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대화 1-2: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

지난번 ‘놀이와 대화’ 글에서는 대화에 드러나는 관점 차이, 즉 사건의 경위를 보는 시점의 차이, 상대와 자신의 의도와 결과에 대한 생각의 차이, 그리고 잘잘못에 대한 생각 차이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에 이어 모든 어려운 대화에 숨은 두 번째 대화, 감정에 대한 대화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1. 감정 회피의 문제점

보통 감정은 대화의 주제가 아닌 주변적인 문제, 혹은 방해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예 못 참고 감정을 막 쏟아내는 게 아닌 이상은 ‘이성적인’ 대화에 감정을 끌어들이고 감정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피 행동이지요.

그러나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새어나오거나 분출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이 대화에 새어나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감정의 대리물로 대화 중 옳고 그름을 따지고 외부적 기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글에서 예를 든 M과 P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M: P’는 왜 다른 주인공들하고 동떨어지는 거죠? 일행이 안 모이고 있어서…
P: 걔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할 수 없어요.
M: 하지만 그건 주인공 성격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전체의 재미를 저해하면 안 되죠.
P: ……

여기서 M은 자기 감정 얘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M의 말은 분명히 감정적입니다. 이성적 기준을 빌어서 얘기하고 있어도 사실 중심은 P가 ‘핑계’를 대고 있다거나 ‘재미를 저해’한다는 말을 통해 드러나는 짜증스러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대화에 드러나게 마련인데도 그 실체를 외면하고 대신 옳고 그름만 따지는 것은 비생산적인 (역설적이게도) 감정 싸움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외면한 채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 보면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일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하고 인간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져버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봐도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기는커녕 오히려 감정에 지배당하는 지름길입니다.

2. 감정을 직시하고 분석하기

물론 감정을 직시하고 대화에 생산적으로 끌어들이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우선해야 한다고 배우며, 또 감정, 특히 분노, 질투,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을 부인하고 왜곡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마저.

그래서 감정이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좋은 사람도 얼마든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나 질투를 느낀다고 해서 그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은 아닙니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 중 하나일 뿐이죠. 원인을 공략해서 극복하고 해결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 실체를 외면해서는 극복은 더 어려워집니다.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감정을 세분화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M은 P에게 짜증이 난다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 나누어 보면 사실 그 실체는 훨씬 복잡할 수 있습니다. P에 대한 분노 외에도 캠페인 상태에 대한 실망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진행자인 자신의 무능이라는 두려움과 부담감, 협조하지 않고 있는 P에 대한 당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은 알지 못한 채, 아니 자신은 감정 따위 없이 철저히 이성적이라고 믿으면서 이 모든 감정의 무게를 P에게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것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겠지요.

또한, 감정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을 직시하고 표현하는 어려움은 감정 대화를 감정 아닌 것으로 해결하려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좋은 참가자라면 일행 융합에도 협조할 거야.’라는 심판이나 ‘왜 캠페인을 망치려는 거지?’라는 의도 단정, ‘당신은 배려심이 부족해요.’라는 평가, ‘이제부터는 일행과 함께 다니면 돼요.’라는 문제 해결은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의 대체물일 따름이죠. 감정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지, 타인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감정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감정을 회피하는 또 다른 수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면 감정과 교섭하기도 한결 수월해집니다. 감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만큼 인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지난 번 글에서 다룬 관점 차이를 하나씩 생각해 보면 감정을 다스리기가 좋아집니다. 사건의 경위, 상대와 자신의 의도와 행동의 결과, 사건의 원인 기여가 정말로 M이 생각한 그대로인가. P의 관점은 M의 관점과는 한결 다르지 않을까.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압박을 덜 수 있으며, 그만큼 상대의 관점에 귀기울이고 문제 해결을 향해 나아갈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3.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면 비로소 감정에 대해 생산적으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무시해야 할 부산물로 치부하는 대신 대화 중 직접 다루고, 심판, 단정, 평가, 문제 해결 대신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감정은 대화에서 다룰 수 있는 사안 중 하나가 됩니다. 예를 들어 위의 M과 P의 대화에서 M이 감정이 실린 가치 평가를 하는 대신 감정을 정직하게 얘기한다면 대화는 한결 달라지겠지요.

M: 하지만 그건 주인공 성격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전체의 재미를 저해하면 안 되죠.

대신에

M: 근데 일행이 잘 모이지 않아서 저로서는 진행하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캠페인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계속 일행이 흩어지면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좀 되는데, P님 생각은 어떠세요?

하는 식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이 대화에 새어나가서 내가 잘했다 네가 못했다는 싸움이 되는 대신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상대의 감정 역시 들어줄 자세가 되었다는 표시를 할 수 있으니까요. (눈썰미 있는 분은 1-1에서 다룬 관점 대화도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P의 의도가 나쁘다고 단정짓는 대신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다루니까요.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은 2부에 할 예정입니다만, 일단 맛배기 (?))

이렇게 감정을 다룰 때면 자기 감정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품고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점 차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와 자신의 감정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필요한 정보이니까요.

또한, 위에서 얘기한 감정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문제를 피하려면 자신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감정을 평가하지 않고 일단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 인정이 곧 동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왜 너는 그렇게 느끼느냐 혹은 내가 이런 감정이 있다니 참 바보다 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물론 감정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감정도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설득하고 싶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감정은 이성이 아닌 만큼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 감정은 잘못되었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감정에 대한 외면과 부정직함, 그리고 억압을 유발할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습하는 대화를 통해 인식을 조정해 가면서 감정 역시 변화시키고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감정을 인정하고 감정에 대해 정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대상은 다스릴 수도 없게 마련이지요. 감정의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정직해야 감정에 지배당하는 대신 감정을 제어하고, 감정을 비롯한 주변 문제를 생산적으로 해결할 기반을 쌓을 수 있습니다.

6 thoughts on “놀이와 대화 1-2: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

    1. 로키

      정말로 어른스러운 어른이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RPG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만악의 근원일지도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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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時雨

    사람끼리 하는 것이니 역지사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역시 지키기는 쉽지 않은 것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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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사람은 심리적으로 위협을 받으면 거의 본능적인 감정적 반응이 있으니까요. 그 위협감 자체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 더 다루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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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yst

    RPG 카운셀링이 필요한 시점이군요^^
    RPG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달시키고 인간심리를 파악, 연구할 수 있는 좋은 매체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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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결국은 말씀대로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이라는 점에서 RPG를 잘하는 사람은 사회생활도 잘할 거라는 게 제 지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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