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그림자] 끝과 시작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종결 약 1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이걸 기반으로 캠페인 주인공들의 10년 후를 그리는 공화국의 그림자 에필로그 프로젝트 (1:1 단편 플레이)를 해볼 수도 있겠군요.


방안은 조용했다. 둥근 창밖으로는 멀리서 말소리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창밖에 드리운 나뭇가지를 통해 햇빛이 비쳐드는 명상실에는 깊은 고요가 감돌았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사내는 그 침묵에 조금도 동요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존재로 방은 더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쓴 로브 두건에서 발끝까지 드리운 로브자락까지 미동도 없이, 어쩌면 정신마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는 침묵 속에 그저 존재했다. 침묵의 일부가 되어.

밖의 복도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어깨와 손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조금 굽히며 문을 비스듬히 향했다. 짐짓 편안하면서도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준비자세를 숙련된 전투원이라면 알아보았으리라. 그에게 이것은 지금 필요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것도.

발소리가 문앞에서 멎더니 미닫이문이 거의 소리없이 열렸다. 이윽고 인사를 하며 들어선 열네댓쯤 되어보이는 소녀는 긴 금발머리를 파다완의 갈색 로브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면서 햇살이 순간적으로 눈에 비치자 소녀는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이다, 멜리나.”

창가에 선 제다이는 두건을 내리며 문을 똑바로 향했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에는 살짝씩 잿빛이 엿보였고, 갈색 얼굴에는 눈가와 입가에 미세한 주름이 지고 있었지만 눈빛과 목소리는 서글서글했다.

“당신이?”

멜리나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너로서는 ‘나이트 아를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구나.”

사내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담담했다.

“‘스승님’도 좋겠다. 공의회에서 명령받았으니.”

“난 스승을 정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여전히 문가에 선 채 멜리나는 팔짱을 꼈다.

“당연히 그렇겠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를 찔린 듯 멜리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들어오겠느냐?”

천천히 멜리나는 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서 섰다. 아를란이 바닥에 정좌하고 앉자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로는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쳤다.

침묵 속에서 나이트 아를란은 편안하게 멜리나를 마주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깨달음 깊은 제다이로 보고 지나갔지만,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공허할 정도로 평온한 시선과 기쁨 없이 잔잔한 미소에서 폐허의 평화를 알아보았다. 아직 서른 남짓이었지만 거의 열 살 연배의 스승과 동년배로 보이는 그에게는 부서진 돌틈에 자라는 풀포기, 무너진 지붕으로 비쳐드는 햇살의 고즈넉함이 있었다.

드로이드가 하나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차 한 잔씩을 놓고 나간 후에 아를란은 입을 열었다.

“잘 지냈느냐?”

멜리나는 뻣뻣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럭저럭요.”

“그래, 내가 스승이 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순간 멈칫했다가 멜리나는 그를 도전적으로 마주보았다.

“잘 아시네요. 솔직히…”

“솔직히?”

“도대체 내가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멜리나는 다짜고짜 따져물었다.

“포스력은 나보다도 약한 시스 출신 스승을 붙여준다는 걸 말이에요. 당신.. 나이트 아를란이 우리집 응접실에서 엄마 목을 조르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왜…”

소녀의 목소리는 고통스럽게 잦아들었다.

“왜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에 있던 당신이…”

“뭐 굳이 내 변명을 하자면, 현직 제다이 나이트 중 너보다 포스 재능이 강한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아를란은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은퇴하신 나이트 미셸이 비슷했을지 모르지. 감지력 면에서는 단투인의 나이트 드리엘이 훨씬 강하겠고, 오히예사 그 친구는 능력이 엉뚱해서 비교하기 어렵고… 내 포스 능력이 좀 떨어지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무례했다면 죄송했습니다.”

멜리나의 볼멘 사과에 아를란은 손을 저었다.

“죄송할 거라면 말하지도 않았겠지. 괜찮다.”

그 말에 멜리나가 헷갈린 표정이 되는 동안 아를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시스 출신인 것도 사실이고, 너희 어머니를 공격했던 것도 사실이지. 지금와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니로구나.”

“저기… 제가 한 말은 잊어주셔도-”

“내가 나이트 로어틸리아가 아니라는 점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그건 다른 어떤 스승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너무나 태연하게, 지나가는 소리처럼 한 말의 의미를 멜리나가 이해하는 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해한 순간 파란 눈이 커지면서 얼굴은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고…”

“네가 인정할 수 있는 스승은 하나밖에 없겠지만, 그건 동시에 네가 용서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지. 네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제다이로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 역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멜리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반쯤 일어나 앉았다.

“나이트… 전 나이트 로어틸리아는 제 친구들을 학살한 살인자에요. 그런 사람을 생각하다니 제가 왜…!”

“그리고 시스에게 납치당한 너를 구출한 분이기도 하지. 너희 어머니 부탁으로 로크린에서 코루선트까지 너를 보호한 후견인이며,(주:http://wiki.storygames.kr/jedi/pc/til/secret 참조) 차갑도록 이성적이고 적에게는 치명적이었던… 이상적인 나이트.”

“차갑지 않았어요.”

멜리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억지로 짜내는 듯 힘겨웠다.

“속내가 깊은 분이었고… 내게는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분이었어요.”

아를란이 무표정하게 찻잔을 내려다보는 동안 멜리나는 고통스럽게 물었다.

“그런 분이… 왜…”

그 의문이 방안에 무겁게 가라앉는 동안 아를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고통이라기보다는 오랜 고통의 메아리가 얼굴에 스쳐갔다.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제다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전 제다이가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아를란은 천천히 눈을 뜨고 멜리나를 마주보았다. 멜리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말을 해서 그런지 차라리 후련한 표정이었다.

“나는 네가 의문을 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멜리나는 눈을 동그렇게 떴다.

“나는 너와 자란 환경이 좀 달랐고… 그래서 내게 제다이가 되는 것은 선택이었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평생 처음으로 한 선택이기도 했지.”

햇빛이 흐려지면서 창밖의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를란이 찻잔을 집어들고 목을 축이는 동안 빗방울이 지붕과 밖의 나무를 톡, 톡, 톡 두드렸다. 역시 찻잔을 집어들고 홀짝거리면서도 멜리나는 시선을 아를란에게 고정했다.

“그래서 공의회에서 자라나는 너희들이 제다이가 되는 것이 정말로 너희의 선택인지 나는 의문이 있다. 물론 훈련이나 교육의 질은 월등하다만… 제다이의 길은 환경과 기대에 휩쓸려서 걷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멜리나는 찻잔을 두 손 사이에 돌리면서 출렁이는 찻물을 지켜보았다.

“저더러 제다이가 되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조금 더 세상을 보고 결심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아를란은 입을 열었다.

“로크린에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로크린…이요?”

멜리나의 표정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찼다.

“셀렌, 카론, 단투인… 그래, 넬반도. 그 모든 곳들을.”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투명한 눈빛으로 멜리나를 마주보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오래 전에 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네 어머니, 내 스승이신 마스터 토레이, 나이트 네루나, 레이디 미셸, 오히예사… 네가 그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이트 틸리아…가 했던 여행인가요?”

멜리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왔다.

“그 여행이 재난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구나.”

아를란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모든 것이 변한 것은 확실하지. 공화국, 공의회, 우리들… 그래, 나이트 로어틸리아와 그녀의 언니도.”

그가 조용히 일어서자 멜리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그 둘의 이야기도 해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아를란은 멜리나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 너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포스 안에서 너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지… 그 속에서 네가 평온을 찾기를.”

충만한 침묵 속에 잠시 빗소리만이 울렸다.

“함께 가겠느냐?”

멜리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번 끄덕였다. 아를란은 미소지으며 손을 떨구었다.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 같구나. 잘 부탁한다, 파다완.”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각자의 숙소로 갈 채비를 했다.

“내일 또 이야기하자꾸나, 멜리나.”

빗물이 흘러내리는 출구 앞에서 아를란은 로브 두건을 덮어썼다.

“되도록 빨리 떠날 터이니 채비를 해두거라.”

그가 몸을 돌려서 가려는 순간 멜리나가 불렀다.

“아, 저… 스승님?”

“왜 그러느냐?”

아를란은 돌아보았다.

“스승…님은 평온을 찾으셨나요?”

비를 등진 채 잠시 멜리나를 마주보다가 아를란은 천천히 말했다.

“어려운 질문이구나. 어쩌면 평온을 찾는 것을 포기한 것이 나의 평온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대답할 말을 찾는 멜리나에게 아를란은 시리도록 공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일 보자, 파다완.”

비를 뚫고 달려가는 나이트의 등뒤로는 로브자락이 긴 그림자처럼 따랐다. 멜리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어둑한 복도를 따라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잿빛 고요 속에 빗소리만이 시간의 조그마한 발걸음처럼 끝없이 톡, 톡, 톡 들려왔다.

8 thoughts on “[공화국의 그림자] 끝과 시작

  1. 이방인

    이…이게 아를란?!(…)

    거짓말쟁이이이이(갑자기 뒤돌아서서 눈물을 뿌리며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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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orches

    오오, 아를란. 긴 말이 필요없군요. (손가락을 척 올립니다)

    확실히 10여년 후라면 많은 것들이 변해 있겠지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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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감사합니다..^^ 미셸 이름에 ‘레이디’를 붙인 건 전에 잠시 말씀하셨던 미셸의 정계진출(!)을 반영한 거였죠.

      Reply
  3. 소년H

    어이쿠. 이미 오래전의 글이군요…왠지 그리운 이름들..

    10년 뒤라면 저는 가면 쓰고 의수를 쓰는 이름 불명의 포스 검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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