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과 석양의 도시] 가지 않은 길

다시 기다림의 땅 이야기입니다. (죽은 것들이 말이 많아…) 내용은 12화 그 지독한 굴레 끝에 기다림의 땅 대목에서 바로 이어지며, 게임의 규칙 속편이기도 합니다.

청년은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걸어간다. 안개는 가끔 나무 하나, 언덕 자락 하나를 드러내며 갈라졌다가 이내 그 정경들을 다시 덮는다. 끝없이 움직이는 그 안개의 너울 속에서 기다림의 땅은 알 수 없는 미지로 남지만, 가끔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는 청년은 가는 길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어느 순간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저 앞에서 안개가 갈라지면서 어렴풋한 형체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풀 위에 치맛자락을 사락거리며 걷던 여인은 안개 사이로 나타난 그를 보고 멈춰선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환영하러 달려와줄 줄은 몰랐네.”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무감정하다.

“내가 환영한다고 했던가?”

여자는 두 걸음 앞으로 내딛어 그의 얼굴을 감싸고 끌어내려 입술에 가볍게 입맞춘다. 그녀가 그를 놓으며 한 발짝 물러서자 남자는 마치 잡으려는 듯 순간 손을 내밀었다가 떨군다. 천체의 운행만큼이나 오랜 춤.

“그 정도면 괜찮은 환영인사 같아.”

미소짓는 여인을 보며 청년은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왜 벌써 왔어?”

두 사람 사이로 안개는 바람 없는 공기중에 몰려들다가 밀려난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웃음기가 없다.

“나… 마지막에는 완전히 어두웠거든.”

그녀가 맑은 녹색 눈에 잠시 손을 가져가자 남자는 고통스럽게 이를 악문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이 평생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했어. 정말 할일을 다한 것처럼.”

“할일이 뭔데. 폐하께 복수하는 것? 제국을 피바다로 만드는 것?”

언성을 높이는 남자를 보고 여자는 어깨를 으쓱한다.

“같은 반역자로서 할 얘기가 아니잖아? 물론 나와는 반대의 결과를 위해서였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

그녀의 눈빛은 비웃음으로 반짝인다.

“당신이 하늘처럼 받든 그 평생의 친우마저 말야.”

그 말에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누구한테 설교할 입장도 아니고.”

“항상 궁금했어…”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당신은 왜 그랬어?”

청년은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리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팔을 내민다.

“잠시 좀 걸을까?”

“별로 경치가 좋은 곳은 아닌데.”

말하면서도 여인은 그의 팔짱을 끼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소리없이 바람이 불면서 안개가 조금씩 걷힌다. 그러면서 드러난 나무와 바위 사이로 그들은 걸음을 옮긴다. 조용한 정경 속에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마침내 어렵게 입을 연다.

“너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면 믿겠어?”

여자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왜 그래? 거짓말이 그렇게 서툰 사람은 아니었잖아,”

“아아, 역시.”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믿어달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운 얘기였나.”

“당연하잖아.”

여자의 입술은 유려하게 미소짓고 있지만, 눈가에는 고통이 어린다.

구릉 정상에 도착하자 남자는 평평한 바위를 손으로 가리키고, 여자는 그의 에스코트대로 그 위에 앉는다. 눈앞에는 해가 없는 땅의 언덕과 시내, 평원과 숲이 펼쳐진다. 그녀 앞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는 입을 연다.

“내가 도저히 전쟁을 치를 수 없었던 이유는 네가 맞아. 아니면 어쩌면 나 때문에.”

“반란이라니, 꽃이나 보석보다는 재미있는 선물이네.”

여자는 작게 코웃음을 친다.

“도대체 왜?”

“너와…”

그는 해가 없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다.

“네 아이와, 남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여인은 할말을 잊는 일이 잦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지만, 지금은 침묵하고 있다. 남자는 말을 잇는다.

“전쟁을 했다면 그는 전쟁에 나갔겠지.”

그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어느 전장이 가장 위험할지, 어떻게 하면 군단장이 죽을 만한지 나는 뇌리 한켠에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전쟁을 했다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전쟁을 하기 전에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왜 그런…”

“그렇게 했더라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녀를 돌아본다.

“나는 주군께 충성하는 신하일 수도 없었고, 친구라고도, 오빠라고도 불릴 자격이 없었다. 제국이 어떻든… ‘나’는 전쟁을 치를 수가 없었어.”

“믿지 못할 얘기라는 게 맞네.”

여자는 실소를 터뜨린다.

“나나 아이를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살의까지 들었다니, 그게 무슨 얘기야.”

“원한 적이 없다고? 왜 그렇게 생각해?”

청년이 무표정하게 묻자 여자는 얼굴이 굳는다.

” ‘오직 자신만을 생각해요.’ 아직까지도 기억해, 그 말.”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하다.

“내가 오해한 거야? 너랑 네 후레자식은 짐이 된다, 난 그렇게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 절대로.”

그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짝 다가선다.

“오히려 너에게 그 짐을 지울 수가 없어서… 날 미워하고 자유로워지게…”

“변명은 집어치워!”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다.

“알아서 하라며 비겁하게 가버리고 나서는, 애를 낳으니까 미안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켰다고? 당신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치졸해? 당신의 반란까지 내가 책임져야 돼?”

맑고 예리하던 목소리는 갑자기 떨리면서 잦아든다.

“당신의… 죽음까지?”

그는 망설임 없이 둘 사이의 거리를 한 달음에 좁히고, 그녀를 품안에 끌어안는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청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그녀의 입술에서는 외롭고 공허한 울음이 새어나온다.

“왜 그렇게 죽어버렸어, 날 두고…”

“미안해.”

그는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준다.

“미안해…”

“잘난 척하며 사는 걸 보고 마음껏 경멸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당신 결혼하는 날에는 그 누구보다 화려한 모습으로 축하하며 예의바르게 저주할 생각이었는데…”

흐느끼면서 여인은 떨리는 팔을 들어 발작적으로 그를 끌어안는다.

“당신이 없는데 어떤 의미로 살아가라는 말야? 점점 똑같이 닮아가는 아이만 바라보면서…”

“난 네게 용서를 빌 수조차 없어.”

사내는 무릎을 꿇는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주저앉듯 자리에 앉는 여자의 어깨를 그는 붙든다.

“뒤늦게 후회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그런 것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또 죽고 파멸하고… 이젠 싫단 말야.”

얼굴에 눈물이 젖은 채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다.

“모두 나 때문에 죽어가… 아버지도, 그 조각가도, 당신도… 난 어려서 죽었어야 했는데! 나 때문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떨구며 고개를 숙인다.

“절대 그렇지 않아.”

남자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손바닥에 가만히 입맞춘다.

“그런 네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던 거다. 그 불쌍한 예술가도, 나도, 네 남편도…”

그는 그녀 어깨 위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황금빛 불꽃에 손을 파묻었다가, 턱을 손으로 받쳐 자신을 마주보게 한다.

“사악한 마녀든, 독사이건 뭐건 네가 있어서 행복했다. 결국 실족하고, 허우적거리고, 죽었지만… 고통의 밑바닥에서도, 내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네가 있어서 의미가 있었어. 그래서 네게 미안하고, 감사한다.”

“바보같은 사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그는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준다.

“이제와서 왜…”

꽃이 피어나듯, 물이 흐르고 별들이 운행하듯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손은 손을 끌어당기고, 팔은 몸을 감고, 입술과 입술이 만난다. 함께할 수 없었던 평생의 안타까움을 담은 순간의 달콤함에는 시간조차 범접할 수 없다.

입맞춤이 끝나고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청년은 여인의 무릎팍에 고개를 묻는다.

“만약 내가 좀더 용감했더라면, 세상이나 주군이 뭐라고 하든 내 여자고 내 아이라고 당당할 수 있었더라면.”

중얼거리는 그의 머리칼을 여인은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는다.

“아니면 차라리 네 증오를 내것으로 만들어 함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파멸했더라면, 그 파멸마저 달콤했을 텐데.”

그녀는 몸을 숙여 그의 관자놀이에 입맞춘다.

“자신과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 내가 좀 더 온전히 살 수 있었더라면. 당신 여자와 아이를 내치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기라도 했더라면 당신은 용기를 냈을까?”

여인은 그의 머리에 이마를 얹으며 가만히 끌어안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지. 어떻게 살았든, 언제 끝났든, 아쉬움과 후회마저도 당신과 나의 온전한 삶이야.”

말없이 그는 손을 여인의 무릎에 얹고, 그녀는 평화롭게 미소지으며 그 손을 잡는다.

“삶의 굴레를 넘어서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해…”

서서히 안개가 다시 몰려들며 두 사람의 모습을 덮는다. 가지 않은 길의 아쉬움과 걸어온 길들의 교차로, 기다림의 땅은 기다림의 침묵과 만남의 속삭임을 품은 채 긴 고요에 빠진다.

아악 이 닭살족들 같으니. 스틸리안느와 니키아스의 이야기는 워낙에 복잡해서 글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만, 이 정도면 대충 표현은 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만 해도 복잡한데 정치적 역학, 과거의 원한, 임신, 결혼, 반란, 배신, 미움, 죄책감, 후회 등등이 엉켰으니 풀어가자면 끝이 없지요. 하지만 결국 그 근본은 서로 많이 사랑했던 남녀가 내적, 외적 장애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흔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라이산드로스와 에이레네 같은 행복한 사랑 이야기와 이런 비극의 차이는 본인의 용기와 선택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운의 차이도 크다고 봅니다. 니키아스와 스틸리안느만큼 상황이 복잡한 연인은 라이와 레니처럼 주변이 완전히 평탄한 연인보다는 훨씬 많은 용기를 내고, 더 많은 아픔을 겪어야만 가까스레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못했다 하더라도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비극적이면 비극적인 대로, 옳은 선택을 했거나 죄를 지었다면 그건 또 그런 대로 다 온전한 하나의 삶이고 그 사람의 이야기이겠지요.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었으니..’ 하는 부분은 김혜린 화백의 비천무 마지막권에서 살짝 따왔습니다. 거기서는 ‘이 손을 다시 잡으려고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던가!’ 하는 식이었던 것 같지만요. 대하 순정만화의 닭살만땅 대사들 좋아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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