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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시대에...> 타로 신탁 알파 버전

이전에 몇 번 플레이소개한 적 있는 사악한 시대에… (In a Wicked Age…) 이야기 카드를 타로 덱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신탁이라고 하는데, 참여자마다 특정한 이야기 실마리가 있는 카드를 무작위로 뽑아서 거기서 인물 설정이나 이야기 힌트를 얻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진실한 보물 지도가 있는 불쾌한 사냥꾼’ 카드와 ‘뼈가 된 주인의 팔에 아직도 채워진 금팔찌’ 카드, ‘죽어가는 이의 지식을 훔치는 사령술사’ 카드를 뽑아 인물을 만들고 설정하는 식이지요.

원래는 트럼프 카드로 하지만 (책에 있는 신탁 내용을 번역해서 제가 만든 전용 카드도 있습니다만), 타로 카드로 신탁을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럼프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타로 카드는 트럼프와 달리 카드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으니까요. 타로는 영적인 부분에서 물질적인 부분까지 인간의 삶을 꽤 폭넓게 다루고 있는지라 더욱 풍부한 얘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타로 신탁을 조금 전에 완성했습니다. 페이지 만든 때가 2008년 12월이었으니 장장 2년이 조금 넘게 걸렸군요. 물론 안하고 방치해둔 기간이 길어서 그렇긴 하지만요(..) 아직 전혀 테스트하지 않은 알파 버전이기는 하지만 일단 뭔가 고칠 거리가 생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배경은 처음에는 타로카드가 나타난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생각하고 했습니다만, 사실 타로덱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꼭 그럴 건 없을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범용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처음 생각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만요. (제 타로덱은 아프리카 타로라서 배경이 덱을 따라간다면 꽤 독특한 분위기가 될지도요? ㆅ)
또 다른 활용법이라면 신탁을 뽑는 것뿐 아니라 뽑은 카드 자체를 타로 스프레드처럼 생각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궤적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역으로 나온 카드는 그 규칙을 적용한다든지, 아예 한 10장쯤 뽑아서 켈틱 크로스 스프레드 만들고 장기 캠페인으로 가버린다거나,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장기 캠페인까지 할 만한 내용인지는 테스트를 안해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아직 전혀 테스트를 안해본지라 많이 부족하지만, 다가오는 네이버 TRPG 클럽 RPG 캠프에서 돌리기로 했고 그 전에도 기회가 있다면 테스트해볼 생각입니다. 뭐 신탁 별거 있겠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정말 재밌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네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보고 많은 지적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업데이트: 오늘 타로 신탁으로 카드를 뽑아서 실제 설정을 해보았습니다. 동양풍 판타지가 될 듯하네요. 신탁 자체도 다시 읽어보면서 자잘한 수정을 가해보고 있습니다.

일일 플레이 후기

네이버 TRPG 카페에서 한 2월 15일 일일 플레이 후기입니다.
1부: 테스트와 준비

이번 네이버 TRPG 카페 일일 플레이에는 처음에는 전혀 다른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원래는 펄프용 규칙인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로 17세기 유럽 배경의 스워시버클링물을 하려고 했는데, 첫 플레이테스트일 전날(..)에 예정을 급 변경했습니다. 우선 캐릭터를 미리 만들어가는 등 준비할 게 많았는데, 인물과 시나리오 등을 미리 준비해가는 것은 참가자가 준비 단계부터 함께 참여해서 참가자 몰입을 이끌어내는 제 진행 스타일에는 잘 맞지 않았거든요. 물론 미리 준비한 인물 중에 참가자가 선택하게 하는 것은 좋은 차선책이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제게는 이상적이지는 않았고, 차선책을 위해서 그 많은 준비를 해가기에는 좀 효율이 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삼총사, 17세기 유럽 역사, 겁스 스워시버클링 등 온갖 자료를 읽은 사전 준비는 과감히 뒤엎고 (덕분에 이 시기와 스워시버클링 장르에 대해 많이 배우기는 했습니다) 중동풍 환상/공포물인 사악한 시대에… (In a Wicked Age…)로 급선회했습니다. 당일 아침 돼서 주사위도 없이 승한군에게 주사위 갖고 나오라고 문자친 후에 트럼프 덱도 없이 타로덱 들고 영문 시트를 프린트해서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찌어찌 한 플레이테스트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ORPG로 할 때는 나름 진지했는데 TRPG로는 완전 만담물이 되더군요. 신탁은 ‘잠들지 않는 과거’로 정해서 카드를 네 장 뽑고, 의도적으로 애매한 신탁의 구체적인 사항을 플레이로 채워나가며 유쾌하게 즐겼습니다. 유리한 환생을 구하던 마법사의 영혼이 결국 원숭이 시체에 들어가서 원숭이로 다시 태어난 결말에서는 전원 폭소. 이 테스트 플레이를 하면서 좋은 조언이 많이 나와서 한글 시트를 만들고, 신탁 카드도 한글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트럼프 카드를 뽑고 표에서 찾는 형식인데, 하는 김에 아예 카드를 만들자고 생각해서 PDF 파일로 만든 후에 카드용지에 프린트해서 잘라 덱을 만들었습니다. 그거 자르는 데 시간이 많이 들어서 애물단지가 되긴 했지만요.
두 번째 테스트 플레이는 일일 플레이 전날에 했습니다. 한글화한 시트와 신탁 카드를 선보여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번에도 역시 좋은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교인 집단자살을 꿈꾸는 광신 교주를 맡으신 두하님 RP가 너무 실감났죠. 위시송군의 적당히 비겁한 마법사 조수와 필리더님의 나쁜 남자! 였던 사제 역시 인상깊었습니다.
부족했던 점이라면 먼저번 플레이테스트에 참여하셨던 두하님과 위시송군이 계셔서 처음 해보신 필리더님에게는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고 판정을 휙휙 지나간 면이 있었습니다. 전원 사악한 시대에…초심자들이 하실 본 플레이에서는 준비시간 30분을 들여 좀 더 판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예시도 풍부하게 들라는 지적이 아주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놈의 애물단지 신탁 카드는 두 번째 플레이테스트 날에도 저를 애먹였지요.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프린트하고 잘라놓은 신탁 덱 중 ‘잠들지 않는 과거’와 ‘독사의 소굴’을 잃어먹은 것이었습니다. (…) 결국 다음날 아침 허겁지겁 카드를 다시 프린트해서 자르느라 아침도 못 먹고, 일일 플레이 장소로 달려가면서 레이저 토너가 잔뜩 묻은 손으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었더랬습니다. 주사위는 여전히 없어서 필리더님께 협찬받았습니다. (사악한 시대라는 테마에 맞춰서 Wicked라는 문구가 있는 옷을 입고 나갔는데 아무도 별 얘기가 없어서 서운했어요..ㅠㅠ)
일일 플레이 장소에 도착해서 위시송군의 처절한 안마 고문을 받으며 규칙책을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요약본에 틀린 부분 발견해서 사인펜으로 급 수정. 옆에서는 마나밍님과 다른 회원분께서 대형 맵 여섯 장을 45분 내에 그려내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위업을 이루고 계셨죠. 그리고 12시 30분경에 참가자분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2부: 이 사악한 시대에
일일 플레이 참가자분 중 제가 면식이 있었던 분은 정숙조신님뿐이었고, 나머지는 처음 뵙는 분이었습니다. 갸리님과 아무개님, 머리띠님, 정숙조신님이 모두 도착하셔서 플레이를 준비하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 테스트 플레이를 거치면서 받은 조언들이 플레이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글화한 시트와 신탁에 더해 판정을 처음부터 설명하고, 특수능력 등에 대해 폭넓은 예시를 들면서 설명한 것이 플레이가 부드럽게 흘러가는 데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처음 해보는데도 전원이 빨리 적응하시기도 했고요. 준비와 설명을 하는 30분은 그 이상의 시간을 절약하고 플레이 자체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첫 번째 이야기: 광기의 영지 –
첫 신탁은 ‘잠들지 않는 과거’였습니다. 잠들지 않는 과거 프린트하다가 카드용지가 떨어져서 빈 카드에 손으로 직접 쓴 카드가 그만 발각당해서(..) 이거 안 쓰면 너무 아깝다는 게 참가자들의 의견이었죠. 수상한 인상의 약제사, 젊고 잔인한 영주, 뱀을 부리는 여마법사, 인간을 미치게 하는 지성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머리띠님의 제안으로 인간을 미치게 하는 지성은 여마법사에게서 가출한 뱀이 되었고, 뱀에는 사람을 물어서 미치게 하는 특수능력을 추가했습니다. 여마법사는 뱀에게 물려서 미쳐버린 영주의 이복형을 이용해 영주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고, 영주는 그 이복형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고 있었고, 약제사는 돈을 벌어 영주 자리를 사려고 하고 있었죠.
이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속에서 영주의 이복형 아다르 말고는 전원 어느 정도 (사악한) 해피엔딩을 맞았습니다. 영주의 이복형은 영주를 죽이려다가 뱀으로 맞아서(..) 구제불능으로 미쳐버렸고, 영주 자신도 자다가 뱀에게 물려서 그 치유약을 평생 먹는 신세가 되어 약제사에게 꼼짝도 못하게 되었고, 뱀 쟈키티는 여주인에게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 두 번째 이야기: 죽은 자와 산 자의 도시 –
두 번째 신탁은 ‘독사의 소굴’이었습니다. 이건 좀 음모물이나 정치물 성격이 있다는 제 설명이 무색하게 실제로 뽑은 카드는 연적에게 마법으로 아내를 잃은 젊은이, 늙은 수도승의 집 뒤에 봉인되었다가 풀려나는 악마, 귀신이 회합하는 폐가, 그리고 작은 마법 유파에서 세운 학교였지요. 이 네 가지를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 머리를 싸맸는데 서로 얘기하다 보니 어찌어찌 되데요. 마법 학교 부분은 거의 비중이 없기는 했지만, 그런 취사 선택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신탁은 재료를 제시할 뿐이고 어떻게 요리할지는 참여자들이 결정할 사항이니까요.
처음에 신탁에 나온 인물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완전 스타가 된 것은 아내를 잃은 젊은이 아람의 어린 아들 자히르. 영을 보고 만지는 능력이 있는 이 ‘식스 센스’ 꼬맹이는 아빠도 이기고 귀신 대장 자인도 이기는 도시 최강자로 군림했습니다. 봉인을 풀고 자유의 몸이 된 악마가 도시를 타락시키기 시작하자 일거에 악마를 쫓아버리고 도시를 구한 수도승 나탄은 그래서 자히르를 후계자로 두려고 하지만, 아버지 아람의 단호한 반대로 무산. 결국 죽은 자와 산 자를 분리시키겠다는 나탄의 꿈은 후계자 부재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도시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두 세계가 공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지요. 생과 사는,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는 보기보다 훨씬 가까우니까요.
– 평가 –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미리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결국 이야기는 참가자들에게서 나왔고, 제가 하는 일은 처음에 공을 굴리고 약간씩 조절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최초 상황에 따른 참가자의 반응과 선택으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참가자들은 자기 인물의 목적과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이며,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에 대한 제안을 던지며 스스로 이야기를 움직여 주셨습니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창작 욕구가 있는 참가자들에게 이야기에 대한 권한이 주어지면 정말 폭발적인 집단 창의력이 나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참가자가 주로 이끄는 이야기인 만큼 참가자의 스타일은, 그리고 참여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플레이의 중요한 동력원이었지요. 그 점에서 우리끼리는 서로 잘 맞았던 것 같아서 더더욱 좋은 플레이가 되었습니다. 갸리님은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셨고, 첫 번째 이야기의 마녀 시파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의 악마 시8은 완전 센스 폭발이었습니다. (‘시8! 저놈 잡아라!!’) 수도승이 악마를 보내버린 후에는 NPC였던 자히르를 맡으셔서 폴터가이스트 납치범을 발길질로 굴복시키는 꼬마 파워를 유감없이 발휘해주셨습니다.
아무개님은 말씀을 너무 재밌게 하셔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 한마디에 전원이 굴러다녔었죠. 광기의 영지에서 좀 짱이셨던 영주 발라시부터, 죽은 자와 산 자의 도시에서 엄마를 쫓아가려는 고집쟁이 아들한테 걷어차이는 불쌍한 젊은 아버지까지 정말 재미있게 해주셨습니다. 발라시는 마녀도 잡아들이고, 광전사 이복형도 이기고, 약제사한테도 안 속고 정말 무적 같았는데 도사리고 있던 뱀에게 마지막에 콱 물려버릴 줄이야.
머리띠님은 한 발짝 물러나서 조용히 계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움직이시는 센스가 돋보였습니다. 이분은 정치물을 정말 잘 하실 것 같은데, 첫 이야기 때 완전 무적이시던 영주님을 끝에 스윽 나타나 단호히 잡아버리는 쟈키티의 끈기는 대단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때 도시 귀신의 짱 자인으로서 조용히 계산적인 모습도 보스의 면모를 보여주셨고요. (그러나 자인이 수도승을 이기고 수도승이 악마를 이겼는데 악마는 자인을 이기고 봉인에서 탈출하는 건 무슨 조화인지요. 그리고 꼬마의 발길질에는 당해낼 용자가 없었다능.)
정숙조신님의 약제사는 꼭 사기꾼 약장수 같았는데 자신은 미치는 약은 처음 만들어본다고 투자자 영주 앞에서 솔직히 말해버리는, 당대의 과학적 양심에는 모두 감탄. 두 번째 이야기에서 수도승 나탄은 악마를 일격에 보내버리는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잘 키우려는 젊은 애아빠의 부정(父情)에는 이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실험체에게 ‘약이 잘 안 나오니 미친 척을 해라’ 같은 제안을 하셔서 이야기를 멋지게 끌어가시는 기지를 발휘하시기도 했죠.
이렇게 좋은 참가자분들 덕분에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과 재미, 창작의 만족감, 모두 함께 웃고 떠드는 사회적인 즐거움이 잘 맞아떨어진 좋은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좋은 시간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3부: 전체 후담과 뒤풀이
플레이를 모두 마친 후에는 모든 팀이 평가와 소감을 공개한 뒤 경품을 추천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경품 추천 중에는 왜 우리 팀원은 안 나오나 막 안타까워하다가, 희귀 아이템인 D&D 클래식 추첨에 머리띠님이 나오셔서 좋아라 했었죠. 그러다가 이미 귀가하셨다는 얘기에 ‘이럴 순 없어!’ 울부짖다가 역시 우리 팀원이신 갸리님이 당당히 당첨되셔서 회생 (?). 갸리님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뒤풀이에서는 많은 분들을 뵙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정숙조신님과도 이야기 나누었고, 에어님, 버닝도넛님과도 안면을 익혔죠. 이전에 MSN에서만 잠깐 뵈었던 멜키아님, 또 이번에 처음 뵌 줄라이님하고 타나토스님하고 나눈 얘기도 재미있었습니다. 다크선님과 멜키아님과 한 SF 이야기도 참 즐거웠고요. 왁자지껄한 자리여서 깊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온라인으로만 뵌, 혹은 처음 뵙는 분들과 안면을 익힌 것도 아주 의미가 깊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두하님과 모든 스탭분들, 플레이테스트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나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 되었습니다. RPG는 결국 함께해서 재미있는 놀이이고,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모임의 기쁨인데 어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군요.

사악한 시대 플레이

지난 일요일에는 참가자 한 명이 사정상 불참해서 어스돈의 혼 정기 플레이 대신 광열군을 끌어들여 사악한 시대에.. (In a Wicked Age…) 즉석 플레이를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승한군 글에 나와있고, 몇 가지 덧붙일 감상이라면…

우선 무작위로 뽑는 이야기 요소들 (신탁)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효과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폭군을 돕는 사악한 악마’라든지 ‘무모한 젊은이를 지키는 수호령’ ‘전쟁용 황소떼 몰이꾼’ 같은 요소들이 순전히 무작위로 모여서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과정이 쉽고 재밌었던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본 배경은 고대 중동풍 판타지이지만, 신탁에 따라 배경이 달라지므로 신탁만 바꾸면 다양한 장르로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또 하나, 이야기 요소들에서 뽑은 인물들의 목표를 번갈아 설정하면서 목표에 갈등을 짜넣는 과정이 플레이의 극적 긴장감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맡은 황제를 돕는 악령이 황제를 실각시키고 용사를 새 황제로 세우려는 계획은 악령과 황제 사이에 갈등을 설정했고, 남에게 희생이 없게 자신이 모든 희생을 지려는 전사의 목표는 전사를 무조건 지키려는 수호령과 갈등을 유도했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지향성과 촘촘한 갈등의 망을 설정한 채 시작하기에 즉석에서 극적 배경과 인물을 설정하면서도 플레이가 방향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군더더기 없는 긴장감을 유지했다고 봅니다.
이렇듯 상상력을 무작위로 자극하는 신탁과 갈등을 유도하는 목표 설정, 거기다 간단한 인물 제작 규칙 때문에 사악한 시대는 즉석 플레이를 하기에 좋은 규칙입니다. 그러면서도 즉석 플레이를 연속적으로 연계해서 과거나 미래 이야기를 다루는 등 중장기 플레이도 할 수 있고, 신탁과 목표는 다른 규칙과 연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규칙이면서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악한 시대는 최근 RPG 구매 중 가장 괜찮은 축으로 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