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문화와 남녀, 불편한 소재에 대한 생각

주의: 말 그대로 ‘불편한 소재’를 다루는 글이므로 폭력, 외설, 성적 폭력 등을 언급합니다. 그런 내용이 많이 불편하신 분들은 읽지 말아주시길.

미국 쪽 RPG 게시판 돌아다니다 보면 홍일점 여자 참가자에게는 상담 한 마디 없이 그 참가자의 여자 PC가 강간을 당했다… 같은 호러스러운 이야기를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일행의 다른 PC들에게 윤간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지요. 플레이 내에 있는 일은 물론 진짜가 아니지만, 누군가의 비유마따나 자기 PC를 죽인다고 선언하는 참가자가 총을 차고 있다고 상상하면 대충 그런 상황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그렇게 심한 상황은 없었습니다만 (약간 비슷한 일은 한두 번 있었지만), 플레이 내에, 그리고 플레이 주변부에서의 불편한 소재는 ‘저런 갈아마실 놈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생각해볼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반드시 남녀만의 문제도 아니고 결국은 개개인의 감수성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만, 남자가 다수인 취미에 있다 보니까 남녀차 쪽으로 좀 더 생각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겠죠.

플레이 중, 혹은 플레이 후 잡담을 하다 보면 제게는 불편한 얘기가 꽤 자연스럽게 나오고는 합니다. 저도 음담패설에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왠만한 얘기에는 기죽는 일이 없는데, 강간이나 유아애 쪽으로 농담이 나오기 시작하면 곤혹스럽더군요. 재밌게 하고 있는 얘기를 저 하나 때문에 끊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계속 듣고 있기는 좀 그렇고. 보통 생각하는 동안에 말이 지나가니까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종종 남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RPG가 남자 다수 취미인 건 그런 문화적 차이도 한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여자들이 강공이니 수니 하고 야오이 얘기를 하면 남자들이 거리감을 느낄 수 있듯, 남자들이 세 살짜리 여자애를 어떻게 하네 조교가 어떻네 사육이 어떻네 같은 이야기를 하면 여자들도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겠죠.

결국 뭐, 남자는 짐승이다 같은 식상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남자가 짐승이라면 여자도 짐승이겠죠. (암수가 다를 뿐 (?)) 성적 대상화야 어느 한쪽 성만의 이야기도 아니고요. 다만, 이곳에서 내가 ‘주체’인가 ‘객체’인가에 따라 여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인가 하는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 즉 남자 혹은 여자가 환영받는 분위기인지 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별로 환영받는 기분이 아니라면 좀 더 자신이 환영받을 자리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야 이심전심이죠.

물론 위에도 얘기했지만 이것은 비단 남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떤 여자 혹은 남자에게는 아주 재밌는 얘기도 다른 여자 혹은 남자에게는 찝찝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성별과 무관한 경험이나 개인적 사정으로 객관적으로는 별로 불편하지 않은 소재가 불편해질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뱀파이어 LARP에서 자기 사이어가 죽는 내용에 충격먹은 일화가 그런 예겠죠.

그래서 자신에게 불편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타인에게 지나친 노력이나 희생을 요구한다면 (야오이 없이는 플레이 내용이 확 달라진다든지) 스스로 떠나는 것이 낫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도 있기 편한 자리가 되도록, 그리고 남들도 어떤 이야기는 피하는 게 좋고 어떤 이야기는 자유롭게 해도 다들 편한지 알 수 있게 개인적 경계와 감수성의 한계를 공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알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통 남에게 싫은 이야기를 하는 건 거부감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잠시 남녀차로 돌아가자면, 여자들은 자기 의견이나 호오를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문화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대가 세느니, 잘난 척 하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요. (제 생각에는 여자들이 확실한 의사표시를 못하는 게 남녀 간 오해에 약 50%의 원인 제공을 합니다.) 게다가 남자란 존재는 종종 작살나게 눈치가 없어서(..) 아주 대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는 일도 잦습니다. (이것이 나머지 50%!)


자신에게 무엇이 불편한지 얘기하기 어려운 만큼 그냥 말 안하고 참거나 슬그머니 떠나버리는 식의 회피 행동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정이란 참으면 되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 감정이란 증기와 같아서 덮어놓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은근히 새어나오거나, 아니면 참고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폭발하게 마련이지요. 그런 일이 없으려면 자신을 불편하거나 소외감을 느끼게 만든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소재는 피해달라고 공지를 확실하게 하는 것은 역으로 타인의 마음도 더 편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피해야 하고 무엇은 표현해도 좋을지 혼자 짐작하는 대신 정확하게 알 수 있고, 그런 만큼 피하지 않아도 되는 소재에 대해서는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러다가 혹시 지나쳐서 남의 심적 경계를 침범하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대신 저쪽에서 그럴 때는 확실히 알려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면 더욱 마음은 편해집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행동이 범죄인지 명문의 법으로 정하는 것이 자유로운 사회의 필수조건인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또한, 자기 마음이 불편하다고 알리는 것이 꼭 싫은 소리일 필요도 없습니다. 예의바르게 자기 입장을 알리고, 타인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확신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는 대신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로 접근할 수 있지요. (이건 사실 모든 어려운 대화에 적용할 수 있는 얘기기도 합니다.) 악의가 없는 건 알지만 그 얘기 때문에 내 기분은 이러한데, 그런 소재는 좀 피해줬으면 좋겠다든지 하는 식으로 예의바르게 얘기해도 기분나빠한다면 역시 그 자리는 미련없이 떠나는 게 낫겠죠.

정리하자면 RPG처럼 사람이 같이 모인 자리에서는 사람이 다 다른 만큼 본의아니게 남의 감수성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다수인 취미인지라 그게 남녀차로 가면 더욱 심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마음이 불편한 얘기가 플레이 중이든 플레이 전후이든 나오면 그 사실을 정중하게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이 모두 마음이 편해지도록. RPG는 다같이 하는 놀이이니까요.

7 thoughts on “놀이문화와 남녀, 불편한 소재에 대한 생각

  1. Xenosia

    확실히 저런 소재는 어떤 사이건
    함부로 이야기할 소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문화적 차이..라고 보기엔
    솔직히 좀 개념 없어 보입니다 [..]

    RPG를 즐기는데 있어서 상대에 대한 배려는 꽤나 중요한데 말이죠.

    Ps. 왜 저만 토요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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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뭐, 사람마다 불편한 영역은 조금씩 다르긴 하니까요. 그래서 저한테 어떤 영역이 불편한지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은 제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름 눈치를 주긴 했는데 너무 완곡했는지 효과가 없군요..(..) 오해의 여지가 없게 확실하게 얘기해도 변화가 없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있겠죠.

      지옥섬(?) 귀환이신가요. 힘내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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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년H

    저는 아직까지 남자거나 여자거나 온라인에선 돌려말하기가 성공하는 예를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 어조라던가를 살릴 수 있는 오프라인과 달리 글만 보고 알아차리는 건 좀 힘든건가 싶기도…랄까 온라인에선 직설적으로 말해도 어조 때문에 이 사람이 진지하게 말한 건지 농담조로 말한 건지 물어봐야 할 때가 꽤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번 플레이 관련이라면 ‘생각하기 싫은 것이 떠올랐다’며 뭔가를 이야기한 로키님이 떠오르..(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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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그게 온라인 인간관계의 어려움이기도 하죠. 대면 상황하고는 여러모로 달라서.. 그래서 플레이는 IRC로 해도 대화는 스카이프로 나눈다든지 하는 것도 나름 실용성이 있는 것 같아요. 최소한 어조는 전달되니..

      그때는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 안 나요! 절대 안 나요! (귀를 막고 랄랄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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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기생수

    제목보고 제가 평소에 찌질대던 남녀성차 관련 몇몇 RPG 담론 생각도 나고, 자작한 몇몇 괴이한 템플릿 생각도 나고 해서, 냉큼 달려왔습니다만. 다행히 상상한 것과는 약간 다른 이야기였군요. (‘님 이야기 관련 있는거 맞거든요?’이러면 버로우)

    그렇죠뭐. 남녀 성차 이전의 인격 문제인 면도 있고, 또 평균적인 인격(?)을 갖췄다면 그 다음에는 얼마나 특성을 이해하느냐의 문제겠죠. (이런 류의 놀이에 있어서의 성차이의 의미를 ‘애써’ 가리는 것에 관심을 가진 동기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저도 음담패설을 그리 피하지 않는 편이지만 (‘과연 피하지만 않을라고?’)예전부터 이런 문제에 느낀바는 좀 있어서 성이 다른 분들과 RPG등을 놀게 되면 눈치를 좀 보는 편이긴 합니다. 뭐, 그분들이 먼저 관련 소재(?)로서 농담이 들어오기도 하면, 안심하고 봉인을 푼적도 있긴 합니다만. 모두가 함께 즐길수 있는(?) 음담패설도 조금만 조심하면 없지는 않더군요. (…)

    여담으로, 확실히 온라인상은 글의 뉘앙스 전달이 안되서, 유치하게 봐줄 위험을 무릅쓰고 이모티콘이나 (…) (?) <- 이런 식의 별도의 (쉰세대 아저씨스러운) 기호를 농담할때 애용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진지한 거라고 간주합니다. 여담 2 / 뉘앙스 파악하는 문제는 남녀의 유전적인 면은 잘 몰라도, 대화경험의 양적인 문제인 경우도 많더군요. 물론 여성쪽이 상대적으로 대화량이 많은 문화적 차이('수다')가 있기에 훈련(?)이 더 잘된면도 있겠죠. (뇌구조적 차이에 훈련량까지 차이나면...) 수다 많이 떠는 남자들도 그러다보면 뉘앙스는 잘 감지하는 편. 대화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좀 외롭게 사신 분들이 그런거 익숙하지 않기도 해서 '혹시 그런 경우인가?' 싶어서 개인적으로는 약간 안타깝게 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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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푸핫.. 물론 대화처럼 어느 정도 사회적 구속력이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고, 글처럼 쉽게 피할 수 있는 매체를 얘기하는 건 아니죠. 아주 약간 관련이 있다면 쓰신 몇몇 글을 보면서 ‘오, 저건 내가 모르는 세계’ 하는 느낌이 들었고, 다른 RPG인들과 대화하면서 그 느낌이 더 강해졌다는 정도일까요.

      그와 관련해서, 아무래도 놀이 분위기가 남자들의 취향과 환상에 맞춰질 수록 여자가 끼기는 이런저런 문화적 장벽을 느끼겠죠. 말씀대로 배려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또 남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전 글에서 쓰신 동인 플레이에 남자가 끼면 플레이 분위기가 변할 수 있는 것처럼요.

      말씀하신 사회성 부분과 연계하자면, 사회성의 부재나 경험 부족이라기보다는 맥락의 부정합이라는 기분도 들었어요. 평소 사회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해도, 편하게 남자끼리 노는 데 익숙한 자리에서 여자를 놀이의 ‘동료’로서 대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는 느낌도 들어서 제가 침입자가 된 기분일 때도 있죠.

      결국 여자들이, 혹은 특정 여자가 RPG에 끼는 게 한쪽 성의 환상을 충족하는 분위기에서 이전하는 수고를 할 가치가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혹은 팀이 함께 판단할 문제겠죠. 비유하자면 여자 손님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게 스트립 바를 일반 술집으로 개조할 용의가 있는가? 정도가 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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