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 RPG 세기의 혼: 장르와 범용성, 극과 전략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능력치와 난이도 표현에 숫자 대신 형용사를 사용하는 퍼지 (Fudge) 규칙을 기반으로 면모와 극점수를 추가한 페이트 (FATE)의 발전형으로서, 범용 규칙인 페이트의 펄프 장르용 변형입니다. 기본 배경은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시작하기 전, ‘세기 클럽’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벌이는 모험 중심입니다. 세기 클럽의 모험가들은 악당 수학자 메두셀라 박사, 제트팩을 메고 날아다니는 소련 특수요원 로켓 레드 등 다양한 악당을 상대로 고대 유물 탈취전을 벌이고 거대 로봇과 전투를 벌이는 등 세계를 구해내지요.

펄프 자체는 국내에 아주 낯익은 장르는 아닙니다만, 위에 나온 간단한 소개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양한 장르 문학과 영화, 만화의 요소를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펄프의 특징 중 과학과 활극에 초점을 두면 수퍼히어로물과 SF, 초자연에 초점을 두면 호러와 판타지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장르가 펄프의 파생물입니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국내에 잘 알려진 영화도 ‘펄프’라는 이름과 연관짓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전형적인 펄프물이고요. 이와 같이 펄프는 대중적 장르 작품과 연관이 아주 깊습니다.
일종의 상위 혹은 메타장르, 혹은 기원점인 프로토장르라고 할 수 있는 펄프의 기본 정신은 긴박한 활극과 모험, 서양과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 시대상을 반영하는 지식과 기술에 대한 낙관,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에서 생겨난 미지와 신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각각 나누고 중점을 다르게 하면 위에서 언급했듯 다양한 하위 내지 파생 장르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펄프 RPG를 표방하는 세기의 혼은 펄프를 넘어서는 다양한 장르에 적용할 수 있으며, 펄프 장르를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많은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이 특징은 장르 규칙인 세기의 혼이 역설적으로 범용성을 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기의 혼은 어떤 면에서 펄프 RPG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활극에 특화된 인물 제작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적은 수의 기능이 각각 넓은 분야를 다루므로 (예를 들어 구르기, 곡예, 수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운동신경’ 기능 하나로 통합) 각 인물이 상당히 넓은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싸움을 잘한다고 사회성이 떨어질 이유는 없고, 뛰어난 학자도 필요하면 총 (혹은 채찍!)을 들 수 있지요.
넓은 기능 범위의 단점이라면 기능 선택으로는 인물의 개성이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세기의 혼은 기능의 특화 내지는 특수 활용인 스턴트 규칙으로 개성을 확보하고 획일화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영할 때면 운동신경 판정에 자동으로 +2를 받는 스턴트가 있다면 운동신경 등급이 비슷한 다른 인물과 차별화할 수 있지요. 또한, 춤을 출 때면 운동신경을 예술 기능 대신 활용하는 스턴트가 있어도 마찬가지로 높은 운동신경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특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활극의 중요한 요소인 전술적, 극적 연출에도 세기의 혼은 강한 편입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환경이나 장면의 특징을 ‘면모’로서 조작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연회장에서 모두가 긴장한 상태라면 그 장면에는 ‘모두 긴장했다’ 면모가 있습니다. 이때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해서 위협 기능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술 기능으로 음악이나 춤 등 공연을 해서 긴장한 분위기를 없애고 대신 ‘부드러운 분위기’ 면모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면모로 친화력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지요. 자신이 스스로 판정해서 부여하거나 발견한 면모의 첫 발동은 무료이므로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극점수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무료 발동을 넘길 수도 있으므로 꽤 긴밀한 협력도 할 수 있고요. 이렇게 해서 세기의 혼은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꾸거나 관찰하는 것을 규칙으로 포상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보너스나 페널티가 붙는 것은 거의 모든 RPG에 있는 규칙이지만, 세기의 혼 규칙은 위와 같이 극점수와 면모 발견, 부여, 제거를 매개로 참가자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직접 다루고 포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가자가 훨씬 능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작하고 이용해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극적이면서 동시에 확고한 규칙상 이점도 있으므로 전술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은 활극적 재미를 더욱 강화합니다.
다음 세기의 혼의 펄프적 특징으로 지식 기능의 활용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학술과 과학, 공학, 신비학과 같은 지식 기반 기능의 활용도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단순히 어떤 지식을 아는지 판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 판정을 통해 참가자가 새로운 극적 사실을 선언하고, 그 선언에 따라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림의 부족과 조우했을 때 ‘이 부족은 여자만을 지도자로 뽑으니까 우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하면 결과가 좋을 거에요.’ 하는 같은 선언을 하고 학술을 굴려 성공하면 접선하는 부족에 ‘여성이 지도자인 것을 당연시한다’ 면모를 부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했을 때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이때도 판정을 통해 면모를 부여했으므로 첫 발동은 무료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 돛줄을 자르면 돛이 적을 덮어버릴 거야!’ 하고 선언한 후 과학 굴림에 성공하면 동료가 해당 돛줄을 잘랐을 때 적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실패한다면 잘못 판단한 거니까 효과가 없거나 우리편이 돛에 덮여버릴 수도 있겠지요. 공학이라면 ‘저 깜박거리늘 붉은 빛을 쏘면 차단문이 내려와!’ 하는 식으로 선언하고 마찬가지로 판정할 수도 있고요.
지식 판정의 선언 기능 외에도 세기의 혼에는 연구, 기계 제작과 수리 등 학술, 공학, 과학을 활용하는 규칙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신비학은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학술, 과학, 공학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공학으로는 손목에 차는 무전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신비학으로는 같은 제작 규칙을 사용하되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식입니다. 이렇게 과학기술과 신비를 둘다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세기의 혼 규칙은 다분히 펄프적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기의 혼이 펄프적 특징을 잘 반영하는 것은 규칙을 통한 인물 표현의 확보가 아닌가 합니다. 펄프의 원동력이자 펄프적 정신의 표현은 다름아닌 펄프의 영웅들, 강한 개성과 놀라운 지략과 행동력, 교양과 지식이 빛나는 주인공들입니다. 딱히 창의적이거나 새로울 필요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일정한 기존 유형을 잘 활용하면 더 인기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인물성을 표현할 필요는 있지요.
이러한 인물 표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면모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환경이나 장면 면모처럼 인물에게도 면모가 있는데, 환경이나 장면 면모가 주변 환경의 특징을 표현하듯 면모도 ‘서부 최고의 명사수’라든지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 등 그 인물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하면 해당 판정에 +2를 받을 수 있지요.
위의 예를 계속하자면, 서부 최고의 명사수 면모 당연히 총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면 예쁜 여자 꼬시는 데는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2를 받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점이 인물 자신의 배경이나 특징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면모 발동은 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인물의 배경, 과거, 특징, 내면 등을 플레이 자체에 반영합니다.
면모는 이점뿐만 아니라 약점도 될 수 있습니다. 서부 최대의 명사수에게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나 도전자가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고, 이런 때에 진행자는 면모가 불리하게 (혹은 귀찮게) 드러난 인물의 참가자에게 극점수를 역으로 지급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쁜 얼굴을 보면 사족을 못쓰는 특징도 진행자가 ‘시장 부인이 엄청 미인이야! 가서 꼬시려고 들면 극점수 줄게’ 하는 식으로 불리하게 발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면모가 불리하게 작용해서 극점수를 역으로 받는 것을 강제 발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참가자를 곤란하게 한다기보다는 플레이를 재미있게 유도하는 장치입니다. 극점수가 나온다는 면에서는 전술적인 장치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면모를 통해 등장하는 사건과 갈등은 이점과 마찬가지로 각 인물의 배경과 특징, 사연에서 나오므로 면모 중심 진행은 인물 중심적 전개를 유도하며, 플레이의 극적 재미를 풍요롭게 합니다. 뛰어나면서도 부족한 데가 있는 인물들의 능력과 과거, 갈등에서 나오는 플레이는 참가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진행을 편하게 해주지요.
결국 제가 보는 세기의 혼은 장르 특징에 대한 충실성과 그 장르를 넘어서는 일정한 범용성, 그리고 극적 연출과 전술적 선택이라는, 서로 상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긴장관계에 있는 요소들을 조화시키는 규칙입니다. 그리고 그 긴장을 창의적으로 해소하는 순간 굉장히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죠. 세기의 혼을 플레이하며 그 끝없는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2 thoughts on “펄프 RPG 세기의 혼: 장르와 범용성, 극과 전략

  1. Wishsong

    면모 부여와 지식 기술 활용은 확실히 멋진 아이디어인 것 같아. 이 부분을 다른 시스템에서도 쓸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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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기존의 밸런스를 유지하면서도 면모의 장점을 도입하는 건 꽤 계산과 테스트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이론적으로 가능은 할 정도로 면모는 범용성이 있는 개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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