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 없는 RPG를 위하여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6:28~9

이전에 우리의 미래에 RPG는 있는지 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이후 취직이나 진학 등의 이유로 RPG를 중지하거나 줄이는 분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봤습니다. 업무와 가족에 대한 책임 등이 무거워지면서 앞으로 그런 시간적 부담은 심해지기만 하겠죠. 그래서 RPG를 부담 없이, 그러면서도 알차게 즐기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1. 진행자의 부담을 줄인다

RPG에서 가장 부담이 되는 부분은 아마도 진행일 것입니다. 특히 진행자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진행자 중심성이 클수록 말이죠. 이러한 부담은 진행자 수와 플레이 기회가 적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난 진행할 실력이 안 돼’라는 생각으로 진행을 시작하지 않는 RPG인이 많고, 또 진행을 해봤더라도 충분히 준비하고 신경쓸 여유가 없을 때는 기피하게 됩니다.

1.1. 준비 작업

진행자의 부담을 더는 첫 번째 방법은 세계 설정, 시나리오와 인물 제작 등 준비의 부담을 줄이는 것입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작업을 참가자들이 분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준비량을 축소하는 것이겠죠. 전자는 설정이나 시나리오 작업을 공동으로 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세션에 필요한 준비량 자체를 줄이는 것입니다.

참가자들이 준비 작업을 분담하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고 방법론을 일반화하기 어려우므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것이 시간적 부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인지는 의문입니다. 진행자의 부담이 줄기는 하지만 참가자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늘고, 또 방법에 따라서는 의논과 조율에 많은 노력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두 번째 방법, 즉 준비량 자체를 줄이는 방향이 근원적으로 준비의 부담을 줄이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별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나리오 부분에서는 시나리오가 필요없는 진행을 지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규칙에서 진행자는 첫 장면의 시작 부분만 준비하면 되고 그다음부터는 참가자의 장면 신청을 통해 서로 의논하고 발상을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 장면을 구성합니다. 이건 규칙이라기보다는 어느 규칙에든 사용할 수 있는 기법에 가깝긴 하지만요.

역시 시나리오가 필요없는 진행을 지원하는 규칙으로는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죄의 진행’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만, 불의, 죄 하는 식으로 한 마을이 잘못된 경위와 정도를 정한 후, 각 주요 조연이 주인공인 신의 파수견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파수견이 마을에 오지 않는다면 벌어질 귀결 등을 정해놓고 주인공을 그 마을에 진입시키는 것입니다.

이 죄의 진행은 극적 긴장이 팽팽한 상황에 주인공을 떨구어서 온갖 사건을 유도하면서도 사건의 경과를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적은 준비로 극적 재미와 시나리오 중심 진행보다 높은 자유도 등 고효율을 내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역시 규칙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기법이어서, 승한님의 M&M 캠페인에서도 이 방법을 이용하는 걸로 압니다.[footnote]로키는 지금 포도원의 개들 캠페인 돌리긴 하지만 게을러서 죄의 진행표마저 안 하고 있긴 합니..(자랑이다)[/footnote]

기법보다는 규칙으로 시나리오 없는 진행을 지원하는 예로는 폴라리스 (Polaris)가 있습니다. 폴라리스는 진행자 없이 주인공을 조종하고 편드는 ‘마음’과 주인공의 시련과 적수를 맡은 ‘후회’의 대립과 교섭을 통해 극을 끌어나갑니다. 따라서 시나리오가 필요없을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폴라리스는 좀 있다 얘기할 진행자 없는 RPG의 예이기도 합니다.

인물 제작 부분에서도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조연은 주인공처럼 완전히 만들지 않고 필요한 기능이나 눈에 띄는 부분만 대충 넣는 방법을 많은 진행자가 사용하지요. 포도원의 개들은 시트를 미리 무작위로 만들어 두었다가 조연이 판정에 참여하면 시트를 배정하는 방식으로 조연을 제작하는 수고를 덜고 있습니다.[footnote]이 방법은 조연이 주연에 비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도 방지하지요. 그래도 부상을 입힐 만한 수치는 또 나온다는 게 묘미. (흐흐)[/footnote]

또 떼로 덤비는 건달이라든지 하는 덜 중요한 조연은 간단한 제작 규칙을 사용하는 7번째 바다 (7th Sea) 같은 예도 있습니다. 아예 조연은 규칙상 수치 자체가 없어서 이름과 설정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규칙도 있지요. 안방극장 대모험, 폴라리스, 트롤베이브 (Trollbabe) 등이 그 예이지요. 이렇게 하면 준비 시간을 덜 뿐만 아니라 규칙 처리도 간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설정 부담을 더는 방법으로는 역시 대강의 설정만 만들어 놓거나 차용하고, 플레이해가면서 채워가는 것이 가장 좋지 않나 합니다. 저는 대강의 분위기만 있는 상태에서 세부적인 것은 그때그때 채워가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그 외에 화륜전설 (The Burning Wheel)의 인맥 규칙 하는 식으로 규칙을 통해 참가자가 직접 배경에 영향을 주는 것도 참가자에게 주도권을 주는 동시에 진행자의 설정 부담을 덜어주겠죠.

1.2. 세션 진행

준비 다음으로 진행자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라면 세션 진행 그 자체겠죠. 세션 진행 부담을 더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는 크게 준비 작업과 진행 권한 분담이 있습니다. 준비에 대한 것은 위에서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권한 분담 쪽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권한 분담을 정형화하지 않아도 참가자의 제안과 의견을 활발하게 받는 의사소통을 통해 진행 권한을 분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진행과 플레이 전반에 언제나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잘 활용하면 권한 분담에도 도움이 됩니다. 진행자 혼자 진행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도 진행에 대한 권리와 부담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다만, 의사소통만으로는 진행에 대한 부담을 완전히 덜기는 부족합니다. 무엇이든 의사소통으로 조정할
수는 있지만, 진행 중 의사소통의 필요성이란 해당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일차적인 문제 이후의 얘기니까요. 어떤 극적 요소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있는 한 그 요소에 대한 부담 내지는 책임 역시 진행자의 몫입니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으로 권한을 분담하는 방법은 권한을 규칙으로써 나누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안방극장 대모험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장면 신청 규칙 때문에 진행자가 다음 장면에 무엇을 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제안을 던지거나 발상을 교환하는 의사소통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규칙에서도 권장합니다만, 다음에 어떤 장면을 할까 생각해내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참가자의 권한이며 따라서 부담입니다.

진행 권한 분담의 다른 예로 폴라리스는 주인공, 주인공의 시련과 적, 정서적 관계에 있는 인물, 권위적 관계가 있는 인물 등으로 서술 권한을 분배하므로 진행자 없는 규칙으로 구분합니다. 진행자란 결국 특정 요소 (배경, 조연 등)에 대한 서술권을 분배받은 역할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진행 권한을 분배하기에 따라서는 진행자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없는 RPG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약간 더 다루겠습니다.

1.3. 팀 조직

진행자의 기본적 역할은 팀의 리더 역할까지 포함하지는 않습니다만, 진행자가 캠페인 기획자이자 리더가 되는 현상은 흔합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겠죠. 진행자가 보통 플레이에 가장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이니까 결정권도 크다든가, 일반적으로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유형이 진행자를 많이 하므로 자연스럽게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든가.

이런 부분에서 진행자가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팀원들이 서로 의논해서 팀의 행정적 역할을 분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주에 모두 모일 수 있나 전화로 확인하는 연락책이라든가, 캠페인 사이트 유지 담당이라든가, 각종 공고 담당이라든가. 어쨌든 진행자가 플레이 외에서까지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흔하긴 하되 필연은 아니고, 다같이 하는 놀이니까요.

1.4. 진행자 없는 RPG

지금까지 길게 다루었듯 전통적 진행자 역할에는 준비, 진행, 팀 관리 등 플레이 내외적으로 따라붙는 부담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RPG에 필연적으로 진행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 폴라리스,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 등 진행자 없는 RPG도 꽤 있지요. 이러한 놀이에서는 플레이 내적으로는 권한과 부담이 비등비등하며, 플레이 외적으로도 ‘진행자니까’ 어느 한 사람에게 책임이 몰리는 대신 좀 더 다양한 주변 상황을 고려해서 책임을 분담할 수 있습니다.

2. 규칙에 대한 부담 줄이기

RPG에서 또 부담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규칙에 대한 부분입니다. 규칙을 배우고, 적용하고, 해석하는 작업 역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 수 있으니까요. 이는 위에서 얘기한 준비나 진행의 어려움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규칙에 대한 특유한 내용도 있으므로 따로 떼어서 얘기하겠습니다.

2.1. 규칙 학습

규칙을 읽고 익히는 수고를 줄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단순한 경량 규칙을 익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적은 수의 규칙을 익혀 폭넓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두 접근은 다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경량 규칙은 일단 단일 규칙을 익히는 데 노력이 덜 든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 규칙이 없다면 일단 효율이 떨어집니다. 이건 다른 것보다 규칙 선택의 문제이긴 하지만요. 예를 들어 고도의 전술적 전투나 낙상을 다루는 규칙이 필요한데 폴라리스나 안방극장 대모험을 선택하는 건 아무리 배울 때는 쉽다 해도 결국 비효율적이겠죠.

또한, 경량 규칙에 따라서는 다루는 극적 상황이 아주 좁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폴라리스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나 파멸로 끝나는 비극을 다루며,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허영과 권력의 부조리, 포도원의 개들은 심판과 그 심판에 대한 대가를 다룹니다. 따라서 다양한 플레이를 하고 싶으면 더 많은 수의 규칙을 익혀야 할 수도 있으므로 복잡한 규칙책 하나를 익히는 것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들 수도 있습니다.

적은 수의, 예를 들어 하나의 규칙을 익혀 폭넓게 사용하는 것은 겁스 (GURPS)와 같은 범용 규칙이나 d20 혹은 유니시스템 (Unisystem)처럼 다양한 장르 규칙의 기틀이 되는 규칙을 익히는 것을 가리킵니다.(주:반대로는 플레이하는 장르와 배경을 제약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건 RPG에 질리는 지름길이라는 전제 하에 일단 배제합니다. 물론 반론은 환영입니다.) 이러한 범용 혹은 준범용 규칙은 하나를 익혀서 그대로, 혹은 약간씩 변형을 가해서 다양한 장르와 배경에 적용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입니다.

반면 범용성이란 종종 불완전한 약속이라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는 있습니다. 비록 모든 장르와 배경에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의 범용성을 갖추었다 해도 플레이 스타일까지 범용적이기는 어렵습니다. 겁스와 새비지 월드 (Savage Worlds), 트라이스탯 (Tri-Stat)이 모두 범용성을 표방하지만 기본 플레이 스타일은 사뭇 다르듯이요. 플레이 분위기는 규칙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결국 규칙을 취사선택하거나 고치게 되고, 그렇게 걸러내고 고치는 부분이 많을 수록 시간과 노력도 더 들겠지요.

2.2. 규칙 적용과 해석

규칙의 적용과 해석에 대한 부담은 크게 주인공 제작과 플레이중 규칙 해석과 판정 문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크게 단순한 규칙 사용, 예시와 템플릿 제공, 그리고 낮은 파워 레벨 제작 등이 부담을 더는 방법이 되리라고 봅니다.(주:낮은 파워 레벨에 대한 것은 아사히라군에게 힌트를 얻었습니다.) 해석과 판정 부담을 더는 방법으로는 단순한 규칙 사용, 규칙의 선택적 사용, 규칙 적용상 역할 분배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할 분배의 예라면 우선권을 한 사람이 맡아서 관리한다든지, 계산을 보조한다든지 하는 예가 있겠죠. 이것은 진행자의 진행상 부담을 덜어주는 것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3. 단편과 단기 플레이

마지막으로, 장기 캠페인의 기본 가정을 (내지는 신화를) 버리고 단편과 단기 플레이 중심적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도 바쁘고 변화가 잦은 생활에 적응하고 플레이 부담을 더는 한 방법입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자꾸 끊어지는 장기 캠페인보다는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단편이나 단기 플레이가 더 만족도가 높다고 생각하고, 또 캠페인을 계속할 사정은 돼도 캠페인이 길어질 수록 특히 진행자의 부담은 무거워지게 마련이니까요.

이상과 같이 부담을 덜면서 재미있게 RPG를 할 수 있는 방법과 고려사항을 적어보았습니다. 어쩌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중점을 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당장 이 모든 방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당신은 더 이상 RPG를 계속할 수 없다!!!’ 같은 얼빠진 소리는 아니고, 자신에게 효용이 있어 보이는 방법을 골라서 실천해보면 한결 편한 플레이가 되지 않을까, 혹은 생활과 RPG를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생각의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해서 써본 글입니다. 폭넓게 도움이 되는 글이자 논의의 시작이 되었으면 더 바랄 바가 없겠지요.

4 thoughts on “부담 없는 RPG를 위하여

  1. 魔界範君

    확실히 RPG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슬슬 신경 쓰이는 문제이지요… 저희 팀 쪽도 예전에 비해서 플레이어 상황이 계속 변하고 있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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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dowan

    시크릿 렐름의 DnD의 몬스터 디자인 쪽의 번역을 보니
    예전DnD의 몬스터의 스탯이 3판의 스탯보다 단순한 것을 느꼈답니다. 그래서 4판에서는 몬스터 제작도 역할에 따라 간단하게 할 수 있도록 바꾼다고 하더군요.
    3판에서 몬스터의 스탯이 복잡해 진 것은 진행자가 균형에 맞는 적을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였을 거 같습니다. 뭐 균형면에서는 잘 안들어맞았다지만 말입니다.

    누군가가 제작해 놓은 테이블이나, 요약 표, 마인드 맵 등도 부담없는 RPG에 도움이 될까요? 정작 플레이 중에는 요약표등은 잘 보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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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균형을 맞추면서도 스탯을 간단하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뭐, 이미 준비된 스탯이 있다면 준비 부담은 한결 덜하겠지만요.

      요약표나 테이블 등은 플레이 중 책을 찾아보는 시간은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미 규칙을 익힌 후의 문제기는 하니까 RPG 규칙을 읽고 소화하는 부담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죠. (적절한 정리는 모든 종류의 학습 효율을 높인다는 면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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