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7화 (5): 걸맞는 죽음

“무슨 일인가!”

지카리는 의무실 문을 열고 문 꼭대기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그런 그의 뒤로 아라가 서둘러 들어왔다.

“해독제는 찾았지만 발작이 심합니다.”

하얀 작업복을 입고 수염을 천에 말아 감아놓은 드워프가 침착하게, 그러나 한가운데 병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침대
위에는 랜돌프가 척 봐도 극심한 고통에 떨리는 몸을 뒤틀고 있었다. 상처인지 토혈인지 하얀 침대보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떨쳐버리고,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드워프
치유사의 차분한 설명은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해독제 투여일을 너무 많이 늦춘 데다가, 창고를 뒤지는 동안 진통제로 발작을 눌러놓은 것이 오히려 도졌군요.”

“무슨 일 처리를 그렇게…!”

아라가 언성을 높이자 드워프는 그녀를 조용히 마주보았다.

“투여 날짜를 놓친 것은 우리 쪽이 아닐 텐데요?”

랜돌프는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비명도 아닌 끄윽…거리는 신음을 내지르며 침대보를 찢어지도록 세게 쥐었다. 주변의 하얀 옷 입은
치유사들은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노예사냥꾼을 어떻게 살리느냐겠지요.”

랜돌프를 잠시 보다가 치유사는 덧붙였다.

“살리고자 한다면.”

“그는 대원으로서 충실히 활동해 왔네.”

지카리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은 걸맞는 죽음이 아니야.”

“지카리공이 잡아주시겠습니까?”

아라가 그에게 물었다.

“경련이 심하지만, 공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해보겠네.”

고개를 끄덕이고 지카리가 침대로 다가가는 동안, 연청색 액체가 찰랑이는 투명한 병을 든 치유사 조수가 드래고니안을 따라갔다. 그
뒤로 아라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지카리의 손이 닿자 랜돌프는 완강히 저항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지카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고하게 그를 앉혀 뒤에서 양팔을 붙들고
몸을 고정시켰다. 몇 번 더 몸부림치다가 랜돌프는 헉헉거리며 몸이 처졌다.

그러나 조수가 병을 들고 다가가자 그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발버둥을 쳤다.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젖히고 먹이려 하자, 그는 병이
닿는 순간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머리를 잡은 손에서 벗어났다. 해독제가 몇 방울 이불보 위로 쏟아지자 조수는 황급히 병을
바로잡으며 물러났다. 바로 세우자 병은 뚜껑이 저절로 닫히며 액체가 쏟아지지 않게 막았다.

“이런 식입니다.”

아라 옆에서 치유사가 감정 없이 말했다.

“그렇다고 수면제를 더 주었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즉, 책임전가인가.”

아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드워프는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

“낯선 사람보다는 동료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지카리의 팔에 랜돌프가 가만히 붙잡힌 모습을 눈짓하고 아라를 올려다보았다.

“해보시겠습니까?”

“모르는 사람보다 나을 지는 모르겠다만…”

아라는 쓴웃음을 짓더니, 조수에게 손을 내밀어 병을 받았다.

“해독제는 얼마 없습니다.”

치유사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있었다.

“창고에서 찾아낸 것은 그게 다입니다. 더 찾아보라고 지시는 해놓았지만…”

아라는 병을 들고 침대에 다가갔다. 눈만 희번득거리며 가끔 고통스럽게 경련하는 랜돌프를 그녀는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꼴사납구나, 다사케타. 인사불성이라니.”

그녀는 그의 머리에 손을 뻗으며 병을 그의 입술에 가져갔다. 기울이자 병은 뚜껑이 열렸지만, 랜돌프가 진저리를 치자 아라는
쏟아지기 전에 병을 도로 세워 뚜껑을 닫았다. 물러나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숟가락을 달라고 해서 맑은 연청색 해독제를 조심조심
덜어냈다.

“쏟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치유사의 경고에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궁수다.”

아라는 병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숟가락만 든 채 다시 접근했다.

“손이 떨릴 일은 없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를 밀자 랜돌프는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다. 그녀는 그의 입에다가 숟가락으로 해독제를
흘려넣었다.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자 몇 방울이 턱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무심코 그의 머리를 잡았다. 그는 거의 짖듯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연청색 방울이 공중에 흩날려 침대보에 투둑 떨어졌다.

“더 이상의 손실은 안 됩니다.”

드워프 치유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으로 잠재우거나, 더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서…”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라는 뒷걸음질쳐 숟가락을 병 옆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다시 재웠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소?”

치유사는 손을 펼쳐보였다가 떨구었다.

아라는 대답 없이 랜돌프를 내려보다가 빈손으로 다가섰다. 그는 기도가 막히는지 쌔액쌔액 힘겹게 공기를 빨아들이며 눈만 굴려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구석에 몰린 짐승 같구나.”

그녀는 다크엘프어로 낮게 말했다.

“두려우냐, 인간 아이야?”

그녀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이마에 갖다대었다. 잠시 벗어날 듯 몸을 틀다가 그는 지친 기색으로 이마를 손에 기댔다.

“이해할 수 있다…”

아라는 속삭였다.

“나도 그러니까.”

이마에 얹은 손을 천천히 옮겨 아라는 그의 뒤통수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갖다댔다. 에디우스는 놀라서 순간 굳었다가 짧은 고함을 내지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는 내내 입술을 대고 있다가 아라는 그가 조용해지자 다시 허리를 펴고 내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창백하게 땀에 젖은 채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뒷통수에 축축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며 아라는 턱을 받친 손을 떼어 침대가 탁자에 대고 저었다. 치유사 조수가 서둘러 병을
집어드는 동안 지카리는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니아카…?”

아라는 치유사가 건네주는 병을 받았다.

“대신 하실 분을 구해도…”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맡아주실 분이 없겠지요.”

“훌륭하게 하고 있으니 계속하시지요.”

치유사는 헛기침을 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거의 동시에 다른 치유사와 조수들도 무심코 물러났다.

“이래서 아는 분이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입술이 없는 데다가…”

지카리는 날카로운 이빨이 길게 줄지은 주둥이를 벌리며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긁는 소리를 냈다.

“랜돌프를 잡고 있어야지 않겠나.”

눈썹을 치켜들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아라는 병을 기울여 해독제를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옆에서 기다리는 조수에게 병을 건네주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랜돌프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녀는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포갰다. 턱과 목을 주물러서
그가 약을 꿀꺽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아라는 다시 손을 뻗어 해독제 병을 받았다.

다섯 번 반복했을 때쯤 랜돌프의 얼굴에는 조금씩 화색이 돌았고,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채 지카리에게 기대어 늘어졌다. 아라는
병에 조금 남은 해독제를 그의 입안으로 흘려넣고 마지막으로 턱밑을 주물러 삼키게 했다. 치유사의 손짓에 지카리는 랜돌프를 놓고
침대에 눕히는 것을 거들었다. 침대 발치로 발과 발목이 비어져나온 채 환자는 가볍게 기침하다가 축 늘어져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호흡했다. 그 위로 치유사 조수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제 몇 시간 쉬고 깨어나면 괜찮습니다.”

치유사가 랜돌프의 눈을 까뒤집어 보며 말했다.

“체력은 좀 회복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정상이지요.”

“무슨 일이 또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아라는 기운없이 말하고 돌아섰다. 지카리의 묵직한 걸음이 의무실에서 그녀를 따라나왔다.

“솔직히 좀 의외로군.”

의무실 복도로 나와서 그가 말했다.

“랜돌프를 싫어하는 줄 알았네.”

“싫어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황망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른 복도로 접어들었다. 환한 등잔이 몇 발짝마다 벽감 속에 빛나는 지하 통로는 통풍도 충분해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햇빛이나 표지물 없이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비현실감이 있었다.

지카리의 커다란 손이 어깨에 와 닿자 아라는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재빨리 손을 떼고 갈고리발톱이 난
손가락으로 다른 통로를 가리켜보였다. 그녀는 목례하고 그가 가리킨 통로로 방향을 바꾸었다.

“만약 그가 배신해서 죽는 것이었다면 저는 맨 앞줄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습니다.”

“동의하네.”

따라가는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끈하게 넓히고 다듬은 곧은 돌 통로에 그들의 발걸음이 울렸다. 아라가 숙소 문을 여는 동안
지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자네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럽군.”

그 말에 아라는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감사합니다. 그저…”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그자에게 아무 말씀 말아주시겠습니까.”

“약속하지. 쉬게.”

지카리의 그녀가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고는 옆방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몸을 한껏 숙여
들어간 뒤 복도는 가끔 등잔이 퍼득거릴 뿐 긴 고요에 빠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무실에서는 세 번째 일행, 겁에 질렸던 맹수가
꿈 없이 어둡고 따뜻하기만 한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소감

죄송합니다 안 죽었어요(?). 역시 로그에는 절대 없는 창작 분량입니다. 원래 로그의 7화에 내용이 더 있는데, 랜디의 독 중독과 그에 얽힌 과거에 초점을 유지하려고 소설본 7화는 여기에서 끊었습니다. 입으로 약을 먹여줘서 낫게 한다…는 발상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는데, 삭풍님과 이방인님 모두 오케이하시니 뭐 까짓거.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위로해줄 따뜻한 접촉을 원하는 랜디의 무의식적 욕구를 표현하는 의미도 있고요. 그럼 이걸로 7화는 끝~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5 thoughts on “이오닉스 7화 (5): 걸맞는 죽음

  1. 진혼

    다름이 아니라 연락드릴 곳이 영 마땅치 않아서 여기에 리플을 답니다.
    제가 이번에 폴라리스를 한번 플레이 해 보려고 하는데, 위키에 번역본이 있는 거 같은데 비공개더군요. 혹시나 폴라리스 번역 위키를 공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공개가 영 꺼림직하시면 파일로 전송해주셔도 되고, 팀 외로 유출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Reply
    1. 로키

      원작자와 국내출판 계약을 진행하고 있는 룰이기는 한데, 어차피 번역 플레이테스트가 필요하니 플레이에 참관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번역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면 플레이테스트를 위해 공개하겠습니다. 혹시 비밀댓글로 메신져 연락처 남겨주실 수 있는지요?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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