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7화 (4): 호접몽 (胡蝶夢)

주의: 이번 편에는 성적 폭력에 대한 암시와 언급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그렇게 헤루모르에 도착해 마침내 전언을 무사히 전할 수 있었어요. 그걸로 원래는 끝이어야 했죠.

짧아서 자꾸 발이 빠져나오는 낯선 침대에 누워, 정신이 드는 사이사이 낯선 돌 천장을 올려다보며 랜디는 꿈을 꾸었다.

지금 헤루모르에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알고는 있었다. 거친 산길을 넘어오느라 예정보다도 더 걸려 독이 파먹은 몸은 엉망이었다.
다크엘프가 드워프들에게 그렇게 재촉했지만 해독제는 없거나 아직 못 찾은 듯, 뭘 먹으라고 주기는 줬는데 해독제가 아니라 무슨
수면제나 진통제인 듯 마시고 나니 잠만 쏟아졌다. 해독약이나 대령하란 말이다, 노스탤지아 새끼들아. 이거 계약 위반이야…

다시 돌 천장이 흐릿해지면서 그는 바이포드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뒤에는 브램과 그 패거리가 쫓아오는 소리에 얻어맞은
상처가 다시 쓰려왔다. 이를 악물고 달리던 그는 낯익은 문을 헉헉거리며 열어젖혔다.

삐걱이는 가구 몇 점에 벽은 습기에 변색된 집안에는 부모가 다투는 소리만 들려왔다. 별 감정도 없이 그저 습관적인 의례였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것이냐며 에드레드 아주버님께 편지는 써보았느냐, 던햄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단조로운 푸념에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형님이 사정이 되면 어지간히 도와주시겠느냐, 아무 계획도 없이 던햄에 어떻게 가느냐며 신대륙으로 가보자는
소리로 응대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 위험하고 야만적인 곳을 어떻게 가느냐며 펄쩍 뛰었다. 이 모든 것이 투자를 한다고 속이고
아버지 돈을 가로채 도망간 고트프리드 탓이라는 것만은 두 분은 언제나처럼 의견이 일치했다.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열한 살 랜디는 잘 알고 있었다. 에드레드 숙부는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던햄으로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안힐라스는 더더욱. 고트프리드는 아버지 돈으로 부자가 되어 언제까지고 편하게 살 것이다. 집에 앉아 과거를 그리워하며
남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지 불평하는 정도가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문득 방 구석에 이전의 집기 중 팔지 않은 유일한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점점 허름한 집으로 몇 번이나 이사하면서도 어머니의
고집으로 끌고다닌 무거운 마호가니 찬장, 바로 옆에 선 칠이 벗겨지는 벽과 기우뚱한 탁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검은
광택에 소년은 가슴이 답답해왔다.

“랜돌프 왔니?”

방문이 끼익… 열리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문가에 비쳤다.

“어머니가 지금 몸이 좀 안 좋구나. 점심 챙겨먹을 수 있지?”

요리나 청소같은 일을 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언제나 몸이 좀 안 좋았다. 옆집에 혼자 사는 노파가 보다못해 와서 좀 챙겨주는 때가
아니면 랜돌프는 집에서 더운 음식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예…”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뒷문에 가서 귀를 기울였다. 브램네 패거리는 지나간 것 같았다. 랜돌프는 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 밥을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했다. 노점에서 뭐 하나 훔치거나, 성 메르다 광장으로 가보면 지금쯤 교회에서 뭐 나눠주고 있을 지도 몰랐다.
집에서 멀어지는 랜돌프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가 어느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듯이.

랜돌프는 숲속으로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속을 달려 벌목꾼 오두막촌에 도착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울타리를 훌쩍 짚어넘은 그는
얼기설기 대충 지은 오두막 두 채를 지나 세 채째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가자, 얼간이들!”

열아홉 청년은 놀라서 돌아보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난 오늘부로 이곳에서 벗어난다. 엘프 좀 잡아 보시겠다 이 말이야.”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서 나무나 하면서 썩고 싶은 놈은 남고, 돈 좀 만져보고 싶으면 따라와라.”

그의 동료들은 서로 마주보다가 각자 말없이 결론에 도달했다. 몇 명이 고개를 저으며 벌목나갈 준비를 마치는 동안 나머지는 그에게
몰려와 질문을 던지거나 꼭 끼워주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랜돌프는 득의양양하게 미소지었다. 여기 남아 고되게
일하면서 빚만 쌓여갈 동료들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기회의 땅 안힐라스에서 그 정도로 끝내는 건 낭비였다, 낭비. 아무것도 없이 두
쪽만 차고 내린 놈에게도 야심과 배짱만 있다면 이 땅은 끝없는 가능성을 약속했다. 그 생각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쉭쉭쉭- 양쪽에 추가 달린 끈이 회전하며 날아가 가느다란 다리에 휘감기자 숲속을 달리던 걸음이 갑자기 끊겼다. 여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아씨, 그러게 도망치기는.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라고.”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 옆으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꿇은 랜돌프는 턱을 잡아 살짝 돌렸다. 쏟아지는 연갈색
머리 사이로 눈물에 젖은 우미한 얼굴선을 확인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얼굴은 안 다쳤군. 남편놈도 지하에서 기뻐할 거다.”

그는 단검에 흥건한 피를 털어버리고 풀에 슥슥 닦은 후 단검집에 꽂았다. 여자의 눈물섞인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는 밧줄을
꺼내 그녀의 손목을 묶고, 다리를 동여맨 볼라를 풀어내며 매끈한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10만 골드는 가볍게 나올
상품이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만 밧줄 매듭을 익숙하게 조였다. 이 여린 손목들이 쓸리지 않게 고급 대마
밧줄을 사느라 수익이 다 나간다니깐. 이 정도면 꽤 인도주의적이지 않은가.

“어이, 울지 말라고, 잠깐 고생하면 이런 숲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호사가 평생 기다리고 있으니까.”

랜돌프는 흐느끼는 여자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고, 여자가 경악해서 굳어버린 사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신선한 체취를
들이마셨다.

“뭐라고 지껄여도 너희 여자들은 편하게 사는 게 최고잖아? 난 먹고살고, 넌 호강하고, 서로 좋은 거지.”

몸을 일으키며 그는 씩 웃었다.

“과부 됐다고 걱정은 말고. 가는 길에 충분히 재밌게 해줄 테니.”

그는 초저녁의 어스름이 내리는 숲속을 달려갔다. 숲은 빠르게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워낙 뻔질나게 드나든 길이었기에 잘 안 보여도
얼마든지 뛰어갈 수 있었다. 돌 옆에 고개를 내민 수선화, 개울가에 고개를 끄덕이는 물망초가 눈에 띄자 그는 점점 가슴이 설레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개울을 따라 내리막길로 내려오면서 양옆에는 계곡 벽이 환영해주는 팔처럼 감싸왔다. 라벤더와 별패랭이, 아지랑이꽃의 향기가 따스한
공기를 타고 폐부에 스몄다. 랜디는 걸음을 늦추어서 꽃을 밟지 않게 하나하나 피해, 노래하듯 흐르는 개울을 따라 벨벳처럼 부드러운
풀밭을 걸어갔다.

꽃들 사이로 하나둘 색색의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왔어?” “왔어!” “노래꾼이다!” “거인! 꺄악!”

빛무리 한가운데마다 조그마한 여자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개울의 즐거운 음악에 섞여들었다. 대답 없이 그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그가
평소 즐겨찾는 장소, 개울 옆에 쓰러진 나무가 걸쳐있는 움푹 파인 땅을 찾았다. 이끼로 파란 나무둥치 옆에 주저앉아 바위에 기대자
다시 페어리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날아다녔다.

“노래해줘!” “뭐 가져왔어?” “노래!”

가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페어리를 손을 저어 내쫓고, 노래해달라고 떼쓰며 머리카락을 당기는 페어리를 무시한 채 랜돌프는 바위에
편하게 기대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계곡과 그에 가득 핀 꽃, 그리고 그 위에 춤추는 빛무리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그는 향기로운
공기를 깊이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오 아름다운 포트모어, 빛나는 그 정경
너를 그리면 그릴 수록 생각하건대
네가 예전처럼 나의 것이었더면
아린의 모든 영주라도 빼앗지 못하리

나직한 노래소리에 주변에 페어리들이 날아들어 가만히 앉았다. 그들이 턱을 괴며, 혹은 춤추듯 가볍게 움직이며 지켜보는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그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숲의 새들이 슬피 우는구나
이제 어디서 쉬고 어디서 잘까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베어가고
아름다운 포트모어를 허물었으니…(주:영국 민요 Bonny Portmore 가사 중 따왔습니다. 로레나 멕케닛 버전을 좋아하는데, 유튜브에도 있더군요.)

아름다운 노래였지만 너무 구슬펐다. 여기서 부르기는 솔직히 좀 재수없는 노래라고 생각하며 랜돌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나둘 별이
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풀벌레가 또르륵 또르륵 우는 소리에 섞여 귀찮은 날파리놈들이 웃으며 조잘거렸다. 천화의 계곡에 가득
핀 꽃은 그윽한 향기를 밤공기중에 내뿜었다. 그 한없는 평화 속에 침잠해 랜돌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랜돌프는 풀섶 사이를 달리다가 잠시 웅크려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저기 앞에 또 하나 있었다. 알프 연방 척후를 알아보고 그는
몸을 낮게 낮추며 육박해갔다.

뭔가 느끼고 척후병이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랜돌프는 그의 등허리부터 단검을 찔러 올라갔고, 척후는 몸을 활처럼 뒤로 젖혀
커억거리더니 긴 풀이 흔들리는 풀섶으로 털썩 쓰러졌다.

“세 놈째인가…”

그 순간 쉬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랜돌프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보이지 않는 척후가 던진 단검은 바로 그의 귓가의
나무둥치에 퍽! 꽂혔다. 작은 나무껍질 조각이 얼굴에 팍 튀었다.

랜돌프는 나무 뒤에 급히 몸을 숨기며 풀섶을 살폈다. 저쪽에 작은 움직임이 보였지만, 해치우려면 더 가까이 끌어내야 했다. 들키지
않고 하나씩 처리하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날파리 같은 것들…”

그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네놈들 때문에 죽게 될 줄 알았지.”

알프 연방의 척후대가 천화의 계곡을 발견했을 때 그는 페어리들에게 급히 경고했었지만, 그 멍청한 날파리들은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언제나처럼 실없는 소리나 해댔다. 결국 그들이 소집했던 회의라는 것도 난장판으로 끝나버린 후 랜돌프는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와
척후대를 찾았다. 그들이 천화의 계곡, 페어리가 가득한 금광의 존재를 인간들에게 알릴 수 없도록. 계곡 가득 핀 기화요초를
군화발로 짓밟고, 골빈 날파리들을 잡아다가 날개나 뜯어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을 숨긴 척후가 다가오면서 풀섶이 푸스스… 흔들렸다. 동시에 왼쪽과 오른쪽에서도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그들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랜돌프는 나무에서 떨어져 숲속으로 달려갔다. 물레바위까지 가면 놈들을 따돌리고 한동안은 흩어놓을 수 있었다. 어쩌면
한둘쯤은 더 해치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떤 이는 달콤한 행복을 타고나고…”

속삭이듯 작게 노래하며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어떤 이는 끝없는 밤을 타고나지.(주:William Blake, Auguries of Innocence)”

침묵하는 추적자 여럿을 꼬리에 단 채 그는 밤의 숲속을 달렸다. 그에게 약속된 끝없는 밤을 향해.

“웃기는군…”

질문이 너무나 우스워서 랜돌프는 저절로 입술을 젖히며 이를 드러냈다. 사람이 웃는 얼굴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표정과 근본이 같다고
록윌 장터에서 늙은 사냥꾼이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주:늙은 사냥꾼의 이름은 김○환이라는 모 RPG인..[퍽] 동환님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옮겨보았습니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얼굴 그대로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정면의 가장 높은 돌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늙은 엘프를 올려다보았다.

“가우르가 토끼를 잡아먹고 나서 눈물 흘리면 가우르가 죄책감을 안다며 감동할 테냐?”

죄책감을 느끼냐고? 그야말로 가우르가 웃을 소리였다. 가우르가 웃으면 사람이 보기에는 으르렁거리는 것 같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사는 주제에, 잡아먹은 상대에 대해 죄책감이라고?”

그가 앉은 의자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두른 돌 의자에 앉은 열두 명의 엘프 장로는 침묵했다. 공터 가장자리의 숲에서는 새가 울었다.
그의 재판관인 그들은 희미하게 주름진 얼굴과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를 품은 눈빛 너머로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았다. 세상을
멀리서 관조하는 듯한 그들의 초연한 얼굴은 지금 그에게는 노스탤지아의 얼굴이기도 했다. 천화의 계곡 페어리들의 연락을 받고 알프
연방 척후병에게서 그를 구출한 동시에 포로로 잡은, 그 알 수 없는 집단의…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엘프 이터를 정성껏 치료한 후 이
기묘한 재판정에 세우고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동틀 때부터 숲 위로 석양이 내비치는 초저녁인 지금까지 장로들은 차분한 질문을 던져왔고, 사실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었기에 그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에미넴 숲의 엘프 중심지인 로리니엔 근처에 숨어지내며 혼자 있거나 소규모 집단에 있는 엘프 여자들을 노렸고,
기억하는 한 10여년 동안 서른아홉 명의 남자를 죽이고 마흔세 명의 여자를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겨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끌고가는 길에 몇 번씩 겁탈했다. 천화의 계곡을 구하려고 알프 연방
척후대를 단신으로 습격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죄책감을 느끼느냐고?

“엘프들보다 강했기에 그들을 잡아먹고 살았을 뿐이다.”

아마도 재판장에 해당하는, 정면에 앉은 장로의 눈빛이 희미하게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 역시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엘프들의 눈물과
고통, 수치, 그리고 죽음이 그에게는 돈과 생계, 그리고 얼마간의 쾌락이 되어 돌아왔다. 가우르가 쏜 화살에 맞은 토끼의 고통과
공포, 그 작은 생명의 끝이 하룻저녁 식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때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뭐가 이상한지
깨닫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도 노스탤지아 대원보다 약했기에 잡혀왔을 뿐이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삐딱하게 웃었다. 백날 정의를 외쳐봐라, 에미넴 숲의 악명높은 ‘엘프 이터’를 잡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알프 연방 척후대를
쓰러뜨리고 빈사 상태의 부상자를 죽음에서 건져낸 노스탤지아의 힘이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희에게 먹히더라도 원망이나 후회 따위는 없다.”

장로들은 마치 눈빛만으로 이야기가 통하는 듯 서로 표정 없이 시선을 던졌다. 그 묘한 태도가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랜돌프는 기세좋게 말을 마쳤다.

“뜻대로 해라. 그것이 승자의 권리이니까.”

숲 위로 펼쳐진 하늘은 석양의 붉은빛이 더욱 깊어졌다. 어스름 속에 가끔 우는 저녁새와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외에는
침묵이 깊어졌다. 랜돌프는 종일 돌 의자에 앉아 쑤시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이놈들! 아니면 감정이라도 내보이거나. 상대는 너희 동족을 노예로 팔아먹고 강간한 놈이란 말이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그
조용한 눈빛을 마주보며 그는 왠지 식은땀이 났다.

“장로회는 결정을 내렸다, 랜돌프 에디우스.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다.”

아무런 준비나 기척도 없이 재판장이 갑자기 말했다.

“그대는 달의 움직임에 따라 목숨을 취하는 달의 그림자, 카이론 두아스를 마시고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배속되어 사역하도록 한다.”

흐르는 듯 매끄러운 그들의 언어는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새울음처럼 자연스럽게 숲의 소음에 녹아들었다.

“삭월이 돌아올 때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자들이 판단하기에 그대가 신실하고 정직하다면 해독제를 주어 다음 삭월까지 그 생을 유지할
것이다.”

장로가 말을 잇는 동안 랜돌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대 생명은 그대를 우리 과업에 묶는 굴레가 되리라.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리니, 그 속에 운명을 넘어선 자유를 찾을지어다.”

재판장이 말을 마친 침묵 속에서 랜돌프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웃음은 점점 커져 박장대소가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웃으면서 숨이 차고, 배가 아파왔다.
마침내 랜돌프는 숨을 몰아쉬며 돌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 몸을 바로잡았다. 그는 손끝으로 눈물을 쓸어버리며 숨가쁘게 말했다.

“이 지독한 놈들…”

능지처참을 해버리고 싶은 그 지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노예사냥꾼에게 독을 먹여 꼭두각시로 이용해먹겠다는 그
발상은 얼마나 처절하도록 실용적인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라면 그게 누구든 그는 기꺼이 축복할 수 있었다.

어두워진 숲 위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삭월이 얇은 은조각이 되어 떴다. 숲속에서 불빛 하나가 움직이더니, 등잔을 든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로브 입은 마법사 혹은 약제사 하나가 쟁반에 받친 잔을 들고 공터로 나왔다. 그 뒤로는 갑옷 입은 엘프전사 둘이 따랐다.

행렬은 침묵하는 장로들의 원 안으로 들어와 랜돌프 앞에 섰다. 등잔을 든 수행원과 로브 입은 녀석이 그의 앞에 멈춰선 동안, 마시지 않으면 강제로
먹이려는 듯 두 전사는 그의 양옆에 자리잡고 섰다. 추상무늬를 정교하게 조각한 은잔 안에는 검은 액체가 희미하게
치직거리며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랜돌프는 잔을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희들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

그는 잔을 집어들고 쏟지 않게 조심하며 치켜들고 숲에 울리도록 목청을 높였다.

“노스탤지아에 건배다!”

그는 고개를 젖혀 잔을 입에 가져갔다. 머리 위의 삭월이 뿌리는 희미하지만 예리한 빛을 눈에 새기듯 올려다보는 동안
독은 뜨겁고 씁쓸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잔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내고 입가에 묻은 독까지 핥아낸 그는 엘프들에게 씩
웃어보였다.

더 말을 하려다가 그는 뭔가 왈칵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막았다. 내려다보자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어?”

이런 식으로 된 일이 아니라고 머릿속이 아우성을 쳤다. 카이론 두아스는 마시고 바로 발작하는 독이 아니었다. 그는 멀쩡히 일어서서
원래 있던 감방으로 안내받았었다. 그러나 그 지극히 논리적인 지적과 상관없이 날카롭고 차가운 고통이 등골을 통해 뱃속까지 깊게
찔러오더니, 이내 가시덩굴 같은 감촉으로 목을 휘감고 입과 코에 감겼다.

도저히 참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숲과 엘프들은 발작의 안개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아무도 도와주거나 반응하는 이 없이 그는
혼자였다. 몸에 점점 날카로운 가시를 뻗치는 통증만을 남기고…

소감

이번 편은 기본적으로 랜돌프의 인물 배경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로그에는 절대 없습니다. 난 로그 못 따라잡을 거야 아마(..) 나름 마음에 들게 나왔는데, 다른 분들은 어떨까 모르겠군요. 왠지 저는 마호가니 찬장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일단 이방인님과 삭풍님의 OK가 나왔으므로 공개합니다.

랜디라는 인물의 과거 행적이 좀 거식하다 보니 그 시점으로 쓰기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녀자 납치강간범(..)을 너무 긍정적으로 그려서 범죄에 대한 정당화가 되지 않나 하는 염려도 있고요. 그래서 더욱 랜디의 현재 상황은 죄값을 치른다는 걸 7화 내내 강조하려고 했고, 아직 소설은 거기까지 안 갔지만 랜디 자신도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실 재판에서 잘났다고 떠드는 것 자체도 양심의 가책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보면 아시타를 죽인 뒤 아라의 패악질이 떠오르기도 해서 역시 저것들은 동종혐오라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랜돌프 배경과 제일 다른 부분은 재판 대목입니다. 원래는 배경글에 나온 것처럼 배심원 재판으로 했는데, 삭풍님이 엘프 재판은 어떨까 장면 발상을 제안하셔서 그 제안을 골자로 고쳐써보았습니다. 삭풍님께 하소연(?)했듯 제가 중학교 때부터 톨킨광이었습니다만, 엘프는 (게이샤 에루후 말고 톨킨 엘프) 영 이해가 안 가는 족속이더군요. 그래서 그 이해 안 가는 점을 역이용해 기묘한 느낌을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쓰면서 제 생각은 대체로 뭐야 쟤네 완전 이상해(..) 열두 명으로 쓴 건 대충 적당한 수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배심원 수가 열두 명이라 원래 썼던 재판 장면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운명을 넘어서는 자유… 얘기는 엘프다운 이상한 대사기도 하고, 또 랜돌프의 형벌 뒤에 있는 흑막(?)에 대해 삭풍님과 이야기한 걸 반영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랜돌프의 꿈에 나온 대로라면 저런 복잡한 독약을 판결 나오자마다 뚝딱 대령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뭔가 조작의 스멜이? ㅋㅋ 또 뭐, 네 자유의지로 속죄를 해봐라 그런 말을 꼬아서 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으으 역시 엘프란 이상한 족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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