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7화 (2): 예정이 어긋나다

제가 맡았던 임무는 보안규정이 아니더라도 크게 쓸 것이 없습니다. 거짓 정보에 속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함정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이지요.
마법사란 언제 봐도 대단해요.

“이쪽입니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섬광이 번쩍할 때마다 썩어 문드러진 채 울부짖는 수많은 얼굴이 보였다. 좀비가 포효하고
요원들이 서로 지시를 외치는 소음 위로 아스타틴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결 길이 좁아지니까 훨씬 쉽게 방어할 수 있어요. 통로를 막아내면서 기수들을 부르도록 해요.”

“그럽시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해 보이는 크세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뚫어볼까요.”

마법사가 눈을 감고 지팡이를 쳐드는 동안 아스타틴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봉을 들었다. 쉴새없이 터지던 섬광이 뜸해지자 좀비 몇몇이
접근했지만, 아스타틴이 휘두르는 봉에 연이어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자 그어어…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 크세노바가 든 지팡이 끝에는 빛의 구가 생겨났다. 그 빛을 곁눈으로 보고 아스타틴은 몸을 빙글 돌리며 비켜주는 순간 크세노바는 지팡이를 내지르듯 휘둘렀다. 구가 날아가면서 공기가 크게 일렁이더니, 다가오던 좀비가 뒤로 날려가 다른 좀비와 사지가 얽혀 진흙탕에 뒹굴었다. 그 틈으로
크세노바와 아스타틴은 동료들과 함께 달렸다.

갑자기 크세노바가 크게 비틀거리며 거의 쓰러질 뻔했다. 번개가 번쩍하는 빛 속에, 몸의 반이 타 없어진 채 진흙탕에 뒹구는 좀비가
그의 로브자락을 잡은 모습이 보였다.

아스타틴이 휙 돌아서며 좀비의 앙상한 손을 내리치는 순간 천둥이 하늘을 뒤흔들었고, 손가락이 부러진 좀비는 로브를 놓쳤다.

“어서요!”

좀비는 끼이이…하고 신음을 흘리며 기묘한 각도로 꺾인 손을 다시 내뻗었다. 그런 좀비를 역겹게 내려다보며 아스타틴은 크세노바의
팔을 잡아끌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그들은 안전의 가능성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비슷한 시간에 지카리씨와 다른 일행은 남부 난 엘모스 산맥으로 진입하고 있었을 거에요.

남부 난 엘모스 북서부 거점에 도착한 그들의 안내를 맡은 드워프는 복잡하게 꼬인 통로로 그들을 이끈 끝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벽으로 다가섰다.

“막다른 골목이잖아…?”

랜돌프가 중얼거리는 동안, 천장에 머리가 거의 닿은 지카리는 횃불을 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드워프가 바위벽에 손을 대고 중얼거리자 갑자기 문 모양의 윤곽이 벽에 빛나더니 그 모양 그대로 벽의 일부가 끼익… 열렸다. 동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쳐들자 아라는 손을 쳐들어 눈을 가렸다.

“여기가 가장 가까운 출구일세.”

안내원은 손을 뻗어 지카리가 내미는 횃불을 받아들고,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눈앞에는 깎아지른 듯 뻗어올라가는 암산이 가로막았고, 그 너머로 역시 험준한 산이 줄지어 저 멀리에서는 푸르게 흐려졌다. 아래로는
좁은 돌 턱 너머로 까마득한 골짜기가 입을 벌렸다. 아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짝 물러섰고, 랜돌프는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더럽게 황량하군….”

“길을 따라 내려가 아렌고원 방향으로 좀 걸어올라가면 크레이들이 보일 거야.”

드워프는 문밖으로 몸을 내밀며 가리켰다. 문앞의 턱은 암벽 중턱을 따라 쭉 이어져 사람 두셋 정도가 나란히 걸을 만한 길을 이루고
있었다.

“자, 여긴 선물일세.”

안내자는 그들에게 작은 맥주통을 안겨주었다. 지카리는 얼굴이 환해지며 통을 받아들었다.

“안내 고맙네, 작고 단단한 친구.”

지카리가 몸을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드워프의 뿔난 표정을 보고 아라는 헛기침을 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산의 전사여.”

그녀는 드워프에게 말했다.

“승리 속에 또 뵙기를 바라지요.”

표정이 풀어진 드워프는 나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산에 난 문은 잠시 윤곽이 빛나더니 감쪽같이 사라져 다시 아무것도
없는 암벽이 되었다.

길로 나왔다가 저 밑의 골짜기로 눈이 간 아라는 숨을 삼키며 아사나스의 등에 득달같이 올라탔다. 고삐를 꼭 잡은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가르릉거리며 몇 번 돌아보다가 가우르는 날카로운 바위 사이로 펄쩍펄쩍 뛰며 길을 달려내려갔다.

“ㄲ…!”

이를 악물어 비명을 참으며 아라는 고삐를 당겼다.

“저 녀석은 또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지.”

지카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랜돌프는 아라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 말에 지카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라는 간신히 실눈을
뜨며 더듬거렸다.

“누… 눈이 좀 부실 뿐이다.”

지카리는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종의 유머로 생각하면 되나…?”

“무슨 일 있나, 평소같지 않군.”

지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겁을 먹은 것 같아 보이는데…”

그 말에 아라가 항의하기도 전에 랜돌프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하니…”

그는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높은 곳이 싫으냐…?”

그 말에 아라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고, 가우르는 캬악- 이빨을 내보였다.

”…정답이군.”

랜돌프는 히죽 웃었다.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지카리는 턱을 쓸며 미소를 가렸다.

“조금 천천히 가지.”

“그 고양이 잘 다뤄라.”

랜돌프는 아사나스를 마주보다가 여전히 웃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난 나한테 덤비는 건 그냥 놔두지 않거든.”

아라는 그를 싸늘하게 보다가 일부러 그의 옆으로 아사나스를 바싹 몰아 머리에서 꼬리끝까지 스치며 지나갔다. 랜돌프는 가우르와
기수가 지나가며 던지는 눈빛을 마주 노려보았다. 침묵 속에 일행의 발걸음만 골짜기 벽에 가벼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정찰 목표를 향해 가던 길에 세 사람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서 경로를 바꿔야 했죠.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헤루모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결국 삶이란 의미없는 운과 우연에 덧없이 휘둘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거대한 의지나 은총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개입하는 것일까요?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악운이 닥쳐오는 것도 누군가의 뜻이겠지요.

암벽을 돌아 골짜기 바닥으로 내려온 셋은 산봉우리 너머로 모습을 나타낸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저 앞, 골짜기 벽을 이룬 깎아지른
암벽 꼭대기에는 투박하고 튼튼해 보이는 탑이 골짜기 전체를 굽어보았다.

“망루 지척까지는 접근할 수 있겠구나.”

바위에 몸을 숨긴 채 아라는 망루 밑에 골짜기 바닥을 가리켰다. 망루가 선 암벽이 골짜기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에 땅에는
날카로운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 있었고, 군데군데 난 솔처럼 거친 풀섶도 몸을 숨길 장소가 되어주었다.

“망루 밑을 통과한 다음에는 저 산자락을 돌아 지도에 표시된 동굴로 가도록 하자.”

그녀는 망루가 선 암벽 너머로 산자락이 골짜기에서 각도를 이루어 작은 계곡으로 갈라져나가는 지점을 가리켰다. 지카리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드워프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잠시 더 지켜보다가 다시 이동하도록 하세.”

“빡빡하겠는데…”

랜돌프는 망루를 노려보다가 허리의 단검을 점검했다.

“제압해야 할 지도 모른다.”

아라는 그를 보고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지도를 챙겨넣고, 아사나스와 나란히 바위 뒤에서 나섰다.

“조심해서 가보자.”

긴장한 침묵 속에 그들은 망루와 절벽의 그림자를 통해 이동했다. 멀리서 날카로운 새울음 말고는 주변에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망루의 모습이 백 보 앞쯤으로 다가왔을 때, 랜돌프가 손을 휙 들며 귀를 기울였다. 저 위의 망루에서 시끌시끌한 외침과 지시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굳어서 지켜보는 동안 병사들이 망루에서 달려나왔고, 망루 꼭대기에서는 총이 불을 뿜었다.

“이상한데…?”

랜돌프가 중얼거렸다. 병사들이 손으로 가리키고 총을 겨누는 방향은 그들이 있는 골짜기 바닥이 아닌, 건너편 암벽 위의 하늘이었다.

그순간 다시 그 날카로운 새울음이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서 들려왔다. 지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날카롭게 쉭쉭거렸다.

“그리폰!”

그들 위로 날개달린 그림자가 지나갔다. 사자의 몸을 한 그리폰은 독수리 머리로 고통과 공포의 소리를 내질렀고, 기수는 고삐와
안장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폰은 필사적으로 고도를 높이려고 했지만,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공중에 피를 흩뿌리면서
왼쪽 날개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망루에서는 환호성과 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나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그리폰이 일행에게 멀지
않은, 망루 그림자의 가장자리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랜돌프는 눈을 크게 떴다.

“뛰어!”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골짜기를 따라 달려갔다. 지카리도 그를 따라 뛰는 동안 아라는 아사나스의 등에 오르더니, 추락하는
그리폰을 향해 가우르를 달렸다.

“저게 뭐하는…!”

랜돌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돌아보자 지카리도 멈춰섰다. 아라는 그들을 향해 재촉하듯 크게 손을 젓고는 다른 손에 고삐를 모아잡고
그리폰을 향해 질주했다.

“끼에에에에엑—!!!”

그리폰이 땅에 충돌하며 주욱 미끄러지자 돌이 부서져 날았고, 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망루에서는 병사들이 내려오는 듯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가까워왔다.

먼지에 콜록거리며 아라는 그리폰 옆으로 튕겨나간 엘프 기수를 부축해 아사나스의 안장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폰은 끼리리릭… 부리를
벌리고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피투성이 기수를 향해 고개를 뻗었지만, 피를 흘리고 날개는 꺾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폰을 잠시 돌아보다가 아라는 엘프 뒤에 타고 아사나스를 돌려 지카리와 랜돌프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끼에엑- 하는 그리폰의
울부짖음이 그녀를 따라왔다.

“무슨 어울리지 않는 짓을…”

랜돌프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런 모습을 돌아보았다. 지카리가 돌아가려고 하자 랜돌프는 그의 팔을 잡았다.

“가지 마. 이틈에 빨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해.”

그들이 가끔 돌아보며 산자락 너머로 이동하는 사이 이제 차차 가라앉는 먼지구름 속에서 아라는 아사나스를 타고 암벽 그림자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축 늘어진 기수를 한쪽 팔로 안은 채 가우르를 달려 골짜기로 내려오는 병사들에게서 멀어졌다. 병사들이 요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리폰에게 몰려들었을 때쯤 아라와 아사나스는 기수를 데리고 산자락을 돌아 일단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워프들이 표시해준 산자락의 굽이 안쪽에는 이전에 산사태가 있었던 듯 돌과 흙이 쌓여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앞에서 랜돌프와
지카리가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는 아사나스에서 내려 엘프 기수의 등에 손을 대서 균형을 잡아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마치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랜돌프는 마음이 변한 듯 조용히 말했다.

“시선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서 이놈을 살펴보자.”

“여러… 여러분은…”

기수는 헐떡거리며 피투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힘을 아끼도록.”

아라가 말하며 아사나스의 고삐를 끌었다.

“우선은 움직이자고.”

랜돌프가 말했다.

경사를 따라 그들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탕- 하고 날카로운 총성이 등뒤의 골짜기에 울렸다. 병사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랜돌프가 신경쓰지 안고 걸어가는 동안 지카리는 무표정하게 산자락에 가리운 골짜기를 돌아보았고, 아라는 잠시 눈을 감고
서있다가 따라갔다. 아사나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돌과 흙투성이 경사가 산자락과 맞닿는 꼭대기, 서로 엇갈려 쓰러진 두 개의 석판에 거의 가려진 안쪽 그늘에 동굴 입구가 있었다.
안은 살짝 축축했지만 조용했다. 바닥에 아라가 망토를 깔고 지카리가 조심조심 엘프를 들어 눕히자 기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라가
초를 꺼내서 켜는 불빛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던 그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 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라는 엘프의 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붙은 옷을 랜돌프가 찢어내고 피를 대충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빛이 흔들렸다가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탈출했다고 전해다오, 랜돌프.”

랜돌프가 그녀를 흘깃 보자 촛불이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피가 솟는 상처를 누르고 허리띠
주머니에서 꺼낸 연고를 바르며 엘프어로 대충 그 거짓말을 전했다.

랜돌프의 지시에 지카리가 엘프를 천천히 일으켰다. 붕대를 감아 상처를 압박해주고 다시 눕히자 엘프는 한결 편해보였지만, 피묻은
손을 천에 닦으며 랜돌프는 아라와 지카리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신을 잃었던 듯했던 엘프가 조금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저… 전 틀렸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가 낮게 하는 말을 랜돌프가 중얼중얼 통역했다.

“세계수가… 어머니가 절 부르는 게 느껴집니다…”

“세계수…”

그 말에 아라가 표정이 누그러지는 동안, 기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허리띠에 단 주머니에 가져갔다. 그가 힘겨워하자 지카리가
주머니를 열더니 접은 종이를 하나 꺼냈다.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루모르…로 시급한…”

기수의 목소리는 자꾸 희미해졌다.

“그래서 지름길로…”

“헤루모르…?”

아라가 중얼거렸다.

“병신같은 수뇌부 자식들.”

랜돌프는 이를 부득 갈았다.

“하나하나가 중요할 때 겨우 문서 하나를 위해 이게 대체 무슨…”

엘프는 대답 없이 숨을 헉헉거렸다.

“엘…”

동굴 안의 차가운 공기가 움직이자 촛불이 흔들렸다. 그에 맞추어 엘프의 목소리도 자꾸 희미해졌다.

“혼자 남겨지면… 슬퍼할 텐ㄷ…”

목소리가 끊어지면서 그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몸을 숙여 잠시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랜돌프는 몸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아라는 기수의 눈을 감겨주었다.

“둘이 함께 저 창공을 날거라.”

“자연의 품에서 편히 쉬길 바라네.”

지카리의 눈빛은 차분했다. 그는 커다란 손을 잠시 기수의 움직이지 않는 가슴에 얹었다가 떼었다.

“이런 망할.”

지카리가 내려놓았던 문서를 랜돌프가 잡아챘다.

“그놈의 문서라는 게 대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구경이나 하자.”

“대부분 알 수 없더군.”

지카리는 기수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랜돌프에게 말했다.

“암호인 것 같네.”

“헤루모르… 시급…”

랜돌프는 깜박이는 촛불빛 속에 글씨를 눈으로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인가. 헤루모르에 전하는 거라고 했었지?”

“그러나 이제는 전할 이가 없구나.”

아라는 기수의 시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급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지카리의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나왔다.

“이제 우리가 완수해야겠지.”

“급한 것은 그쪽이니 그것이 옳겠지요.”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사나스를 타고 앞서서 가면 같이 가는 것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랜돌프를 쳐다보았다.

“그 동안에 둘이서 정찰을 완료하고 보고하면…”

아라의 말에 랜돌프는 눈쌀을 팍 찌푸렸다.

“저짝이 나고 싶냐?”

그는 엘프 기수의 시체를 가리켰다.

“간다면 셋이 같이 간다. 젠장, 중요한 일이 아니기만 해봐.”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그 말이 옳네, 아라니아카. 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늦어지는 것이 나아.”

랜돌프를 쏘아보다가 아라는 지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스름 속에서 랜돌프는 자신의 손을 불안하게
내려다보았다.

“미치겠군.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데…”

뭔가 생각이 난 듯 그는 엘프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라는 순간 입을 꼭 다물었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대검과 활 외에 개인 소지품인 듯한 목걸이와 반지, 돈 몇 골드를 발견하고 더 나오는 것이 없자 랜돌프는 짜증스러운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왜 그러느냐?”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가자.”

그는 몸을 돌려 동굴 입구로 빠져나갔다. 아라는 그가 가는 것을 잠시 보다가 목걸이와 돈을 챙겨 손수건에 싼 후 아사나스의 안장
주머니에 넣었다.

“유족에게 전해줘야겠구나.”

엘프의 시신 밑에서 피투성이 망토를 빼낸 그녀는 그의 얼굴과 몸을 덮어준 후 양초를 들고 일어섰다. 지카리가 나가는 동안 그녀는
입구에 서서 기수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아사나스를 불러 내보낸 후 그녀가 양초를 불어 끄자 동굴은 입구로 흘러드는 희미한
햇살 말고는 어둠에 잠겼다.

산자락을 돌아서 골짜기를 내다보자 인간 병사들이 말을 동원해 그리폰의 시체를 끌고가는 모습이 보였다. 피와 깃털이 엉긴 흔적이 그
뒤에 길게 남았다.

“저것으로 뭘 하려는 것 같나?”

지카리의 속삭임에 랜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근사한 장식이 되겠지.”

“박제해서 전시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며 아라는 말했다.

“저것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중얼거리며 지카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폰을 끌고가고 자기들끼리 승리를 자축하느라 인간병사들이 골짜기 길을 비운 사이 일행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을
잠시 스쳐간 기수와 그리폰의 마지막 비행을 따라, 헤루모르를 향해.

“여기까지 사흘… 헤루모르까지 다시 사흘인가…”

남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랜돌프는 중얼거렸다.

“제기랄.”

소감

7화는 제노님과 오체스님이 빠졌던지라 아스타틴과 크세노바도 뭐 했다고 시위하려고(..) 두 사람 장면을 써보았습니다. 마법 효과를 정정해주시고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도 제안해주신 제노님께 감사드립니다.

외곽 망루 밑에서 벌어지는 모험은 로그를 꽤 충실하게 따라가지만, 역시 조금씩 재구성과 압축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엘프 기수 줍는 진행이 아니었다고 삭풍님이 그러셨는데, 아라의 돌발행동 때문에 그야말로 예정이 어긋났습니다. 아라는 기수가 혹시 생포당해서 보안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편에 있는데 인간에게 포로로 잡힌다는 생각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반면 냉혹이나 차별주의 (엘프) 같은 단점 RP는 잘 안 된 면이 있지만, 함께 위험을 겪는 순간이라 그랬다고 변명해보렵니다.

아라의 고소기피증 (-1짜리 버릇)이 드러나는 장면 등을 통해 아라와 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보았고요. 헤루모르에서 그 긴장감이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해소가 되니까 복선을 듬뿍 넣어보았습니다. 그 외에 그리폰이나 치유 묘사 같은 부분이 쓰기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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