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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의 탄생

트위터에 썼던 ‘프리 크릭스슈필이 D&D 탄생에 끼친 영향(링크)에 좀 더 살을 붙여서 D&D가 탄생한 과정을 적어봤습니다.

1974년 탄생한 TRPG 던전스 앤 드래곤스(D&D)는 반세기 동안 게임 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지금은 전세계 5천만 명 이상의 팬이 플레이하는 거대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D&D의 창시자는 게리 가이각스와 데이브 아네슨인데, 저는 D&D를 ‘게리 가이각스가 만든 육체에 데이브 아네슨이 생명의 숨결을 집어넣은 창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D&D의 뿌리를 이야기하려면 ‘프리 크릭스슈필’부터 언급해야 합니다. 크릭스슈필(독일어로 ‘워게임’)은 19세기 프로이센 육군에서 장교들에게 전술 교육용으로 실시한 이래 널리 퍼진 워게임입니다.

크릭스슈필에서는 시야 제한 구현이나 복잡한 규칙을 해석하기 위해 심판을 두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규칙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심판들은 처리에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게다가 규칙이 지나치게 엄격한 나머지 때로는 현실과 동떨어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나온 방안이 바로 “딱딱한(rigid) 규칙 대신 심판이 자유롭게(free) 상황을 판단하고 처리하는 방식의 워게임”, 프리 크릭스슈필입니다.

프리 크릭스슈필은 이후 미국의 워게임 ‘스트라테고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트라테고스는 19세기 당시 장교 훈련용으로 흔히 사용되던 워게임이었으나, 이후 20세기 들어서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1967년, 워게임 팬이자 제작자 데이비드 위슬리는 미네소타 대학교 도서관에서 스트라테고스를 발굴하고, 이 게임의 각종 요소를 자신이 속한 게임 동호회 ‘미드웨스트 밀리터리 시뮬레이션 어소시에이션(MMSA)에 소개하고 보급했습니다. MMSA의 멤버 중에서는 데이브 아네슨도 있었습니다.

1969년, 데이비드 위슬리는 프리 크릭스슈필의 원칙을 적용한 ‘브라운스테인’을 만들어 테스트 플레이를 해보기 시작합니다. 브라운스테인은 나폴레옹 시대 가상의 독일마을을 배경으로 한 워게임입니다.

브라운스테인은 플레이어들이 지휘관이 되어 병력을 운영하던 기존 워게임과 달리 여러 플레이어가 마을 사람 개개인의 역할을 맡아서 각자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운영하는 방식이었는데, 원래는 플레이어들이 별도의 방에서 각각 심판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선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캐릭터 연기를 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마을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두 플레이어가 예상치 못하게 서로 결투를 시작해서, 웨슬리는 즉석에서 결투 규칙을 고안했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이 테스트 플레이는 ‘혼란한 실패작’으로 생각했지만, 플레이어들은 이 롤플레이를 매우 즐거워했고, 웨슬리에게 게임을 더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군대에 간 웨슬리를 대신해 데이브 아네슨이 브라운스테인의 심판을 맡았고, 그는 브라운스테인을 개조해서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가들을 플레이하는 배경 무대인 ‘블랙무어’를 플레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데이브 아네슨은 ‘캐슬 앤 크루세이드 소사이어티(C&CS)’라는 소모임에도 가입했는데, 이 소모임은 게리 가이각스가 운영하던 중세 미니어처 워게임 동호회였습니다.

게리 가이각스는 C&CS를 운영하면서 ‘그레이트 킹덤’이라는 가상의 판타지 왕국과 이 무대를 배경으로 플레이하는 ‘체인메일’이라는 워게임을 만들어서 C&CS 회원들이 왕국 내 각 지방을 맡아 워게임을 플레이하게 했습니다. 데이브 아네슨은 블랙무어의 무대를 그레이트 킹덤에 통합시키고, 체인메일의 1:1 스케일 플레이, 마법, 몬스터 규칙 등을 적극 차용합니다. 그러면서 가이각스와 아네슨은 적극적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1972년 가을, 아네슨은 가이각스가 사는 레이크 제네바로 가서 블랙무어 플레이를 시연합니다. 이 게임의 잠재성을 깨달은 가이각스는 아네슨과 협력하여 ‘던전스 앤 드래곤’의 개발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