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투를 RPG로 한다면?

경고: 다음에 나오는 동영상은 리암 니슨이 주연한 1995년 영화 롭 로이 (Rob Roy)의 절정 장면입니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싶지 않은 분은 글을 펼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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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화 롭 로이의 결정적인 결투 장면입니다. 로버트 로이 멕그레거의 친구 알랜 맥도널드를 살해하고 아내 메리 멕그레거를 겁탈한 아치볼드 커닝햄에게 멕그레거가 결투를 신청한 상황이죠. 본격적인 결투는 약 2분 50초 지점부터 볼 수 있고, 마지막 반전은 7분 지점 정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오는 대사 중 중요한 것을 간단하게 번역하면…

2분 10초 지점

심판: 여러분은 명예의 문제로 이 자리에 섰소이다. 명예롭게 해결해야 하오. 등뒤에서 찌르기, 칼 던지기, 지정한 무기 외의 무기 사용은 금지하오. 상대가 항복한다면…
멕그레거: 항복은 없소.
커닝햄: 받지도 않을 것이며.
심판: 이것들이 내 말을 씹어!! …무기를 들고 내 신호에 따라 시작하시오.

7분 지점

커닝햄: (멕그레거의 목에 칼을 대고) 항복은 하지도 받지도 않는댔지.

이런 식으로 한쪽이 일방적으로 깨지다가 회심의 일격으로 상황을 뒤집는 싸움을 의도적이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든 RPG 규칙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식이 될까요? 제가 익숙한 것들로 예를 들어보자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판정에 걸린 것은 ‘커닝햄이 죽느냐, 멕그레거가 죽느냐.’ 참가자가 주인공 죽여먹을 각오 하고 되도록 작은 주사위만 쓰면서 부상이란 부상은 다 받고 엉망으로 깨지다가, 마지막에 남겨둔 큰 주사위로 받아치고 회심의 일격!

다만, 남은 주사위는 다 아니까 진행자랑 어느 정도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어야겠죠. 진행자 역시 큰 주사위를 아낀다면 멕그레거가 나중에 갑자기 큰 주사위가 연이어 터지지 않는 한 연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멕그레거 쪽에서 굴릴 수 있는 능력치에는 ‘커닝햄에 대한 증오 2d10’이라든지 ‘실전에서 단련한 클레이모어 실력 1d8’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인간관계도 굴릴 게 많겠죠. 커닝햄이 적이니까 ‘커닝햄 3d4’라든지, 여기서 죽으면 아내를 못 볼 테니까 ‘사랑하는 아내 3d8’ 같은 것도 굴릴 수 있을 테고요.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이쪽은 포도원의 개들보다 훨씬 우연의 역할이 크니까 주인공의 생명은 아마 걸기 어려울 테고, 그 대신 ‘멕그레거가 몬트로즈에게 검술로 이기느냐’ 같은 것을 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검술로는 진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저렇게 기사회생하는 서술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폴라리스 (Polaris): 롭 로이는 해피엔딩이라 살짝 안 어울리긴 하지만 서술 교섭으로 하기 괜찮은 판정이긴 하죠. 마음이 ‘그리고 멕그레거는 커닝햄을 죽이고야 말았다!’ 하고 서술한다면 후회가 ‘그러나 그러려면 커닝햄에게 일방적으로 져야 한다.’ 하면 마음이 ‘그러나 그러려면 아르가일 공작과 몬트로즈의 내기로 빚을 탕감받아야 한다.’ 그리고 후회는 ‘일은 그리 되었더라.’ 하고 끝내는 식.

또 어떤 규칙상 표현이 될까요? 멕그레거의 진을 완전히 빼놓고도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커닝햄의 절제된 검술이라든지 두 사람의 힘과 체격 차이 등 이것저것 재밌는 요소가 많이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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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이 결투를 RPG로 한다면?

  1. nefos

    전투를 워게임화하는 룰들에서는 열심히 서로 HP가 떨어지도록 싸우다가 한쪽의 펌클과 반대편의 크리티컬로 역전이라는 이미지가 되려나. 아니면 싸웠는데 NPC가 이기자 자동진행(…)을 한다거나 말이죠.
    WWE에서 선수들끼리 서로 열심히 싸우다가 피니셔맞고 쓰러졌는데 로프에서 뛰어내리는거 피한뒤에 쓰러진 상대에게 피니셔 먹이는것과 비슷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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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서로 HP를 깎는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게, 한쪽은 마지막 일격까지는 전혀 상처나 심지어는 피로도 없어 보이니 말이죠. HP가 무엇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처를 입어야 HP가 깎인다면 아마 한쪽은 마지막까지 전혀 HP가 깎이지 않다가, 구석에 몰린 상대가 마지막에 크리티컬이 터졌거나 피해를 많이 올리는 피트를 사용해서 일격에 HP를 마이너스로 깎는 쪽이 될 것 같군요. NPC가 이겨서 자동진행도 괜찮아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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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sdee

    GURPS에서라면… [짐작]으로 계속 보너스를 쌓으며 얻어맞다가, 막판에 방심했을때 기습으로 [전력공격]을 날려서 역습하거나요.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결투가 길긴 하지만… 그 자체도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었을 수도.(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일방적으로 깨집니다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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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근본적으로 ‘밥먹고 칼질만 한 인간’과 ‘밥먹고 칼질도 하고 정치도 하고 사업도 하고 소몰이도 하고 소도 훔쳐보고 약탈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집도 짓고 산 인간’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실력 차이는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게다가 맥그레거는 강경한 명예원칙이나 피보호자 정도 말고는 특별한 단점도 없어보이고 장점은 많은 인물인 반면, 커닝햄은 소비벽이나 집착증, 아버지도 연줄도 없는 낮은 신분 등 단점이 넘쳐나는 인물이니 기능에 쏟을 CP 자체도 더 많을 테고요. (어떻게 보면 오히려 PC에 어울리는 반사회적 전투귀신? (..))

      결과적으로 저 엉망으로 깨지는 모습이 기만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어느 시점에서는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을 노려보자고 생각한 것 같기는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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