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그림자] 파다완의 의무

공화국의 그림자 외전입니다. 전혀 다른 걸 쓰려고 했는데 아를란이 끼어들어서..(…) 외설은 딱히 없지만 슬쩍 언급은 있고, 좀 잔인한 묘사도 나오니 주의하시고요. 욕설도 약간 나옵니다.

시간상으로는 본편 50화 직후이며, 47.9화, 7화9화 내용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체스님과 한 6월 2일 왕닭살 콘체르토와 갈등이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어서, 아마 아를란이 갑자기 외전 써달라고 보챈 게 그 플레이 때문인 것 같네요.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혼동하지는 마라.”
– 자락스 토레이

화염 한가운데 두 자루의 라이트세이버가 맞부딪치고 있었다. 세이버의 주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이글거리는 불길 사이로 차갑고 곧은 두 줄기 빛은 또렷이 보였다. 치명적으로, 경쾌하게 현란한 솜씨로 공격하고 막는… 마치 거인의 주먹이 부수고 들어간 듯 건물 한가운데 난 구멍에서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향해 불길한 꽃처럼 피어올랐다.

필리스, 불러보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불타는 건물에서 불어오는 열풍에 휩쓸려 사라졌다. 건물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며 접근하는 동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건물은 점점 가까워 왔고, 동시에 불길도 높아가기만 했다. 머리 위로는 보이지 않는 함선들과 공화국 비행정들이 선회하고 상승하다가 때로는 위태위태할 정도로 건물 지붕 위로 낮게 스쳐갔다.

저 건물에 닿으면 어떻게 할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세이버 실력이 자신을 훨씬 상회하는 데다 건물이 저 지경으로 불타는데도 나올 생각이 없어보이는 두 자매를 어떻게 싸움을 말려서 데리고 나올지 하는 대책따위 있을 리가. 그저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귓가에 방망이질치는 심장의 박동만이 발길을 재촉했다.

건물 지붕으로 건너뛰자 착지 순간에 다리를 때려오는 강한 충격을 그는 무릎을 굽히며 흡수했다. 그리고 지붕 가장자리까지 달려가자 이제 바로 옆 건물에서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붉게 날름거리는 화염 사이로 분간할 수 있었다. 숨쉴 때마다 검은 연기와 불길의 열기가 가슴을 뜨겁고 답답하게 덮쳐왔다. 비상 사이렌과 대피 안내가 혼란 위로 울렸다.

‘다시 안내드립니다. 공습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하여서 안전한 경로로 지정한 방공호로 이동해 주시기..’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떻게 건물로 들어갈까 생각하며 발길을 옮기는 순간 뭔가 포스 감각을 스쳐가더니, 허공에서 발사된 빔이 이미 화염에 휩싸인 건물을 훑고 지나갔다. 굉음과 함께 건물은 연기와 먼지를 거대한 벽처럼 올려보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라이트세이버 빔과 두 전투원의 모습을 검게 삼키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고함을 지른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그는 몇 달음에 건물을 뛰어내려가 내려앉는 건물을 향해, 필리스를 향해 달려갔다.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런 순간에 그녀 곁에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같이 죽겠다는 순간적인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또 다른 비명이 그를 붙잡았다.

돌아보자 건물 몇 채를 건너, 조금 전의 포격을 맞은 듯 역시 불길과 연기가 오르는 주거용 아파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서 윗층 창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기 사이로 10층이 넘는 창가에 사람 모습이 보였다.

아를란은 피나틸리아와 그녀의 동생을 삼킨 건물을 한 번 돌아보았다. 아파트 건물에 갖힌 사람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다시는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가만히 앉아서 잃지는 않으리라고 맹세했었다. 다시 그런 상실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에게 뭐라고 필리스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가.

그러나 머릿속의 차분하고 냉정한, 낯선 목소리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피나틸리아와 나이트 로어틸리아는 포기해야 했다. 그들이 자력으로 나올 수 있다면 그가 가서 도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나올 수 없는 상태라면 구하려다가 같이 죽을 가능성이 더 컸고, 아파트 건물은 불길 때문에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저 위에 갖힌 사람도 죽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네 명이 죽을 수 있는 선택과 최선이라면 넷이 다 살 수 있는 선택 사이, 그 산술적 결론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미 아를란은 달려가고 있었다. 심장을 움켜잡은 손을 뿌리치는 것 같은 고통에 순간 숨이 막혀왔지만, 자신에게 깊이 생각할 시간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는 안타깝게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연기가 뿜어나오는 입구에 어떻게든 들어가보려는 구출자들을 훌쩍 뛰어넘어 창틀 하나에 매달렸다가 그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피어오르는 연기에 기침하며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도약해 홈통 위에 선 순간, 열기 때문에 홈통이 크게 휘어졌다. 세상이 뒤집히는 아찔한 순간이 지나가고, 무작정 손을 뻗자 다른 창틀이 손에 잡혀서 위태위태하게 매달릴 수 있었다. 이제 10층 이상 올라왔을까. 저 아래서 올라오는 놀란 비명들이 뒤늦게 귀에 들어왔다. 창틀에 올라서서 숨을 고르며 아를란은 위로 올라갈 길을 살폈다.

오래 전, 머나먼 행성에 있는 또 다른 건물 밖에 이런 식으로 위태하게 매달린 적이 있었다. 그때 지금의 스승과 파다완 센 테즈나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당장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가 죽는지 사는지 신경이나 쓰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은 잊을 수 없었다. 이용하고 내버릴 쓰레기에 눈길을 준 멍청한 제다이가 있었기에 그가 오늘날 여기 있다는 사실만은.

아를란은 다리를 크게 굽혔다가 다시 뛰어올라, 잡히는 창틀을 붙잡고 올라가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안타깝게 창밖으로 몸을 내미는 여자와 바로 마주쳤다. 힘없이 칭얼거리는 품안의 아기가 휘두르는 자그마한 손이 얼굴에 가볍게 부딪혔다.

로크린을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갓난 멜리나를 안은 소니아를 떠올린 것은. 따를 대상을 간절하게 찾고 있던 그에게 형이나 스승과도 같았던 쟈겐트의 관심을 송두리째 가져간 모녀. 소니아를 미워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을까. 영링 시체 사이에 선 멜리나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여자는 순간 놀라서 창틀에서 흠칫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는 팔을 뻗어 다짜고짜 허리에 팔을 두르고 창틀로 끌어올렸다. 어디선가 폭음이 들리면서 건물이 흔들리자 창틀을 붙잡아 균형을 유지하다가 손이 데인 것을 깨닫고 서둘러 뗐다. 실내의 검은 연기 사이로 붉은 기운이 섞여오고 있었다.

“애 놓치지 말아요.”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여자를 꽉 끌어안아 둘 사이에 아기를 고정시킨 그는 건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바로 쫓아왔고, 뜨거운 충격이 등에 세게 부딪치면서 그들을 더 멀리 밀어냈다.

비행 (飛行). 그는 날개 없이 날고 있었다. 불타는 건축재, 반짝이는 무수한 유리조각과 함께 도시를 향해 빠르게 떨어져내리며 그는 이 순간 코루선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했다. 불길과 연기의 너울에 죽음과 파괴라는 현실을 아스라히 감춘 채, 슬픔도, 고통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도시. 생명만큼이나 덧없이 그렇게…

밑에서 땅이 빠르게 다가오면서 도시의 소음도 다시 귀를 때려왔다. 있는 대로 포스를 끌어올려 추락의 속도를 늦추고 여자와 아이를 몸으로 감싸면서 무릎을 굽혔지만, 아무리 충격을 흡수하려고 해도 착지의 순간 다리를 따라 전류처럼 타고 올라오는 충격은 곧 쓰린 고통이 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아이와 여자를 땅에 쏟아내듯 내려놓았다. 아기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리자 가슴 속에 안도감이 꿈틀거렸다. 저렇게 조그마할 때부터 이미 고통은 삶의 증거일까.

“제다이 선생님, 괜찮으세요? 등에 피가…!”

온몸이 욱신거리고 포스를 갑자기 쏟아내서 몸이 텅 빈 듯 기운이 없었다. 가까스레 고개를 들자 아기를 안고 일어서서 그에게 몸을 숙인 여자, 그리고 그 너머로는 필리스와 그녀의 동생이 전투를 벌인 건물이 보였다. 이제 완전히 무너져내려 연기와 불길만 오르는…

그는 고개를 떨구며 보도를 맨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이 까지면서 아려왔지만 부족했다. 지켜줄 수 없다면 곁에 있기라도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약속마저 어겨버렸다.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다시 눈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제다이 선생ㄴ-“

“꺼져.”

그는 선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칭호를 들을 자격이 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말을 할 수 있을 그의 스승이나 나이트 린라노아였지, 자신을 사랑한 적 없는 여자 때문에 넋이 나간 애송이가 아니었다. 치밀어오르는 고통을 삼키며 아를란은 여자를 노려보았다.

“애새끼 데리고 방공호로 가. 공중에서 훤히 보이는 데서 표적이 되고 싶어?”

그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여자는 흠칫 놀라더니 아이를 보호하듯 감싸안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를란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평생 다시는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너져버린 건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아직 저릿하게 아파오는 다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잠시 휘청거렸다. 건물에 포스 기척은 일체 없었다. 열과 폭발에 휘고 변형된 건물 뼈대와 금속 틀이 눈에 들어왔고, 재와 연기가 매캐하게 눈과 폐를 찔러왔다.

이 재 중에는 피나틸리아도 있을까. 그가 몸을 떨며 머리를 기대곤 했던 하얀 가슴도, 마치 유리로 된 듯 소중하게 붙잡고 입맞추었던 가느다란 손도 저 건물의 잔해 아래 검게 타서 살이 뼈에 눌어붙고, 숯덩이가 되어 두개골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위로는 하얗게 녹은 안구가 기묘한 눈물처럼 흐르고 있을까. 그렇게 생전에도 사후에도 똑같은 두 시체가 얽힌 채…

“아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지독하고 독살스러운 다쓰 세리트가, 어린애를 학살해댄 전 나이트 로어틸리아가 그렇게 갈 리가 없었다. 둘이 어떻게든 탈출해서 이 파괴와 화염의 지옥을 벗어났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두 사람을 얽맨 과거도, 소속도 모두 버리고 자유로워졌다고. 그러지 않으면 맨손으로 저 잔해에 달려들어 뒤지다가 미쳐버려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구별할 정신조차 남지 않을 테니까.

“떠나버려요, 이곳을…”

코루선트의 하늘을 향해 쏟아지는 연기와 날름거리는 불길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파다완 아를란은 다리를 절며 도시의 건물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자.

한 줄 요약: ‘아를란, 창문으로 침입해 애엄마 보쌈하다.’ 긴 캠페인을 거치며 모든 인물이 변화를 겪었지만, 가장 성장의 여지가 많았던(..) 아를란군이 제일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심히 거칠고 덜 다듬어졌지만 시스로 자라난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구분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차이를 깨달았고, 제다이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자각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모든 성장이 그렇듯 많은 시행착오와 고통이 따르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또한 동환님과 얘기했던 로어틸리아와 피나틸리아의 두 가지 가능한 결말, 즉 ‘같이 사망’과 ‘같이 탈출’을 둘 다 암시해보았습니다. 저는 전자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진행할 때 죽음에 더 가까운 묘사를 했고 이 외전에도 그쪽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지만, 다른 분들은 또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죠. 무엇보다 건물이 무너지던 순간은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아를란을 포함한 모든 목격자가 혼란 상태라 믿을 만한 목격담은 없기도 하고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