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7화 (3): 헤루모르로 가는 길

격추당한 전령의 임무를 대신 맡은 세 사람은 헤루모르까지 훨씬 먼 길을 가야 했죠. 길이 워낙 험해서 보통 고생이 아니었을 텐데,
다들 별 내색은 하지 않더라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려니 하고 있어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속에 날카로운 바위와 산이 맑은 하늘을 찔러 올라갔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히스 덤불을 군데군데 이고 있는
산도 더러 있었지만, 이곳은 새조차 거의 안 보이는 황량한 땅이었다. 원래 갔어야 할 크레이들 요새에서는 벌써 한참 남쪽으로
빗겨나 그들은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알프 연방에서 닦아놓은 골짜기 길을 벗어나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을 따라가야
했다.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하루에 한두 번쯤 머리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독수리, 몰려다니며 눈앞에 얼쩡거리는 날파리와 한 번은
그들을 보고 도망친 토끼 하나가 다였다. (토끼는 다크엘프가 활로 잡아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나마 샘과 개천이
많아 수통을 채우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여정이 길어지고 휴대용 식량이 바닥난다면 자체조달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랜디에게 심각한 것은 식량보다도 시간이었다. 엘프 기수놈의 임무를 떠맡은지 이틀, 크레이들 요새에서 하루쯤 남쪽 거리에서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시작인가…’

그는 얼굴이 굳으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동안 통증은 배에까지 손을 뻗어 위장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인데…’

다크엘프 여자가 그 빌어먹을 짐승을 바로 옆으로 몰아오자 그는 가뜩이나 힘겨운 상태에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한창 산고개를
넘어가는 중이었으므로 여기서 잘못 넘어졌다가는 저 아래 바위투성이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여자는 그걸 노렸을 지도
모른다.

“독 때문에 그러느냐?”

다크엘프 여자가 물었다.

“산이 싫어서 그래.”

그는 다크엘프를 쳐다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금씩 고통이 잦아들고는 있었지만, 아직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소매로 땀을 신경질적으로 훔쳤다. 이건 앞으로 며칠의 맛배기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왜, 높은 곳이 싫기라도?”

다크엘프는 눈썹을 살짝 쳐들며 미소지었다. 랜디가 고통스러운 것이 즐거운지 그녀는 오히려 이 높은 곳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개같은 드워프놈들.”

랜돌프는 욕을 하며 그 미소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딴 게 왜 좋지.”

“아직 안 죽지 않느냐.”

여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마치 신호기라도 한 듯, 희미해지나 싶었던 통증이 갑자기 갈고리 발톱처럼 머리를 헤집고 폐부를 잡아챘다. 고통에 숨을 못
쉬고 있지 않았더라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잠…깐… 쉬지.”

아픔의 첫 칼날이 지나간 후 그는 간신히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꾸 경련하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에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고통이 한 번 크게 솟아오르며 금방이라도 의식이 멀어질 듯 눈앞에 검은 점이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그 뒤끝에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귀기울이며 랜디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건드려 또 통증이 발작할까
두려웠다.

‘아편이라도 챙겨와서 씹을 걸 그랬나.’

“많이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지카리는 옆에 와서 짐을 내려놓고 앉았다.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시간이 없다.”

다크엘프 여자는 해가 중천을 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고 일어났다. 뒤처지는 것은 이전부터 참을 수가 없었다. 약하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으니까.

그런 그를 보다가 다크엘프 아라니아카는 가우르 안장에서 일어났다.

“타거라.”

“필요없어.”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쏘아보며 벌써부터 이를 드러내는 짐승에게 몸을 의지해서 짐이 되느니…

“두 발로 걸어서 못 따라갈 정도가 되면 그냥 죽는 게 낫다.”

그는 억지로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걸어갔다. 약하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에, 강하지 못하다면 강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강한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강했으니까. 빌어먹을 엘프 독과 무능한 노스탤지아놈들 때문에 잠깐 이럴 뿐이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랜돌프 에디우스는 약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편하기는 하겠다만.”

다크엘프는 그의 걸음을 쉽게 따라잡았다.

“죽기까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뒤쳐지지나 마라.”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난 제국력 590년산 와인을 마시며 죽을 계획이야. 아직 한참 남았다고 그러려면.”

랜디는 다소 무리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갔다. 옆에 솟은 암벽의 시원한 그늘에 들어서는 동안 바람은
마치 밀어주듯 그의 등뒤에서 불었다.

“허세부릴 힘이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모양입니다.”

바람을 타고 아라의, 그러니까 그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세 같은 소리 하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
뒤처질까보냐?

암벽에 한쪽 손을 대고 잠시 쉬고 있는데 (오직 잠시 쉬어서 더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옆에 시커먼 것이 휙 지나갔다. 어느새
검은 짐승을 타고 그를 지나친 다크엘프는 앞서가서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어서 따라와보거라, 다사케타.”

짐승조차 그를 비웃듯 노란 눈으로 돌아보더니, 놈과 그의 기수는 둘다 몸을 돌려 쏜살같이 멀어져갔다.

재수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랜디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위에 타오르는 태양과 끝도 없이 멀리까지 펼쳐진 황량한
바위투성이 풍경은 아직도 멀고 험한 길을 예고했다.

‘죽기까지 열하루인가.’

약해진 몸, 그리고 무자비하게 흐르는 시간과 싸우며 랜돌프는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걸어갔다. 어딘지 까마득한 빌어먹을
헤루모르를 향해.

소감

분량이 들쭉날쭉(..) 아아 랜디 괴롭히기는 재밌군요 (?) 로그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이런 부분이 어쩌면 가장 리플레이 소설답죠. 끝에 아라의 도발드립만 좀 추가. 긴장감 복선은 계속 이어가고 있고, 랜디라는 인물을 7화의 초점으로 삼으려고 독의 위험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야 헤루모르로 가는 거지만, 그걸 통해서 인물의 내면이라든지 이슈라든지 표현해보려고 말이죠. 과연 남에게도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하고 주변에게라도 재밌게 써보렵니다. 쉬운 작업이 아니라서 제가 재밌어도 될까말까한데, 저한테 재미가 없으면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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