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와 소설

저는 RPG, 특히 ORPG를 하다 보면 소설 쓸 때와 비슷하게 머리를 굴리게 되곤 합니다. 묘사, 상황 연출, 인물 표현 같은 면에서 말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글 하나를 다 쓰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해서 약간씩, 그리고 자신이 서술권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쓴다는 점이 다르지만요. (그래서 진행에 비해 서술권 범위가 좁은 참가를 답답해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RPG를 할 때면 실시간 협동 소설 쓰기 같다는 느낌도 꽤 받습니다.

RPG를 소설처럼 생각해서인지 실제 소설도 RPG, 특히 캠페인에 많이 사용하는 편입니다. 특히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을 하면서는 세션 중에 시간 잡아먹지 않게 조연들만의 사정이나 행동은 소설로 많이 빼냈죠. 그렇게 하면 세션이 조연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참가자가 원하면 조연에 대해 더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전체 이야기도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고요.

비동시성 플레이에 관심이 가는 것도 어쩌면 제 진정한 취미는 RPG라기보다는 소설이라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RPG 역시 알게모르게 소설로 인식하고 있으니) 동시성 플레이를 할 때 나오는 ‘퇴고 안 된 실시간 소설’보다는 좀 더 잘 다듬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고, 한편으로는 규칙 없이 쓰는 공동 창작 소설보다는 서술권 규율이 잘 되어 있어서 따로 놀지 않고 공동 참작물답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보입니다. 반면 동시성 플레이의 생동감과 사회성은 덜해서 쉽게 질리고, 따로 규칙을 관리하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단점이겠지요.

소설이 나름 취미이기는 하지만 사실 혼자 생각해서 쓰는 소설보다는 RPG, 팬픽 하는 식으로 타인과 공유하는 로망에 대해 상상을 펼치는 편을 좋아합니다. 스스로 생각해낸 인물들과 상황을 쓴 결과물은 너무 자기도취적으로 흘러서 썩 좋아하지 않죠. 그보다는 타인의 로망에 다시 제 로망을 반영하는 편이 저 자신만의 좁은 로망을 벗어나는 의외성이 있어서 재밌어하는 편입니다.

요즘엔 RPG도 한동안 안해서 좀 시들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극적 욕구에 제가 바라는 것을 투영시킨,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에서 나오는 창의성은 어떤 형태로든 쭉 제 취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RPG이든, 게시판이나 위키 플레이이든, 팬픽이든. 그래서 제게 언제나 창작이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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