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교섭: ‘무엇’보다는 ‘왜?’

※ 주: Roger Fisher의 교섭 지침서 Getting to Yes와 수업 중 배우고 교섭 훈련받은 내용 등을 놀이라는 상황에 맞춰 정리한 것입니다.

RPG 등 여럿이서 하며 규칙 외의 영역이 꽤 되는 놀이를 하다 보면 의견 차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런 때면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만 다루면서 의견 차이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거나 (“아니 외교 중심 캠페인이랬는데 왜 전투귀신이야!”), 충돌하는 요구사항 사이에 타협하기도 합니다(“전투에 투자한 것 중에서 반만 사회 기능으로 돌리자, 응?”). 때로는 상대의 기분이나 팀내 화합을 먼저 고려하는 의미에서 양보하기도 하고 (“알았어, 인정하지.”), 때로는 진행자이니까, 혹은 지난번에는 내가 양보했으니까 등의 이유로 의견을 관철하기도 하지요(“처음부터 그랬지, 외교 중심 캠페인이라고!”).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하고 간단한 사실이라면, 요구사항 자체만을 다뤄서는 교섭 결과에 만족하기 어려우며 가치를 창출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섭에서 중점이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째서 원하는가‘입니다. 전자가 요구라면 후자는 그 요구의 이유가 되는 관심사이지요. 이 차이를 이해하면 바로 그 요구 말고도 같은 관심사를 충족할 수단을 모색할 수 있고, 그런 수단 중에는 양자 모두의 관심사를 충족할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관적으로 훨씬 만족스러운 합의사항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죠.

위의 외교 캠페인의 예로 돌아가보면, 사실 참가자 P가 진행자 G의 공지에도 불구하고 전투 중심 인물을 만든 것은 전에 어려운 전투 때문에 인물이 죽은 일이 있어서 어떤 전투에도 대응하려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예를 든 P나 G의 의견 완전 관철은 물론이고 타협책 역시 어느 쪽의 관심사에도 충분히 부응하지 못합니다. 전투능력이 반으로 줄면 P의 위기감은 늘어나기만 할 테고, G도 외교 능력이 부족한 P의 인물 때문에 캠페인에 이런저런 조정을 가해야 할 테니까요. 요구사항의 배후에 있는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의견 차이가 있을 때면 상대의 관심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위의 P는 전투를 잘하는 인물을 만들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굳이 외교 캠페인에 전투에만 치중한 인물을 만들어온 동기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G도 외교 중심 캠페인이니까 주인공 일행은 외교관이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그게 정말로 외교 캠페인을 재미있게 돌리는 방법인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교섭은 자신과 상대의 관심사를 이해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어떤 관심사가 있는지 알아야 그 관심사에 만족스럽게 부응하는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놀이에 임하는 자신과 상대의 관심사를 알아내고, 맞수가 아닌 협력자 입장에서 해결책을 함께 찾아나갈 수 있다는 면에서 의견 차이는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심사를 알아내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입니다. 그 요구의 이유를 물어보고 귀기울이면서 정리해가는 것이지요. 단순히 자기가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경청이 아니라, 정말로 상대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합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실생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경청을 침묵으로 끝내지 않고 상대의 관심사를 추출하는 한 가지 중요한 기법으로는 능동적 경청이 있습니다. 먼저 상대가 말을 하면 듣고 인정합니다. (“그렇구나.”) 그 말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말의 배후에 있는 관심사를 정리해서 자기 말로 다시 표현합니다. (“즉, 전처럼 전투가 위험해지면 왠만한 실력으로는 견디기 어려우니까 자기 방어 차원이라는 거?”) 그리고 자신이 정리한 관심사가 옳은지 확인합니다. (“맞나?”) 이들 단계는 함께 하거나 짧게 지나갈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다시 표현 단계를 질문형으로 하면 확인의 역할도 하죠), 각자 효용이 다르므로 개념적으로는 따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경청은 이익을 파악하는 중요한 수단인 한편 감정적으로도 서로 가까워지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죠. 누군가 자기에게 귀기울여주고 정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은 그만큼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하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놀이에 임하는 교섭의 특수성이라면 요구의 배후에 있는 관심사는 무의식적이거나 내밀한 것도 많다는 점이기에. 그래서 나오는 것이 관찰의 중요성입니다.

요구의 배후에 있는 상대의 관심사를 파악하는 두 번째 주요한 수단인 관찰은 좀 덜 점잖게 말하면 ‘알아서 눈치깔기’라고도 할 수 있고, 결국 사람에 대한 감인 만큼 설명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대화를 나눌 때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제나 태도, 잘 만드는 인물 유형, 놀이 중에 열성적으로 반응하는 요소 등을 관심있게 보다 보면 이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할 것 같은지 느낌이 오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G가 평소 보기에 P는 능력이 튀는 편을 선호하는 것 같다면, 그것 역시 P의 관심사라고 추정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관심사를 파악하면 다양한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볼 기반이 생깁니다. P가 원하는 것이 꼭 전투귀신이라기보다는 플레이 중 허무하게 죽지 않는 것이라면 그 욕구를 충족하면서 G의 관심사 역시 충족하는 방법은 많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경호원 조연을 둔다든지, 전투는 어느 정도 난이도가 적합할지 함께 생각해 본다든지, 전투 중 너무 쉽게 죽지 않게 규칙을 고친다든지.

마찬가지로 G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전원 외교 중심 인물로 구성한 일행이라기보다는 즐거운 외교 캠페인이라면 전투 중심 인물이 있는 것이 꼭 외교 캠페인의 재미를 해칠지 생각해보고, P의 인물은 경호원이라든지, 유명한 군인인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협용으로 데려온 인물이라든지 하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죠. P와 G가 각각 처음 내놓은 요구사항만을 다루었다면 생각하기 좀 더 어려웠을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글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이미 많은 팀에서 하고 있는 새삼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라 해도 정리해 두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 있는 상황에도 적용할 수도 있고 비판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 된다는 점에서 이렇게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더 좋은 놀이와 더 많은 토론의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thoughts on “놀이와 교섭: ‘무엇’보다는 ‘왜?’

  1. Asdee

    “무엇”보다도 “왜”라는 심층을 캐야한다는 점을 정말 잘 짚어주신 것 같아요. 상대방이 왜 이것을 요구하는지 이해하려는게 결국 핵심인 듯. 저도 실수를 많이 해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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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키

    Asdee// 저도 시행착오가 많았고, 앞으로도 많겠죠. 하지만 확실히 말씀대로 심층을 캔다면 창의적이고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낼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 같아요.

    Wishsong// 쫓아가서 때립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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