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외전 – 그들만의 게임

잿빛 메타포노비아의 아시타와 아스타틴 대화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아시타 시점은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했는데 거짓말이었..(..?) 나중에는 시간 순서대로 정리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별문으로 올리겠습니다.

내용상 주의사항: 여성 동성애 암시 (과연 암시만?), 폭력과 죽음.

메타포노비아의 잿빛 대지 위에는 잿빛 새벽이 밝아왔다. 그 속에 하품을 하며 아시타는 숙소 밖으로 나섰다. 동료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서늘한 새벽 바람 속에 서자, 오른쪽의 동녘에서 시작해 정면의 남쪽 하늘까지 희미한 홍조를 띈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 다크엘프의 수도 외곽 정착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나는 이들, 아마도 가축 먹이를 주거나 밭에 나가는 사람들이 어스름 속에 그림자처럼 움직여가는 모습이 띄엄띄엄 보였다.

문앞에 기다리는 다크엘프 전사들은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인 것이, 인간 튀기 따위를 그들의 지도자 프리야 마타 앞에 데려가려고 잠을 설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시타는 일부러 더 밝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과장스레 허리숙여 인사했다.

“세계수의 그늘 속에서 축복받은 아침입니다, 용감한 전사들이여.”

인간 혼혈이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실에 놀랐다면 그 사실을 들키기에는 자존심이 강하거나 졸린 모양이었다. 창을 든 오른쪽 전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질 뿐, 검을 찬 왼쪽 전사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프리야 마타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일시적이었지만 그들에게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집에 그들을 여주인으로 모시는 남편이 적어도 한둘은 있을 터이고, 한 번도 남자를 동격으로 생각해본 적 없을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남자인데다가 원래는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 죽었어야 할 혼혈인 그가…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분명 작고 날카로운 쾌감이었다. 동맹과 사절의 특권이란, 그리고 인간들의 침탈과 노스탤지아의 존재는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을 상황을,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다.

오른편의 전사는 신발 바닥에 묻은 더러운 것을 보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 절도있게 돌아서더니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잠이 부족했는지 갑자기 피곤했다.

그들은 텅 빈 노스탤지아 연락기지 마당을 가로질러 메타포노비아 남문으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에 목책을 두른 도시의 모습은 정면에 압도해 왔다. 특별히 번영하거나 호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지만, 메타포노비아에는 그런 외형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안에 새끼가 바들바들 떠는 굴을 지키는 암여우처럼, 구석에 몰리면 어떤 제어나 한도도 없이 행사할 폭력과 결코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이.

아아, 여자들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또 새끼 지키는 암컷이 뭐냐. 하지만 정말로 이곳 다크엘프, 그의 아버지를 낳은 민족의 힘은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의 것이었다. 무겁지 않고 예리했고, 무차별적이지는 않았지만 포기를 몰랐다. 어떤 비하하는 의미도 없이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 이곳은 암컷의 도시였다. 그렇기에 시야 가장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보다 빨리 움직이며 단어의 억양 하나, 떨리는 속눈썹의 그림자 하나에 확확 달라지는 이곳의 숨막히는 정치는 그에게 애당초 불리한 그녀들만의 게임이었다.

호위 내지 감시병을 따라 남쪽 문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문득 세계수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남쪽에 있는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에서는 도시의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머니의 폐허를. 아마도 연락기지의 배치는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경비하는 전사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서 세계수를 지켜본 것에 그는 자부심과 다시 유치하고 약간 악의어린 기쁨을 느꼈다.

해뜨기 전의 잿빛 그늘이 무겁게 내린 메타포노비아의 거리를 걸으며 그는 이 길의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생각했다. 원래 프리야 마타는 다크엘프 최고 군사지도자인 라카’쟈나인을 이을 후계자였지만, 현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는 라카’쟈나인이 공석인 상태에서 벌써 근 30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전대 라카’쟈나인인 이샬헤브라의 복수를 하기 전에는 취임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얻은 종교적 정당성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에 힘입어 다크엘프 부족들에게 유례없는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노스탤지아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흔히 번역해서 라카’쟈나인은 ‘여왕’, 프리야 마타는 ‘공주’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샤나에리스야말로 다크엘프 최초의 여왕이었다. 프리야 마타는 물론이고 어떤 라카’쟈나인도 자긍심 강하고 뻣뻣한, 각자가 자기 집과 부족의 주인인 부족장들에게 이리도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노스탤지아의 지도부에 보고할 때마다 본 그녀였지만, 그녀의 본거지인 메타포노비아에서 다른 지도부 없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족의 여왕으로서의 그녀를.

라카’쟈나인의 집이자 지금은 공식적으로 주인 없는 궁, 하타라야로 가는 길은 문에서부터 똑바로 가는 대로가 아니었다. 종종 굽어지고 꺾이는, 불과 수레 두세 대 정도가 나란히 지날 만한 길은 요소요소마다 방어군이 엄호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끼고 돌았다. 올려다보면 종종 목책 위의 거점에서 뚜렷한 사선이 확보되어 있었다. 삼면에 강력한 세력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드워프족은 모두 우방이었고, 엘프들은 파괴당한 세계수를 마주할 수 없어서라도 이곳에까지 올 일은 없을 텐데 왜…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침묵하는 두 전사와 걸음을 옮기면서 아시타는 하타라야로 가는 길이 어떤 공격군을 경계하는지 문득 깨달았다. 내부의 경쟁자. 다른 부족장과 전사들, 하나같이 자신의 집과 부족의 주인인 저 자존심 드높은 쟈나인–여인, 여주인, 여왕, 그들의 언어에는 구분이 없었다–들이 라카’쟈나인의 한 발짝 뒤에서 끝없이 계책을 세우고 지켜보고 기다리고, 때로 움직이는 한 이곳 허무의 대지에 진정한 여왕이 설 수 있을까.

심지어 그들의 그림자 여왕인 샤나에리스마저도 다스리되 군림할 수는 없었다. 하타라야의 접견실에 온전히 그의 편이 있다면 바로 프리야 마타 자신이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지지하는 사안이라 해도 족장들은 정식으로 통합 부족회의 안건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를 올리고 노스탤지아의 요청을 정식 안건으로 내놓는 역할을 맡은 행운아가 바로 아시타 자신이었다. 뭐 실은 전령단 전체였지만, 동료들은 연락 기지에 두고 왔으니 이제는 혼자의 몫이었다.

정신나간 녀석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임무일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계율과 관습상 자신 같은 하프다크엘프는 보자마자 죽여버리는 사회에 호기심이 동해 닥치는 대로 공부할 정도로 미쳤다거나, 세계수를 한 번 보고싶어 이런 임무에 자원할 정도로 무모한 녀석이라면… 그런 바보라면 다크엘프 부족장이 모인 자리에 나가 군 통수권을 이양하라고 요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의 끝에는 허무의 대지치고는 꽤나 높은 하타라야가 버티고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타는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타라야는 드워프 건축가가 보면 수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그 무자비하도록 실용적인 선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1층은 돌, 2층은 나무로 지은 큰 집은 별다른 장식이나 편안함 없이 여기저기 굴뚝과 탑이 솟아나왔고, 유리가 없는 좁은 창문이 경계하는 눈처럼 거리를 내다보았다. 전사들을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이곳 특유의 사나워보이는 닭 몇 마리가 꼭꼭거리며 발앞에 흩어졌다. 주 건물 양옆으로는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앞에 얼쩡거리는 전사들과 가우르, 남자와 아이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두 호위전사는 하타라야 정문을 비껴나 왼편 벽에 난 문으로 그를 데려갔다. 문에 접근하면서 그는 문앞에서 여인들이 뭔가 낮게 얘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그와 말없는 호위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단숨에 그 눈빛이 적의가 되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들의 시선에는 적의를 넘어 살의의 싸늘함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허리로 갔다가 아시타는 하타라야 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주의사항대로 방에 놓고왔다는 것을 기억했다. 이론적으로 그의 안전은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두 전사가 책임지게 되어 있었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을 어쩌랴. 게다가 더욱 살떨리게도, 비교적 고급 옷이나 무장으로 보아서는 부족장 혹은 비슷한 급인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차고 있었다. 아시타는 벌거벗은 듯 무방비가 된 기분이었다.

벌거벗은 생각 하니, 여인들 중 셋은 나이가 좀 지긋했지만 둘은 제법 젊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고위 전사들은 그를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인사하며 한 명씩 문으로 들어갔다. 그 중 하나는 어깨에 활을 멘 궁수였는데… 어라?

“니아?”

순간 너무 반갑고 의외여서 그랬을까,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이름부터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키였지만 당당하게 치켜든 턱과 냉랭한 눈빛에는 그를 굽어보는 것 같은 당당함이 있었다. 그 눈빛은 그를, 모든 접근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입을 살짝 벌렸다. 눈이 마주친 찰나 그는 다시금 마법사의 불타는 실험실에서 오르는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았고, 밤하늘 아래 실험실의 잔해에서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고 있었다. 품안의 죽은 아이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않는, 생존에는 관심도 없는 그 노예 여인을 붙들고 아시타는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었다. 나중에 탈출하는 행렬에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복을 빌어주었었는데…

그런데 이 여인은 임페리얼에서 탈출하는 길에 그에게 즐겁게 재잘거리고, 때로는 죽은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훌쩍훌쩍 울던 그 아이같던 여인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은 전사 귀족의 얼굴을 한 그녀는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들 니아… 혹은… 어쨌든 그 다크엘프 전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것이 아시타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왜 생각없이 그렇게 부른 걸까. 더듬거리며 막 사과하려는 그에게서 돌아서며 니아는 주변의 전사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이 자를 아느냐?”

나이 지긋한,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아마도 니아의 어머니인 여인이 말했다.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잠시 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자 니아의 어머니는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그녀는 딸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들어가서 기다리마.”

마주보는 모녀 사이에는 뭔가 말없는 대화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도 엿들을 수도 없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가깝고 긴 연(聯)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대화. 소속도 없고 가족도 없는 그에게 그 침묵의 대화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얘기하던 사람들이 하타라야의 옆문으로 들어간 후에 여인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가 손을 저어보이자 두 호위전사는 즉시 허리를 숙여보이고 물러났다.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원치 않는 목숨을 구제받았던 니아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분명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지금 이곳에서 떠나라.”

“예?”

아시타는 당황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하타라야의 문지방까지 와서 돌아가라고?

“목숨을 구해준 것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적대감도, 웃음기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이곳을 떠나. 하타라야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시타도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을 두고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고운 먼지를 품고 부는 바람처럼, 도시의 지붕 위로 비쳐오는 햇살처럼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그가 뭔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 호위전사가 아니면 무기는 소지할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모두가 달려들어 맨손으로 죽이려 드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그전에 프리야 마타의 호위병이 먼저 반응할 것이 틀림없는데.

질문은 끝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한 말만으로도 넘치도록 말했으리라. 남자이고 외부인인 그에게 전사인 그녀가 명령 외에 어떤 이유를 제시하거나 설명할 필요를 느낄 리 없었다. 드물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만으로 이미 의무는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궁수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신분과 종족, 역사의 간극은 너무나 멀어서 서로 보이지도 않았고, 서로 들리지도 않았다.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경고, 아니 명령에 따른다면
영원히 그러리라.

“거절하겠습니다.”

니아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아시타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남녀 사이의 설렘과는 또 다른, 아니 그보다 한결 강렬한 열망,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던 눈에 하나의 개체로 투사된 그 인지의 순간에…

“…뭐?”

“임무를 띠고 온 사절로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그 시선을 마주치며 아시타는 조용히 말했다.

“사절로서 제 신변은 프리야 마타께 보장받았으므로 지금 와서 임무를 포기하는 것은 프리야 마타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그녀의 시선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니아는 휙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 섰다.

“바보같은 놈.”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격렬했다.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냐?”

이제야 나오는가. 더는 돌려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고 이유를 말하는 그녀를 보며 다시 아시타는 날카롭고 다소 잔인한 승리감을 느꼈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래, 날 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목숨을 걸 만한 신념이, 의지가, 열망이 있는 ‘나’를. 숙소에 두고 온 루카와 미리엘과 아스타틴을, 노예들의 하얀 뼈가 가득한 광산을, 엘프 숲이 있던
불탄 폐허를, 너무나 원통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던 눈앞의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시선을 가린 장막을 모두 잡아뜯고 서로 똑바로 마주볼 수만 있다면.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한 니아는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마치 겁을 먹은 듯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는 등을 돌려버렸다.

“나는 경고했다, 마이레야카.(주:다크엘프어로 ‘혼혈’)”

“제 이름은 아시타입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냥 여느 사내, 여느 튀기가 되지는 않으리라. 자신을 무심히 지나가는 시선의 무심한 폭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그를 흘깃 돌아보는 니아의 눈빛에는 싸늘한 분노가 어렸다. 다시 한 번 둘 사이에는 무거운 장막이 드리웠고,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는 까마득히 멀었다. 그녀는 육중한 문을 지나 들어갔다.

“가십시다.”

아시타는 호위 전사들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가 통과해야만 하는 눈앞의 문에만 향했다.

“프리야 마타를 기다리시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뱀이 혀를 내밀어 냄새를 맡듯 아시타는 홀 안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혼란과 분노, 오래 묵은 적개감과 반목의 냄새가 났다. 그의 보고는 에미넴 숲을 잠식하는 록윌 요새, 남부 난 엘모스를 압박하는 크레이들 요새, 대륙 동부에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제국과 그나마 운신의 여지가 있었던 서부에마저 내륙으로 치고 들어오는 십자군의 존재라는 대륙의 전황 전체를 포괄했다. 홀의 양옆에 부족별로 모여앉은 전사들은 귀를 기울이고, 토론하고 반박하고, 이익을 저울질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막간에, 전사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고 협상하고 공모하며 웅성거리는 동안 아시타는 단상의 발치 자리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원래는 사절단 전체가 할 보고를 혼자 하다 보니 보고를 마치고서야 쉴 틈이 났다. 돌아가면 아스타틴 녀석을 못살게 굴어서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하인이 내어온 차를 마셨다.

많은 낯선 얼굴을 멀리서 살피며, 이 거대한 연극의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관객이 된 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의견을 내고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짐작하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낯선 얼굴 사이에 낯익은 얼굴 하나에 시선이 갔다가 가슴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한기를 느꼈다.

“저기 잠시…”

그는 일어서서 옆에 무료하게 선 호위전사 중 창을 든 쪽, 동료가 ‘아루나’라고 부른 전사에게 말했다.

“저… 분은 어째서 무기가 있는 것입니까?”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시선으로 따라갔다가 아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

아라니아카…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던가. 마하스트린이라면 분명 대궁 (大弓)이라는 뜻, 다크엘프 중에서도 최상 수준에 드는 궁수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는 아까 입구에서 얘기할 때 보았던 활을 이 안에서도 당당하게 메고 있었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프리야 마타의 친우이시다.”

아루나의 동료가 뭐라고 말하자 (아시타가 알아듣기에는 낮고 빨랐다) 두 전사는 갑자기 자기들끼리 깔깔거렸다. 그런 웃음이라면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남녀가 부쩍 둘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아니면 서둘러 결혼한 신부의 배가 벌써부터 얼마나 불러오는지 얘기할 때면 어디서나 터뜨리는 그런 웃음. 그 웃음을 듣는 순간 아시타는 니아가, 아니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가 어떤 류의 친우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지도.

어머니와 얘기하던 아라니아카는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회의장의 인파 너머로 마주친 그녀의 고요하고 냉정한 시선 속에서 아시타는 자신의 죽음을 읽었다. 활이라면, 그리고 마하스트린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한 실력이라면 프리야 마타의 전사들이 개입하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궁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더니 마침 다가온 다른 전사와 이야기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떤 부인이나 변명도 없던 그녀의 눈빛은 분명 도전이었다.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뚫어져라 보며 아시타는 입안이 말라왔다.

그녀가 던진 선택은 세 가지였다. 통수권 이양이 안건으로 나오기 전에 나갈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이며 연인인 라카’마의 무장해제나 감시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떠나버린다면 통수권 이양이라는 안건은 꺼내기 전부터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외지인이었지만 이것은 어디를 가나 뻔한 일이었다. 노스탤지아에서 제시하는 안건인데 정작 노스탤지아 사절이 없어서야 어떻게 반대의견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를 암살자로 의심한다는 뜻을 내비친다면…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샤나에리스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고 포로가 되어 노예살이를 했었다. (이 빌어먹을 바보놈! 탈출노예 행렬 속의 니아가 그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던가.) 그런 의자매를 공개적으로 의심하는 언행을 했다가는 통수권 이양 반대파뿐 아니라 찬성파까지 마음이 멀어질 것이다. 차라리 등에 표적을 그리고 말지.

세 번째 선택은 예정대로 통수권 이양 안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등에 화살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을 알면서, 좀전에 잘난 듯 떠들어댔듯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다. 귓가에 심장박동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정숙해 주십시오.”

의전 책임자인, 화상 흉터 투성이에 한쪽 다리를 저는 나이 지긋한 전사가 단상 발치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타는 절박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벌써 안건을 제시할 시간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제기랄,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이든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삶은 갑자기 가슴이 저리도록 소중했다.

전사들이 자리에 앉고 의전 책임자가 회의 순서를 알리는 동안 아시타는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끓는 나머지 오히려 백짓장이 된 것 같았다. 나가거나 아라니아카에게 주의를 돌릴 시간은 시시각각 바닥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어떻게…

“..시오?”

문득 말의 마지막을 듣고 고개를 들자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 말한 기색으로 의전 책임자는 애써 참을성 있게 말했다.

“노스탤지아에서 온 사절은 제시할 안건이 있으시오?”

그가 천천히 일어서는 동안 회의장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제시할 안건, 안건이 무엇이었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고 도망갈까 그는 생각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미친 여자친구나 좀 챙기시라고 할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그가 할 선택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책무를 그런 식으로 버리려고 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단상 꼭대기의 텅 빈 의자, 라카’쟈나인의 빈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낮추자 단상 앞에 앉은 프리야 마타 샤나에리스의 엄격하고 각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표정 없이 마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어떤 열망이 있었다. 그와 같은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로서는 흉내밖에 낼 수 없는 헌신이.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보고 중에, 그리고 그 전후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이 임무에 자원했다고 하자 걱정하는 기색이면서도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이 여인의 시선 속에서만은 그는 명령하고 하대할 남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튀기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였다. 비록 위치는 한없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들은 동지 (同志),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회의장의 수많은 시선, 각자의 목적과 편견과 과거의 바다 속에서 그는 오직 프리야 마타의 시선만을 붙들었다. 등뒤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여인은 돌아보지 않고, 지금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전황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스탤지아에서는 존경하는 프리야 마타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용감하신 전사 여러분께…”

그는 반쯤 몸을 돌려 회의장 전체를 시선으로 훑었다. 아마 친척들 사이에 있을 아라니아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프리야 마타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서 힘을 얻으며.

“부족 연합 전사대의 통수권을 노스탤지아의 휘하에 통합할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기다리던 것이 오자 회의장에 모인 사람 전원이 한꺼번에 한숨을 내쉰 것처럼 공기가 풀리면서 동시에 변했다. 전사들의 낮은 웅성거림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심각하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서로 격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소란 중에 아시타는 아라니아카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야 마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 고요가 회의장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한 번 아시타는 이 고집센 민족에 대한 그녀의 통솔력에 감탄했다.

“앉으십시오, 자매들이여.”

샤나에리스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앉아서 차례대로 발언해도 늦지 않습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이미 찬성하시는 것 아닙니까!”

얼굴에 길게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이 단상 앞으로 나섰다.

“당신의 전사들을 빼앗아가려는 인간들의 음모에 속으신 것입니까!”

그녀가 너무 가까워오자 아루나의 동료 전사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아시타는 그녀가 어딘가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그는 작은 움직임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한 발짝 나서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와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얼굴에 흉터가 난 젊은 여인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했다. 문 앞에 아라니아카와 그녀의 친족들과 함께 서있었고, 그와 니아의 대화를 막으려고 했던 전사. 그녀가 시선을 끌어주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있었다.

“아라!!”

비명에 가까운 샤나에리스의 외침이 회의장의 공기를 갈랐다. 아시타가 몸을 옆으로 던지는 동시에 아루나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찰나 속, 날아오는 화살 너머로 마주친 아라니아카의 눈빛은 구석에 몰린 듯 사나웠고. 그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피하려고 막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뭔가 가슴을 세차게 때리자 아시타는 뒤로 비틀 물러났다. 옆에서 아루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내려다보자 가슴에 박힌 화살대가 눈에 들어왔다. 화살을 인식하는 것이 신호이기라도 했는지 가슴에 타는 듯한 통증이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나왔다. 후벼파는 듯한 기침의 고통 때문에 눈앞에 하얀 반점이 반짝이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나의 승리입니다, 니아.’

고통의 안개 너머로 그는 눈을 들어 아라니아카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멍한 채로 마치 이끌린 듯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의 규칙대로 나를 판에 올려놓고 이겼습니다. 인정하지요?’

다시 기침 때문에 눈앞이 하얘졌다.

‘나를… 인정하지요?’

다시 시각이 돌아왔을 때는 저 위에 천장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호흡이 가릉거리면서 입안에는 찝찔한 쇠맛이 가득했고, 숨쉬기가 점점 힘겨웠다.

“괜찮을 것이다, 아시타.”

그의 손을 잡아준 손길은 강인하고 따뜻했다.

“조금만 참거라.”

그는 힘없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중얼거렸고, 잠시 가슴속에 온기가 피어났지만 이내 통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왈칵… 다시 쇠맛이 올라오자 누군가 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었다. 바닥 위로 퍼지는 선혈을 보고 그는 피에 익사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막상 자신에게 벌어지니 실감이 날 리 없었다.

이렇게 끝인가. 뭔가 기도나 참회라도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딱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맡기고 간다, 루카, 아스타틴, 모두들. 난 여기까지니까 제발 개죽음만은 되지 않게 해줘. 대단한 척 목숨을 걸겠다고 떠든 일이니까, 다들 안심하고 좀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대단한 바람도 아니잖아?

가슴이 빠개질 듯 아파오자 그는 몸을 뒤틀며 피가 그륵거리는 소리를 질렀다. 죽어가는 육체 속에서도 정신은 묘하게 평온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다가 끊어지는 세계수의 부서진 검은 윤곽을 떠올렸다. 한때는 하늘을 가득 뒤덮었을 그 푸르른 생명력의 잔해를…

“마람… 에르 다라…(주:나무들의 어머니, 세계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가족도 종족도 없이 떠도는 그에게도 세계를 낳은 어머니의 품에 안길 자격이 있다면. 가로막은 거리와 장벽을 넘어 다가갈 수만 있었더라면 시리도록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눈을 감은 기억은 없는데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 절대적인 평화에 그의 의식은 천천히 침잠했고, 모든 차이를 지워주는 너그러운 어둠 속에는 어떤 장막도 없었다.

쓰러진 사절이 잠잠해진 후, 샤나에리스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는 평생을 곁에서 모신 라하드마저 움찔했다. 사절의 피가 옷과 손에 튄 샤나에리스의 앞을 전사들은 소리없이 비켜주었다.

아라니아카에게 무기를 겨눈 채 포위한 호위전사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 샤나에리스는 의자매 앞에 섰다. 둘이 말없이 서로 마주보는 동안 방안의 침묵에 아주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샤나에리스의 손이 휙 올라갔다. 누군가 놀라서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아라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샤나에리스가 아라의 얼굴을 후려치자 철썩 소리가 회의장 구석까지 울렸다. 고개를 돌린 채 아라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의자매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랬지?”

프리야 마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만큼이나 깊은 비탄에 갈라졌다.

“왜 그랬느냐, 아라!”

“의자매의 안위를 염려함이었습니다.”

아라니아카는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목소리는 작고 또렷했고, 눈빛은 맑았다.

“근래 인간과 인간 잡종이 프리야 마타 곁에 빈번히 왕래하며 무례한 요구까지 하니, 프리야 마타께 위해를 가하지나 않을까 저어하였습니다.”

전사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녀의 답변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샤나에리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내가 널 어찌하면 좋겠느냐?”

프리야 마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박했다.

“뜻하는 대로 하소서.”

아라는 평온히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라의 목숨은 프리야 마타의 것이었습니다.”

괴롭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샤나에리스는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마하스트린을 구금하도록.”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선 바이두르야 전사들 사이에서 라스카야가 한 발짝 나서자 샤나에리스는 아라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처분은 이후에 결정합니다, 족장이여. 물론 그전에 부족에 먼저 통보하고 불복할 기회도 드리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족장은 다시 물러났다. 전사들에 둘러싸여 나가는 딸을 보는 시선은 안타까웠지만, 표정은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나가다가 아라니아카는 문득 단상 앞에 쓰러진 혼혈 사절을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피투성이 바닥에서 시신을 들어올려 들것에 싣는 모습을 그녀는 홀린 듯 지켜보다가, 뒤에서 인솔하는 전사가 어깨를 가볍게 밀자 그제서야 기억이 난 듯 걸음을 옮겼다. 다른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삼삼오오 회의장을 떠나, 먼지바람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황량한 땅 위에 길게 드리운 세계수의 그늘 속으로 나섰다.

덧: 시점 인물이 죽는 건 이전에 썼다가 묵혀둔 습작 이후 처음인 것 같군요. 다크엘프 정치에 대한 아시타의 생각은 어슐라 르귄 할머니의 ‘어둠의 왼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미묘한 시프그레서 정치에 주인공 겐리가 답답함을 느끼던 부분 말이죠. 뭐 결국 결론은 아시타 안습이라는 것… 원래 괜찮은 녀석들이 괜히 나서다 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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