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인스케이프 길잡이 3-3. 블리크 카발

레이디의 그늘 주인공 중에 게이트하우스 고아원 출신이 있어서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어본 블리크 카발입니다. 입당과정이라든지 당파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건 뺐고요. 역시 ‘참가자를 위한 플레인 길잡이’의 기본 골자에 ‘당주선언문’을 합친 것입니다.

해답 같은 것은 없소. 생에는, 세계에는, 멀티버스에는 아무 의미도 없소. 그렇다면 내적 의미를 찾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며 유일한 희망인가? 희망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혹은 고통과 절망만이 남는가, 끝없는 우울의 심연만이? 세상은 무자비하지만 그래서 자비가 필요한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굶주리고 집없는 사람들, 고아와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것이오.

근거도 해답도 없는 수수께끼. 유일한 의미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 나의 구원이며 나의 희망, 나를 생에 붙드는 한가지. 내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깊은 우울은 광기가 아닌 안도감인 것이오. 이마저 없이 어떻게 이 허무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까.

광인(블리커)의 비밀이란 바로 이것이오. 사물의 의미를 찾아헤매지 말 것.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면을 살필 것. 나는 내 안에서 세상을, 나의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했으며 그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광기인 것을.

– 블리커 당주 라르

철학

블리크 카발은 멀티버스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는 허무주의자들입니다. 때문에 멀티버스의 의미를 찾는 다른 당파들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요. 멀티버스의 모든 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이상의 해답이나 의미, 목표는 없다는 것입니다.

블리크 카발에 들어가려면 우선 의미를 찾는 노력을 포기해야 하며, 둘째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세번째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야 합니다. 어차피 의미없는 멀티버스의 의미를 찾아헤매는 헛수고를 하는 대신 개개인의 내부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블리크 카발은 역설적이게도 시길에서 가장 자선을 많이 행하는 당파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원

블리크 카발은 모든 종족과 직업에 열려있지만, 질서 성향인 사람은 블리커가 될 수 없습니다. 의미 없이는 질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900년에 걸친 역사 동안 블리크 카발에서는 단 한번도 적극적으로 당원을 모집하거나 선전활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만, 주기적으로 당원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당원이 갑자기 늘어나는 시기는 동시에 카발의 위기이기도 한데, 새로운 당원이 갑자기 많이 유입되면 허무주의와 절망을 기반으로 한 이 당파에 원래 높은 정신질환 발생률 또한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블리커들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정신질환을 블리커들은 ‘검은 사색’이라고 부릅니다. 검은 사색은 보통 고위 당원부터 먼저 희생당하기 때문에 블리크 카발은 모든 당파 중 당주의  평균 재임 기간이 가장 짧습니다. 현 당주 라르는 당주 자리에 오른지 겨우 3년째이지만 그것도 블리커 기준으로는 매우 긴 기간입니다. 아직도 게이트하우스 어딘가에 갖혀있는 전 당주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블리커들은 검은 사색에 걸리곤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정신질환과 정신치료 경험을 쌓은 블리크 카발은 이제 꽤 높은 치료율 또한 자랑합니다. 또한 당원의 수는 시길 내에 1만명 내외로 안정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판데모니움에 거주하고 있긴 합니다.) 검은 사색이 대거 발생한지는 이제 30년이 넘어가며, 게이트하우스의 블리커 동에 입원하는 블리커의 수도 비약적으로 줄었습니다.

이런 행운은 블리크 카발이 시길 내에서의 자선활동을 늘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블리크 카발은 전통적으로 시길에서 가장 자선을 많이 행하는 당파입니다. 선행을 하면서 당파의 목적인 내적 평온에 보다 가까워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구세주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블리커도 있습니다만.) 또한 자선은 당파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요.

블리크 카발은 게이트하우스에 구빈원을 두고 있으며, 시길 여기저기에 무료 급식소를 운영합니다. 카발 당원이라면 급식소 뒷방의 간이침대에 하룻밤 정도는 신세져도 됩니다. 현 당주 라르는 빈민가인 하이브 뿐만 아니라 시길의 다른 구역에도 무료 급식소를 세웠습니다. 하모니움, 머시킬러와 거브너들은 블리크 카발의 이러한 자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차원

무의미한 광기로 울부짖는 판데모니움의 동굴은 블리커의 허무주의적 철학에 잘 맞습니다.

시길에서의 본부

시길에서 블리크 카발은 정신병원, 극빈자 구호소, 고아원을 겸하고 있는 게이트하우스에 근거지를 두고 있습니다. 거대한 게이트하우스 건물은 하이브 외곽에 있는 구릉에 자리잡고 있으며, 베들램 런이라고 부르는 굽어지는 비탈길 끝에 있습니다. 전염병 환자 격리소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500년 전에 카발에서 인수해 게이트하우스라고 이름붙였지요. (그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레이디의 미로에 통해있기 때문이라는 구설수가 끊이지 않습니다.)

Gatehouse

게이트하우스의 모습


게이트하우스의 중심은 지붕 없는 반원형의 큰 탑이며, 이 탑을 중심으로 큰 동이 여럿 붙어 있습니다. 탑의 바닥에는 타일로 거대한 상징이 새겨 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 무슨 의미인지도 오래전에 잊혀진 이 문양을 카발에서는 당파 상징으로 차용했습니다. (어울리죠?) 탑의 입구는 창살 지름이 1.5m에 달하는 거대한 창살문으로 막혀 있지만 창살간 간격이 4.5m에 달하기 때문에 드나드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게이트하우스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무엇을 막으려고 이렇게 큰 창살문을 만들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게이트하우스 앞에는 스스로 찾아왔거나 보호자가 데려온 정신질환자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맡기려고 데려온 부모, 노망이 든 부모를 맡기려고 모셔온 자녀 등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하루에 50명밖에는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나긴 줄은 베들램 런을 따라 하이브에까지 뻗칩니다. 단지 질문을 하고 싶을 뿐이라도 대부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따라서 돈을 주고 앞사람과 자리를 바꾸는 일도 꽤 있지요. 블리커 당원은 줄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고, 친교가 있는 당파의 고위당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절박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은 범죄의 온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게이트하우스 앞에는 사기꾼과 소매치기가 들끓으며, 굶주리고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을 고용해 떳떳치 못한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찾아옵니다. 이들은 대부분 게이트하우스 밤시장에서 나온 사람들로, 밤시장은 장물과 비밀, 심지어는 노예까지 돈만 있다면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범죄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블리크 카발의 허무주의적 예술가들 역시 이곳에서 재능을 펼칩니다. 이들의 절망에 찬 시, 고상한 만가, 음울한 곡예는 흡사 장례식 서커스 분위기를 냅니다.  이들 ‘블리크닉'(…)은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근처 술집이나 카페로 데려가 후원을 청하거나 예술론을 논하곤 합니다. 실제로 ‘지친 머리’라는 근처 주점은 블리크닉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Gatehouse

게이트하우스 평면도

당원들의 거처가 있는 5층짜리 중앙 탑(1) 1층에서는 들어온 사람들을 분류해서 각 동으로 안내하며, 구빈원(2) 동에서는 극빈자에게 단 며칠만이라도 식사와 잘 곳을 제공합니다. 회생불능 범죄적 정신병동(3)에서는 가장 위험하고 회복 가능성이 없는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며 (게이트하우스를 지나다 보면 들리는 절규는 대부분 이곳에서 들려오는 것이지요), 고아원과 일반 정신병동(4)은 1, 2층은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 일반 정신질환자를 위한 병동, 3층은 열네살 이하의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아원 및 정신병동은 크게 트여있는 공간이라 청소와 감시가 쉬우며, 네개의 동 중에서 가장 일손도 많은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블리커 정신병동(5)은 검은 사색에 시달리는 당원들이 스스로, 혹은 친구들에게 끌려서 수용되는 곳입니다. 회복해서 퇴원하는 비율은 매우 높지만, 이곳에서의 치료과정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비밀입니다. 이곳의 창문은 창살로 막혀 있으며, 창살 안쪽은 검은 덧문이 굳게 닫혀 있지요. 이곳 1층 창문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은 하이브의 아이들에게 용기를 과시하는 모험입니다.

그 외에 게이트하우스에는 빈자와 고아들을 위한 정원 (6), 블리커들 전용 정원 (7), 정신병동 환자들이 운동하고 산책할 수 있는 정원(8)이 있습니다. 가장 탈출의 위험성이 높은 회생불능 범죄적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철저하게 감시받으면서 정신병동 환자들을 위한 정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적과 아군

블리크 카발의 허무주의적 철학은 중립적으로 보기가 힘듭니다. 둠가드, 더스트맨, 혁명 연맹, 그리고 카오시텍트는 모두 블리커 철학에 심정적으로 동조합니다. 반면 질서의 형제단, 하모니움과 머시킬러는 블리커의 사상에 반대합니다.

혜택

이미 반쯤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블리크 카발 당원들은 광기를 유발하는 모든 마법주문에 면역이 있습니다. 마음을 읽는 주문에 저항도 가능합니다. 또한 2 레벨마다 매력이 추가로 1점씩 올라 종족 한도와 상관없이 최대 25점까지 매력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모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자비로운 분위기 때문입니다. 시길의 진정한 영웅, 광기어린 성자로서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매력 25점의 블리커는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자동으로 최선의 결과가 나와서, 심지어는 하모니움 정찰 코앞에서 무단횡단을 해도 싫은 소리 하나 안 듣는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블리커가 발휘할 수 있는 또다른 능력은 인공적으로 유발된 타인의 광기를 흡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법 같은 수단으로 일부러 유발된 정신병에만 가능하며, 자연적으로 생긴 정신병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법사는 ‘절망’과 ‘판데모니움의 절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한

블리커들은 삶의 무의미함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깊은 우울에 빠지는 일이 있습니다. 게임속의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1d20를 굴려 20이 나오면 극단적인 허무감에 빠져서, 왜 행동을 해야 하는지 철학적으로 설득당하지 않으면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괴물이 동료를 잡아먹는 것은 행동할만한 이유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 불쌍한 녀석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 반면 1이 나오면 극도의 조증 상태에 빠져 의욕은 넘치지만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한 상태가 됩니다.

블리커들은 또한 평생동안 광기와 우울에 저항해야 하기 때문에 수명이 줄어듭니다. 인간과 티플링은 10년, 하플링은 20년, 노움과 하프엘프는 50년, 엘프는 200년, 그레이 엘프는 400년의 수명을 잃지요. 드워프와 바리오르는 수명이 줄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블리커는 이 수명 단축을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여깁니다. 아무 의미없는 인생을 뭐하러 오래 살고 싶을까요.

2 thoughts on “플레인스케이프 길잡이 3-3. 블리크 카발

  1. 김캐리버

    뭔가 쇼펜하우어 비스무리한거 같기도 하고…그냥 조울증 환자 모임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저런 사람들이 왜 매력이 올라가는 걸까요? 자기성찰을 열심히 해서?

    Reply
    1. 로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철학입니다. 제 개인적인 철학과 차이가 있면 저는 무의미한 우주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입장이지만, 세계에 대한 기본 인식은 비슷해요.

      매력이 올라가는 건 역시 뭔가 깨달은 자의 스멜 아닐까요? 아니면 열심히 자선을 해서?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