로비드 보도를 가리켰다.

“네 형이 죽고 공의회가 어떻게 했는지 보지 않았느냐! 모트 클라인 그 자가… 공의회의 늙은이들이! 그들을 온 우주 앞에서 오르가나의 이름으로 두둔하고… 놈들과 한패가 되어서 날 능멸해? 네가…!”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를 다룬은 차라리 슬프게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가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분노할 때면 온 우주가 자신을 버린 것처럼 떨려오던 시절이. 지금은 아버지가 든 손의 궤적은 너무 느리고 둔해 보여서, 손목을 붙잡아 막는 것은 우스울 정도로 쉽겠지.

아버지가 손을 휘두르는 것을 뻔히 눈으로 따라가면서 다룬은 움직이지 않았다. 뺨에 불이 붙는 기분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꺾였을 때는 오히려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약해졌나 싶었다.

그는 맞은 쪽 뺨을 손가락 관절로 살짝 건드려 확인했다. 이를 미리 물어서 입안에 상처는 없었고, 반지에 긁혔는지 뺨에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의료 드로이드에게 처치받으면 어머니가 눈치 못챌 정도는 될 것이다. 부기가 심하다면 나가면서 카메라는 피해야겠지.

“죽은 형의 이름을 팔아 형을 배신한 기분이 어떠냐?”

다룬은 아버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언제 아버지를 내려다보게 된 것일까. 아버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작고, 이렇게 시야가 좁았던가. 변한 것이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다.

“형님이 살아있었다면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닥쳐! 루바트라면 그런 식으로 날 속이지 않는다. 루바트는-”

“예, 형님이라면 아버지를 속일 필요가 없었겠죠. 형님이라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상의했을 테고, 형님이 설득하면 포기하셨을 테니까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그도 루바트처럼 완벽하고 싶었고, 루바트처럼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루바트처럼 빛나고 싶었다. 루바트처럼 정직하고 명예롭게, 루바트처럼…

하지만 루바트 오르가나는 죽었다. 오르가나 가문을 위해 살아가기보다는 공화국을 위해 죽는 쪽을 택했고, 가문의 희망에게 버림받은 부모와 가문을 끌어안는 것은 고스란히 다룬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가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루바트가 아닌 다룬 오르가나. 어쩌면 공화국에도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아버지가 저를 후계자로서 대우하셨더라면… 이런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다못해 귀띔이라도 해주셨다면, 그리고 제가 합당한 의견을 얘기할 때 귀를 기울이셨더라면 제가 왜 아버지 주변에 첩자를 두고 아버지를 속였을까요? 속임수밖에 남은 것이 없었으니 속임수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가 오르가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다시 손이 올라갔지만, 다룬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형이 떠난 후 10년을 넘게 참아온 지금, 누가 누구를 참아주고 있었는지 이제는 아버지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손목을 그대로 잡아 팽개치듯 뒤로 밀어냈다. 균형을 잡으려고 비틀거리는 아버지에게 그는 언성을 높였다.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더 때리려면 얘기라도 마저 듣고 때리시죠.”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래진 채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예, 제다이에 대한 통제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모욕을 아버지만 느끼는 줄 아십니까? 형님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그 자리를 시스에게 내준 공의회의 처사를 제가 잊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욱신거리는 뺨의 통증을 잠재우려고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병을 들어 잔에 반쯤 따랐다. 좀전에 얼굴에 뒤집어썼던 것과 같은 와인이 목구멍으로 따뜻하고 달콤하게 넘어갔다.

“공화국의 영웅들에게 고삐를 씌우는 게 누가 되든, 적어도 그 과정에서 오르가나 가문이 악역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르가나의 이름을 구델이나 트리노와 엮겠다니, 무슨 생각이셨던 겁니까? 한 번의 전투를 위해 전쟁을 내주겠다고요? 제가 미리 알아채고 상황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넌… 넌 이해 못한다. 루바트는 공의회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쳤는데, 공의회 놈들은…”

아버지의 더듬거리는 핑계에 다룬은 잔을 탁 내려놓았고, 아버지가 순간 흠칫하는 모습이 섬뜩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루바트는 제 형이었습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공의회가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결코 잊지 않아요. 제 연설을 못 보셨습니까?”

아버지의 얼굴에 뒤늦게 떠오르는 이해를 지켜보며 다룬은 와인을 좀더 부었다.

“때가 되면 그들을 제 방식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오르가나의 손을 더럽혀서는 알데란의 왕좌는 멀어질 뿐입니다.”

아버지는 안쓰러울 정도로 화들짝 놀랐고, 다룬은 웃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알데란에 두 번째 의석을 얻어낸 것, 이번 기조연설이 왕가측 의원이 아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국고가 거의 바닥나고 영향력을 잃은 채 쇠퇴해가는 왕조에 아들마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그는 아버지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비록 아버지는 제가 후계자 노릇을 제대로 못하도록 온갖 애를 쓰셨지만, 그래서 오히려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의외로 많습니다. 감사할 일이죠.”

웃으며 잔을 들어보이는 그를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마주보았다.

“모르시겠습니까?”

그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천천히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주춤주춤 물러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기색이었고, 그 모습에 악의어린 기쁨을 억눌러야 했다.

“아버지.”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 아직은 이렇게 올려다보는 것이 편했다. 아직 한동안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오르가나가 알데란의 왕좌에 오르는 것도, 제다이 공의회의 전횡을 제어하는 것도. 아버지가, 그리고 그 위의 조상들이 준비하고 계획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게 날개를 펼칠 공간만 주신다면…”

“너 따위를 위해 준비된 것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여전히 오르가나 가주이다. 너를 반드시 후계자로 유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을 잊었느냐?”

다룬은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버지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상황파악이 느린 것일까. 루바트에 대한 집착에 눈이 먼 나머지 재앙을 부르려는 실책을 어떻게든 무마해 놓았더니만 이번에는 이런 소리나… 역시 가문을 위한다면 아버지를 가능한한 빨리 은퇴시켜야 했다.

“물론 후계자를 바꾸는 것은 아버지의 권리입니다. 오르가나 가주로서 말이죠.”

마치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 천천히, 부드럽게 얘기하며 다룬은 일어섰다.

“하지만 오늘 일로 상황이 달라진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젊어서 죽은 영웅의 동생, 온 의회의 마음을 움직인 연사, 공화국의 미래를 믿는 젊은 기대주를 갑자기 내치는 것은 설명이 꽤 필요할 겁니다. 물론 그런 무리수를 두고 싶으시다면 그건 아버지 자유입니다.”

문간으로 걸어간 그는 도어스위치를 작동시키기 전에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바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모습이 왠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은 아버지 몫이죠. 아버지마저 속일 수 있는 수완의 후계자에게 책임을 넘기고 오르가나를 일으키게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 말 잘 듣는 미숙한 친척을 다시 허울뿐인 후계자로 두고 끝까지 권력을 붙들다가 이번 세대의 기회를 그냥 보내시겠습니까.”

그는 빙긋 웃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머리만은 맑았고, 승리감은 전류처럼 온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적어도 저를 내치신다면 오르가나 다음으로 유력한 가문에 몸을 의탁해서 그들을 왕가로 만들 것만은 약속드리죠. 오르가나의 유일하게 남은 직계손이 다른 가문에서 신하 노릇하는 꼴과 더불어서, 수 세대에 걸친 준비가 모두 물거품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되실 겁니다.”

아버지는 표정도, 자세도 변하지 않았지만 다룬 오르가나는 그가 안쪽에서부터 구겨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차지한 자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면서 왠지 오그라든다는 인상.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 아닌가.

“어머니가 한동안 테레아 남부에 있는 그 별장 얘기 하시더군요. 경치도 좋고 일 년 내내 따뜻한 곳입니다. 생각해 보시죠.”

아버지는 묵묵히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눈으로… 다룬은 목례를 하고 도어스위치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아버지를 등뒤에 둔 채 자신의 미래를 향해 걸어나갔다.

[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3/5)

3.

“준비되셨습니까?”

분장 스폰지의 촉촉한 감촉이 감은 눈꺼풀을 스치고 뺨과 코, 턱도 매만지더니 곧 사라졌고, 분장 드로이드가 물러나는 동안 다룬은 자신의 얼굴을 향한 수많은 공중부양 거울들을 건성으로 한번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중파를 타기 전의 준비는 어려서부터 익숙한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떨리는 일이었다. 지금은 훨씬 더했다.

“시작합니다. 대기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한두가닥의 머리를 빗어내리는 손들도 그가 연단 플랫폼을 밟자 곧 물러났다.

“3… 2… 1.”

위로 올라가는 플랫폼의 움직임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떨어질 위험은 없다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면서 다룬은 단호히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저 위의 조명이 점점 크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사위는 던져졌도다.”

중얼거리는 동시에 조명이 그를 가득 감쌌고,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한번 훑었다. 수백 수천의 얼굴들, 온갖 종족과 온갖 문화에서 온 행성 대표자들이 까마득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화국 의회의 압도적인 규모는 홀로비드로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더군다나 수백억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장소에서 전 은하계의 대의원들에게 연설을 하려는 순간은 그 어떤 경험이나 상상하고도 달랐다.

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새삼 겁이 났지만, 결정을 내린 이후로 어차피 계속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감흥은 없었다. 연습한 그대로 말이 자신있게 나오기만을 빌며 그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공화국 상원의원 여러분, 그리고 공화국의 시민 여러분. 저는 알데란 제 2 의원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 대리 다룬 오르가나입니다. 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제가 대신 이 자리에 나온 점, 양해를 구합니다.”

그는 연단에 준비된 물을 한모금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두려움은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명확하고 날카로운 목적의식이 남았을 뿐. 그리고 가급적이면 짧게 끝내야 했다. 아버지가 의회 건물에 들이닥칠 경우 어떻게든 지체시킬 조치는 취해 놓았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으니까.

“지난 몇개월은 우리 가족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제 형인 파다완 루바트 오르가나가 시스에게 목숨을 잃은 비극을 들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회장 안의 분위기를 저울질해 보았다. 숙연하고 동정적… 완벽했다. 좀더 자신감을 얻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실을 겪은 것은 저희 가족 뿐만이 아닙니다. 공화국의 수많은 가족들이 혈육을, 배우자를, 친구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으며, 그러한 분들에게… 그 아픔을 이해하는 한 평범한 시민으로서 위로를, 애도를, 그리고 무엇보다 우정을 전하고 싶습니다.”

뜻밖에도 박수소리가 터져나오면서 회장 안을 감쌌다. 순간 다룬은 당황했다. 아직 끝이 아닌데, 어떻게 벌써 끝났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혹시 그만하고 내려가라는 뜻인가?

박수소리가 짧게 잦아들고 다시 침묵이 흘렀을 때에야 다룬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회중의 분위기를, 그의 말과 그들의 기대감이 혼합되어 전류처럼 공중에 흐르는 흥분을 맛볼 수 있었다. 어떤 고급 술보다, 어떤 여자의 품보다 더 아찔한 그 쾌감을.

“전쟁의 상처가 아직 깊이 남아있는 공화국이 당면한 사안은 많고도 다양합니다…”

당면한 과제들을 짧게 얘기하고 그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시간이 있다면 좀더 짚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는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었고, 무엇보다 죽은 형의 후광을 입은 초보 연사가 긴 시간 동안 이 많은 인원의 관심을 붙잡아둔다는 보장이 없었다.

“…전쟁의 길고 어두운 나날 중에도 우리를 지켜왔으며, 앞으로도 걸어야 할 험난한 길 위에서도 우리를 이끌어줄 것은 많습니다. 공화국에 대한 우리의 신념,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 민주주의의 전통… 그리고 스스로의 목숨과 바꿔 공화국을 지켜왔으며 앞으로도 지켜갈 공화국의 군인들, 그리고 제다이 공의회입니다.”

박수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다룬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재빨리 그는 연단의 화면을 조작해서 트리노, 구델, 스쿠식 등의 얼굴을 띄웠다. 아버지가 오늘 오지 못한 것부터 이미 당황하고 있을텐데 그 아들이 기대를 와장창 깨기 시작하면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제가 특별히 제다이 공의회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편파적이라고 하실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최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면… 제다이로서 젊은 나이에 목숨을 바친 제 형을 생각하면 공의회에 대한 제 감상은 남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마치 말을 이을 수 없다는듯 잠시 침묵했다. 박수소리 대신 숙연한 침묵이 따르는데 만족하며. 지금 그는 이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제 이 기세가 흩어지기 전에 단숨에 끝까지 밀어붙여야 했다.

“허나 저는 형님의 죽음이 아니라 살아간 방식으로 루바트 오르가나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 모습을, 대의 앞에서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헌신을. 그것은 제 형님 뿐만 아니라 모든 제다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박수가 터져나오는 동안 그는 곁눈으로 화면을 살폈다. 구델과 스쿠식은 혼란스럽게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고, 트리노는 굳은 표정으로 컴링크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숙연한 표정을 애써 유지하며 그는 잦아드는 박수소리의 뒤끝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헌신은 제다이 공의회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공화국이 공의회에 영구 임대로 부여한 행성들에서 나오는 수입의 60% 이상을 재건사업에 사용하면서 공의회 산하 모든 기관에서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있는 청렴함은 공화국의 왠만한 정부기관도 부러워할만 합니다.”

웃음소리와 박수소리. 아버지와 그 공모자들이 제출하려고 계획한 법안의 핵심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구델은 이제 땀을 닦고 있었다.

“우리는 큰 전쟁을 치렀고 아직도 그 뒤끝은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허나 공화국을 위협하는 것은 외부의 적 뿐만이 아닙니다. 내부의 불의가, 우리 안의 부패가 결국에는 더 큰 화를 불렀고, 앞으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앞길을 막는 먹구름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양심의 목소리와 양심의 힘이 언제나 함께합니다. 바로 공화국의 수호자, 제다이 공의회가!”

갈채가 터져나올 틈조차 주지 않고 다룬은 바로 밀어붙였다.

“공화국의 손이 미치지 않는 점을 이용해 선량한 시민들을 물건처럼 사고 파는 자들이 있다면, 제다이의 손길이 그곳에 있습니다. 이윤을 위해 힘없는 부족들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제다이의 힘은 그곳에도 있습니다. 정복전쟁의 야욕으로 공화국을 다시한번 전화(戰火)의 구덩이로 몰아넣으려는 이가 있다면 제다이가 그들을 막을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무력과 자금을 갖춘 자들의 범죄라도, 그래서 공화국이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제다이는 정치적 밀물과 썰물에 따라 흔들리는 정치적 기관이 아닌 공화국의 확고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박수는 전에 없이 우렁찼지만, 서로 불안하게 마주보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화면에서 트리노는 아예 일어나 나가고 있었고, 구델과 스쿠식은 뭔가 말다툼을 하는 것 같았다. 다룬은 속으로 웃음지었다. 오르가나라는 적법한 구심점 없이 이 정치적 야합이 유지될리는 만무했고, 저들은 늘 그랬듯 스스로의 이해충돌에 허우적거리다 와해될 것이다.

다룬은 좀 기다려서 분위기가 차분해지도록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법안통과를 위한 연맹을 흩어 놓는다는 목적은 달성했고, 마무리만이 남았다.

“존경하는 공화국의 시민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깊이 존경하는 손윗형제가 있을지 모릅니다. 함께 있으면 그저 즐거운 친구이며 자신을 끝없이 재는 잣대가 되는 경쟁자, 때로는 어떤 원수보다도 심하게, 치사하게 싸우는 적수,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스승. 제게는 형님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며 다룬은 물을 한모금 마셨다. 이렇게까지 솔직해질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분위기에 휩쓸린 모양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조금 길어지고 있었다.

“그런 형이 믿는 것, 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모습은 어린 제게 곧 신앙과 같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루하루 다시 그 진실을 확인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그리고 성인의 이성으로 저는 여러분 앞에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시련을 딛고 공화국은 끝없이 미래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공화국이 있는 한 제다이는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지키리라는 것을. 우리의 하인도, 주인도 아닌 우리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의 양심으로서.”

서서 말만 하는 것이 이렇게 지치는 일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땀에 젖은채 그는 기분좋은 탈진감에 휩싸였다. 카메라상에 번들거리는 것을 막을만큼 분장이 잘 되었기를 바랄 수밖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하고 있는 회중의 숨죽인 기대감에 대고 그는 조용히 마지막 말을 띄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꼭 전하고 싶었던 진짜 용건일지도 몰랐다.

“오르가나 가문은 언제나 제다이 공의회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잊지 않습니다. 제다이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동생으로서 저는 결코… 루바트 오르가나의 죽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수소리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대의원들이 아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하는 모습을 벅차게 지켜보며 다룬은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 열화와 같은 반응 속에서 그는 아버지의 법안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플랫폼이 내려갈 때가 됐다는 신호가 오자 그는 마지막으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깊이 인사한 뒤 플랫폼 하강 내내 똑바로 섰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탈진해 쓰러질까 두려웠다. 제일 힘든 싸움은 여기서부터였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스탭이 얼굴을 닦아주고 겉옷을 둘러주는 동안 조수 하나가 다가와 컴링크를 내밀었다. 소란 위로 목소리를 높이며.

“공자님, 사무실에서 연락입니다.”

올 것이 왔는가. 정확히는 올 사람이. 컴링크의 이어피스를 조수가 대주었다.

“오르가나요.”

“공자님, 아버님께서 오셨습니다.”

비서의 불안한 목소리는 귀를 바로 때려왔다.

“지금 잘 말씀은 드리고 있습니다만…”

“알았소. 조금만 더 붙잡고 있어줘요, 바로 갈테니.”

그는 컴링크를 떼고 스탭을 큰소리로 치하하면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에게 한턱 내겠다는 약속을 끝으로 문이 등뒤로 닫혔고, 그는 잠시 벽에 기댄채 숨을 골랐다. 지친 몸과 마음에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부탁하며 다룬 오르가나는 걸음을 옮겼다.

[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2/5)

2.

데이터패드의 끝까지 넘겨본 다룬은 책상에 패드를 가볍게 팽개치며 뒤로 등을 기댔다.

‘이것이 그 법안이라는 건가.’

창가로 걸어가서 그는 저택 주변지를 내려다 보았다. 잘 조경된 정원과 살짝 얼어붙은 연못, 지평선까지 넓게 펼쳐진 숲 위로는 차가운 잿빛 하늘. 그는 시원한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아예 예상할 수 없던 일은 아니었다. 3개월 전, 형의 죽음 이후로 아버지는 점점 제다이에 대한 불평이 늘었고, 언제나처럼 다룬에게는 아무 설명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제다이 템플에 보내는 요구사항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눈치 정도는 챌 수 있었다. 매우 정중하고 예의바른 무시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무시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럴수록 공화국의 수호자인 제다이가 공화국의 제어가 불가능한 자체 세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아버지의 불평은 높아만 갔다.

눈을 뜨고 다룬은 입김이 서린 유리를 쳐다보았다. 육아실의 유리창에 형과 둘이서 입김을 불어가며 낙서하던 생각이 나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허리를 펴면서 그는 창에 손끝으로 무심코 몇 글자를 쓰다가 머쓱하게 돌아섰다.

책상으로 돌아온 그는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데이터패드를 손바닥에 탁탁 쳤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자금이 있는 곳에 힘이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이기도 했다. 800년 전의 오스테렉 서약을 통해 제다이 공의회에 영구 임대로 주어진, 공화국 의회조차 관여할 수 없는 행성들과 그 전 수입… 그 제어권을 다시 의회가 되찾는다면 제다이 공의회는 싫어도 다시금 의회의 뜻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제다이 공의회의 버팀목을 자른다.’

통과된다면 제다이는 다시 한번 의회 다수파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적 도구가 되겠지. 의회내의 권력 장악에 성공하면 제다이를 손에 넣는다… 일단 제다이라는 칩이 들어가면 의회의 모든 권력다툼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위의 판돈이 걸리게 될 것이다. 위험한만큼 매혹적인 생각! 의회의 내분에 의해 제다이가 제다이에게 칼을 든 코르디스의 난이 재현될 날도 올까?

다룬은 탄식하듯 웃음을 터뜨리며 데이터패드를 이마에 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버지… 당신이란 분은.’

아마도 가장 무섭고 흥분되는 것은 통과될 수도 있다는 사실. 하지만 그 대가는? 다룬은 아버지의 비서관에게서 데이터패드를 받으면서 알아낸 이름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 그들과 연합한다면 확실히 필요한 표를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피로를 느끼며 다룬은 책상에 팔꿈치를 짚고 얼굴을 문질렀다. 트리노 의원. 자기 지배하에 있는 행성의 자원개발을 위해 원주민을 강제이주시키려다 제다이의 저지를 받은 인물. 공화국 영역 밖의 노예무역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어떻게든 무마시켰지만 여전히 제다이 공의회의 주목 대상인 구델. 의원이라기보다는 군벌에 가까운 스쿠식 의원도 이웃 행성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고 있는 제다이가 눈엣가시일 것이다.

하나같이 강력하고, 하나같이 부패했고, 하나같이 제다이의 독립성이 마음에 들지 않을 자들. 하지만 오르가나와 같은 정통성을 갖춘 이름이 구심점이 되지 않고는 자기들끼리 다투다가 끝날 뿐이지, 절대 제대로 된 정치세력으로 뭉쳐서 이런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리 없었다.

‘강한 적을 참 많이도 만들었군, 그대들도. 이제는 우리 아버지까지…’

다시 한번 데이터패드를 훑어본 다룬은 망설임없이 자료를 삭제했다. 아들이 아버지 주변에 첩자를 두는 일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적어도 형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형은 소년일 때도 이미 아버지가 믿고 상담하는 후계자였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없는 자신은 아버지의 의중과 계획을 알려면 좀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형이라면 어쩌겠어?”

그는 빈 방에 대고 나지막히 물었다. 뭐, 뻔했다. 형이라면… 형이 살아있었다면 당장 아버지에게 이 말도 안되는 짓을 그만두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형이 죽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가슴이 쓰려왔다.

여전히 제다이 공의회에 대한 배신감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었다. 형을 빼앗아가고, 결국 형을 죽게 하고, 형을 죽게 한 자를 군소리 없이 용서하려는 조직.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형을 살리지 못하고, 형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시스를 새 제자로 들인 제다이 마스터. 과거는 마치 없었던 일인양 의기양양하게 제다이 로브를 입고 형의 자리를 차지한 시스놈.

빈 데이터패드를 사무용품 소각구에 던져넣고 다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다이 공의회가 오르가나 가문의 우정과 호의를 얻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요구대로 집나간 형을 돌려보냈더라면, 전쟁중에 루바트를 최전선에 배치하지 말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더라면, 전후에 위험한 변방 임무 대신 코루선트에 배치하라는 부탁을 들었더라면, 마스터 모트의 노망난 고집을 단호히 꺾기라도 했다면…

‘번번이 우리에게 침을 뱉은 것은 그들이다! 오르가나 가문이 언제까지 업신여김을 참을 것 같은가.’

슬픔이란 묘한 것이었다. 구멍이 난채로도 그저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는 삶의 틈새에서 때로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덮쳐오는… 혼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다룬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입을 막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어떤 결과든 이제는 공의회의 책임인 거야!’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분노는 넘치도록 충분했지만 왠지 공허하기만 했다.

형이 더이상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 그의 우상, 그의 경쟁자, 그의 적, 그의 목표가 이 세상에 없었다.

이제 그는 누구와 웃고, 누구와 추억을 나누어야 하는가.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형제가 없는 세상에서…

그 근본적인 어긋남에 고민하며 그는 흐릿해진 눈을 뜨고 창밖으로 하나둘 내리는 눈송이를 지켜보았다. 텅빈 공간을 가로질러 끝없이 떨어져가는 영원의 작은 조각들을.

[포도원의 제다이] 신들이 사랑하는… (1/5)

신들이 사랑하는…

1.

“거짓말이야.”

목쉰 한마디는 침묵 속에 공허하게 울렸다. 자신이 한 말이라는 것을 다룬 오르가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일이 사실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리가…

“두분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젊은 제다이 나이트의 얼굴은 부드러우면서도 차분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에 동정은 보낼 수 있되 공감할 수는 없는 사람의 표정. 이 사람에게, 이 제다이에게 다룬의 슬픔은 견딜 수 없이 가슴을 할퀴는 현실이 아니라 위로하고 쓰다듬어줄 남의 상처에 불과했다. 다룬은 그런 제다이에게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미움을 느꼈다.

“다쓰 세데스라고 했소? 그 자는 어디있소?”

창가의 의자에 앉은채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는 무겁게 질문을 던졌다. 남이 보기에는 무표정할 뿐이었지만 다룬은 아버지의 흔들리는 눈빛을, 깊이 가라앉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절망보다 깊은 그 상실을.

“다쓰 세데스는 도망쳤고 아직 행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르가나 각하.”

“그 자의 제자를 붙잡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가 스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않겠소?”

다룬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채 제다이를 쳐다보았다. 다쓰 세데스의… 형을 죽인 자의 행방에 대해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다면! 젊은 나이트는 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자락스 토레이는… 전 스승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 스승?”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가 아주 작게 한쪽 눈썹을 들어보이자 순식간에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젊은 나이트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고, 그 광경에 다룬은 잔인한 즐거움을 느꼈다.

“저도 한가지 묻지요. 마스터 모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번갈아 보며 제다이 나이트는 이제 눈에 띄게 불편해하고 있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아버지도 다룬도 지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제다이는 뭔가를 말하기 꺼려하고 있었고, 그것이 형의 죽음에 관련된 것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째서 제 형님의 스승이 아닌 나이트 리엘께서 이 비보를 전해주시는지 궁금하군요. 설마 마스터 모트께서도 부상을 당하셨습니까?”

다룬은 형이 제다이가 된 이래 코루선트에 갈 일이 있으면 형과 함께 만나곤 했던 모트 클라인을 떠올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평온하고 소탈하던 웃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굳은살투성이의 따뜻한 손. 부모님마저도 저런 스승 곁이라면 루바트도 안심이라고 했었는데 결국에는… 치미는 슬픔을 참으며 그는 표정변화 없이 나이트 리엘을 마주보았다.

“아닙니다… 마스터 모트 클라인은 코루선트에 있습니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오.”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이번에는 아버지가 심문을 이어갔다.

“다쓰 세데스가 설마 코루선트로 도망쳤을 것 같지는 않고, 무엇 때문에 마스터 모트가 제자의 가족에게 루바트의 죽음을 알릴 시간도 없이 코루선트에 있다는 말이오?”

다룬은 천천히 아버지의 의자 뒤로 가서 서며 이제 확연히 쩔쩔매고 있는 나이트에게 말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자락스 토레이라는 자를 심문하기 위해서?”

나이트 리엘은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시스가 공의회의 포로이긴 한 것이오?”

제다이 나이트는 마치 구원을 청하는 시선으로 방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그러합니다.”

“허나?”

나이트 리엘은 애써 자신을 추스르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오르가나 부자를 마주보았다.

“마스터 모트는… 자락스 토레이를 제자로 받기 위해 제다이 공의회를 설득중입니다.”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다룬은 입안에 피맛이 고일 때까지 입술 안쪽을 작게 깨물었다. 평온하고 소탈한 미소, 굳은살투성이의 따스한 손. 마스터 모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의심많은 대귀족 가문 사람마저도 신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안심이 됐었다. 형이 저런 분의 제자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어린 마음에 부럽기까지 했었다…

‘형…’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제다이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그 기세에 눌려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제다이를 무표정하게 보며 다룬은 의자 등받이를 꽉 쥐었다.

“내 아들의 죽음의 원인이 된 시스를… 제다이로 만들겠다고? 루바트의 스승이?”

“오르가나 각하, 진정하십시오. 파다완 루바트의 죽음은…”

“이 작자가 정말 스승의 행방을 모르는지는 어떻게 아시오? 정말로 제다이가 되려는 것인지, 첩자인지 확인할 수 있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각하. 거짓이 있다면 저희 제다이 공의회에서 밝혀낼 것입니다.”

어린애 달래듯 평안하고 차분한 그 태도에 다룬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걸로 끝입니까? 전쟁 내내 시스였다가 잘못했다, 제다이가 되고 싶다는 걸로?”

아버지의 묵묵한 시선과 제다이의 정나미 떨어지도록 평온한 시선을 둘다 느끼며 그는 제다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최소한 재판은 있는 겁니까? 전쟁중의 범죄에 대한 처벌은?”

“오르가나 공자님, 포스를 바로잡는 길은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는 그 자체가 처벌이 되고도 남습니다. 부디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파다완 루바트를 죽인 것은-”

“그래서!”

다룬은 거의 절규하듯 제다이의 말을 끊었다. 깊은 터널을 지나듯 귀가 울리면서 머릿속의 열기가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다. 피를 보면 이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이 작자의, 마스터 모트의, 형이 죽었는데 살아있는 자락스 토레이라는 시스의…

“내가 제다이 선생의 미간에 대고 블래스터 방아쇠를 당기면 ‘미안하다’ 한마디로 끝나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무슨…!”

“다룬!”

아버지의 일갈에 다룬은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순식간에 식으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의 피로만 남았다.

“나가 보거라.”

아버지의 눈빛은 매서웠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격앙된 상태라 해도 제다이를 협박하다니, 실수라는 것 정도는… 늘 불완전하고 늘 실수투성이인 자신이 차지한 이 자리에 설 자격을 진정 갖춘 그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 생각에 가슴이 텅 비는 것만 같았다.

“예, 아버지.”

그는 허리숙여 인사했다. 더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이 목소리는 다시한번 낮고 냉정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나이트 리엘. 우리 일반인들은 제다이처럼 감정을 버리지 못하니 이해하시길.”

말에 숨은 뼈를 알아챘는지 못챘는지 나이트 리엘은 그에게 깊이 예를 취했다.

“아닙니다, 공자님. 공자님과 가족이 겪은 상실에 조의를 표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다룬은 아버지 집무실에서 나와 아무 목표도 없이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로든 움직일 수만 있다면.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풀밭에 앉은채 웃고 떠들던 형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그라브볼 경기 얘기, 가정교사들이 숙제를 너무 많이 준다는 얘기, 여자애들 얘기, 온갖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보냈던 여름 오후의 기억.

‘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형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어릴 때의 그 악동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 장난이었다며, 형의 타고난 권리를 다시 찾아가기를. 십여년이 지나도 도저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낄 수 없는 이 특권과 의무의 덫에서 자신을 건져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루바트 형은 특별했으니까. 형만큼 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저택의 현관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다룬이 멈칫하는 동안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찬바람과 함께 오후 햇살이 가득 들어왔고, 그는 순간적으로 그 문으로 걸어들어오는 형을 떠올렸다. 쾌활하게 웃으며 정복자처럼 당당하게. 전쟁과 죽음의 참혹한 현실 따위는 닿지도 못한다는듯 그렇게. 그게 바로 형이라는 사람이었다. 다룬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열리는 문으로 들어서는 여인을 지켜보며 그는 짧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어머니는 승마용 장갑을 서둘러 벗으며 다가왔다.

“얘야! 저택에 제다이가 왔다고 들었다. 무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나 팍팍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 같았다. 무표정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어머니의 얼굴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자식과 부모간의 그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을 통해 어머니가 진실을 깨닫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감흥조차 없었다. 자신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오던 어머니의 무릎이 꺾이자 팔꿈치를 붙잡아 받쳐올리는 동작은 기계적이었다.

“아냐… 아냐! 아니라고 해라!”

다룬을 올려다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그가 아니라고 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기라도 하듯. 어머니가 이렇게도 작은 분이었던가. 형과 둘이 무슨 말썽을 부린 것이 들켜서 어머니 앞으로 끌려왔던 때면 그렇게도 무서웠는데. 그 찌푸린 얼굴을 올려다보던 때가 그렇게 먼 옛날 같지도 않은데. 형과 나란히 꾸중을 듣던 때가… 표정없이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다룬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냐…!”

어머니는 마치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려는듯 몸부림을 쳤지만, 다룬은 놓지 않았다. 손가락을 푸는 방법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제자리에 굳은채 어느 영원 동안 서있으면 이것이 현실이 아니게 될까.

“제발… 아닌 거지? 네 형… 그럴 리가 없잖니? 그럴 리가… 루바트…!”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자 다룬은 기계적으로 그 작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렇게 눈에 띄는 장소에서 어머니가 감정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지만 하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현관으로 들어오던 햇살이 점점 좁아지더니 사라졌다.

석상처럼 선채 그는 어머니의 슬픔이 자신에게 가득 부딪쳐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상실 앞에 서로 부둥켜안고도 그들은 각각 혼자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손을 잡아드리고, 등을 쓸어드릴 수 있겠지. 어쩌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어붙은 혼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황금빛 햇살 속에 웃던 소년의 기억은 산산조각난 빛의 파편이 되어 천천히 흩어져갔다.

네, 옛날에 시범 플레이에서 잠시 나왔던 다룬 오르가나입니다. 지난번의 성원에 힘입어(?) 약속했던 과거 이야기죠. 뭐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 주인공이긴 (뭔소리여) 하지만 어차피 저는 진행을 할때든 소설을 쓸 때든 남의 인물을 건드리는 일은 피하고 보기 때문에… 시범 플레이에서 주인공이었다가 본 캠페인에서 조연이 된 로크락이 그나마 제일 이 원칙에서 벗어난 경우군요.

어쨌든 주인공들이 직접 나올 일은 없지만 자락스와 다소 관련이 있는 얘기고, 이방인님이 전에 요청하신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갈등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워낙에 규모가 큰지라 겁부터 나긴 합니다만…) 다른 분들도 캠페인의 방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제안해 주시면 제가 고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